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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반 칼럼 소개하기 (안소현) by 안소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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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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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혼외자(婚外子)를 혼내자</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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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p><p>수십 년간 따로 살아온 사람과 하루 만에 가족이 된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박수를 보내고 당연하다는 듯 돈 봉투마저 쥐여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눈치채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당연했던 축복을 빼앗는다. 단지 내 곁에 '남편'이라는 이름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p><p> </p><p>비혼은 혼자 산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일생을 누군가와 함께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친구를 어떤 사람은 동물을 가족으로 선택한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상투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가정은 때론 멸시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는 사이에 이 나라 출산율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까지 추락해 버렸다.</p><p> </p><p>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손가락질당하며 살 거란 생각은 안 드니? 어떤 사람들은 누구보다 뾰족한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키면서 아빠 없이 자랄 아이의 아픔에 대해 토로한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은 정상 가족을 뜻했다. 친엄마, 친아빠. 이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만이 행복해질 자격이 있었다. 참으로 모순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비상이 걸린 이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아이만을 장려해야 하는가. 가족이 반드시 혈연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결혼이 대표적인 비혈연 가족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정상이라는 기준을 모르는 아이들의 불행은 어른들이 그 기준으로 아이를 재단하는 순간 시작된다. 편견 없는 어른 곁에서 자란 아이는 차별 없는 시선을 배우고 다음 세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 결국,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길이란 우리 어른의 시선부터 바꾸는 것이다.</p><p> </p><p>영혼의 단짝을 만나 결혼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단짝인 줄 알았다가 인생의 한 길목에서 잠시 스쳐 간 길동무였음을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 그리고 이혼을 고민해보는 부부들의 비중까지 고려하면 대략 결혼의 절반은 실패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함을 인생 덕목으로 배워온 우리 세대에게, 절반의 성공률은 반드시 인생을 걸만한 높은 확률은 아니다. 가족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꼭 이성과 결혼해야 한다면, 우린 평생 자녀 양육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느껴선 안 되는 걸까.</p><p> </p><p>평생을 따로 살아온 남과 하루 만에 가족이 되는 일에 박수를 보내 주는 사회라면, 평생을 함께할 아이를 품겠다는 마음에 축복이 따라붙는 건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모든 꽃이 정원에서만 피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담장 밖 어디에서 피든, 그저 누군가의 햇살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햇살이, 더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으면 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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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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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금붕어가 인간을 이겼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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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요즘 사람들의 집중력은 금붕어보다 짧다.” 한때 인터넷 밈처럼 떠돌던 이 말이 실제 연구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Microsoft가 2015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평균 집중 시간은 2000년 12초에서 2013년 8초로 줄어들었다. 이것이 2015년에 발표된 수치이고 현재 그로부터 12년이나 더 지났기에 집중 시간이 더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붕어의 평균 집중 시간이 9초라고 하니, 우리는 이제 금붕어보다도 덜 집중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셈이다.</p><p> </p><p> 나는 요즘 예전만큼 드라마나 영화를 집중해서 보지 못한다. 1시간 분량의 에피소드도 길게 느껴지고, 유튜브 영상을 2배속으로 재생하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됐다. 친구들에게 “요즘 드라마 뭐 봐?”라고 물으면, 대부분 “길어서 잘 안 봐” 또는 “요약본이나 쇼츠로 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우리가 모두 자각하지 못했지만, 짧은 영상(숏폼) 중독자인 것이다.</p><p> </p><p> 릴스, 쇼츠, 틱톡 같은 짧은 영상은 뇌에 강한 자극을 주며 즉각적인 보상을 안긴다. 한 편의 영상이 끝나기 전에 다음 영상이 자동 재생되면서 우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자극으로 끌려간다. 이 반복은 뇌를 점점 더 자극에 민감하게 만들고, 그에 비례해 긴 호흡의 콘텐츠에는 쉽게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p><p> </p><p>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현상이 단순히 ‘집중력 저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짧고 빠른 정보에만 익숙해진 두뇌는 복잡한 문장을 해석하거나 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논란이 되었다. 또한 ‘중식’을 중국 음식으로 ‘금일’을 ‘금요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처럼 기본적인 문해력 수준을 갖추진 못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해력의 저하는 단순한 오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력 저하로 이어진다.</p><p> </p><p> 물론 긴 글을 읽고 생각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 우리의 뇌는 이미 빠른 보상 체계에 길들어 있다. 나 또한 짧은 글을 읽는 것조차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흘러가게 놔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p><p><br></p><p> 잠시라도 스크롤을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숏폼을 보며 느끼는 강한 자극의 영향력을. 우리가 누르고 있는 릴스의 ‘좋아요’가 진짜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금붕어보다도 짧은 집중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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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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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리함 속 피로, 우리는 정말 쉬고 있는 걸까?</title>
         <author>minseo90</author>
         <link>https://padlet.com/2022110156_1/zd4ghduz2cjfvabl/wish/3426504494</link>
         <description><![CDATA[<p>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 전 SNS에서 80~90년대 사진을 보았다. 어린 시절 잊고 있었던 행복한 추억들이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들,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사람들,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며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 마당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다. 전자기기 사용으로 우리가 잊어버린 모습들이다.</p><p><br></p><p>현대인들은 스마트폰과 하루를 함께 보내며, 손에 없으면 불안해할 정도가 되었다. 디지털 기기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주변 환경이나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작은 화면 속에 갇혀 정보를 얻고 사람들과 글자로만 소통한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SNS를 보며 비교하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을 보며 쉬고 있다고 착각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피로가 밀려온다. 하지만 뇌는 도파민 중독으로 인해 그것이 휴식이라 믿고 있다.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삶은 편리해졌지만 정작 우리는 쉬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p><p> </p><p>최근 한국갤럽과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국내 스마트폰 사용률은 98%에 달하며 청소년의 하루 평균 인터넷 사용 시간은 무려 8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평균 수면 시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놀라움을 넘어 걱정스러운 수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을지 모른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밤에 잠에 드는 순간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돌아보자.</p><p> </p><p>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내며 화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제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디지털 디톡스라는 말처럼 하루에 한 시간 혹은 주말 하루만이라도 전자기기 없이 지내보자. 카메라 대신 눈으로 풍경을 담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책을 읽고, 손 글씨로 일기를 쓰고, 종이에 메모하며, 가족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 아주 작지만, 소중한 이런 행동들이 진짜 휴식을 선물할 수 있다.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쉴 수 있는 방법을 찾길 바란다.</p><p> </p><p>예전에는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친구를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 참 평화로웠다. 진정한 쉼은 화면 속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다. 전자기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진짜 휴식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편리함 속에 가려진 피로를 마주하고 진짜 쉼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잠시 멈춰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삶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어린 시절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각자에게 맞는 쉼의 방식을 다시 찾아보자.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진짜 나를 위한 쉼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p><p>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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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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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줄어든 아이스크림은 누가 먹었는가?</title>
         <author>rzjmc998xv</author>
         <link>https://padlet.com/2022110156_1/zd4ghduz2cjfvabl/wish/3426504495</link>
         <description><![CDATA[<p>  어느 날 냉동실 문을 열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꺼내 포장을 뜯곤 한입 베어 물려는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 이상하다. 이거 원래 이렇게 작았나?” 아이스크림 어디에도 누군가가 몰래 먹은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번 베어 물었을 뿐인데 벌써 바닥이 보인다. 혹시 내 아이스크림을 슬쩍한 범인이 있는 걸까? 사실 범인은 바로 제품을 만든 기업이다. 이름은 같고, 가격도 그대로인데, 어느샌가 아이스크림이 조금 작아졌던 것이다. 아이스크림뿐만이 아니었다. 과자, 빵, 심지어 삼각김밥까지, 우리는 눈치채지 못한 채 ‘작아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p><p><br></p><p> 이런 현상을 ‘슈링크플레이션’이라 부른다. 겉으로는 가격을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용량을 줄이는 ‘조용한 가격 인상 방법’이다. 원자재 가격이 오른다고 소비자 가격을 무작정 올려 버린다면, 소비자들의 구매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고객을 유지하고 싶은 기업 입장에서 ‘슈링크플레이션’은 원가 부담을 은밀하게 덜 수 있는 똑똑한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속은 기분이 들게 된다. 말도 없이 줄어든 양, 티도 안 나게 작아진 크기, 이건 마치 ‘몰래 가져간 한 입’과 도 같다.</p><p><br></p><p>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이 변화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에서 익숙한 과자를 집어 들며 “요즘 과자는 왜 이렇게 작아졌지?” 하고 말하면서도, 우린 또다시 그 과자를 사 들고 나온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소비자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지출은 늘고 만족도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기업의 이런 ‘은밀한 변화’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다. 단순히 용량을 줄이는 수준을 넘어, 소비자가 눈치채기 힘든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용량 제품의 등장이다. 기업은 기존 제품의 용량을 슬쩍 줄인 뒤, 그보다 약간 큰 ‘점보 팩’을 더 높은 가격에 별도로 출시한다. 소비자들은 제품이‘작아졌다’는 느낌이 들 즈음, 더 커진 제품을 마주하게 되고, 결국 무엇이 원래 크기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이처럼 소비자는 갈수록 정교해지는 눈속임 속에서, 더 많이 내고도 더 적게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p><p><br></p><p> 첫 번째는, 작아진 세상을 감지하는 힘. 바로 ‘눈치’를 발휘해라. 누가(기업이) 내 아이스크림을 먹었는지, 이제는 마트의 냉동고 문을 열 때마다 의심해야 한다. 단순히 제품을 저렴하게 사는 데 그치면 안 된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소중한 음식을 뺏기기 싫다면, 지금부턴 용량, 단위 가격표를 꼼꼼히 살피도록 해라. 당신은 아마 ‘이전과 비슷해 보이던 제품’들이 사실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p><p><br></p><p>두 번째는, 은밀한 변화에 보내는 저항. 바로 ‘투정’을 부려라. 매일 당신 밥상에 올라오는 고기의 양이 줄었을 때, 당신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기업이 우리가 눈치채기 힘들게 양을 줄여버린다면, 우리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항의해야 한다. 신문이나 뉴스에 제보하는 방법이나 기업에 직접 건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p><p><br></p><p>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애당초 기업이 슈링크플레이션을 택한 이유는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슈링크플레이션 때문에 수요가 감소하고, 구매력이 떨어진다면, 기업은 기존처럼 ‘몰래 줄이기’를 시도하기 힘들 것이다.</p><p><br></p><p>‘슈링크플레이션’은 우리 삶에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다. 가만히 있을수록 결국 우리의 지갑만 조용히 비워진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 소비자들도 예민하게 기업의 계략을 눈치채고, 순응하기보단 항의해야 할 때이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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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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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웡카 초콜릿즈: 골든 티켓이 된 야구 티켓</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2022110156_1/zd4ghduz2cjfvabl/wish/3426504496</link>
         <description><![CDATA[<p>바야흐로 KBO 천만 관중 시대가 도래했다. 2024 시즌 야구 관중은 10,887,705명으로, 2020 시즌328,000명 이후 4년 만에 3219.42%나 증가하였다. 관중 수가 급증하면서 야구장 티켓을 둘러싼 경쟁도치열해졌고, 그에 따라 티켓 가격 역시 상승했다. 실제로 KT 위즈의 시즌권 가격은 포수 뒤 테이블석 기준으로 2023시즌 2,840,000원에서 2024시즌 3,504,000원으로 23.38% 인상되었다. 이는 전년도11.15% 인상률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다.</p><p>시즌권의 성격과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시즌권은 한 시즌 동안 특정 구단의 홈경기 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보통 특정 좌석에 대해 구매하는 시즌권과 일반 회원보다 티켓을 먼저 구매할수 있도록 하는 선예매권이 있다. 시즌권은 2010년대부터 프로야구와 함께했고, 팬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스템이다.</p><p>문제가 되는 것은 올해부터 일부 구단에서 도입하는 선선예매권이다. 선선예매권은 선예매권보다 먼저 예매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kt 위즈 등 일부 구단에서 올해부터 시즌권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선선예매권을 판매하기 시작했다.</p><p>선선예매권은 형평성 문제를 일으킨다. 대부분 구단들은 선예매권과 선선예매권으로 구할 수 있는 좌석 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일반 팬은 응원석 등 좋은 좌석들을 예매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떤때에는 아예 좌석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대중 스포츠로 불리우는 야구지만, 선선예매권의 가격을 부담할 만한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지 않은 팬들을 점점 더 야구장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p><p>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디지털 접근성에서도 소외되는 팬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처음 들어선 것은 1982년, 올해로 43년째이다. 부모님 손을 잡고 OB 베어스의 우승을 본아이는 이제 50대이고 친구들과 야구장을 다니던 대학생들은 이제 60대가 되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 야구를 지켜온 ‘골수팬’들에게 온라인 예매는 야구장으로 향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p><p>이러한 소외는 결국 ‘골수팬’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관중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야구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지역 사회에서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응원이 계승되는 문화에 기반하여 성장해왔다. 디지털 장벽으로 인해 가족 단위 관람이 줄어들고, 전통적인 팬층이 흔들리게 된다면, 그만큼 미래의 잠재적 팬을 유치할 기회도 사라지는 것이다.</p><p>하지만 이를 인지하고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구단은 극히 드물다. 현재까지이들을 위한 별도 좌석을 마련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구단은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기아는올해부터 일정 수량의 좌석을 현장 예매 전용으로 확보하겠다고 밝혔고, 롯데 역시 작년 0.3%에 불과했던현장 판매 비율을 올해 1%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처럼 제한적인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나머지 구단들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p><p>이렇게 좌석 접근성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서 암표 거래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기 좌석은 정식 판매가시작되기도 전에 사실상 매진되며, 일반 팬은 웃돈을 얹은 암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선선예매권을 이용해 확보한 좌석이 몇 배 가격에 되팔리는 구조 속에서, 야구는 점점 더 '특권층의 스포츠'가 되어가는 듯하다. KBO는 암표 문제에 대한 대응 의지를 밝혔지만, 실질적인 개선은 아직 갈 길이 멀다.</p><p>지금의 선선예매권은 단순한 티켓 선점권이 아니라, 마치 소수만 가질 수 있는 ‘골든 티켓’처럼 변모했다. 인기 구단의 주요 좌석은 일반 판매 전에 대부분 동나고, 그 자리는 정보력과 자본력을 갖춘 이들에게 돌아간다. 누군가는 손쉽게 예매하고, 누군가는 클릭조차 해보지 못한 채 돌아선다. 그렇게 야구장은 점점 더‘들어가기 어려운 공간’이 되어간다.</p><p>「찰리와 초콜릿 공장」 속 웡카는 최소한 모든 아이들에게 골든 티켓을 얻을 ‘기회’라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KBO와 구단들은 그 기회마저 특정 계층에만 허락하고 있다. 마치 초콜릿을 살 수 있는 사람만 공장에입장할 수 있다는 듯, 선선예매권으로 구장을 잠가버린다. 열정과 애정은 있어도 정보력이나 경제력이 부족한 팬들은 야구장 문턱조차 밟기 어렵다. 이들이 나누는 건 초콜릿이 아니라 특권이고, 필요한 건 골든 티켓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한 입장권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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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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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람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바로 무한이다.                                                            </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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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로맨스 영화, 드라마와 웹툰… 일상생활 속에 있는 여러 매체에서 가슴 떨리는 사랑의 경험을 하고 대리만족하는 많은 나날. 등장인물들이 실연을 당할 때 같이 슬퍼하고, 질투할 때 따라 질투하며, 기어이 사랑이 이루어질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설레어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는 게 주된 일이요, 이러한 매체들을 접하는 목적이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p><p>그러나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이라는 일종의 ‘이상향’을 내세워 자기만족의 행위를 하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마침내 어느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현실 자각과 함께 허무함과 슬픔, 고독, 분노라는 결과에 연속적으로 다다른다. 순정 웹툰을 보면서 가슴이 콩닥거리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쓸쓸하였던 경험을 했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새에는 이렇게 매체에 자신의 마음을 맡겨놓은 사람이 꽤 많아졌다.</p><p>혹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든지, 또는 백 번 봄이 한 번 함보다 못하다는 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말이 지금부터 생각의 전환과 행동의 변화에 물꼬를 틀 것임을 기대하며, 수 해가 지나도록 혼자인 초보자가, 비록 제 코가 석 자여도,</p><p>이제는 입을 열어 말해야겠다.</p><p>왜 매체에 매달리는가? 그 이상적인 사랑이 과연 참된 사랑일까? 사실, 이것은 ‘거짓된 사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승전결이 완벽한데 무슨 소리인가? 오히려 기승전결이 완벽하기에 거짓된 것이다. 주인공들, 그러니까 ‘이상향’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내려놓음이란 찾아볼 수 없고, 때로 엇갈림과 흠집도 이겨내며, 그들의 하이라이트만을 비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위하여 짜인 극본이기에, 실제가 아니란 점에서 우리에게 단순하고 일시적인 행복감과 설렘을 줄 뿐, 얼마 가지 않아 현실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끼기 마련이다.</p><p>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모든 것이 부딪힘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참되고, 완벽하지 않기에 끝없다. 설렘과 기쁨, 고양감과 환희, 허무함과 슬픔, 분노와 외로움까지, 그러나 그런데도 이어지는 부딪힘과 마침내 이루는 쟁취. 스스로가 부딪히고 깨져가며 만들어내는 맑은 마음, 생생히 느껴지는 따스함과 숨결, 그리고 결과, 이 모든 것은 끝없는 변수와, 되풀이되는 도전과, ‘무한한 가능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사랑이다. 깨어짐에 무너지고 차가운 눈빛에 마음을 접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그래서 참된 것이고, 그래서 이상향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다. 굴하지 말고, 일어서서 꿈꾼다, ‘무한한 가능성’을. 그러면 언젠가는 두려움의 벽을 깨고 무수한 변수로 나아가기 전, 이러했던 나날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읊조릴 것이다.</p><p>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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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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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언젠가 사라질 모든 것들에게 </title>
         <author>n598r6rcbk</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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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2025년에 막 들어선 3월, 따뜻한 햇볕이 들어 땅이 녹기 시작하여 꽃봉오리가 터지기 직전, 죽음과 관련한 무거운 사건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나라 전체가 깊은 탄식에 잠겨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참사’였다. 어느 날 일어난 사고로 인해, 가까운 일상 속의 사람들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일들 곁에는 항상 죽음이 함께였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죽음’을 나와 당신은 어떻게 대해야할까.</p><p><br></p><p> </p><p>  나는 어렸을때 유난히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침대 위에 누워 잠에 들기 전에는 혹시나 천장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워하며 잠이 들었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차문이 뜯어져 나갈까봐 죄 없는 차 시트를 잡아 뜯곤 했다. 그렇게 근거 없는 악몽들은 항상 주변을 따라다녔다. 그 중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은 언젠가 엄마아빠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이였다.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건 유치원생 때 쯤 이였다. 한창 사고가 자라나고 자아가 형성될 때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혹은 병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항상 든든하던 아버지 언제나 옆에서 함께 할 것이라 생각하던 어머니가 사라진다니, 흔적도 없이, 새하얀 재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 세상에서 다신 볼 수 없게 된다니. 부모가 인생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에겐 아마 부모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최고의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p><p><br></p><p><br></p><p>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7살, 키우던 햄스터가 세상을 떠났다. 처음 경험한 죽음 이였다. 너무 오래전일이라 햄스터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지만, 따뜻하고 말랑했던 녀석이 차갑고 딱딱해져 움직이지 않던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느낀 죽음의 첫 인상은 차갑고 정적인 것 이였다. 첫 죽음을 겪은 후 속으로 소망했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이별 없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도 조금씩 성장하면서 알게 되었다. 헤어짐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 그에 비해 우리의 삶은 한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나누는 일은 어쩌면 우주의 어떤 역사보다도 뜨겁고 찬란할지 모른다.</p><p> </p><p>  나는 오늘도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밥은 드셨어요?” “요즘 날씨가 추워요,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그 안에 “사랑해요”라는 말을 슬쩍 숨겨 전한다. 언젠가, 너무 늦기 전에, 꼭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p><p><br></p><p>그러나 문득, 생각한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야 서로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왜 ‘연결’과 ‘공감’은 언제나 잃은 뒤에야 찾아오는가. 어떤 죽음은 뉴스 속 ‘단신’으로 처리되고, 어떤 이의 사라짐은 세 줄의 기사로 소비된다. 장례식장엔 울음이 흐르지만, 거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온다. 죽음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p><p>  죽음을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곧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사적인 영역에만 가두고, 사회는 그에 대한 애도와 감각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참사 앞에서도, 이별 앞에서도, 더 이상 함께 울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고립되어 있으며, 너무나 무감각하다.</p><p> </p><p>  조동범 시인은 말했다. “진열된 죽음 앞에 무감각한 모든 일상이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 말은 2025년의 오늘에도 유효하다. 빛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사라져가는 존재들인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죽음은 언젠가 반드시 오지만, 그 죽음을 통해 사랑을 기억하고, 함께였던 감정을 다시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공동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어야 하니까. </p><p><br></p><p>그렇기에 이 글을, 언젠가 사라질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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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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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림은 따듯한데, 마음은 불편하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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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지브리 주인공이 됐어요.”</p><p><br></p><p>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간 듯한 AI 그림이 유행하고 있다. 마치 『이웃집 토토로』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세계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따뜻하고 몽환적인 그림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브리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대중들은 향수에 젖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그림들을 보며 신기한 듯 감탄한다.</p><p><br></p><p>하지만 놀라움과 즐거움의 뒤편에는 불편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좋아하는 캐릭터와 익숙한 풍경이 AI에 의해 쉽게 재창조될 때, 창작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AI가 손쉽게 만들어낸 이미지에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브리 특유의 예술성을 '모방'이라는 한 단어로 축소시키는 씁쓸함이 있다.</p><p><br></p><p>사실 AI가 만드는 그림의 매력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지브리 작품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빨리 분석해내고, 어떤 사람이라도 단 몇 분 만에 지브리 스타일의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모습조차도 지브리 스타일로 바꿀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원작자의 허락도, 원작에 대한 존중도 생략된다는 점이다.</p><p><br></p><p>원작자에게 이 문제는 단지 기분 나쁜 일로 그치지 않는다. AI 그림이 늘어날수록 원작의 고유성은 점점 흐릿해지고, 작가의 창의적 노력 역시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AI가 그린 그림은 팬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예술과 창작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p><p><br></p><p>흥미와 윤리 사이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누구나 쉽게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세상, 분명 매력적인 아이디어다. 하지만 기술 발전을 이유로 예술의 본질과 창작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p><p><br></p><p>국내 최초 AI 화가 '이메진AI'와 인간 화가 '두민'이 함께한 『Commune with…』 프로젝트에서는 “AI는 인간의 창작을 돕는 도구로 존재해야지, 결코 예술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p><p><br></p><p>AI가 그린 지브리 그림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오래 지속되려면, 이제는 그림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우리 모두가 원작과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윤리를 지켜나갈 때, AI 그림도 진정한 예술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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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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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녀는 잠을 자지 않는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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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유정아 일어나야지! 왜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해? 너 어제도 늦게 잤지? 일찍 자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하니!” 어릴 때부터 아침잠이 많은 유정이가 요즘 따라 부쩍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된 후로 그 전 학기보다 등교 시간도 빨라졌고, 수능 공부에 집중하게 되면서 학교에서 추가 자습을 하는 탓에 하교 시간도 오후 10시로 늦춰졌다. 집에 늦게 오게 된 만큼 침대에 눕기 위해 준비를 하는 시간도 늦춰졌는데, 그래도 11시~12시 사이에는 얼추 준비를 끝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정이는 바로 잠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밤에 무엇을 하길래 늦게 자는 거야?” 유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과제가 있는 날에는 과제를 하다가 잠에 들어요. 또 과제가 없는 날에는 취미생활을 해요.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저녁까지 공부하고 집에 오면 10시가 넘는데, 바로 자면 아쉽잖아요! 게임도 하고 싶고 유튜브도 보고 싶은데 볼 수 있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는걸요?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자기 전에 갖는 개인 시간을 통해서 해소하는 거예요. 친구들도 1~2시쯤 자는 것 같던데요?” 그녀와 대화하니 잠을 자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수면 습관이 걱정되었다.</p><p>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평균 수면시간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다. 2019년 초(4~6)·중·고등학생의 평일 평균 수면시간은 7.3시간으로, 고등학생은 평균적으로 6시간 잠을 잔다고 한다. 수면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청소년기 적정 수면시간은 8~10시간으로, 적어도 8시간은 자야 적당한 것이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된 청소년 건강행태 데이터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중학생의 52%, 고등학생의 90% 정도가 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 미만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35%의 학생들만이 잠이 부족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11%에서는 잠이 부족하다고 응답한 학생들과 수면시간 자체는 비슷한데도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잔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즉 적게 자는데도 수면시간을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p><p> 이처럼 많은 청소년들이 수면 부족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 잠이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수면시간을 더 줄여야 한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수면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찍 자라'는 잔소리가 아니다. 왜 충분한 수면이 필요한지 교육하고, 그리고 그 시간을 지켜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청소년기는 생체 리듬상 자연스럽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시기이다. 그런데도 이른 등교를 강요받는 현실은 아이들의 수면 부족을 악화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의 생체 리듬에 맞춘 교육 환경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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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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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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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Love is sharing a password.”</p><p>   대한민국 1위, 넷플릭스의 초기 홍보문구이다. 동일한 IP에 접속한 이력이 확인되는 기기에 대해서만 계정 공유를 허용한다는 정책을 내건 지금의 모습과는 퍽 다른 모습이다. 2023년 11월 2일, 넷플릭스는 계정 공유 대상을 가족으로 제한하겠다고 선포했다. 사실상 ‘지금까지 만연하게 행해진 계정 공유는 불법’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넷플릭스는 국내 OTT 1위 기업으로, 2위인 쿠팡플레이와 비교했을 때 2배 이상의 이용자 수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업계 1위의 뒤를 이어, 디즈니플러스와 티빙 역시 시류를 따라 계정 공유 단속을 시작했다. 기업 입장에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겠지만, 기존 소비자 입장에서는 익숙하고 편리했던 사용 방식을 빼앗긴 꼴이 되었다.</p><p>  이것만이 아니다. 2022년을 기점으로 넷플릭스의 요금은 고공행진 중이다. 넷플릭스는 2022년 3월을 기점으로 약 2년간 베이직 요금을 4천 원, 프리미엄 요금을 1만 3천 원을 인상했다. 넷플릭스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이는 서비스 국가의 세금 정책 변경이나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적 문제 때문이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요금 인상과 동시에 독점 콘텐츠 경쟁이 심화되면서, 소비자는 하나의 플랫폼만으로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소비자는 배가 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p><p>  잇따른 호황으로 후끈한 OTT 업계와는 달리 소비자는 싸늘했다. 광고형 요금제에 대해 광고 자체에 대한 거부감과 불만족이 클 뿐만 아니라, 요금 변동과 계정 공유 단속과 같은 정책에 부정적인 반응이 역력하다. 2023년도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61%가 OTT 요금 인상이 ‘지나치다’고 응답했으며, 약 48%는 ‘구독을 중단하거나 줄일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용자들이 계정 정책 변화, 가격 변동에 따라 느끼는 불쾌감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닌, 소비자로서 존중받지 못했다는 실망감에 가깝다.</p><p>  이 시점에서 기업의 입장은 명확하다.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독점경쟁이 치열해진 시장에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업들은 광고 요금제를 도입하면서도 이용 요금을 인상하고, 사용 방식까지 제한하고 있다. 이는 ‘양질의 콘텐츠 제공’이라는 명분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소비자 기만 전략이다. 광고제 요금 도입, 베이직 요금 유입 제한, 광고제 요금 및 프리미엄 요금 인상 등과 같은 동향을 미루어 봤을 때, 사실상 이는 정체된 시장 안에서 기존 사용자에게 최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p><p>  2024년 11월, 스팸메일을 정리하던 와중 넷플릭스에서 온 한 통의 메일을 발견했다. 바로 기존의 요금제 가격을 인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범람하는 콘텐츠 속에서, 개인에게 그만큼의 돈을 매달 더 요구한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릴레이 게임처럼 이어지는 타사의 요금 인상 행렬까지.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미디어 산업이 발달하여 소비자의 선택 폭이 넓어지면 좋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래 목적인 이윤추구에만 충실한 기업들의 행태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용자의 불만이 거세지는 가운데, 이들을 눈가림하는 기업의 행보가 앞으로의 이용을 보장할지는 미지수이다. 미디어 기업 전반이 콘텐츠의 질보다 수익의 질에 집착하게 될 때, 진짜 위기는 시작될 것이다. 소비자가 없는 산업은 존재할 수 없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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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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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KTX 운임 인상, 단순한 가격 상승이 아닌 구조적 변화의 시작</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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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와 또 올랐다카네. 기차가 뭐 황금 발로 달리나, 예?”</p><p>서울역 대합실, 저녁 기차를 기다리며 눈을 붙이던 중, 옆자리 중년 아저씨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잠이 깼다. 말투를 보니 나랑 같은 경상도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고개를 들고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가자, TV 뉴스 화면에 KTX 운임 17% 인상… 서울 부산 7만 원 시대"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p><p>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영덕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상경한 지 1년하고도 2개월째,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집에 갈 때마다, 특히 방학이나 명절 때 가족을 만나러 내려갈 때마다 꼭 필요한 연결선이니까. 그런데 서울 부산 요금이 5만 9,800원에서 7만 원이라니.</p><p>하지만 짜증만 낼 수는 없었다. 뉴스 자막만 보고는 처음 보는 높은 요금에 깜짝 놀랐지만, 보도 내용을 확인하고 나니 이건 단순한 요금 인상이 아니었다. KTX를 운영하는 한국철도공사는 14년 동안 요금을 동결해 왔다. 그 사이 물가는 오르고 차량 유지비, 선로 관리비도 늘었지만, 공사는 정부 보조 없이 적자 노선까지 책임지며 운영을 이어왔다. 문제는 SRT다. 고속철도에 경쟁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설립된 주식회사 SR이 2016년부터 SRT를 운행하며 KTX와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운행 초기에는 수서에서 부산, 목포까지만 다니던 SRT가 이제는 전라선처럼 KTX의 주요 흑자 노선까지 들어왔다. 그 와중에 SRT는 KTX보다 5~10% 저렴한 운임으로 승객을 끌어모았다.</p><p>결과는 뻔하다. KTX의 수익 구조가 흔들리면, 적자 노선을 감당할 어력도 줄어든다. 흑자 노선을 SRT가 가져가면 공사는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고, 결국 유지하기 힘든 노선부터 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파장은 지방에 가장 먼저 닿는다. 지방 노선은 수익성이 낮음에도 공공성의 원칙에 따라 간신히 유지되었지만, 수익이 더 줄어들면 그 공공성조차 지키기 어려워지기 때 문이다.</p><p>SR은 공사와 다르게 미간 투자 유치가 가능한 주식회사로, 민간 자분이 철도에 개입하게 되면 철도의 민영화로 이어질 수 있다. 민간 기업은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기 때문에 결국 보이지 않는 곳의 지출부터 줄일 것이고, 이는 인력 감축, 안전 투자 축소, 서비스 질 저하를 초래한다.</p><p>공공성보다 수익성이 앞서는 구조에서 요금은 자연히 오르며 수익이 안 나는 노선은 줄어든다.</p><p>실제로 철도가 민영화된 일본과 영국에선 수익이 나지 않는 노선이 사라졌고, 남은 노선의 요금 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이렇게 기차는 점점 돈 있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되어간다.</p><p>물론 불만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용자 입장에선 더 많은 돈이 나가니까. 나도 그렇다. 한 장의 승차권에 한 끼 식사비가 추가로 들어간다는 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원래 7만 원이 면 오늘처럼 기차를 기다리기 전에 제육볶음 정식을 먹을 수 입었는데. 이제 그 도을 오전히 기 차에만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짜증 뒤에 어떤 구조가 있는지 들여다본다면 요금 인상이 무조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p><p>괜히 옆자리 아저씨에게 한마디 툭 던지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p><p>‘진짜 황금으로 달리진 않지만요... 이렇게 요금이라도 올리지 않으면 저희 동네엔 기차가 아예 안 설지도 몰라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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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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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뮤지컬은 더 이상 대중예술이 아니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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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뮤지컬은 본래 대중을 위한 예술이었다. 클래식한 오페라와 전통적인 연극의 중간 지점에서 보다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간 형식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뮤지컬이다. 그러나 지금의 뮤지컬 시장을 보면, 과연 여전히 '대중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뮤지컬은 점차 높은 가격의 벽과 낯익은 얼굴들만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그 본질적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p><p>언제부턴가 뮤지컬계에서는 같은 배우가 같은 작품을 반복하여 출연하는 광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대극장 뮤지컬을 중심으로 제작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미 유명한 배우, 혹은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을 중심으로 캐스팅이 이루어진다. 물론 제작사 입장에서는 모험을 감수하기보다 관객 동원이 보장된 스타 배우를 반복적으로 캐스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결과, 신인 배우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점점 줄어들고, 새로운 스타가 등장할 기회는 철저히 차단된다. 또한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관객의 부담으로 이어지며, 티켓 가격은 점점 더 오르게 된다.</p><p>가장 큰 문제는 이 같은 경향이 뮤지컬 산업 전반에 걸쳐 악순환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높은 티켓 가격은 새로운 관객의 유입을 막는다. 한 번도 뮤지컬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15만 원이 넘는 티켓 가격을 보고 쉽게 도전할 수 있을까? 그 진입장벽은 결코 낮지 않다. 동시에 기존의 뮤지컬 팬들도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낯선 배우의 무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제작사는 또다시 스타 배우를 기용할 수밖에 없고, 관객층은 점점 고정되어 다양성을 잃는다. 이처럼 가격 상승과 캐스팅의 고착화는 서로를 강화하여, 점점 뮤지컬을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p><p>게다가 최근에는 일명 '회전문 관객'의 수조차 줄어들고 있다. ‘회전문 관객’이란 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공연의 성장을 함께 이끄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격이 높아질수록 이들조차 반복 관람을 주저하게 된다. 결국 뮤지컬을 꾸준히 지지하던 충성도 높은 관객층마저 이탈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는 단순한 표가 덜 팔리는 문제가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신호다.</p><p>이처럼 점점 좁아지는 뮤지컬 시장 안에서 신인 배우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지고 있다. 무대는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다양한 색깔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수익성과 흥행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산업 구조 속에서,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기회를 박탈당한다. 무대 위는 여전히 찬란하고 화려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많은 젊은 배우들이 가능성만을 품은 채 대기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산업이 경제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뮤지컬이 예술의 이름을 걸고 있는 한, 단기적인 성과에만 목매는 구조는 결국 ‘대중예술’ 이라는 이름을 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p><p>뮤지컬는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스타’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관객과 창작자 모두를 위한 더 건강한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배우에게 기회가 열릴 수 있도록 대학로 창작 뮤지컬과 중소극장 무대의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가격 장벽을 낮추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도 마련되어야 한다. 무대를 보는 관객이 ‘선택받은’ 소수만이 아닌, 더 많은 이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술은 언제나, 관객과 함께 호흡할 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중예술'이라는 이름을 다시 붙이기 위해서는, 제작사와 관객, 배우 모두의 진심을 다한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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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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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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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거리에서 문신이 보이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있다. 짙은 화장을 한 남성, 짧은 머리의 여성, 색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는 일은 흔하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에 따라 판단이 오가고, 겉모습만으로 품격과 품행을 재단한다. 문제는 이러한 반응이 개인의 취향이 아닌 ‘사회적 기준’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타인의 외양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곧 다양성을 위협하는 태도이며,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다.</p><p><br></p><p>타투에 대한 시선은 대표적인 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타투를 범죄, 일탈, 방종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몸에 무언가를 새겼다는 이유로 고용의 문이 닫히고, 공공장소에서 시선을 피해야 하는 현실은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로서, 상실의 기억으로서, 자아 표현의 수단으로서 타투는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지만,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이미 부정적인 낙인이 먼저 작동한다. 이는 외양을 본질보다 우선시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시선이 낳은 결과다.</p><p><br></p><p>편견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은 이해보다는 배제를 선택하게 만든다. 하지만 편견은 그 자체로 타인의 삶을 왜곡하고,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스타일을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경계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이다. 문제는 이런 판단이 단순히 마음속에 그치지 않고, 채용, 교육, 대인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제적인 차별로 이어진다는 점이다.</p><p><br></p><p>자유란 단지 제약 없는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을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누군가의 외모나 표현 방식이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틀렸다고 간주하는 순간, 사회는 획일화된 틀 안에 사람을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이는 개성의 죽음이며, 창의성의 쇠퇴다. 다름을 틀림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결국 모두에게 손해를 안긴다. 판단의 기준은 표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서사여야 한다.</p><p><br></p><p>더 나은 사회는 더 많은 ‘이해의 시선’ 위에 세워진다. 무엇이 정상이냐를 정하는 대신,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겉모습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 전부가 아니다. 한 사람의 배경과 맥락을 외면한 채 짓는 시선은, 결국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시선을 가진 이 자신도 세상의 넓이를 잃게 만든다.</p><p><br></p><p>일상의 판단에는 습관처럼 작동하는 ‘틀’이 있다. 누가 단정해야 하는지, 무엇이 적절한지, 어디까지가 용납 가능한지에 대한 기준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고정된 틀을 유지하는 일은 편하긴 하지만, 성찰을 멈추게 만든다. 수용은 이해를 필요로 하고, 이해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오만이 편견을 키우고, 그 편견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p><p><br></p><p>이제는 묻고 들어야 할 때다. 왜 불편한가, 왜 거슬리는가. 그 감정 뒤에 자리한 오래된 고정관념을 의심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틀에 갇힌 시선을 벗어날 때, 사람은 비로소 온전히 보인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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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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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흘린 말 주워담기</title>
         <author>seob0081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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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옛날부터 우리 동네에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왔다. 그 이야기는 사람이 뱉은 말은 바람과 같아서,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본인에게 돌아온다고 했다. </p><p>그저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뿐인 나에겐 그 전설은 하나의 말일 뿐이었다. 내가 그 사건을 마주하기 전까진 말이다..</p><p><br></p><p>때는 입학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일어난 걸로 기억한다. 한창 꽃이 필 무렵 소풍을 가는 우리 1학년 3반. 곧 점심때가 되어 저마다의 도시락을 들고 온 아이들 틈에 내가 앉았다. 꽤나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나는 내 주변에 앉은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허나 말수가 적을 뿐, 그들과 친해지고 싶던 나는 발만 동동 구르는 병아리가 되었다. 슬슬 서로가 만들어낸 바람이 잠잠해지길래 지금이라면 모두가 나의 말에 집중해줄 것이라고 느꼈고, 결국 오고 가는 말 사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나의 마음이 내 이성을 앞서고 말았다. 나는 내 옆자리의 도시락이 맛없을 것 같다고 비난했고 큰 관심을 받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못된 말에 그 애가 곧 울기 시작하였고, 곧 죄책감이 나에게 도착했다. 수많은 눈동자들의 무게에 나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고, 이 것이 내 초등학생으로서 추억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p><p> </p><p>그 때 그 아이가 커서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이러한 실수를 하고 싶지 않기에 나의 아픈 과거를 복기함으로써 미연에 방지해보려 한다. </p><p>우선 난 내 자신이 그 때 너무 마음만 앞섰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당장 그 자리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은 이후에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p>그러므로 성급하게 말을 꺼낸 것이 나의 말실수를 일으킨 첫번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결국 내가 뱉은 말의 의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친구들과 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도, 이야기의 맥락도 미처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을 휘둘렀다. 이는 첫번째 원인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인들을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을까? </p><p>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처법은 마음을 차분하게 함으로써 내적 여유를 찾는 것이다. 옛 말에 '돈 없이 시장에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오거나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들고 나오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때 돈을 내적 여유, 시장을 인간관계 또는 대화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대화에는 흐름이 존재하며, 이는 곧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기다리면 자신의 차례가 온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더욱이 성급하게 말을 꺼낼 필요 없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과 내가 그 말을 꺼내고자 하는 이유를 점검하며 기다려도 좋다. </p><p>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사람이 꽤 무안해질 수도 있는 순간이 있더라도, 목표가 있다면 그 순간을 거름 삼아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 상황에 대입하여 생각해보자면 대화에 참여할 기회가 또 주어질 때, 다시 용기를 내어 의견을 펼치자는 것이다. 스스로 고심하더라도 결국 말을 전하지 못 한다면 그들에게 내 뜻이 전해질 수 없다. </p><p>분명히 기회는 또 주어진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우린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린 실수를 경험 삼아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못 한다면 그 실수는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거나, 우리에게 어두운 색안경을 씌울지도 모른다. ‘실수해도 괜찮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겠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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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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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약국에선 OK, 다이소에선 왜 NO?”</title>
         <author>rqwc6zsm96</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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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오늘도 건강은 카트에 담겼지만, 권리는 빠졌다.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다이소에서, 물건을 고르지만, 진짜 중요한 선택은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p><p>&nbsp;</p><p>타지에서 혼자 자취하던 시절, 몸이 아플 때의 서러움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몸은 아픈데 나갈 힘조차 없고, 주변엔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겨우겨우 일어나서 병원에 찾아갔더니, 열이 있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다. 이런 경험을 겪고 나니,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생활화하면서 멀티 비타민, 유산균, 오메가3, 밀크씨슬은 어느새 ‘건강 루틴’이 됐다. 하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영양제를 꾸준히 복용하기에는 금전적인 부담이 상당했다. 그러던 중 다이소에서 5,000원 이하의 영양제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격적인 뉴스를 발견했다. “다이소 영양제 판매, 결국 중단되나... 일양약품 돌연 철수”, 이유는 약사 단체의 반발이었다.</p><p>&nbsp;</p><p>처음엔 단순히 저렴한 가격이 문제인가 싶었다. 하지만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약사들의 주장도 구체적이었다. 대한약사회에 따르면, 유명 제약사가 다이소를 통해 자사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며 “약국은 비싸기만 하다.”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심어주고 있고, 약국에서 이뤄지는 전문적인 복약 상담과 건강 상태 고려 같은 요소는 단순한 가격 비교로 환산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는 단순한 유통 가격 문제가 아니라 약사의 전문성과 약국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반발이다.</p><p>&nbsp;</p><p>이쯤 되면 생각하게 된다. 소비자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건강기능식품을 아무렇게나 고르는 시대는 지났다. 성분표 확인은 기본이고, 복용 기간이나 제품의 적합성도 직접 따져 본다. 때로는 전문가 리뷰나 의약 관련 커뮤니티의 의견을 참고하기도 한다. 영양제를 가격만 보고 고르지 않듯, 브랜드 이름만 믿고 고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약사는 “소비자는 잘 모르니까 우리가 판단해 줘야 해”라는 자세를 보인다. 우린 무지해서 고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알아보고 판단하며 고르는 중이다.</p><p>&nbsp;</p><p>결국 약사 단체가 지켜야 할 것은 유통 경로의 독점이 아니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건강’을 둘러싼 ‘시장 전쟁’이다. 기업은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팅을 하고, 약사는 전문성을 지키기 위해 반발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소비자인 우리는 종종 ‘선택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잃는다. 소비자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저렴한 제품이 아니라, 믿고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다. 건강을 위해 고른 영양제가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판매 불가’로 밀려난다면, 결국 밖으로 밀려나는 건 언제나 소비자다. 그러니까, 사는 건 내 맘인데, 파는 건 왜 네 맘이냐고.</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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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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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노동자, 잠들어야 깨어난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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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더울 땐 더 덥게, 추울 땐 더 춥게’</p><p><br></p><p>요즘 사람들의 패션 철학에 관한 유명한 유머 문구다. 더울 땐 덥게 잔뜩 껴입고, 추울 땐 얇고 짧게 입어야 멋쟁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문구,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번 웃고 넘기는 재미있는 유머가 아니라 눈앞의 무서운 현실이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작년 10월까지 승인된 온열 질환 산재 신청 건수는 총 42건으로, 이는 작년 같은 기간의 신청 건수인 25건에 비해 68%가 증가한 수치이다, 지난 10년간 온열 질환 관련 산재 신청이 가장 많이 승인된 해의 승인 건수는 총 35건이었다. 한 해가 모두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기록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p><p><br></p><p>점점 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는 나날이 전 세계의 이상 기후 현상을 부르는 중이고, 이 기후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전례 없는 폭염을 가져오며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작년 여름에는 2018년 이후 최악의 폭염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폭염은 그저‘상당히 더운 날씨’ 수준이 아니다.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주는 명확한 건강 위협 요인이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가 온열 질환을 앓고, 또 죽고 있는데 대책은 여전히 열사병 예방 수칙 배포와 같은 겉치레뿐이다. 현실적인 대책 마련이 가장 시급한 이 상황에,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p><p> </p><p>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열대 지방 국가에는 시에스타(siesta)라는 낮잠 시간 문화가 존재한다. 이 지역에서는 여름이 되면 내리쬐는 살인적인 햇빛과 더위로 인해 야외에서 활동하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이 시간에 더위 속에서 힘들게 일하지 않고 낮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해가 쨍쨍한 낮에 잠을 자는 사람이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게으르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가장 더울 때 일하며 체력을 낭비하느니 그 시간에 체력을 보충하고 저녁에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는 더 좋은 선택이라는 취지이다.</p><p> </p><p>우리나라도 이제는 아열대 기후 국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염이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폭염 속에서 죽음의 위협과 싸우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소외된 채 혼자 남겨져 있다. 한국은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죽어 나가기 전에 스페인과 같은 나라의 상황을 참고하고 반영하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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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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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정함이  지닌 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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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사람들은 흔히 다정함이 나약함과 멍청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물렁물렁한 다정보다는 날카로운 협박이 더 큰 힘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절을 무시하고 권력 앞에서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힘든 현실에 맞서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무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이것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타인에게 모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혐오와 차별의 표현을 남발한다. 그러면서 다정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그러므로 다정하고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로한다.</p><p>과연 다정은 정말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과 다정, 그리고 친절은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을 가진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이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살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역시 공포와 협박이 아닌 다정과 선이다. 선은 어쩌면 익숙하다 못해 뻔한 단어와 개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목적과 이유, 방법까지도 다채롭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롭다. 악을 행하는 목적은 본인만의 이익을 위해서이지만 선은 내가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악은 이기적이기에 연대할 수 없지만 선은 본래 이타적이므로 쉽게 연대한다. 따라서 선과 다정은 모일수록 큰 힘을 낸다.</p><p>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다정함이 가진 힘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는 그들 가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국세청 직원에게 쿠키를 준다. 이 쿠키를 받은 국세청 직원은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제공해 준다. 작은 친절이 위기에서 이 가족을 구한 것이다. 허무주의에 빠진 딸 조이이자 빌런인 조부 투파키에게 에블린은 다정으로 맞선다.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진 조이의 세상에서 다정과 사랑으로 그 의미를 찾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모든 것을 경험한 뒤 없어진 잠재력으로 인한 허무주의를 이기는 것은 대단한 무술 실력도, 무기도 아닌 다정함이었다. 그동안 빌런 조부 투파키와 그의 부하들과 무력으로 맞서다, 남편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보여달라는 말을 듣고선 적과의 싸움에서 그들의 결핍을 해소해 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모든 적을 물리치고는 조부 투파키 역시 돌려세운다. 결국 다정함이 이겼다. 그 모든 기술과 무력을 제치고 그깟 다정함이 승리했다. 이 영화에서 다정함은 결국 우주를 구해낸다. 이를 통해 다정과 사랑이 그만큼의 힘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p><p>비록 일상에서의 작은 다정함이 우주를 구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우주를 지켜줄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이의 우주뿐만 아니라 나의 우주까지도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보자.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어주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혐오와 갈라치기가 지배하려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맞서 싸우자. 차별과 혐오를 멈추며 포용적인 태도를 가져보자. 이것은 단지 누군가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나의 우주를 가꾸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땐, 다정과 사랑으로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자. 우리는 무슨 힘으로 살아갈까? 지친 하루에서 아주 사소한 누군가의 행동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일화를 많이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정은 절망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다시 한번 도전할 결심을 하게 하기도 하며 또 한 번 일어난 용기를 주기도 한다. 다정하자, 사랑하자.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p><p>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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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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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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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별빛이 꺼졌다"</p><p> 밤에 혼자 또는 누군가와 같이 길을 걷다 보면 얼굴을 스치는 시원하고도 상쾌한 공기, 나무들조차 잠에 든 것 같은 조용한 분위기, 은은하게 켜진 가로등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이유는 위와 같다. 산책하며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환한 불빛을 내는 가로등, 그 불빛을 받는 나무, 그 나무의 달린 잎사귀들, 그 나무 아래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들 등과 같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 고개를 위로 올리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검은색으로 가득 채운 도화지에 소심하게 찍혀 있는 점과 같은 별들, 대범하게 찍혀 있는 점과 같은 달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하늘을 볼 때만큼은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새로운 세상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든다.</p><p> 시골에서는 많은 별과 함께하는 산책을 할 수 있다. 깊은 시골에서는 별의 개수에 압도당한다. 아직도 중학교1학년 시절 학급수련회를 간 곳에서 본 밤하늘을 잊지 못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시골과 달리 별빛을 꺼 놓는다. 도시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별빛을 끌 수 있을까? 도시는 밤에도 환한 불빛을 낸다. 도시의 불빛은 별빛을 가리기에 충분하다.</p><p> 전에 읽은 기사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도시에는 한밤중 인적이 드문 때에도 간판조명이 환하다. 영업이 종료된 후에도 불을 켜두는 상점과 빌딩 조명도 많다. 24시간 켜두는 광고판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야간 경관을 위해 과도하게 설치한 가로등도 문제가 된다. 이 기사에서는 실제로 강남대로 일대에서 쓸데없이 켜둔 조명들을 조사한 내용이 있다. 또 우리나라가 인공조명에 의한 오염이 주요 20국 가운데 이탈리아와 함께 최악이라는 연구결과도 보여준다. 이는 각종 네온사인, 상점조명, 디지털 광고판, 가로등 조명이 과도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p><p> 단순히 별을 보고싶다고 징징대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조명으로 인해 에너지 낭비가 크게 발생한다. 상점들이 영업시간 이후 조명들을 끄는 것만으로 에너지 소비를 7.6% 줄일 수 있다는 기사도 있다. 인간에 의해 발생된 필요 이상의 빛에 의한 공해를 빛 공해라고 부른다. 빛공해는 생태계에도 영향을 준다. 빛에 이끌리는 습성을 가진 동물들이 야간에 조명에 이끌려 건물에 충돌하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식물도 합성 주기가 변경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스웨덴 연구팀은 “인위적인 빛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물 종의 생존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도 있다. 폴란드의 한 교수는 “야간조명은 인간의 시각기능을 긴장시키고 다양한 생리현상을 방해하며,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방해하여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라고 말했다.</p><p>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야간 전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는 시계, 달력, 나침반 등이 없었기에 별을 이용하여 밤에 길을 찾았다. 특히 별자리를 이용하여 동서남북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별은 항상 우리에게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다. 과거에는 밝게, 지금은 어둡게.</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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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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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공부를 포기해야 야구를 할 수 있는 나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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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甲子園- 고시엔. 일본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 “일본의 야구 선수들에게 고시엔 우승과 프로 야구단 지명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전부 고시엔 우승을 고를 것 입니다.” </p><p>  2023년 8월, 제 105회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게이오 고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신은 겨우 2주 남짓한 시간 동안 지역예선만 해도 100개 고교 중 단 1개의 학교만이 본선에 진출하고, 14연승을 해야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이 대회에서 우승한 이 학교의 야구부는, 정말 하루 종일 훈련만 하고 야구 특기생으로만 꽉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학교는, 야구 특기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게이오 고교의 입학 기준은 중학교 내신 45점 만점에 38점 이상, 2차 면접과 글쓰기. 한국으로 치면 영재고, 과학고 정도의 수준을 요구한다. 도대체 공부만 할 것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까.</p><p>  한국의 고교 야구 선수들을 흔히 떠올려 본다면, 머리를 빡빡 밀고, 기합을 받고, 학교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하루 종일 운동만 하는 모습이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고교 야구부에 입단하게 되면, 모든 생활이 코치진에 의해 수동적으로 진행되며, 학교 수업과 공부보다 야구부의 엄격한 규율과 훈련이 더욱 우선시 되는,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환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p><p>  한국 고교 야구부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프로에 지명되는 것. 봉황대기, 대통령 배, 주말 리그 등 고교 선수들을 위한 대회들이 있지만, 학생들이 즐겁게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아닌, 선수 개개인의 퍼포먼스를 잘 보여주어 구단에 지명을 얼마나 받느냐가 야구부와 학교의 제 1 목표이다. 학교조차 학생들에게 야구를 즐거운 취미 활동이 아닌 실적을 내기 위한 업무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기조 속에서 소속 선수들은 학창 시절의 유일한 목표가 프로 야구단의 지명이 되고, 지명을 위해 학교 수업보다 야구부 훈련이 우선시되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렸을 적 재밌어서, 하고 싶어서 했던 야구지만 이제는 그 야구가 해야만 하는, 못해서는 안될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로 변해버렸다. </p><p>  게이오 고교가 우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게이오 고교 야구부의 모토,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 대부분 고등학교 야구부의 모토인 [엔조이 베이스볼] 덕분일 것이다. 그들은 야구를 하고 싶어서 하고, 프로 구단의 지명을 중요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즐거움과 팀의 즐거움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야구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 인생이 야구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한다. 플레이 하나에 인생이 걸렸다는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고, 그냥 이 한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하자라는 생각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실적을 내는데 급급한 것이 아닌, 학생이 야구를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다. </p><p>  대표적인 예시로 ‘공부하는 선수’의 육성을 들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공부 시간보다 연습 시간이 주가 되는 반면, 일본에서는 공부시간을 보존하고 남은 여가 시간과 부 활동 시간을 쪼개 연습 시간을 갖게 되며, 많은 학교에서 학과 성적과 수업 성취도가 저조하다면 야구부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등의 제도를 택하고 있다. 이런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학생들의 기량 향상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 다양한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p><p> 한국의 학생들은 과연 이런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가? KBO 신인 드래프트에는 매년 1,100명 이상의 학생이 신청하지만, 실제로 지명받는 인원은 고작 110명, 즉 10% 남짓이다. 그리고 그 10%에 들더라도 수많은 선수들이 1~2년 만에 방출된다. 결국, 대부분의 학생 선수들이 프로 입성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야구 이외의 다른 미래를 준비할 기회를 잃는다.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합숙과 훈련에 매몰되어 낮아진 성적은 그들이 다른 꿈을 꾸는 것을 막아버린다. </p><p>  야구는 원래 즐거웠던 것이어야 했다.우리는 이제, 아이들에게 다시 야구를 [엔조이]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한국의 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엔조이 베이스볼]을 한국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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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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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 집은 괜찮은데 왜 저 집은 별로일까?</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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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p><p>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을 때, ‘이 가게의 아메리카노는 산미가 강해서 내 취향이 아니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교 앞에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을 때는 산미가 거의 없고 원두의 고소한 향이 두드러져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집 근처 말고 학교 앞에서만 이 카페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들 카페가 아니더라도 프랜차이즈를 이용해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 여기서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같은 집의 같은 메뉴를 마셨는데 왜 다른 맛이 날까?</p><p> </p><p>‘점바점’이라는 말을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을 듯하다. 점바점이란 지점 by 지점(점포 by 점포)의 줄임말로, 같은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메뉴나 서비스 등이 점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현상을 말한다. 사실 같은 레시피를 사용하더라도 요리하는 사람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는 진짜 이유는 이런 당연하게 나타나는 차이 때문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문제 삼고 있는 점은 지점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맛과 서비스이다.</p><p> </p><p>소비자들의 점바점에 대한 불만은 여러 기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 기사를 보면 소비자는 타 지점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음식을 제조하거나 부실한 서비스에 중점적으로 불만을 가진다. 타 지점에 비해 양이나 질에서 부족한 재료, 성의 없고 음식을 맛없게 만드는 포장 등이 그 예이다. 이런 문제들은 차곡차곡 쌓이면서 결국 그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이 너무 달라 가까우면서도 가지 않게 되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경우처럼 말이다.</p><p> </p><p>심지어 최근에는 소비자조차도 지점별로 맛과 서비스가 차이 나는 현상에 대해서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만큼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점바점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사회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그저 넘어가서 되는 게 아닌 명확하게 고쳐야 할 문제이다. 점주뿐만 아니라 소비자도 지점별 맛과 서비스의 차이를 가만히 방관해서는 안 된다.</p><p> </p><p>소비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프랜차이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이다. 그런 소비자들에게 심각한 지점별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곧 그 브랜드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소비자를 위해, 브랜드를 위해 프랜차이즈는 지점별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본사는 본사대로 점주는 점주대로 최선을 다해야 그 최선이 소비자에게 닿아 그들의 가치가 높아진다. 또한 소비자도 지점별 차이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 점주들이 문제를 자각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프랜차이즈 지점의 점주와 이를 이용하는 소비자 모두가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기분 좋은 소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p><p>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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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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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란 제복은 없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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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삼십년지기 우정은 별 볼 일이 없어졌다. 내 아버지의 두 친구분은 술자리에서 정치 논쟁을 벌이신 후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셨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선고 전까지 광화문 광장을 이념의 아우성이 메우던 일이 있었다. 역사 교과서 위에 조용한 활자로만 보고 싶었던 일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크게 뒤흔든 사건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일상생활 속에 배어든 정치가 아주 예리한 칼날이 되어 아버지의 친구 두 분의 30년 넘는 우정을 베어냈다. 비단 그 두 분만을 베어 놓았을까, 우리 사회를 이렇게까지 크게 갈라놓은 일은 적어도 내 짧은 생애 동안에는 없었다. 물론 케케묵은 갈등은 항상 있었다. 정치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갈등은 인류 역사의 동반자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애당초 갈등은 진화적 본성이라고 여러 사회학자는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가 돌을 부딪쳐 나무 꼬챙이에 묶던 그 시절부터 자신과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들을 지키기 위해 DNA에 각인된 폐쇄적 본능, 그것이 갈등 본능이 인류의 뇌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이유다. 즉 한정된 자원을 놓고 ‘나’를 비롯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너’를 비롯한 ‘그들’을 배척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말미암은 갈등 자체는 필연적이다.</p><p> </p><p>그러나 정도가 지나쳤다. 뇌에 각인된 본능이기 때문에 갈등이나 혐오를 정당화하기에 우리는 꽤 우아한 시대에 살고 있다. 싸움이 날 것 같을 때, 막대기 두어 개만 조용히 쥐여주면 될 것을 왜 구태여 점잖게 빼입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겠는가. 미상불 현대 사회의 인간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다. 오히려 인간이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개체와 소통할 수 있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종이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기도 하다. 어쩌면 대화와 소통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에 ‘살아남기 위해’ 돌로 돌 깨던 시절부터 키워온 우리의 적응 기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현대 사회는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p><p> </p><p>혼란의 4개월 동안 가급적 정치 뉴스나 정치적인 게시물은 보지 않으려고 했다. 상대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이나 배려의 말미를 주지 않는 것에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태곳적 ‘본능’대로 다 깨부수는 사회가 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사람들은 광화문을 이념의 분투장 삼아 극단의 칼날로 상대를 잔인하게 공격하는데, 글에 차마 적기 힘든 비하성 표현들부터 터무니없는 낭설들까지 폭풍처럼 몰아치던 지난 4개월이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힐난의 폭풍 속으로 휩쓸려가는 한 척의 배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反)국가 세력이라고 호도하면 대관절 ‘국가’는 무엇이려나.</p><p>진정 국가를 위한다면 상대를 무참히 짓밟기 보다는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토론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p><p> </p><p>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이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십 대 소년들이 섬의 자연과 공포로부터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종국에는 소년들이 두 무리로 갈라서서 한 무리가 나머지 하나를 사냥하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그들은 더욱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극단에 치달은 그들에게서 기회는 달아났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 파란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소년들이 있는 섬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조한다. 쫓고 쫓기던 소년들 앞에 선 파란 제복. 그제야 처참했던 살육의 비극은 끝이 나고 초췌한 꼴의 소년들은 ‘파란 제복’에게 구조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쯤에서 우리 사회에는 우리를 구해줄 ‘파란 제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설령 파란 제복이 나타난다고 한들, 그는 서로 물어뜯고 으르렁대는 우리를 점잖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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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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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난로 뒤편의 구직자</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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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무의미하다. 최저임금 인상률 심의에 대한 뉴스를 접한 뒤였다. 오는 4월 22일, 2026년에 적용할 급여에 대한 최저임금 위원회의 1차 전원회의가 개최되며, 추후 생길 수 있는 정부의 변화에 따른 최저임금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근로자에게만 해당한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뉴스를 통해 한 번씩은 들리는 용어이다. 그러나 채용절차법, 들어보았는가? 들어본 사람은 물론, 그 내용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근로자는 위와 같은 제도의 개선을 통해 조명받아 왔으며 권리를 보호받는다. 하지만 알바와 같은 임금 근로 구직자들의 처우에 대한 체계는 찾아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비하다. 채용절차법조차도 30명 이상의 상시 근로자를 뽑는 ‘회사’부터 적용되는 법으로 주로 소규모 단기 업종에 채용되는 임금 근로 구직자들에게 해당하지 않는다.</p><p> </p><p> 이력서가 확인되고 결과가 나와도, 알바는 그로부터 이틀 후에 떨어진다. 일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응답의 불합격 통보를 받게 되고, 실업자가 된 듯한 실망감으로 변한다. 지원한 곳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그 일감에서는 떨어진 것이며 개별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마감되었지만 공고를 내리지 않은 알바에 지원하여 이력서가 읽히지도 않는 일도 알바 시장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지원 자격에 명시되지 않았는데도, 경력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떨어지기도 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 것 가지고 불만이냐.’ 사회는 말한다. 하지만 결과 통보의 부재는 일거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빼앗는다. 그 과정이 임금 근로 구직자들을 힘들게 한다. 한 알바에 지원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겹치는 다른 일감에 지원하기 어렵다. 결과가 합격이 아니면 따로 연락이 오지 않기 때문에, 이력서가 확인되어도 이튿날까지는 하루에도 열댓 번씩 수시로 구직 애플리케이션을 들어가 직접 정황을 살펴야 한다. 같은 사례가 마감된 공고에 지원할 때도 나타난다. 이 경우는 아직 이력서가 읽히지 않았고, 읽힌다면 합격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그러나 하루, 이틀, 더 많은 날이 지나고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알바 구직자의 의지도 휘청이기 마련이다.</p><p> </p><p> 보통 기업, 직장을 구할 때는 합불 여부가 지원자 각자의 연락처로 안내된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구직자들에게도 관련 제도의 강화와 체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일반 회사처럼 불합격 통보 연락을 보내거나, 마감된 공고와 지나치게 오래 구인 공고를 띄워두는 것을 막아서 무응답이 채운 족쇄를 풀 수 있다.</p><p> </p><p> 난로는 사람들의 관심과 법의 구제이다. 난로가 비추는 앞은 따뜻하지만, 그 뒤는 차갑다, 법과 관심으로 보호받는 따뜻한 난로 앞은 근로자의 자리다. 차가운 난로 뒤편에서 임금 근로 구직자는 방치된다. 난로 앞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야속한 난로는 더 뜨겁게 타오른다. 한때의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모두가 난로 앞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냉혹한 현실에서는 한쪽만 비추는 난로보다 함께 둘러앉아 쬘 수 있는 모닥불이 절실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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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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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 방은 있지만 마음 둘 곳은 없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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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대학 입학과 동시에 많은 지방 학생들은 집을 떠나 자취 생활을 시작한다. 나 또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처음 느끼는 자유에 대한 설렘이 컸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려왔다. 나의 원룸 월세는 60만원이고 관리비와 공과금을 더하면 매달 70만 원 이상이 지출된다. 여기에서 식비, 교통비까지 계산해서 합쳐본다면 자취생의 한 달 생활비는 150만원을 가볍게 넘긴다. 한달동안 쓴 가계부를 보면 내가 혼자 부담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라는 현실이 다가온다.</p><p>처음엔 작은 소비 하나도 마음 편히 하지 못했다. 하루에 한 끼정도만 제대로된 끼니를 챙기고 나머지는 라면이나 즉석밥으로 버티며 건강보다는 비용에 신경을 쓰며 살았다. 겨울엔 난방을 최소한으로 틀면서 옷과 이불에 의존하며 전기요금의 눈치를 보았다. 돈을 아끼는 일은 나를 위한 일이기 보단 부모님에 대한 금전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의무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꿈을 향해 노력하기 보다는 당장 내 생활을 위해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을 지 고민하며 절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숫자와 친해졌고 자취는 나에게 경제감각을 가르쳐준 첫 선생님이 되었다.</p><p>여기서 문제는 자취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통학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대학교에 입학한 이상 자취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지만 나와 같은 대학생을 위해 주거를 지원하는 정책은 여전히 부족하다. 기숙사 수용 인원은 한정적이며 입주 조건도 까다롭다. 또한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비 보조 제도 역시 대부분 일정 소득 이하 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받을 수 있다. 결국 많은 학생들은 부족한 지갑형편으로 인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의 지원에 의존해 눈치를 보며 버티고 있다.</p><p>그렇다고 이 상황을 단순히 사회초년생일때는 다 힘든 것이라고 넘기기엔 무책임하다. 경제적 부담은 곧 학업과 삶의 질로 직결된다. 아르바이트는 학업을 방해하고 불안정한 주거 환경은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대학가의 높은 월세, 부족한 정책속에서 자취생들은 오늘도 경제의 무서움을 체험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하곤한다. “왜 대학생의 생활비는 등록금보다 무겁게 느껴지는가?”, “나는 과연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 자립할 수 있을까?” 오늘도 수많은 자취생들은 경제와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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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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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작은 보석으로 세상에 나를 보여주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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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자주 듣는 노래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기도 하고, 기존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도 한다.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와 네일 아트를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과거에는 고등학생의 머리 길이를 강제하고, 젊은이의 짧은 치마를 단속하는 식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청년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대가 있었다면, 요즘은 반대로 개성을 표현하라고 사회는 요구한다. 우리는 그만큼 자아 정체성이 중요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p><p>  중학생 때 나는 귀에 첫 피어싱을 뚫었다. 뚫고 나서 너무 만족하며 집에 돌아갔지만, 아빠는 왜 몸에 구멍을 내느냐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피어싱은 나에게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몇 달에 한 번, 많으면 한 달에 여러 번 꾸준히 개수를 늘려갔다. 엄마는 귀가 망가지겠다면서 싫어했지만, 그 행위는 일탈이라는 이름 아래 해방감을 주었고, 작은 돌멩이가 고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듯 지루한 일상에 자극이 되었다. 갈수록 반짝이는 귀가 마음에 들었고 아무것도 없는 귀가 어색했다. 고작 피어싱 하나로 자유로운 사람이자 용기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p><p>  사회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꾸준히 변화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피어싱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학원 조교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중고등학생들도 피어싱을 뚫은 모습을 네 명, 다섯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길거리에도 피어싱 가게가 많아지면서 접근성도 높아졌다. 내가 사랑하는 문화는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보다 보편적인 문화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사회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여전히 기성세대는 반항의 의미를 지닌 튀는 행동이라고 평가하고, 그에 맞춰 청년들은 좋은 인상으로 남기 위해 면접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피어싱을 포기한다. 나 역시 대학 면접을 준비하면서 “피어싱은 빼고 갈 거지?”라는 이야기를 모의 면접 때마다 들었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외면만으로 내면을 알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편견으로 가득 찬 주관으로 개성을 표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반화하고 규정해 버린다. 이러한 규정 아래에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p><p>  피어싱은 단순히 ‘반항’의 수단이 아니며, ‘꾸밈’의 수단에서 그치지 않는다. 각각의 사람들은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작은 큐빅 하나에 그보다 큰 크기의 의미를 담는다. 강점을 부각하거나, 콤플렉스를 보완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더 이상 단순히 겉보기에 깔끔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되지 않아야 한다. 사회는 더 변화해야 한다. 학교 규정이나 채용 기준에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의 개성을 제한해야 한다면 최소한 합리적인 이유가 명시되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다양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피어싱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가 와야 한다. 작은 액세서리 하나로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당연시되면 안 된다. 사소한 부분 하나</p><p>하나가 존중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그토록 원하던 자아 표현을 더 자유롭게 이룰 수 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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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0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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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텅 빈 지갑, 굶주린 청춘: 대학생 식비 SOS</title>
         <author>2022110156_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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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대학생들은 한 달 생활비로 얼마를 지출할까? 의정부에 거주하며 동국대학교(서울)로 통학하는 나의 경우를 예시로 들자면, 알바 급여 40만 원과 부모님 용돈 25만 원 합쳐 65만 원으로 생활한다. 65만 원의 생활비로 교통비, 식비, 교재비, 여가 및 문화 활동 비용 등을 지출한다. 다양한 지출 유형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식비이다. 집보다는 학교를 포함해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 식사도 자주 밖에서 해결한다.</p><p>&nbsp;</p><p>하지만 점점 이런 지출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담감이 나에게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요즈음 밖에서 밥 한 끼만 사 먹어도 10,000원 이상은 나간다. 많으면 15,000원까지도 나온다. 주 5일 등교, 한 끼에 10,000원 지출하며 두 끼를 밖에서 해결하는 학생을 예로 들면 한 달에는 식비로만 40만 원이다. 위에도 말했듯이 적게 잡아 10,000원이기에 15,000원으로 잡는 경우 60만 원이다. 이러한 금액을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식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 시작은 언제인가? 펜데믹 이후와 우크라이나 전쟁 시기를 기점으로 2021년 말 ~ 2022년 초, 세계적인 공급망 문제와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해 곡물, 육류, 식자재 가격이 급등하며 식당 원가가 상승했고 바로 학생 식비로 전이되었다.</p><p>&nbsp;</p><p>앞서 언급했듯이,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상승한 물가, 특히 식자재 가격의 폭등은 대학생들의 얇은 지갑을 더욱 춥게 만들었다. 하루 두 끼를 외부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학생들에게 식비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만 원짜리 한 끼'가 일상화된 캠퍼스 주변 식당가에서, 학생들은 점심 메뉴를 고르는 순간에도 가격부터 먼저 확인하는 씁쓸한 현실에 직면한다.</p><p>&nbsp;</p><p>이러한 식비 부담은 단순히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압박감은 학생들의 학업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아르바이트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한다. 이는 곧 자기 계발이나 여가 활동의 부족으로 이어져 대학 생활 전반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동시에 마련해야 하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식비 지출은 더욱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p><p>&nbsp;</p><p>우선, 대학생 스스로는 합리적인 소비 습관을 들이고, 불필요한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도시락 지참을 생활화하고, 교내 학생 식당의 효율적인 이용이 기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개인의 소비 패턴을 파악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학교 주변 상권에서 제공하는 학생 할인 혜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 역부족이다. 이에 학교는 학생 식당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합리적인 가격을 통해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나아가, 학생 식당의 메뉴 다양화 및 위생 관리 강화는 물론, 운영 시간의 유연성을 확보하여 더 많은 학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천 원의 아침밥' 사업과 같은 성공적인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전국 대학으로의 확산 및 심층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통학 거리가 먼 학생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시간대 조정, 주말 운영 등 다양한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취약 계층 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식사 지원 프로그램 개발 및 확대를 통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p><p>&nbsp;</p><p>대학생 식비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 세대의 삶의 질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더 이상 개인의 노력에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학교, 정부, 그리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실적인 지원 정책과 사회적 관심만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대학생들이 밥걱정 없이 학업에 전념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대학생들의 합리적인 식탁을 위해,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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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4-27 13:10: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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