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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사 1반 by 신성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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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1 00:33: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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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4서승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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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30: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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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7 김원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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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42: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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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2 김강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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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p><p><strong>⚔️ 1. 생애와 독립운동 참여</strong></p><p><br/></p><p><br/></p><p>오광선 선생님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뜻을 세우셨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군과 대한통의부, 그리고 나중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 무장부대 등과 긴밀히 협력하셨습니다.</p><p><br/></p><p>그는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며,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에서도 군수·조직·전략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대한독립군의 군자금 조달과 무기 확보에 헌신하여 실질적인 군사 활동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p><p><br/></p><p><br/></p><p><br/></p><p><br/></p><p><strong>🇰🇷 2. 대한독립군과의 관련</strong></p><p><br/></p><p><br/></p><p>오광선 선생님은 대한독립군의 작전참모 겸 재무 책임자로서, 만주 지역의 여러 부대를 통합하고 군사 체계를 확립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단순히 전투 참여자에 그치지 않고, 조직력과 행정 능력을 통해 부대를 유지·운영하는 중추 역할을 맡았습니다.</p><p><br/></p><p>또한 독립군이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피해를 입었을 때도, 부상자 수송과 피난민 보호, 물자 조달을 주도하며 전투력을 유지시킨 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독립군의 그림자 참모”라고 불리기도 합니다.</p><p><br/></p><p><br/></p><p><br/></p><p><br/></p><p><strong>🏛️ 3. 광복 이후의 활동</strong></p><p><br/></p><p><br/></p><p>광복 이후에는 귀국하여 한동안 정부 수립 과정에 협력하였으나,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공식적인 보훈이나 정치적 위치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지들은 그를 <strong>“묵묵히 싸운 독립군의 참된 군인”</strong>이라 회고했습니다.</p><p><br/></p><p>1967년에 별세하였으며, 사후에야 독립운동 공적이 재평가되어 <strong>건국훈장 독립장(1968년, 추서)</strong>이 수여되었습니다.</p><p><br/></p><p><br/></p><p><br/></p><p><br/></p><p><strong>🕊️ 4. 평가</strong></p><p><br/></p><p><br/></p><p>오광선 선생님은 독립운동사에서 잘 알려진 전투지휘관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독립군 조직을 지탱한 실무형 지도자였습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성공 이면에는 그의 철저한 준비와 헌신이 있었으며,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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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42: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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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9임도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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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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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47: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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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21 주승환</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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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이춘상 투사님께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깊은 고난 속에서도 용감한 의거를 행하셨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투사님께서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한센병이 발병하시어 대구에서 2년 동안 힘든 치료를 받으셨다고 합니다.</p><p>그러다 1942년 6월 20일, 소록도 갱생원에서 거행된 '보은감사일' 행사 도중에, 당시 원장이었던 수호 마사토를 식칼로 찔러 살해하는 의거를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본인 원장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분들을 상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끔찍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지요.</p><p>이 의거로 인해 이춘상 투사님께서는 체포되셨고, 1943년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투사님의 희생은 소록도에서 은밀히 벌어지던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p><p>당시 한센병을 앓으시던 아버지를 따라 소록도에 강제 격리되셨던 정연식 씨는 80년 전 수호 원장의 참배 현장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투사님의 행동이 얼마나 큰 충격과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p><p>참으로 안타깝게도 이춘상 투사님께서는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립유공자로 정식 인정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투사님을 "제2의 안중근"으로 칭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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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49: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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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20임상준</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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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김용관</p><p>김용관(1897~1967)은 과학기술을 통한 민족 자립을 추구한 독립운동가이자 공학자입니다.</p><p>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자로 일하다가, 1924년 발명학회를 세워 조선인 발명가를 지원하고 1933년 과학조선 잡지를 발간하며 과학 대중화 운동을 이끌었습니다.</p><p>그는 무력투쟁 대신 과학과 산업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실천적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p><p>광복 후에는 요업(도자 기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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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1: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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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5김민찬</title>
         <author>sghs0155</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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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신규식</p><p>신규식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세울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독립운동가중 하나이다. 신규식은</p><p>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여 1911년 우창봉기와 상하이봉기 특히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쑨원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쑨원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금전적지원 및 정부수립을 인정을 받았다. 이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고 볼수있다. 1912년에는 동제사를 설립하여 한국에거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한국인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상해 거류 한인들의 상조기관과 더불어 비밀결사 단체로 활동하였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당이라는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어 이상설,유동열,박은식 등과 협조하여 고종을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구상하였고 일본의 중국 침입을 저지하고 밀약체계을 조직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신한혁명당은 1917년 신해혁명동안 신규식이 민족 민생 민권 삼민주의에 입각하여 봉건체, 제국주의 거부, 민주공화국 건설을 지향하며 배운것을 선언문에 담아 대동단결선언물을 발표하였고 서로다른 당파 및 세력의 단결을 촉구하고 통일된 조직과 임시정부를 수립을 제안하고 임시정부의 이론적 기반마련을 기했다. 또한 순종의 주권포기는 무효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상속되어졌다 주장하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렸으며 공화주의와 삼권분립을 적은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독립운동의 이념적틀 형성하였다.</p><p>결과적으로 독립운동의 정신적기치와 민족의 일체감 과시시키고 평범한 민중이 참여하게 유도하여 독립운동이 대중운동으호 변하게만들어 훗날 3.1운동을 일으키는데 도움되어 임시정부가 생겨나게 되도록 만들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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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5: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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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7이지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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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p><p>윤세주 열사(1900년~1942년)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약산 김원봉의 동향이자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을 품었던 그는 1919년 서울 3.1 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밀양 지역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p><p>윤세주는 무장 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1919년 김원봉 등과 함께 창단한 핵심 멤버였으며, 초기 폭파 공작 활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독립운동 세력의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고,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무장 투쟁 지도자 양성 기관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습니다.</p><p>1938년 중국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1941년 김원봉 등 주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후, 윤세주는 남아있는 대원들을 이끌고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화북(華北)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 험준한 지역에서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한 선전 공작과 무장 유격전을 치열하게 전개했습니다.</p><p>1942년 6월, 윤세주 열사는 일본군의 대규모 '반소탕전'에 맞선 타이항산(太行山) 전투 중 총상을 입고 순국했습니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험난했던 시기에 무장 투쟁의 선봉에서 싸우다 생을 마감했으며, 동지들로부터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릴 만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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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6: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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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8 이치윤</title>
         <author>leechiyoon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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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9: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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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3 김도영</title>
         <author>sghs0153</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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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9: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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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4 김명준/안무(안병호)</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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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안무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에 몸 바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한 전투지휘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8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일본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군단에 참여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무기 확보와 병사 훈련을 담당했다. 이후 김좌진 장군과 협력하며 북로군정서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 부대의 선봉을 맡아 일본군을 크게 격퇴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이 전투들은 무장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하며, 독립군의 사기와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p><p>그러나 승리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 작전이 이어지면서 안무는 부하들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민족 해방을 위한 무장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나, 1924년 러시아 내분 속에서 불의의 피습을 받아 순국하셨습니다. 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p><p>안무는 생애를 통해 끝까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불굴의 군인이자 지도자였고, 특히 그의 전투지휘 능력과 강한 민족정신은 이후 독립군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무의 삶은 나라를 잃은 시대에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참된 애국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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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6:59: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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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2 박진우</title>
         <author>hong36729</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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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7:00: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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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1권민석</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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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3 07:02: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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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5서정훈 </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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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안경신(安敬信) (1888~?)</p><p>안경신 선생은 </p><p>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p><p>여성 독립운동가로, </p><p>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조직적 활동과 전략적 기획을 통해 항일운동을 지원한 인물이다.</p><p> 그녀는 비밀결사 조직 속에서 정보 전달, </p><p>자금 모집, 동지들의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았다.</p><p>특히 안경신 선생은 여성으로서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침착함과 지혜로 조직 내 신뢰를 받았으며, 임신이나 육아 등 개인적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을 위한 헌신을 멈추지 않았다. </p><p>그녀의 활동은 눈에 띄는 전투 장면보다는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전략적 지원과 </p><p>조직 운영을 통해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p><p>안경신 선생의 삶은 오늘날 지식과 전략, 협력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와 맞닿아 있으며, 묵묵한 실천과 치밀한 사고로 지식과 전략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참된 애국심의 모범으로 평가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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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5 00:02: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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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6 이정동, 이태준 열사</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seonggwanghigh/w30tg0qd1vvbpwcq/wish/3650262847</link>
         <description><![CDATA[<p>이태준 열사(1883~1921)는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제2회로 졸업한 뛰어난 의료인이자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며 항일 정신을 키웠습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중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고, 이후 독립운동가 김규식 등과 함께 독립의 열망을 안고 1914년 몽골의 수도 고륜(현재 울란바토르)으로 향했습니다.</p><p>몽골에 도착한 이태준 열사는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원하고 의술 활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몽골에는 매독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하여 많은 몽골인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이태준 열사는 헌신적인 치료와 봉사로 몽골 국민의 질병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 뛰어난 의술은 몽골인들에게 '신인(神人)'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몽골의 마지막 군주인 복드 칸(Bogd Khan)의 어의로 임명되었고, 1919년에는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귀중한 금강석'을 받는 등 최고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태준 열사는 오늘날 '몽골의 슈바이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p><p>의료 활동과 동시에 그의 주된 삶은 독립운동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태준 열사는 몽골에서 번 돈 대부분을 상하이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자금으로 보냈습니다. 또한, 동의의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교통 등 편의를 제공하는 비밀 연락 기지이자 쉼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로 선임되었으며, 1920년에는 코민테른 자금 8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상하이로 성공적으로 운반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의열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p><p>그러나 1921년, 독립운동 자금 운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 몽골을 점령했던 러시아 백위군 운게른 부대에 체포되어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며 조국 광복의 꿈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고귀한 희생과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현재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이태준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한국과 몽골의 우정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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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5 15:32: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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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8 김지웅</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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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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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02:51: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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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06 김상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seonggwanghigh/w30tg0qd1vvbpwcq/wish/3650731562</link>
         <description><![CDATA[<p>이태준은 어린 시절 함안 지역에서 한학을 배운 뒤, 근대 의학교육기관인 세브란스의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1907년 입학, 1911년 제2회로 졸업하여 의사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p><p>재학 중에는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p><p><br></p><p>의사 활동 및 몽골 진출</p><p>일본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국내 여건이 어려워지자, 이태준은 1914년경 중국 및 몽골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몽골에서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하였습니다. </p><p>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동의의국’이라는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당시 몽골에 번졌던 매독(화류병)을 치료하는 데 큰 기여했습니다. </p><p>몽골 황제 복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로 임명되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p><p><br></p><p>독립운동 활동</p><p>이태준은 단순히 의료인으로서 활동한 것만이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 네트워크와 협력하였습니다. 예컨대 몽골을 통해 러시아·중국 지역으로 독립자금을 운반하거나 임시정부와의 연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p>1919년에는 몽골에서 최고 등급의 훈장인 ‘에르데니 인 오치르(Erdeniïn Ochir)’를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p><p><br></p><p>순국(殉國)</p><p>1921년 초, 몽골에서 활동 중 러시아 백위파 및 사병세력과의 무력 충돌 혹은 암살에 의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몽골을 침범했던 사병 세력 ‘미친 남작(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등이 그 배경으로 지목됩니다. </p><p>이로써 향년 약 37~38세로 이른 나이에 순국하며 그의 의료·독립운동 활동은 일찍 마감되었습니다.</p><p><br></p><p>3. 주요 업적 및 의미</p><p><br></p><p>근대 의료선구자: 국내에서 의사로서 교육을 받은 뒤 해외(몽골)에서 근대 의술을 전파하고, 특히 전염병·성병 치료에 기여하여 몽골 현지인들로부터 ‘몽골의 슈바이처’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p><p><br></p><p>독립운동가로서의 헌신: 의료활동의 틈새에서 독립운동 자금 운반·네트워크 활동 등에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에 일익을 담당했습니다.</p><p><br></p><p>국제적 연대의 의미: 일본 제국주의 압박 하에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몽골로 건너가 활동했다는 점에서 한-몽 교류·항일 연대의 의미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p><p><br></p><p>기념 가치: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최근 ‘함안 이태준 기념관’ 등이 설립되는 등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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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09:04: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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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109 김치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seonggwanghigh/w30tg0qd1vvbpwcq/wish/3650849594</link>
         <description><![CDATA[<p>독립운동가 황병길은 1883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앞서 말했듯이 가난하여 서당도 못 가 어깨 너머로 독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산포총대에 가입, 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고, 무려 신아산 전투에서 홀로 일본군 14명을 사살했다 한다. 1909년 연해주 연추로 이주한 후 안중근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다.</p><p><br></p><p>1911년 연해주 연추에서 훈춘으로 이주한 후 독립군을 위해 인재양성, 군자금 모집에 힘썼으나 1917년 10월 황병길은 일본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친일 선전에 이용되다가 석방되었다.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20일 훈춘에서 3·1독립선언축하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주도하였지만 4월 29일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20년 1월 1300여명의 의용군을 조직하여 2월 국경 지방을 습격하여 무장 투쟁을 하기도 하였으나, 4월 병으로 앓아누웠고 결국 1920년 6월 1일 훈춘에서 향년 37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p><p><br></p><p>나는 독립운동가 <strong>황병길</strong>을 지폐 인물로 선정했다.<br> 황병길 선생은 1883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스스로 글을 배우며 뜻을 세운 분이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만주로 건너가 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며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는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14명을 사살할 만큼 용감한 인물이었고, 이후 단지동맹을 결성해 독립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또한 독립군 양성,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짧은 생애 동안 보여준 강한 의지와 희생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큰 울림을 준다.</p><p>나는 황병길 선생이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strong>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운 숨은 영웅이라는 점</strong>에서 그분의 업적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이 인물을 선택했다. </p><p><br></p><p>또한 나는 화폐의 뒷면에 신아산 전투의 모습을 담았다. 이 전투는 황병길 선생이 직접 참여하여 일본군 14명을 사살하며 큰 전과를 올린 대표적인 독립전투이기 때문이다. 신아산 전투는 황병길 선생의 용기, 희생, 그리고 강한 독립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그의 투쟁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br> 그래서 화폐의 뒷면을 통해 황병길 선생이 보여준 독립운동의 의미와 정신을 기억하고자 이 장면을 선택했다.<br>  </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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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12:30: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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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113 박창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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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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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8 00:33: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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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22 천유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seonggwanghigh/w30tg0qd1vvbpwcq/wish/3653458333</link>
         <description><![CDATA[<p> 1912년 7월 25일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면 서성정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에는 삼달정창(三達正昌)이라는 창씨명을 쓰기도 하였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대구에 거주하였다.</p><p> 1927년 대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자, 전국의 학생과 민중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호응하기 위해 1930년 2월 15일 시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연행되었고,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p><p> 대구상업학교의 시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목받아 1931년 10월 대구상업학교 5학년 재학 중 같은 학교 학생 서상조의 권유로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조선제일지국에 가입하였다. 이 조직은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사회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된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와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관지 『프로과학』을 발행하여 일본 내 70여 개소에 지국을 두고, 조직의 활동을 담은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뉴스』를 발행하였다. 1930년 12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대구에 조선제일지국을 설치하였다. 조선제일지국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할 목적으로 산하에 농민운동·학생운동·노동운동 세 부문을 두어 대중을 획득하고, 노동쟁의·동맹휴학·동맹파업에 대한 지도와 실행을 위해 활동하였다.</p><p>조선제일지국에 가입한 후 같은 학교의 서상조·서오룡·이동우 등과 함께 매주 2회 정도의 독서회 활동을 통해 사회과학 관련 잡지를 탐독하면서 사회 인식을 심화시키고 사회주의 선전에 힘썼다. 그리고 지국원 획득을 포함한 조직 확대를 위해 서오룡과 함께 학교 서클을 맡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는 한편 학교의 각 서클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일제의 본질을 폭로하고 친일단체의 격멸을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지국 뉴스』를 발간하여 지국원에게 배포하고, 일본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에도 발송하였다.</p><p> 1931년 12월 대구에서 일본군 제80연대,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역 등지에 살포한 반전반제 내용의 이른바 ‘대구격문 사건’으로 사사키와 서오룡이 붙잡혔다. 이때 이들의 집에서 일본에서 발행된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뉴스』와 대구에서 발행한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지국 뉴스』가 발견되어 조직의 전모가 드러났다.</p><p> 이 일로 1931년 12월 붙잡혀 1932년 1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2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p><p>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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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8 00:59: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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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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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0박서준,권기옥</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seonggwanghigh/w30tg0qd1vvbpwcq/wish/3653463210</link>
         <description><![CDATA[<p>권기옥 여사님(1901~1988)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향한 강렬한 염원을 안고 하늘을 날아 조국 광복에 헌신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시작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조국의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자라났습니다.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권기옥 여사님은 평양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비밀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strong>'송죽회(松竹會)'</strong>에 가입했습니다. 송죽회 활동을 통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으며, 직접 만세 시위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3주간 구금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p><p>출옥 후에도 독립 자금 모금 활동 등 독립 운동을 지속하던 여사님은 그해 10월, 다시 평양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재차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시정부와의 연관성을 추궁하며 혹독한 고문, 심지어는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기옥 여사님은 결코 굴하지 않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옥중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으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녀가 비행사의 길을 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0년 9월, 권기옥 여사님은 고국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p><p>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러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중, 여사님은 우연히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며 충격과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날개가 없으면 마음대로 다닐 수 없으니 날개를 가지고 나라의 독립에 몸을 바치겠다"는 강렬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조국이 없는 설움을 하늘을 통해 극복하고 싶다는 뜨거운 포부를 품게 된 것이죠. 1923년,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 <strong>윈난 육군항공학교</strong>에 입학한 권기옥 여사님은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쳐 <strong>1925년 마침내 비행사 자격을 취득</strong>하는 쾌거를 이루어냅니다. 이 순간, 그녀는 명실상부 <strong>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strong>이자 동시에 독립운동에 '하늘'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개척한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됩니다.</p><p>비행사 자격을 얻은 권기옥 여사님은 조국 독립을 위해 하늘 위에서 헌신했습니다.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strong>국민정부 항공서 부비항원(부조종사)</strong>으로 복무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도 참여했습니다 . 동시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지원했으며 ,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도 활동하며 미래 한국 공군 창설에 대한 꿈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갔습니다. 훈련 중 "나는 일본의 심장을 폭격하고 싶다"는 뜨거운 발언을 통해 그녀의 조국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p><p>마침내 광복을 맞이한 후, 1947년 고국으로 돌아온 권기옥 여사님은 한국 공군 창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초기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도 활동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6.25 전쟁 이후에도 국방부 비상설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재건과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빛나는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strong>건국훈장 독립장</strong>을 추서했습니다. 권기옥 여사님의 삶은 일제의 탄압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용기와 도전 정신의 상징으로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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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8 01:02: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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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11 박세훈</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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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전협 열사(全協)는 서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호는 두암(斗庵), 이명으로 전국환·김동운·한석동 등이 전해진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고, 1896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1907년에는 부평군수로 재직하는 등 관료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국권을 잃은 이후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는 점차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p><p>초기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의 활동에 관여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 길이 조국의 앞날에 해가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며 독립운동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전향은 단순한 개인적 결심을 넘어, 식민지 현실 속에서 ‘잘못된 길을 바로잡은’ 역사적 자기성찰의 표본으로 평가된다. 이후 전협은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단결을 위해 전국 각지의 애국인사들과 교류하며 항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p><p>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 전협은 최익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strong>조선민족대동단(大同團)</strong>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황족, 유림, 종교인, 교육계, 상공인, 청년, 여성 등 사회 각계각층을 아우르는 11개 단(團)으로 구성된 대규모 조직이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단순한 무장투쟁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단결과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전협은 대동단의 중심인물로서 조직 구성과 재정 운영을 총괄하며 활동을 이끌었다.</p><p>대동단은 ‘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선전문과 선언서를 제작·배포하고, 비밀리에 항일운동 자금을 모았다. 전협은 특히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추진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도모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통합 독립운동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대동단은 제2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등 국내 항일운동을 재점화하려는 시도도 했다.</p><p>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곧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되었다. 1919년 11월 19일, 전협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 처벌령·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동료들에게 “조국의 광복은 반드시 올 것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남겼다고 전해진다. 긴 수감 생활 속에서 얻은 고문 후유증과 질병으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1927년 7월 11일 가출옥된 직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였다.</p><p>비록 그는 조국의 해방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의 숭고한 뜻은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협 열사는 단순히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민족 내부의 단결을 이끌고 독립운동의 조직화를 주도한 전략가형 지도자로 평가된다. 그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 새 길을 선택하여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진정한 애국자였다.</p><p>전협 열사의 생애는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진정한 독립의 길을 걸은 한 인간의 이야기이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이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나라의 자주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모든 노력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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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30 07:36: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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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121 주승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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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이춘상 투사님께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깊은 고난 속에서도 용감한 의거를 행하셨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투사님께서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한센병이 발병하시어 대구에서 2년 동안 힘든 치료를 받으셨다고 합니다.</p><p>그러다 1942년 6월 20일, 소록도 갱생원에서 거행된 '보은감사일' 행사 도중에, 당시 원장이었던 수호 마사토를 식칼로 찔러 살해하는 의거를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본인 원장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분들을 상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끔찍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지요.</p><p>이 의거로 인해 이춘상 투사님께서는 체포되셨고, 1943년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투사님의 희생은 소록도에서 은밀히 벌어지던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p><p>당시 한센병을 앓으시던 아버지를 따라 소록도에 강제 격리되셨던 정연식 씨는 80년 전 수호 원장의 참배 현장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투사님의 행동이 얼마나 큰 충격과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p><p>참으로 안타깝게도 이춘상 투사님께서는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독립유공자로 정식 인정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투사님을 "제2의 안중근"으로 칭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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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5 03:29: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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