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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간송 전형필 (금) by 마중물논술_이진선T</title>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link>
      <description>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1-08-06 05:33: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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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배보다 더 소중한 민족문화 수호의 일념</title>
         <author>book_kebi</author>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wish/1670768656</link>
         <description><![CDATA[<div>무언가를 1만개를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끈기를 요한다. <mark>하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은 본인의 일생과 재산을 바쳐 고서적 1만 여권과 미술품 3000여 점을 수집했다.</mark> 이중에는 <strong><mark>혜원 신윤복의 &lt;단오풍정&gt;, 겸재 정선의 &lt;해악전신첩&gt;, &lt;훈민정음 해례본&gt; 등 가치를 헤아릴수 없는 한국 문화의 근간이 다수 포함돼있다.</mark></strong></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strong>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를 보호해 나라를 지켰다고 평가 받는다.</strong><strong><mark>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문화재를 모으고 해외로 반출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지켜기 때문이다.</mark></strong> 때로는 기와집 400채를 살 거금으로 도자기 20점을 인수하고 당시의 대기업인 일본의 상회와 경매에서 맞붙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mark>그렇게 간송 선생이 하나씩 소장하게된 문화재는 현재까지 한국 미술사학계를 발전시킨 주요 자료가 됐다.</mark><strong><mark> </mark></strong>오세현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몽유도원도처럼 일본에 소장되었다면 미술사 연구에 제약이 많았을 것”이라며 "<strong>간송 선생이 겸재 정선의 주요 작품을 보존했기에 ‘진경산수’라는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다</strong>”며 이라고 말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간송 선생은 1906년 배오개(현재 종로구 인의동)에서 2남 4녀 중 늦둥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각종 벼슬을 지내고 배오개 상권을 장악하면서 <strong>서울 일대와 충정도, 황해도의 대지주로 거듭난 집안에서 태어난 전형필</strong>은 어의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신식교육 받았고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간송 선생이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그는 14살에 막대한 재산을 지닌 집안의 적손이 된다. 전형필 선생은 후사가 없는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작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그의 친형인 전형설이 28살 젊은 나이로 요절해 생가의 재산도 물려받았다. &lt;간송 전형필 선생의 민족 문화주의 철학&gt; 논고를 저술한 장재천(용인대 교육대학원) 교수는<mark>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다면 어려웠을 일이지만 </mark><strong><mark>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간송은 민족문화수호 일념으로 문화재 수집에 할애했다</mark></strong><mark>”</mark>고 평가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strong>간송 선생이 고려·조선 문화재 중에서도 정수만을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인의 도움도 컸다. </strong>휘문고보 시절 미술선생님이자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의 소개로 만난 <strong><mark>오세창은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일종의 ‘멘토’ 역할을 했다.</mark></strong> 추사 김정희의 제사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이자 신라대부터 우리나라의 서화·글씨를 정리한 &lt;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gt;을 저술한 <strong>오세창은 간송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감식안을 키워주는 스승이었다.</strong> 오세현 연구원은 “간송은 29살부터 문화재 구입을 시작했다"며 "할아버지 벌이었던 오세창 선생의 미술작품에 대한 조언과 도움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strong><mark>또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손과 발이 돼 준 거간꾼 덕분에 간송 선생은 다양하고 많은 문화재를 수장할 수 있었다.</mark></strong> 거간꾼이란 간송 선생대신 경매에 나가거나 전국의 유명 문화재를 보유한 사람을 수소문해 문화재를 사들인 중개인을 말한다. <strong>간송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거간꾼은 이순황이다. </strong>간송의 수집활동은 경영위기에 처한 한남서림을 이순황을 대리인으로 삼아 인수하고 더욱 활기를 띤다. 장재천 교수는 <strong>“당시 국내에서 고서적과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곳이 없었다는데 그런 중심거점이 된 곳이 한남서림”</strong>이라고 말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strong>그 예전에도 미술품 수집은 재테크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하지만</strong> <strong><mark>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문화재 보존과 전수’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mark></strong> 오세현 연구원은<strong> “심사정의 ‘촉잔도권'은 간송 선생이 당시 5000원을 주고 구입했지만 6000원을 들여 복원을 했다”</strong>며 “단순히 부를 축적하기 위해 미술품을 사들였다면 보존할 돈으로 다른 미술품을 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병선(인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도 “그 시대에도 이재를 위해 문화재를 수집한 사람이 많았다”며 <mark>“</mark><strong><mark>‘지켜내고자’했던 의지가 간송이 가진 차이</mark></strong><mark>”</mark>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간송은 문화재의 미래 전수를 염두에 두었다. 신간 서적을 구입할 때면 복수로 갖춰 분실과 소실에 대비했다는 일화는 문화재와 보존에 대한 간송의 혜안과 아량을 보여준다.</div><div><br><br>고대신문, 이영현 기자</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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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1-08-06 05:35: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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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악전신첩, 마침내 간송의 품으로 돌아오다_조은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wish/1670953584</link>
         <description><![CDATA[<div>장형수는&nbsp;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일대를 더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친일파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송병준의 집이 있었고, 장형수는 그곳에 있는 값진 문화재들을 사려 했기 때문입니다.<br><br>그곳에 주인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눈에 확 띄는 물건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주인은 그것을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br><br>때마침 해가 저물었고, 장형수는 송병준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장형수는 소피가 마려워 뒷간을 다녀오는 길에 그 집 머슴이 사랑채에 불을 때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무슨 문서 뭉치를 아궁이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장형수는 쪽빛 비단으로 꾸민 책 하나를 보았습니다.<br><br>그는 그 책을 들고 주인에게 보이며 조금 전 일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불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그에게 팔라고 얘기했더니 주인이 20원에 팔겠다고 했습니다.<br><br>사실 그 책은 겸재 정선의 화첩인 "해악전신첩"이었습니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였습니다. 그림은 스물 한 폭이었고, 한가운데는 양면에 걸쳐 금강산 그림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림마다 제목이 붙어 있으니 총 마흔 두 폭인 셈입니다. 비단에다 섬세한 필체로 그린 엄청난 금강 그림은 정선이 직접 금강산에 세 번이나 갔다와서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귀중한 문화재가 불탈 뻔했다니!<br><br>간송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약 1400원 정도의 값을 주고 해악전신첩을 샀습니다. 70배의 값을 주고 사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기와집 한 채를 사고도 남는 양의 돈입니다.<br><br>사실 골동품이란 정해진 값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대단한 물건이 헐값에 거래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송은 가치 있는 고미술품을 살 때 금액을 깎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건 주인이 그 가치를 몰라서 싼 값을 부른 경우에도, 간송은 주인이 원하는 값에 두세 배에 금액을 지불했습니다.<br><br>나는 이 행동이 간송이 그 문화유산을 꼭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간송이 얼마나 간절하면 집 한 채가 넘는 값을 주고 문화유산을 사들이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간송이 참 결단력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더 값을 깎을 수도 있는 값진 문화유산을 정당한 돈을 주고 사들였기 때문입니다.<br><br>그리고 간송이 애국자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문화유산을 모으는 것은 나라가 해야 할 일인데 개인이 나라를 위해 인생을 바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그를 애국자로 만들었습니다.<br><br>나라면 간송의 돈으로 개인 생활을 하며 즐겼을 겁니다. 하지만 간송은 그 돈으로 문화재를 모으며 나라를 위해 돈을 썼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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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1-08-06 10:56: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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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청학매병_이시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wish/1670959723</link>
         <description><![CDATA[<div>청화 백자는 경성미술구락부경매장 의 경매품목에 올라와 있었다. 맨처음에는 참기름 병으로 쓰이다가 국보가 된 청화 백자의 이야기를 적어보겠다.<br><br><br>청화 백자는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품목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야마나카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br>처음에는 가격이 깔끔하게 올라 갔었지만, 점점 올라가는 가격이 100원, 10원 대로 낮아지면서 14580원이라는 깔끔하지 않은 가격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낙찰되었다. (한화 약45억 (반올림을 사용함)) 여기서 580원은 치열했던 승부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br><br><br>이렇듯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우리나라의 소중한 국보를 차지하려고 45억의 거금과 노력을 쏟아 부은 것, 굳이 전 재산을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것,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무력이 아닌 문화재 구입으로 맞선 것이 감동적이었다.(특히 돈을 많이 쓴거)<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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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1-08-06 11:11: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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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훈민정음 해례본-이지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wish/1670961529</link>
         <description><![CDATA[<div>&nbsp;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에 살고있는 사람한테 있었다. 어느날 그 사람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1,000원에 판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순황이 전형필한테 이 소식을 전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이순황한테 11,000원을 줬다. 그리고 만 원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고, 천 원은 이순황한테 수고비로 가지라고 했다.<br><br>&nbsp; 훈민정음 해례본을 천 원에 판다고 했는데 굳이 만 원을 낸 이유는 이 유물이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에 맞는&nbsp; 제값에 사야한다며 만 원을 냈다. 물론 지금은 만 원의 가치를 훌쩍 넘지만 그때는 10,000원이 곧 30억이었다. 이렇게 전형필은 그 주인이 이 물건의 가치를 모른다고 값을 깎지도 않고, 물건의 제 값을 냈다.<br><br>&nbsp; 이 외에도 전형필은 일본에게 빼앗긴 수많은 문화재를 되찾아왔다. 우리는 일본이랑 무기로 싸우는게 일본한테 저항하는 줄만 알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도 일본한테 저항하는 일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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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1-08-06 11:15: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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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민준 - 존 개스비에게서 찾은 우리나라 문화유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book_kebi/kansong3/wish/1670962304</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 도쿄에 살던 영국인인 변호사 존 개스비는 무려 30년이나 일본에서 살며 20년 이상 고려자기를 수집한 수집가었다.&nbsp;<br><br>개스비는 고려자기를 약 20년간 수집했었기 때문에 많은 양의 고려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송도 개스비 수장품에 관심이 많았다.<br>어느 날 간송은 골동상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스비의 이야기가 나왔고 개스비가 가장 많은 고려자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간송은 '개스비의 소장품을 모드 찾아올 순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일본에 있는 유력한 골동상인들을 만나서 개스비가 수장품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바로 간송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간송의 기다림과 준비는 헛되지 않았다.<br><br>1936년 2월 26일 일본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젊은 장교들이 군대를 이끌고 수상 관저와 내각 요인의 집을 습격하고 이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nbsp;<br><br>또 같은 해 12월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라는 법을 만들고 대한제국의 애국지사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였다.&nbsp; 1938년에는 초등 교육과정에 서 국어시간을 없애버렸다. 이는 자라고 있는 중인 아이들 민족의식의 싹을 뽑아버리려는 청책이였다.<br><br>간송은 이러한 일본의 정책에 불안감을 느꼈고 일본이 영국이나 미국과 전쟁을 한 것만 같은 예감을 한 사람이 적지 않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히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준비했다.&nbsp;<br><br>1937년, 간송은 골동상인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고 개스비가 고려자기들을 처분한다는 내용을 듣고 일본으로 달려갔다. 개스비는 고려 자기 2개를 기념품으로 가졌고, 간송은 2개를 제외한 나머지 20점을 다 가지게 되었다.<br><br>고려자기 20점의 값은 기와집 400채로 40만 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1200억이나 된다.<br>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며 가치있고, 고려자기 20점 중, 7점이 보물로 인정되어 ( 4점 - 국보, 3점 - 보물) 1200억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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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1-08-06 11:16: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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