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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1 일본 사회문화의 이해 by 김태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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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깜놀하는 즐거움을 담아 만듦</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2-03-14 01:07: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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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히메</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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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59/">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59/#35408079_new</a></div><div>•<a href="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67/">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67/#35408079_new</a></div><div>•<a href="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77/">http://www.pandora.tv/view/kalsin2/49184977/#35408079_new</a></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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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4 01:08: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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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시1) 2019110000</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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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우선 일본은 한국처럼 개개인이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는 지역마다 풍토, 지역에 따라 각자 받들어지는 신이 다르며, 신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극 중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모습이 여럿 나온다. 예를 들어 극 초반, 무녀가 점을 통해 재앙신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인들의 만물에 신이 깃든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잦은 재난재해는 일본인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을 것이다.</div><div>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을 이용하고자 자연파괴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연의 소중함이 아닌 현실의 삶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며 나무와 광석을 캔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인간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에보시의 모습이 마냥 악인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보시는 팔려나가는 여자들을 전부 거두어들이거나, 갈 곳없는 병자들에게 사람으로서 취급해주는 모습 등에서 그걸 살펴볼 수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타타라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이런 영화에서는 인간들의 평면적인 나쁜 점만 그려내는 데 반해,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는 인간들의 입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다른 장면을 보면, 아시타카는 전쟁을 목격하고 팔이 욱신거린다. 아시타카의 몸에 저주를 내린 멧돼지가 재앙신이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전쟁을 목격한 순간 팔이 욱신거리는 건, 전쟁이란 결국 인간이 불러들인 재앙이라는 뜻 아닐까 싶다.</div><div>또, 그가 사슴신을 마주했을 때 역시 팔이 요동친다. 사슴신은 동물과 인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생명을 앗아가거나 부여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자연의 섭리 등을 상징하는 것 같다.</div><div>따라서 아시타카가 사슴신을 마주하고 나서 팔의 고통을 느낀 것은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려 했던(죽음을 두려워했던) 재앙신, 멧돼지가 온전한 자연의 섭리를 마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거부반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div><div>아시타카와 부상자들이 사슴신과의 조우 이후 생명력을 부여받은 듯한 묘사도 등장한다. 사슴신은 왜 이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했을까?사슴신은 공평한 자연의 모습, 다시 말해, 어떤 때는 자비롭지만 자비롭지 않은 자연을 표현한 것 같다.</div><div>작중 아시타카가 사슴신의 숲을 지나 부상자들을 구해 마을까지 데려가는 장면이 있다. 이 때, 마을로 부상자들을 데려온 아시타카에게 에보시의 측근은 의심스럽다는 듯 자신들이 도착한지 30분도 안돼서 부상자들을 데리고 왔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또, 그가 사슴신의 숲을 가로질러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슴신의 숲은 동물들이나 신들이 고대의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몸을 갖고 있는 신성한 장소이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장소이다. 아마 그곳은 시간조차 자유로운 신들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신사에 들어가는 길에는 반드시 '토리이'라는 문형태의 건축물이 있는데, 토리이는 인간 세계와 신들의 세계를 분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부상자 중 한명이 이곳이 저승 입구라는 말을 한 것이나 사슴 야쿠르가 호수 위의 섬에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시간관념조차 초월한 신들의 공간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여러 전설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물은 오래 전부터 죽음의 매개체로 활용되었는데, &lt;공무도하가&gt;나 황천, 삼도천 등의 여러 이야기도 떠올랐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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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4 01:12: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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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시2) 2018110000</title>
         <author>teseus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2830946</link>
         <description><![CDATA[<div>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는 ‘자연’이다. 하지만 그 키워드는 단순히 자연을 지켜야 한다, 혹은 자연을 살리자 같은 구호가 아니다. 1984년 작품인 &lt;바람 계곡의 나우시카&gt;에서는 거대 산업문명 때문에 파괴된 환경과 자연의 복원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13년 뒤인 1997년에 나온 작품인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 중점을 맞추는 것은 자연의 복원이 아니라, 문명을 세우며 파괴된 자연 속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공존 할 것이며, 문명 설립 속 파괴의 역사 속에서 인간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혹은 살아남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div><div>&nbsp; &nbsp;</div><div>&lt;모노노케 히메&gt;에는 문명을 세우는 에보시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 사람들과 자연 속에서 늑대들과 함께 살아가는 산,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서로를 이해시켜 보려는 아시타카가 중심인물로써 등장한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로써 초반에 아시타카를 감염시키는 역신(타타리가미), 시시가미, 그리고 숲 속에 사는 작은 생명체인 코다마 등 역시 등장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상징성을 지닌다. 산은 당연히 자연의 편에 서는 사람을, 그리고 에보시는 문명의 선에 편을 사람을 상징한다. 시시가미는 자연의 신적인 이미지를, 코다마는 자연 그 자체를, 그리고 역신은 자연의 분노를 상징한다.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각각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해 논한다.</div><div>&nbsp; &nbsp;</div><div>인간은 끊임 없이 문명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문명을 이루는 과정에는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감독은 물음을 던진다. 그 ‘모순’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div><div>&nbsp; &nbsp;</div><div>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처럼 자연재해가 빈번한 국가에서는 더 심화된다. &lt;모노노케 히메&gt;에 등장하는 울창하지만 무언가 스산하고 괴이한 원시림 자체도,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역신이나 늑대(작중의 모로와 그 자식들)도 모두 인간이 두려워하는 자연의 일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을 단지 두려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작중에서도 자연을 파괴해가며 제철 산업을 하는 에보시의 마을도 그렇고, 신 중 하나인 시시가미에게 에보시가 총을 쏘는 장면 역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의 메타포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인간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동료들을 인간에게 잃은 옥코토누시(멧돼지신)이나, 결국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시시가미가 그런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도와주기도 한다. 아시타카나 산이 숲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숲 안쪽까지 안내해준 코다마들은 인간을 돕는 자연의 한 면모이다. 결국,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해가 되기도, 또 도움이 되기도 하는 딱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자연과 문명 중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애초에 세계 자체에는 선악이 없고, 작품에선 오히려 그 안에서 인간이 선한 태도를 취하느냐 악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매사가 갈린다는 메시지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iv>&nbsp; &nbsp;</div><div>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일본의 종교관이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에는 자칭 팔백만의 신(八百万の神)가 있다. 대부분의 다신교가 그렇듯 이 수 많은 신 중에는 좋은 신도 있고 악한 신도 있다. 신토 신앙에 의하면 누구든 죽으면 신이 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 누군가가 꼭 선하고 선행을 많이 해야만 신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위에 말한 것처럼 좋은 신도 나쁜 신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완벽하게 선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가령, 기독교는 선한 사람만이 주님의 곁으로, 즉,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천국에 갈 사람인지 구분해내고, 내가 천국에 갈 만큼 선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신토 신앙에서는 그런 판단이 필요가 없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치관처럼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도 크게 문제가 없다. 어차피 신은 누구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div><div>&nbsp; &nbsp;</div><div>어쨌든 그런 복잡한 관계인 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선과 악을 완벽하게 이분법 적으로 나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주인공인 산의 입장에선 자연을 파괴하는 에보시가 적이겠지만, 자연을 무리하게 파괴해서라도 마을을 부흥시키려는 에보시는 결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아래 있는 수많은 주민들이 고통받을 것을 방지하려는 것뿐이라 그녀를 무작정 ‘악당’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애초에, 에보시가 데리고 있는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장애인, 여성, 어린 아이들이다. 기본적으로 자연이란 약육강식의 세상이기에,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그런 자연 속에서 이런 약자들의 생존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약자들도 에보시의 마을에서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문명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도태되거나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가리기는 더더욱 어려워 진다.</div><div>&nbsp; &nbsp;</div><div>그런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사정을 보여주며 감독은 애써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심판하려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 관계의 해답은 인간과 자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무리한 자연 회귀를 도모하기 보다는 서로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lt;모노노케 히메&gt;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아시타카가 산에게 말하는 ‘살아라(生きろ)’ 라고 볼 수 있다. 작중에서는 단순히 무모한 행동을 하려는 산에게 아시타카가 ‘네가 사는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이지만, 사실 이 대사는 &lt;모노노케 히메&gt;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인간이 살아 가는 것은 자연 안에서든, 문명 안에서든 힘들다. 하지만 인간은 어딘가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그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lt;바람계곡의 나우시카&gt;에서는 자연을 되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즉, 자연을 살리지 않으면 인간은 파멸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는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1984년에서 1997년까지의 시간 동안 변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을 어느 정도는 파괴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연과 함께 ‘공존’하며, 하나가 하나를 이기거나 없애는 것이 아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더욱 많은 자연의 요소를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라는 것 자체는 단순히 하나로 정의될 수 없고 신의 모습 (시시가미)도 있고, 정령의 모습 (코다마)도 있고, 멧돼지 (옥코토누시)도 있고, 그런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런 다양한 모습 자체가 각각의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div><div>&nbsp; &nbsp;</div><div>&lt;모노노케 히메&gt;의 주된 메시지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가 공존할 최선의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정설은 아니지만, &lt;모노노케 히메&gt;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영혼(아마도 코다마)가 &lt;이웃집 토토로&gt;의 토토로가 된다는 말이 있다. &lt;바람 계곡의 나우시카&gt;, &lt;모노노케 히메&gt;가 조금 더 어두운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웃집 토토로는 밝고 포근한 분위기의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만약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감독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lt;이웃집 토토로&gt;처럼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자연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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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4 01:13: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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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시3) 2017110000</title>
         <author>teseus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2833040</link>
         <description><![CDATA[<div>인간적인 신은 비단 일본의 신도만이 가진 특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령공주에서 나타나는 종교관이 독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현재의 일본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로마신화의 경우 현재는 단지 서구의 문화적, 철학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신도는 일본인 생활과 사고방식 등을 지배하며 이어져오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원령공주를 보았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인물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라는 것이었다. 크리스트교와 같은 유일신 신화에서는 절대적인 가치체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선과 악의 대비가 분명하며 인물들의 내, 외적 갈등은 유일신을 중심에 놓고 두 갈래로 갈라 사이에서 고민하는 평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원령공주의 인물들인 신(자연)과 인간은 저마다의 사정과 추구하는 가치가 있으며, 이로 인해 어느 쪽이 선이고 악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div><div>&nbsp; &nbsp;</div><div>신과 인간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힘과 지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같은 세계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신과 인간은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 동등한 위치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 문명은 결국 일본이라는 땅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과 인간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만 한다.</div><div>&nbsp; &nbsp;</div><div>선악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신과 인간이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조심하고 불행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령공주’라는 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나있다. 바로 ‘원(怨)’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은 모두 인격적인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억울하기도 하고 남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죽어서야’ 그러한 원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원령공주에서 신은 원怨을 품고 죽으면 타타리가미(재앙신)가 된다. 또한 일본신도에서 인간은 죽으면 신이 되며, 그래서 그들을 기리기 위한 제단을 마련한다. 여기서 평소 감정을 감추고 살아가는 일본적인 정서와 삶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div><div>&nbsp; &nbsp;</div><div>원령공주의 큰 틀은 자연과 인간의 대비가 아니다. 주인공 아시타카가 부정을 타고(원怨을 입고) 그것을 정화하기 위한 여정이 이 영화의 주된 골격이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인의 삶의 양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과와 반성 혹은 모르쇠하며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과오를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에게 원을 샀으며 그것만 지워버린다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일본의 신도와 일본인의 선악관이라고 원령공주를 보며 유추해보았다.</div><div>&nbsp; &nbsp;</div><div>마지막으로 원한怨恨이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나라가 주목하는 ‘한恨의 정서‘와 일본이 집중하는 ‘원怨의 정서’의 차이는 무엇일지 고찰해보았다. 개인적으로 ‘한‘은 참는 것이지만 ‘원’은 표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평소 감정적으로 분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미움과 억울함을 품고 죽어 ‘한‘을 남긴다. 이와 반대로 일본인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다가 죽은 뒤에 ‘원’을 표출한다. 자연재해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비록 신도가 없지만 좀 더 다양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어 오는 귀신보다 일본의 귀신, 요괴가 많은 것은 신도적인 세계관 속에서 죽은 뒤 ‘원‘을 표출하는 귀신, 즉 원령이 탄생하기 때문이다.</div>]]></description>
         <enclosure url="https://m.blog.naver.com/beakjungsnu/220629298087" />
         <pubDate>2022-03-14 01:15: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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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 강영준</title>
         <author>dud904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4071458</link>
         <description><![CDATA[<div>&lt;모노노케 히메&gt;의 감상을 논할 때는 역시 에보시라는 캐릭터의 입체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이 작품과 같이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주제로 삼는 작품의 경우 자연을 해치는 인간 세력은 절대악으로 묘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에보시의 경우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이유만으로 악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녀는 타타라 마을의 장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을 주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아사노와 같은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철을 생산하며 자연을 파괴한다. 그에 더해 팔려나간 여성을 거두어들이며 여성이 대우받는 마을을 만들고 멸시받는 나병 환자도 살뜰히 챙기는 등 위정자로서는 전혀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며 시시가미를 죽인다는 점에서 아시타카의 목적에 반하는 안타고니스트인 것은 분명하나 그녀를 과연 일반적인 의미의 악역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div><div>한편 에보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 측도 과연 순수하게 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자연 측에 속하는 멧돼지 무리와 모로 일족, 성성 등은 분명 인간의 자연 파괴에 분노한 것이기는 하나 그 방식이 매우 배타적이고 잔혹하다. 극의 초반에 나오는 나고신의 경우 타타라 마을에서 피해를 보았으면서 에미시에서 재앙신으로서 피해를 입히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절대적 존재로 묘사되는 시시가미는 인간 측과 자연 측,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존재할 뿐으로 에보시에 의해 머리가 날아가기 전까지는 그저 생을 거두고 부여하는 역할에 전념했다.</div><div>이 작품을 보면서 주목했던 것은 같은 감독의 전작이자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의 작품 &lt;바람계곡의 나우시카&gt;와의 대비였다. &lt;바람계곡의 나우시카&gt;와 &lt;모노노케 히메&gt;는 주제나 인물 면에서 많은 공통점이 엿보인다. 예컨대 자연과 소통하며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중재하는 나우시카는 아시타카와 비슷하며 크샤나는 자연을 파괴하는 여성 지도자라는 측면에서 에보시와 비슷하다. 그러나 작품이 최종적으로 주장하는 메시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아시타카와 나우시카라는 캐릭터의 차이, 그리고 각 작품의 안타고니스트의 특성의 차이로 구분된다. &lt;바람계곡의 나우시카&gt;의 경우 나우시카는 이상적인 절대선으로 묘사되고, 자연은 인간이 오염시킨 땅을 정화하나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자연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 나우시카가 이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lt;모노노케 히메&gt;의 경우 앞서 서술했듯 어느 쪽이 선이고 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상당히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 나우시카와는 달리 &lt;모노노케 히메&gt;의 아시타카는 관객에게 ‘살아라’라는 다소 모호한 메시지를 던진다. 타타라 마을이 작중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자연 파괴는 수반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며, 두 작품 사이에 있는 13년의 시간 동안 변화한 감독의 철학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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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4 15:13: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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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3</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4965305</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스케 히메의 이야기는 아주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산, 모로, 에보시 등 각자의 목표를 있어 그 믿음을 가지며 행동한다. 이야기 중에 누가 옳은지 정답이 없고 그냥 입장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대립이 된 것이다. 인간들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했으므로 자연을 보호하는 신과 동물들이 분노를 일으키며 전쟁이 터졌다. 숲이 파괴되고 타타라바도 망가져버렸다. 마지막에 시시가미가 죽었지만, 아시타카 말한 것처럼 시시가미가 죽지 않아 시시가미 그 자체가 생명이다. 이 말에 삶과 죽음은 뗄 수는 없어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시가미가 죽으면서 생명의 씨를 뿌려 파괴된 숲은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회복시킨다. 이것은 산신이 인간에게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을 생각한다. 이번에 인간과 자연 간의 밸런스 잘 유지할지 아니면 실패를 다시 되풀이할지 인간에게 남긴 숙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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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1:50: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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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063176</link>
         <description><![CDATA[<div>환경파괴&nbsp;문제는 현대의 다양한 해결과제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며 대립이 뚜렷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릴적 교육을 통해 '환경파괴는 나쁘다' 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가지고 환경을 바라보다가 사회의 다양한 갈등관계를 알게 된 후에는 정답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원령공주의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이 과정을 그대로 따른다. 재앙신에게 저주 받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그 마을이 환경을 파괴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에보시를 적대하게 되나 에보시가 나병 환자들과 여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진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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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2:55: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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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모노노케히메&gt; 감상평 (2020110250)</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074659</link>
         <description><![CDATA[<div>현대 보편적 이해 속 ‘신’은 무엇인가. 인간의 부모 혹은 스승 역으로서 인간을 구제하며 자애와 성스러움을 두른 전지전능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대중적 이해일 것이다. 그것이 탄생한 문화를 배경으로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 각각이 어느 정도의 권한을 나눠 가져 전능하지는 않다고 묘사된들, 보통 인간은 그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수동적 존재인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은 일방적 구세주이며, 불교의 부처는 신보다는 목표 혹은 개념에 가깝고, 힌두의 수많은 신은 인간이 범접 불가능한 영웅적 면모와 서사를 지닌다. 그리스 신화의 인간적인 신들조차 결국 그들의 변덕과 저주에 인간은 저항할 수 없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으로부터 한없이 멀다.<br><br></div><div>하지만 현재까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쳐오고 있는 민속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상신과 자연신을 숭배한다. 조상은 실재했던 인간이며, 자연물은 항상 곁에 있는 존재이다. 현대에 잔존해 있는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애니미즘적 특성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작중에서는 들개 신 모로와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 그리고 사슴 신 시시가미가 등장한다. 모두 짐승의 형태를 하고 있고 특히 시시가미는 생명을 관장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물의 신격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신’들이 인간들과 대립하며 쉽게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시시가미나 무서운 파괴력과 함께 저주를 부여하는 재앙신에게는 고전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이 완전히 무력화될 만큼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다. 본작의 묘사처럼 일본의 팔백만 신은 인간과 가까우며 때로는 숭배하고 때로는 극복하는 세상 만물의 가치 현현이라고 볼 수 있다.<br><br></div><div>그렇기에 일본의 신토는 일본인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현대에는 종교보다는 문화로써의 인식이 강하다고 하지만, 1945년 히로히토 천황이 인간선언을 하기 이전까지 일본은 살아있는 신이 존재하던 국가였다. 이자나기·이자나미 신이 일본 열도와 각종 자연의 신을 낳은 후, 뒤를 이은 인간이 죽은 이와 자연물을 숭상하며, 신사에서 참배를 하는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사와 함께 긴 시간에 걸쳐 성장해온 일본의 종교는 그들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역할로써 큰 의의를 갖는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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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3:03: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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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30009</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242353</link>
         <description><![CDATA[<div>영화 ‘모노노케히메’에 등장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서 「玉の小刀」(흑요석으로 만든 슴베찌르개)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아시타카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에미시의 어떤 여자아이가 마을을 떠나는 그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선물한 장명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이후 전개에서 아시타카는 그것을 산에게 주기도 한다.&nbsp;</div><div>이와 같은 ‘돌’을 작품 안의 중요한 요소로서 등장시키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은 모노노케히메 뿐만이 아니다. 제일 대표적인 작품은 ‘청공의 성 라퓨타’다. 이 작품 안에서는 몇 번이나 ‘비행석’이라는 사람이나 물체를 하늘로 띄우는 특별한 힘을 가진 돌이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이외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에서는 다른 세계의 입구인 터널 근처에 수상한 석상이 써 있기도 한다.</div><div>&nbsp;</div><div>&nbsp;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서 ‘돌’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왜 ‘돌’이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돌’을 작품 안의 특별한 요서로써 설정했을까.</div><div>&nbsp;</div><div>&nbsp;이것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수업애서도 언급이 됐던 ‘야오요로즈노 가미’(팔백만의 신)이라는 일본의 특이한 종교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야오요로즈노 가미’란 자연의 수많은 현상, 물체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일본 특유의 사상이며 종교관이다. 수업에서 언급된 숲을 비롯하여 산, 바다, 물, 쌀 등 아주 다양한 상태의 신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안에 ‘돌’도 포함된다. 이것은 일종의 애니미즘적 사상이며 일본인에게는 옛날부터 ‘돌’을 비롯한 자연을 숭배하는 독특한 종교관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nbsp;</div><div>&nbsp;</div><div>&nbsp;‘돌’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 특유의 사상은 지금도, 일상생활 속에서도 아주 싶게 볼 수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お地蔵さん’(지장보살)이라는 석상이다. ‘お地蔵さん’은 한국의 일반적인 지장보살과 달리 보통 석상이며 안에 행복을 상징하는 신이 있다고 한다. ‘お地蔵さん’은 길의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일본인들은 ‘お地蔵さん’을 발견하면 기도를 하거나 소원을 빌기도 한다.&nbsp;</div><div>&nbsp;</div><div>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오하카’(무덤)에서도 ‘돌’을 특별시하는 일본 특유의 종교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로 만들어진 무덤에 유골을 넣어서 조상을 추도하는 경우가 꽤 많다. 또한 나라형의 ‘이시부타이고분’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들이 돌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일본인들의 ‘돌’을 신성시하는 종교관을 알 수 있을 것이다.&nbsp;</div><div>&nbsp;</div><div>&nbsp;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안에 몇 번이나 ‘돌’이 중요한 아이템으로써 등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일본인 특유의 ‘돌’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 주목하면서 다른 지브리 작품을 감상하면 일본인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독특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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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5:16: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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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 신앙관의 특수성에 관한 소고 (2017110143)</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423238</link>
         <description><![CDATA[<div>여느 지브리 장편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 『모노노케 히메』는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가치를 전한다. ‘증오에 반대하고 용서하며 화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중 전반에 거쳐 전하는데 이를 선악의 구도를 뭉개버리는 방식으로 전달했다는 점이 썩 흥미롭다. 작중에 등장하는 갈등의 구도는 여러 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아시타카와 운명, 산과 에보시, 타타라 무라와 외부 세계, 시시가미 숲의 여러 영물들과 인간들 등. 이 가운데 그저 나쁘기만 한 이들은 누구이며 또 그저 착하기만 한 이는 누구인가.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 누구나 저마다의 명분을 갖고 또 저마다 어느 정도의 친절함을 보이며 서로 얽힐 뿐이다. 산은 자신을 들개에게 버린 인간에 대한 증오를 지녀서, 에보시는 타타라 무라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지코 스님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타타라 무라와 시시가미 숲의 영물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아니며 모든 이들이 ‘인간다운’ 마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메시지를 전하는 인물인 아시타카는 작중에 묘사되는 바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선악의 밸런스가 맞춰져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nbsp;</div><div>&nbsp; &nbsp;</div><div>한편 시시가미는 숲이 망가져가고 영물들이 쇠해 가는 상황임에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듯 선악의 양면을 동시에 보이는 인물들과 달리 모호한 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선악의 구도를 모호하게 뭉개진 채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저 일어난 일들일 뿐이다. 이와 같은 서사 구조 자체가 자연을 그저 일어나는 일로 파악하는 일본인의 사고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다만 『모노노케 히메』라는 텍스트로 일본인의 ‘특수한’ 신앙관을 읽기는 다소 힘들었다. 자연과 자연물을 숭상하는 형태의 종교는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애니미즘이 되었건 토테미즘이 되었건 심지어 샤머니즘이 되었건 원시적인 종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에 기반한다. 한반도에 살던 이들 역시 예외가 아닌데 중세 한국어의 속격 표지 ‘ㅅ’이 존경의 대상과 자연물에 붙는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외경적인 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국어학자도 있었다. 두려움과 숭상의 존재로 자연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 한편, 지코 스님으로 대표되는 외래 종교와 에보시로 대표되는 문명은 자연을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구도는 일반적인 원시 종교의 쇠락 과정에서 외래 종교의 유입이나 문명화, 도시화가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불교의 신토화’와 같은 토속 신앙과 외래 종교의 혼효라는 일본 특유의 종교관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nbsp;</div><div>&nbsp; &nbsp;</div><div>『모노노케 히메』라는 텍스트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오히려 일본의 종교관이 아주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연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보이지 않는 종교는 적어도 알고 있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 형태의 다신교라는 특성은 인도 아대륙의 여러 종교에서 보이는 한편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는 토속 신앙과 로마 카톨릭이 결합하여 아주 특이한 형태의 ‘변종 카톨릭’으로 일반적인 신앙이 형성되어 있다. 그 원형인 기독교 역시 유대교를 유럽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탄생한 종교이다. 현대 한국의 개신교 계열에서도 스스로 ‘기복신앙과 과도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인의 신앙관이 보편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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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7:42: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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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모노노케히메 감상평
주찬&lt;2018113415&gt;</title>
         <author>iltyc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442735</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일본 애니메이션을 너무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많이 봤고,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은 거의 다 봤다. 우선 원령공주는 미야자키 하야오 초기 작품으로 여겨져야 하는데, 뒤의 센과 치히로나 토토로 보다 그렇게 유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후기의 작품처럼 가볍고 따뜻하지도 않고, 원령공주의 전반적인 줄거리도 좀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사고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령공주는 이 두 가지 특징을 모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br>&nbsp; &nbsp;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자연의 생태 환경을 마구 파괴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많이 가져왔으며,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도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산의 신을 화나게 했다.이때 늑대에게 길러진 소녀는 늑대를 데리고 인간을 공격하여 자연에 대한 파괴를 막았다. 이때 모두 인간인 쌍방이 성장환경과 인지의 차이로 강한 대립 충돌을 일으켰다. 소녀도 분명히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에 의해 원령으로 여겨져서 그녀를 죽이려 한다. 분명히 인간측은 자신이 끝없이 욕심을 부리며 거리낌 없이 약탈했지만,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nbsp;<br>&nbsp; &nbsp;이것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정말 올바른 쪽인가? 정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물을 무제한으로 해칠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안 된다. 이야기 뒤에서도 인간 측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산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자연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작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연이 우리에게 가져온 자원에 감사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이 작품을 본 첫 소감이다.<br>&nbsp; &nbsp;또한 일본인의 보편적인 현상 중 하나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자연이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 많은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연의 힘을 매우 숭상하고 그것을 믿는다. 나는 이것이 일본 문화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각종 일본 소설이나 하이쿠에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묘사가 많고 칭찬의 정도가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br>&nbsp; &nbsp;좋은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정신적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고,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의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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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7:55: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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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55</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461788</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 히메라는 작품의 특징은 선과 악 혹은 물질 문명과 자연의 대립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어느 순간부터 선과 악의 경계는 흐려지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부딪히는 각각의 등장인물이 남을 뿐이다. 이때 일본에서 자연물이 신격화되는 모습은 척박했던 환경과 섬이기에 더더욱 자연에 순응하거나 의존해야 했던 특징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마을을 위하는 에보시나 그 반대의 삶을 사는 산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이전보다 과학 등 기술이 훨씬 발전한 지금의 상황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발전시킨 과학기술을 마냥 비난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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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8:09: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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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9</title>
         <author>11069383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469027</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 히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영화의 주제로 삼았는데요.일본은 섬나라로 숲이 우거져 있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여 자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많았습니다.영화에서 사람들은 숲을 벌채하며 생존을 발견하는데, 숲의 생태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숲속의 식물동물을 신의 화신으로 삼는 것도 자연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영화 중에서는 왕래하는 요정들, 100세의 노인과 오래된 신상을 볼 수 있습니다.일본의 전통문화와 역사신화도 관련이 깊습니다.미야자키 하야오 선생님의 애니메이션은 의미있지만, 간단한 극은 생각해 볼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반영합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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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8:14: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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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원령공주 감상평</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550532</link>
         <description><![CDATA[<div>&nbsp;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에보시, 아시타카,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큰 세가지의 입장을 하나씩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에보시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이 자연을 최대한 활용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 원령공주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아시타카는 두 인물 입장의 중간인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있는 적정한 자연 개발이 필요하다는 세 입장이다.&nbsp;<br>&nbsp;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의 주 초점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에보시가 상대적으로 악인처럼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악의 입장인 생물은 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원령공주에게는 에보시가 적이지만 에보시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사람이다. 반대로 마을 사람 중에는 들개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들개와 원령공주 무리, 그리고 그 이외의 생물들이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nbsp;<br>&nbsp;아시타카의 경우에도 재앙신이 된 멧돼지로 인해 받은 저주를 풀려고 에보시의 마을로 온 것이지만 에보시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멧돼지를 공격한 것이다. 이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과 입힌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해서 나타난다.&nbsp;<br>&nbsp; 자연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영화에서 마을이 사슴신으로 인해 한순간에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악은 없지만 에보시는 마지막에 더 좋은 마을을 만들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영화에서 내내 보여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이 반복될 거라는 것을 암시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새가 둥지를 짓고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을 활용해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생물들처럼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개발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논의 되어야 하고 방법을 꾸준히 모색해야 한다.<br><br> &lt;원령공주&gt;의 사슴신과 나고신을 보며 일본의 신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일본에는 신사가 편의점보다 몇 배는 많다고 한다. 비교적 지진과 같은 큰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다양한 신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고 이러한 특성은 지브리 영화인 &lt;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gt;에도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온천을 이용하기 위해 방문한 신이 정말 많은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lt;원령공주&gt;의 사슴신도 어쩌면 그 속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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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9:09: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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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7</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588039</link>
         <description><![CDATA[<div>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지게 된 계기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이었고 모노노케 히메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사실 이 영화를 수도 없이 많이 봤지만 이번에 다시 보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대략 2~3년 전, 즉 대학생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 다시 본 모노노케 히메는 어렸을 적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그로 인해 수많은 희생이 발생하지만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현실. 처음에는 단순히 신들을 재앙신으로 바꿀 정도로 자연을 파괴하고 신들에 적대적인 에보시와 자코보가 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보시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통해 그녀를 단순히 악하다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코보 또한 사슴신의 목을 가져오라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에보시와 협력을 하지만 주인공 아시타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 등에서 보이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그가 단순히 악에만 해당한다고 보기 애매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의 결말은 나름 해피앤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신들과 인간의 전쟁이 수많은 희생을 낳은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며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해피앤딩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를 조금 확장시켜 생각해 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주는 일종의 경고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수도없이 희생시키고 있다. 물론 환경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환경 보호에 대한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지만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공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만큼 우리에게 환경 문제란 떼어 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일본의 신도와 연결지어 자연과 환경을 신에 대입시켜 한 편의 영화로 만든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류가 직면해 있는 환경이라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주고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고 재미도 있기 때문에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명작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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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9:35: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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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07974</link>
         <description><![CDATA[<div>&lt;원령 공주&gt;는 사람과 동물과 귀신이 세 가지가 같이 등장한 애니멘이션이다. &lt;원령 공주&gt;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주제로, 기술력의 발전을 위해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자연이 그 대가를 보복당한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lt; 원령 공주 &gt;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간과 자연관계에 대해 사고하고 탐구한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매력은 그의 작품을 통해 민족문화의 특징과 현대 신화의 예술 형식을 구조하여 두드러진"인간과 자연관계"라는 심각한 주제를 보여준다.</div><div>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그는"모순된"존재이다.사람들의 견지에서 볼 때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삼림을 채벌하여야 한다는것은 옳은것이다.자연 편에서는 동물들이 살기를 위해 사람들과 싸우는것은 옳은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인류의 평화에 대한 기대한다는 이야기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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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9:49: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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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17086</link>
         <description><![CDATA[<div>&nbsp;'자연' 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수많은 문학, 예술, 미디어 작품들 속에서 자연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특히 종교적인 점에서 생각했을 때 더욱 도드라지는데, 과거의 인식이지만 개발과 사용의 대상에서 시작하여, 공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인간에게 도전과 과제를 주는 더 큰 초월적인 형상으로 묘사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전적인 자연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은 본 작품 [모노노케 히메] 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이미지는 이러한 통념적인 이미지들에 조금 더&nbsp; 특별한 메시지를 더해주고 있다.&nbsp;<br><br>&nbsp;자연이 주는 주술적인 의미는 고대 시대에서부터 우리 인간에게 흔하게 이야기되어져 온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요소들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힘으로 제어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힘과 현상들을 부릴 수 있는 '자연'이라는 존재는 인간들에게 큰 경외심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모노노케 히메] 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이미지도 이와 일맥상통할 수 있다. 아시타카로 대표되는 본작의 등장인물들은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앞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저주를 얻기도 하고, 넘어지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드러난 본작에서의 자연의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던 종교적 의미로서의 자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br><br>&nbsp;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이미지로만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시가미 등의 신들로서 대표되는 [모노노케 히메] 에서의 자연은 단순한 공경과 존경의 대상이라고 보기엔 다소 잔혹하고 냉정한 모습을 띄기도 한다. 어쩌면 '신'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nbsp;단순한 초월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보다 중립적이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br><br> 결과적으로 [모노노케 히메]에서 드러난 자연의 이미지는 흔히 알려진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이미지에서 벗어난다고 볼 수 있다. 본작에서의 인간은 신과 대결하며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닌 자연과 맞서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마냥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된 자연이 아닌, 보다 중립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부딪히며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게 해주는 복합적 이미지로서의 자연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자연의 이미지 ' 라는 주제에서 생각했을 때, [모노노케 히메]는 더욱 도전적이고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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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09:55: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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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살아감에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하는 메시지 2020110255</title>
         <author>jennyda10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27604</link>
         <description><![CDATA[<div>산은 인간이지만 들개 신에게 주워져 자연 속에서 짐승들과 자랐다. 그녀는 들개 일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숲을 파괴하는 인간들을 극도로 증오한 나머지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공습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산은 본질적으로 인간인 존재이며 실제로 아시타카는 산에게 ‘결국은 너도 인간이잖아.’라는 대사를 던진 적이 있다. 산 또한 본인이 인간 태생임을 자각하고 있다. 마음만은 숲의 세력들과 다를 바가 없으나 안타깝게도 들개 일족을 제외한 다른 숲의 존재들은 인간인 산을 자신들과 같은 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고로 산은 어느 쪽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로 그저 인간을 증오하며, 인간을 몰아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한다.<br><br></div><div>‘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br><br></div><div>아시타카가 산에게 던진 이 대사는 단순한 플러팅이 아닌, 인간 세력 내에서도 이질적이고 숲 세력 내에서도 마찬가지인 모호한 입장의 산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며 너는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이는 인간과 숲의 세력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함과 동시에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속죄하며 공존을 추구하는 아시타카의 면모와 역할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br><br></div><div>다음으로는 타타라 마을의 수장이자 산과 대립하는 인물인 에보시가 있다. 에보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인간, 즉 현대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몇십 년 후 미래보다 당장 오늘내일 먹고 살 일이 더 급하기 때문에 생존하고 필수적으로 번영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에보시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산과 충돌하게 된다. 결국 이는 생존, 즉 살아감으로 귀결된다. 에보시와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숲의 세력들과 척을 질 수밖에 없다.<br><br></div><div>‘분노한 신들과 인간의 싸움 속에서 행복한 결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증오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는 찾을 수 있습니다.’<br><br></div><div>두 집단의 대립을 두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설명한 바는 이와 같다. 원령공주는 산, 에보시, 아시타카,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합세해 사슴 신의 목을 돌려놓아 자연을 원 상태로 회복시키며 끝이 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고 볼 수 있으나 고작 몇 시간 동안의 끝에 불과할 뿐이다. 이후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똑같은 굴레의 반복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야오가 언급한 것처럼 증오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는 찾을 수 있다. 산은 숲에, 아시타카는 마을에 남기로 결정했듯이 원령공주 속 인물들은 다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br><br></div><div>지금까지의 감상은 수업 시간에 배운, ‘원령공주는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품을 고찰한 결과이다. 원령공주 속 선과 악의 모호함,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 여부의 근간에는 바로 앞서 언급한 타자론의 문제와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정답은 없지만 이유는 찾을 수 있다는 하야오의 메시지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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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0:02: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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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18 유영남</title>
         <author>mika6565j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56629</link>
         <description><![CDATA[<div>본 영화는[자연],[자연을 지키는 신],[신,인간,자연간의 결생]를 큰 주케로 제작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다. 신과 인간과의 전쟁에 대해 서술함과 동시에 자연과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일본은 도서 국가이며, 일본 사회는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예전에 읽은 첵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일본사회는 인간이 삶을 통해 자연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먼저다.자연 안에 있는 개개의 것, 즉 자연 일반의 이념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다.” 이 개념은 일본 사회에 있어서 중요하며 일본 사회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자연의 다양한 요소가 관여하고 있다. 일본사람한테 신은 자연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이라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연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요소에 지키는 신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공경한다면 신은 인간을 돕고, 인간이 자연을 공경하지 않으면 신은 인간을 벌하는 것이다.</div><div>아시타카는 쟁정을 통해 타타라바 시민과 신간에 나쁜 사이가 나아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계속 아시타카는 지킴이 모로에게 숲과 사람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는지 몇번이나 물어봤다. 에보시와 타타라바 시민들은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저절로 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자연에 대해 에보시와 타라바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숲을 착취하는 것이 잘못이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기근과 전투에서 헛되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자신들의 삶을 지키고 싶을 뿐이아닐까 싶다.</div><div>&nbsp; &nbsp;그리고 포스타에 쓰여 있는 生きろ（살아가)는 감독님이 저희한테 남음 하마디 이지만 펴면적인 의미가 이나라 더울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다. 앞에 말했 듯이 자연, 신 가의 이야기이지만 그 것들을 넘어서 저희한테 생각해 주고 싶은 것은 세상에 넘치는 "대립", 차이점"으로부터 생겨나는"갈등"을 넘어, 모두가 함께 살려면? 대립을 초월한 공존, 상생, 공영의 길이란? 살기 위해서는?</div><div>이 아닐까 싶다. “대립”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nbsp; 사람은 한명한명 다르기 법하다.&nbsp; DNA가 다르고 감가, 주장, 생각, 의견 이들이 다 달라서 가치관도 다르게 된다. 그러나 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이 세상이 재미있고 다채로운 것이다. 다 다르고 다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대립은 생긴다. 즉 갈등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대립은 차이에서 생긴다.대립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차이에서 생겨난다.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div><div>서로의 부족한 정보를, 서로 보충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자기의 일만', '자기가 얻는 것만', '자기가 받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대립이 해소되지 않기는 커녕, 초조해진다. 그리고 그 대립에서 생기는 싸움에서 지는 것이 불행해진다.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라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생각하다.</div><div>&nbsp;</div><div>&nbsp; 저는 개인적으로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팬이고 이 제품 자체도 몇번이나 봤는데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div><div>그 만큼 이 작품은 진짜 사람들이 반복해서 보고 또 생각해 볼 만한 작품이라는 것이다.</div><div>&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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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0:23: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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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히메 감상평(2018210988) 신민호</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78177</link>
         <description><![CDATA[<div>“함께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태어나는 힘, 보라, 먼곳을 떠난다해도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 희망의 하늘”<br><br></div><div> 모노노케 히메의 ost&nbsp; '아시타카와 산' 에 나오는 가사 중 일부이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은 우리 곁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또한 우리가 죽을 때는 ‘소천(召天)하다’ 혹은 ‘돌아가시다’라는 말을 하며 우리는 본래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br><br></div><div> 또한 먼곳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모르던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사람, 건물, 음식 등...</div><div>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어도 ‘하늘’만은 동일하게 주어진다.</div><div>이를 통해 OST에서는 사람은 본래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노래한다.</div><div>&nbsp; &nbsp;</div><div> 하지만, 영화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장면이 주로 등장한다. 그 예가 타타라 마을의 수장 ‘에보시’이다.</div><div>에보시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하나의 세계인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녀에게 마을은 하나의 세계이다. 그녀는 그 세계 속에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제철 사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제철 사업을 위해서는 강한 불이 있어야되며 그 불을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 속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연을 파괴한다.</div><div>하지만, 그 과정에서 산은 민둥산이 되어버리고, 동물들은 목숨을 잃는다. 결국, 자연은 죽음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아시타카와 소몰이꾼이 발견한 ‘코다마’를 통해서이다.<br><br></div><div>숲에서 코다마를 발견하고 놀란 소몰이꾼에게 아시타카는 코다마는 숲이 풍요롭다고 말해주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소몰이꾼은 놀라며 코다마는 ‘시시가미(죽음신)’을 불러들인다고 말한다. 이는 곧 코다마가 나오는 숲은 풍요롭지만, 인간이 그 숲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순간, 많은 자연이 훼손되어 이는 곧 죽음이자, 죽음신(시시가미)를 불러들인다는 것으로 보인다.</div><div>&nbsp; &nbsp;</div><div> 하지만, 영화 말미, 인간은 자연에게 굴복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존재한다.&nbsp;</div><div>생명을 관장하는 사슴신이 에보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시시가미가 되어 자연의 생명을 가져가며 타타라마을까지 진격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며 훼손하던 자연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친다. 이 모습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자연의 생명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div><div>&nbsp;<br> 또한 영화는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기도 한다.<br>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에보시'를 보며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선함에 감동받는다. 그들은 에보시를 '절대적 선'의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자연이 보았을 때 에보시는 '절대적 악' 그 자체이다. 그녀는 총으로 동물들을 죽이고, 나무를 베어간다.&nbsp;<br>이렇듯 영화에서는 절대적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저 어떤 관점으로 상대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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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0:38: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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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195 &lt;모노노케 히메&gt; 감상평 </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696817</link>
         <description><![CDATA[<div>&nbsp; &lt;원령공주&gt;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병사들의 갑옷과 무기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14~15세기 무로마치 시대다.<br>&nbsp; 타카라는 에미시 일족의 왕자가 '재앙신'으로 불리는 멧돼지신을 만나 그가 있는 마을을 습격하려 한다.타카는 처음에는 재앙신이 떠나기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재앙신이 빠르게 전진하고 사나워서 아시타가는 어쩔 수 없이 재앙신를 공격해 격파했지만 동시에 아사다카의 팔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저주를 남겼다.<br>&nbsp; 이 이야기는 신들이 원한과 분노에 자신을 맡기면 사마(邪魔)가 대신 몸을 잠식해 공포의 재앙신가 된다는 설정이다.<br>&nbsp; 이때 아시타카는 원한이 가득한 이 '재앙신'의 몸 안에 신비로운 철탄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에미시 일족의 마녀은 분석한 후에 아시타카가 마을을 떠나 '재앙신'의 탄생과 마을에 와서 인류의 원수를 찾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팔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낸다.<br>&nbsp; 영화 초반부터 이런 장면으로 신명과 인간 사이의 원한을 던지고, 그 원한이 주인공의 팔에 기생한다.<br>&nbsp; 이야기에 나오는 첫 번째 족속은 에미시 일족으로, 폐쇄적인 생화방식으로 자급자족하며 자연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시도한다.타타라마을이고. 에보시는 자신이 세운 마을을 보호하고 무력 우위에 있는 총포를 연구하기 위해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지도자이며 동시에 나는 타타라마을은 모계사회의 꿈의 나라라고 생각한다.세 번째는 신명의 일족,그들은 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끊임없이 자원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보아 인간에게 복수하려고 한다.넷째는 산과 아시타카이다. 아시타카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지가 있고, 산은 신명이 키운 인간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다리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br>&nbsp; 아시타카는 산을 만난 첫눈에 사랑했지만, 아시타카 역시 산을 도와주기보다는 끊임없이 충돌하는 몇몇 족속들 사이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산도 이 과정에서 아시타카가 자신과 같은 자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에보시가 산숨신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 대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고 만물을 파멸시킬 수 있는 재앙을 초래한다.결국 숲을 구했지만 숲을 파괴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여주인공은 숲으로 돌아가기로 했다.<br>&nbsp; 모든 족속은 하나의 공동 목적을 갖고 있다, 바로 생존이다. 방법이 다를 뿐 서로 배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서로 어떻게든 상대를 파멸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병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위대한 일이다.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인류는 끊임없이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 하고, 다른 나라나 인종,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그리고 큰 재앙에 이르기까지 세계 대전, 천재지변, 역병 등에 의해서만 평화 공존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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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0:50: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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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6 ‘원령공주’에서 엿볼 수 있는 소외된 자들과 자연의 관계성 – 어린이, 여성, 병든 자들, 그리고 자연</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763883</link>
         <description><![CDATA[<div>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영화는 인간의 다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div><div>인간이란 본디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모습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소외시킨 존재에게도 동정심을 느끼기 마련이다.</div><div>원령공주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소재는 앞서 언급했던 소외된 존재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어린이, 여성, 병든 자들, 그리고 자연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주요 인물인 아시타카와 산은 다른 영화와 달리 체격이 건장하고 현명한 지식을 지닌 어른이 아니라 보통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어린이다. 또한 영화 내에서 주된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산과 에보시, 여성이며 에보시가 거주하는 마을인 다타라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철을 생산하는 자들은 여성들이다. 이는 원령공주의 배경이 무로마치 시대임을 고려했을 때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다타라바 마을에게 힘을 안겨준 철제 무기를 만드는 자들은 다름이 아닌 나병 환자들이다.</div><div>&nbsp; &nbsp;</div><div>그렇다면 자연은 왜 소외된 존재인 걸까.</div><div>일본인들은 국가의 인류 문명이 원생식물에 기인한다는 ‘조렵수림문화론’을 믿을만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높은 자들이다. 특히 여러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국가 특성상, 일본인들은 그 어떤 민족보다 자연을 숭배하는 기조가 강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따라서 기독교, 불교 등 특정 신앙을 믿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자연에 신앙을 부여한 애니미즘을 믿는 것이다.&nbsp;</div><div>이렇듯 그들의 역사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을 인간이 직접 소외시키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문명이 발전되고, 사회가 발달될수록 인류는 다타라바 마을 사람들과 에보시와 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인공적인 힘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자연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국가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유독 강한 경외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손으로 자연이라는 존재를 소외시켰다는 것에 큰 회의감과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일본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연 뿐만 아니라 소외되었던 모든 존재들을 영화를 통해 부각하고 그들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여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원령공주는 그러한 그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각종 주요 인물들을 소외된 자들로 설정한 것과, 그 중요성을 감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소외시킨 존재 중 가장 중요하다고도 여길 수 있는 자연에게 신비한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을 부여하고, 동시에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을 극대화하고 자연과 신앙의 의미를 강조하여 본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신앙심과 숭배가 여전히 존재함을 영화를 통해 주장한다.</div><div>&nbsp; &nbsp;</div><div>그 의미는 시시가미 숲의 사슴신이 죽으면서 더해진다.&nbsp;</div><div>시시가미 숲의 사슴신은 원시림의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 절대자는 단순히 생명력을 수여하는 존재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대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존재로서 영화 내에서 유일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사슴신이라는 특정 캐릭터로 구체화하여 자연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더욱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사슴신이 인간에 의해 목숨을 잃으며 수많은 생명이 존재했던 시시가미 숲이 파괴된다. 아시타카는 사슴신이 죽자 이런 말을 한다.&nbsp;</div><div>“시시가미는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우리에게 살라고 말해주었다.”</div><div>이는 인간 또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자연과 인간은 평생 공생해야하는 것임을 말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숲을 파괴하였던 인간처럼 언젠가는 자연 또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하고, 인간과 자연, 두 가지 중 무엇이 우위에 있는지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했다.</div><div>&nbsp; &nbsp;</div><div>논설하였던 것과 같이 자연은 신앙과 신령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인간을 키우고, 인류의 문명을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회에서조차 소외받은 자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본인들이 다른 신은 믿지 않더라도 현재까지도 애니미즘을 믿는 이유 또한 이러한 것이다. 영화 속 자연에 대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조차 그 자연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저항하려고 하여도 결국 그 안에 속해있음을 잊으면 안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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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1:39: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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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2 김기려</title>
         <author>Giryo</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771187</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자연은 사람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자연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작품 같다.&nbsp;</strong></div><div><br></div><div>이런 주제가 나온 이유를 일본인들의 “자연친화적”인 태도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연을 좋아하는걸 넘어 신격화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신격화한 사슴신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일본에 관광하러 가면 개구리신사, 여우 신사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 “니와(정원)” 같은 것들이 유명한 이유도 자연을 즐기는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div><div><br></div><div>이런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좋아하고 알리고싶었던 감독이 위에 말했듯 “자연은 사람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자연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하자”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만든 작품인 듯하다.</div><div><br></div><div>그리고 문명을 만드려는 “에보시”도 자연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남음으로써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있다. 자신들을 망친 인간을 용서해주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이 미안함이나 고마움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준 것 같다. 그리고 자연의 적이긴 하나 에보시는 여성, 장애인 등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 옳게 행동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nbsp;</div><div><br></div><div>고다마들이 죽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사람들이 문명을 진화시키면서 자연을 배척하고 싸움을 하게 됐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 장면인데 ‘자연이 예전만한 회복력과 생명력을 잃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때문이다.’ 라는 주제를 담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div><div><br></div><div>그리고 멧돼지 신이랑 들개신 죽는 장면에서도 느낀 점이 있다. 그 신들은 인간을 원망하고 공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슴신이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말만 맞는, 말이 안통하는 그런 존재들을 비판한게 아닌가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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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1:44: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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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연과 전쟁의 명분 2020110263 정은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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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은 일본에서 단순히 배고픔을 배부름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감사함뿐만 아니라 이 음식이 도착하기까지 거친 모든 손길들은 물론 음식을 위해 희생된 존재들, 예컨대 쌀·야채·생선 등에도 감사를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들이 믿는 ‘신들’과 ‘자연’에 대해 감사 인사를 올린다. 일본에서 믿는 신의 숫자가 800만에 달한다고 하는데 대부분 자연에 관련된 신이다. 일본이 자연을 숭배하는 이유는 과거부터의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것은 모두 잊은 듯, 현재에는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오만함으로 자연을 멋대로 파괴한 대가를 받고 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우리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장면이 등장한다. 재앙신은 아시타카가 살고 있는 에미시 부족의 마을에 나타나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앗아갔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쫓아 그를 죽이게 되고 아사타카는 재앙신의 저주를 받게 된다. 재앙신은 죽기 전 ‘더러운 인간들이여 너희가 어찌 내 고통과 원한을 알겠느냐.’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이는 자연을 대변하는 재앙신이 인간에게 큰 경고와 위협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결국엔 재앙신이 받은 고통을 다시 돌려받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nbsp;</div><div>&nbsp; &nbsp;</div><div>또, 에보시를 보며 세상에 과연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겪는 편견 혹은 착각 그 사이에 어떤 사람은 꼭 늘 착한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 반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사람은 입체적이기 마련이다. 그녀는 마을 공동체를 위해 철 생산을 통해 부를 축척하고 시장에 팔려나오는 여성을 구해 새 삶을 선물해주고 나병 환자들을 보호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연의 신에게 도전해 그를 파괴하려 들고 결국 파멸을 맞는다. 늘 우리는 자연을 이기려했지만 그 위에 존재하려 했지만 번번히 우리를 파괴하는 꼴이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모노노케히메를 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해야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았다. 현재 지구촌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을 보면서 언제쯤 우리가 평화라는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이룰 수 없는 신기루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고 잃을 것만 수두룩하다. 전쟁에 명분은 있지만 그 명분은 결국 이유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저 사리사욕을 채우고 욕망이 이성을 지배한 것뿐이다. 전쟁의 처절함을 모노노케 히메에서 잘 볼 수 있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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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1:44: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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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41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775845</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고전 만화 영화입니다. 영화 초반에 갑자기 정글에서 나온 괴물들을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합니다.극중 인물과 같은 공포감까지 느꼈습니다.</div><div>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고전적인 만화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 초반에 갑자기 정글에서 빠져나온 괴물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심지어 극중 인물과 같은 공포감까지 느꼈습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인간적인 못생긴 면을 봤습니다. 자기 영토를 넓히기 위해 동물들의 숲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동물을 쫓기 위해 군사무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동물 보호를 위해 숲을 지키는 늑대녀 ’산’과 숲과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탐욕스러운 인간, 그리고 주인공 세 각지 인간을 보았습니다. 주인공의 역할은 중립적이었고 그는 인간이 숲 속의 신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div><div>다른 한편으로, 사악한 악마가 된 산돼지는 원한과 원망의 상징입니다.</div><div>영화에서 죽은 동물의 영혼이 많이 등장하고 일본 실생활에서는 대부분 신들의 존재가 있다고 믿으며 기본도 자연의 신들입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신도, 불도, 유교, 음양도 등 민간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뿌리를내리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div><div>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뒤에 산신의 출현입니다. 산신은 신을 뜻합니다. 그는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고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을 살려낸 것은 산신의 선량함과 너그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그를 죽이고 머리를 가져가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있던 원한이 폭발합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린 뒤 아름다운 세상을돌려주었습니다. 주인공 팔뚝에 흉터처럼 악령은 없어졌지만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평화로 인해 고통을 잊지 말라는 경고의 뜻일지도 모릅니다.</div><div>저는 이 영화가 인간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닏다. 생태적 균형을 맞춰야 인간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에 깊은 의미를 지닌 열화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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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1:47: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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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3059 최재혁  원령공주 감상평</title>
         <author>choi_jaehyu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808578</link>
         <description><![CDATA[<div>2017113059 최재혁</div><div>&nbsp;<br>모노노케히메는 현재 우리의 삶을 과거 일본 무로마치 시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사회에서 지적되고 있는 환경문제와 그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루고 있고 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환경으로 대표되는 멧돼지와 늑대 신을 통해 자연이 우리에게 하고싶은 말을 어림잡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늑대 신은 인간과 맞서고 그 무리에는 “산”이라는 인간 여자아이도 존재한다. 이로 보아 늑대 신과 그의 무리들은 자연을 생각하는 사람을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nbsp;<br>&nbsp;<br>맷돼지 신들은 작품 초반부에서 나왔듯이 분노와 고통에 먹혀 재앙신이 되었고 작품 후반부에서도 또 하나의 맷돼지신이 재앙신이 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인간에게 분노한 자연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nbsp;<br>&nbsp;<br>&nbsp;생과 사를 관장하며 작품 내 가장 강력한 신으로 묘사되는 사슴신은 여러 동물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며 또 누군가에게 단순한 사냥감이 된다. 마지막 사슴신이 인간에게 목이 잘리고 분노하지만 다시 인간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가 자연을 괴롭게 했지만 아직 늦지 않았으며 자연을 보호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있다.&nbsp;<br><br>현대에는 기후변화 혹은 기후위기라고 칭해지는 새로운 국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자연이 우리 인간과 공생하며 미래를 그릴지 아니면 자연과 함께 파멸에 이를지 크나큰 과제로 남겨져 있다. 전 세계 각 국에서는 자연을 보존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자는 목소리를 한데 모으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해서 아직은 비관적인 전망이 나타나고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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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2:08: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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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05 황목자</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864240</link>
         <description><![CDATA[<div>&nbsp; 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을지 알려고 한다.<br>&nbsp; &nbsp; &nbsp; &nbsp;영화는 저주받은 멧돼지가&nbsp; 마신으로 변해 인간의 마을을 침공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아시타카는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nbsp; 마신을 죽인다.하지만 자신도 저주를 받았다. 마을에서 무녀는 점을 치는 방법을 통해 서쪽에서 그를 구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바로 서쪽으로 갔다. 처음 이 대목에서는 일본이 신을 믿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종교가 아직 일본에 전해지지 않았을 때였다.일본인들은 산천초목을 신의 화신으로 여긴다.그래서 일본인들은 큰일을 당하면 신명을 향해 참배한다.<br>&nbsp; &nbsp; &nbsp; &nbsp;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가다 전쟁을 만나 산수신 숲에서 2명을 구했다.그리고 상처 입은 흰 늑대와 원령공주를 만났다. 마을로 가는 길에 수많은&nbsp; 요정들을 보았다.그 두 마을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고대의 일본인들의 숲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다. 마을 사람들은 자원을 위해 나무를 베어 광석을 채굴해 숲을 파괴해 왔지만.그러나 숲 속의 요정은 산신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고 산신수는 상처를 치유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해 왔지만 자연도 신명도 인간에게 복수하지 않고 포용하는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주체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br>&nbsp; &nbsp; &nbsp; &nbsp;마을에 도착한 아시타카는 원령 공주를 만나 에보시를 찔러 죽인다. 아시다카는 인간과 자연의 전쟁을 막으려는 일념으로 에보시를 막았다. 그리고 원령 공주를 구했지만 자신도 중상을 입었지만 결국 산수신이 아시타카를 구했다. 사람들은 삼림의 자원을 더욱 약탈하기 위해 자연에 도전했다.멧돼지 왕도 자신의 자민과 인간을 이끌고 처절한 싸움을 겪었다.결국 둘 다 패하고 말았죠. 인간과 자연의 싸움은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싸웠다. 그러나 인간의 작은 몸집으로는 신명과 맞설 수 없다.영화 속 천황은 부하들에게 신을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 전투에서 산신수는 자신의 머리를 찾기 위해 숲 전체를 부식시켰다.그리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결국 아시타카와 원령 공주는 머리를 산신수에게 돌려주고 화를 가라앉혔다. 산신수가 삼림 전체를 부활시켰다.이야기의 끝에서 에보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마을 사람들을 인솔하여 마을을 새로 만들다.아시다카도 이곳에 남아 유령공주와 함께 이곳을 지킨다.<br>&nbsp; &nbsp; &nbsp; 이 영화를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신명을 존중하는 사상적 이념을 표현했다. 일본의 신도교도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숲은 신들이 사는 곳이라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취지에 부합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를 통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했다.생태를 유지한다. 인류는 자연을 향해 다시 요구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하지 않는다.하지만 계속 무한정 자연으로 요구하면 된다.자연의 노여움도 무섭다.그래서 자연을 꼭 보호해야 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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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2:41: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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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49 소유란</title>
         <author>happycow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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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중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리고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는 늘 '인간', '문명', '기술'이다. &lt;모노노케 히메&gt;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어김없이 인간세계를 대표하는 인물과 자연을 대표하는 인물, 그리고 둘의 화합을 돕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과도하게 정복하려고 하지만,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주장한다. '왜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을 뒤집으려 한다.<br><br>2020년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에 봉쇄령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공해의 원인이었던 공장 가동이 모두 멈추었고, 에베레스트 산에서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대기 오염 정도가 완화되었다. 세계 최악의 미세먼지 국가인 인도에서는 약 30년 만에 히말라야 산맥이 보였고, 멕시코 남부에서는 수십 마리의 돌고래가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모순적이게도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나타난 뒤로 환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자연스럽게 인간과 환경의 대립 구도가 드러난다.<br><br>인간은 세상의 모든 종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고 자부하지만, 그러한 뛰어남으로 인해 자신의 이익에만 관대해지고 자신과 다른 종을 지배하여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 또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파괴하면 그 업보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오게 된다. 인간과 환경은 결국 같은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열이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닌, 화합과 공존이 현실화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lt;모노노케 히메&gt;가 시사하는 평화가 아닐까 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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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2:51: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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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 「모노노케 히메」감상평 정붕거</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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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모노노노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하여 1997년에 개봉한 작품이다.이 작품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주제다.일본은 ‘신’을 숭상하는 나라로, 이 작품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신을 형상화했고, ‘삼림의 신’ 역시 생령의 수호신이다.이와 함께 인류는 철기를 만드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스스로 자원을 방어하거나 빼앗기 위해 강토를 개척해 삼림을 파괴한다.숲의 대량 감소로 숲 속의 동물들이 이동을 강요받았지만, 양보만 일삼아 결국 인간의 변본만 더욱 극심해졌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에 대한 공격을 자행해야 했다.이에 따라 자연계와 인류의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br>「모노노노히메」는 인간과 자연, 전쟁과 평화, 생존과 발전의 시대를 그린다.이 작품에서는 묵직하고 심원한 주제, 굴곡진 판타지, 웅장하고 감동적인 음악 외에도 ‘원령공주’가 지키고 있는 그 푸르름과 그윽한 산수신의 숲에 대한 묘사가 놀라움을 자아낸다.생기발랄한 이 자연의 보물에는 원숭이·사슴·멧돼지·산견 등 온갖 영적인 동물과 신명이 살고 있고, 떼를 지은 고다마（こだま）는 숲속 나무의 화신으로 길을 잃은 주인공 아시타카에게 방향을 제시한다.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지속적인 감동을 준다.그의 작품을 보면 늘 마음속에 한 줄기 샘물이 흐른다.<br>자연은 지구상의 생물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는다. 출생과 죽음은 순간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을 구하고 환경을 변화시킬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우리가 자연을 잘 대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br>자연은 우리가 경외해야 할 신이다.우리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연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류의 작은 의미와 자연을 잘 대해주는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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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2:58: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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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 2020110284 김윤수</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917994</link>
         <description><![CDATA[<div>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단골소재 중 하나이다. 여태껏 이런 소재로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지만 ‘모노노케 히메’, 는 그 중에서도 최고로 뽑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재특성을 떠나서도 애니메이션 작품 중에서도 이 작품은 손에 꼽히는 작품일 것이다. 아름다운 작화와 짜임새 있는 구성과 스토리, 눈을 뗄 수 없는 스릴과 몰입도, 영화를 아름답게 감싸주는 음악 등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이런 대단한 작품이 탄생되지 않았나 싶다. 모노노케 히메는 단순히 만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nbsp;<br><br></div><div>일단 이 애니메이션을 볼때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영상미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배경 작화가 눈에 띈다. 자연에 대한 컨셉이 주라 그런지 숲과 나무에 대한 아름다운 작화가 많다. 또한 캐릭터의 디테일한 움직인의 표현 또한 이 작품에 재미를 더해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체는 친근하면서도 정이 간다. 일본 특유의 뾰족뾰족한 왜색이 짙지 않으면서도 편한 인상을 준다. 왜색이 짙은 작품은 보통 한국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기 마련안데 이 작품은 거부감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큰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의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었다. 아시타카나 산의 캐릭터 디자인은 수수하면서도 그 나름의 멋이 있었고 시시신의 디자인은 밤의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함과 야생성을 고스란히 캐릭터에 담아냈다.&nbsp;<br><br></div><div>사실 이 작품은 충분히 전체관람가로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 작품 중간중간 나오는 여과 없는 잔인함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 나오는 아시타카의 화살에 날라가버리는 사무라이의 팔은 어른인 내가 봐도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모두 아이들과 어른 모두를 아우르는 연령대를 가지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이 작품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정면들도여럿 포함 되어 있다.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 불어넣은 철학이 결코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원령공주에서는 그의 작품들 중 비교적 사실적이고 복잡한 구성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착한편과 악당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원령공주의 에보시는 악인과 선인의 중간에 서 있는 캐릭터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숲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죽이는 악인이지만, 인간들에게는 자비롭고 덕망이 놓은 선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에보시가 무작정 밉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마을을 일으킨 지도자이면서 약자들에게 관대함과 자비를 베푸는 선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nbsp;<br><br></div><div>사실 에보시는 현대의 인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도 우리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숲을 파과하고 자연을 오염시키곤 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생각해보면 예보시라는 캐릭터를 무작정 악인또는 선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원령공주는 산과 동물의 행동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와 같다고 생각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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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3:09: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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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서문 입니다 2020110282</title>
         <author>jiangshuwen15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5933375</link>
         <description><![CDATA[<div>볼수록 좋아지고,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영화.<br><br>환경보호는 단지 가장 바깥층일 뿐인데, 이 영화가 좋으니, 그 이상이다.사람이 상상하는 것은 그 차원이 매우 두텁다.<br><br>영화 속 핵심 인물과 그 의미, 대충 말해서 뽕나무(mo)가 있다.노노크로 대표되는 자연, 여성주(검은 모자)로 대표되는 인간사회, 악시다카(axidaka)방관자 또는 사고자를 말한다.그 옆에는 동물계의 급진파 멧돼지 신, 인류사회의 이런 조직 등이 있었다.남자주인공은 완벽에 가까운 인격표징, 착하고 용감하며(친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황폐를 쏴 죽이는 것), 강인하고 냉정하며(최종 고비에서 여러 세력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 넓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다다다다다라 시내의 그 구간).그러니 잔도구의 정서가 더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뽕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그녀를 끌어안고, 알 수 없는 결말을 이해하고, 살아남고, 파멸하고, 그 빛을 받아 평결처럼 다가온다.네, 우리가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불쌍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도, 이 세상의 여러 충돌을 균형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욕망과 모순이 아니라 생명이 이 세상에 살아남는 가장 기본적인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가 인하지 않고, 만물을 조개로 삼기 때문이다.가장 좋아하는 주인공은 사실 인간의 이성과 욕망을 대변하는 여성 성주다.욕심이나 산업예절의 대역이 아니다.영화도 결코 산업 예절에 대한 고소가 아니다.자기 욕심을 위해서 산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살아남기 위해서요.기쁨도 고통도 귀신과 같이 병석에서 연명하는 사람도 조금 더 존엄하게 살기를 바란다.이 여인의 몸에는 인간의 고귀한 품행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물희(物喜)로 슬퍼하지 않고, 풍화설월(風花雪月)의 무병(無病)으로 신음하지 않으며, 단호하고 결단력 있고, 백절불굴의 고집이 있을 뿐이다.사람이 사는 것은 자연에 대한 요구이다.인구가 늘어나면서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구멍이 되었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가 되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소리 없이 죽게 만들지는 않았다.살아있다는 것이 곧 '식신(識神)'을 뜻한다면 그녀도 꿋꿋이 할 것이다.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아 포스트모던처럼 무너지지 않고 담담하게 '처음부터'를 시작했다.그도 그럴 것이요, 인간은 그 들풀과 마찬가지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뽕, 부각하는 힘은 사실 이전 두 사람보다 깊지 못하다.그러나 그녀의 배후에는 흰 늑대, 멧돼지, 기린신 등이 있기 때문에 이 방면의 힘도 매우 세다.늑대와 멧돼지의 차이도 흥미롭다.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 거울의 다른 면도 비슷하다.인상적인 것은 흰 늑대와 '아스카의 그 대화는 창량하고 아득한 음악에 맞춰졌다(히데요시 조!이런 가벼운 조소에도 어렴풋이 서사시 같은 느낌이 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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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3:17: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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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모노노케히메&gt;감상평 (2020110280)</title>
         <author>moono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22857</link>
         <description><![CDATA[<div>남주인공 아시다카는 마을에서 기승을 부리는 사악한 악마를 죽였다.이로 인해 저주를 받은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주문을 푸는 여로에 올랐다.(제가 영화를 다 봤기 때문에 이런 소감이 나온다.)산은 가망없이 아시다카를 죽이려고 자신을 파멸시키려 한다.비수가 아시다카의 목덜미 사이에 멈추는 순간 그는 신에게 "살아가다…예쁘다"고 말했다.아시다카가 중상을 당하고 허약하게 풀밭에 누워 있다.산이 음식을 깨물며 몸을 숙여 먹이는 순간 아시다카는 눈물을 흘렸다.지난날의 고통이 봇물처럼 가슴에 쌓였다.아시다카는 고난의 세례에 아무리 견고해도 다 부술 수 있지만 부드러운 위로를 받으며 무너진다.아시다카의 화살이 산돼지 신의 눈동자를 맞았던 그 순간 그는 돌아설 수 없었다.마을을 지키거나 자아를 보전하는 데 아시다카는 전자를 선택해 파멸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그러나 희생을 각오하고 아시다카가 저주의 근원을 찾으러 서쪽으로 멀리 건너가야 한다고 무당이 말했을 때 온 집안의 마을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정말 한심하다.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고 피비린내 나는 이 길을 함께 가겠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아시다카는 돌아서서 아무말도 안한다.그는 이 길이 가면 돌아오지 않음을 확실히 알고 있고 좌중의 사람들도 모두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영화는 일본 室町時代를 배경으로 한다.이 시기에는 전란이 잦아지면서 무사도 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스님이 아시다카에게 묘사한 대로 "곳곳이 원망을 품고 죽은 원혼이 가득하다.전사한 사람,병사한 사람,굶어 죽은 사람,전혀 상관할 사람이 없다.그러나 이 시기의 갈등은 그 이상이다.인간은 서로 싸울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적이 된다.영주는 불로장생을 망상하여,응어리 어른에게 산수신의 머리를 빼앗으라고 명령하였다.아시다카가 바로 이런 격동의 시대에서 처한다.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고,주위의 환경도 혼란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숙명의 굴레였는지 산을 만나는 첫눈에 아시다카는 깊이 빠져들었다.산이 사악한 악마에게 침식당하는 것을 보고도 망설임 없이 그를 깊은 구렁텅이로 끌어들일지도 모르는 그 악마를 덮쳤다.몸은 사악한 악마의 삼켜지고 영혼은 무언의 적막과 공황에 휩싸인다.진로의 길은 죽음으로 직결되고 돌아가는 방향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이래서도 아시다카는 여전히 사상자를 구하고 있다.진로의 길은 죽음으로 직결되며 돌아가는 방향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그는 강에서 숨이 턱까지 쉰 소를 키우는 사람을 구했고,타타라 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도와서 성을 지킨다.인간의 공격으로부터 숲을 지키는 동시 산의 강인한 영혼도 지켜준다.그는 타타라성 사람들의 강인함과 용감함을 감상하고 산수신의 박애와 관용을 존경했다.평화의 사도인 아시다카는 인간의 현대 생활과 자연 보호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를 원했다.이 신화 의식에서 아시다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중적 구원 속에서도 자아에 대한 저주 해제를 완성한다.영화의 결말,인간과 자연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아시다카의 손바닥에는 아직도 저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다.산이 여전히 인간을 용서할 수 없어도 ‘넌 숲에서 살아.난 타타라 마을에서 살게.네가 보고 싶을 때 야쿠르를 타고 숲으로 갈게.’아시다카가 말했다.수많은 밤낮의 처참한 비바람과 난관이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바뀌었고,풍찬노숙의 노역의 아픔은 영혼의 순수함과 단맛을 일깨웠다.원령공주는 동화 같은 세상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세대 현대사회의 그림자가 굴절돼 나타난다.고대의 전쟁을 묘사했는데 이 전쟁은 대대로 상연되고 있다.정의와 악의 분명한 경계는 아니며 인간과 자연은 항상 상생한다.생명의 연속에는 또 곳곳에서 균형이 잡히지 않는 모순이 가득했다.사랑과 미움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감정이고 사랑보다 사람들은 증오하는 것에 대해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이런 위험한 감정이 사람마다의 마음속에 숨겨 있어 자제하지 않고 사소한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고, 예상할 수 없는 전쟁일 수도 있다.원령공주가 단순히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더 깊이 다룬다고 생각한다.요즘 세계 뉴스에 나오는 전쟁국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에게 정감을 부여받은 멧돼지 짐승,산개 짐승 같은 증오가 그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미래의 희망이 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사랑보다 미움이 더 오래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깊이 숨어 있고 위험하지만 진실하다.우리는 과연 어떻게 미움을 풀고 더 많은 사랑을 해야 할까?<br>증오와 살육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갈 만한 것이 있다.한 번의 아름다운 만남 또는 아름다운 사물을 위한 존재입니다.우리가 증오를 그리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다.우리가 저주를 그리는 것은 해방 직후의 기쁨을 묘사하기 위해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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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3:56: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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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히메 감상평(2017113401) </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26656</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히메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면서도, 각각의 입장을 충분히 다루면서 어떤 것이 "선" 또는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연도, 인간 또한 삶과 생존을 위해 서로와 충돌한다.&nbsp;<br><br>에보시 고젠으로 대표되는 인간은 삶의 투쟁을 위해 자연으로 진출한다. 철광업으로 시작된 이들의 삶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산으로 그 장소를 옮기게 되었고, 결국 숲, 나아가 자연을 파괴하게 된다. 시시가미, 모로 등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에 의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nbsp;<br><br>그러나 에보시와 인간은, 자연의 관점에서는 악한 존재이나 인간의 관점에서는 선한 존재로 다뤄진다. 에보시는 당시 시대상으로는 흔치 않은 여성 지도자이나, 카리스마와 적절한 리더십을 갖춰 타타라 마을을 부흥으로 이끌었으며, 당대에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나병환자들을 거두어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주었다.&nbsp;<br><br>반면 자연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악한 존재이나 자연의 관점에서는 선한 존재이다. 이들은 삶의 터전인 숲에 들어와 파괴를 일삼는 인간을 격퇴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고, 이는 곧 인간의 죽음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서로의 이익과 생존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둘러싸고, 이들은 충돌하며, 서로에 대한 폭력과 증오의 굴레를 생산해간다.<br><br>모노노케히메는 이러한 폭력과 증오의 굴레가 결코 한 쪽의 일방적인 책임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그리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감독은 각자의 입체적인 사정과 입장을 대변하고,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br><br>모노노케히메는 일본인의 종교관을 엿보는 도구이기도 하다. 감독은 수많은 신, 내지는 영적인 존재들이 각각의 동물, 식물, 그리고 이를 모두 포괄하는 자연에 깃들어 있음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신들은 인간이나 다른 부류에 대해 적대적일수도, 친화적일수도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br><br>어찌보면, 이러한 신/영적인 존재들의 관계는 인간의 그것과도 비슷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완전한 선과 악이 딱 부러져 존재한다고 말하기가 힘들듯이, 신들 또한 선과 악을 따지기 힘들며, 또 그들 간에도 관계가 존재해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쓰러져 있는 아시타카에 대해 들개와 원숭이간에는 그의 처분을 둘러싼 입장차가 발생하고 있다.&nbsp;<br><br>다만 이러한 폭력과 증오의 굴레도 공통의 위기 앞에서 흐려지게 된다. 타타라 마을이 파괴될 위기에 처하고 아시타카와 모로의 아들이 이들을 구할 존재가 되자, 인간은 상위권력자에 맞서고, 아시타카, 그리고 들개를 도운다. 그리고 이들은 힘을 합쳐 결국 타타라 마을, 그리고 숲을 구원하는데 성공한다.&nbsp;<br><br>어찌보면, 이러한 장면은 결국 감독이 인간과 자연, 나아가 모든 대상 간의 파괴와 폭력을 끊는 데에는 공존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최근 파괴와 폭력, 그리고 전쟁으로 둘러싸여진 세계에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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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3:58: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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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8</title>
         <author>ocy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30636</link>
         <description><![CDATA[<div>&lt;모노노케히메&gt;감상평<br><br>&nbsp;애니메이션에서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자연과인간의 공존, 그리고 더 나아가 화합이다. 워낙 유명하고 인기 있는 영화임은 알았으나, 과제를 통해 처음 볼 수 있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아시타카는 중재자의 역할을 , 산은 자연 그대로를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과 에보시는 자연을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죽음과 생명은 늘 그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린다.<br><br>&nbsp;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실생활 속 평판이나 행동 등을 통해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없음을 알리고자 한다.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아시타카는 절대선이어서 애초부터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저주를 풀고자 함을 목적으로 여정을 떠나다보니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바라게 되었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개발을 중시한 에보시 또한, 그저 절대악만으로써 소개되지는 않았다.&nbsp; 마을에서의 에보시는 약자를 고용하였고, 그들에게 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었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자연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하였고 이는 절대악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nbsp;<br>&nbsp;<br>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중 몇몇의 작품들은 보고 나서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lt;모노노케 히메&gt; 또한, '과연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보이는 장면이 다인 것인가?', '악역으로 보이는 등장인물이, 선하게 비추어지는 등장인물이 과연 진정 절대악, 절대선일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감독이 작품을 통해 시청자에게 던지고자 한 메세지가 단순하지만은 않겠지만, 한 명의 시청자로써 느낀 메세지는 분명하였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화합이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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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00:00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30636</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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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 (2021110261 서가은)</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59204</link>
         <description><![CDATA[<div>&nbsp; 이번 수업을 계기로 「모노노케 히메」를 처음 보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영화들처럼 자연과 인간을 주제로 한 영화이며, 인간과 신, 정령 등을 통해서 일본의 신화와 자연, 영혼 등이 강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표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영화라고 생각하며, 공생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해 준다.<br><br></div><div>&nbsp;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의 군주로 버려지거나 팔려 갈 뻔한 여성들을 구해 마을을 일궈내고, 나병 환자들도 치료해 주며 철강 산업으로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남다를 포용력과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안보력을 가진 입체감이 잘 나타나 영화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에보시에게서 조차 마을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개발은 그저 파괴에 불과하다. 자연을 개발해 자신들의 복지 향상과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인간과 이에 대항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들개와 맷돼지들의 싸움은 그저 생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br><br></div><div>&nbsp; 영화 속에서 에보시와 상인들이 사슴 신을 죽이자 산 전체가 황폐해지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엄청난 재앙이 시작된 장면이다. 사슴 신은 모두에게 평등하며 인간과 자연 그 어느 한쪽에게만 친절을 베풀지도,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슴 신이 머리를 되찾기 전 까지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터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모습을 통해 사슴 신은 절대적이며 생과 사가 만물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br><br></div><div>  에보시는 마지막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라고 말하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고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목숨은 건졌지만, 아시타카의 팔에 남아있는 저주는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도 어떻게 하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더 나은 방향을 향해 가야 한다. 공존할 것인지 같이 파멸할 것인지는 모두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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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12: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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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9 </title>
         <author>songkim158a</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70468</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히메) 감상평<br><br>어릴 때 모노노케히메를 감상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수업을 통해 다시그 성인 된 후에 감상을 하고 나니 엄청난 공을 들여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존에 봐왔던 신들의 내용을 다루는 영화들과 달리 인간의 형태를 한 신이 아닌 동물을 통해 신을 표현했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동물을 통해 신을 표현함을써 자연과 인간의 대비를 극명하게 나타낸 것 같다. 또한 작 중 에보시를 통해 절대악, 절대선이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에보시가 악역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상 인간에게 있어서 그녀는 나병환자를 차별없이 대해주거나, 남성주도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도 경제적 주도권을 주는 등 강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연 그리고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을 파괴하는 악역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대로 절대악과 절대선을 구별짓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되었다. 또한 사슴신 또한 인간과 자연, 한 쪽에 취우치지 않는 생명을 주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생명의 근원이자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작중 마지막까지 확실한 결말이 없는 끝맺음으로 아무리 힘들고 무서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도 해결은 없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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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16: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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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4 이현정</title>
         <author>hjlee006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080644</link>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 히메의 주된 주제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는 멧돼지, 사슴신, 들개 등 산과 숲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 중심에는 모노노케 히메라고 불리는 인간 '산'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해치는 인간을 증오한다. 이 원한은 에보시와 그가 이끄는 무리와 마을을 향한다. 그와 그의 마을은 철을 생산하기 위해 자연을 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산의 주인이었던 멧돼지는 분노했고, 원한이 쌓인 채 달려나가다 결국 아시타카라는 인물에게 저주를 내리게 된다. 인간이지만 원령의 저주로 인해 팔에 상처가 남고, 그 상처에서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느끼는 아시타카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산’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자연과 ‘에보시’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인간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둘의 공존을 외친다.</div><div>이 영화가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지어 놓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들개와 산, 멧돼지들에게 에보시는 그저 이익을 좇아 자신들의 영역을 파괴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병든 자들을 돌보고 팔려 나온 여성들을 수용하는 정이 많은 인물이자 그들이 따를 수 있는 인물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해치는 들개들과 멧돼지들이 위협적인 존재일 것이다. 선과 악의 모호함을 통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자연과 인간의 갈등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선과 악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div><div>마지막 부분에서 에보시에 의해 사슴신이 죽고 마을과 주변의 산들은 황폐화되지만, 사슴신의 머리를 산과 아시타카가 함께 돌려주자 이내 푸른 식물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시작해서 더 좋은 마을을 만들자는 에보시와, 산은 숲에서, 자신은 타타라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자는 아시타카의 모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조금 더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에보시의 마을처럼 너무 많은 것을 잃기 전에 자연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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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21: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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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7 두다혜</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19724</link>
         <description><![CDATA[<div>-종교를 중심으로 본 모노노케 히메</div><div>나는 우선 신화를 중심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감상해 보았다. 그리스로마신화 속 신들이나 불교의 부처, 한국의 옥황상제 신화 같은 많은 신화나 종교의 신들은 공통점을 공유한다. 우선 인간의 형상을 기본으로 하며 인간과 소통하는 경우가 많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듯 인간의 기도를 듣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위의 신화들은 모두 신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을 불어넣는 것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의 인과를 설명한다. 물론 이 역시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상한 일들을 오히려 정말 신이 있고 그들에게 감정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그러나 일본의 종교는 위의 종교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해석한다. 작품 속 사슴신은 감정에 대한 묘사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과 소통하거나 인간의 행동에 마음을 움직인 적도 없다. 그저 생명을 부여하거나 앗아갈 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데 머리를 도둑맞았을 때 순식간에 일으킨 폭발적이지만 그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파멸을 보면서는 오히려 신이라는 것보다는 물이 끓으면 흘러 넘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작용에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이런 장면들이 일본의 신도라는 종교가 ‘자연물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의 의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에는 의지라는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섭리다. 작중에서 사슴신과 연관된 인물들에게 생긴 일을 살펴보면, 나고신은 멧돼지 일족으로서 자연과 사슴신을 그토록 섬겼으나 재앙신이 되었으며 아시타카라는 인간의 손에 죽었다. 하지만 나고신을 죽였고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속하는 자임에도 아시타카는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오코토누시와 모로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사슴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에보시는 그냥 두었다. 사슴신이 만약 제우스나 옥황상제처럼 감정을 가지고 자연 속 존재들을 심판하는 자였다면 과연 이럴 수 있었을까? 일본에서 말하는 ‘자연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사정과는 일절 상관없이 일어나는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div><div>&nbsp; &nbsp;</div><div>-사회를 중심으로 본 모노노케 히메</div><div>과거에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어떤 주제를 다루는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동물과 인간이 왜 싸우는 건지도 모르는 채 그저 착한 주인공이 악역들을 모두 물리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만을 바라며 생각 없이 감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본 모노노케 히메 속에서는 놀랍도록 다양한 인물이 놀랍도록 다양하고 입체적인 입장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신기하고 흥미로웠기에 종교와는 별개로 인물들의 입장을 생각하며 작품을 정리해보았는데, 과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식이 크게 바뀐 인물인 에보시에 대해 느낀점을 적어보고 싶다. 과거와 똑같이 생각한 점은 에보시가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에보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자연을 모조리 이용하고 방해되는 존재들은 모조리 죽여버리려는 태도를 보이는 다소 극단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과거와 달리 ‘그래서 그는 이기적이고 악한 인물인가?’라는 물음에는 그렇다고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에보시는 철저하게 인간만을 위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연 속 존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표현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 속에서 그를 관찰한다면 오히려 진정 이기심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지코와 반대로 이타심과 평등을 중요시 여기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의 마을에는 여러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구성원이 매우 특이하다. 소몰이꾼 등의 부락민, 전염병 환자, 팔려갈 운명이었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에보시는 그들을 마을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평등하게 일할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와 기술을 제시해 주었다. 작중에서 계속해서 싸우려는 이유도 ‘이 마을을 노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과연 이기적이고 악한가, 악한 존재라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결국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갈등도 겪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또 다른 존재를 해칠 명분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시타카가 “당신한테는 악귀가 있다”라고 말했듯 에보시 역시 산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가 만든 원령에 씌인 또 다른 모노노케 히메라고 생각했다. 그 밖에 오코토누시와 모로는 똑같은 ‘인간과 갈등을 겪는 자연속 존재’라는 입장이면서도 극단적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과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항상 그런 방법을 취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또다시 나뉘는 것을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생각, 그리고 각자가 처한 입장과 화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폭넓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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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38: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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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윤건희 2019215472</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25216</link>
         <description><![CDATA[<div><br>모노노케 히메 감상평-윤건희 2019215472</div><div>&nbsp; &nbsp;</div><div>모노노케 히메는 워낙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이고 중학교때 학교 선생님 께서 틀어주시는걸</div><div>보았지만 성인이 되고 다시 보니까 역시 명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div><div>&nbsp; &nbsp;</div><div>미야자키 영화의 주된 모티브는‘자연과 인간’이다. 미야자키 영화 작품의 주요 주제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를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쉽고 간결하게 전달해 남녀노소 그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일본의 모호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반전을 주장하고</div><div>인간에 의해 자연의 본성보다 원한으로 바뀐 동물들을 보여주어 환경보전을 주장하고</div><div>다르다는 이유로 무시받는 여자들과 환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빠른 내용 흐름과, 여러 신들의 등장함으로 일본 종교가 어떤지도 간접적으로 체험할수 있다</div><div>원령공주는 산,자연과 인간, 문명의 대립으로 큰 틀이 형성 되어있다.</div><div>시시가미 사슴신의 숲 일본의 산악신앙 "그 옛날 이 나라는 깊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거기에는 태고 때부터 신들이 살고 있었다." 이 이부분에 산악신앙을 이야기해주고 있고</div><div>원령공주의 배경 태고적 일본, 무로마치 후기에서 전국시대 서양의 신들은 모두 하늘에 있는 반면 일본인들은 신들을 항상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멧돼지 재앙신이 상징하는 일본 신도이즘 만물에 신이 깃들어있다는 전통 농경사회의 사상인 '애니미즘',그리고 이에 바탕한 일본의 전통신앙인 '신도사상'이 드러난다. 멧돼지 재앙신이 상징하는 원령신앙</div><div>원령이란 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혼인데 원령신앙이란 이러한 원령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러한 작품으로 역사신화를 많이 알게 될 수 있지만 지금 2022년에 와서도 현실적인 요소를 반영이 된다는 점에서 정말 명작이라고 볼 수 있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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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40: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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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원령공주를 통해 나타나는 부조리와 그에 따른 문제 해결방식.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타나는 인과관계와 주인공 아시타카와 타인의 상관성과 함께)</title>
         <author>tinytedkim</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29984</link>
         <description><![CDATA[<div>일어일문학과 16학번 2016110279 김하선<br><br>&nbsp;모노노케 히메는 일반적인 이원론을 통해서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는 작품이 아니다. 덕분에 애매모호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질문을 감상자에게 던져 주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아시타카라는 주인공이 겪는 문제 상황을 뽑을 수 있겠다. 아시타카는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처음에 자신의 마을을 습격하는 재앙신으로부터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재앙신을 살해한다. 하지만 재앙신은 타타라 마을의 침범으로 인해서 원한을 가진 상태로 비통해하면서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건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아시타카와 재앙신과 타타라 마을의 원인제공과 인과적 결과가 1대1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타타라 마을이 숲을 침범하고 재앙신을 초래하게 됐지만 그로 인한 피해와 저주는 제 3자인 아시타카가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이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잘못은 내가 하지 않았는데 벌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면 인간은 납득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시타카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인과 관계이지만 우리는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이를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쓰레기는 내가 버리는데 처리는 다른 사람이 하고, 미세먼지는 내가 자르지도 않은 나무와 사막화를 통해서 나에게 닥친다. 현실에서 나와 타인과 사건의 인과관계는 실로 아시타카가 에보시가 일으킨 원인을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내가 직접적 인과관계에 자명하게 연관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슨한 인과관계를 설정한다면 우리는 연기를 통해서 모두 이어져 있으며 나비가 날갯짓을 하더라도 캘리포니아에선 태풍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나비의 날갯짓은 우리는 바로 보이지 않아 직접적으로 태풍으로 연관시키기 어려우나 실제로 세상은 명석판명 한 인과관계보다 애매모호하지만 연관성 있는 연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느슨한 인과관계는 우리에게 이해의 어려움과 납득하기 힘든 현실을 보여주고 이에 따라서 우리는 에보시의 죄를 대신 뒤집어써야 하는 아시타카를 통해서 세상의 부조리함을 몸 써 느낄 수 있다.<br><br>&nbsp;이러한 부조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느샌가 그림자가 드리우듯 문득 나타나며, 만약 내게 이러한 부조리한 사실이 닥치더라도 결국 나 자신 또한 사소한 행위로 인하여 어떠한 사건에 원인제공을 했을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해서 나 자신에게 찾아오는 부조리라는 불청객을 우리는 싫더라도 정면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실제로 아시타카는 이러한 부조리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상황에 맞닥뜨리고 들개는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에 있는 아시타카에게 대답이 쉽지 않은 질문을 한다. “그냥 그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라. 그러면 너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아시타카는 대답할 수 없다. 이는 우리에게 존재론적인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이성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인생과 세상에 향해서 자살을 통해서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가?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실제로 고통은 자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고통의 해소를 제 1목적으로 둔다면 삶의 문제를 자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타카는 자살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한 “살아라.” 라는 대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삶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식을 잘 설명해 준다. 작품의 마지막에 타타라 마을의 제철소가 다 타버릴 때도 “이제 마을은 끝이야….” 라고 하는 남편에게 부인은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대사를 통해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볼 수 있다. 고통은 자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부조리의 해결이 아닌 단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기에 해결법으로는 볼 수 있으나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결국 살아갈 수밖에 없다.<br><br>&nbsp;이 모노노케 히메가 재밌는 점은 결국 정답 같은 것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앞서 나온 현존적 사실인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에 대한 강한 근거를 인물 간의 서사를 통해서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타라도 아시타카도 산도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나름에 서사가 있으며 자연과 신으로 설명되는 존재들도 절대적 판단과 체용적 세계관에서 나오지 않는 깨달은 존재들이 아닌 그들 또한 상처받고 즐거워하고 당황하기도 하는 인격체로 나오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어디에 위치해서 그 사건을 관찰하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결국 인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치 판단을 통해서 자신의 기준과 사상을 관철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시타카 또한 처음에는 원인 제공자인 에보시를 증오했으나 그들의 삶의 터전과 공동체를 보면서 그들의 서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산과 들개의 삶의 터전과 신들의 삶의 터전이 침범당하는 문제의식을 보면서 자신이 어느 한쪽이 정의롭거나 올바른 선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였고 결국 어느 한쪽을 명확하게 편드는 것이 아닌 애매모호한 입장을 지속해서 취하게 된다. 사실 나 개인은 이러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매우 선호한다.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이 자명하고 명확한 정의가 악을 물리치는 쉬운 인과관계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항상 애매모호하고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명하고 쉬운 인과관계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싶어 하고, 그로 인해서 서양의 히어로 영화와 같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스토리가 인기를 얻게 된다. 덕분에 누군가에겐 아시타카가 매우 답답하고 이상한 주인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시타카는 어느 한쪽에 서서 그 사상을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상황을 여러 면에서 관찰하고 오류를 덜어내려고 하는 철학적 태도를 작품에서 계속 보여준다. 아시타카와 같은 어찌 보면 회색 지역에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세상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이성을 발휘하며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지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자연신들의 편에 서던, 타타라와 인간계에 서던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양쪽 진영 모두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타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기준이 있다. 산도 살았으면 하고, 에보시도 살았으면 하고, 사슴 신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판단하기 힘든 세상의 부조리 안에서 나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누군가의 고통을 더 줄여줄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사슴 신에게 머리를 돌려주는 것은 아시타카가 자연의 편에 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시타카가 마지막에 타타라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편에 선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결국 아시타카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주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인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힘이 미약해서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시타카도 인간과 멧돼지의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개인의 힘은 한계가 있다. 만약 아무리 내가 올바르게 살고 싶더라도 시대와 패러다임이 그것을 허용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고 고통을 줄여가는 삶. 모노노케 히메에서 우리는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아시타카의 고뇌와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 또한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 또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나에게 다가오는 부조리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부조리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허나 이러나저러나 자살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nbsp;<br><br>그렇다. 결국 살아가야 한다.&nbsp;<br>그게 어떤 방식이든.</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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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42: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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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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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모노노케 히메를 학창시절 보고, 그때 모노노케히메를 비롯한 지브리스튜디오의 작화가 너무 맘에 들어서 블루레이를 빌려 스크린샷을 찍어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썼었던 적이 있었다.<br><br>&nbsp;그 당시엔 단순히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화와 디테일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수업을 통해 일본과 일본인이 생각하는 종교와 자연을 배우고 보니 새롭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영화를 보니 영화를 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었고 사고의 흐름을 달리 할 수 있었다.<br><br>&nbsp;영화 내에선 인간과 자연 두 구도의 대립구조를 보여준다. 단순히 선과 악, 흑백논리로 이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확실히 어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종교관과 자연관은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체득한 문화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봤을 땐 작품의 스토리에 감동받지 않고 작화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nbsp;<br><br>&nbsp;일본 특유의 종교관과 자연관을 이해하고 나니 모노노케히메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도 뭔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최근 내가 하고 있는 게임인 '젤다의 전설' 또한 이 작품을 오마쥬한 설정이나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이 작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다른 미디어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서도 비슷한 설정을 넣어둔 것을 보았다. 일본의 이러한 자연과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말 일본에선 보편적이고, 또한 외국인인 우리가 바라보기에 특이하면서 묘하게 끌리는 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br><br> 선과 악을 단정 지으면서 흑백논리를 적용시키는 것은, 권선징악의 문학작품이나 영웅이 나오는 미디어에선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복잡한 관계에선 멋대로 선과 악을 단정 짓기에는 조심스럽다. 이러한 작품 속에서 나오는 종교관과 자연관을 이해하고 마음에 담아둔다면, 단순히 문학작품을 바라볼 때의 시선 말고도 다른 것을 바라볼 때 이항대립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각자의 관점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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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43: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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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히메 감상평 - 2017110271 김영 </title>
         <author>rladud0108</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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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모노노케 히메는 두 개의 세력이 등장한다. 동물의 형상을 한 신은 자연을 상징하며 에보시라는 지도자 산하의 타타라 마을은 인간의 자연의 파괴를 통한 발전을 상징한다. 두 세력어디든 간 절대악과 절대선이라 할 수는 없다. 가령, 들개와 멧돼지 등 자연의 존재들은 자신이 살아가던 터전이 사라지는 생존의 문제가 달리긴 했으나, 재앙신의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인간이라면 죄의 유무 판단없이 죽이려 했으며, 에모시 측 산이 민둥산이 될 정도로 파괴를 하였으나 발전과 생존을 위해서는 개척은 필수적이다. 특히, 여성과 병자마저도 포용한다는, 시대를 고려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이상적인 사회인 에보시의 마을이 유지되는 것에는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고 이에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의 가속화를 불러왔다.</div><div><br></div><div>타타라 마을의 모습은 오늘날 사회 유지와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후반부에서 멧돼지들이 전멸했듯이, 현실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자연을 자유자재로 가공할 수 있게 된 인간의 승리로 귀결된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이 죽음으로써 나오는 재앙신, 그리고 사슴신의 폭주를 통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고, 마을이 파괴된 것 처럼 자연의 파괴는 기후변화와 천재지변으로 인해 결국 인간의 삶의 터전의 파괴, 나아가 죽음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됨을 암시한다.</div><div><br></div><div>주목할점은 이런 파괴 행위를 멈춘 것이 바로 아시타카와 산이라는 인간이면서도 자연 측의 입장을 존중하는 이중적인 입장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이다. 아시타카의 경우 에보시 측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면서도 자연에 대한 파괴를 멈추고 공존 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다른 인간들과 달리 자연의 존재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에게 해가 될 경우 자연에 대립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가령, 첫장면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공격하려는 재앙신을 죽인 것이나, 에모시를 죽이려하는 산을 막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산의 경우는 처음에는 자신을 인간으로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생활방식을 끝까지 인정하지않고 자연의 편에서 항쟁한다. 그러나 아시타카라는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 사슴신의 목을 돌려줌으로써 재앙의 지속을 멈춘게 이 두 인간이었다는 것은 결국 지속 가능한 생존은 양측의 면모를 모두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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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52: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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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118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유은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54892</link>
         <description><![CDATA[<div><br>몇 년 전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만든 랑종이 개봉했다. 랑종은 무당이라는 뜻이며 작중 인물은 바얀 신을 모신다. 보통 숲 안엣 바얀 신의 형상을 한 석상에서 의식을 치룬다. 영화가 하이라이트로 갈 때쯤 바얀 신 석상이 목이 잘린 채 부서져 있었다. 주인공은 한 번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성격을 보여줬지만 그 모습을 보고 오열한다.&nbsp;<br>현대에 와서 자연은 그저 수단이다. 인간이 목표를 이루는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있듯 모노노케 히메에서 또한 자연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와 변화를 담는다. 현재 일본 사원의 수는 일본 내에 있는 편의점 점포수보다 3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아 신을 대하는 태도를 중요시 여기는 일본의 주요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nbsp;<br>모노노케 히메 안에서도 신을 자연으로 보는 집단과 자연을 신으로 모시지 않는 집단이 나뉜다고 봤다. 그리고 그 집단들은 대게 서로 갈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점은 절대적 악 집단이 아닌 그저 이해관계의 충돌로 볼 수 있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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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4:54: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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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모노노케히메&gt;감상평 (2020111116)</title>
         <author>sjelfchegoyui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70056</link>
         <description><![CDATA[<div>오랜만에 봤지만 역시 지브리의 세계관은 좋아한다.<br>내용도 그렇지만 뭐보다 풍경화가 넘 아름다웠다. 눈치채면 풍경만 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숲속에서 비치는 햇빛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나, 달리는 그 빛과 그림자가 움직여 가는 장면 등, 매우 아름답고 리얼했다.<br>손으로 이렇게 리얼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손이 걸려 있을까 라고 무섭기도 했다. 효과음도 대단했다.<br><br>자연계에 경의를 내면서 공존해 가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br>근대는 바로 자연계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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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5:01:10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70056</guid>
      </item>
      <item>
         <title>2020110266 ‘원령공주’에서 엿볼 수 있는 소외된 자들과 자연의 관계성 – 어린이, 여성, 병든 자들, 그리고 자연</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096191287</link>
         <description><![CDATA[<div>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영화는 인간의 다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div><div>인간이란 본디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모습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소외시킨 존재에게도 동정심을 느끼기 마련이다.</div><div>원령공주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소재는 앞서 언급했던 소외된 존재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어린이, 여성, 병든 자들, 그리고 자연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주요 인물인 아시타카와 산은 다른 영화와 달리 체격이 건장하고 현명한 지식을 지닌 어른이 아니라 보통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어린이다. 또한 영화 내에서 주된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산과 에보시, 여성이며 에보시가 거주하는 마을인 다타라바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철을 생산하는 자들은 여성들이다. 이는 원령공주의 배경이 무로마치 시대임을 고려했을 때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다타라바 마을에게 힘을 안겨준 철제 무기를 만드는 자들은 다름이 아닌 나병 환자들이다.</div><div>&nbsp; &nbsp;</div><div>그렇다면 자연은 왜 소외된 존재인 걸까.</div><div>일본인들은 국가의 인류 문명이 원생식물에 기인한다는 ‘조렵수림문화론’을 믿을만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높은 자들이다. 특히 여러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국가 특성상, 일본인들은 그 어떤 민족보다 자연을 숭배하는 기조가 강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따라서 기독교, 불교 등 특정 신앙을 믿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자연에 신앙을 부여한 애니미즘을 믿는 것이다.&nbsp;</div><div>이렇듯 그들의 역사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을 인간이 직접 소외시키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문명이 발전되고, 사회가 발달될수록 인류는 다타라바 마을 사람들과 에보시와 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인공적인 힘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자연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국가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유독 강한 경외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손으로 자연이라는 존재를 소외시켰다는 것에 큰 회의감과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일본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연 뿐만 아니라 소외되었던 모든 존재들을 영화를 통해 부각하고 그들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여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원령공주는 그러한 그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각종 주요 인물들을 소외된 자들로 설정한 것과, 그 중요성을 감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소외시킨 존재 중 가장 중요하다고도 여길 수 있는 자연에게 신비한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을 부여하고, 동시에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을 극대화하고 자연과 신앙의 의미를 강조하여 본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신앙심과 숭배가 여전히 존재함을 영화를 통해 주장한다.</div><div>&nbsp; &nbsp;</div><div>그 의미는 시시가미 숲의 사슴신이 죽으면서 더해진다.&nbsp;</div><div>시시가미 숲의 사슴신은 원시림의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 절대자는 단순히 생명력을 수여하는 존재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대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존재로서 영화 내에서 유일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사슴신이라는 특정 캐릭터로 구체화하여 자연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더욱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사슴신이 인간에 의해 목숨을 잃으며 수많은 생명이 존재했던 시시가미 숲이 파괴된다. 아시타카는 사슴신이 죽자 이런 말을 한다.&nbsp;</div><div>“시시가미는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우리에게 살라고 말해주었다.”</div><div>이는 인간 또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자연과 인간은 평생 공생해야하는 것임을 말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숲을 파괴하였던 인간처럼 언젠가는 자연 또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하고, 인간과 자연, 두 가지 중 무엇이 우위에 있는지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했다.</div><div>&nbsp; &nbsp;</div><div>논설하였던 것과 같이 자연은 신앙과 신령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인간을 키우고, 인류의 문명을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회에서조차 소외받은 자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본인들이 다른 신은 믿지 않더라도 현재까지도 애니미즘을 믿는 이유 또한 이러한 것이다. 영화 속 자연에 대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조차 그 자연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저항하려고 하여도 결국 그 안에 속해있음을 잊으면 안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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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15 15:10: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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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가구야공주를 통해 보는 일본미</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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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화요일&nbsp;저녁 9시까지 코멘트 올려주세요~ 다른 분들이 쓴 글도 읽어보시고 댓글들 달아주세요~</div>]]></description>
         <enclosure url="https://sjh-world.tistory.com/entry/2013%EB%85%84-%EA%B0%80%EA%B5%AC%EC%95%BC-%EA%B3%B5%EC%A3%BC-%EC%9D%B4%EC%95%BC%EA%B8%B0-%EC%9E%90%EB%A7%89-%E6%9C%89-%E3%81%8B%E3%81%90%E3%82%84%E5%A7%AB%E3%81%AE%E7%89%A9%E8%AA%9E" />
         <pubDate>2022-03-16 07:05: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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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잇슨보우시</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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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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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02:12: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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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모타로</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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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02:12: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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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시와카마루</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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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02:12: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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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3 </title>
         <author>cord2001030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009333</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타 애니메이션과 같이 인간의 욕심과 탐욕, 그라고 그로인해 무시되는 개인의 행복을 담고 있다. 가구야 공주가 추구했던 삶과 그에 대립하는 사회적 모순은 가구야 공주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가구야 공주이야기는 타케토리 모노가타리에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래동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현대인의 가치관에서 바라 보았을 때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가치관이 구시대적인 악습 혹은 가치관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로인해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시청하며 제작 당시의 시대상과 가치관을 수정하고 현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디즈니' 혹은 '픽사'의 애니메이션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당시의 가치관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또한 과거의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나 ,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고 달나라로 도망치는 결말을 조금이나마 현재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수정하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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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0:33: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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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3</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104678</link>
         <description><![CDATA[<div>&lt;가구야공주 이야기&gt;</div><div>대나무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남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주변에 변화가 생기면 아이가 웃으며 커졌다. 점점 그 아이는 천진난만한 아기에서 소녀가 되고 또 성숙하고 마음대로 하지 못한 여성이 되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히메가 성장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다.</div><div>&nbsp;</div><div>할아버지가 히메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믿어서 공주님으로 키워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히메를 위해서 궁전을 세우고 이름을 지어주신 분도 모시고 예절도 가르쳐준다. 가구야 히메의 미모, 재능과 신비로움으로 사람들은 만나고 싶어 하고 귀족과 황제까지도 가구야 히메를 장가들러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진심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지도 못한다. 가구야 히메는 만들어낸 이미지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그녀는 가구야 히메가 되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는 자기가 대나무순 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가구야 히메로 되는 것은 그녀에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어버렸다. 마지막에 히메가 “아버님께서 원하신 그 행복이 저에겐 괴로웠어요”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하는 행동은 현재 많은 부모와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사랑이란 명의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요한다. 점점 부모와 아이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보았다. 부모과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르다. “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행복할 것이다.” 히메에게 생명의 가치는 살아있다는 뿐이다.</div><div>&nbsp;</div><div>이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브리의 작화체와 너무나 다르다. 일본 고전적이다. 다른 지브리 작품과 비교하면 그렇게 섬세히지 않지만 시각적으로 보기에 아주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 나온 음악도 그렇고 좀 평범한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재미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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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1:41: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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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210988 &lt;가구야공주 이야기&gt; </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181484</link>
         <description><![CDATA[<div>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사랑했지만, 딸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br>자연에서 태어난 가구야 공주를 수도에서 키우기 위해 본인도 자연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수도에 와, 자신의 삶과 맞지도 않는 생활을 하며 공주를 데리러 온 천인들을 사람들을 이용하여 막는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구야 공주를 이용하였다는 생각만 든다.<br><br>행복은 남이 규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규정하는 것이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복이 곧 가구야 공주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br>'찬란히 빛난다'라는 뜻을 가진 가구야 공주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남들 눈에는 가구야 공주가 찬란히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것은 그녀 스스로 빛을 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들이 그녀에게 빛이 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nbsp;<br><br>가구야공주는 자연 속에서 생활 할 때 혹은 자연 속 무언가와 마주칠 때만 웃음을 보였다. 이후, 도시로 올라와서는 몇번의 웃음을 제외하고는 일절 스스로 웃은 적이 없었다. 도시에서의 그녀의 삶은 수동적인 삶 그 자체였으며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수동적인 삶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nbsp;<br><br>또한 가구야 공주가 할아버지가 만든 대나무 새장 속에 갇힌 새를 풀어주는 장면을 통해 그녀 또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의 새장 속에 갇힌 인물이며 자신 또한 그 새처럼 가족이라는 유대감과 도시라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br><br>마지막으로 스테마루는 진정 가구야 공주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가구야 공주와의 재회 후 그는 자신의 아이와 아내를 버리고 가구야 공주를 만나려고 한다. 과연 그것이 가구야 공주를 사랑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방법이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nbsp;<br>만약, 그가 가구야 공주가 고귀한 아가씨가 되기 이전, 시골 소녀였을 때부터 좋아했다면 그는 결혼하기 이전에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시골의 가구야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도성에서 고귀한 아가씨로 변한 그녀를 보자, 아내와 아기를 버리려고 했다. 그는 그저 가구야 공주가 아닌, 그녀가 가진 재산을 탐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br>&nbsp;<br>혹여 그가 가구야 공주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녀와 매일 만날 수 있기에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본래 가구야 공주는 달에서 온 천인이니 그녀가 그리울 때면 스테마루는 저녁에 달을 바라보면 된다. 달은 그녀와 그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달에서도 지구가 보이고, 지구에서도 달이 보이니...</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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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2:27: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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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19110118 유은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432028</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고<br></strong><br></div><div><br></div><div><br></div><div>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 전통 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불교 윤회를 기반으로 한 국내 애니메이션오세암도 종종 생각나며 국내 설화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비교하면서 감상했다.&nbsp;</div><div>가구야 공주가 대나무 새순 안에서 다른 아기들보다 작게 태어난 점이 눈여겨 볼만 하다. 국내 설화에서 박혁거세 혹은주몽 또한 자연을 빌려 태어난 인물들이지만 아기 답지 않은 큰 크기로 태어난 인물들이다. 이는 일본의 미 즉 작은 것을미로 생각하는 것을 이입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구야 공주는 크고난 이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혹은 주변 나라 왕자들이 청혼을 하기 위해 몰려오는 장면으로도 일본의 미가 작은 것을 추구한다는 걸로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nbsp;</div><div>전 수업에서 모노노케 히메 속 자연 경배를 보고 가구야 공주 안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유기성이 돋보였던 것 같다. 가구야 공주가 대나무 새순 안에서 태어난 것, 자연과 시골을 사랑하여 궁궐에서도 그 삶을 똑같이 살아가고 싶어한 점이 말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자연을 헤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벌을 주고자 했지만 가구야 공주는 윤회를 선택한다. 마지막에 불상이 가구야 공주를 데리러 온 것도 윤회을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구간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앞서 오세암을 언급했던 이유 또한 이런 윤회 속에 있다. 인간은 속세에서 죄를 짓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공통된 부분인 것 같다.&nbsp;</div><div>다소 극장에서 보기엔 지루한 면이 있어 흥행에 실패한 것 같지만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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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4:21: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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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가구야 공주 이야기 감상평 강영준</title>
         <author>dud904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433369</link>
         <description><![CDATA[<div>고전소설 《타케토리모노가타리》가 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로 각색되면서 부각된 가장 큰 차이는 카구야 공주의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일 것이다. 원전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던 카구야 공주의 어린 시절의 생활과 관계가 묘사되면서 카구야 공주의 캐릭터성이 확연해진다. 카구야는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자연과 함께, 시골의 친구와 함께 소소하게 지내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할아버지가 카구야 공주를 ‘고귀한 아가씨’로 키워야 한다면서 수도로 이사하면서 깨진다. 카구야는 수도로 올라온 뒤 받는 소위 ‘고귀한 아가씨’가 되기 위한 갖은 제약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그런 카구야의 마음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여성의 행복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한다. 카구야의 교육 담당인 사가미도 카구야에게 ‘고귀한 아가씨’라는 프레임을 강요하며 그를 거부하는 카구야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div><div>이 작품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강조된다. 할아버지도 사가미도 무엇이 여성의, 카구야의 행복인지를 자신의 가치관에 의거하여 카구야가 그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들의 결정에 카구야의 의향은 반영되지 않는다. 카구야가 바랐던 것은 어린 시절처럼 자연과 함께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는데, 이를 자극한 것은 (원전에서는 비중이 별로 없었던)이시즈쿠리 황자 뿐이었다. 물론 그 또한 카구야를 꼬드기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캐릭터성이 확립된 할머니나, 원전과는 다른 카구야와 천황의 관계도 주목해 볼 만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특히 천황과의 관계가 변하면서, 카구야가 달로 떠나면서 천황에게 선물을 주는 장면도 삭제되었다. 이로 인해 카구야 공주는 수도로 온 뒤로는 정말 조금의 마음 기댈 곳조차 찾을 수 없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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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4:21: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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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가구야 공주 이야기 감상평 (2021110261 서가은)</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635057</link>
         <description><![CDATA[<div>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아이들이 보는 영화 아닌가, 영화가 꽤 길다고 생각했다. 처음 접하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라는 일본 전통 설화와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서 생소했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div><div>  이름처럼 빛이 나야 하는 가구야 공주는 할아버지의 욕심으로 빛이 나기는커녕 웃지도 않는다. 그 시대에서 말하는 여인의 모습을 하기 위해 외적인 모습부터 행동거지 하나하나 통제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공주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며, 공주에게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것들을 강요했다.</div><div>  가구야 공주가 꽃놀이 가려고 준비하면서 이에 칠했던 까만 것들을 닦아내며 지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수도로 온 뒤 잘 웃지 않았던 공주가 크게 웃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찾으러 가는 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흩날리는 꽃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공주는 더 이상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공주는 할아버지가 원하던 행복 때문에 불행했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그것 때문에 괴로웠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자연에서 소박하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공주에게 이러한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달을 불렀고, 결국 달로 돌아갔다.</div><div>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 이런저런 권유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행복은 스스로가 찾아가는 것이고, 나의 행복을 남이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도망갈 달이 없으니 사소한 것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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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5:50: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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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5784817</link>
         <description><![CDATA[<div>[카구야 공주 이야기]<br><br>&nbsp;이 영화는 유명한 일본 고전 설화인 [타케토리모노가타리] 를 배경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서, 본작의 내용을 큰 각색 없이 거의 유사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일본의 여러가지 고전 설화 중 [겐지모노가타리] 와 함께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축에 속하는 작품이니만큼, 일본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유명한 고전 소설의 각색 버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br>&nbsp;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들이 여럿 있다고 사료가 되는데, 첫번째 로는 '지브리스럽지 않은' 작화와 편집이 되겠다. 우리가 흔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지브리 특유의 그림체와 연출들이 본작에서는 크게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전래 동화책을 읽는 듯한 연하고 부드러운 그림체로,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정체성을 잘 살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는 대중적 히트에는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 되지만, 큰 이야기 흐름의 변화 없이 원작 설화를 충실히 재현해낸 부분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탄탄한 전달력을 나타낸 부분이라고 보여진다.<br>&nbsp;내용적인 부분에서 살펴보았을 때, 어느 정도 속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카구야 공주의 욕망과 그에 대비되는 할아버지의 세속적인 행동들과 태도들은 원작 설화의 탈체제성과 삶에 대한 고찰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며, '삶과 죽음' 이라는 큰 틀 안에서의 이야기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어느 정도 각색이 된 스토리 상의 내용들에서 나타나듯, 인물들의 행동과 말들이 카구야 공주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흐름을 드러냄과 동시에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자 하는 제작자의 의도가 보이는 부분이라고도&nbsp; 할 수 있겠다.<br> 고전 설화를 영화로 재현해내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고 보여진다. 어린이들을 타겟으로 한 동화화된 우화로 표현되기도 하고, 스토리를 많이 비틀어 재미와 색다른 흐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주제 의식을 강조함과 동시에 원작 설화의 흐름을 그대로 살린 이 작품의 표현 방법은 지브리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뉘앙스의 작품을 선보임과 동시에, 비록 대중들의 큰 선택을 받지는 못한 작품임에도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여진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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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1 17:01: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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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7110271 김영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감상평</title>
         <author>rladud010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602612</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div><div>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본 작품은 다소 생소한 작품이었다. 특히 처음에는 이야기부터 소재, 작화까지 기존의 지브리가 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이것이 지브리 작품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해당 작품의 동양화와 같은 작화와 고전의 재해석은 흥미로웠다. 해당 작품은 일본의 고전인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단순히 고전의 영상화나, 일본 전통 문화의 시각화에만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바로 ‘행복’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원작과의 차별화를 노린다.&nbsp;</div><div>&nbsp; &nbsp;</div><div>그렇다면 이러한 차별점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 우선 본래는 등장하지 않던 카구야 공주의 성장 과정이 묘사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갓난아기 시절부터 수도에 가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약 30분에 걸쳐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자유로웠던 하층민의 삶을 살면서 그녀가 무엇에서 행복을 느꼈는지에 대해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게끔 한다. 특히,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서는 어떤 것이 그녀에게 가치를 가지는지를 직접 말해준다. 모두 자연물과 사람의 정과 같이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때 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div><div>&nbsp; &nbsp;</div><div>그 이후 수도에서 귀족 여성의 삶을 살게 된 그녀가 불행해지는 과정에 대해 천천히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유년기의 자세한 설명 없이 귀족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일반 평민 소녀가 귀족 여성이 되어가기 위해 웃음을 잃고, 본래의 얼굴을 잃고 자신이 하기 싫은 화장을 하게 되는 등의 행위 속에서 천진난만했던 소녀는 사라지고, 새장에 갇힌 불행한 여성이 되어간다. 관례식 때 꾼 꿈, 과거 소박했던 집을 흉내 낸 창고와 정원 등을 통해 그녀가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더 부각했다. 결혼에 대해서 역시 그들이 자신을 진심으로써 대하는 것이 아닌 그저 미를 바라면서 그들이 가져오려는 보물처럼 전시하고 싶을 뿐이라며 결혼을 거절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추가한다. 그녀는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가구야 공주가 달로 떠나기 전 고향으로 돌아가 스테마루의 만남이 꿈으로 끝났듯이 이미 한번 잃은 과거는 되찾을 수 없음을 말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nbsp;</div><div>&nbsp; &nbsp;</div><div>그녀가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일본인 여성이 고된 노동이나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살 수 있게끔 고위귀족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속물적인 근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시대적 한계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가식과 통제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부유한 수도의 삶이 아닌 소박하면서도 자유로웠던 평민의 삶이었음을 보면 행복은 결국 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정하는 것이 작품의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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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2:57: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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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4110282 윤녕후 가구야 공주 이야기</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717324</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lt;타케토리모노가타리&gt;를 기반으로 약간의 각색을 더하여 만든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내용 외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전통 설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섬세한 붓터치를 활용한 듯한 그림체가 인상적이다.&nbsp;<br> 전체적인 스토리는 대나무와 죽순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어느날 죽순에서 태어난 아이가 하늘의 선물처럼 내려온다. 이들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을 금지옥엽 사랑을 주며 기르고, '타케노코'는 무럭무럭 자라 시골 마을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고귀한 공주'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러 시골 마을을 떠나게 되고 행복하지 않은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lt;가구야 공주 이야기&gt;는 여러가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골 소녀는 소박하게 시골 마을에서 자연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삶을 꿈꿨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구야 공주를 통해 출세를 꿈꾸었고 이는 공주의 행복한 삶을 망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남에게 행복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해석해보면 아버지와 가구야 공주의 갈등을 사회와 성장에 대한 비유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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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4:24: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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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9 가구야 공주 이야기 </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787174</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 가구야 공주를 보면 영화 전체가 수묵풍있다. 화면 스타일이 너무 예쁘다.가구야 공주는 눈썹을 뽑지 않고, 검은 이를 염색하지 않으며, 구애받지 않고 웃는 자유를 추구했다.아버지에 대한 행복은 거부하지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고귀한 공주가 되도록 노력했다. 기쁨을 잃었지만, 착함을 버리지 않았다. 뒤에 가면 가구야 공주는 마음속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그녀를 떠나면 더 이상 많은 근심이 생기지 않기 때문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인간세상에는 근심뿐 아니라 가족애도 있고 자연의 근심 걱정 없는 소박한 삶이 미련을 남겼기 때문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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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5:16: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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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30009</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795426</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공주 이야기〉를 이번 수업에서 언급됐던 ‘일본의 미’라는 관점에 주목하면서 감상해봤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헤이안 시대의 분위기가 나타난 관습, 옷차림, 노래들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도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특이한 화장법, 「白塗り(시로누리)」와「引き眉(히키마유)」가 돋보였다.&nbsp;</div><div>&nbsp;</div><div>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미’와 이 작품의 원작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가 만들어진 시기, 헤이안 세대의 ‘미’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걸로 보인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일본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平安美人(헤이안 미인)」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외꺼풀이나 얼굴이 넙데데한 사람들이 자신을 비하할 때 장난식으로 쓰는 표현이며「私典型的な平安美人だ…(나 전형적인 ‘헤이안 미인’이야…) 」「平安時代に生まれてたらモテてたのに…(헤이안 시대에 태어났으면 인기많았을 땐데…)」라는 식으로 많이 쓰인다.&nbsp;</div><div>&nbsp;</div><div>이처럼 오늘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미’의 기준과 헤이안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미’의 기준이 정반대인 걸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그 당시는 「白塗り(시로누리)」와「引き眉(히키마유)」같은 특이한 화장법이 아름답다고 생각되었을까? 헤이안 시대의 ‘미’의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div><div>&nbsp;</div><div>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먼저「白塗り(시로누리)」와「引き眉(히키마유)」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nbsp;</div><div>우선 얼굴 전체를 하얗게 화장하는「白塗り(시로누리)」는 원래 조명이 어두운 궁궐 내부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서서히 하양 얼굴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어 ‘미’의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nbsp;</div><div>이러한「白塗り(시로누리)」는 입을 크게 열리거나 표정이 풍부하면 아주 쉽게 무너진다고 한다. 그 당시의 여성들은 화장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표정을 안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서히 표정을 숨기게 되었다. 이러한 ‘표정을 숨기는 것’자체가 ‘미’라고 생각하게 되어 헤이안 시대를 사는 여성들은 자꾸 얼굴을 숨기면서 일상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작품안에 등장하는 궁궐의 여성들이 표정이 거의 없는 걸로 보이거나 가구야 공주를 교욱하는 ‘사가미’가 “공주는 그렇게 크게 웃지 않는다”고 꾸짖는 부분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nbsp;</div><div>&nbsp;</div><div>또한 눈썹을 다 뽑고 먹으로 그리는「引き眉(히키마유)」도 위와 똑같다. 눈썹은 얼굴 안에서도 특히 표정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 뽑고 표정이&nbsp; &nbsp; &nbsp; 파악을 어려워지게 함으로써 헤이안 시대의 여성들은 ‘표정을 숨기는 미’를 실현했다고 한다.</div><div>&nbsp;</div><div>이러한 ‘숨긴다’는 관점에 주목하면서 다시 영화를 감상하면 작품(의 궁궐생활)내내 계속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명의 왕자가 찾아왔을 때 가구야 공주는 절대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궁궐안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은 쥘부채를 들고 다니며 얼굴을 숨긴다. 또 가구야 공주들이 꽃구경을 갔을 때, 차 안에서 밖의 상황을 확인할 때도 가구야공주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하녀가 공주를 숨기면서 밖을 보기도 한다. &nbsp;</div><div>&nbsp;</div><div>이처럼 헤이안 시대에 ‘숨기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독특한 풍습, 미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가구야공주 이야기〉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해할 수가 있다. 동시대의 쓰인 다른 일본의 고전에도 이러한 ‘숨기는 미’가 등장하는가에 주목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nbsp;</div><div>또한 일본인들이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고 본심을 숨긴다는 점도 이러한 ‘숨기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일본 특유의 사상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본적인 정소가 아직도 가장 남기고 있는 곳이며 꽤 오랫동안 일본의 미야코(수도)였던 곳, 쿄토 사람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적인 내용을 말하는 성격이 강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고전 작품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상생활 속에서도&nbsp; ‘숨기는 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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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5:22:13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795426</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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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9 김송환 (가구야 히메) 감상평</title>
         <author>songkim158a</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821317</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에는 :가구야 히메"라는 작품을 수업을 통해 감상하게 되었다. 이번 수업에서 언급된 듯이 일본의 당시의 시대상의 미의 기준에 대해 작품을 보는 내내 많은 생각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nbsp;<br><br>작중 가장 특이하고 신기하게 와닿았던 것은 가구야 공주가 자연, 즉, 시골을 벗어나 아버지의 바램대로 도시로 나와 공주가 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헤이안 시대의 화장법이 너무나도 특이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nbsp;<br><br>그녀가 공주가 되는 과정 속에서 "시로누리"라고 하는 얼굴을 하얗게 덕칠하는 화장을 한다. 이는 당시 헤이안 시대에서 어두운 곳에서도 얼굴이 밝게 잘 보이도록 하기위함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괴기하다는 생각을 갖지만, 당시에는 이런 화장법이 미의 기준이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그녀가 눈썹을 다 뽑고 먹으로 눈썹을 칠하는 "히키마유"라는 화장 또한 당시에 얼굴 표정을 숨기는 것이 미의 기준이었다. 심지어 이까지 검게 먹으로 칠하는 것을 보고 미의 기준이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은 얼핏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nbsp;<br><br>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헤이안 시대의 일본의 미의 기준이 현재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이나 분위기 등을 가구야 공주의 성격과 더불어 더욱 강하게 와 닿을 수 있었다. 그녀는 본래 천지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 존재로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녀는 시골에서 노부부에 손에 길러지게 된다. 그녀는 자연속에서 시골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행복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노부부 아버지가 생각한 그녀에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수도로 나아가 공주가 되어 높으신 분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가구야 공주 또한 도시로 나아가 시골 소녀에서 공주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게 된다. 하지만 이후부터 그녀는 점차 활기를 잃어가며 사실상 노부부, 아버지의 행복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노부부가 진정으로 그녀를 키워주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는 것은 알지만 당시에 시대상을 본다며 아버지가 생각하는 행복이 당연한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당시의 살던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행복의 척도 또한 정해져 있다는 억압적이고 제한적이었다고 느꼇다.&nbsp;<br><br>결국 특이한 화장법이 당시의 미의 기준이었으며, 또는 외출을 하더라도 얼굴을 가리는 등의 행동들은 표정과 같은 모든 감정을 숨기는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는 본래 가구야 공주가 시골에서 지내던 밝고 희망찬 모습과 상반되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는 결국 당시의 시대상이 억압되고 강압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nbsp;<br><br>이번 가구야 공주를 통해 일본의 미의 기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시의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확실하게 와닿았던 것 같아 좋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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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5:43: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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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195 가구야 공주의 이야기</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839396</link>
         <description><![CDATA[<div>원작을 읽어본 적이 없어 처음 &lt;가구야 공주의 이야기&gt; 이 영화를 봤을 때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가구야 공주의 비극은 누가 빚어낸 것안가.대나무에서 얻은 돈과 옷은 도대체 어떤 계획이 있는가?할아범이 이해한 것처럼 대나무가 공주가 되기를 바랐는가?가구야 공주의 첫 탈출은 환상인가,아니면 현실인가?가구야 공주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성장 속도가 왜 다른가.등등의 일련의 문제들이 나를 괴롭혔다.<br>다카하타 이사오의 이야기에서 대나무가 아닌 죽순에서 온 가구야 공주는 처음부터 묘령의 소녀의 모습으로 태어나 놀라운 성장속도를 암시하며 월궁에서 인간으로 좌천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서사를 더욱 합리적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또한 대나무 나무꾼인 할아범 미야쓰코가 살고 있는 깊은 산속 환경과 이웃에 대한 묘사, 가구야 공주가 어떻게 신통하게 자랐는지에 대한 묘사, 금을 얻은 후 할아범의 관념이 바뀐 묘사, 대저택에 살면서 가족에 대한 묘사 등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원래 이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디테일을 조금 더 풍만하게 만들어 가구야 공주를 차가운 동화의 주인공이 아닌 피와 살을 지닌 개성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br>영화를 보면서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은 영화 중 반복되는 동요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살며 어린 친구들과 놀던 그 경쾌하고 생명력 넘치는 가락과 혼자 달을 향해 읊조리며 애잔한 반음이 섞여 서글픈 가락이었다.변조 버전인 이 동요를 기억하고,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월궁에서 듣고도 지구에 갔던 천녀가 노래에 대한 동경을 갖고 왜 이 노래가 '비애'였는지 체험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한다.그러나 한 번 세상을 지나면서 천녀의 슬픔은 이런 것들의 선악 때문이 아니라 버리려 하지 않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타인과의 '인정'임을 깨달았다.<br>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죄와 벌'이라고 적혀 있는데, 가구야 공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세상을 폄하당했고, 이 '죄'는 그녀가 인간에 대한 있을 수 안 될 동경과 동경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월궁은 휘야희를 인간으로 폄하해 벌을 받게 된다.영화를 통해 가구야 공주의 진짜 목적은 새, 벌레, 짐승, 풀, 나무, 꽃처럼 자유롭게 자라기 위한 것이며, 월궁은 당연히 이에 대한 벌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할아범에게 황금과 옷감을 주고 천계식으로 그녀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엔딩에 대한 눈물은 사실 가구야 공주가 어렸을 때 노래하던 눈물에 호응하는 부분이 있다.왜 그런지도 모르는데 막상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다.결말에 대해서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휘야가 하늘의 사람들을 따라 달로 돌아오는 동안, 색채가 조금씩 희미해져서, 마지막에는 거의 다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구는 항상 색채로 변해 있다.그가 어렴풋이 돌아본 땅바닥 사람들은 모두 그녀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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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5:59: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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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카구야 공주 이야기 감상평 2020110355 서혜연</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867063</link>
         <description><![CDATA[<div>`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에서 오래된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는 지브리 특유의 작풍이 아닌, 동양풍의 뭔가 수묵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새로운 작풍으로 작업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영화의 전반적인 면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카구야 공주 이야기라는 영화의 시대와도 카구야 공주 이야기라는 내용과도 잘 맞는 작풍이라고 생각되었다.</div><div>카구야 공주는 우리나라의 신화들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별한 아이였다. 대나무 순에서 나온 아주 작은 아이. 이때 여기서 일본이 생각하는 작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일본으로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은 ‘작다’였고, 또한 일본에 미니어처 같은 상품이 많은 것도 뭔가 작음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공주의 아빠는 공주를 키운 뒤로 대나무에서 금이 나온다든지 옷감이 나온다든지 하는 계속해서 신기한 일이 생기는데, 이에 공주가 특별한 아이이니 이에 맞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 좋은 옷, 좋은 집에서 살게 하는 등 노력한다. 그러나 아빠가 원하는 고귀한 공주가 될수록 공주는 미소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주는 그 불행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네, 그래요. 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공주가 한 이 말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또한 아빠가 주려 했던 행복이 결국 공주에게는 마지막까지 행복하지 못한 불행이었다는 게, 결국에는 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div><div>비록 흥행은 실패한 영화지만, 우리들의 삶처럼 아름답지만 모든 부분이 아름답지는 않은 그런 이야기고 영화였던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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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6:24: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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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77 가구야 공주 이야기</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898616</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 고전 설화 타케토리 모노가타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이야기라 익숙하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에는 그냥 이런 이야기구나 하고 가볍게 넘겼던 것과 달리 이번에 다시 본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안타깝게 다가왔다. 나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영화를 감상했는데 그 첫 번째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추상적이어서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하지만 영화 속 할아버지가 가구야 공주에게 강요하는 아름다움은 사회적인 기준에만 맞춘 것이며, 가구야 공주의 바램과는 전혀 반대 방향의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체념하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며, 나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자유롭게 뛰놀던 어린 시절과 달리 점점 빛을 잃어간다고 느껴졌다.&nbsp;</div><div>두 번째 관점은 가구야 공주가 바라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에 관한 것이다. 가구야 공주는 지구를 동경했고, 그 벌로 지구에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표현했다. 답답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예쁜 의복들과 화장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연과 어울어져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었지만 그녀 자신도 스스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결국 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대나무에서 가구야 공주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그녀가 하늘이 내려준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골이 아닌, 수도에서 귀하게 키워야 하고 귀공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무조건 가구야 공주를 행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구야 공주에게는 독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그토록 동경했던 지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달의 사람으로서 지구를 동경한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우리는 대부분 사회에서 좋다고 인식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삶에 지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그런 내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름다운 헤이안 시대의 의복과 건물 양식들, 시골 풍경들이 드러나는 부드럽고 따뜻한 작화 역시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지만 다케토리 모노가타리를 각색해 삶의 철학을 담아낸 이야기 또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한다는 점에서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보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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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6:52: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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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49 소유란 - 가구야 공주 이야기</title>
         <author>happycow2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926274</link>
         <description><![CDATA[<div>&lt;가구야 공주 이야기&gt;는 당시 일본 시대상의 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삶과 연결 지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div><div>&nbsp;</div><div>대나무숲에서 가구야 공주를 처음 만나고 그녀를 키운 아버지는 늘 공주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왔지만 그가 생각한 ‘행복’은 그저 부와 명예와 권력이었다. 황제 또한 억지로 공주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고 자신과 혼인하는 것이 공주에게 가장 큰 행복일 것이라 말한다. 모두가 공주의 행복을 자기 멋대로 정의하고 자신이 규정한 행복을 공주에게 적용하려 한다. 그러고는 공주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하거나 너무하다고 비난한다. 사실은 공주를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그 모든 행위를 “공주를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한다.</div><div>&nbsp;</div><div>가구야 공주는 수도에서 살게 된 이후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거짓이며 그러한 거짓된 행복을 받아들일 바에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매일 밤 정자에서 달을 바라본 것도, 달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엇 때문에 이 땅에 내려왔는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르던 노랫말처럼 공주는 공주가 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일 뿐이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는데 주변인들은 그것을 ‘행복’이라는 명목 아래서 가로막았다.</div><div>&nbsp;</div><div>결국 가구야 공주는 자신이 처음 땅에 내려온 대나무숲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재회한 친구 스테마루는 공주가 늘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이자 돌아가고 싶어했던 ‘자신의 땅’이었다. 공주는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혼자 온 힘을 다해 뛰어서 도망쳤고, 스테마루와 함께 자유로이 날며 ‘진정한 행복’을 되찾았다. 그녀는 끝내 누구의 것도 되지 않고 달의 마중을 받으며 태초로 돌아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다시 돌아온다”는 노랫말처럼 사계가 순환하는 것이 운명이고 우리는 모두 그 운명 속에서 흘러간다. 모든 것은 윤회를 겪으며 슬픔도 고민도 없이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div><div>&nbsp;</div><div>가구야 공주는 인간이 억압하려 한 자연과 자유, 그리고 사랑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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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7:15: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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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lt;가구야 공주 이야기&gt;</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926461</link>
         <description><![CDATA[<div>&nbsp;내용과 관련된 감상 전에 그림체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보려 한다. 이전에도 이 작품을 감상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의 지브리 작품과는 다른 그림체로 인해 나름의 진입 장벽이 생겨 감상하지 못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작품을 다 감상한 후에는 이 그림체가 작품의 신의 한 수 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련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체 덕분에 가구야 공주가 땅에서 살아가며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br><br>&nbsp;작품을 감상하면서 행복이란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구야 공주가 대나무에서 나오고 나중에 다른 대나무에서 금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대나무순'이라 불린 가구야 공주까지 셋은 함께하는 것 자체,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었다. 그러나 금을 얻은 후 딸을 수도에서 고귀한 아가씨로 만드는 것이 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돈을 쓰는 것이라 마음대로 생각한 아버지로 인해 결국 가구야 공주는 달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작품의 배경 시대엔 아버지처럼 신분 높은 사람과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nbsp; 처음 수도에 가구야 공주를 데려가려고 한 아버지의 마음은 당연히 딸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가구야 공주도 대나무 숲을 떠나올 때는 슬펐지만 큰 저택에서 산다는 것을 안 직후에는 잠시 행복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후에 아버지는 딸로 인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선물 공세와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는 듯한 기분으로 딸의 행복이라는 명목 아래에 자신의 실리를 위해 더 행동하는 듯 했다.<br>&nbsp;<em>'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지 지금까지 공주의 행복만을 바라며 소중히 키워왔건만'<br></em>마지막 쯤 아버지의 이런 말은 너무 이기적인 말로 들렸다. 처음의 마음가짐과 과정이 무엇이었든 결과적으로 공주는 이미 불행해졌기 때문이다.&nbsp;<br><br>&nbsp;'고귀한 아가씨'가 되는 과정이 가구야 공주를 더 힘들 게 했을 것이다. 가구야 공주는 누군가의 여자가 되면 한 인간보다는 예쁜 소유물 정도로 취급 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nbsp;<br>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사회에서 요구되는 행복의 기준을 따라가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나의 인생을 찾고 행복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작품에서 말해주는 듯 했다. &nbsp;<br>&nbsp;&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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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7:15: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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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구야 공주를 보고 2020110263 정은채</title>
         <author>spring_c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973008</link>
         <description><![CDATA[<div>지브리 애니메이션과 너무나 다른 작화였고, 애니메이션보다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했다. 피아노 선율 대신 거문고 소리와 다른 작품들보다는 더 많이 자연의 소리를 이용한 것이 동화처럼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어서 오히려 더 흥미있었다. 사실 늘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이라고 하면 의심없이 늘 그 결말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새드엔딩이면 이렇게 했으면 해피엔딩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조건들도 스스로 생각해봤던 것 같다. 하지만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다 보았을 때 그녀가 그 숲에서 타케모리 영감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흔히 쓰는 말로 그녀에게 타케모리 영감은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가 아니였을까 싶다.&nbsp;<br><br></div><div>노부부가 가구야공주를 처음 봤을 때 울창한 대나무 숲과 그녀가 처음 걷던 날 스테마루 동생들에게 대나무순이라고 불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름보다 더 소중했을 그 별명 그리고 같이 꿩을 잡거나 머루를 따서 먹는 모습들을 보면서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사랑과 친구들의 우정을 굉장히 단순하지만 진심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세심하게 표현한 것 같다고 느꼈다. 부모님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행복한 모습들만 나오다가 후반에 혼자 고립되고, 자신의 마음을 닫는 카구야공주를 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아렸다. 빛나는 대나무에서 금을 얻은 타케모리 영감은 공주를 공주답게 키워야한다고 말하며 그의 가족들을 수도로 데려갔고, 카구야 공주는 소박했던 삶을 모두 지워야만 했다. 그녀의 의견이나 의지는 완전히 묵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도에 오면서 그녀의 미모는 수도의 모든 사람이 알만큼 칭송받았고 귀족이나 황자 더 나아가 황제에게까지 구애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사라졌고, 오직 결혼을 통해 예쁜 인형처럼 존재하면서 신분상승이나,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야하는 존재로 살아나가야 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지만,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그린 부분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br><br></div><div>가구야공주는 달에서 온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점점 자랐다. 스테마루가 가구야에게 ‘난 네가 지금처럼 자꾸자꾸 커져서 언젠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 같아.’ 라는 말을 한다. 가구야공주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복선으로 이어지는 말이다. 가구야는 결국 달에 돌아가게 되는데 그 전에 그녀는 스테마루를 만나러 간다. 잠깐이지만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녀는 달로 돌아가야만 했고 스테마루는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다. 가구야는 스테마루와 함께였다면 달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결국 달로 돌아간다. 그녀가 달로 돌아갈 때 부처가 등장한 것이 신선했다.&nbsp;<br><br></div><div>또,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의 별명이나, 타케모리 영감의 이름에서 볼 수 있다 싶이 자연을 활용한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현대 일본인들 성을 보면 나무 등 자연을 표방한 성이 많은 것 같다. 일본인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들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같다. 특히 영화에서도 자연의 미를 강조했다고 느꼈다. 그녀가 태어난 대나무 숲과 즐겨놀던 산 등 일본의 주요 관광지인 교토의 아라시야마 등 일본의 자연을 직접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iv>.</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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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7:48: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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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내 자유롭지 못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 2020110255 이세영</title>
         <author>jennyda10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6989427</link>
         <description><![CDATA[<div>애니메이션의 작화나 연출은 잔잔하고 포근했지만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은 작품이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불쾌함 반, 찝찝함이 반, 그리고 결국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었던 가구야의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을 끝으로 감상을 마쳤다. 대나무에서 태어난 가구야는 마을 사람들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산속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녀가 지상에서 유일하게 진정으로 웃을 수 있었던 때였으며 가구야가 지상으로 내려온 이유 또한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구야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파악한 미야츠코는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명목을 가지고 수도로 거주지를 옮김과 동시에 가구야를 철저히 속박했다. 바깥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던 아이를 꼼짝없이 가두는 거에 모자라 고귀한 귀족 아가씨로 키우기 위한 전담 선생까지 붙여놓는다. 그녀에게 청혼을 걸어온 자들은 하나같이 진심이 결여된 욕망에 휩싸여져 있었으며 애초에 가구야는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겉만 번지르르한 감언이설에 불과했으나 일순 가구야의 염원을 자극한 이시즈쿠리 황자에게는 처가 있었고 손수 제비집을 뒤지다가 사망했다는 중납언의 소식은 간신히 붙들고 있던 그녀의 정신을 무너지게 했다. 가구야 공주의 불행은 황제가 그녀에게 강제로 접촉했을 때 극에 치달았는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이를 빌미로 가구야는 자신이 달에서 온 존재라는 걸 깨달았고 필연적으로 그곳에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br><br></div><div>여기서 ‘달’은 과연 어떤 곳인지에 대한 논의가 빠질 수 없다. 작중에서 ‘저는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났어요.’라는 가구야의 대사가 등장한다. 가구야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나무에서 태어났다. 그 말인 즉 달에서의 가구야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삶의 극명한 반대는 죽음인데, 사(死)를 관장하는 저승이라고 하기에는 달로부터 내려온 존재들의 이미지가 이질적이다. 따뜻한 색감과 귀를 두드리는 악기음은 오히려 생동감을 전해준다. 가구야를 지키던 병사들이 쏜 화살은 생명을 지닌 꽃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니 혼란스러움이 도진다. 부처가 있는 걸로 보아 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불교는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윤회’는 인간이 죽어도 그 업에 따라 육도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불교 교리이다. 윤회 속 삶과 죽음의 경계와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둘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는 작품 내에서 유추해본, ‘달’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의미와 비슷하다. 그곳은 삶도, 죽음도 없는 ‘무(無)’의 세계이지 않을까.<br><br></div><div>따라서 가구야는 삶을 동경함과 동시에 열망했다. 인간들이 부른 노래 가사 속의 자연적 존재들처럼 살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에 의해 살아졌다.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행한 삶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자는 그녀를 거둬 키워준 미야츠코였다. 가구야가 달에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직접적인 이유 또한 황제와의 혼담을 부추긴 미야츠코 때문이었다. 그를 탓하고 증오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가구야는 자신이 귀공자들과의 혼인을 거절해 그가 벼슬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이처럼 가구야는 인간을 사랑했지만 인간에 의해 망가졌다. 대나무에서 태어난 달의 존재인 가구야가 자연을 상징한다고 가정한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수 있을 것이다.<br><br></div><div>가구야는 짧았던 생을 남에게 휘둘리며 살았으며, 지상에서의 최후도 본인의 의지에 따라 택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 달로 끌려가게 된다. 모노가타리의 ‘모노’는 ‘인간의 운명’ 또는 ‘과거나 현재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뜻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보아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작인 ‘타케토노모노가타리’속 ‘모노’는 전자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불행의 마침표가 그녀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팠기에 해당 작품을 닫힌 새드 엔딩으로 여겼다. 하지만 가만히 되새겨 보니 마지막에 날개 옷을 입고 기억을 잃은 가구야가 눈물을 단 채 지구를 돌아보는 연출이 떠올랐다. 이는 그녀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불교의 윤회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가구야는 언젠가 다시 지상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럴 시에는, 부디 그녀 스스로의 뜻으로 삶을 가득 채웠으면 하는 바람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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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8:00: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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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66 가구야 공주의 죄와 벌</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13900</link>
         <description><![CDATA[<div>2020110266 고가연 가구야 공주의 죄와 벌<br><br>일본인들이 사람과 사물, 두 가지를 모노로 통칭하는 이유는 사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믿는 일본인들의 애니미즘 성향이라고 한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 놓여졌을 때 마음에 따라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운명을 뜻한다.</div><div>&nbsp; &nbsp;</div><div>타케토리모노가타리에서의 모노 또한 개인적으로 운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nbsp;</div><div>해당 영화의 캐치프레이즈 또한 ‘공주가 저지른 죄와 벌’이다. 캐치프레이즈를 본 후 영화를 감상했을 때 공주가 저지른 죄와 그에 따라 받은 벌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진 않았으나 생각하기에 가구야 공주의 죄는 부여 받은 달에서의 운명을 거스르려 한 것이고, 받은 벌은 달로 다시 돌아갔을 때 인간 세상에서의 기억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인간 세계에서의 인생은 가구야 공주가 달에서 들었던 노래처럼 평화롭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순탄하게 흘러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의 생각과는 반대였으며, 그녀는 불행해졌고, 이는 운명과 역행하는 선택을 한 그녀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한다.</div><div>&nbsp; &nbsp;</div><div>일본 영화 또는 드라마 등 콘텐츠를 보며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주인공들이 운명에 순응한다는 점이다. 국내 영화 및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표현하는 주된 모습은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모습인데, 일본에서 그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고와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사회적 기조처럼 가구야 공주 또한 그 운명을 거스르려 했기에 죄를 지은 것이고, 벌을 받은 것이다. 보통 자기의 인생은 자력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보통의 관념과는 구분되는, 일본에서의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고찰할 수 있었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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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8:18: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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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50 가구야공주 이야기 감상평</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63258</link>
         <description><![CDATA[<div>&nbsp;애니메이션 &lt;가구야공주 이야기&gt;의 포스터를 보면, "공주가 지은 죄와 벌"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다 보고 나서 생겨난 것은, '가구야공주의 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가구야공주는 노부부에게 거둬들여져, 조금 말괄량이긴 하지만 착하고 예쁜 아이로 성장했다. 그녀가 사가미의 교육에 조금은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할아버지의 일방적 믿음과 욕심으로 맞지 않는 수도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이었고, 얼토당토않은 혼인 조건을 내세운 것은, 원치 않는 구혼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중 이소노카미가 제비집을 뒤지다 죽은 것도 가구야공주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노부부의 품에 들어와 달로 돌아갈 때까지 명백히 '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br><br></div><div>&nbsp;하지만 이야기에서 가구야공주만이 지닌 특이점인 '달에서 온 천인이라는 신분'을 생각해보고, 만약 하늘의 고귀한 신분으로서 지구라는 환경에 궁금증을 갖고 내려온 것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지구에서 겪은 그녀의 불행을 '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신화를 함께 보면, 이자나기 신이 이자나미를 데리고 나오려 발을 디딘 저승이라는 '다른' 세계,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씻어내야 했던 '더러움'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구야공주도, 다른 세계인 지구를 탐내다 '더러움'을 묻힌 죄로 불행이라는 벌을 받았고, 결국 지구에서의 '더러움'의 기억을 모두 잊고 원래 있어야할 곳인 달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업보를 끝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br><br></div><div>&nbsp;이 해석을 통해 보면, 가구야공주의 죄는 곧, 본인이 의도치 않았을지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주위의 인간들을 비일상으로 끌어들여 질서를 문란하게 한 죄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곧 일본인의 문화와도 연결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인은 본인의 영역을 중시하고 내 선과 남의 선을 확실히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선악 또는 이외의 기준을 떠나, '내 자리 혹은 할 일'을 우선으로 보고, 위에서의 명령이나 위치상의 책임을 순종적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왔다.<br><br></div><div>&nbsp;본 애니메이션의 원작은 가장 오래된 동화로 알려진 타케토리모노가타리로, 단순히 보면 그저 옛 소설문학으로 볼 수 있지만, 다각적으로 생각하면 실제 일본 문화의 뿌리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본 작품에 더 몰입하며 더 가치를 부여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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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8:51: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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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카구야공주의 문제해결방식과 일본의 여성 억압적 사회경향을 통해 해석한 카구야 공주</title>
         <author>tinytedkim</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72096</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div><div>카구야공주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기반으로 제작된 지브리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예전부터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좋아하던 나에겐 오랜만에 색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 할 기회가 생긴 샘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일본의 여성을 대상으로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에 관한 이야기이다.&nbsp;</div><div>일본은 과거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성기숭배사상과 특이할 정도로 노골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이 가져야 할 미적 기준과 여성이 일종의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서 다루어져왔다. 물론 일본도 여성위주로 사회가 돌아갈 기회가 분명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텐노우가 여성이 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켄 덴노(718~770)는 여성이었으며 동시에 일본 최초의 여성 덴노 였다. 하지만 이 때 권력체계를 생성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죽어버린 탓에 그 후에 귀족들로 인해서 일본은 다시는 여성이 덴노가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밀레니엄 이전에 페미니즘 항쟁도 일정 부분의 성공을 인정하나, 여성의 주체성을 얻어내는 것, 완전한 성평등을 이루어내기는커녕 후에 페미니즘 세대가 마케이누세대로 혐오적 표현으로 불리우는 것처럼 일본 사회의 여성은 끊임 없는 불평등과 사회적 압박을 받았어야 했다. 이는 여전히 죠시료쿠, 여자력이 영어로 해석될 때 “걸 파워”가 아닌 “와이프 스킬” 로 번역이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바탕과 현재의 경향을 볼 때, 끊임없는 섹슈얼 하라스먼트와의 싸움에 아직도 여전히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많은 여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한국적 페미니즘 소설중에 큰 히트를 이루어낸 “82년생 김지영”이 최근 많은 판매 수를 기록하며 책이라곤 눈곱만큼도 읽지 않는 필자의 일본인 여성친구들 조차 82년생 김지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변화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일본의 결혼 이후 부계 성으로 여성이 흡수되는 문제나 당연시 되는 성소비 문화등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여기선 다시 카구야 공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div><div>카구야 공주의 삶을 끝까지 본다면 많은 감상평이 있겠지만 아마 상상하기에 카구야 공주 개인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 같다. 끊임 없이 카구야 공주는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게 되는데, 에초에 카구야 공주라는 이름부터 외모로 인해서 생긴 평가를 명사화시킨 것이니 시작부터 카구야 공주의 앞날이 쉽지 않을 것은 훤히 보이는 바이다. 그것 외에도 많은 여성은 이러해야만 한다는 많은 대사들과 함께 결국 카구야 공주를 화려한 장식품 보듯이 구경하러 오는 많은 귀족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 여길 때 이는 곳 카구야 공주가 온전한 주체로서 인정 받는 것이 아닌 1차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는 부모에게 종속되며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인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고, 결국에는 권력이 강한 귀족 남성에게 귀속되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표현되는 사회체계에서 카구야 개인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이는 상당한 불평등인데 이에 대한 끊임 없는 불편함을 던져주는 것에서 카구야 공주가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div><div>여기서 또 집중해서 볼 것은 중요한 것은 카구야 공주를 가지기 위해서 오는 다섯명의 남성이 카구야 공주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인데, 이는 카구야 공주를 보물이라는 귀속품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카구야와 물건을 일치화 시키듯이 “내가 만약 당신과 결혼 할 수 있다면 이 보물을 다루듯 당신을 다루겠소.” 등의 대사를 통해서 이미 카구야 공주를 주체적인 판단 대상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div><div>하지만 중요한 것은 타케토리 모노가타리가 쓰였던 당시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여성 개인이 사회를 뒤집거나 스스로 경제력과 신체적 안전을 지킬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을리는 만무하며 결국 카구야 공주는 해결 방법으로서 달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째서 하필이면 달로 돌아갔을까. 이는 일종의 죽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현상세계와의 분리로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여성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패러다임을 극복하기 위해선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기에 결국 패러다임 바깥의 세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 한 것이 카구야 공주가 할 수 있았단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타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 천황이나 귀족, 남성과 같은 주류 권력자들이 많은 경우 우스꽝스럽게 표현이 되거나 욕망에 이기지 못하고 패망하는 모습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탈권위와 평등사상,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nbsp; &nbsp;</div><div>오늘도 어딘가에서 존재할 혐오스러운 마츠코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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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8:57: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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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구야 공주 이야기 2018113415 주찬</title>
         <author>iltyc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75922</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진선미에 대한 일본의 극단적인 추구를 보았고, 또한' 부성애' 에 대한 나의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가구야 공주는 아버지의 요구로 다재다능하고 아름답고 고귀해졌지만 진정한 공주가 된 것처럼 보이며 수많은 귀족들의 추구를 불러일으켰지만 이것은 모두 아버지 자신의 소원이다. 가구야 공주는 이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그럼 이렇게 하는 게 도대체 가구야 공주한테 좋을까?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가 최고가 되기를 바라며 신의 지시에 따라 가구야 공주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의 관점에서 볼 때 지위와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을 잃게 한다. 그래서 가구야 공주는 결국 용감하게 진정한 자신이 되기로 선택했다. 가구야 공주처럼 세상을 꿰뚫어보고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용감하게 추구하는 것은 일본이 항상 숭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동시에 가구야 공주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도 효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이 두 방면이 모두 일본이 매우 중시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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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9:01: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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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143 가구야 공주 이야기</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76548</link>
         <description><![CDATA[<div>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설화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바탕으로한 서사이다. 가구야의 유년기를 더 자세히 다룬 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된 점, 덴노의 인물상이 바뀐 점, 결말부에서 가구야가 ‘증거물’을 건네지 않는다는 점 등 원작에서 여러 변용이 가해졌다. 하지만 서사 전체의 기본적인 틀이 ‘사라짐’이라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이에 본고는 일본적 美의 측면에서 ‘사라져 가는 것’ 혹은 ‘모노노아와레’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nbsp;</div><div>앞서 언급했듯 인물들은 점진적으로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라짐’은 주인공 ‘가구야’가 겪는 상실이다. 가구야는 귀족으로 살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산촌에서의 삶을 상실하고, 연심을 품은 이와 떨어지게 된다. 가구야라는 이름을 받은 뒤 귀족으로서 삶에 적응하던 중, 염증을 느껴 도망쳐 옛집으로 향하지만, 그리던 고향이 없어진 모습도 보게 된다. 이후 청혼자가 사고로 죽는 사건을 겪어 마음이 꺾이고 모든 기억을 잃고 달로 돌아감에 따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서사가 진행되며 가구야가 점차 자신의 이름을 잃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고향을 떠나며 ‘타케노코’라는 이름을 잃고 ‘가구야’라는 이름을 얻고 ‘히메’로 통용되지 못하며 결말부에서는 노부부의 사랑하는 딸 ‘히메’라는 이름마저 잃는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어가며 결말에 가구야가 달로 떠남에 따라 모든 것을 잃는다.</div><div>이렇듯 많은 일본의 서사에는 사라져 가는 것들이 등장한다. 고전 작품은 물론이고 현대 문학에서도 이러한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서사들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은 점차 ‘사라져 가는’ 인물들을 묘사함을 서사의 골자로 한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역시 어느 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 사견이나 번안된 제목 ‘상실의 시대’가 더 명징한 제목이 아닐까 싶다. - 서사 이외에도 일본인은 ‘사라져 가는 것’에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일본인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은 하나같이 순간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이다. 봄철의 벚꽃, 여름철의 불꽃놀이, 가을철의 단풍 등, 길지 않은 순간 머물고 어느 순간 덧없이 사라진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선호의 일차적인 요인일 것이지만 이들의 본질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일본에서 한정 판매 전략이 유독 잘 통하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한국에서 (유교의 영향일 수 있으나) 전통적으로 소나무, 대나무와 같이 한결같은 것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과 대비되는 점도 흥미롭다. 보다 이전 시기로 돌아가면 고려가요, 향가, 상고 시대의 가요를 보면 ‘사라지는 무언가’에 관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모노노아와레가 ‘사라지는 무언가에 대한 정서’라면 한국에서는 무언가가 사라지고 ‘남은 것에 대한 정서’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일본 특유의 미적 세계관이 어떠한 연유로 형성이 되었는지는 더 살펴봐야 할 것이지만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의 심리 기저에 깔려있음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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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9:01: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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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20110262 김기려</title>
         <author>Giryo</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088635</link>
         <description><![CDATA[<div>이걸 보고 가구야히메의 아버지에게의 애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계급 승진이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존재했다. 하지만 가구야히메의 행복을 바라고 아끼는 마음 또한 진실이었기에가구야히메는 애증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복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이었다. 하지만 번번히 아버지가 방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구야 히메를 제 2의 자신의 인생이라 생각했던 점도 있는 것같다. 그래서 부모의 양육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nbsp;</div><div><br></div><div>더불어 사람들의 계급에 대한 욕심이나 겉으로만 보이는 체면, 이미지 관리에 대해 비판해볼 수 있는 장면이 많았다 생각한다.</div><div><br></div><div>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자기 마음대로 가구야히메의행복을 정의하고 준비해줬다. 그게 가구야히메에게는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점이 안타깝다. 또 여기서 남의 행복의 기준을 내가 정하면 안되듯 사람마다 정의,배려의 기준도 다 다를 것이라는 점을 항상 인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구야히메에게는 큰 집과 좋은 옷, 돈이 부질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실했던 존재였을 것처럼 말이다.</div><div><br></div><div>그리고 관습에 집착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일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하는 듯 하면서도 관습을 중시하고지켜나가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일본인의 생각이 엿보였던 것 같다.</div><div><br></div><div>또 기억에 남았던 장면 중에 하나는 엄마가 딸과 눈높이를 낮춰서 고개를 숙이고 공감해줬던 장면이다. 옛날집을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에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모습에서 모성애를 강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모성애’를 아름답게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성 인권이나 사랑,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부모나 양육법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그 외에도 여자로써의 체면을 지키는 점, 결혼이 최고의 행복이라면서 강요당했다는 점, 파티에 주인공만 없는 점,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점,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점(보물이라 지칭), 황제의 성추행 장면 등에서 가구야히메의 서러움을 느낄수 있었던 것 같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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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9:10: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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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18113414 가구야공주 이야기</title>
         <author>9rjbjr8xjj</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139785</link>
         <description><![CDATA[<div>&lt;가구야공주 이야기&gt;<br><br>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영화의 각 캐릭터에 대해 많은 소감을 느꼈다.<br>첫째는 아버지의 역할이다. 그는 가구야 를 공주로 키웠다. 그녀를 명문가와 결혼시키기 위해 딸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그는 행복한 삶이 돈과 권력에 관한 것이라고 믿다. 아버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딸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nbsp; 하지만 그것은 딸이 원하는 삶이 아니다.그래서 딸의 삶의 너무 고통스럽겠다.<br>가구야 의 어머니: 영화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모든 어머니의 그림자여야 한다. 자녀의 능력과 지위는 필요하지 않다. 농작물이 자라는 집에서도 볼 수 있으며 모녀의 작은 세계에 속한다. 엄마는가구야이 행복하고 안전하며 건강하기를 바랄 뿐인다. 딸이 달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포함해 그녀는 꺼림칙하면서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br>가구야 :대나무에서 태어난 그녀는 특별한 삶의 경험을 하게 될 운명이며 성장하는 동안 같은 마을의 오빠을 만나 함께 성장했다. 그것은 또한 일종의 정서적 생계를 나타내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가 슬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와 선생님 앞에서 다르게 행동했다.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는 자유에 대한 내면의 욕망을 숨겼다. 어느 날 새를 놓아주니 가구야는 마음속으로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혼하러 온 5명의 고위 인사들을 만나면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슬퍼하실 거라는 소식을 듣고 이 만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을 비난했다. 그녀의 친절함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저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br>이 세상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많다.극에는 라인이 있다: 나무는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고 이제 모두는 참을성 있게 견디고 있다. 이것은 마치 생명이 없는 산이 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그녀는 결국 그녀의 인생을 안내할 것이다.<br>공주의 무조건적인 복종이자 일본 문화를 나타내다.<br>아마 몇 번 더 보면 더 다른 생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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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9:44: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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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9215472 &lt;가구야 공주 이야기&gt;</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150705</link>
         <description><![CDATA[<div>원작을 읽어본 적이 없고 처음 이영화를 봤을때 일본의 풍습 문화 처음보는 신선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br><br></div><div>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일본 여성의 풍습들을 알 수 있었는데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 특히 중세 이후 신분이 높은 화족이나 그에 버금가는 귀족 계급을 가진 여성들이 많이 하던 풍습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당시의 미적 감각에 의하면 새까맣게 물들인 치아가 아름다워서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여성의 화장법은 얼굴에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검고 두껍게 그린 가짜 눈썹과 붉은 입술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새햐얀 얼굴에 비해 치과위생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가 상대적으로 누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예 검게 칠해버린 것. 치열이 고르지 않은 사람의 경우 치열이 잘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히키마유는 원래 있던 눈썹을 밀고 눈썹이 있던 자리나 더 위인 이마 쪽에 눈썹을 새로 그린다. 고대 일본의 미인상은 얼굴이 하얗고 치아가 검어야 하며 이마가 좁아야 했다 결국 이마가 좁아 보일려고 눈썹을 밀어 이마쪽에 눈썹을 새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눈썹을 얇게 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짧고 굵게 그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눈썹과 눈썹이 멀면 멀수록 고귀함을 나타내었기에 귀족 남자도 하였으나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자들의 화장법으로 남아 결혼을 하면 오하구로를 하였고 아이가 태어나면 눈썹을 밀어 히키마유를 했다.</div><div>&nbsp; &nbsp;</div><div>가구야 공주는 진정한 자신이 원하고자는 걸 마지막에 찾았지만 그때는 비소로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 보고 인간의 후회 잘못을 엿볼 수 있었다. 가구야 공주는 결국 자연에서 맘껏 즐겁게 사는 것 그거 하나 뿐이였다. 가구야 공주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탐욕, 거기서 비롯된 개인의 행복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다루고 있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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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09:52: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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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카구야공주 감상문 </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00763</link>
         <description><![CDATA[<div>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작화였다. 보통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생각한다면, 외곽을 규정하는 실선이 명확하게 그려져있거나, 3D 캐릭터들이 모션에 따라 움직이는 형태를 떠올린다. 그러나 &lt;카구야공주&gt;는 여기서부터 다른 면모를 보인다. 작화는 대부분 동양화의 화풍을 띄어, 붓과 묵 등으로 그린 듯한 장면들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진다.&nbsp;<br><br>뒤이어 영화는 카구야 공주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점은 카구야 공주의 탄생이 굉장히 작은 형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완성된 작음에서, 미완성된 작음(아기)의 형태로 바뀌었다가 성장하는 것은, 작은 것을 美의 기준으로 여긴 일본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br><br>이야기는 이어 카구야 공주의 성장과 불행을 다룬다. 시골의 주민에서 하루아침에 귀족의 여성이 된 카구야 공주는 그 과정에서 결국 행복을 잃고, 자신과는 다른 삶을 강요받는다. 원하지 않는 혼담 또한 인간의 탐욕을 보여주거나, 당시의 윤리로는 납득받지 못할 행태만 전시하는 결과를 낳았다.<br><br>결과적으로 카구야 공주는 자신이 태어난 장소인 달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테마루, 양부모를 포함해 속세와의 모든 인연은 절단되고, 카구야 공주에게나 속세의 인간들에게나 슬픔만을 안기는 결말을 맞게 된다. 이러한 파국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nbsp;<br><br>영화는 분명 '공주의 죄와 벌'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지만, 그래서 그 '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고전소설인 &lt;타케토리모노가타리&gt;라는 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lt;카구야 공주&gt;임을 감안해 볼때, &lt;카구야 공주&gt;의 '모노'는 어떠한 죄를 지었고 그 처벌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nbsp;<br><br>별개로 이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의 성적을 거뒀다. 사실 어느정도 이해는 갔다. 평론가들에게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내용이지만, 대중영화로서의 소구력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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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0:26: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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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19110264</title>
         <author>hjlee006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11454</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캐치프레이즈는 공주가 지은 죄와 벌이다. 여기서 공주가 지은 죄는 달의 사람인데도 지구에서의 삶을 동경한 죄일 것이다. 이에 따른 벌로 공주는 지구에서 살게 되었다. 대나무 밭에서 한 남자에 의해 발견된 공주는 남자와 그의 아내를 부모님으로 따르게 된다.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 이웃 아이들에게 '죽순'이라 불리는 공주는, 그들과 함께 숲과 나무, 꽃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라난다. 어느 날 공주의 아버지는 대나무 밭에서 빛나는 대나무를 발견하고, 그 나무에서 형형색색의 옷감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공주를 고귀한 아가씨로 키워 귀공자의 아내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공주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곧장 수도로 이사가기로 한다. 수도에서의 삶은 공주에게 있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는 자연 속에서 뛰어 놀 수 없었고, 당시 미의 기준에 따라 눈썹을 뽑고, 이를 검은색으로 칠해야 했다. 미색만을 보고 자신과 혼인하기를 원하는 남자들을 보며 자신은 누구의 아내도 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슬픔에 빠진 공주는 달을 향해 도움을 청하고, 공주를 데리러 달에서 사람들이 내려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지구에서의 삶을 동경했는지 깨닫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애원하지만, 달로 돌아가는 것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달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공주에게 달의 날개옷을 입히려고 하며 달에 돌아가면 마음 아픈 일도 없고, 이 땅의 더러움도 없어진다고 말하자 공주는 이를 저지하며 더러움 같은 건 없으며,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기가 넘친다고 말한다. 이렇듯 지구에서의 삶을 향한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끝내 달로 돌아가게 된다.<br>&nbsp;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본 공주의 삶, 특히 수도에서의 삶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쁨도 슬픔도 지구에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생기가 넘친다고 말하는 공주를 보며 그는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공주에게 주어진 벌은 지구에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의 삶을 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삶 그 자체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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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0:34: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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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18 가구야 공주</title>
         <author>mika6565j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21805</link>
         <description><![CDATA[<div>저는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그걸 본 지 이미 10년이 넘었는데 그 당시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nbsp; 하지만 오늘 이 제품을 다시 보니까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고 영화 한 편을 다 보면 울컥할 수밖에 없고, 오래도록 영화에 취해 헤어나지 못합니다.&nbsp;<br>&nbsp;저는 이 영화가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삶을 체험하러 온 생령들이라는 것이다. 지구에 온 유일한 목적이자 가장 큰 의미는 살아 있는 것을 체험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의미임을 알려줬다.&nbsp;<br><br>우리는 기억을 지워버리고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지구에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유혹이나 협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본심을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우리는 세속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고 막막하여, 인간 세상의 불운을 느끼다. 살고, 본심을 따라 살며, 살아온 순간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음미한다. 인간 세상의 새벌레와 짐승을 체취하고, 인간 세상의 푸른 풀과 나무와 꽃을 체험하며, 인간의 희로애락과 정의를 체험한다.&nbsp;<br><br>&nbsp; 영화 속 카그야히메 처럼 저도 세속적인 인정을 받지 않고 가장 진실했던 자신을 찾지 못한 채 행복과 즐거움마저 잊은 적이 있다.<br><br>&nbsp; 너무 많은 무거운 의탁과 사명을 짊어지고 마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 사회의 물욕적 가치에 굴종하여 자신의 본성과 영혼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즐거움을 되찾으려고 할 때, 자신은 이미 소멸의 끝자락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br><br>&nbsp; 예전에 저는 자기가 평범하다는 말을 너무 싫다.&nbsp; 겨우 이 세상에 왔는데 평범하게 사느니 특별하게 , 열정적으로, 남다르게 살아야 삶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길에 저는 깨달았다.&nbsp; 우리는 다 평범하고 평등한 사람이라는 것이. 배우도 그렇고 연애인도 그렇게, 위대한 과학자도 그렇고 각자의 분야에서 빛 나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무리하게&nbsp; 저답지 않게 하기보다는 평범한 자신을 수용하고, 더욱 우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천천히 하고, 때로는 노력하는 길에 푹 쉬고 길가의 풍경도 감상하고 , 천천히 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nbsp;<br><br>&nbsp;역시 평범하게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인지도 모른다.<br>"살아있다, 살아 있는 매 순간을 마음속으로 느껴보는 것이 삶이 아닌가요!?</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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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0:42: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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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3205 황목자 가구야 공주</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36469</link>
         <description><![CDATA[<div>오늘은 지브리가 낳은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봤다. 먼저 한 노인이 대나무에서 가구야 공주를 주웠다.그리고 집으로 데려와서 그 아내와 함께 공주를 키웠다. 공주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친구, 동물들과 걱정 없이 산속에서 놀았다.그래서 전기의 가구야 공주는 걱정 없이 시골에서 사는 순결한 소녀였다. 어느 날 노인은 대나무 숲에서 황금과 비단을 발견하고 도시로 이사했다.그리고 선생님을 찾아가 가구야 공주에게 예의를 가르쳤다.하지만 공주는 그게 싫었다.그 선생님이 가구야 공주에게 이를 검게 칠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가구야는 화가 나서 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공주님께 청혼하러 왔다.공주는 모두 거절했다. 사실 가구야 공주가 원하는 게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살고 싶은 게 전부였다.친구와 걱정 없이 놀다.공주는 성에서도 어린 시절 성장했던 곳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찾아가고 싶어했다. 시골에서 살면서 가구야 공주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도시로 이사한 후부터 가구야 공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노인은 성안에 가면 공주를 부자나 천황과 결혼시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주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귀함은 가구야에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가구야는 시골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웃을 수 없다. 앉는 자세나 걷는 것조차 제한된다.가구야 공주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는 가구야 공주에게 주어진 사명인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 중 가구야 공주는 이런 부귀한 삶에 지쳤다는 표현을 여러 번 했다.가구야 공주는 스스로도 새벌레와 짐승, 푸른 풀과 꽃들을 원한다고 말했는데, 그것들처럼 자유롭고 싶었다. 영화 마지막 달은 가구야 공주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다.가구야 공주가 지구를 가지고 달을 향해 가는 동안 화면은 흑백으로 흐른다.&nbsp;<br>&nbsp; &nbsp; &nbsp;조금 슬픈 결말이라고 생각한다.공주는 시내로 이사온 후로 별로 신통치 않게 지냈고, 데려가는 과정에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기억은 지워지고 강제로 끌려갔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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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0:53: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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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 정붕거 가구야 공주 이야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83635</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 최고(最古)의 이야기 『다케토리모노가타리』를 소재로 대나무에서 태어난 휘야희가 벌죽옹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해 월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이 영화는 수묵화풍을 채택하여 일본 전통문예미학의 계승과 발전을 보여 주었다.<br>이 영화가 나를 사로잡은 것은 대나무 숲과 월궁의 허실 대비, 가구야의 아름다움과 버티기, 그리고 보물로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과정이다.'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선과 아름다움의 본질이며 사랑을 강화했고, 사랑을 갈등으로 만들었지만 외력의 분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사랑 때문이다.가장 비극적인 곳이기도 하다.외부의 압박에는 반항할 수 있고, 탈출할 수 있으며, 사랑에 대해서는 진퇴양난이다.자신에 대한 사랑인 줄 알지만 받아들일 수 없고, 내심으로는 반항하고 싶어 소리를 내지만, 이별을 마주하고 후회하는 순간, 인생에 완벽한 선택은 없기 때문에 결말을 바꿀 수 없다.<br>만약 사람들이 부적절한 사랑이 잃어버린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사람들은 사랑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안타깝게도 비극이 닥칠 때 깨달을 수 있다.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자신에게 절실한 아픔이 없다.<br>저는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 가구야 공주 이야기 ' 를 보면서 섭섭하고 슬펐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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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26: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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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구야공주이야기] 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295132</link>
         <description><![CDATA[<div>&nbsp;수업을 듣고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았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통해 일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br><br>&nbsp;일본인의 미를 포함한 이번 김태진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영화를 보면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달에서 내려온 사람이 깨끗함과 더러움의 표현을 쓴다는 것이었다. 달을 깨끗한 곳으로 인식하는 반면 땅은 더러운 곳으로 말을 한다. 날개옷을 입고 깨끗한 곳으로 돌아가면 땅의 더러움도 없어진다는 표현을 듣게 되었는데, 수업을 통해 일본인이 생각하는 더러움과 깨끗함(케가레) 을 배우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 했을 것이다.&nbsp;<br><br>&nbsp;영화 전반적으로 일본풍이 짙게 깔려 있는 작품이다. 또한 작품의 작화도 전래동화느낌이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영상자료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구야 공주가 수도에 있는 집의 마당에 옛날에 살던 집을 구현한 것을 통해 일본풍의 영화 속에서 일본의 미를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마당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문화, 잉어를 키우는 문화는 일본에 대해 배우지 않아도 일본 여행을 가 보면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주인공은 그 마당에 옛날에 살던 집을 구현해 놓으며 그 것들에다가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것들을 통해서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함을 표현한다.&nbsp; 그 부분에서 작게 만들어내는 것에서 미를 찾아내는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br><br>&nbsp;작품에서 남성중심적, 그리고 여성을 수단화함을 통해 미를 찾는 부분도 느낄 수 있었다. 여성의 얼굴을 하얗게 하고 눈썹을 뽑고 이를 검게 칠하는 것이 현대에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일본인의 미의 기준이었다는 것이 꽤 충격적이었다. 물론 이것이 당시 일본인 전체의 미의 기준인지,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들의 미의 기준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좌우지간 여성을 그렇게 함으로써 수단화, 증표로 생각했음이 당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nbsp;<br><br>&nbsp;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고 타케토리모노가타리 또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영화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의 차이점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읽고 차이점을 파악함으로써 현대에 만들어진 가구야 공주 이야기 영화와 비교하고 싶다. 그 차이점을 파악함으로써 영화감독이 어느 부분에서 차이점을 뒀는지 알고 싶어졌다.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원작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원작을 읽고 비교를 통해 타케토리모노가타리와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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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34: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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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80 시문옥 [기구야 공주]감상문</title>
         <author>moono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300235</link>
         <description><![CDATA[<div>이 작품에서 깊고 섬세한 감정과 노래와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화면은 실제 이면에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새와 벌레와 수류,푸른 풀과 나무와 꽃들은 다 인정을 내포한다.인생길을 한 번 가 보니 오미가 뒤섞여 있다는 걸을 알 수 있다.사람은 흔히 삶을 동경하는데 가구야 공주는 이로써 이른바 '죄'를 들춰냈다.첫머리의 싱그러운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절경이며 죽순에서 태어난 소녀가 생명의 아름다움에 부응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향토 간의 친근한 인간관계와 순박한 시골의 정이 나날은 청빈하지만 도원경과 같다.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쉽다.대나무에 나타난 금과 흩어진 화려한 옷이 바로 '벌'의 시초이다.할아버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소녀를 덕행을 겸비한 공주로 키우려 하자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부귀를 얻으려는 욕심이다.이때부터 기뻐하는 소녀는 사라져 대신에 아버지가 실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새장 속의 새다.웃는 얼굴을 버리고 취미도 버린다.귀인의 눈에 띄면서 천황의 마음에 걸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운명을 강요받았다.노래에서 들렸던 그렸던 아름다움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자연히 인심의 추악함으로 대체된다.달빛 아래서 현악기를 탄 실의감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실망의 계선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현실의 꿈이 깨지고 이 모든 것이 소녀를 짓눌렀다.월궁에서 사람이 오고 소녀가 그녀의 '벌'도 동시에 맞이한다.인간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지만 결코 부서진 결과를 얻었다.결국 늙은 부모를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소녀가 맞닥뜨리게 될 '벌'이다.동시에 할아버지와&nbsp; 할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이들이 저지른 '벌'은 욕심을 숨기지 않고 결국 가구야 공주를 잃는 '벌'이었다.소녀는 활기찬 생기를 향하지만 숙명은 그녀를 얼음처럼 차갑고 위선적인 귀족 생활로 인도하여 물화되어 가는 여성이 되었다.영화는 왕궁자제들의 청혼함으로써 권리의 황당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다.그들에게 공주는 귀중한 물건과 다를 바 없이 단지 권력의 장식할 뿐이다.동시에 공주의 선택을 통해 자아에 대한 추구를 표현한다.자연 속에서 진실한 자아를 실컷 느끼고 그녀에게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인간 세상에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이 야기는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비극적이다.다만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을 뿐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인생이 멋진 것은 수많은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욕망의 존재가 그다지 무섭지 않고 욕망을 한없이 증폭시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은 가장 무섭다.공주는 산간의 비교할 수 없는 자유도 경험했고 예의범절에 얽매인 적도 있었다.긴 시간에서 애썼고 괴로워하고 막막했다.세상만사를 경험하고 결국 천계로 소환된 공주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처럼 세상에 와서 평생 애증을 겪어본 것도 결국엔 돌아갈 곳은 똑 같다.영화는 곳곳이 자유와 속박,순수와 허위,하늘과 인간,삶과 죽음,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가득찬다.한편으로는 인간의 일생을 해석한다고 생각한다.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고 구하지 못할 고통도 없어졌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즐거움도 더 이상 느끼기 어려웠다.사실 즐거움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은 원래 상부상조한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고 삶의 진,선,미를 소중히 여기는 것 뿐이다.<br>작가님의 영화는 서사적으로 매우 생활적이고 질박하면서도 철리도 풍부하다.영화는 가구야 공주의 일생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사람으로 사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이 세상이 더럽지 않고 생명도 감정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화면에서는 동양 고전 기법과 현대 수채가 어우러져 독특하고 민족 문화의 멋을 띤 화풍을 이루고 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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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38: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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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구야공주이야기 감상편 2017113059</title>
         <author>choi_jaehyu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302710</link>
         <description><![CDATA[<div>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원령공주,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번에 감상하게 된 '가구야공주이야기'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숨겨진(?) 애니메이션 영화를 발견하고 감상하게 되었다.<br><br>대나무 죽순에서 태어난 가구야히메가 시골에서 시골 동네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자연 안에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가구야를 발견한 아버지 되는 사람은 이 가구야를 예의바르게 성장시켜 훌륭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는게 가구야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이끌고 수도로 향하게 된다.&nbsp;<br><br>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듯이 가구야는 시골과는 다르게 미소를 잃고 자주 울게 되었고 원치 않는 시집을 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진다. (그것이 황제라 하여도)&nbsp;<br><br>사실 이 애니메이션을 봐도 현실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우리도 종종 우리가 원치가 않는 상황에 맞딱뜨리게 되더라도 부모의 희망이나 그들이 지나온 발자취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투영시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강요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그려진 그림대로 자식이 그렇게 되더라도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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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39: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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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110267 두다혜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감상문</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322813</link>
         <description><![CDATA[<div>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자주 나오는 노래가 있다. 원문으로는 ‘와라베 우타’라고 하며 한국어로는 ‘지구의 노래’라고 번역된 것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노래가 인상 깊었다고 생각했고 노래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해보았다. 노래에서는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자연의 이치를 계속해서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빗대어 표현한다. 물레방아는 끝없이 돌고 돌아서 해나 바람, 비 같은 것을 불러오고 이들이 모여 사계절을 만들며, 사계절이 반복되는 동안 새, 벌레, 짐승, 풀, 나무, 꽃과 같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또 자라서 나중에는 죽어간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동식물이지만 이전의 것과는 다른 생명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자연의 이치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것을 노래로 만들었고 이것은 ‘동요(와라베 우타)’가 되어 끝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다. 나에게는 이 일련의 모습들이 ‘모노노아와레’ 그 자체를 묘사한 것처럼 보였다.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따르면 ‘모노노아와레’란 ‘모노’를 보고 감동하여 나오는 ‘아와레’이다. 여기서 ‘모노’란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수 없는 자연을 뜻하며 ‘아와레’란 터져나오는 감탄사 그 자체이다. 즉,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느낀 감동으로 인해 터져나오는 감탄사라는 뜻이 된다. 내가 지구의 노래를 모노노아와레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 ‘아와레’ 때문인데, 모노노아와레에서는 모노에 감탄한 사람들이 내뱉는 감탄사인 아와레를 ‘노래’로 표현한다. 물론 지금처럼 다채로운 멜로디를 만들어서 반주를 붙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모노노아와레의 정수라고 불리는 와카는 ‘일본적인 것을 노래함’이며 실제로 읊을 때도 높낮이와 리듬감을 넣어 노래처럼 부르는 것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런 운율이 ‘진심으로 감동했을 때 감탄사를 말로 내뱉으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하며 와카의 운율과 가사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솔직한 감정을 일본적인 미라고 칭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자연에 대한 감탄을 담은 이 노래가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그리고 가구야 공주가 되기 전에 타케노코가 살던 시골의 사람들부터 도읍의 사람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전래동요로 나온다. 또한 가구야 공주가 부른 부분에서 ‘아득히 먼 시간을 돈’다는 것과 ‘돌아서 마음을 되살려내’라는 부분을 통해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많았다는 것과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노래를 통해 거기에 담긴 마음을 떠올려 은연중에 일본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감탄, 즉 아름다움이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가구야 공주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지닌 지구에서 벗어나 달로 돌아가게 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작품 속에서 가구야, 아니 타케노코의 의지가 반영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시골에 남고 싶었으나 할아버지에 의해 도읍으로 왔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는 결국 결혼에 대한 강요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마지막에는 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강제로 돌아가야 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가구야가 꿈속에서 연회장을 뛰쳐나와 옷가지를 내던지며 내달리는 장면이 분명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강한 감정을 느꼈으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모노노아와레라는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남성에 의한 모노노아와레’라는 인식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작품의 캐치프라이즈인 ‘공주가 지은 죄와 벌’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작중 가구야는 ‘내가 금단의 땅인 이곳을 동경했기 때문에 그 벌로써 여기에 내려보내진 것’이라고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지구에서의 추억을 모두 잊게 되는 것’이 벌의 실체라고 해석한다. 물론 나도 이 말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동경하던 지구로 내려가 그 땅에서 정해진 인간 여성으로서의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삶을 통해 동경하던 것의 그렇지 못한 실체를 알게 되는 것’ 역시 벌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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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51: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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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2강서문</title>
         <author>jiangshuwen15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334219</link>
         <description><![CDATA[<div>이 영화는 아름다운 화풍을 가지고 있으며, 손으로 그린 화면은 영화 전체를 더욱 자연스럽게 변화시킨다.줄거리도 흥미롭게 디자인했다.하지만 여주인공의 성격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그리고 그 관념은 영화 전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br><br>나는 어떤 때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만약 그녀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무슨 이유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처음엔 너무 섣부른 결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휘야희에게 제일 좋았던 것 같다.결말이 났다. 그녀는 삶을 즐길 용기가 없었고,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꿈뿐이었다.그런 그녀가 세상에서는 즐거울 수 없다. 아마도 달로 돌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br><br>영화를 보면서 그녀는 왜 포기했느냐고 속으로 수없이 물었다.분명히 기회가 눈앞에 닥쳤고,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삶, 좋아하는 사람을 쫓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날을 묵묵히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하루는. 나는 이런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만약 그녀가 속죄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면, 그녀는 자신을, 삶을 누릴 수 없을까?기쁨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휘야희가 영화 초반에 산속 생활을 즐긴 것은 그때 옹구네와 할멈이 데리고 살았기 때문이다.휘야희의 귀족생활은 즐겁지 않았다-옹이 그녀를 데리고 산림에서 떠나 원치 않는 삶을 주었기 때문이다.휘야희의 인간 생활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br><br>나는 이 영화가 휘야희의 삶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br><br>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보니 우리 모두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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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1:59: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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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8 오채연, 가구야 공주 서평</title>
         <author>ocy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363451</link>
         <description><![CDATA[<div>&nbsp;한 편의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작중 인물에 대한, 작품 외적인 여러가지 요소에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어질 것이다. 다소 일차원적인 사고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lt;가고야 공주&gt;라는 영화를 본 한 명의 감상자로써, 그녀의 삶과 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가고야 공주가 머물다 간 인간세상은 그녀에게 기쁨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왔을까?<br><br></div><div>&nbsp;        <em>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nbsp;<br>&nbsp;</em></div><div>&nbsp;다음은 영화 후반부 그녀의 대사를 일부 발췌한 것이다. 그녀는 풀처럼, 벌레처럼 인간세상에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과연 그녀를 사람 아니 어쩌면 풀, 벌레처럼 대해주었을까? 가족에게 그녀는 귀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녀를 한 명의 인격으로써 대해주었을까? 작품을 보며, 그녀가 하나의 수단, 혹은 목적으로써 존재하였다는 느낌을 받아 마냥 유쾌하게 감상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밝은 미소로 얼핏 행복해 보이는 장면들은 사실은 무척이나 외로운 장면이었고, 그녀의 절망적인 얼굴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장면들은 단순히 영화 속을 벗어나 현실로 나아가 새로운 문제들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nbsp;</div><div>&nbsp;가구야가 인간세상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하게 된 벚꽃 구경은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를 공주처럼 키워온 아버지는 그녀를 진정한 ‘공주’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귀하게 그녀를 대접하였고, 비로소 그녀는 타자에 의해, 타자를 위해 공주가 되었다. 가구야의 어떠한 모습조차 직접 보진 못하였지만, 공주라는 이유로 또는 단순히 아름답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청혼한 사람들을 사라지게 해야 했다. 현명한 방법으로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녀는 봄을 만끽하며 풀 숲으로 뛰어간다. 자연 속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하얀 치아와 함께 보이는 밝은 웃음은 그녀가 어디에 존재해야 알맞은 지 보여주는 장면 같이 기억에 남았다. 가구야는 누구보다 절실히 자연을, 자유를,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nbsp;<br>&nbsp;또한, 앞서 가구야가 거절한 많은 청혼들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상황과 주위의 환경은 또 다시 가구야에게 상처로 다가오게 되었다. 자신의 말로 인한 다양한 결과들에 회의감을 느끼며 괴로워하였고, 황제를 포함한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그녀를 그냥 하나의 수단, 궁금증, 혹은 자랑거리로 삼는 듯하였다. 하물며 아버지의 모습 또한 공주를 수단으로 여기며 그에 따르는 본인의 이익을, 하나의 자랑거리로 삼는 모습을 보였다. 강압적인 황제의 모습은 “내가 원하면 너는 내것이 된다.”와 같은 몰상식한 발언을 통하여 가고야의 하나의 인격이 아닌 물건으로, 혹은 하나의 놀이로써 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난 가고야의 모습도 그저 아름다운 조각이며, 가고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탐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해 놀란 가구야의 모습에 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몇 년 전의 영화에도 담긴 이러한 모습과 더불어 현재에도 존재하기에 마냥 가벼운 애니메이션으로만 볼 수 없었다. 의사소통의 부재와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은, 단지 상대가 예쁘고 약한 여자라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성별을 막론하고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를 떠나, 아버지의 모습은 그녀를 사람 답게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애정하는 마음은 갈수록 표현의 방식이 달라지며 더 나아가 결국엔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하나의 창구로써 존재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모습 또한, 현재와 많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식을 자신을 자랑하는 존재로 내세우기 위해 ‘자랑할 만한 자식’으로 만드는 모습에 이질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br><br></div><div> 한편, 인간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모의 품에 안긴 가구야는 분명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 예컨데 ‘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달세계의 존재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연주와 부모의 표정은 더욱 더 대비되어 슬픔이 강조되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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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2:16: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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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422347</link>
         <description><![CDATA[<div>가수야 공주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가구야 공주에게"귀한 공주전하가 되라"는 말을 했다.</div><div>그건 한 마디뿐이 아니다. 그게는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루고 싶었던 목적이다. 아버지는 그녀를 속세 너머에서이 세상 공주로 태어나게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구야 공주를 속세에서 공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가구야 공주의 아버지는 그것이 가구야 공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div><div>그러나 가구야 공주는 그런 신분을 강요당해야만 했다.가구야 공주는 종래로 호화롭고 큰 집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가구야 공주가 큰 집을 좋아했지만 누가 또 좋아하지 않겠는가?그러나 그는 물질적인&nbsp; 것들보다 시골에 있는 친구들을 더 사랑했으며 시골에서 근심과 걱정 없이 즐거운 시간이 그리워했디.몇달동안에 급속하게 아름다운 소녀로 변해버렸다.가구야 공주의 아버지는 강제로 가구야 공주를 시골에서 떼내여 가구야 공주의 부모님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궁전에 살게 했다.가구야 공주는 즐거웠지만, 기쁨은 곧 없어졌다, 가구야 공즈는 궁전에 모든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구야 공주와 부모,함께 놀 수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로 되었다.</div><div>인생은 이렇게 결정되었고, 가구야 공주가&nbsp;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nbsp; 금지되었다. 그들은 가구야 공주가 원하는 대로, 영원히 존엄이 있게 살기를 원했다.그녀는 그렇게 거만지만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분명히 쟁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완변하게 했다.</div><div>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저런 꿈이나 원하는 생활바식 있다.성장한 동안에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 우리의 꿈이나 원하는 생활방식을 잃어버렸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최초의 자신을 잃지 말라고 생각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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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2:48: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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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구야 공주 감상평 -2020110284 김윤수</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439984</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에 본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설화인 ‘다케토리 모노카타리’를 모티브로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문학을 공부할 당시에도 고전문학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고 보지는 않았다. 더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도 아니고 일본의 고전소설인지라 일본인들의 정서와 그들의 옛 역사적 식견도 없기 때문에 이 에니메이션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간적인 고뇌와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두고 봤을때는 꽤 흥미로운 작품이었던 것 같다.&nbsp;<br><br></div><div>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일반적으로 옛날 이야기, 또는 고전 문학에서 하늘의 복을 받아 마땅한 선하고 가난한 백성의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노부부가 우연히 발견해 데리고 온 가구야 공주를 진짜 딸처럼 돌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비정상적으로 금방 자라는 가구야 공주를 보고 다른 아이들이 ‘대나무순’이라고 놀릴 때 공주를 다독여주는&nbsp; 할아버지의 목소리의 울림에서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서 엄청난 감동이 느껴졌다.&nbsp;<br><br></div><div>할아버지는 하늘의 뜻을 받아 수도로 집을 옮기고 공주에게 소위 공주수업을 받게 하면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공주는 그저 자연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아 가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노부부는 부모의 마음으로 공주가 더 나은 환경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고 다 공주를 위한 길이라며 합리화를 한다. 이것은 사실 작품내, 그리고 일본에서 뿐 만 아니라 현대 우리나라 부모자식 간에서도 흔히 보이는 갈등양상이다. 할아버지는 정말 공주를 친딸처럼 사랑하고 공주다운 재색을 겸비한 공주가 일취월장 하는 모습을 보며 기대도 높아진다. 그것이 공주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인지도 모른 채 공주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기뻐하는 모습이 씁쓸하기만 했다. 고귀한 아가씨가 되기 위한 그런 과정에서 가구야 공주는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성공과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많은 남자들에게 구혼을 받을 때에도 행복해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가구야 공주의 모습이 대비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nbsp;<br><br></div><div>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공주의 모습을 옆애서 묵묵히 바라보는 할머니의 존재가 참 의지되고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계속해서 일방적인 생각으로 공주에게 강요를 해 공주를 힘들게 한 할아버지는 정말로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나중에 가구야 공주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시 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울면서 이야기하는 공주를 보며 노부부의 마음이 찢어지지만 할아버지는 하나도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nbsp;<br><br></div><div>보름날, 저택 하늘에서 음악과 평온하게 달나라 사람들이 내려오는 장면에서의 음악과 영상미가 정말 예술이었다. 정말로 고전미가 흘러 넘치는 장면들이 많았다. 완전 무장하고 긴장하고 있는 속세사람들과 대비되게 정말 해탈한 듯이 평화롭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마치 이승에 나들이, 소풍이라도 온듯한 평온한 모습에 더 울컥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딸을 데려가지 못하게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정말 슬펐다. 희극 가운데 비극이 더 강력하게 보이는 것 처럼 말이다.&nbsp;<br><br></div><div>마지막에 미안하다고 흐느끼는 할아버지와 자신도 같이 데려가라는 할머니의 절규가 자식을 잃은 부모늬 모습같아서 정말 슬펐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의미와 인간의 감정 그리고 부모의 마음으로 보는 딸의 새드엔딩에 마음이 씁쓸하고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nbsp;<br><br></div><div>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일본의 고전과 한국의 고전이 왠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설정, 그리고 비극 속 나타나는 교훈 등이 한국의 몇가지 고전을 떠오르게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원작 소설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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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2:56: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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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노노케 공주 이야기 감강 (2020111116 카토유이)</title>
         <author>sjelfchegoyui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07552845</link>
         <description><![CDATA[<div>나는 일본인이면서 이번에 지브리의 카구야 공주를 처음 보았다. 스토리는 중학교에서 배운 "타케토리 모노가타리"그대로며, 타케에서 태어난 카구야 공주가 달에 돌아간다라고 하는 단순한 이야기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있었다.</div><div>다만 침묵도 많고 장시간 영화라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어린 아이들은 추천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이 됐을 때 꼭 봤으면 좋겠다.어르신들까지 즐기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원작 "타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는 어린 시절의 카구야 공주가 거의 그려지지 않은 것에 비해 본작 "카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정중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아기 가구야 공주가 너무 귀여웠다.</div><div><br></div><div>카구야 공주가 성장해서도 마찬가지로 전체를 통해 그림도 예쁘고, 한 장 한 장 손으로 그려냈다는 것 자체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손글씨감도 있으면서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그림자나 초목까지 잘 그려져 있었다. 소리도 굉장히 좋고 특히 대나무의 조릿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등의 생활음이 매우 좋았다.</div><div><br></div><div>스테마우 오빠를 찾으러 가도 찾지 못하고 10년동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 눈 속에서 카구야 공주가 쓰러져 버리는 장면에서 갑자기 꿈이었던 것처럼 방에 돌아와 있던 장면이 하나 수수께끼로 생각되었다.</div><div>나중에 살펴보니 달 사람은 불로불사로 한 번 동사해 소생했다고 한다.</div><div>일본에서는 달은 불로불사의 상징이라는 설화가 있다. 카구야 공주는 스스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SOS신호가 되어 달에서 마중을 나와 버린다는 설화가 되어 있다고 한다.</div><div><br></div><div>삶의 기쁨이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인간에게만 주어진 환상이며 애당초 불사의 달의 세계에서라면 삶의 기쁨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생각과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div><div>인간 세계와 달의 세계 두 가지 사고를 알아버린 카구야 공주 자신이 가장 불쌍한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했다.</div><div><br></div><div>삶의 기쁨과 고통의 슬픔은 우리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다시 삶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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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2 13:46: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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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신구라를 통해 보는 사무라이 문화</title>
         <author>teseus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6081492</link>
         <description><![CDATA[<div>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SZebYQDAjzw_uCub_NNl9HbIZ2tiOTBv?usp=sharing(주신구라 1/47 / 최후의 주신구라)<br><br>https://www.youtube.com/watch?v=KiCWrDMZZFk(미조구치 겐지 영화 겐로쿠 주신구라)<br><br>https://www.youtube.com/watch?v=Q3p1NgCwMQc&nbsp;(주신구라 내용 간단설명)<br><br>화요일 저녁 9시까지 코멘트 올려주시고, 댓글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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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00:53: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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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118 유은우 최후의 추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6675650</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2019110118 유은우 최후의 추신구라를 보고<br></strong><br></div><div><br></div><div>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사도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감상한 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편지가 생각났다. 일본 군인들이 전쟁에 패배한 후 후퇴 도중 영광을 위해 수류탄으로 자살을 하는데 최후의 추신구라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할복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nbsp;</div><div>과거 일본의 국군주의가 기사도 정신에 의해 생겨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고자는 그런 이데올로기 속에 탄생한 역설적인 인물이다.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 할복을 강요 당하지만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후 할복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div><div>늘 이런 이데올로기의 피해 뒤엔 남겨진 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속 군인들 중 어떻게든살아남은 군인들은 명예롭게 제대하지 못한다. 최후의 추신구라에서 또한 마고자와 관련된 인물들은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정신적인 피해자인 것 같다.</div><div>한국 또한 상업 전쟁 영화에서 볼 수 있듯 남겨진 자들,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어떤 인물의</div><div>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서사들이 앞서 밝힌 일본 영화들과 비슷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최후의 추신구라에서 의미 있던 지점은 일본의 역사를 일본인 시선 그대로 담았다는 점인데 앞으로 국내 영화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영웅 서사보다는 남겨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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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08:15: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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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210988 최후의 추신구라 감상평 신민호</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6997663</link>
         <description><![CDATA[<div>사무라이 문화는 과연 올바른 문화인가?<br>최후의 추신구라에서는 '배신자'라는 낙인 속에서도 주군이 부탁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주군을 배신하여 사무라이보다 명예가 없는 상인으로 위장한 채 주군의 딸이 장성하여 시집을 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그는 주군에게 받은 임무를 다하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신념이자 모든 사무라이들의 신념인 충의의 '할복' 으로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br><br>나는 개인적으로 주신구라의 내용(복수, 할복)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원작에서 46인의 사무라이들의 주군이던 아코번의 영주이자 천황사절의 접대원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사신 접대 예절을 알려주던 '기라 요시나카'에게 칼부림을 행해 자결할복을 명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칼부림을 한 이유는 요시나카의 잦은 무시로 인해서였다고 하지만, 그는 이미 에도성안에서 무기를 지참할 수 없다는 법을 위반했다. <br><br>에도성은 당시 에도막부의 쇼군이 있던 곳인데 그는 착검을 한 채 성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막부의 입장에서 그가 지도역인 요시나카에게 칼을 겨눌 정도로 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 인물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이는 곧 막부의 힘이 약해지거나 그에게 대우를 잘못했을 때 그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다.&nbsp; <br><br>'내 집이 곧 내 성이다'라는 말이 있다. 당시에는 '내 성이 곧 내 집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에도성 즉, 내 집에 칼을 들고와 휘두른 자를 어떻게 집주인이 가만 둘 수 있겠는가?<br><br>그렇게 주군의 죽음을 접한 46인의 무사들의 대처도 나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다. 정의없는 힘은 곧 폭력이며 폭력은 모든 정당성을 부정한다. <br>그들의 정의가 곧 사회의 정의인가? 아니면 그저 그들의 대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정의인가? <br><br>또한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주신구라의 내용뿐 아닌, 할복이라는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유교에서는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말을 강조한다. 나의 신체는 부모님이 주신 것으로서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nbsp; <br><br>46인의 사무라이는 주군에 대한 자신들의 충의 신념의 하나로서 할복을 선택했다. 하지만, 주군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있다. 인간은 살아있기에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마저도 그저 자신에게 돈을 주던 상사에게 맡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br>이러한 모습은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족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는 사람이 할복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들은 그의 가족, 아내, 부모는 어떤 감정을 느끼겠는가.<br><br>46인의 사무라이는 그 당시에는 충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들 또한 칼을 차고, 에도성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죽인 죄인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과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과연 충성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누군가는 충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을 또 다른 범죄자라고 생각한다. <br><br>그들이 명예를 지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그저 명예살인을 저지른 자들이다. 주군의 가문에 대한 명예를 더럽힌 기라에 대한 '<strong>살인</strong>' 말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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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2:11: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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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츄신구라(드라마) 감상평 강영준</title>
         <author>dud904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7314338</link>
         <description><![CDATA[<div>현대인에게 ‘충(忠)’이란 그 개념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운 감정이 아닌가 싶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조직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조직, 예컨대 소속된 국가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상위의 개념에게 고전적인 의미로 ‘충성’한다는 것이 무슨 감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현대인의 입장에서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그것이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말이다.</div><div>특히 일본의 충의 개념은 한국과 중국에서의 충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더더욱 온전한 이입이 힘들게 느껴진다. 유일한 군주인 왕 혹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동양의 충성관과는 달리 일본의 기사, 사무라이의 충성은 각 번의 영주에게 쏠린다. 이는 동양보다는 서양적인 충성관으로 느껴진다. 지방 관리가 중앙정부에서 보내진 공무원에 불과했던 조선을 전신으로 둔 한국 사람이라면 더더욱 거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에서는 충성의 대상인 왕이 어긋난 길을 가려고 하면 목숨이 날아가더라도 직언을 해서 바른 길로 돌려보내는 것을 충이라 보았다고 한다. 반면 일본의 경우 주군이 잘못된 길을 가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을 충이라고 보았다고 한다.&nbsp;</div><div>충의 개념이 이해되지 않으니 주군의 명예를 세우는 것이 사무라이들에게 중요한 과업임을 공감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비록 《츄신구라》 드라마에서는 마치 아사노가 키라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고의로 아사노에게 모욕을 준 것으로 묘사되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이 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설령 드라마의 묘사대로 키라가 아사노에게 모욕을 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자리에서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데에 대한 책임은 분명 아사노가 마땅히 져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드라마는 추가로 키라가 쇼군에게 뇌물을 주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겐카료세바이(喧嘩両成敗)의 처벌을 피했다는 것으로 묘사되나 이 또한 각색의 범주로 보아야 할 것이다.</div><div>《국화와 칼》에서 서술된 바에 따르면 일본인에게 있어 체면에 상처를 입은 당사자의 잘잘못은 중요하지 않다. 원인이 무엇이든 한 번 체면에 먹칠을 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당시 일본인의 도리였다. 작품을 독해하는 데 있어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츄신구라를 일본인이 좋아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이전에 등장인물의 행동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div><div><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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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4:37: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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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415 주찬 겐로쿠 주신구라 전편 The 47 Ronin 감상평</title>
         <author>iltyc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7355813</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매우 유명하며 일본에서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문학 작품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예전에 일본의 무사도 정신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느꼈다.<br>&nbsp; &nbsp;이 영화 전체의 기조는 매우 무겁다. 화면의 색채도 주로 흑백으로 억압적인 느낌을 준다. 이야기 속 주공의 죽음으로 복수의 길에 오른 46 명의 무사들은 일본 무사도에서 이런 극도의 충성심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주공을 위해 그들은 국가와 대항할 수 있고,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도 버릴 수 있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사실 매우 극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 및 기타 일본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무사도는 죽음에 대한 칭찬의 태도로 보인다. 어느 정도 죽음만이 자신의 충성과 무사도 정신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이것도 일본 무사도의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br>&nbsp; &nbsp;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무사도 정신에 대해 반 탄복과 반 찬성하지 않는다. 탄복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그들의 충성이고, 찬성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극단이다. 충성은 정말 국가와 가족보다 더 중요하는가? 만약 자신의 주공이 잘못이나 나쁜 일을 한다면, 그래도 계속 따라가고 충성해야 하는가? 나는 사람이 자신의 사고와 판단력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br>&nbsp; &nbsp;그리고 끝까지 보면 이 영화에는 싸우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수와 자살의 줄거리도 기본적으로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와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깊이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예술 차원에서 매우 우수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작품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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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4:56: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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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추신구라(드라마) 감상평 </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7501964</link>
         <description><![CDATA[<div>추신구라의 내용은 제목처럼, 충신들의 이야기를 뜻한다. 간단히 말해, 할복을 하게 된 주인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46명의 무사들이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 내내 강조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충忠의 개념일 것이다.&nbsp;<br><br>왜 46인은 공격을 하기 위해 각종 굴욕이나 고생길을 자처하는가? 그것이 忠이기 때문이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명백한 공격을 감행하는가? 그것이 忠이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공격이 성공으로 끝난 뒤 나온 할복하라는 명령에 복종하는가? 그것도 忠이기 때문이다.&nbsp;<br><br>이들은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고, 그에 따른 결과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수 있는 단계까지 공격을 보류했고,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함이 밝혀지자 자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추신구라가 보여주는 忠은 어느정도 우리에게 생각해볼 부분을 지닌다.&nbsp;<br><br>따지고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굳이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이나 고려에도 주군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은둔이나 자결을 선택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서양에도 다른 수단이 없을 때 국가나 다른 이들을 위해 자살적인 방법을 택한 자들의 전훈이 내려오고 있다.<br><br>추신구라가 전후 흥행에서 성공한 이유는 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국가나 민족을 불문하고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요소가 합쳐지면서 더욱 많은 관객들이 공감을 이뤘고, 이것이 흥행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nbsp;<br><br>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이나 고려, 서양에도 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들은 전해진다. 그럼에도 추신구라에서 다루는 忠의 개념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실질적인 현대국가의 정책으로도 이어진 사례이기 때문이다.&nbsp;<br><br>1944년 이래 종전까지 태평양 각지에서는 각종 자살공격이 이어졌다. 이는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닌, 국가가 정책적으로 이를 지원하고 추진한 결과였다. 어떤 이들은 어뢰로, 어떤 이들은 비행기를 사용해 자결을 단행했다. 물론 죽음에 앞서 몇몇 이들이 저항감을 개인적으로 표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수는 돌격을 감행했다.&nbsp;<br><br>이러한 자살공격이 큰 저항 없이 정착된 이유에는 추신구라 등에서 다루는 忠의 개념이 도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쓴 것처럼, 추신구라의 경우 국가나 상부는 자살적인 작전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할때까지 기다린 뒤, 자발적으로 작전과 죽음을 선택했다.&nbsp;<br><br>그럼에도, 전쟁 시기 일본은 이 맥락을 제거하고, 국가/상부를 위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忠이라고 선전했다. 전시 국가의 선전능력은 국민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고, 도용된 忠의 개념은 국민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忠이라고도, 어떠한 가치를 위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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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6:02: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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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추신구라 감상평 (2021110261 서가은)</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7524468</link>
         <description><![CDATA[<div>&nbsp;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카우보이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사무라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단순히 그런 이미지라고만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무사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 등의 배경지식이 없어서 조금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사무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무슨 집단인지,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해주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nbsp;   추신구라는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충이란 무엇이고, 그 충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나 체통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충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행한 것일지라도 현재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주군을 위해서 재산이나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내, 자녀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모습이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었고, 복수만을 위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듯한 분위기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중국 등 많은 나라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나‘라는 존재보다 내 위에 있는, 나보다 지위가 높은 누군가의 목숨이 더 소중했고,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충성심과 신념은 존중할 수 있지만, 비판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국가나 가족을 저버릴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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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6:13: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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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주신구라 감상평 (2020110268 오채연)</title>
         <author>ocy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7548208</link>
         <description><![CDATA[<div>사무라이의 문화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문화와 정신을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을 사무라이로 칭하며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인을 매혹시킨 하나의 이야기가 바로 ‘추신구라’이다. 드라마 추신구라에서 나타난 무사도는 평화로웠던 100년동안 잊힌 듯한 충성심을 세상에게 다시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아코 무사 47인의 복수 이야기는 현대의 일본인들에게까지도 여전히 감동을 주고 있다.&nbsp;<br><br></div><div>&nbsp;드라마를 감상하며, 지난 학기 읽었던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다루었던 내용이 함께 떠올랐다. 같은 동양권 문화를 살고 있지만, 일본과 한국에서 ‘충’이라는 개념은 사뭇 다른 듯하였다. 사실 현대인으로써 살면서 ‘충성’이라는 개념에 뜻을 품고 산 적도 없었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일본인에게의 ‘충성’이란 더욱 진지하게 다가간다고 느껴졌다. 일본인에게 충성을 다 하는 것은 곧 다른 의무를 모두 수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했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인은 충성을 곧 최고의 덕목으로써 배워왔다. 드라마 속 아코 무사 47인의 복수 또한, 진정한 무사도와 충성심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nbsp;<br><br></div><div>&nbsp;사무라이로써의 삶, 주군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온 47명의 기사들을 보며 충성심에 감탄하다가도 한편으론 복수를 떠나서 각자 개인의 삶이 없다고 느껴져 안타까웠다. 모두 각자의 삶을 포기한 채 사무라이로써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고 할복을 명 받아 끝까지 사무라이로써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 복수를 이루기 위해 포기해온 개인의 가정과, 생활과, 또 그동안의 수모를 돌이켜보았을 때, 현대를 살고 있는 감상자로써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목숨까지 바쳐 이루고자 한 복수와 복수에 이르기 위해 향해온 과정과 각오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느껴졌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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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16:26: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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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7110271 김영 추신구라 감상문</title>
         <author>rladud010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059299</link>
         <description><![CDATA[<div>  추신구라를 보면서 들은 생각은 그저 사적 제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추신구라가 벌어지는 시대상을 보면 해당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당대 일본 사회는 전국시대가 끝난 이후 에도막부 하의 평화로운 시대상에서 무사가 활약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무사의 주군에 대한 충정 즉, 무사도를 보여줄 만한 사건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사무라이 무용담에 목말라했던 당대의 사회가 추신구라를 보며 열광하게 된 것이다.</div><div>  추신구라가 가지는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에도막부 설립 전 혼란스런 사회를 지배하던 풍습인 무사도와 에도 막부 설립 후 들어선 중앙행정에 의한 법치의 대결이 표면화된 사건이다. 사무라이의 행동 원칙인 무사도를 따지면 명예를 더렵혀진 아사노의 칼부림은 정당한 것이나 에도성 내에서 칼을 뽑았다는 막부의 권위를 어기는 행동이었기에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무사도에 의하면 키라가 명예를 더럽혔음에도 처벌없이 넘어간 것은 곧 아사노 가의 명예가 훼손된 것임으로 가신들이 사적 제재더라도 키라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이는 막부가 내린 처분에 반하는 것임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넘어갈 경우 이는 막부의 권위 추락으로 이어진다. 즉, 막부는 무사의 행동원리의 맞게 행동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가당착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무사들의 복수 이후 내려진 처분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막부 입장에서는 결국 할복을 명령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웠으나 키라가문을 몰수령을 내렸다는 것, 아사노 가문을 재건시켜주었다는 것에서 완벽한 법치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은 태생이 무사 정권이었던 막부가 자신의 정체성인 무사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nbsp;</div><div>  드라마 추신구라에서는 야스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사는 어떻게 사는지보다 어떻게 죽는지가 더 중요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주군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의 강한 신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근사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목적인 충성과 사적 제재가 미덕으로 보편화된 사회가 과연 정상적일까?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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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8 21:46: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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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215472 &lt;추신구라&gt; 윤건희  감상문</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478481</link>
         <description><![CDATA[<div><br></div><div>추신구라는 일본 에도시대에 벌어진 무사들의 복수 학살글을 모티브로 한 인형극와 가부키 작품의 제목이다. 주인이 할복한 후 밑에 있던 46명의 무사들의 복수를 하는 것이고 사무라의 충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도쿠가와말에는 사무라이들의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는데도 사무라의 정신은 성립이 되었다.</div><div>사무라이로서 명예를 보여주기 위해 죽는다는 것조차 사무라이만들이 할 수 있다고 미화된 점 도있다. 추신구라이야기는 사무라이들의 주인의 대한 복수라고 낭만화 시켰다. 이 때문에 지금 일본들의 국민들한테 많은 영향이 된거같다. 주인을 위해 몸 바쳐 싸우고 죽음을 무릎 쓴 사무라의들의 용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러한 희생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일본들 스스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게 된거같다. 주신구라의 이야기는 일본인들을 단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있는거 같고 지금까지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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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3:13: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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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3 엄희경 The 47 Ronin 감상평 (겐로쿠  추신구라)</title>
         <author>cord2001030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600815</link>
         <description><![CDATA[<div>the 47 ronin(겐로쿠 추신구라)는 에도 성내에서 칼을 빼면 안된다는 금기를 어겼다는 억울한 이유로 할복하게 된 아사노 나가노리의 복수를 위해 46명의 사무라이 들이 나가노리의 복수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nbsp; 46명의 사무라이들은 나가노리의 복수가 실패했을 시,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뿐만아니라 46명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가족, 부, 모든 것을 버리며 에도 막부에 대항한다. 그리고 그 결심은 충성심, 즉 忠에 기반했다. 어떻게 '忠'이라는 가치가 가족, 목숨, 부 다른 가치들 보다 우선시 될 수 있을까. 47로닌을 감상하며, 다른 가치들보다 충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현대인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는 충이라는 개념은 점차 약화되고 있고 등한시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47로닌에서 忠을 우선시 하는&nbsp; 46명의 사무라이들의 가치관을 통해 당대 일본 무사도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에도 당시의 무사도 정신은 꽤나 강압적이거나 극단적이라고 생각된다. 가족, 부, 목숨보다 우선시 되는 忠은 옳은 것일까.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의 가치관을 옳다 그르다 재단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에도 당시의 가치관에서는 그것이 옳다고 여기어 졌으며, 47로닌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마 그들의 무사도 정신, 그리고 忠의 정신을 접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세대와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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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4:53: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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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30009  우스키 스미레 </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622058</link>
         <description><![CDATA[<div>‘추신구라’는 일본에서 매우 인기가 많은 「時代物(지다이모노)」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역사상의 인물에 열광하는 여성들,「歴女(레키죠)」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레키죠’란 ‘역사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나타내는 말이며 마치 배우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처럼 역사 굿즈를 모으거나 성지순례를 하는 여성들을 가리킨다.&nbsp;</div><div>&nbsp;</div><div>이번에 ‘추신구라’에 관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레키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또 다른 역사 작품,「白虎隊の悲劇(백호대의 비극)」이 떠올랐다. ‘백호대의 비극’은 그 결막, 작품내내 나타나는 무사도 정신, 그 당시의 독특한 사생관 등 ‘추신구라’와 공통점이 많아 지금도 ‘레키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작인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다. 여기서부터는 ‘백호대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사무라이’들의 탁월한 충성심, 나아가 그 당시의 특이한 사생관을 알아보도록 하겠다.&nbsp;</div><div>&nbsp;</div><div>1868년. 메이지 신정부군과 후쿠시마현 「会津藩（아이즈번）」을 비롯한 구막부군 간에 「戊辰戦争(보신전쟁)」이 일어났다. 아이즈번에는 엘리트 무사를 양성하기 위해 10대 청소년으로 구성한 소년병 부대, ‘백호대’가 소속되어 있으며 그들이 보신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nbsp;</div><div>그러나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졌다. 신정부군의 추격에 쫓겨 20명의 백호대 패잔병들은「飯盛山（이모리야마）」로 피신하게 되어 그들은 거기서 본거지인「鶴ケ城（쓰루가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실제로는 쓰루가조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난 연기였지만 이를 보고 「落城(낙성)」을 오해한 이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장렬한 최후가 낫다”며 집단 자결을 택했다. 그 중 한 명이 살아남아 이들의 최후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div><div>&nbsp;</div><div>&nbsp;여기서 알 수 있는 ‘백호대의 비극’과 ‘추신구라’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죽음의 추구’이다. ‘백호대의 비극’애서는 소년들이 전쟁에 패배하여 패잔병로써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집단 자결을 하고 만다. ‘추신구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치욕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무사로서의 충성심을 지키며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복수를 결행하며 그 후 할복을 하게 된다.&nbsp; 이처럼 당시는 ‘생’보다 ‘사’에 초점을 둔 시기였다는 것, 충성을 지키면서 죽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 두 작품의 검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사생관이지만 이는 ‘사무라이’ 뿐만 아니라 70~80년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분명히 존재한 사상이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 「神風(가미카제)」라고 불리는 비행기 자폭 테러 전술 및 이를 위한 특공대를 구성했다. 이 당시는 적극적으로 ‘가미카제’을 지원하여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져 있었던 시기였다. ‘사무라이’ 때부터 2차대전 때가지 이어진 ‘아름다운 죽음의 추구’를 우리는 여러 작품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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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5:10: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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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195 추신구라 감상문</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646332</link>
         <description><![CDATA[<div>오늘 수업을 배우기 전에는 추신구라에 대해 조금도 잘 알지 못한다. &lt;최후의 추신구라&gt;를 보고 "추신구라“라는 말을 익히고 일본 무사도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다.1701년 아코번 번주 아사노 다토미노카미가 에도성에서 분쟁으로 기라 고즈케노스게를 찔렀고 막부로부터 당일 활복을 선고받았다. "막부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일년 후 47명의 아코 낭사가 기라 고즈게노스게의 저택에 침입하고 기라를 죽이고 막부에 자수한다. 막부의 최종 타협적인 판단은 47명 낭사를 활복시했다. 그것은 무사만이 누릴 수 있는 존엄한 죽음이다.<br><br><br>이런 이야기는 중국 역사에서 &lt;수호전&gt;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lt;수호전&gt;의 기본 모티프는 북송 시대 산동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송강 무리의 기의(起義) 사건이다. 역사책에는 송강을 비롯한 36인이 기의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서 정벌되었다고 매우 간략히 기재되어 있지만, 이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등장인물은 점차 108인으로 증가하고 보다 흥미진진한 허구화된 영웅담으로 발전해 갔다.&lt;수호전&gt;에는 무려 108명의 비범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각각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이 대개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108명 모두 뚜렷한 성격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추신구라를 보면 리더로서의 오이시 구라노스케 외에는 46명 낭사들의 성격 특징을 잘 알지 못한다.<br><br><br>'추신구라'와 달리 &lt;수호전&gt;은 의협정신과 유가사상을 핵심가치로 전한다.&lt;추신구라&gt;영화 전체를 보면서 무사도 정신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무사도 정의에 대한 내용을 검색해봤다.'일본의 무사계층에서 발달한 도덕. 가마쿠라시대에서 발달해 , 에도시대에 유교 사상에 뒷받침이 되어 집대성, 봉건 지배체제의 관념적 지주가 되었다. 충성, 희생, 신의, 염치, 예의, 결백, 꾸밈없음, 검약 등을 중시한다. 일본사에서 무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부터이다. 그 후 메이지유신까지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다. 이것이 시사해 주는 점은 일본이 '칼을 찬 무사의 나라'라는 점이다. 일본과 중국, 한국 등을 비롯한 소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만큼 독특한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충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에서 충(忠)보다는 효(孝)가 강조되고 있는 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화 속 사무라이들의 복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고 그들은 선악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충성 여부를 따지는 불공정한 막부 장군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근세의 무사도는 죽음으로의 충성과 군주에 대한 절대충성의 도덕으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다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막부의 타협과 후세의 칭송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일본인에게 집단성이 강한 이들의 습관은 그들의 역사문화적 기호를 생활 속에 녹여냈다. 사람은 중후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고 고무시켜야 한다. 무사는 본보기가 필요하고 방향이 필요하다. 이러한 충의가 강한 사건도 당연히 천황과 같은 고중앙집권적 지배계급에 의해 추앙되었다. 그들에게는 충성심이 필요하다. 비로소 일본 무사의 미학을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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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5:32: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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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7 김여경</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651843</link>
         <description><![CDATA[<div>최후의 추신구라 감상문<br> 영화 감상에 앞서, 『주신구라』라는 작품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일본 고전 문학 작품이다. 『주신구라』는 &lt;아코 사건&gt;을 배경으로 해 창작된 작품이며, 개인적으로 일본의 ‘충’의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보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보다 주군에 대한 충심을 더 중요시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이해가 안되면서도, 책을 읽어가며 그들에게 공감이 되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주군의 복수가 성공했을 때 같이 기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감상한 영화는 &lt;최후의 추신구라&gt;로, 실제 아코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아코 사건의 결말은 봉기를 일으켜 결국 주군의 복수를 끝마친 47인의 사무라이들의 할복이었지만, 영화는 살아남아 거사를 함께한 사무라이들의 유족을 도와주라는 오오이시 구라노스케의 명을 받은 테라사카 기치우에몬이 그를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주신구라』에는 주군의 복수를 이행해 가는 가신들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그들이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영화에 나타나는 그 이후 유족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족은 자신의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복수라는 선택을 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또한 아코 사건이 끝난지 17년이나 지났음에도 주군의 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기치우에몬의 모습, 오명을 쓰고 세간의 온갖 질타를 받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주군의 밀명을 이행하는 마고자의 모습과 카네가 오오이시의 숨겨진 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시집을 가는 장면에서 함께 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수많은 기사들의 모습, 아코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것이 범법이었다는 것을 아는 시로지로가 아코 낭자인 기치우에몬에게 깍듯이 대하는 모습, 오오이시의 딸이라면 훌륭한 며느리감이라 말하는 모습 등을 통해 당시 ‘충’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div><div>영화는 ‘인형극’과 함께 전개되는데, 이 인형극의 내용은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비롯하여 영화의 결말에 대해 어느정도 예상가능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오오이시의 숨겨진 딸인 카네는 인형극을 보고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돌봐주었던 마고자에 대한 연심을 깨닫게 된다. 인형극의 결말은 금지된 사랑을 해버린 남성과 여성의 동반자살이지만 기치우에몬은 카네를 거부 포목상의 며느리로 시집보내고 할복을 선택한다. 사실 기치우에몬의 카네를 향한 마음이 부성애인지 아니면 연심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카네가 시집간 그날 밤 혼자서 자결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카네를 훌륭히 키워내 좋은 곳에 시집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주군을 따름으로써 충을 다한 것, 혹은 카네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었으며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부성애인지 연심인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할복인지 등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할복한 마고자에게 그가 진정한 아코의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외치는 기치우에몬의 대사와 함께 당대 일본인들에게 있어 무사 정신과 충이라는 것의 가치와 무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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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5:37: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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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49 소유란 - 주신구라</title>
         <author>happycow2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702772</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인에게 있어서 '충(忠)'이란 무엇인가? 지난 학기에 루스 베네딕트의 &lt;국화와 칼&gt;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일본의 '충'이란 다른 국가와 구별되는 독특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서양권 문화뿐만이 아니라 같은 동양권 문화 내에서도 일본의 '충'은 한국이나 중국 등의 나라가 정의하는 '충'과 다르다. 특히 사무라이에게 '충'이란 주군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자 무사의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한국 문화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개개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충'은 비판받을 일일까, 혹은 말 그대로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질 일일까?<br><br>&lt;주신구라&gt;에서 사무라이의 목숨은 인간의 목숨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잘못 작동했다고 해서 폐기 처분되는 기계처럼 그들의 목숨의 가치는 상당히 낮아 보였고, 더군다나 먼저 명예를 훼손한 기라 가문은 조금도 처벌받지 않았다. 필자는 그들이 진정으로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서 그 길을 택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lt;멋진 신세계&gt;에 등장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사람들(소설에서는 이들을 '기계 부품처럼 작동한다'고 묘사함)처럼 사무라이 또한 그저 주어진 길을 따라가도록 교육받고 자신도 모르게 강제당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무라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정말로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br><br>사무라이들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가정도 역경에 휘말리게 되었고 가문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에게는 어떻게 사는지보다 어떻게 죽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가 배제된 삶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충'만을 좇아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선택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자 최고의 덕목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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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6:17: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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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추신구라 감상평 2018113414 강영화</title>
         <author>9rjbjr8xjj</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722146</link>
         <description><![CDATA[<div>개인적으로는 추신구라(忠臣藏)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해하고 일본인들이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이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이 영화에 나타난 주군(主君)의 복수무사 정신이 마음에 들었다.일본 무사의 명예훈련에서 무사는 주군에 대한 복종과 충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충신장'의 이야기는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吉良는 浅野의 출신과 달리 귀족 출신인 吉良가 浅野를 도와주기를 거부해 浅野가 의식상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br>모욕감을 느낀 아사노는 의식 마지막 날 칼을 뽑아 吉良를 베었다.<br>이에 장군 쓰나요시(綱吉)의 명령으로 다음날 할복자결하고 가문 전체의 무사 명분을 폐지하였다.<br>이 대목은 사실 중국 고대의 역사와도 비슷하다.중국 고대의 황제에게도 잘못을 저지른 대신을 사형에 처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심각한 사람은 가족 전체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그러나 일본이 독단정치에서 문치정치로 전환한 시기였기 때문에 吉良는 처벌받지 않았다.<br>하지만 당시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둘 다 처벌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했다.무사 수행에 대한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요구대로라면 무사는 순결하고 편집적이며 주군(主君)에 충실한 가신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그래서 나중에 복수하는 에피소드가 생겼습니다.47명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는 모습을 보며 충의 있는 무사정신이 존경스럽다는 것을 느꼈다.<br>그 사건은 '무사도'와 '충'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를 잘 보여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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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6:31: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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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3 정은채 주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spring_c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768003</link>
         <description><![CDATA[<div>주신구라 드라마는 자신들이 삼은 주군인 아사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한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의 정신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가문은 그 사람의 전부였을 것이고, 가문을 지키는 것이 나의 가족을 지키고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무사라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는 모르겠지만 ‘희생’을 통한 복수는 잘 이해가지 않았다. 정말 가문을 위한 복수인지도 잘 판단이 되지 않고 그저 허울만 존재하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일을 위해 목숨까지 담보잡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문화가 현재에 빗대서 보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이지 않을까 싶다. 공동체 역시 중요하지만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div><div>&nbsp; &nbsp;</div><div>이 사람들, 아사노의 복수를 하기 위한 46인의 무사들을 우리는 충신이라고 불리운다. 그렇다면 충신은 과연 무엇일까? 가문을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사람을 물론 충신이라고 부르겠지만, 이들이 정말로 충신일까? 궤변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충’이라는 개념은 제일 알기 쉬우면서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아사노, 그들의 주군을 위해 칼을 들었겠지만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칼을 들었다는 것을 자꾸 의심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사노를 위해 키라를 암살하려고 하는 사무라이의 정신을 보며 용맹함을 느꼈다. 끝까지 남은 그들의 충은 의심을 덜도 바라보고 싶다.</div><div>&nbsp; &nbsp;</div><div>또, 아사노의 처벌이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키라가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도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현대의 법감정에서 보았을 때는 다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파괴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그의 할보기 너무 빨리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삼심제도를 비롯한 재판기구가 없었으므로 막부가 처벌이 내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너무 빠른 결정이 아니였나 싶었다. 현재에 비추어볼 때 우리 역시 과거보다는 더 나은 제도를 갖추었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판단으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긴 숙제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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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7:02: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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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6 고가연 추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835136</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인들의 눈에 사무라이라는 캐릭터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올곧은 신념과 지조, 그리고 충. 일본이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사무라이 캐릭터는 대부분 충과 명예 의식, 그리고 높은 기개를 드러내는 인물로 표현된다.&nbsp;</div><div>&nbsp; &nbsp;</div><div>추신구라 또한 마찬가지이다. 47인의 사무라이는 주인을 향한 충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키라 가문의 몰살을 향했고 이는 그 행위의 적정도를 떠나 추신구라가 처음 나왔던 당시 시대의 사람들도 그 의리와 기개에 반했으며 현대의 사람들도 아직까지 해당 작품을 그렇게 받아들인다.</div><div>&nbsp; &nbsp;</div><div>나는 이 작품을 보며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떠올랐다. 라스트 사무라이 또한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천황에 반발하는 일본의 전통, 고유 정신을 지키기 위한 사무라이 집단이 일으킨 전쟁을 그려내는 영화다. 천황의 군 교육을 위해 서양에서 파견된 주인공이 결국 일본 사무라이 정신에 반해 그들의 편에 서서 일본 고유의 전통과 사무라이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어떠한 한 대상을 향한 사무라이들의 절개와 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와 추신구라는 굉장히 비슷하다. 내가 시청한 ‘추신구라 1/47’ 드라마는 주인공이 가문의 사위로 들어갈 때 자신의 성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 가문의 성. ‘호리베’를 택한 면모부터 결말까지 쭉 주인공의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라스트 사무라이는 결국 서양인도 반한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설정을 내세워 일본 사무라이 정신에 정당성과 매력을 부여했다.</div><div>&nbsp; &nbsp;</div><div>그러나 두 작품을 동시에 비교하며 나는 꾸즌히 느껴지는 아이러니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을 구분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사무라이들이 내세우는 ‘충’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주인을, 그리고 자신들의 명예와 일본 전통 사무라이 정신을 향한 자기희생적 태도는 높게 평가될 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이 행하는 행위가 전부 충을 표방해 미화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도 떨쳐낼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충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동양 사상을 포함해 서양에도 존재하는 정신이지만, 일본이 강조하는 사무라이의 충 정신은 제국주의 정신과 이어진다고도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모든 행위가 충으로 미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 또한 이와 일맥상통한다. 주인, 다시 말해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에게 부도덕적이며, 도의에 어긋나는 제국주의 정신을 요구한 카미카제 전술이 세계 대전에서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div><div>&nbsp; &nbsp;</div><div>이는 사무라이 정신, 일본인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이며, 본인들과 그 나라에 대한 자존심을 고취하는 요소일지는 몰라도 외국,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여러 의문점이 남는 요소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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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7:47: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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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3059 최재혁 추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choi_jaehyu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866547</link>
         <description><![CDATA[<div>&nbsp;추신구라는 주군을 잃은 47명의 로닌들이 복수를 다짐하고 주군을 죽음으로 몰게한 인물을 처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 단어로 말하자면 '와신상담' (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릎쓰는 것) 이라는 사자성어가 제일 걸맞는 말인 것 같다.&nbsp;<br>&nbsp;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에서도 나왔듯이 그들은 한가지의 목표에 결심하여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데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면서, 심지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내를 유곽에 파는 것으로부터 거사를 달성하기 위해 일부러 술주정뱅이인척을 하고 주변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nbsp;<br>&nbsp;이러한 면모를 보이면서 일본의 무사(사무라이)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이 다른 덕목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이야기인 것 같다.&nbsp;<br>&nbsp;하지만 그들의 거사는 자신들의 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로닌들은 자신의 주군이 한 짓이 천황이 거주하는 장소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이기에 거사를 치룬다는 것은 천황에게 반기를 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로닌들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자신들의 오점과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덕목을 달성하기 위해서 '할복자살'을 시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 중 47명 중 46명은 그걸로 인해서 죽고 말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이야기가 아직도 화자되고 있는 명예롭고 충직한 사무라이들이라고 불려지고 있다.<br>&nbsp;나머지 한 명은 이 이야기가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살아남게 되었고 아마 이 사무라이가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했기에 이렇게 일본의 유명한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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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10: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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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2 김기려</title>
         <author>Giryo</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878081</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자신의 사적인 복수가 아닌 자신의 주인(?)을 위한 복수극이었다는 점에서 신기하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모나 스승의 원한을 갚는다면 효나 충이라고 합리화를 해볼 수 있지만 주인을&nbsp; 위한 원한은 잘 이해가 가지않았다.&nbsp;<br></strong><br></div><div><br></div><div>&nbsp;그리고 할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나는 이 관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선 일본에서만 보이는특이점이기도 하고 충성심을 왜 생명으로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nbsp;</div><div><br></div><div>이거랑 비슷한 작품도 생각났는데 ‘최후의</div><div>사무라이’가 생각이 났다. 일본은 사무라이에 대한 의지나 사상을 고고히 여기고 할복을 명예롭게 여긴다. 하지만 ‘충성’으로만 사람을 판단했던 것 같아서 이질감이 든다. 사무라이를 왜 이렇게 사랑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새삼우리나라에도 사무라이같은 존재가 있나 궁금해졌다. 아사노 가문의 사무라이들이 잘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당시의관념이라고는 하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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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18: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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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신구라 감상문 （황목자 2020113205)</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882988</link>
         <description><![CDATA[<div><br><br>&nbsp; &nbsp; &nbsp;&nbsp;영화는 1701년 아코가 천황의 사자를 다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주와 무사의 관계는 공생이다.가주가 없으면 무사는 낭인이 되고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다.반대로 무사의 지킴이가 없었다면.번국에도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가주가 사고를 당하자 그들은 순순히 성을 내주지 않았다.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복수가 완성됐다.이는 막부시대 일본 문화의 완벽한 구현이다.무사도는 일본의 명족 정신이다.무사도의 큰 특징은 충성스럽고 절대적인 충성심이다.극 중 46명의 사무라이들의 충성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가주를 위해 모든 생명을 버릴 수 있다.<br>&nbsp; &nbsp; &nbsp; &nbsp;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나는 사무라이 정신은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일단 한편으로는 그 충성 위주의 정신은 찬양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극 중 가주가 죽은 뒤 이토록 많은 충성을 가진 무사가 그를 위해 복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예를 들어 2차대전 때 군국주의자들은 일본 청년들의 정서를 이용했다.비행기를 몰고 미국의 군함을 들이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국할 것을 독려했다. 맹목적으로 충성해서는 안 된다.그래서 저는 무사도 정신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br>&nbsp; &nbsp; &nbsp; &nbsp; 이 영화는 1941년에 개봉했지만 영화의 예술적 가치도 우수하다.그리고 이 사건도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주신구라가 이렇게 많은 것을 리메이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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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21: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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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4110282 윤녕후 추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888094</link>
         <description><![CDATA[<div>추신구라를 3부작 드라마로 접하게 됐다. 겐로쿠 시대, 나카야마 야스베라는 무사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스가노에게&nbsp; 거두어들여져 성장하게 된다. 스가노의 적인 3명을 혼자 쓰러뜨린 사실이 조금 부풀려져 18명을 혼자 상대하여 이겼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되고 당대의 권력가인 키라 코우즈케노스케의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다. 오히려 진심을 보인 호리베가에 사위로 들어가며 호리베 야스헤이가 된다. 이후 아사노 타쿠미노가미는 키라에 대한 상납을 거절하다 칼부림을 부리게 되고 결국 할복을 명 받고 죽는다. 이에 휘하 47명의 낭인들이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이다.<br> 문학 작품은 그 사회의 가치관과 염원을 담기 마련이다. 추신구라에는 일본 사회가 바라는, 혹은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이 사무라이 캐릭터들에 녹아들어있다. 호리베 야스헤이는 무사로서의 의리와 수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아사노가 궁지에 몰리자 타타미 장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오오이시가 아사노의 복수를 거부하자 막부의 장군의 뜻에 반하는 행동도 하는 인물이다. 즉 이 작품에서 일본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인물의 특성은 자신의 본분을 알고 그를 위해 손익을 따지지 않고 앞장서 행동하는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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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25: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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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5 이세영 주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jennyda10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926225</link>
         <description><![CDATA[<div>아사노는 기라의 시비와 멸시를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그에 막부 측에서는 할복으로 잘못을 사죄하라고 명령했으며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가문을 멸하는 처벌까지 내렸다. 아사노 가문의 무사들은 어찌 두 사람의 주군을 섬길 수 있냐며 자발적으로 낭인이 되기를 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낭인의 생활은 버거워졌고 막부 측에 아사노 가문의 부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에 따라 47명의 낭인들은 주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기라 가문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기라의 목을 베었다. 과연 47명 모두의 복수는 오로지 주군을 향한 충성심에서만 비롯되었을까? 낭인 생활이 힘겨워져 삶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사리사욕이 진정한 기폭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아사노 가문 무사들이 기라 요시나카 집에 몰래 침입하여 습격했을 때 기라만 죽였어도 충분히 복수가 되었을 텐데 다른 집안 사람들까지 몰살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충'이라는 신념을 위해 비인도, 비윤리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는 사무라이 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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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50: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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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143 김준형 추신구라 코멘트 페이퍼</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930655</link>
         <description><![CDATA[<div>실화에 바탕을 둔 ‘추신구라’ 이야기는 일본인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이야기이다. 근래까지도 수많은 미디어 믹스에 직접 등장하거나 모티프로 차용된다는 점에서 현대에 이르러서도 제법 매력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사무라이 모티프는 일본의 사극뿐만 아니라 『47로닌』, 『라스트 사무라이』 등 해외의 작품에서도 차용되는 점도 주목해 볼만 하다. 또 최근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귀멸의 칼날』 역시 사무라이 모티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와 같이 ‘사무라이’,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편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사무라이’ 혹은 ‘사무라이 정신’이 현대의 창작물에서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div><div>드라마 『추신구라』에서도 그러하듯 사무라이, 혹은 사무라이 모티프 서사에서 주동인물은 의협심이 투철하고 의리가 있으며 충의를 아는 인물이다. 드라마 『추신구라』에서는 영주 ‘아사노’와 ‘호리베’를 비롯한 47명의 무사들을 통해 이를 그려낸다. 그러나 원전 ‘추신구라’와 사무라이 모티프를 차용한 여러 서사는 현대의 문화 비평에서 많은 비판을 받은 바가 있다. 주로 세계 제2차 대전과 관련하여 전체주의적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과 근대에 이르러 재발견된 전통이라는 점이 중심적으로 조명된다. 특히 『국화와 칼날』에서는 군국주의의 만악의 근원이 된 사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개별 작품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추신구라의 경우 행위의 정당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주를 이루고 『47로닌』 등 해외의 사무라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이 짙게 묻어난다는 비판이 있었다. 『귀멸의 칼날』 역시 군국주의 시절을 연상시키고 조직 체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인물에 대한 비판 등을 꾸준히 받는 중이다.</div><div>그럼에도 현대에도 이러한 모티프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비슷한 결을 가진 해외의 작품을 살피고자 한다. 서구의 기사문학을 비롯한 ‘기사물’, 홍콩의 느와르 영화, 한국의 조폭 영화, 할리우드의 갱 영화 등은 사무라이 모티프를 차용한 서사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한다. 이들 서사는 대상의 실제 사회적 인식과 무관하게 이들을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이들 역시 꾸준히 비판을 받아온 한편으로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무라이 모티프 서사와 서사 내/외적으로 유사한 면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사의 이미지 상 골자가 되는 ‘낭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이들 작품은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이 등장한다. 이 조직 내에서 일반적으로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상급자는 ‘존경할만한 인물상’으로 묘사된다. 이 환경 내에서 인물들은 서사 전반에 걸쳐(주로 희생 혹은 연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의리, 충의 등의 가치를 형상화한다. 위와 같은 요인으로 소위 ‘의협물’이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무라이 모티프 서사는 여기에 일본전통의 색채를 입힌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일본 옷을 입음으로 해외의 의협 서사와 다른 매력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선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서사가 ‘에그조티시즘(타문화 선호 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되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한편 일본인이 사무라이 모티프 서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본 특유의 자국 전통에 애착을 보이는 현상의 동일선 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사무라이 모티프 서사는 일본적 테이스트가 가미된 의협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사무라이 모티프가 현대의 많은 창작물에서 차용되는 이유는 그 자체의 특수성에서 찾기보다는 ‘의협물’의 특수성, 일본 국내외의 ‘일본 선호 현상’과 관련지어 탐색해야 할 것이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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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53: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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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9 추신구라 감상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934052</link>
         <description><![CDATA[<div>&lt;추신구라&gt;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생사를 경시하며 의리를 중시하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군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 같은 계급의 친구에 대한 신뢰, 지고무상의 명예에 대한 존중, 모욕, 비방에 대한 모든 복수를 무릅쓰는 가신이 있습니다.무사도의 의리도 중요한 존재여서 일본인들이 모욕을 참고 살 수 있고, 폭발하는 데 광적으로 뛰게 할 수도 있습니다.사무라이 정신을 추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개인적인 감정, 심지어 생명까지 희생시켰습니다. &nbsp;<br>&lt;추신구라&gt;일본의 민족성과 일맥상통합니다.일본인들은 치욕을 덕행의 근본으로 삼을 정도로 극단적인 표현으로 적절한 자결로 무명을 씻고 배를 가르는 일이 성행했습니다.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일본인의 성격에도 사무라이 정신은 은연중에 감화되어 있습니다.지금은 무사도에 대한 실재는 없지만, 무사도의 정신은 항상 존재합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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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8:55: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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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3</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972071</link>
         <description><![CDATA[<div>&lt;최후의 추신구라&gt;<br>마고자가 자기를 희생해, 오이시사마의 따님을 키우려고 배신자라는 명을 붙게 되어 16년 살아왔다. 마고자가 명령을 받고 살아왔지만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아 심리적 그 부끄럼과 미안함이 얼마나 큰지도 모른다. 남에게 밝힐 때도 자기가 더 이상 무사가 아니, 상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카논 시집가고 나서 또 유우에게 자기가 무사라고 말했고 할복하였다. 그 것은 마고자가 무사로서 그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div><div>&nbsp;</div><div>내 생각은 죽는 것은 무섭지만 남아있는 사람이 더 힘들다. 유족인지, 도망간 자인지 다 똑 같다. 마음에 있는 그리움이나 자책감 더 사람을 괴롭게 한다. 나였다면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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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9:21: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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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 [주신구라] 감상문</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8983699</link>
         <description><![CDATA[<div>&nbsp;[주신구라]는 '아코 사건' 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사건을 인형극과 가부키 대본으로 만든 것으로, 오랜 시간동안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이야기이다. 사무라이들의 정신과 당대 시대상과 사회적 분위기 등, 본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꽤나 의미가 큰 것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 짚어보아야 할 점은, 과연 일본인들이 이 작품을 몇 백년의 시간 동안 사랑해 온 이유는 무엇일지가 되겠다. 본작의 어떠한 점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렇게도 오랜 시간동안 이 작품과 이야기를 향유해왔던 것일까?<br>&nbsp;에도 시대 이후 일본에는 '법치' 라고 하는 가치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무사도' 의 본질성과 양자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더 이상 일본은 전국 시대 때의 사회처럼 혼란하고 여러 세력이 자웅을 겨루는 사회가 아니었다. 오랜 혼란기를 겪으며 사무라이들의 무사도는 중앙집권화된 막부의 통치 방식과 부딪히기 시작하였고, 본작의 역사적 사건이 되는 '아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력과 폭력을 통해서라도 주군의 복수를 하는 것,&nbsp; 그리고 본인들도 할복을 통해 결백을 주장하는 이 행위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 당시에 새로 바뀌기 시작한 '법치' 의 일본 사회에서도 이 논쟁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사회적 / 도덕적 가치에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논란을 가지고 있는 이 사건은 어떻게 [주신구라] 라는 전설이자 이야기로 민간에 전해지고,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br> 이 당시 일본 민중들이 막부의 유교적 법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본작의 사건을 충절과 의리의 가치로 이해하였고, 현대 일본 사회에 까지 전해내려오는 전설로 이어왔다. 봉건적 가치를 벗어난 현대의 일본 사회에서도 충절과 충성 등의 가치로서 이해되고 '본받을 만 하다' 라고 여겨지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신구라]가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 측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본작의 사회 도덕적인 결론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담긴 긍정적인(이라고 해도 다른 문화에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가치를 읽은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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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9:29: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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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최후의 추신구라 감상평</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10776</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주신과 가신, 충, 의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전에 &lt;라스트 사무라이&gt;라는 작품을 볼 때 '일본에게 사무라이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이 사무라이란 존재에 대해 가진 의미를 현대에서 여러 방법을 통해 그 특별함을 표현하고 기록한 것 같았다.&nbsp;<br>&nbsp;영화에서 마고자는 주신에게 받은 명령을 16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고 이후에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결국 할복을 감행한다. 심지어 할복으로 죽지 않자 한번 더 자신을 벤다. 47인이 복수를 감행한 후에 스스로 할복을 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의지가 강할 때의 할복, 그리고 다수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에 대의를 위한다는 생각이 좀 더 강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에몬의 명령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복수가 아니었고 그것을 16년이나 받들었고 결국 완수까지 했다. 이전에 누군가를 죽인 후 할복한 47인과는 상황도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 16년동안 겉으로는 무사가 아닌 상인으로 살아왔고 '카네'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키우는 일도 했다. 그 긴 시간이 지나서 임무를 완수했는데 할복까지 한 것은 '충'의 관점으로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과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가신들이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충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nbsp;<br>&nbsp;그러나 마고자에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은 도망친 자였다는 오해를 오랫동안 받아왔고, 물론 아니었지만, 따라서 이전에 미리 할복한 47인처럼 무사로서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 같다. 오이시의 자녀인 카네에게도 계속 무사의 딸임을 잊지 말라고 하고 자신도 무사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온 것이 작품 속에 계속 나타났기 때문이다. <br> 작품을 보면서 무사도 정신을 여느 사상으로 빗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사상이 인간의 목숨에 영향을 줄 만큼 관여하도록 두어야 하는지, 과거 무사의 대의명분을 현대의 관점에서 판단해도 되는 지의 큰 두 가지 생각은 작품을 다 감상하고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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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09:47: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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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50 &lt;주신구라&gt; 감상문</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33737</link>
         <description><![CDATA[<div>드라마 주신구라 1/47의 이야기는 섬겼던 주군의 복수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행한, 목숨을 건 충(忠)의 이야기다. 작품을 보면서 주인공인 호리베 야스이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끝끝내 해낸 복수는 현대까지도 이 이야기가 인기를 얻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div><div>‘충’의 정신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이다. 왕에 검을 바치는 영국의 기사도, 목숨을 걸고 간언을 바치는 한국의 충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발현하는 현태는 각자 다르더라도, 중심에는 중앙통치를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한 의도가 공통적으로 담겨있다.</div><div>하지만 추신구라를 통해 본 일본의 충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는 것 같았다. 충을 바치는 대상을 마치 본인과 동일시하는 듯 절대적으로 따른다. 그것이 이미 그 주군이 죽고 허물만 남은 명예와 같은 추상적인 것일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복종적이고 세태에 맞지 않는 비합리성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무사도는 ‘타(他)’가 아니라 ‘아(我)’를 위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드라마 초반에서 야스이를 여러 곳에서 데려가려 할 때, 야스이는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며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복수를 위한 교토행을 거절한 사토시를 질타한 것도, 끝끝내 아내와 헤어지고 복수를 행한 것도 그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만약 주군이 그 신념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된다면, 무사로서 그는 주군을 따랐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div><div>이처럼, 일본의 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이를 잘 담고 있는 &lt;주신구라&gt;는 이런 일본의 정서와 특징을 생각해볼 수 있었던 좋은 작품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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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0:03: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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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0 시문옥 The 47 Ronin감상문</title>
         <author>moono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50539</link>
         <description><![CDATA[<div>忠臣藏의 이야기가 일본에서 이렇게 인기가 많이 받은 이유는 일본 사무라이의 미학을 잘 구현했기 때문이다.서양인들은 일본인의 인생관이 민담이나 소설,연극을 결말을 짓지 못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이들이 흔히 말하는 것은 주인공이 '정의와 감정','충과 효','정의와 의무'의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주인공의 실패는 그가 감정에 사로잡혀 '정의'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아니면 충효가 양쪽을 다 못 봐서 그런 거 같다.정에 못 이겨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다가 정에 못 이겨 가족을 희생시킨 것이다.이렇게 그려진 충돌은 여전히 의무 간의 충돌이며 둘 다 구속력이 있으면서 다 선행이다.이 같은 스토리는 능동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표현한다.주인공들은 어떤 의무를 다하면서 다른 의무를 무시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주인공이 그가 간과했던 의무를 청산하는 것으로 끝난다.이 이야기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위상은 비길 데가 없다.대대로 이 낭인 47명의 묘소는 줄곧 순례의 성지였다.그 주제는 주군에 대한 정을 핵심으로 한다.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정과 충,정과 정의의 충돌,단순정과 무한정의 충돌이 묘사돼 있다.물론 이런 충돌에서는 정이 정의의 자세로 이기는 경우가 많다.이 역사 이야기는 봉건제도가 한창이던 1703년에 일어났다.근대 일본인들의 상상대로 그때의 남아들은 모두 대장부였고 정을 이행할 때는 마음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47명의 영웅들이 의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명예,아버지,아내,동생,정의을 포함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게는 어느 낭인이 복수에 나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를 기방에 팔아넘겼다.그의 아내의 형님도 낭인의 한 사람이다.복수의 비밀이 여동생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낭인은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여동생을 직접 죽이려 한다.다른 낭인이 장인을 죽였다.또 한 낭인은 여동생을 吉良侯의 집에 들어가 하녀 겸 시첩으로 삼게 해 복수 시기를 궁내에서 알아보도록 했다.이 행동은 그녀를 사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수 없게 하였는데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길양후의 편에 서게 되었으며 그녀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오점을 씻어야 했기 때문이다.그들은 주군의 두 차례 피로 물들인 패도를 가지고 吉良侯의 수급을 들고 줄지어 아사노의 묘소로 향했다.이 낭인들의 행동은 동경을 뒤흔들었고 온 도시가 기뻐하며 그 의거를 칭찬하였다.이들을 의심했던 가족들은 앞다퉈 이들을 끌어안으며 경의를 표했다.귀족들은 길을 따라 그들을 대접했다.이들은 묘소를 찾아 수급과 패도를 묘 앞에 바치는가 하면 망군을 알리는 추도사를 읽었다.이들은 정의 의무를 다했다.그러나 이들은 아직 충을 다해야 하고 죽어야만 양쪽이 모두 원만하다.일부 사람은 그들이 옳다는 인증한다.그들은 일종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사무라이의 충성을 최대한 살리고 망주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이다.이미 배가 된 마당에 낭인 47명의 희생은 무의미하다는 말도 나온다.이런 희생 때문에 막부의 타협이,후세의 칭송이 나올 수 있다는 관점도 있다.일본인에게 집단성이 강한 이들의 습관은 그들의 역사 문화 부호를 생활 속에 융합시켰다.대중은 중후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고 고무시켜야 한다.무사는 본보기가 필요하고 방향이 필요하다.그들에게는 충성이 필요하고 온몸을 바쳐야 하며 죽을 때까지 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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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0:17: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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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신구라 감상평 2020110355 서혜연</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72337</link>
         <description><![CDATA[<div>추신구라는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전개되는 내용이었다. 제목 그대로 충신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추신구라라는 드라마는 당시 사무라이들의 계급 체제와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양쪽 다 이해가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많이 나온다.</div><div>처음 나오는 무사들끼리 싸우는 장면에서는 나이 든 무사가 ‘늙었어도 무사’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당시 무사들이 어떤 사명감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이후 나오는 아사노의 칼부림 장면에서부터는 당시 변화하는 사회 상황과 무사들의 세계와의 괴리가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변화한 사회에 의하면 에도성 내에서 칼부림한 것은 분명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며, 이는 무사들의 사회에서 사회체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문제는 키라는 그에 대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아사노의 복수를 위해 모이는 무사들을 보며 당시 무사 사회에서 중요시했던 가치와 충성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사노의 복수를 위해 남은 47명의 무사와 그럼에도 떠나간 무사들 어느 한쪽을 옳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죽으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충성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도 우리나라 안에서도 왕에게 충성을 다하다 죽은 사례를 생각하면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div><div>그리고 대부분의 무사가 살아가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명예 혹은 바른, 명예로운 죽음이 무사 사회에 있어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했고, 또한 일본 자체에서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도 생각할 수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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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0:35: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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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4 이현정</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76266</link>
         <description><![CDATA[<div>어째서 사무라이들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을까.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당당히 맞이하고, 또는 할복이라는 형태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죽음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바탕에는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사무라이 정신이 있을 것이다. &nbsp;<br>&nbsp;영상을 보는 동안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충을 다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솔직히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가족마저 뒤로하고 주군을 위한 복수를 선택할 만큼 '충'이라는 것이 가치있는 개념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들에게 충은 무엇이었을까?&nbsp;<br>사무라이에게 충이란 하나의 의무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루스 베네딕트는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문화를 '수치(하지)의 문화'로 규정했다. 또한 일본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 한 개인으로 존재하며 사회적인 불명예, 수치를 면하기 위해서는 의무를 다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충'을 의무적으로 따르며 충의를 위해서는 가족을 뒤로하기도, 법을 어기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br>&nbsp;47명의 로닌의 행위가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들은 법을 어기고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복수가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사무라이 정신을 통해 일본 사회와 문화를 한층 심도있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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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0:38: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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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39;忠臣蔵&#39; 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고통과 인과론적 해결방식</title>
         <author>tinytedkim</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092053</link>
         <description><![CDATA[<div>2016110279 일어일문학과 김하선<br><br>&nbsp; &nbsp;우리 인간은 언제 가장 괴로울까?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 지갑 안에 지폐를 잃어버렸을 때? 연인과 헤어졌을 때? 물론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다 괴롭지만 단연코 정말로 괴로운 것이 있다.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를 맞이했을 때이다. 우리는 일종의 모순상황, 같은 기준하에 다른 결과, 다른 기준 사이에 같은 결과 등 인과가 맞지 않는 상황에 엄청난 답답함과 고통을 느낀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순율이 없는 자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사고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우리는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능력은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며 삶을 살아가는데 마치 안개 속을 등불 없이 걸어가는 맹인과 마찬가지일 것이다.<br><br></div><div>&nbsp; &nbsp;그러니 우리는 문제상황을 헤쳐나갈 때, 논리적으로 어떤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정할 때, 논리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이성을 통해서 사건을 판단할 수 있다.</div><div>&nbsp; &nbsp;</div><div>1. 인간은 A가 참인 동시에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div><div>2. A가 참이라면 A는 항상 참이다.</div><div>3. A가 거짓이라면 A는 항상 거짓이다.</div><div>4. 기준으로 A를 선택할 때 모든 사람에게 A는 보편적으로 참이다.</div><div>5. 2명의 사람에게 A를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때,</div><div>한 명이 ~A라면 둘 다 ~A고, 한 명이 A라면 둘 다 A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만약 이러한 사실을 참인 근거로 놓을 때, 어떠한 기준을 대상으로 각각에 다른 결과가 주어진다면 이는 모순이다. 한국의 전통적 귀신들이 항상 억울함을 달래주길 원하는 것은 여기가 한국이라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억울함을 풀고 싶은 원한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경향성이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항상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큰 질문을 던져준다.<br><br></div><div>&nbsp; &nbsp;내가 권력에 굴복하던 현실과 타협하던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모순이라는 강력한 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주신구라를 찾아보고 드라마나 영화는 각색이 너무나 많이 들어가 실제 역사와 많은 괴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드라마, 영화와 같은 영상 매체던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진실이던 그들에게 분명한 건 그들이 납득하기 힘든 현실의 부조리가 닥쳤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진실이 예수 본인보다 살아남아서 그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인간에게 더욱 큰 영향을 주었듯이 인간의 부조리한 죽음을 바로 옆에서 겪어야 하는 사람들은 문제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부조리한 죽음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죽음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동시에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심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필연적 의무에 시달리게 된다.<br><br></div><div>&nbsp; &nbsp;그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제일 많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인과 관계를 단순 명확하게 하여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건을 바라보고 결과가 어떤 원인으로부터 왔는지 파악하고 그 원인을 근본부터 해결하는 것이다. 주신구라에서 47인의 무사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코란에서부터 나오는 인간의 전통적 해결방식,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황금률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이러한 1대1로 원인과 결과를 일치 시키려는 행위는 매우 강력한 욕구를 가지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나도 한 대 때리고, 내가 한 대 차이면 마찬가지로 나도 상대를 한 대 차는 것이다. 이는 가장 단순 명확하게 인과 관계를 맞추어서 투박하지만 명확하게 타자와 나를 일치 시키며 만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박한 인과일치는 사실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장점이라곤 쉽다는 점 밖에 없다. 실제 현실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 모든 사건은 1대1로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으로서 복잡하게 문제상황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대가 나를 이 자리에서 때렸다면 누구나 쉽게 단순한 인과 관계로 파악하기 쉽다. 상대방에게 분명히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이런 단순한 사실도 인과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태가 조금 복잡할 때는 어떨까. 주신구라에서 기라와 아사노가 갈등이 생긴 것은 오로지 기라가 부패하고 부도덕한 관리이기 때문이고 아사노는 그저 정의심이 가득하고 청렴결백한 피해자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하면 의문이 든다. 기라가 부패하는 데 영향을 끼친 여러 상황, 아사노가 청렴해지는데 영향을 끼친 상황, 그 둘의 다툼을 관찰하는 여러 인물, 그 둘의 켄카료우세이바이, 싸우면 둘 다 책임을 지게 만드는 법을 적용한 쇼군 등 너무 많은 의지와 표상이 섞여 있기에 이러한 복잡한 사건을 단지 부패와 청렴의 권선징악으로 인과관계를 해석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하다. 실상은 더욱 많은 인간적 상황과 감정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런 단순한 인과관계를 즐기고 명확한 선과 악이 나누어져 선의 입장에서의 복수극을 즐겁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 고찰 해 볼 필요성이 있다.&nbsp;<br><br>&nbsp; &nbsp;사실 주신구라가 약간 옛날 작품처럼 보일지 몰라도 주신구라의 플롯 자체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선한 인간이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갈 때, 악한 인간이 이러한 질서를 혼돈화 시키며 선이 악을 무찌르고 정의를 구현하는 모양은 너무나도 사건을 단순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더더욱 단순하게 만든다. 과연 삶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일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을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사태를 단순하게 설명해주면 좋아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항상 상황을 일률단편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괴롭더라도 훨씬 다방면으로 보기 위한 노력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주신구라는 부조리에 부딪힌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인과관계를 관철하는지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결국 인간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한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더 현명하게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 있을까.</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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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0:51: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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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18 유영남  </title>
         <author>mika6565jk</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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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내가 원래 시대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려운 내용만 나오는 느낌이 있어서 이 제품을 볼때는 너무 걱정했다. 하지만 이 제품은 '부시도'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고 생각하다. 이 제품 자체도 2001년 출판이다 보니까 작성때도 다른 시대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현대적으로 만들었다고 여긴다.</div><div>&nbsp; &nbsp;호리베 안베에의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좋았다.이유 없는 깨끗한 일과 자존심만을 고집하는 번사들에 비해 득실을 계산할 수 있는 냉정함이 있어, 합리적인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다. 그런 만큼 키타무라 타크야의 아이돌로서의 캐릭터와 결합하면 더 매력적인 호리베 안베가 되었다고 생각하다. 구라고 그에 눈에는 힘이 있고, 납득할 수 없는 분노나,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표현 부분은 잘 전해왔다. 키무라타크야 배우는 물론 멋있었습니다만, 살진의 굉장함 때문에 눈에 띈 생명 의 중요함에 강하게 느꼈다.&nbsp;</div><div>&nbsp; &nbsp; 무엇보다, 저렇게 박력이 가득 찬, 진짜다운 살진은 사극에서도 드문 것입니다만, 현대극에서의 서로 죽이는 것은 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극만이 가능한 「삶과 죽음」의 표현이 되어 있다고 본다. 텔레비전의 「주신구라」로서는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다.</div><div>&nbsp; &nbsp; 우리는 살아있다기보다 살아 숨쉬고 있다.왜, 무엇때문에 나는 자신밖에 모르는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의미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살고싶다고 다시 생각했다.&nbsp;</div><div><strong>生きるために死ぬ、死ぬために生きる&nbsp;</strong></div><div><strong>살기 위해서 죽는다. 죽기 위해서 살다.</strong></div><div><strong>여전히잊을 수 없다.&nbsp;</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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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1:05: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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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 정붕거 최후의 추신구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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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최후의 추신구라'은 47명의 자객을 바탕으로 사건 16년 후 두 생존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영화에서 사토 코이치가 연기한 데라사카 기치우에몬는 이야기의 화자다.이 슬프지만 힘찬 이야기 속에서 그는 하나의 증인으로 존재했다.그리고 그의 운명은 이야기의 주인공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세오 마고자에몬의 운명의 기구함과 비참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사십칠 아코번 사무라이의 사변 이후 하나는 열사의 가족을 돕기 위해 떳떳하게 살았고, 다른 하나는 주공의 딸을 부양하기 위해 모욕을 참고 몰래 도피생활을 했다.<br>&nbsp;한 무사가 살아 있는 의미는 임무를 완수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주공을 따라 죽는 것이다.그러나 세오마고자는 자신의 사명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그러나 한 무사에겐 남들의 눈에 존엄을 잃고 비웃음을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영화 속 그는 열사묘 앞에 와서 제사를 지내다가 다른 가신들로부터 치소와 폭행을 당한다.그러나 마음속의 그런 주공에 대한 충성은 그를 모욕을 참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게 한다.<br>&nbsp;나는 이 영화를 보고 '충(忠)'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면서 자신을 타인으로 버리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이런 무사도의 절대 '충(忠)'의 정신은 나를 경탄하게 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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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1:35: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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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1 주신구라 감상편</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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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lt;주신구라&gt;를 보는 것로 통해서 일본낭인들의 무사정신를 유감없이 표현된다.어렸을 때부터 무사정신이 이해할 수 없고 배를 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는 것은 무사정시로 이해된다.지금 &lt;주신구라&gt; 봤을 때까지 무사정신이 무엇인지 알았다. 도쿠가와 통치 시대에 일본천황도 흠차를 파견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지방 제후 아사노가 흠차로 파견된다.아사노는 지방 제후로 인해 조정의 예절 몰라서 기라에게 예절을 배웠다.근데 기라는 노물 받고 가르치는 것이다.아사노는 뇌물을 주는 것을 싫다.그래서 뇌물을 기라에게 안 주었다.기라는 앙심을 품았다.결과는 아사노가 배웠던 예절이 다 잘 틀린 예절이다.이 사건으로 인해 뒤에 모든 오해가 된다.의례 끝나는 날에 아사노는 칼을 뽑아서 기라를 죽이고 싶지만 기라가 안 죽었다.그 후에 도쿠가와가 이 사건을 알았다,아사노에게 배를 가르주라고 했다.근데 기라는 피해자 때문에 처벌이 없다.아사노의 신하들을 이 소식을 알아서 해결방법을 고민했다.대부분 신하들이 할복을 찬성했다.그중에 진심으로 아사노를 위해 북수할 신하가 47명만 있다. 일련의 모의를 거쳐거 47명 신하들이 기라를 죽였다.기라를 죽이고 나서 47명 신하들이 막부에게 자수했다.그 후에 47명 신하들이 할복했다.47명은 주인에 대한 '충'을 이루기 위해 '인(仁)' '의(義)' '이(理)' '지(智)'를 버리고 아내와 여동생을 기방에 팔아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누운 여동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이상 모두 명성을 지키기 위해다.사무라이 정신은 일본 문화의 핵심이자 일본 국민을 지탱하는 정신의 힘인데, 일본의 문화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47명의 복수는 황당무계한다는 생각이 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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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1:48: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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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7 두다혜 / 추신구라 감상문</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180660</link>
         <description><![CDATA[<div>추신구라에서 아사노가 죽음을 맞게 된 이유는 상황적으로 설명하자면 천황의 칙사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엄밀히 따졌을 때)자신보다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는 키라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법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가 어긴 것은 ‘검을 3촌 이상 뽑으면 사형’이라는 법률이다. 물론 사무라이끼리 싸우면 사형이라는 법률도 있으나 그 이전에 검을 뽑았을 때부터 아사노의 중죄는 확정이었다. 처음 내가 추신구라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도 몰랐고 그저 사무라이의 충성심이 대단하다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더 자세히 살펴보니 의문스러운 부분이 꽤 있었다.</div><div>우선 아사노는 업신여겨졌다는 이유로 격분하여 칼을 뽑는다. 사실 현대를, 아니 현대가 아니더라도 일본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이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만약 당시의 배경이 조선이었다면,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조선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책을 뒤져봐도 앞에서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에 칼을 뽑아서 그를 향해 휘두르는 행위를 한 양반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렇다면 아사노의 행위는 적어도 보편적으로 세계 누구나 인정할만한 행위는 아니라는 소리다. 이는 에도의 법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당시 법률 중에는 ‘검을 3촌 이상 뽑으면 사형’, ‘사무라이끼리 싸우면 사형’, ‘다른 사람이 싸우는 데에 참견 금지’ 등 적어도 나에게는 생소한 법률들이 적지 않게 있다. 나는 이 중에서도 ‘검을 뽑으면’과 ‘싸우면’ 사형이라는 법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법은 ‘누군가를 죽이면 사형’처럼 어떠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에 대한 것이 많았다. 반면 에도의 법은 ‘검을 뽑는 것’과 ‘싸우는 것’이라는, 이어지는 행위처럼 보이는 것을 굳이 둘로 나누어 이중으로 금지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싸움에 참견 금지’라고 하는 것도 싸움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방지할 의도도 있었다는 해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특히 사무라이들의 싸움을 철저하게 막고 이 법들의 위에 서는 쇼군의 지위를 절대적으로 높이려는 의도 역시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만 말하면 자칫 사무라이들이 법으로 제재하지 않으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성질 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나 역시 이전에 추신구라에 대해 생각했을 때는 ‘얼마나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으면 저런 법이 생기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 속에 이입해서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지난 학기 때 나는 이 기무와 기리에 집중하고 의문을 표했었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이어지는 생각에 더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div><div>이미 여러 사람이 짚었듯 일본에서는, 아닌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의 사무라이들에게서는 ‘온’, 그리고 ‘하지’의 문화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에 대해 먼저 간략히 정리하자면 사무라이들은 온 중에서도 기무로서 다이묘에게 충성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 갚아도 다 갚지 못하는 은혜이다. 47인의 사무라이가 아사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마음도 기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47인의 사무라이들은 아사노 다이묘가 모시는 쇼군과도 온으로 묶여 있게 된다. 이들은 복수를 통해 아사노의 온을 실행했으나 그와 동시에 쇼군과의 온을 배신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는 사무라이들이 복수 후 죽음으로 쇼군에 대한 온을 갚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부분을 읽고나서 나는 복수도 반성도 죽음으로 하는 그들의 방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순이라고 느꼈던 이런 면모는 위에서 언급한 아사노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칼을 뽑았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러나 하지의 문화라고 하는 것에 따르면 ‘업신여겨졌다는 것’, 즉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싸움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 하지의 문화에서는 죄의 문화에서 행위 자체의 선과 악을 기준으로 삼는 것과 달리 다른 사람의 눈과 그에 따른 수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둘이 서로 지나치다 칼집이 맞부딪혔다는 이유만으로 싸우는 일도 있었고, 애시당초 이런 상황에 칼을 뽑지 않는다면 당사자도 주변인들도 모두 ‘남자답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생각해보면 아사노나 다른 사무라이들이 자주 싸운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회를 만들어두고 ‘싸우지 마라’라는 법을 강요하는 법 체제가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비슷한 맥락으로 지난 학기에는 47인의 사무라이가 복수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여동생을 복수 대상에게 시집 보내거나 처자식을 유곽에 팔아버리는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 들였는데, 이번에 작품을 다시 보면서 잘 생각해보니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때까지 쌓여온 역사와 문화였으며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올바르고 훌륭한 대처로 생각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이 현대적 관점에서도 훌륭하고 잘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고 의문 역시 있으나 조금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해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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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1:59: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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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추신구라] 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181352</link>
         <description><![CDATA[<div>&nbsp;추신구라 1/47 3부작을 보면서 과연 사무라이란 어떤 것인가, 충성과 의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가치관과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왜 메이지 시대에 추신구라가 많이 읽히고 찬양받으며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도 외국인인 우리가 일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때 이 작품을 보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br><br>&nbsp;추신구라를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사극을 봐서 그런가 작품의 당시 일본세계관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본어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잘 안 쓰는 일본어들과 경어들을 듣는 재미도 있었다. 또한 복수극의 재미, 일본 사무라이의 충신과 일본풍으로 갖춘 추신구라는 3시간을 풀집중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미있었다.&nbsp;<br><br>작품 속에서의 아사노편과 주인공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보았다. 작품 내에서 시대가 바뀜에 따라 무사의 소양도 조금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뇌물문화 등 돈을 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사노 가문은 바뀐 시대에 따른 돈의 쫓음을 터부시한다. 그리고 주인공도 과거의 무사의 기상과 무사의 정신을 강조하는 가치관을 굳게 가지고 있다. 또한 주인공은 목숨을 담보로까지 하는 복수를 무사의 사명으로 여기는 생각을 작품 전체에서 대사로 표현하고 있다. 작중에서 "살아가는 것에 의미란 없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떳떳하게 사라질 것인가, 무사는 죽을 장소를 찾기 위해 매일 살아간다" 라는 말을 주인공이 하였다.<br><br>&nbsp;종종 일본의 문화작품이나 미디어, 혹은 일본인들의 대화를 볼 때 가끔 이정도로 극단적이라고..? 라고 느낄 때가 있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도 뭔가 극단적인 표현이 있는 것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사무라이 정신, 할복 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이 든다.<br><br>&nbsp;추신구라가 일본인들을 매혹시키고 일본 전체의 가치관을 바꾼 것인지, 평소 일본인들의 갖고 있던 가치관을 추신구라가 콕 집어 일본인들의 공감을 사고 관심을 끈 것인지는 더 알아보고 조사해볼 점이지만, 확실한 건 외국인 입장에서 추신구라를 보면서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정신과 상명하복에 따른 일본 특유의 엄청난 충성심과 의리를 작품을 3시간동안 보면서 확실하게 느꼈고,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다른 작품을을 보면서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br><br> 외국인인 내가 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추신구라를 보면서 일본에 대해 이해를 하듯, 외국인들도 한국을 이해할 때 한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이해할 것이다. 근데 한국인이 보기에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굉장히 친숙하고 재미있고 긍정적인 면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또한 한국의 어두운 면이나 한국사회의 소수자들을 다룬 작품들도 많다. 추신구라는 일본의 미,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사상과 가치관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일본의 어두운 면과 일본사회 속에서 터부시되는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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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1:59: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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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신구라 1/47 감상평 2020111116 카토유이</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190263</link>
         <description><![CDATA[<div><br><br></div><div>저 같은 추신구라 초보자가 들어가기 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기무라 타쿠야나 오카다 준이치, 사토 히로시, 쓰츠미 신이치 등, 젊은이들도 보기 쉬운 배역이기 때문에 추신구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가장 먼저 보기에는 좋다고생각했습니다.</div><div>솔직히 아코 로시 47명 중 1명을 메인 이야기로 하자면 공격 전까지만 해주었으면 했습니다.</div><div>그 공격 장면은, 아무리 봐도 '그' 중심에서 끝나 버렸습니다.</div><div>공격자는 47명이 모두 메인이기 때문에 그 중 1명의 이야기가 살아나는 것은 그것입니다.</div><div>『주신구라 1/47』은 기라 저택의 침입을 한 아코 무사 47명 중 1명 호리베 안베를 중심으로 그린 작품으로서 픽션으로서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div><div>마지막 싸움이 끝난 후 “당신은 가슴을 펴고 살아라, 나는 죽을 곳을 찾아서 겨우 알았다, 죽은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고통스러워운것이다”라는 이 장면에 감동했습니다.</div><div>안베는 무사로서의 영혼을 관철하고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에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div><div>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뭔가를 하겠다는 것이었고뭔가 전쟁 중의 특공대와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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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2:06: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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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4 추신구라 감상문 </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191568</link>
         <description><![CDATA[<div>드라마 추신구라는 정말 예전의 일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본시대를 정말 잘 표현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다. 사실 평소 사무라이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어서 사무라이에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서 사무라이 문화와 그들의 무사정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영화를 감상하면서 왜 일본인들의 사무라이를 그렇게 찬양하고 추신구라라는 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무사도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받치고 군주가 죽으면 자신 또한 죽음을 선택하는 그 시대 그들만의 가치관이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였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당시 시대에 적응해버려 그 의미가 많이 쇄약해진 무사, 명예로운 죽음과 살아나가는 걸 고민하는 무사,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본래의 무사 정신을 잊지 않고 유지하려는 무사 등 다양한 무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화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사무라이의 모습은 주군에 대한 충을 지키려는 무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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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2:06: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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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2강서문</title>
         <author>jiangshuwen15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19392765</link>
         <description><![CDATA[<div>1941년 당시 도랑 어귀에서 어떻게 이런 동영고풍의 서사시 장편이 나왔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장면의 구성이 매우 섬세하고, 인물 그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영화의 화면들이 이미 역사의 실제 화면에 가깝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그리고 흑백영화일 뿐, 1941년이 어떤 역사적 환경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의 감독, 배우,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을 숙연하게 했다.<br>부족한 점이 있다면 본편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문극이 너무 많다면 문극뿐이라고 할 수 있다.3시간 넘게 이어진 영화에서 핏자국이 전혀 없는 장면은 46무사의 할복에도 단 한 장면도 주지 않은 채 대사와 대사로 표현됐다.중요한 47무사의 기습도 시녀의 빠른 편지 읽기로만 드러났지만, 그 빠른 편지 읽기는 분명했다.2시간 가까이 이어진 백여 명의 사무라이들의 결투 장면을 본 감독은 문장으로 진정한 사무라이 정신이 무엇인지를 부각시켰다.너무 많은 대백이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영무사의 정신은 충절과 지조, 강인함, 불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런 정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이른바 '무사도(武士道)'가 아니었고, 미구치씨는 당시 일본군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이 영화를 찍었는지도 모른다.46명의 의인을 찬양하는 시를 발췌해 46명의 참된 무사를 공경했다.<br>정성을 다하여 날마다 죽으면 어찌 뉘우치랴, 의리가 너무 가벼워진다.<br>사십육 명이 일제히 날을 세우니, 하늘은 좌충할 마음이 없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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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3-29 13:48: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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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의 영웅</title>
         <author>teseus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7783668</link>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lzLJsDZMrLI">https://www.youtube.com/watch?v=lzLJsDZMrLI</a></div><div>•<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AGLCwGIMdeM">https://www.youtube.com/watch?v=AGLCwGIMdeM</a><br><br>화요일 저녁 9시까지 올려주세요. 사카모토 료마 (다른 일본에서의 영웅을 선택해도 좋습니다) 를 통해 보는 일본에서의 영웅은 누구인가, 일본 사회문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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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02:14: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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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2017113059 최재혁</title>
         <author>choi_jaehyu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8007501</link>
         <description><![CDATA[<div>우리나라에는 영웅이라 한다면 누가 있을까? 이순신, 김구, 윤봉길 등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 헌신을 다한 인물들이 있다. 일본에도 당연히 그 나라의 영웅들이 있는데 어느 투표결과 ‘사카모토 료마’가 압도적인 1위로 일본 제일의 영웅이 되었다.&nbsp;</div><div><br></div><div>사카모토 료마는 민족주의적이었고 양이론에 옹호하는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바다 저 멀리 건너온 흑선을 계기로 현실적이고 부국강병을 위해 인생을 바치게 되었다. 페리의 흑선을 보고 서양오랑캐의 목을 따다 아버지에게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하였지만 이내 힘의 격차를 몸소 느끼고 이곳저곳 근대의 발판이 되는 학문적 지식들을 습득하게 되었다.&nbsp;</div><div><br></div><div>일본 내에서는 양이론과 개국파 등 온갖 분쟁이 휩싸였는데 여기서 사카모토 류마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일본을 통합시키고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근대화의 길로 마련하는 인물이었다. 가장 거대한 번 중에서의 앙숙이었던 사쵸와 조슈번의 동맹을 이끌고 메이지유신의 시발점이라고 불리는 대정봉환이라는 막부해제를 이끌어냈다.하지만 그의 인생은 메이지유신의 출현을 지켜보지 못하고 막부의 암살자들에 의해서 막이 내려지고 말았다.&nbsp;</div><div><br></div><div>일본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를 크게 보면 근대 전과 후로 볼 수 있는데 즉 메이지 유신 전후이다. 거기에 교두보가 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였는데 그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일본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각 번들은 자기주장을 하면서 제 2의 전국시대 시대가 열렸을수도 있고 아니면 조선반도나 중국대륙에서의 서양 열강들의 침략으로 인해 자주권을 잃은 모습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흥미로운 생각을 가졌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 만큼 일본을 구한 구세주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 자국민들이 생각하는 올타임 영웅 1위라고 칭해졌다는게 과언이 아니었다는 말을 수긍하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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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05:36: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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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에 대하여 강영준</title>
         <author>dud904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8428552</link>
         <description><![CDATA[<div>영웅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영웅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상에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세종대왕이나 장영실 같은 인물의 경우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존경받는 인물인 것은 맞지만 이들이 ‘영웅’인가 묻는다면 나로서는 심리적 거부감이 든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영웅보다는 ‘위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란 느낌이 든다.</div><div>보통 위인 중에서 ‘영웅’이 누구인가 하면 한국인이라면 보통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것이며, 중국에서는 악비를 영웅으로 둔다. 또 미국의 경우에는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을 영웅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군을 이끌고 외부세력으로부터 자군을 지킨 장군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최소한 내 입장에서 영웅이란 모종의 무력적인 활약상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div><div>그렇기 때문에 내 관점에서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이 영웅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사카모토 료마의 주된 활약상은 ‘외적을 격퇴했다’보다는 삿초 동맹을 성사시켰다는 내적인 면에 있기 때문에 위인이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영웅으로 정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사실 그러한 관점으로 볼 경우 일본의 지정학정 특징상 일본의 ‘영웅’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직면하기는 할 것이다.</div><div>다만 사카모토 료마가 영웅이냐 아니냐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현대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모 랭킹 집계 사이트의 역사 인물 선호 랭킹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사카모토 료마가 3위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한 가지 눈길을 끈 것은, 그를 선호하는 일본인이 주로 평가하는 포인트가 그의 역사적 업적보다는 그의 특이한 삶이나 파격적인 행보, 그의 결단력이나 유연한 사고 같은 스토리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사카모토 료마란 인물이 일본인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이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의 흥행 덕분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div><div><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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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1:22: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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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118 유은우 사마모토 료마</title>
         <author>6cnb57g7r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8693059</link>
         <description><![CDATA[<div>얼마 전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여당과 야당이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갈렸다. 어떤 사람은 환호하기도 어떤 사람은 절망하기도 했던, 역사의 순간을 우리는 직접 목도했다. 하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엔 현대의 정치인이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려 볼 수 있다.&nbsp;<br>사카모토 료마는 요즘으로 치면 조금 잘나가는 집안의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생각하는 영웅 1순위로 뽑히고 있다. 한국에서 영웅이 누구냐라고 물어봤을 때 이순신, 세종대왕 등 여러 인물이 나오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신기한 지점이기도 하다.&nbsp;<br>일본인의 정서에서는 제갈량처럼 지능적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을 존경한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과 비교 분석할 지점이 있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시대의 변화이다. 받아들이려면 우리의 태도도 변화해야 한다. 신분 상관 없이 존경할 수 있는 대표적인 리더쉽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본인은 떠오르지 않는다.<br>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우리는 지금 시대에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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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3:53: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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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0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8700171</link>
         <description><![CDATA[<div>‘영웅’은 무엇인가. 전설이나 신화에는 홀로 대군이나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법한 뛰어난 무예적 기량을 가진 사람을 영웅이라 칭송했고, 중세와 근세의 역사에서는 전쟁의 중심에서 지략과 통솔력을 발휘해 승리로 이끈 사람을 구국 영웅으로 기록했다. 현대는 정의 관철을 위한 자기희생자 혹은 국가의 명예를 높인 자를 영웅이라 칭하고 있다.</div><div>한 마디로, 해당 국가 혹은 사회를 중심으로 세태를 ‘정의’의 방향으로 변화시킨 자가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현대 사회에 들면서는 ‘정의’가 받아들여지는 개념이 달라지면서, 피를 묻히지 않는 영웅상을 그리게 되었다. 일본 사회에서 영웅으로서 상위 랭크에 올라 있는 인물들 중 무예 기량보다 정치 전략적 성과가 강조되는 ‘사카모토 료마’가 그 세대 변화를 보여준다.</div><div>&nbsp; &nbsp;</div><div>사카모토 료마는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의 중심축이 되어 메이지 유신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유명하다. 메이지 유신은 전체적인 일본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폐번치현으로 막부가 무너지고, 경제적으로는 조세제도를 개혁했고, 문화적으로는 서양과 활발히 교류하며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메이지 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이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실제 역사의 대사건에 기여했고, 여기에 시바 료타로의 소설 &lt;료마가 간다&gt;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로 이미지를 세운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div><div>&nbsp; &nbsp;</div><div>하지만 그가 정말 ‘영웅’이라는 단어에 걸맞는가에 대해선 생각해봐야 한다. 료마는 기본적으로 카메야마 조합(후일 해원대)을 운영하며 상업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다. 일찍이 가츠 가이슈를 통해 서구의 사회·경제를 접한 그로서는, 상업 성장에 있어서 도쿠가와 막부의 무역 제재와 독점이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이 필요했고, 무기와 쌀의 거래를 수단으로 이뤄내어, 훗날 막부가 타도되는 대정봉환으로 이어지며 목표를 달성하는 결과를 이루게 된다.</div><div>이외의 업적은 크게 부각되는 것이 없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불씨를 마련했다는 점은 확실히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큰 업적이기는 하나, 그가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웅의 이름 아래 혁명적이라 하기에는 온건했고, 정의롭다 하기에는 상업의 힘에 이끌렸던 료마는, 장대한 서사 속 영웅보다는 한 특징적인 일대기의 주인공 정도가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div><div>물론 ‘영웅’이라는 존재는 사람마다 정의가 다른 만큼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료마는 어찌됐든 영웅만큼의 큰 지지를 받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한 가치도 있을 것이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한 사람이 영웅이 되는 과정에는 해당 집단의 가치관과 관심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 기회로 사카모토 료마를 영웅화한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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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3:56: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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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18 사카모토 료마 </title>
         <author>mika6565j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8895670</link>
         <description><![CDATA[<div>나도 이 수업덕분에 오랜만에 영웅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영웅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확신한 것은&nbsp;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사람에게 역사적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어떤 본보기, 자랑 같은 존재이다. 그 근거로 집 근처에 “ あの龍馬さんだって27歳まで人生迷っていた”라는 광고카피가 있다.(사진 알아보기 어려워서 죄송합니다)&nbsp;<br>&nbsp; 일본을 에도시대부터 근대로 이끈 주역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카모토 료마는 특필해야 할 역할을 담당했다.특히, 일본 최초의 국제적인 상사인 「카이엔다이」(「가메야마샤츄」)를 창시하고, 정치의 움직임과 경제를 연결시킨 것, 그리고 자칫 대립하기 십상이었던 사쓰마, 조슈의 양번을 묶는 「사쓰나가 동맹」을 실현한 것은 크다. 사카모토 료마는 왜 큰 성공을 얻고 , 지금 일본사람의 “인기인”이 됐는가? 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다. 물론 역사적 원인도 있겠지만 나는 인격적으로 생각해봤다.<br> 정론을 말하는 것은 알지만 왠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또는 두뇌가 명석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주위에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분명히 에도막부 말기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그 원동력은 그의 인기에 있었다. 사쓰마(薩摩), 조슈(長州)라는 '조직'의 테두리를 넘어 사람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권한이나 상의하달 이라는 논리를 초월한 인간력이 있어야&nbsp;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인기다.<br> 오늘날 인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데이터가 밝혀낸 것 중 하나는, 인기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다.&nbsp;<br>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읽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제멋대로이거나 남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카모토 료마에게는 유신의 대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남을 이용하겠다는 냉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배려의 정신이 있었기에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br>남과 나 사이의 공감력도 인기의 원동력이 된다.<br>  내가 읽는 자료에서 봐도 사카모토 료마도 여러가지 약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공감하고 따라가려고 했죠. 사카모토 료마 자신도 암살할 생각으로 방문한 가쓰가이슈에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려고 하는 공감력을 보였다.<br>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력, 그리고 물론 명확한 비전. 사카모토 료마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nbsp;<br> 전체적으로 말하면&nbsp; 지식이나 스킬 뿐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를 기르는 중요함도 사카모토 료마가 가르쳐 줍니다.&nbsp; 한 사람의 성공은 절대적으로 이유가 있다.사카모토 료마도 저희한테 정말 대다한 역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원애서 훌륭한&nbsp; 기치관,&nbsp; 배울 만한 인격성을 남겨줬다.<br>  역시 일본의 영웅.</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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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5:27: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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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2018113415 주찬</title>
         <author>iltycb</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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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 &nbsp;료마전 이 대하드라마에 대해서 나는 안에 있는 배우를 매우 좋아해서 전에 본 적이 있다. 처음엔 배우를 위해 보러 갔지만 드라마 자체가 훌륭해서 보기에도 많은 소감이 들었다.<br>&nbsp; &nbsp;우선, 나는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로부터 매우 정직한 정신을 보았다. 이런 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사카모토 료마의 일생은 불공정한 제도를 개선하고 국가 평화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확고하게 노력하는 정직한 정신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특징의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br>&nbsp; &nbsp;사카모토 료마의 인생 변화의 계기를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불평등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료마는 등급제도가 매우 엄격한 시대에 태어났다. 등급제도의 문제로 상사는 하사를 함부로 모욕하거나 죽일 수 있고, 료마의 어머니도 간접적으로 이런 제도로 사망한다. 어머니의 임종 전의 말이 료마를 바꿔서 그의 영웅 생활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는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원망만 하지 말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br>&nbsp; &nbsp;료마전으로 드러난 영웅정신을 통해 일본 전체의 사회문화의 특징이 억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평등에 직면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복종을 선택했기 때문에 감히 나서서 항쟁하는 사람이 영웅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료마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료마가 불평등한 제도에 맞서 싸웠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nbsp;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료마는 매우 착하고 사고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넓은 마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료마의 갖가지 특질은 모두 얻기 어렵고 일본인들이 매우 동경하는 것이다.<br>&nbsp; &nbsp;료마의 일생은 짧았지만 여전히 반짝 빛났다. 그는 그의 생명으로 영웅이라는 개념을 해석했고,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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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5:52: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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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8 오채연,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ocy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108691</link>
         <description><![CDATA[<div> 일본역사인물 여론조사 1위의 인물인, 일본인이 사랑하는 사카모토 료마는 그야말로 일본의 영웅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일본이 봉건주의 국가에서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던 계기가 된 메이지 유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사쓰마번과 조쇼번의 동맹을 성사시켜 막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정봉환을 통하여 일본이 근대국가로써 나아가는데에 일조하였다. 비록 33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의 짧은 인생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굵직한 변화를 안겨주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nbsp;<br><br></div><div> 자신이 맞이하게 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과 굴하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개척해 가는 사카모토 료마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사무라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료마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는 지난주 감상하였던 ‘주신구라’와도 어딘가 겹친다고 느껴졌다. 몇가지의 공통점을 파생하여 생각을 확장해보니, 일본인이 일본스럽게 여기며 자랑스러워하는 영웅의 모습은 어딘가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자신의 뜻을 향해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이 바로 일본에서의 나타난 영웅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 사카모토 료마가 정의하는 무사도는 무사의 칼에는 천년에 걸쳐 칼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온 의(義)와 이(理)와 법(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죽음에는 초연하였으나, 상대방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그의 행동들이 어쩌면 현대 일본인이 바라는 무사도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nbsp;<br><br></div><div>&nbsp;사실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람으로써 ‘일본인이 사랑하는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가졌기에 우리가 흔히 아는 유신삼걸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계열의 영웅으로 칭해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주목받게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놀라웠다. ‘시바 료타로’라는 작가를 통해 대중들에게 가까워졌으며, 그 후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최근 들어 영웅으로 칭송되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과거와는 바뀐 시대상황이 만든 영웅일 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기도 하였다. 물론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을 계기로 바뀌게 된 일본의 역사도 중요하겠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시대가 만든 영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영웅이라고 칭송되거나, 악인이라고 불리는 인물 또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또한 그 시기에 따라, 사회 분위기에 따라 그 평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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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7:16: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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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414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9rjbjr8xjj</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204147</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이 영웅이 가장 많이 출현한 시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외 쇄국정책으로 흑선 사건을 일으켰고, &lt;くろふねらいこう&gt; 이후 무사들의 불만을 샀던 메이지 유신 때라고 생각한다. 이에 사무라이들이 나서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를 무너뜨렸다. 당시 각종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 중하위 무사 계층에는 개혁을 요구하는 사무라이들이 대거 등장했다.&nbsp;<br>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시다마츠카게씨 타카스기신사쿠씨 오오쿠보토시미치씨 키도타카요시씨 사이고타카모리씨 사카모토료마씨' 등이 있다.<br>이러한 사람들의 등장이 훗날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를 무너뜨리는 주요한 힘이 되기도 했다.<br>사실 그 동안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은 중국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맺도록 강요했다. 중국 청나라의 쇄국으로 유럽국가이 중국에서전쟁을 일으켰다.그리고 불평등 조약을 맺고 또 돈을 잃었다.<br>도쿠가와 막부는 대외 개방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의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br>만약 사카모토료마씨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일본과 미국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막부의 실패로 일본은 봉건제도를 타파한 뒤 빠르게 근대화를 향해 나아갔다.일본은 앞으로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을 앞서게 했다.<br>일본 사람들은 왜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는가?<br>나는 일본처럼 등급이 분명한 나라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200년 넘게 통치하면서 불공정한 조약이 많아 백성들이 고통받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막부의 지배를 바꿀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br>그러나 이 무사들이 나타나 새로운 희망을 주면서 무사들의 협력은 도쿠가와 막부를 격파했다.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 등장하면서 자유로움을 되찾게 됐다.그래서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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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4 18:05: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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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17110309 김송환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songkim158a</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695067</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 수업 외에도, 일본학과에 다른 강의를 수강 할 때에도 많이 언급된 일본의 역사적인 인물로 "사카모토 료마"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뽑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자, 일본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시발점이자 중심에 서 있던 남자라고 생각한다.&nbsp;<br><br>이번에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사카모토 료마"의 담대함과 그가 가진 그릇의 크기가 크다고 느꼇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발상과 용기는 그가 가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쇼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무사 정권 "바쿠후"를 찾아가서 돈을 빌려 해군학교를 설립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바쿠후"를 무너뜨리기 위해 만든 해군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바쿠후"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등, 이 외에도 사쯔마번과 쬬슈번을 통합시키거나, 기존의 무사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습관과 가치관과 달리 권총을 소지하고, 가죽 부츠를 싣기도 했다.&nbsp;<br><br>결국 "사카모토 료마"는 훗날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자, 그가 보인 대담하고도 용감한 행동들을 보면 왜 그가 일본의 개혁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인지 알 것 같다.&nbsp;<br><br>어느 분야에서든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서 발상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사카모토 료마" 역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서 개혁을 이루기 위한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 많은 변화를 이루어 냈다고 생각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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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0:46: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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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210988 신민호,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721403</link>
         <description><![CDATA[<div>"인생은 흔히 일종의 연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이 연극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연극의 무대는 타인이 설치해주는 반면 인생의 무대는 자신이 직접 설치해야만 한다. 그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무대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야한다. 결코, 타인이 무대를 만들어 주는 법은 없다."<br><br>료마의 명언 중 감명을 받은 구절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신념을 지닌 채 탈번을 하여 낭인이 되고는 에도로 떠나 일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자 힘 썼다.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던 개국파와 양이파의 사이에서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며 원수지간과 같던 사쓰마와 조슈번을 삿초동맹으로 연결시켰으며 선중 8책을 작성하며 새롭게 태어날 국가의 모습을 구상하였다. 또한 야마노우치를 움직여 대정봉환(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것)을 실현시킨 이른바 메이지 국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라고 생각된다.<br><br>나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조선의 기틀을 다진 정도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활동하던 고려 시대 또한 1860년대 일본의 모습과 같았다. 흔들리는 왕권, 급변하는 정세(원명교체기, 홍건적 등), 신흥강호들의 등장, 개혁파와 온건파의 대립 등... 고려의 정세는 바람 앞 등불과 같았고, 정도전은 료마와 같은 생각을 가진다. 바로 전쟁을 하지 않고, 왕정복고를 실현하는 것. 그래서 그는 이성계라는 신흥 강호에게 자신의 뜻을 투영시키며 결국, '조선'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정치체제의 국가를 탄생시켰다.<br><br>또한 료마와 정도전은 공통된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이 기틀을 세운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료마는 대정봉환을 달성한 뒤 자신의 뜻을 담은 국가 건설을 구상하다가 암살당했으며 정도전 또한 자신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nbsp;<br><br>료마와 정도전이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고, 약한 자를 병탄하고, 인탄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보통사람들은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던 자신들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바라보며 그들의 숭고한 목적과 삶을 추구하며 찬양한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가진 이들이 죽으면 보통사람들은 자신들이 가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가지 못한 뜻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그들을 &nbsp;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br><br>앞서 말한 명언처럼 료마는 다 꾸며진 연극 무대에 대본을 외우고 올라와 남들 앞에 '연기'를 펼치는 수동적인 배우가 된 것이 아닌 자신이 무대를 연출하고, 자신의 독백으로 무대를 꾸민 능동적인 배우가 되어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극을 펼쳤다.&nbsp;<br><br>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서사를 완성하고, 그 서사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남들이 두려워서 가지 못한 길을 오직 하고자 하는 열정과 용기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만을 향해 돈키호테가 여전히 재창작되며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른다.<br><br>대외적인 활약(국가 수호, 국민 보호 등)을 통해 영웅이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내적인 활약을 통해서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나의 인생에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의 '영웅'이 된다고 생각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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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1:07: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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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윤녕후</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871952</link>
         <description><![CDATA[<div>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인 고치 현. 이 곳을 방문하면 사카모토 료마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료마의 이름을 지겹도록 들을 수 밖에 없다. 고치역 앞 광장에는 료마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고치 공항의 애칭은 '고치 료마 공항'이다. 심지어 고치 남부의 가쓰라하마 해변에서는 료마의 생일에 맞추어 매년 축제가 열린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해외의 다른 여러나라에서도 이 곳과 같이 특정 인물의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곳은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일본인의 료마에 대한 사랑은 정말 지대한 것 같다. 그렇다면 료마는 왜 이토록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가.<br>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의 로망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살았던 시대는 말그대로 격량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사회를 장기간 지배했던 사회적, 정치적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목소리가 생겨났다. 료마는 이러한 움직임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며 가메야마 조합 결성, 삿초동맹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료마에 관한 사료는 매우 부족하다. 료마에 대한 인기가 이렇게까지 올라간 것은 결국 소설 '료마가 간다' 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삼국지 소설도 정사보다는 연의가 인기가 많듯이 료마에 관한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와중에 비어 있는 중간중간을 소설이 잘 채워주었기 때문에 료마의 맥락을 독자들이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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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2:59: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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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3 정은채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spring_c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894244</link>
         <description><![CDATA[<div>사카모토 료마는 늘 수업에서 자주 들었던 이름이어서 익숙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영웅으로 불리는 것도 단명한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시작의 중심이 그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영상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그가 왜 일본에서 영웅이라고 불리는지, 사카모토 료마라는 사람의 가치관과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br><br></div><div>사카모토 료마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현실을 읽는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가 에도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접한 난학은 그의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바탕으로 그 당시 세계가 변하는 흐름을 잘 캐치했고 이를 일본화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유신 역시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일본화한 것에 가장 큰 성공사례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일본 사회는 오히려 쇄국정책을 피고 있었지만 그 시대를 역행해 외국에서 들어오는 신문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생각한다.<br><br></div><div>그가 영웅이라고 여겨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해군을 양성하는 학교를 자비로 설립해 일본을 지키려했던 부분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인재를 양성하고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교육을 강조했다. 교육, 특히 자신의 모든 재산을 걸고 학교를 세운 것은 그 당시나 현재로도 굉장히 칭송받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해군양성소를 설립하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에도에서 본 미국의 '흑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다가 뚫리면 본토도 금방 뚫리기 때문에 최전방선인 바다를 지키고자 전문인력을 양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br><br></div><div>일본에서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인물로 형용화하면 사카모토 료마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읽는 흐름,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를 가치있는 인물로 새기고 있는 것같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한다. 옛것과 신문물의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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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3:17: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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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2020110266 고가연</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912940</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 미디어 컨텐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등을 볼 때면 여지 없이 등장하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명 ‘파칭 캐릭터’로 통칭되기도 하는데, 다시 말해 힘을 쓰기 보다는 빠른 두뇌 회전을 활용해 전략을 꾸미고 머리를 쓰는 캐릭터를 뜻한다. 10명 중 9명은 빛나는 무테 안경을 쓰고 있어 파칭이라고 불려지는 것 같다.</div><div>보통 이런 캐릭터는 몸을 쓰는 육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그런 면에서는 유약하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뇌가 아닌 힘을 써야 하는 장면에서 때로 의외의 실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 동아시아의 강대국, 중국과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해 타국보다 국가 발전 속도가 느려 국방력을 활용한 싸움을 일으키기보다는, 전략과 전술, 정치 외교적 술수를 꾀했던 일본의 국가적 특성에 빗대었을 때, 이런 캐릭터는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div><div>&nbsp; &nbsp;</div><div>사카모토 료마도 마찬가지다. 정치 외교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꾸미는 것이 우선되었던 일본 국가 특성상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모사를 꾸미는 역사적 인물은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일본의 근현대사는 메이지 유신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간다고 해도 무방한데, 이러한 메이지 유신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한 사카모토 료마는 그들에게 단순 전략가가 아닌, 본인 국가의 근현대적 발전을 직접 손으로 일군 위대한 정치가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인기의 이유에는 앞서 말하였던 것과 같은 국가적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nbsp;</div><div>&nbsp; &nbsp;</div><div>본 강의가 일본 사회 문화를 탐구하는 것이기에 정치 외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 문화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사카모토 료마의 인생은 일본인들이 추구하고 좋아하는 ‘발전형’ 인물의 대표적인 케이스다.</div><div>일본인들은 한 인물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그 예시로 그들의 아이돌 문화를 들 수 있는데, 실력 완성형 아이돌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그들은 실력적으로 부족하여도 그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것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div><div>사카모토 료마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서사는 일본인들이 엄청난 매력을 갖기에 충분하다. 어렸을 적 최하급 무사 신분을 산 가문 때문에 다른 무사 가문들에게 이지매를 당하고, 막내로 태어나 야뇨증까지 앓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비해 여리고 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누가 봐도 성장하기 어려운 어릴 적 서사를 가진 그가 일본 근현대사의 가장 큰 주축인 메이지 유신의 중심에 설 정도로 대성한 정치가이자 미쓰비시 기업의 전신인 회사를 일으킬 정도로 상업적 능력까지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적인 캐릭터에 매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div><div>&nbsp; &nbsp;</div><div>일본이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을 내세워 창작한 콘텐츠가 매우 많다는 것이 그의 인기를 뒷받침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인기가 있는 역사적 인물인 이순신, 세종대왕도 이 정도로 사회 문화적으로 만연하게 묘사되지는 않는 것 같다. 관련 콘텐츠를 내가 직접 접한 적도 적은 것 같다. 반면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문화 콘텐츠에서 여러 해석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일본 유명 개그맨까지 료마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자료를 보고 굉장히 역사적 인물치고 대중적인 인물임을 깊게 느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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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3:33: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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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49 소유란 -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happycow2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945550</link>
         <description><![CDATA[<div>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영웅'이라고 한다면 대다수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표적인 '영웅'은 누구일까? 이번 수업 때는 일본의 대표적인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와 관련된 영상을 감상했다. 일본의 여러 매체에서 실시한 영웅 인식조사에서 1위는 대부분 사카모토 료마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영웅이란 무엇인가? 사카모토 료마는 왜 영웅으로 인식되는가? 이러한 두 가지 포인트를 중점적으로 고려하며 영상을 보게 되었다.<br><br>사카모토 료마의 업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메이지 유신의 발단'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이 기존의 봉건주의 국가로부터 근대화를 이룩하여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던 사쓰마 번과 쵸슈 번의 동맹(삿쵸 동맹)을 성사시키고 기존 막부에 대항시켰다. 이후 천황이 통치권을 회복하는 대정봉환의 중심축으로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고, 결국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역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국가의 전무후무한 발전을 만들어낸 '대영웅'으로 칭송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이전에 감상했던 &lt;주신구라&gt;와 마찬가지로 료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바를 이루기 위해 무사도 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자기훈련, 자기통제, 자기극복)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일컬어진 행위이기 때문에 료마가 영웅으로 칭송받는 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br><br>하지만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적지 않게 보인다. 당시 역사 전체를 면밀하게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판단은 내리기 어렵지만, 메이지 유신의 발단에 기여한 료마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활약했던 인물들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의견도 많다. 영상을 보면서도 '메이지 유신에 참여한 다른 인물들도 많은데, 왜 사카모토 료마만 위대한 영웅으로 그려지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바 있다. 그럼에도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앞으로도 이와 관련된 질문을 탐구해볼 연구적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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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4:06: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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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53 엄희경,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cord2001030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29992545</link>
         <description><![CDATA[<div><br><br>각 나라마다 한 명 쯤은 영웅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잔다르크, 몽골의 징기즈칸, 한국의 이순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영웅'이라고 칭송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영웅 중에서도 '전쟁영웅 (war hero)'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nbsp;<br><br>전쟁영웅은 전쟁에서 전설적인 전과를 이루어낸 군인을 이르며 좋은 전적을 올릴 수 있도록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사령관들에게도 쓰곤 한다. 물론 미국의 마틴루터 킹 등 전쟁영웅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으로 번혁을 일으킨 영웅들도 다수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영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전쟁영웅을 주로 떠올리게 된다.&nbsp;<br><br>일본의 영웅도 다른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노부나가...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는 '영웅'이라는 의미에서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우선, 전쟁영웅이 아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에도 막부를 전복시킬 기회를 만들어낸 핵심인물이다. 그는 정치 체제의 개편을 위해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을 제시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방법이 받아들여져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며 근대화에 다가가게 된다. 그는 사무라이 였지만 전쟁, 폭력보다는 높은 중재 및 외교력으로 명성을 얻었고 일본이 새로운 시대, 메이지 시대로 다가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사카모토 료마가 영웅보다는 위인에 가깝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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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4:54: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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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2130009  우스키 스미레</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038166</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영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나도 역시 사카모토 료마였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료마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료마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남녀소녀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영웅’에 대하여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더 한 명 있다. 오다 노부나가다.&nbsp;</div><div>노부나가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大名)이고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수많은 공적으로 인해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인물이다. 노부나가가 활약한 센고쿠 시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역사상 아주 큰 역할을 다한 인물이 많지만 그 안에서도 노부나가는 압도적인 인기를 보인다.&nbsp;</div><div>이는 료마도 마찬가지다. 료마가 살던 시대에는 사이고 타카모리나 가츠 카이슈 등 역사상 중요한 공적을 남긴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영웅’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료마를 뽑게 될 것이다.&nbsp;</div><div>그렇다면 이러한 노부나가와 료마의 ‘영웅’으로써의 이미지란 대체 어떤 것일까?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부나가와 료마의 공통점에 대한 언급이 불가결하다.</div><div>&nbsp;</div><div>우선 둘 사이에는 새로운 것, 특히 서양의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유연성과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부나가는 그 당시까지 일본에서 금지되었던 기독교의 유입을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또한 만년에는 전장에 나갈 때 서양식 갑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당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써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div><div>료마의 경우, 처음에는 양이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흑선 내항을 계기로 서양에 다한 관심을 높이며 근대적 국가 설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료마는 서양식 의회민주주의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선중팔책을 입안했는데 이것이 훗날 ‘신정부강령팔책’이라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됐다. 또한 료마가 ‘기모노’에 가죽구두를 신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div><div>&nbsp;</div><div>노부나가와 료마의 공통점은 이 뿐만 아니다. 둘 다 개인주의적 성격이 높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시점일 것이다. 노부나가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으나 협조성에 결여되고 있었으므로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독단적인 판단을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면도 가지고 있으며 그 성격을 설명한《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라는 시구에서 그 냉혹함과 독단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div><div>료마는 노부나가보다 훨씬 사회성이 높고 애교가 많은 성격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개인주의적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료마는 1862년에 소속하는 도사번을 떠나는 ‘탈번’을 하여 낭인으로써 에도로 향했다. ‘탈번’은 당시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으나 료마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이를 택했다. 그 후 1867년에는 료마의 활약으로 인해 대정봉황이 이루어지고 그 공적을 인정한 매이지신정부는 정부의 일원으로써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료마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div><div>&nbsp;</div><div>이를 거꾸로 생각해 본다. 우선 첫 번째 공통점인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없었던 사상, 가치관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보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의 보편적 특징이며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은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보수적, 안정적인 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서 오는 답답함이 노부나가와 료마같은 ‘영웅’을 갈망하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div><div>이런 식으로 분석하면 두 번째 공통점인 ‘개인주의적 성격이 높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사회에는 타국, 특히 서양과 비교를 하면 자신이 소속하는 조직에서 빠져나오면 안된다, 뛰어나오면 안된다고 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개인이 눈에 뛰고 혼자 활약하는 것 보다 조직의 구성원들의 조화를 중요시하고 조직 존체가 성공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서 오는 답답함이 노부나가와 료마같은 자유롭고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영웅’을 갈망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div><div>이런 식으로 분석을 해보면 ‘영웅’이란 현대인이 갈망하는 이상의 모습임과 동시에 현대인이 가지는 문제점, 답답함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웅’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인물들은 한국인들의 어떤 면을 비추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nbsp; &nbsp;</div><div>&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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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5:36: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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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215472 사카모토 료마 윤건희</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054922</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인이 사랑하는 사카모토 료마는 그야말로 일본의 영웅이다.<br><br></div><div>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가 사카모토 료마이고 손정희 회장이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div><div>&nbsp; &nbsp;</div><div>료마는 대정봉환을 주도해 실질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의 앞장섰던 인물이다.<br><br></div><div>서로 대립관계의 있던 사쓰마번, 쵸수번, 삿쵸동맹 및 막부와 번을 통일 성사시킴으로</div><div>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던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다. 일본인들은 2인자의 역할에서 조언을 해주는 포지션의 사람을 많이 좋아한다. 일본에서 중국의 재갈량이 인기가많은 이유이기도 하고 료마가 재갈량과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정봉환이라는 큰업적을 달성하고 자기 구상대로 국가를 구성하려고 한 참에 암살을 당했다. 이걸보고 조선건국과 개혁을 했던 정도전이 생각이 났다. 정도전도 자신의 신념과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결국 이방원한테 죽임을 당했다.<br><br></div><div>한국에 정도전과 일본의 료마는 같은 공통점을 볼 수 있는데 개혁을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희생을 하였고 끊임없이 자신을 놓을 수 있고 잘 받아들였다. 틀에 박힌 것을 바꾸는 것을 정말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설득하고 자기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변화해야겟다는 마음 이런것들이 료마의 자신감이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조선말 개혁시기때 료마같은 사람들이 나왔지만 결국 근대화에 실패했다. 이걸보고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세상에 뒤쳐 질 수 박에없는걸 꺠달았다.&nbsp; 나는 료마의 이러한 개혁정신 세상을 바라 보는 눈에 대해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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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5:53: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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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7 사카모토 료마 김여경</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149562</link>
         <description><![CDATA[<div>'영웅’ 하면 아이언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슈퍼 히어로가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영웅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수업시간에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며,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왜 일본인들에게 영웅으로 인식되는 것일까?</div><div>일본에는 히어로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들이 존재하고 그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그들이 모두 강한 신념과 뚜렷하고 확고한 목표, 그리고 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영웅상을 보여준다.&nbsp;</div><div>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은 이러한 영웅상에 가장 잘 드러맞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정권의 변화는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삿초 동맹을 주도하는 등 막부 타도의 계기를 마련하여 대정봉환을 이루어냈다.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 막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나는 일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을 뿐 다시 태어난 일본에서 영달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런 심경이 아니고서는 대사업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 내가 평소 그런 심경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개 낭사에 지나지 않는 내 의견을 세상 사람들이 경청해 준 것이다. 또한 이렇게 큰일을 성취한 것도 그 덕분이다.’라는 그의 말을 통해 사카모토 료마가 혁명에 가담한 것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자는 일단 뜻을 세웠으면 그 뜻을 달성할수 있는 수단만을 생각하고 나아가야 하며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좌절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목적으로 가는 도중에 죽어야만 한다. 생과 사는 하늘의 뜻에 달려있는 것이니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은 확고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그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영웅상에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수많은 일본인이 사카모토 료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분명히 꿈과 이상을 향한 열정을 중시하는 일본의 영웅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과감히 이행할 수 있는 그의 통찰력과 실행력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시되는 덕목이며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div><div>사실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은 이번 수업시간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근대화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며 수많은 일본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중에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 다룬 드라마 ‘료마전’도 한 번 보고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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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7:10: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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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5 이세영</title>
         <author>jennyda10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00054</link>
         <description><![CDATA[<div>사카모토 료마가 이룬 최대의 업적은 바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사이의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이 둘은 여러 번 대립하던 원수 사이였는데, 사쓰마 번은 조정과 손을 잡아 막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중도파였음에 반해 조슈 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급진파였기 때문이었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서양에게 막대한 굴욕을 당하자 료마는 서양을 이기려면 그들의 기술을 인정하고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성사된 것이 사쓰마-조슈 동맹, 즉 삿쵸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막부가 자신의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한 사건인 대정봉환을 이끌었으며 훗날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의 사이가 무척이나 나빴는데, 이유가 육군은 조슈 번을, 해군은 사쓰마 번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세에도 이토록이나 사이가 안 좋았는데 당시 동맹을 결성시켰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br><br></div><div>사카모토 료마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반대파에게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짧은 생애였으나 역사적 전환기에 일본의 미래를 위하여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후세를 위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나라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살아갔다. 이런 면에서 여전히 사카모토 료마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현대 일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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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7:47: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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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1116 카토유이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sjelfchegoyui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07645</link>
         <description><![CDATA[<div>에도에서 가쓰카이슈와 만나 외국에 지지 않는 해군을 창설해 대등하게 논쟁해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사카모토 료마.</div><div>사카모토 료마가 쓴 편지에 실린 "일본을 다시 한 번 세탁하고 싶다"는 명언은 유명하다.</div><div>에도에서의 수행중, 사카모토 료마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는 쿠로후네 내항 사건이 일어난다.</div><div>미군의 페리가 이끈 거대한 군함은 천황을 존중하고 외국을 배제하는 「존왕양이」(존농상위)라고 하는 사상을 낳았고, 이 흐름에 사카모토 료마도 끌어들여 간다.</div><div><br></div><div>한 번은 도사로 돌아간 사카모토 료마이지만, 각지에서 고조되고 있는 「존왕 양이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토사 번으로부터 탈번해, 에도에 돌아와 카츠카이슈와 만나, "외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지지 않는 해군을 창설해 대등하게 서로 이야기해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div><div><br></div><div>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인물에게는 인상적인 명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div><div>이 무렵 료마가 편지에 쓴 '일본을 다시 세탁하고 싶다(日本を今一度せんたくいたし申候)'는 명언은 널리 알려져 있다.</div><div>이 명언은 앞서 말한 대로 사카모토 료마가 가쓰가이슈와 만났을 무렵의 것으로 누나인 사카모토 처녀에게 보낸 편지 속에 실려 있다.</div><div>사카모토 료마는 붓을 부지런히 쓰기로 유명해서 여러 통의 편지를 누나에게 보냈다.</div><div><br></div><div>이 명언의 의미는 "나는 일본을 변혁할 결심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div><div>"변혁하다"를 "세탁하다"라고 하는 표현으로 비유한 것으로는 사카모토 료마가 독특한 센스를 가지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div><div><br></div><div>실제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을 크게 바꾼 "메이지 유신"의 일등공신이 되는 활약을 완수한다.</div><div>일본은 사카모토 료마에게 세탁됨으로써 낡은 가치관이 불식되고 근대화 되어 갔다.</div><div><br></div><div>토사 번의 참정&nbsp; "고토 쇼지로"와도 친분이 있던 사카모토 료마는, 고토와 둘이서 나가사키에서 효고로 향하는 선내에서 "선중 팔책"이라고 하는 정치 지침을 작성해 토사 번주에 제시하도록 고토에게 부탁했다.</div><div><br></div><div>이 선중팔책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명기된 것 외에 의회정치와 헌법제정 등 신국가의 구상이 제시돼 있었다.</div><div>토사번으로부터 장군인 토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이 제기되어 10월 15일에 성립해 사카모토 료마의 고생이 보답된 것이다.</div><div><br></div><div>또한 "세상 사람들은 나를 무어라 할지라도 내가 하는 일은 나만이 안다(世の人は我を何とも言わば言え、我がなすことは我のみぞ知る)"라는 명언이 있다.</div><div>이 명언은 사카모토 료마가 10대 시절에 읊은 노래다.</div><div>이 명언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런 소리에는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믿었던 길로만 가면 된다"는 뜻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10대 시절의 사카모토 료마는 학교 성적도 부진해 우수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젊은이였다고 한다.</div><div>그래도 이 명언에서는 그 속에 신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div><div>주위의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그 신념을 관철했기에 사카모토 료마는 위업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div><div><br></div><div>이 생각은 요즘도 흔히 듣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규제도 엄격하고 굳은 생각을 가진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을 수도 있다.</div><div>현대에 와서는 이 로마의 사고방식은 이해하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거나 역시 료마처럼 당당하게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는 매우 멋지다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요즘 들어 료마는 그렇게 대단한 위인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로 보면 용마 하나하나의 발언이나 행동이 한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이나 삶의 방식 등에 대해 큰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되는 현대에 말하는 행동적인 인플루언서적인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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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7:51: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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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39560</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영웅 중 한 사람인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어떤 나라던 역사적으로 변화를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주요 인물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고 발전해 나갔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런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업적 중 삿초 동맹은 막부 타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료마는 어린 시절 검술도 배웠고 근대 국가 구상도 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을 설득해 동맹을 맺게 했다. 이런 업적들을 본다면 료마는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재다능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일본의 영웅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찾아보다 보니 그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 드라마 혹은 등장인물 중 하나로 등장 시킨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가 주인공인 대하 드라마는 유명 배우들의 주인공 경쟁도 치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배우들에게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일본인들에게는 대하 드라마가 자체가 중요시 된다고 알고 있다. 이를 생각해봤을 때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 드라마가 많다는 것은 많은 일본인들이 그를 충분히 '영웅'이라고 여기고 있고 시대가 지나도 꾸준히 상기될 수 있게 기록하는 등의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만큼 대대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인물로 비춰졌다. <br>&nbsp;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일본의 방송을 보았을 때 조상이 사카모토 료마의 탈번의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현 시대의 학생이 료마와 관련있었다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금이라도 료마와 관련되었던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고 이 부분에서 료마가 정말 일본의 영웅이라는 점이 실감났다. 또한 료마가 탈번을 할 당시에는 탈번에 대해 민감하고 해서는 안될 것이었지만 후대에는 그가 탈번한 경로를 방송에서 따라가며 자세히 다루고 영웅에게 중요했던 시기로 여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nbsp;<br>&nbsp;일본에게 메이지 유신은 근대화와 경제 성장의 기점인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후손들이 이런 성장의 기초가 되어준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변화를 위한 노력을 했고 실제로 좋은 방향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본인이 그를 본받아 자신의 인생이나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영웅'으로 여기고 좋아한다고 생각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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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8:18: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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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9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39933</link>
         <description><![CDATA[<div> 서로 다른 파벌, 다른 인물들, 같은 위풍당당한 정신의 모습, 같은 결사적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다짐, 같은 난세의 물결속에서 만세를 위해 태평한 이상을 품고 있는 유일한 차이점은 오직 다른 구국의 길을 믿는 것뿐이다.사카모토 료마의 주변 사람들은 사고에 약다. 갈등이 생기면 먼저 자신의 존엄성을 생각하며 칼을 빼들어야 했다. 누가 가장 기개가 있고 누가 가장 용기가 있으며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함치는 상태인데, 유독 사카모토 료마는 남성적인 기질을 가장 잘 하지 않다. 그는 매우 내성적이고 사고와 인내를 잘했다.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이 세상 일을 찾아보려고 했다.번번이 시대의 풍구를 잡았고, 사카모토는 적은 비용으로 후세 사람들이 대체할 수 없는 지위를 얻었다.영웅이 되는것도 선전이 필요했다.능력뿐만 아니라 남보다 앞서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위치에 나와야 했다.사카모토 료마는 그런 영웅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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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8:18: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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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62 김기려</title>
         <author>Giryo</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59161</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오게 했지만 그토록 바라던 새롭고 발전된 일본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이른 그의 죽음이었기에기억에 남는 것 같다. 만화같은 걸 보면 남자 등장인물들이 가장 존경하는인물로 자주 사카모토 료마를 꼽는다. 이름이 익숙해질 정도로 언급이 많이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nbsp;<br></strong><br></div><div><br></div><div>일본 역사에 대해서 잘 몰라서 역사적 흐름 안에서의 사카모토 료마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많은 그의 행적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 사카모토 료마가 탈번한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기존의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긴 했지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자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그가 탈선자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보면 결과적으로 옳은 길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꼭 다수가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정부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없애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div><div><br></div><div>그리고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그가 암살당함으로써 보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누구의 편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초월한 자리를 확보했다. 가장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의 죽음이 일렀던 덕분에(?) 라고 생각돼서 조금 안타깝기도 했던 것 같다.&nbsp;</div><div><br></div><div>그런 그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도전정신과 열정이 크다고 생각한다. 도전이 늘 좋은 결과를 초래해오진 않겠지만 사카모토 료마는 시도해본 것에 큰 의의를 둔 것 같다. 그 점도 기억에 남는다. 최근엔 평소에 도전하지 않게 된 것 같아서 후회됐다. 나도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도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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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8:33: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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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3401 주현우</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277876</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과 관련된 자료들을 볼 때 심심찮게 나오는 이름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였다. 많은 정치인들이나 사회적 인물들이 그를 모델로 삼기도 하고, 그의 행적과 관련된 매체들이 꽤나 나온 적도 있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이끌어내고, 대정봉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료마를 일본은 영웅으로 부르고 있다.<br><br>확실한 것은 료마의 주장은 당대의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꽤나 선구적이었다. 외국과의 접점이 무슨 결과를 부를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감히 외국과의 교류를 외쳤고, 당시 동양에서는 혁신적인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정치체제를 주장했다. 그의 많은 주장들은 현재에는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력을 엿볼 수 있다.&nbsp;<br><br>다만, 역사적으로도 어느 나라던 간에 훌륭한 판단력을 보여준 자들은 많이 있었다. 시대에 앞서는 구상을 하며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FDR은 2차대전 시기 적절한 판단력과 구상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에도 DJ의 집권 시기 행해진 많은 선구적인 판단들이 이후 한국의 발전의 길을 깔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모두가 영웅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료마는 왜 영웅으로 불리는 것인가?&nbsp;<br><br>아마 이 질문에 답하려면 또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무엇이 일반적인 영웅을 구성하는가? 그가 충분히 선구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인가? 한 분야에서 특출난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인가? 이 모두인가?&nbsp;<br><br>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어떠한 행보와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거나 악의적으로 왜곡된다면 영웅은 커녕 적절한 평가를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비슷하게, 설령 실제 역사에서 큰 원동력을 지닌 부분이 없는 인물이었을지라도 그 서술이 편향적이라면 영웅으로 포장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br><br>료마가 실제 역사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가는 어느 정도 규명이 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얼마나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구멍들을 채운 것 중 하나가 시바 료타로가 집필한 &lt;료마가 간다&gt;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구멍들을 작가의 필력과 묘사로 채움으로써 하나의 영웅상이 그려졌고, 그것이 대중의 인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영웅이 구성된 것이 아닐까?&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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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8:47: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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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20110355 서혜연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08222</link>
         <description><![CDATA[<div>  애니메이션을 볼 때, 간혹 사카모토 료마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잘 알지는 몰랐지만,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에서 유명하고 인기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br>  일본은 근현대에 들어 나라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거름을 뿌린 인물이 료마인데, 최후의 순간은 비극적이게도 암살까지 당한다. 우리나라도 영웅이 누구일까요? 하는 질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도 마지막 전투에서 죽었다는 서사가 존경의 한 부분이 된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도 일본에서는 꽤 존경받는 인물인데, 무탈하게 계속 관료로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존경을 받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료마에 대한 인기와 존경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료마는 생각보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당시 모두가 지향하지만 따라갈 수 없던 모습을 지녔기에 료마가 지금과 같이 영웅이 되고 인기가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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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9:10:03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08222</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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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2021110261 서가은)</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09291</link>
         <description><![CDATA[<div>    메이지 유신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사카모토 료마라는 사람은 이번 수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영웅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는 것과, 사카모토 료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지, 왜 후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div><div>    당시 외세의 공격이 일본인들에게 온갖 분노와 부정적 감정을 일으켰지만, 사카모토 료마는 이러한 감정이 일본의 발전을 억압한다고 생각해 급진적인 개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존왕양이를 외치며 계속해서 서양을 공격하고자 했다. 쇄국이 부국강병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는 중도파였던 사쓰마 번과 급진파였던 조슈 번이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이들의 동맹을 ’삿초동맹’이라고 한다. 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선중팔책’이라는 정치 구상을 했는데, 인재 등용, 관제 개혁, 외교 확대, 법 개정 등의 내용이 담겨있고, 이는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되었다.&nbsp;</div><div>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빠르게 맞이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와 중국 보다 훨씬 앞선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치로 인해 근대 문물의 수용을 늦췄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일어날 것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무작정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적으로 보고 이로운 것이면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nbsp;</div><div>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이 단순히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데 큰공을 세운 것뿐 아니라, 부유했지만 차별받았던 유년기, 에도 유학, 탈번, 해군 훈련소 설립 등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계속해서 도전했다.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 더 큰 권력을 갖겠다가 아닌 일본을 위해서라는 큰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직진하는 그의 모습에서 영웅적인 모습을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    그는 ‘큰일 났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큰일 났다.’고 하는 순간 이미 지혜도 사고도 분별도 무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 하는 것들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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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9:10: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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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18113195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62439</link>
         <description><![CDATA[<div>사카모토 류마의 일생은 짧지만 전설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사업가 집안에서 최하급 사무라이, 암살자에서 일본 해군 건설의 선구자, 책략가에서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짧은 인생은 전설로 가득하다. 그는 유신지사로서 막부 통치를 무너뜨리고 천황제도를 다시 실권으로 돌려놓았으며, 이후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고도성장을 초래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하나의 벤치마킹이 되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사업 분야에서 그는 일본 최초의 유한 책임 회사 “龟山社中”를 설립했는데 바로 그 후의 가이엔타이이다. 외교 분야에서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을 성사시켰으며, 그가 제시한 센츄우 핫사쿠는 메이지 유신 정부의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br><br>흑선이 습격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미국의 첨단 화포를 본 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서양 기술과 제도를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결연히 고향을 등지고, 부국강병과 해군 편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향사로서 이런 전향적인 사고와 웅대한 구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물다. 신분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앉아서 논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사카모토 류마는 '왕정 복고（王政复古）'의 그 날을 직접 볼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떠났지만, 그러나 그에게 물든 다른 유신 지사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결국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완수했다.<br><br>「船中八策」과「新政府綱領八策」는는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고, 일본 신국가 체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이후의 메이지 유신은 기본적으로 사카모토 류마의 개혁 구상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 두 문건은 메이지 신정부의 건국 강령의 원본이다. 나는 그가 '일본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대답을 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일본 근대 개혁의 설계자이라고 생각한다.<br><br>사카모토 류마의 일생은 훌륭한 일생이었고, 존경스러운 일생이었으며, 전설적인 일생이었다. 그는 상하 사무라이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고, 사회의 적폐로 형성된 계급적 번들을 넘어섰으며, 사람들이 보수적 사고 패턴을 넘어섰다. 국강의 길을 탐구하여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았고, 그 운명은 일본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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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09:55:03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62439</guid>
      </item>
      <item>
         <title>2018110267 두다혜 / 사카모토 료마</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387337</link>
         <description><![CDATA[<div>가장 처음에 일본의 영웅이라고 했을 때 솔직히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였고 그다음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사카모토 료마 역시 개인적으로 정말 매력적이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번 주 영상의 주인공이 료마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영웅’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른 학우들의 글에서도 특히나 한국인인 우리는 영웅의 이미지를 전쟁 영웅과 많이 관계짓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내용이 보였는데, 나 역시 이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다만 나는 료마가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영웅으로서의 인식이 흐린 이유가 꼭 큰 전쟁에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흔히들 말하는 이야기, 즉 ‘서사(narrative)’라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낭만과 뗄 수 없는 단어이지만 그럼에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영웅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이라는 것은 본인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를 둘러싼 같은 집단의, 더 나아가서 사회의 사람들이 붙여주는 칭호라는 의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불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서사이다. 서사란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실제 사건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그것을 개인 고유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여 언어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표현한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역시 낭만적이지 못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에게 국가적 영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이 서사가 얼마나 대규모이고 극적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히어로도 빌런이 있어야지 정말로 성립될 수 있고 이순신 역시 다 이긴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닌 지극히 어려운 상황을 극복했기 때문에 정말로 대단한 영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사카모토 료마의 인생이 오직 탄탄대로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파악하기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웅들에 비해서 어려움이 컸다고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료마는 자신의 재능과 환경적 조건이 잘 만나서 오히려 빛을 발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div><div>환경적인 면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아무래도 료마의 가족이다. 그는 무사이면서 상인이기도 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 다른 사무라이들에게서 따돌림 받기도 했지만, 집안이 가진 부유함 덕분에 생각하는 것을 도전해볼 수 있었고 혼잡한 시대에서도 꿈을 꾼다는 것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저 무사라는 좁은 시각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닌 상인의 넓은 시각과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 역시 갖출 수 있었다. 또한 료마에게 사무라이로서 무사도에만 정진하라는 것이 아닌 ‘넓은 세상을 누비며 견문을 넓혀라’라는 조언을 일찍부터 해준 사돈과 그를 양자로 들여 집 안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존중해준 형 역시 사카모토 료마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중요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료마가 ‘해군을 만드는 것’, ‘배 회사를 만드는 것’, 그리고 ‘세계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는 계기 역시 심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그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이 가능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가 흑선을 보고 회사를 차리겠다는 생각을 할까? 덧붙여 이런 비유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조선의 세종대왕이 생각났다. 세종대왕 역시 타고난 천재이기는 했으나 그가 왕으로 재위하기 전에 매우 강력한 왕권을 이루어 길을 닦아두었던 태종이 있었기에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기가 훨씬 수월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div><div>하지만 머리와 환경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료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용할 능력과 의지 역시 갖춘 사람이었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의 행동 중 하나는 역시 탈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상에도 나왔듯 자신이 속한 도사번이 번이라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번이 무너져도 좋다는 조슈번에 이미 뒤쳐졌으며 이대로라면 자신은 도사번이라는 입장에 묶여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목숨을 건 탈번을 이행한다. 이러한 행동 자체가 그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만 보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근거 없이 막무가내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탈번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하급 무사인 료마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꿈이었던 무역 회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삿초 동맹을 성사시켜 대정봉환을 이루어 낸다. 나는 이 부분이 료마가 일본에서 압도적인 순위로 영웅이라고 칭해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앞서 밝혔듯 나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서사가 필요하고 료마에게는 국제적인 히어로가 되기에는 서사가 부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보다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서사가 있을까? 외국인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저 악감정이 깊은 두 지역을 화해시켜 나라의 정권이 바뀔 수 있도록 도왔다 정도로 볼 수 있으나 사실 이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며, 말이 두 지역이지 당시의 번이 ‘나라’의 개념과 비슷했다는 점을 알면 단번에 느낌이 달라진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다소 간략화시켜 비유하자면 일본과의 정치적 악감정을 모두 털어내고 좋은 파트너가 되는 일을 해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카모토 료마가 직접적으로 빌런과 싸우거나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고난과 맞선다는 의미의 히어로는 아닐지라도 일본에 있어서, 그리고 세계와 일본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웅이라고 불리기에 지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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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16: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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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404985</link>
         <description><![CDATA[<div>&nbsp;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조사하면서 왜 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영웅으로 칭송받는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일본 사회의 특징은 어떤 면이 있는지, 손정의도 왜 사카모토 료마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생각해봤다.<br><br>&nbsp;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사회가 봉건주의에서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번 간의 동맹, 막부에 대항, 대정봉환, 그리고 일본이 메이지유신까지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을 찾아보면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이 꽤나 큰 것을 알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에 맞는 사람처럼 한 몸으로 일본의 격변기 속에서 주요 순간마다 있었다.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는 그 속에서 다양한 것을 배우고 듣고 깨달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점점 세워 나가고 그것을 관철시킨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와 조슈번 간의 동맹을 위한 야망있는 노력, 그리고 대정봉환을 통해 정권 자체를 옮기는 거사를 주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토대를 닦았다.<br><br>&nbsp;사카모토 료마는 그런 뛰어난 정치가에 그치지 않고 카메야마 조합에서 항해술도 익히고 운수업도 익히며 번 간의 동맹을 도모하고 번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선중팔책이라는 국가구상을 제시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런 면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일본을 위한 열정과 재능은 매우 뛰어나고 일본인들의 존경하는 인물에 걸맞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의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알아보면서 흥선대원군이 떠올랐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고 개국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흥선대원군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쇄국정책이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했겠지만..<br><br>&nbsp;손정의가 말하는 자신의 롤모델은 사카모토 료마라고 했는데, 사카모토 료마를 알아보고 그 두 인물을 조사하면서 어느정도 손정의가 사카모토 료마를 롤모델로 생각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탈번으로 낭인이 되면서까지 자신의 꿈을 펼쳤고 야망을 실현시켰다. 손정의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면서까지 자신의 꿈을 펼쳐야 했던 료마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키지 않았을까.<br><br>&nbsp;사카모토 료마는 시대에 대한 흐름과 국내(일본)을 아는 통찰력, 더 나아가서 서양에 대한 관심과 진짜 일본을 위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았다. 사카모토 료마는 열정 뿐만 아니라 통찰력, 재능까지 갖춘 인물이었다.<br><br>&nbsp;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 속에서 발빠른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했다. 그 후 수많은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있고 난 이후에 지금의 선진국 일본이 있다. 비록 과거와 현재의 일본의 위상이 일치하진 않더라도, 현재의 일본인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좋아하는 것은 더 나은 일본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더 나은 일본을 만들어줬다는 료마의 노력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br><br>&nbsp;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사무라이, 정치가, 혁명가등 다양한 면의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 관록 또한 일본인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당시 복잡했고 봉건주의였던 일본을 '구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br><br>&nbsp;일본의 근대화를 이루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에 기여한 인물들은 정말 많지만, 사카모토 료마 만의 매력과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면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또한 일본인들이 존경하고 영웅으로 불러주는 다른 역사적 인물도 조사하고 알아보면서 그 인물은 왜 일본인들이 존경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사카모토 료마와는 어떤 면이 다른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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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32: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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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4 이현정</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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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우리는 어떤 인물을 영웅이라 부르는가. 인품이 뛰어난 사람, 역사적으로 업적을 남긴 사람 등 그 의미는 국가마다, 시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본받을 점이 있으며,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카모토 료마의 어떤 점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을까. 그는 막부 체제를 타파하고 일본의 근대적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하급 무사 계층 출신인 료마는 원래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인물이었으나 이후 친서양파 가쓰 가이슈에 크게 영향을 받고, 막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바탕으로 선중팔책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그는 일찍이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통상과 해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해운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근대 일본에 대한 구상, 그리고 그 구상을 직접 실현해내는 실행력 등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nbsp;<br><br>사카모토 료마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십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웅'이라고 불리는 인물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료마가 간다'를 집필한 시바 료타로는 어떤 이유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소환해냈을까? 이는 메이지 시대를 다시 돌아보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근대적 변화가 일어났고, 여러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아시아의 제국주의 강국으로 자리잡았었던 그 때의 강한 일본, 그리고 그러한 일본을 만드는 데 조력한 사카모토 료마를 조명하기 위해서 아닐까.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가 남긴 역사적 업적이 소설을 통해 과대평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영웅이 '만들어지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 인물이 어떠한 맥락에서 영웅이 되었는지 그리고 정말 영웅이라 부를만한 인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해당 사회와 문화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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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42: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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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05 황목자 사카모토 류마</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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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 &nbsp; &nbsp; 미나모토노 요시노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 역사상 유명한 영웅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오늘 공부를 통해 내가 알게 된 또 다른 일본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는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의 무사였다.그는 자신의 뜨거운 일생을 일본 현대화의 진행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행동도 많은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가쓰카이치와 함께 1863년 고베 해군 훈련소 일에 몰두한 것이 일본해군 건설의 밑거름이 됐다. 뿐만 아니라 사쓰마와 조슈 2번의 군사동맹을 성사시키는 데 사카모토의 역할이 컸다.<br>&nbsp; &nbsp; &nbsp; 내가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를 위해 개인적으로 세운 조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카모토 료마 제삿날이면 각종 료마 관련 장소가 붐비고, 사카모토 료마가 없었다면 한때 세계 2위 경제국이었던 일본은 없었다.그만큼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인의 마음속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r>&nbsp; &nbsp; &nbsp; 사카모토 료마는 "万事, 見かんん"이라는 명언이 있다.료마의 성격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책을 별로 읽지 않은 사카모토에게는 그의 집착이 묻어난다.<br>&nbsp; &nbsp; &nbsp; &nbsp;사카모토는 일본의 영웅이며, 사카모토와 일군들의 노력으로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사카모토의 정신은 후세에 감탄했다.그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일본에서 사카모토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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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51: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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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431867</link>
         <description><![CDATA[<div>&nbsp;[사카모토 료마] 는 현대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고 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특히나 료마는 대정봉환 관련 활약이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다른 일본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의 인물인 것도 그 인기에 한 몫을 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료마의 어떠한 부분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그를 매력적인 인물로 느끼게 하는 것일까?<br>&nbsp;우선 우리는 료마가 이 당시, 즉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을 준비하던 시기에 했던 역할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유명 인물로 같이 떠올리자면, 조선의 정도전과 중국 고대사의 제갈공명이 있을 것이다. 이 두 인물 모두 한국사와&nbsp; 중국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들이고, 모두 그 나라의 문화 안에서 인기를 얻는 인물들이다. 이들 셋의 공통점은 나라를 직접 세우거나 고쳐낸 왕이나 지도자가 아닐지언정 그 속의 실무적인 개혁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준비했던 '브레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료마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도, "료마가 아니었으면 메이지 유신은 성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라는 이야기로 모일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br> 급변하던 정국의 설계자, 심지어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역사에서의(이후 군국주의와 결합하여 끼친 악영향을 제외하고) 황금기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료마. 더욱이 료마가 고평가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를 꼽자면, 봉건적이었던 당시 일본의 사회상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들과 사무라이들과 천황 사이에 이리저리 얽혀있던 권력의 실타래를 한번에 풀어내고 해결해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후대인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얻는 인물이 더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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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57: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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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 소년만화의 성장형 영웅과 완성형 영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title>
         <author>tinytedkim</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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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2016110279 김하선　</div><div><br>　수업 시간에 원펀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최근에 일본만화에서 유행하는 완성형 영웅과 과거에 유행했던 성장형 영웅에 대한 내 개인적 생각을 한 번 적어보려고 한다.</div><div>&nbsp; &nbsp;</div><div>　요즘 유행하는 일본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주인공들과 양상이 아주 다르다. 흔히 말하는 먼치킨 계열 영웅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개인적으로 2015년도 즈음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일본 웹소설 사이트 “소설가가 되자”가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이세계 물, 먼치킨 물이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먼치킨(munchkin)이란 다른 캐릭터의 도움 없이 모든 문제를 자기 혼자서 해결하는 존재를 말한다. 즉, 먼치킨 히어로에게 동료는 그저 장식일 뿐, 문제 해결은 모두 자신의 영역이다. 물론 예전부터 먼치킨 적인 형태를 가진 캐릭터는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꾸준히 등장하였으나 주인공이 먼치킨인 경우보다 조연이나, 빌런이 그러한 성향을 가질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애초에 주인공이 먼치킨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22년 현재 먼치킨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 먼치킨 계열 주인공인 만화나 애니메이션 대표 작품으로는 &lt;소드아트온라인&gt;, &lt;오버로드&gt;, &lt;원펀맨&gt;, &lt;암살교실&gt;, &lt;길티크라운&gt;, &lt;전생했더니 슬라임 머시기&gt; 등이 있으며 그 외로는 사실상 요즘의 대부분의 이세계물이 먼치킨 적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냥 강하다. 서사도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과거에 비하면 악당도 서사가 별로 없다. 영웅은 이미 작품이 시작할 때부터 엄청나게 강하거나 완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으로는 주변인들이 역경을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영웅이 나와서 일망타진. 한 방에 다 정리해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더는 서사가 튼튼하고 노력하는 영웅이 많이 소비되지 않는다. 일본의 소년만화에서 바라던 영웅상이 달라진 것이다.</div><div>　그렇다면 과거의 영웅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과거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성장형 영웅이었다. 2000년대 인기 작품을 모두 들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lt;아이실드 21&gt;, &lt;강철의 연금술사&gt;, &lt;자이언트 킬링&gt;, &lt;바쿠만&gt;, &lt;원피스&gt; 등이 크게 유행했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크게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동료와의 협력,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장하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영웅의 노력이 정당화 되어야 했기 때문에 따라서 악당의 서사 또한 매우 중요했으며 의미 없는 승부는 없었다.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가 중요했기에 상대방의 서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혼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간단한 문제들은 없다. 공동체가 온 힘을 합치고 동료와 유대감을 키워나가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div><div>　이러한 경향은 아마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2000년대까지는 여전히 유효했으니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을 해본다. 근대적 사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력신화, 능력주의인데 내가 노력해서 무언가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근대적 사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했다. 나의 재능과 노력을 이용하면 못 할 것이 없고 곤죠(근성)론 이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며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하는 스토리가 과거엔 잘 소비되었었다고 본다. 그리고 덩달아 그 당시의 일본은 여전히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사회였으며 아무리 한국에 비해서 일본이 개인주의적이라 한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매우 중요했다. 회사생활이나 학교생활, 동내 학부모 PTA까지 일본에서 공동체 없이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도심이면 괜찮은 편이지 오늘날 현대에도 여전히 일본 시골에서 공동체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여전히 강력히 작용했고 일본에선 커다란 문제를 다 같이 힘을 합쳐 해결하는 양식이 매우 익숙했다. 물론 이러한 성향이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찌 됐든 일본도 동아시아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사토리 세대와 유토리 세대를 기점으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성향이 매우 달라지기 시작했고, 일본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문화적 강제성이 새로운 세대를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2000년대까지는 유지되었던 모던한 사상들이 포스트모던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근대적 유물들이 해체되어 가던 것이다. 이는 일본에 많은 세대 갈등을 낳았고 이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div><div>　유토리 교육이 실행되면서 기존에 국·영·수 위주로 돌아갔던 일본의 교육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 동아리, 부활동 위주로 변해 갔으며 학업도 상당히 널널하게 진도를 잡고 아이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태로 바뀌어 갔다. 물론 이론만 보자면 상당히 좋아 보이지만 결과가 꼭 선하게만 나온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더라도 기성세대는 이후로 신세대를 이해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어느 시대의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잘 이해하겠냐 만은 하여튼 그러했다) 그도 그러할 것이 기성세대는 일본의 경제성장기를 다 누린 황금기를 경험한 세대였지만 유토리 세대는 버블경제가 붕괴하고 태어난 아이들이며 그 후에 IT 버블에다가 리만 쇼크 등 더 이상 일본의 장래가 밝아 보이기만 하는 시대는 끝난 이후에 태어났기에 그러한 경향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사태가 이러하다 보니 오죽하면 ‘유토리 세대는 희생정신이 없다.’, ‘유토리 세대는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토리 세대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보다 개인의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유토리 세대는 이직도 망설임 없었고 승진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었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중시했다. 이러한 세대 변화는 젊은 세대가 주로 즐기는 소년만화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div><div>　신세대는 더 이상 타인과 깊은 유대감을 쌓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안 그래도 회사 가면 말도 안 통하는 동료투성인데 타자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강한 유대감을 호소하는 만화들이 인기를 잃기 시작했고 피땀 흘려가면서 애쓰는 영웅들의 서사를 기다리는 독자들도 점차 줄어갔다. 자연스레 노력의 시간과 서사는 작품 시작 전에 이미 완성해 놓은 다음 작품을 시작하는 작품들이 늘어났으며 이러한 먼치킨 영웅들은 괜히 헛소리만 하거나 따분한 정론을 늘어놓는 주변인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문제를 모두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사실 영웅 스토리를 보는 이유는 내가 영웅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영웅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신세대가 이러한 먼치킨 영웅을 소비한다는 것은 자유롭고 합리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현실과 이상에 괴리가 생기고 많은 타자와의 교감에 피로감을 느끼는 신세대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줌으로써 생긴 유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nbsp;</div><div>　누구보다도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배웠으나, 막상 자신의 삶이 그러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사람에게, 이러한 먼치킨 영웅들은 큰 위로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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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0:58: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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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4 시카모토 료마</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448112</link>
         <description><![CDATA[<div>시카모토 료마라는 일본 역사에 대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을 위해 가장 공헌한 인물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을 보면 그는 일본에서 아주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시카모토 료마는 일본 근대화의 기초를 이루게 한 ‘명치유신’을 성사하게 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가 명치유신의 성사를 이끈 기간은 고작 4년에 불과하고 그럼에도 그가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칭송되는 것은 조금 놀라운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이루어낸 최대의 공헌은 사이가 벌어진 조슈와 사쓰마를 화해시켜 이른바 삿조 동맹을 성사시키고 평화적 대정봉환이라는 획기적인 계책을 마련한 일일 것이다. 또 그에게는 배가 있었기에 그는 명치유신을 피 흘리지 않고 성공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명치유신의 설계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수구파 무사들에 의해 33세라는 어린 나이에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열망하고 힘쓰던 ‘명치 개원’이 선포되기 4개월 전의 일이었다.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시카모토 료마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에 그렇게 오랫동안 강력하게 남아있을 만큼의 매력은 무엇인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를 많은 일본인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한 것은 시바 료타로의 대하소설 ‘료마가 간다’의 힘이 크지 않을까 싶다. 시바는 이 소설로 하여금 일본국민들의 가슴에 료마의 열정과 노고를 다시 살아오게 함으로써 그를 일본에 가장 공헌한 인물로 기억되게 했던 것 같다. 어떠한 역사적 인물이 사람들에 의해 ‘영웅’으로 인식되는 데에는 그 역사적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소설, 또는 영화로 하여금 사람들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일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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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1:12: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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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카모토 료마 2020110283 정붕거</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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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료마전은 미쓰비시 재단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시각을 통해 역사적 인물 사카모토 료마의 일생을 다뤘다.<br>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처럼, 그 시대에 일본에서는 영걸들이 배출되었는데, 사카모토 료마가 그 중 하나였다.사카모토 료마는 걸출한 정치가이다.출신은 미천하지만 국난 앞에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그리고 용마는 그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기적을 창조하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br>드라마에서 료마의 성장 과정을 잘 재현했다.사카모토 료마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희생과 가르침, 그리고 청년이 나라의 대세에 직면한 막막함, 그리고 최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합의 변혁을 감행하는 것을 거쳐 영웅이 되었다.사카모토 용마는 새로운 시대가 오기도 전에 암살됐지만 명성은 여전히 일본 민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을 구하는 서민 영웅이다.<br>료마전은 료마를 중심으로 그 시절 일본의 변혁을 그린 드라마다.저는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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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1:21: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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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71 김영 사카모토 료마 감상문</title>
         <author>rladud010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464506</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왜 열광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카모토 료마가 어떤 일을 행했는지 알아야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탈번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 산하에 속한 하급무사로 양이론에 심취했던, 당대의 무사와 다를 바 없던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흑선 내항을 계기로 인식을 바꾸고 일본의 중앙 집권화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사내였다.</div><div>&nbsp; &nbsp;</div><div>그의 존경한 면모를 따지자면 국가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신념, 강압 없이 대화로써 번 간의 연합을 주도하여 대정봉환을 이룩하게 만든 외교술, 리더십등 여러 면모를 꼬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다른 사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만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필자는 세 가지를 생각해보았다.</div><div>&nbsp; &nbsp;</div><div>우선 그는 행동가였다는 것이다. 유신지사들을 배출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료마와 비슷하게 변혁을 위한 사상을 내세웠지만 그는 료마처럼 탈번을 하여 타번들을 설득시키고 외국과의 교류를 주장하고 움직이는 등의 모험을 하진 않았다.</div><div>&nbsp; &nbsp;</div><div>둘째로는 그가 구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이 어떤 절차를 밟았을지는 주변국의 사례를 봐도 밝아보이지 않는다. 료마는 그런 유신의 시발점이 되는 삿초동맹 – 대정봉환을 이룩해낸 사내라는 점에서 동시에 일본의 피식민지 행을 막아낸 위광을 얻게 되었다. 어려운 조건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능력자라 증명되는 것은 덤이다.</div><div>&nbsp; &nbsp;</div><div>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로 그가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차후 현실정치를 하며 일어날 도덕적 타격을 받을만한 일들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어떠한 권력을 쥐기 전 죽었기에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조슈-사쓰마 파벌 간 알력다툼, 제국주의 침략 주범이라는 원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더욱이 정적으로부터 평가절하될 일도 없어진다.</div><div>&nbsp; &nbsp;</div><div>이를 보면&nbsp;사랑받는 영웅의 조건은 1. 직접 움직이는 행동가이자, 2. 목표하고자 했던 것을 성공해야하며 3. 늙어 악당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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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1:28: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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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143 김준형 &#39;사카모토 료마&#39;</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0468496</link>
         <description><![CDATA[<div>  영웅이란 어떻게 탄생할까. 동서고금에 ‘훌륭한 인물’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보편적인 가치를 실천한 사람, 숭고한 무언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 위대한 발견을 이뤄낸 사람 등이 이 ‘훌륭한 인물’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물이 어느 시대에 영웅으로 추앙받다가도 이후 시대에는 역적으로 취급받는 경우도 많으며,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 특정 시대에 영웅으로서 칭송받기도 한다. 여기에서 영웅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영웅이란 타인에 의해 발견되고 추대되는 것이며 일종의 사회적 합의라는 점이다. 또 어떠한 인물이 영웅으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더하여 일부 화소가 강조되기도 하고 어떤 화소가 감추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편집’을 통해 그 인물을 통해 보고자 하는 가치가 강조된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했을 때, 영웅이란 한없이 사실에 가까운 허구적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div><div><br>  사실에 비해 허구가 잘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당대인의 열망을 투영한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이야기는 당대인의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 가령 고전소설 『박씨전』에는 당대인의 북벌과 주체적인 여성에 관한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순신이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된 것도 단순히 그의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정신적 가치를 숭상하는 것 외에도 ‘일본에 이겼던 역사’를 새긴다는 목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허구적 영웅 서사, 혹은 실존 인물의 영웅적 일대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는 당대인의 바람이나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혹은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 거의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근래에는 기업인 등에 밀려 그 순위가 비교적 낮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상당히 상위권에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인에게 사카모토 료마 이야기가 대표적인 실존 영웅 서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div><div><br>  우선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과 그 인물의 일대기 자체가 매력적인 것이 첫째의 이유일 것이다. 시대적 전환기에 일개 하급 무사로 태어나 문무양도에 뛰어난 행동력으로 후대 이루어진 개혁의 정신적 바탕을 제공한 인물의 서사는 어떠한 문화권에서도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더해 젊은 나이에 반대파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는 소위 ‘낭만적인 죽음’을 맞았다는 화소도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잘 죽는다’는 가치를 숭상하는 일본의 사회 풍토에서는 더욱 주목 받는 화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이전에 인물의 일대기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이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인물에게서도 시사점이나 가치는 찾아볼 수 있다. 즉, 영웅이란 발견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div><div><br>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인에게 있어 영웅으로 칭송받는 둘째의 이유는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는 첫째의 이유보다 본질적이다. 현대 일본인의 시점에서 ‘좋았던 시절’은 과거에 존재한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부터 패전 이전까지, 그리고 1970년대부터 버블 붕괴 직전까지를 호시절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두 시기에는 차이가 있는데 아이콘에 해당하는 인물의 존재 여부이다. 버블 경제 시대에는 그 시기와 경제 호황 현상을 상징할만한 인물이 부재한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패전까지 그 시대를 상징할만한 인물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상징하기에 메이지 천황이나 다이쇼 천황 혹은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인물은 너무나 많은 결격 사유를 지니고 있다. 시대의 상징이 될 수 있으나 타국의 비판은 물론이고 자국 내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인물들을 영웅으로 공공연하게 내세우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사카모토 료마는 그리워하기 꺼려지는 시절에 대한 아이콘으로 적합하기 그지없다. 침략전쟁과 직접적 관련은 없으면서도 근대화 시기의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했던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특성을 ‘발견’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패전 이전까지 시기에 대한 이미지 즉, ‘아시아를 호령하는 일본’, ‘세계무대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강한 일본’이라는 이미지가 한 번에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에 투영되어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일본의 실존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nbsp;</div><div><br>&nbsp; 당연히 이 두 이유만으로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의 대표적 영웅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 것이며 타국의 위인에 대한 폄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그가 영웅이라고 학습되어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고에서는 실존 영웅 서사의 허구성에 주목하여 사카모토 료마에 투영된 일본인의 열망을 생각해보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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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05 11:32: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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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쟁영화를 통해 보는 일본의 전쟁</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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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영원의 제로) <a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2kRit1VSTSyRL6GPZvQCrtnxkgSErorW?usp=sharing">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2kRit1VSTSyRL6GPZvQCrtnxkgSErorW?usp=sharing</a><br>(반딧불이의 묘) <a href="https://noonoo.tv/en_movie/5833">https://noonoo.tv/en_movie/5833#d25ea2b3</a><br>(일본패망 하루전)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m1Lv3GZIARrTIvKfWj7ezKKUp-kX0Gu3<br><br>이번주 코멘트는 16일(토요일) 자정까지 제출하면 됩니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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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5: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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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의 가장 진 하루 1967년 예고편</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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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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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7: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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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딧불이의 묘 감상문 강영준</title>
         <author>dud904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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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다카하타 이사오도 참 억울할 것 같다. 일본에서는 좌익 소리를 듣고 한국에서는 우익 소리를 듣는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우익과는 대척점에 있는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던 데다 인터뷰를 살펴보면 정치적 포지션은 좌익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감독을 맡은 《반딧불이의 묘》는 한국에서는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작품이라며 비판받고 있다.</div><div>물론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이 피해자로서 등장하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콘텐츠는 그 나름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특히 일본의 행패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역사가 입은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반딧불이의 묘》가 마냥 ‘피해자 코스프레 작품’이라는 관점에서만 해석될 만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작품이었다면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을 상대했던 서양권에서도 이 작품의 평가가 높을 리 없을 것이다.</div><div>내가 이 작품을 ‘피해자 코스프레’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세이타, 세츠코 남매가 ‘마냥 불쌍하지는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결말에서 세이타도 세츠코도 먹을 것이 없어서 비참하게 죽으면서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결말에 이른 것이 과연 순전히 전쟁 때문일까. 만약 남매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 작품이 남매를 순수한 전쟁의 피해자로 그려낸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식으로 남매를 그려내지 않는다.</div><div>세이타, 세츠코 남매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절박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조금만 자존심을 굽힌다면 얼마든지 숙모의 집에 의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매가 궁핍한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숙모의 구박을 듣기 싫어서였다. 그러면 모진 숙모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숙모가 남매에게 했던 구박은 전시라는 상황에 얹혀사는 처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응당 할 만한 것들이었다. 세이타, 세츠코는 숙모의 집에서 밥만 축내면서 노는 데에 여념이 없다. 아직 어린 세츠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세이타는 어느 정도 철이 들 만한 나이임에도 공부나 일을 하라는 잔소리에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변명만 늘어놓는다. 이런 세이타의 철없음은 폭격이 왔을 때 ‘네 나이면 동굴로 피할 게 아니라 방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숙모의 구박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또 숙모를 마냥 모지고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남매가 집을 나가려 했을 때 걱정해 준 것으로도 드러난다.</div><div>남매가 집을 나온 뒤로는 어땠는가. 가진 게 다 떨어지고 생활이 힘들어졌을 때 그들에게 농부 아저씨는 ‘이제라도 고개 숙이고 숙모네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그럼에도 세이타는 이를 거절하고 동굴 생활을 계속한다. 식량을 구하는 방법도 번듯한 곳에서 근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리나 빈집털이 등 도저히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 것들뿐이다. 결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자존심만 챙긴 세이타는 동생과 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div><div>위와 같은 상황으로 보았을 때 《반딧불이의 묘》는 남매를 단순한 피해자로 묘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충분히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다 비극을 맞이하는 결말은 당시 일본 상층부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어린아이였다는 점과 그들의 비극이 감성적으로 연출된 것 때문에 이들이 비판의 대상이 아닌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보일 여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비판은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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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9:14: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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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8 오채연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ocy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8992632</link>
         <description><![CDATA[<div>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제작한 영화 ‘반딧불이의 묘’란 2차 세계대전 일본 한 마을의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품을 본 직후, 전쟁과 그로 인한 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전쟁이란 무엇일까? 전쟁이 초래한 막대한 배상금과 더불어 일본 시민들이 겪어야 할 암담한 전후 생활을 생각해보았을 때 일본이 전개한 전쟁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영이 종료된 후 깊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감독이 주입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지 느껴져, 마냥 남매를 애도하고 슬픔을 느끼기엔 어디에선가 느껴지는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br><br></div><div>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남매는 세이타와 어린 동생 세츠코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집은 사라졌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외숙모의 집에서 얹혀 살고 있는 아이들은 사실 거의 놀기만 하는 모습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외숙모 집의 형, 누나는 모두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기 위해 나가지만, 세츠코와 세이타는 집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밖에 나가 놀다가 밥을 먹으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다. 세이타는 방화 활동을 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 동생과 함께 숨어있는다. 하지만 머물고 있는 숙모네 집은 상당히 눈치가 보인다. 숙모의 잔소리는 듣기가 싫고 일을 하는 것도 세이타에겐 여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 둘은 숙모의 집에서 벗어나 동굴에서 생활하기로 한다. 사실상 노숙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생활은 반딧불이의 불로 밤을 지새우고, 낮에는 반딧불이의 묘를 만들어준다. 움푹 파인 땅에 들어가는 죽은 반딧불이의 모습은 전쟁의 피해로 죽은 시민들의 시체와 닮았다. 세츠코와 세이타가 가져온 모든 것을 팔아버렸지만, 생활은 궁핍해질대로 궁핍해져만 갔다. 세이타는 옆 동네가 공습 당하는 날이면 그 동네로 뛰어 가 도둑질을 하고 돌아온다. 그러던 와중에 세츠코는 영양분 부족으로 아파만 갔고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nbsp;<br><br></div><div>  영화는 전쟁 속 아이들의 고통을 파격적으로 표현하여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걸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영화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오로지 국민의 몫이 되고 만다. 어린 세츠코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일본이 전범국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어리고 작은 아이들이 피해 입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영화를 본 직후 느꼈다.&nbsp;<br><br></div><div>  하지만, 영화에 대하여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피해자 코스프레 작품 논란’이라는 키워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세이타와 세츠코를 향한 안타까운 시선과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정치 세력들을 비판하던 감상자로써 작품이 의도했던 아니던 영화 속에서 풍기는 피해자 코스프레의 분위기가 매우 잘 먹힌 것 같다고 느껴졌다. 사실은 식민지배로 인하여 수십 년간 수탈 받은 진정한 피해자는 한국일 것이다. 일본이 전범국이지만, 일본의 무고한 시민은 피해자라고 느껴진 감정들이 어쩌면 관람자에게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의도적으로 전파하고자 한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남매의 비극을 내세워 일본이 주도적으로 전범 행위를 덮으려는 의도가 보여 한편으로는 씁쓸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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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11:16: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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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911018 유은우 반딧불이의 묘를 보고 </title>
         <author>6cnb57g7r5</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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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현재 영화 산업에 있어서 전쟁 이후, 전쟁 중의 참상에 대한 서사는 다양하다. 반딧불이의 묘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미시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가장 어린 캐릭터 세츠코가 죽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그저 비극적으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nbsp;<br>세이타와 세츠코의 행동을 통해 전쟁과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세이타와 세츠코 가족은 전쟁이 나기 전까지 잘 사는 집안이었다. 전쟁이 벌어진 직후까지도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의 대화는 단절 되었다. 또한 세이타는 숙모의 구박을 견디지 않고 세츠코와 집을 나와 작은 동굴 같은 곳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 결과로 세츠코가 죽는다.<br>이 점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보여준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수많은 나라들이 필요 없는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강행했다. 이 지점은 세이타가 숙모의 집을 떠나 동굴로 들어간 모습과 일치한다. 결국 태평양 전쟁은 일본에게 있어서 치명상이 되었다. 이 지점도 세츠코가 죽는 것과 대치한다.&nbsp;<br>많은 대중들이 이 영화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미화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인은 미화 영화가 아닌 이 영화를 일본과 전쟁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라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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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14:04: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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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113414  강영화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9rjbjr8xjj</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9351456</link>
         <description><![CDATA[<div>&nbsp;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하면 일본은 항상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고 그 전쟁으로 인해 어떤 재난을 당했어야 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전쟁이 일본에께&nbsp; 많은 재앙을 끼친 것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왜 이런 재앙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입니다.<br>이 영화처럼 진짜 사건을 엮은 것입니다. 영양실조로 여동생이 죽는 것을 전쟁 중 목격한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 중 엄마를 잃고 집을 잃은 남매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 또 논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아이의 불행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일본이야말로 전쟁의 피해자임을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저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고 무고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일본이 전쟁 피해국이라는 것을 인정 못합니다 .&nbsp; 어느 나라에서든 전쟁 중인 어린이는 모두 무고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전에 왜 전쟁이 벌어졌는지부터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br>저는 무조건 어느 나라를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그동안 국가 간 전쟁 문제로 인해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동안 국가 간 전쟁 문제로 인해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가 굉장히 몰입감 있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nbsp; 시청자들이 전쟁의 피해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사실 전쟁에서는 누구나 피해자입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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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15:22: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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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패망 하루전</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39397221</link>
         <description><![CDATA[<div>전쟁 관련된 영화지만 다큐멘터리로 편집한 부분을 빼고는 전쟁의 장면이 없다. 전쟁 표현하는 것보다 주요 일본 대신들이 포츠담선언의 무조건항복과 본토대전에 대해서 서로 대립과 심리적인 갈등을 보여주었다.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나 육군의 분열 등. 특히 육군대신인 阿南惟幾가 처음에 전패를 부인하고 전쟁을 주장했지만 내각은 종전을 원한다. 육군의 입장 전달하려고 회의 갔다왔다 했지만 최후에 각오해서 종전조서에 서명했다. 육군대신이라 개착까지 거절하며 할복해서 죽음으로 책임을 졌다. 그리고 畑中健二가 영화중에서 제일 우익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천황의 결단을 내려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념을 가지며 정변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도대체 진짜 국체를 유지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군인의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가? 알 수 없지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div><div>&nbsp;</div><div>쇼와천화의 분량이 아주 적은데 나온 장면이 다 국민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고 인자한 이미지를 만든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 이 영화를 보면 정말 천황이 전쟁과 무관계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제작진은 쇼와천황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약화시키고 회피하는 느낌이었다.</div><div>&nbsp;</div><div>원래 역사 관련되 영화라서 심심할 것 같단 예상을 했다. 나온 장면도 어두워서 더 긴장감과 무거운 느낌이 주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보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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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15:49: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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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210988 신민호, &lt;반딧불이의 묘&gt; 어둠의 시대를 빛낼 어린이들의 무덤</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0094076</link>
         <description><![CDATA[<div>&nbsp;&lt;반딧불이의 묘&gt;는 2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까지의 모습을 어른들의 전투 장면이 아닌 어린이들의 생존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를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서 국가의 패망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서 힘 없이 죽어나간 민간인들의 이야기, 그것도 어른을 잃고 혼자 남게 된 부랑아나 고아들의 입장으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는 점이 피해자 영화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br>또한 단순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아닌, 일본의 천황주의를 돌려까는 듯한 장면을 황폐화된 현장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군인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었다.<br><br>이 영화는 반전, 피해자 영화가 아닌, 어른의 품을 벗어난 어린이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오로지 세이타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어머니가 죽고, 숙모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 세이타는 그녀의 갖은 호의를 받으며(마을의 일원이 되어 쌀을 제공받고, 숙식을 제공 받는 등) 생활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처럼 전후 복구에 힘 쓰는 것이 아닌, 집에서 노는 모습을 보이거나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그녀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것을 고물상에 팔아 둘이서만 밥을 해먹으며 지낸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본 숙모의 말을 잔소리라고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과 세츠코만의 순수한 가정,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마을의 일원, 그리고 어른의 품에서 벗어나 방공호로 옮겨 산다. 하지만, 아무 힘 없는 두 어린이는 세츠코의 아픔으로 병원에 가도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었고, 힘 있는 어른에게 세치기도 당한다. 결국 공생의 시대에 독자생존을 택한 세이타와 세츠코는 죽음을 맞이한다.<br><br>나는 이 영화가 피의 시대를 맞이한 나라에서 공생이 아닌 독자생존을 택한 사람, 그것도 가장 힘이 없는 어린이들의 모습과 그런 이들에게 냉소적인 힘 있는 어른들의 태도를 비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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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2 01:41: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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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0 &lt;반딧불이의 묘&gt; 감상평</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0740120</link>
         <description><![CDATA[<div>&nbsp;인간의 역사는 무수한 전쟁과 함께 이어져왔다. 그 목적이 정치적 의도든, 영토든, 자원이든 인간을 갈아 넣어 거대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지도층 중심의 땅따먹기 게임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전쟁이 가진 특징이다. ‘평화’를 강제하는 세계 정부 아래, 전쟁의 폭력성이 갈등의 폭력성으로 옮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 특히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은 사실 멀게 느껴지는 개념이다. 역사책에서 무수한 전쟁을 배우며, 미디어로 그 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전해 들으며, 우리는 무엇에 슬퍼하는가? 총탄에 심장을 뚫린 이들의 죽음 때문인가, 그 죽음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무력한 이들의 남겨진 모습인가, ‘전쟁은 나쁜 것이다’라는 교육 세뇌의 결과인가? 실상에 관심 갖지 않은 채 전쟁터에 놓인 사람들을 그저 동정하는 그 슬픔은 가식이 아닌가?<br><br></div><div>&nbsp;&lt;반딧불이의 묘&gt;는 태평양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민간인인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를 주인공으로 한다. 고베대공습으로 집이 불타버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숙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숙모의 잔소리로 집을 나와 방공호에 살다가 세츠코가 영양실조로 죽고 세이타도 쇠약해져 죽는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사실 이 작품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느닷없는 전쟁으로 화목하고 부족함 없던 가족이 순식간에 붕괴해버리는 과정이다. 일본을 피해자로 꾸며놓는 우익 작품이라는 비판도 다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단순히 민간인인 주인공들을 동정케 한다는 것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동정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은 의문이다. 국경을 가리지 않고 제2와 제3의 세이타를 만드는 것이 전쟁의 비참함이다.<br><br></div><div>&nbsp;극중에서 세이타는 14살의 소년, 세츠코는 4살의 어린 소녀다. 많은 이들이 이 남매를 동정하는 한편, 세이타의 현실자각이 부족한 행동을 비판하기도 한다. 세이타가 세츠코를 데리고 숙모댁을 나오지 않았다면, 돈을 벌기 위한 어떤 행동이라도 했다면 두 남매는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나 또한 작품을 감상하며 그저 비참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확실히, 현명하지 않다. 자업자득이라는 낙인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에 의해 파괴된 보금자리, 전신에 화상을 입고 처참한 모습으로 수많은 시체와 함께 불탄 어머니, 소식을 알 수 없는 아버지. 손에 흙 묻혀본 적 없을 유복한 가정의 아이가, 환영받지 못하는 새로운 환경에서 순식간에 스스로 정신을 차려 살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PTSD를 숨기고 당장의 절망적인 심리를 다스려 ‘살기 위한’ 방법이, 어리석은 현실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세태에 내던져진 무력한 이들에게 ‘현명’을 강제할 자격이, 외부의 눈인 우리에게 있는가.<br><br></div><div> 이곳에 일방적인 피해자는 없다. 어리석음은 있더라도 악은 없다. 무너진 경제에 각박해진 인심도, 수많은 죽음에 무뎌진 감정도, 감정에 휘둘려 뛰쳐나온 발걸음도 지극히 인간적일 뿐, 악하지 않다. &lt;반딧불이의 묘&gt;, 내가 느낀 이 작품은 일본이라는 국경선을 벗어나, 상류 권력에 의한 재해에 개미처럼 휩쓸려버리는 ‘인간’의, 역사책 뒤 그늘에서 스러져간 ‘무고한 인간’의 이야기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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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2 12:33: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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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113195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1021171</link>
         <description><![CDATA[<div>이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후반의 태평양 전쟁 기간에 설정되어 있다. 한 시대의 비극인 듯 세이타와 세츠코 두 남매는 전쟁으로 인해 실향하여 원래 행복했던 삶에서 조금씩 전멸을 향해 나아간다.<br><br>영화 속의 일부 단면에서 볼 수 있듯이, 세이타와 세츠코의 집안 형편은 집안 형편이 틀림없이 부유하다.예를 들어,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그들의 어머니의 기모노 한 벌은 쌀 한 말과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고위 장교였다. 그의 아버지의 사회 지위로 그 가족은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작가가 이런 장면을 묘사한 이유가 세이타의 입장을 부각시키고 남자 주인공이 군국주의의 수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br><br>세이타의 게으름, 아주머니와 따로 밥을 먹고 나서도 설거지를 하지 않는 것, 여동생과 먹고 살 수 없을 때 취직도 안 하고 심지어 음식을 훔치는 것 등이 나를 분개하게 하는 점이었다.그러나 나는 세이타가 노동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금의 곤경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모든 고난은 아버지의 귀환과 함께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타는 종종 군사 잡지를 보는데, 여기서도 세이타의 우익 입장을 암시하고 있다.<br><br>그래서 나는 세이타의 마지막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세이타와 마찬가지로 기차역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군국주의 서포터들을 풍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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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2 15:28: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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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7110309 반딧불이의 묘 </title>
         <author>songkim158a</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1245306</link>
         <description><![CDATA[<div><br>어릴 적에 반딧이불의 묘를 본 적이 있다. 오래전에 일이라, 형과 함께 가끔씩 반딧불이의 묘에 대해서 얘기하곤 한다. 워낙 어릴 때라 그런지 그저 슬펐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수업을 통해 반딧불이의 묘를 다시금 보고 나니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 본 것이기 때문에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br>반딧불이의 묘는 오빠인 세이타와 어린 여동생인 세츠코 남매를 작중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남매는 유복한 집에서 자랐지만,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행방은 모르게 된다. 이후 그들은 외숙모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작중 후반부에는 세이타가 세츠코를 데리고 외숙모네 집을 나와서 궁핍한 삶을 살다 남매는 세상을 뜨고 만다.&nbsp;<br>어릴 적에는 남매가 궁핍한 삶을 살고 불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슬프기만 했던 영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세이타는 외숙모네집에서 지내면서 다른 형, 누나들과 달리 일은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 노래나 부르고, 밖에 나가서 놀다가 밥 먹는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무리 세이타가 유복한 집에서 컷다지만 자신의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있으면 어느정도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나중에 세츠코를 데리도 나와서 할 줄 아는 것 없이 그저 아버지가 돌아오면 무사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둘 다 죽게 된다. 이 부분을 보면서 전쟁이라는 참혹함이 무섭고, 힘들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여전히 세이타가 숙모의 집에서 잔소리가 듣기 싫고 일을 하는 것도 싫은데 어떻게 그 어린 세츠코를 데리고 나갈 생각을 했는지 답답해하다가도 아직은 세이타 역시&nbsp; 14살밖에 되지 않았을뿐더러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이 든다. 결국 전쟁이라는 참혹함 앞에 어떠한 변명조차 의미가 없어지고 그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집과 마을, 그리고 사람들 그 자체가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nbsp;<br>마지막으로 서양에서 (반딧불이의 묘)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한 이유 또한 일본이 피해자라는 의식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느 여전히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츠코까지는 이해하지만, 세이타의 경우에서 순전히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적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때문에 그렇게 슬프지만  않았던 것 같다. 보는 내내 답답함을 가지면서 감상하게 되었다. 비록 내가 전쟁으로 겪지 못해서 말로만 할 수 있지만, 만약에 세츠코랑 세이타가 나의 동생이었다면 나는 세이타에게 한소리를 했을 듯 하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며, 아겨내야 하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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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2 17:55:11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1245306</guid>
      </item>
      <item>
         <title>&lt;반딧불이의 묘&gt; 감상평 2018113415 주찬</title>
         <author>iltyc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1805230</link>
         <description><![CDATA[<div>어릴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과 다카하타 이사오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반딧불이의 묘는 나도 전에 본 적이 있다. 수업 시간에 이 작품을 본 순간 나는 또 봤을 때의 슬픔과 어쩔 수 없는 심정을 떠올렸다. 마침 이번 기회에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소감을 이야기하고 싶다.<br>&nbsp; &nbsp;우선 이 작품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힘겹게 살다가 결국 죽음의 결말을 피할 수 없는 남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작품을 통해 전쟁이 일반인들에게 가져온 큰 상처를 충분히 보여줬다.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예를 들어 남매를 받아들인 친척들이 결국 이들을 쫓아낸 것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친척들이 그들을 쫓아낸다고 해서 반드시 100%의 악행인가? 겉으로 보면 분명 엄중한 악행이지만 전쟁이라는 큰 배경과 연결돼 보면 식량과 자원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문제로 친척들이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도 가족이 있는 경우 자신과 가족을 위해 먼저 다른 사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원래 전쟁으로 인한 이런 잔혹한 선택지가 바로 인간성의 악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보면 친척의 행동도 일방적으로 악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br>&nbsp; &nbsp;다시 한번 작품 제목에 담긴 반딧불이의 의미를 보면 작품에서 드러난 것처럼 반딧불이는 미약한 희망의 상징이지만 마지막 비극을 암시하기도 한다.&nbsp; 반딧불의 희미한 빛은 전 세계를 비추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 작품은 남매의 시각으로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현황을 보여주며 전쟁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과 반성도 볼 수 있다.<br>&nbsp; &nbsp;나는 여기에 다른 견해가 있다. 일본의 많은 작품들은 전쟁에 대한 반성이 자신의 피해에만 국한된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을 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일본 자체의 무한한 확장 욕심 때문이다. 일본은 피해자로서의 반성과 동시에 가해자의 시각에 서서 전쟁 문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실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전쟁의 개시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쟁의 심각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다각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사람들이 더 깊은 사고를 하게 될 수 있고,&nbsp; 평화의 어려움과 어떻게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지킬 것인지에 대한 인식도 더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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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3 02:43: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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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lt;영원의 제로&gt; 2020113218</title>
         <author>mika6565j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1865443</link>
         <description><![CDATA[<div>저는 먼저 세 영화의 소개를 간단하게 보고 어느 영화를 보는가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원해 전쟁주체의 영화에 약합니다. 죽음과 삶 에 대함 민감한 지금의 시대, 저는 죽음을 무섭고 누군가가 죽는 것도 보기 싫습니다. 항상 그 정서에서 길시간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 중에서 상대적으로 슬픈 지 않은 영화를 고르려고 했는데 결코 보면서 가슴이 찢으면서 울었습니다.&nbsp;</div><div><br></div><div>살기만 원했을 뿐 겁쟁이라고 폄훼를 받는 시대.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너무나 장렬한 시대라는 걸 느꼈습니다. 미야베 히사조는 강한 사람이고 , 사람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다 전쟁을 압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은 현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 시대의 생활,사고방식을 현대인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nbsp;</div><div>“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정의”</div><div>영화중, 다른 비행병 같이 미야베의 살고 싶다는 마음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족이 보고싶다 , 죽고싶지 않다고 하는 미야베는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미를 보여줬습니다.</div><div><br></div><div>지금, 살아 있는 것의 행복을 솔직하게 느껴 「정중하게 살자」라고 자계가 태어났습니다.이 영화를 보고 유일한 기뻤던 것은 순순히 살아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그래서 좀 더 정성스럽게 살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입니다. 단지 흘러가는 일상생활을 눈뜨지 않고, 행복을 누리는 일 없이 잡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자계했습니다. 전쟁 영화를 보면 대개 누군가의 희생 위에 우리는 살아 있다고 느끼고 삶을 소중히 여기자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더 강하게 그런 느낌을 줍니다.</div><div><br></div><div>전쟁영화의 매력 중 하나로 목청을 크게 내지는 못하지만 폭발이나 파괴의 영상적 박력이 작품에는 그것이 있었습니다.동료의 연료가 아슬아슬하게 없어져, 상어의 먹이가 되어 버리는 장면은 원작 쪽이 무심한 감이 있지만, 제대로 영상 작품으로 완성한 점은 좋습니다.작품으로서는 현대의 반전 가치관을 갖게 한 주인공이 떠 있지만, 알기 쉬운 것은 좋습니다.그것을 듣는 현대인을 준비하여 본보기를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친절 설계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연기도 전체적으로 과장된 기색으로 남매의 모범적인 연기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꾼 역할 어투, 그 인공적인 부분을 어디까지 받아 들일 수 있는지가 즐길 수 있는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라스트 표정은 진짜 마음에 듭니다! 모종의 미스터리적으로 생명을 고집한 남자가 왜 특공을 선택했는가, 라고 하는 부분은 꽤 당기는 부분이 있습니다.</div><div><br></div><div>마지막의 부문, 마츠노는 “누군가가 살려줬다, 그리고 나한테 生きろ！살아가! 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중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 그 사람이 바로 미야베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div><div><br>“영원의 0” 미야베는 죽지 않았습니다.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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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3 03:40: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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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77 반딧불이의 묘 감상문</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2096531</link>
         <description><![CDATA[<div>반딧불이의 묘 감상문</div><div>  반딧불이의 묘를 처음 감상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는데 너무 슬픈 나머지 엉엉 울면서 본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일본이 전범국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인물들이 처한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만 집중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볼 때는 중간중간 세이타가 해군인 아버지를 회상하는 모습,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 등 어렸을 적에는 그냥 넘어갔던 장면들도 눈에 들어왔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과연 일본 전체를 나쁘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지금껏 전범국으로서의 일본을 지극히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에서는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의 불행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폭격으로 인해 마을이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는 모습, 그로 인해 가족을 잃고 목놓아 우는 사람들의 모습 등 전쟁 국가의 국민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인지, 소수 지배층들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 역시 들었던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은 가해국과 피해국, 양쪽 모두에 고통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터에 보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등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영화를 감상하고 국가 간의 분쟁을 종식시킬수는 없겠지만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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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3 08:11: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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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3 엄희경</title>
         <author>cord20010306</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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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반딧불이의 묘'라는 작품은 어릴 때 한 번 본 이후, 근 10년만에 다시 보게 된 작품이다. 어릴 때 보고, 기억에 남았던 반딧불이의 묘는 전쟁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겪게 되는 남매의 이야기, 그 뿐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반딧불이의 묘를 보고나니, 어릴 적 접했던 반딧불이의 묘와 꽤나 다른 느낌을 받았다.<br><br>반딧불이의 묘는 대공습으로 인해 집과 어머니를 입고 친척 아주머니의 집으로 피신한 세이타와 세츠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nbsp; 친척 아주머니에게로 부터 천대당하던 세이타는 동굴에서 세츠코와 생활하게 되는데 폭격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른 집의 물건을 훔쳐 팔며 돈을 벌어 생활하게 된다. 그 후 세이타는 일본의 패전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고 세츠코는 영양실조로 죽게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다.<br><br><br>반딧불이의 묘는 전쟁 미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비난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필자는 반딧불이의 묘를 감상하며, 두 명의 개인, 세츠코와 세이타의 이야기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으며, 피해자 코스프레, 극우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딧불이의 묘는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배경이 되는 국가, 개인의 국적이 영화 전체의 배경이 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거나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반딧불이의 묘는 세이타가 어른의 보살핌에서 벗어나며 벌어지는 비극적인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nbsp;<br><br>그러나 작품을 감상하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세이타는 동정을 받아 마땅한 인물인가, 라는 것이다. 영화는 세이타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관객들은 세이타의 시선에서 모든 일들을 바라보며 감정을 세이타에게 이입하게 된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세이타의 행동을 판단했을 때, 세이타는 자신의 선택으로 세츠코와 자신을 궁핍과 어려움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에게 숙식을 제공받고 여러&nbsp; 호의를 받지만 세이타는 자신의 기모노 등을 암시장에 팔고 아주머니와 밥도 따로 먹으며 그녀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또한 남매를 학대하지도 않았으며, 세이타의 행동에 대한 충고를 한 것으로 세이타는 가출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보면 세이타가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세이타는 중학교 3학년으로, 현대의 관점에서는 어린 나이이지만 그 당시, 진학률도 저조하고 어린나이에 직업 전선으로 뛰어든 아이들도 많은 것을 고려한다면, 세이타가 생활을 이어나갈 방안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세이타는 어리석지만 동정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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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3 13:08: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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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3 정은채</title>
         <author>spring_c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2864405</link>
         <description><![CDATA[<div>&lt;일본 패망 하루 전&gt;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본의 내부 사정을 빠짐없이 알려준 영화이다.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전쟁을 계속 이어가야 할지 아니면 항복을 선택할지 정말 의견이 팽팽했고,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일본의 전쟁의 모든 결과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텐노는 굉장히 무기력하지만 굉장히 국민을 아끼는 군주로 나와서 놀랐다. 물론 영화이기 때문에 더 포장된 모습은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조금은 변화한 것 같다.&nbsp;<br><br></div><div>특히 전쟁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파괴를 잘 표현했다. 아들의 죽음과, 대공습으로 인해 집이 타오르는 모습, 그리고 일생에 한 번뿐일 결혼식을 공습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서 하는 모습이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일상적으로 누리던 삶을 앗아가고 사물은 가치가 없어지게 되어가고 물론 사람도 수단화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특히 소이탄이 도쿄에 떨어지면서 붉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가 생각났다. 화염방사기로 사람을 죽인다거나 미군에게 죽기 전에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등 본토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nbsp;<br><br></div><div>육군과 해군의 갈등하는 모습을 두 영화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 패망 하루 전에서는 항복하자는 육군과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자고 주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는 해군 장교 중 한 명은 "육지에서 온 것들은 대개 저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둘이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냈다. 전쟁에서 가장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끼리 마저 분열이 일어났다는 점은 이 전쟁의 끝은 어느 선택을 해도 최악의 결과만 남았을 것이라는 것이다.<br><br></div><div>전쟁의 결과로 평화 헌법을 제정하고 실질적 군주는 상징적으로만 남았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고 특히 부전조약을 시작해서 전쟁의 위법화와 평화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얻은 만큼 잊지 않고 가슴에 깊이 새겨두었으면 좋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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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3 18:54: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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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49 소유란 -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happycow2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3339329</link>
         <description><![CDATA[<div>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는 &lt;반딧불이의 묘&gt;를 보며, 지난 학기에 읽었던 하라 다미키(原民喜)의 '여름 꽃(夏の花)'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원자폭탄 투하 사건에 대해 기술한 '여름 꽃'은 원자폭탄이 야기한 '전쟁의 비극'을 일반인(작가 자신)의 입장에서 생생히 묘사한 작품이다.<br><br>당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많은 사상자를 배출했다. 피폭자와 사망자 수를 합치면 거의 60만 명에 육박했고, 이후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의 사상자까지 합치면 9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피해국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지만, 사실 개중에는 당시 강제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도 많았다. 여타 비판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마냥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이 한국의 입장에서 전쟁을 직접 겪은 자전적 소설을 보면 일본은 가해국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br><br>하지만 &lt;반딧불이의 묘&gt;가 단순히 '가해국과 피해국'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반딧불이는 밝게 빛을 내며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빛은 너무나 약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인 세이타는 이러한 반딧불이처럼 희망을 가지고 여동생과 함께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결국 그 빛은 아무도 모르게 꺼졌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반딧불이들이 있었을까. 꼭 2차 세계대전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을까. 그렇기에 나는 &lt;반딧불이의 묘&gt;를 감상하며 전쟁의 비참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비극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태 그래왔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것이고 달콤해 보이는 이기심에 눈이 멀 것이다. 반딧불이는 결국 비극 이전의 나약한 희망이자 금세 시들어버리는 가련한 평화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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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3: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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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패전과 개전 : 성단과 ? </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3598508</link>
         <description><![CDATA[<div>패전은 성단이라면, 개전은 무엇인가? &lt;일본의 가장 긴 하루&gt;(한국명 : 일본패망 하루전)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 있었던 과정과 쿠데타의 시도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히로히토는 파멸의 길로 흘러가는 전쟁을 막는, 일명 '성단'을 내린 인물로 묘사된다.&nbsp;<br><br>그는 스즈키 총리를 도와 교착 상태에 이른 참모회의를 항복으로 이끄는 한편, 아나미 육군대신의 결혼식 소식을 챙길 정도로 인간적이다. 이 과정에서 천황은 '성단'을 행한다. 이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재건하고, 문화의 파괴를 막아 인류의 불행을 초래하지 않기 위한 고심의 결과다. 영화 내내 히로히토는 긍정적인 일면만으로 묘사된다.<br><br>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패전은 이렇게 '성단'이었다. 그렇다면 개전은 무엇인가? 1945년의 패전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 순간 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히로히토는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다시 말하자면, 히로히토는 어느 정도로 결정과정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인가?&nbsp;<br><br>패전의 시기에 가면 '성단'을 내리는 히로히토가, 개전 시기에는 군부와 정부의 결정에 도장만 찍어 준 허수아비였던 것인가? 아니면 패전의 시기에 '성단'을 내릴 정도로 영향력이 존재했던 히로히토가 개전 시기에도 군부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인가?&nbsp;<br><br>히로히토가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lt;일본의 가장 긴 하루&gt;에서는 이 질문들에 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nbsp;<br><br>&lt;반딧불의 묘&gt;와 &lt;일본의 가장 긴 하루&gt;는 모두 비슷한 패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전쟁에 내몰린 소시민의 비극적 일상을 다룰 뿐이다. 그러나 후자는, 1937년과 1941년 도쿄에서 있었던 일들에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일면을 그리고 있지만, 묘사는 1945년의 비극적 상황에 머무른다. 전자보다 외려 후자에 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br><br>별개로 &lt;그때 그 사람들&gt;이 생각난다. 궁성사건과 패전의 과정은 차라리 하나의 블랙 코미디가 아니었을까.&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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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7:47: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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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143 김준형 『일본의 가장 긴 하루』</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166512</link>
         <description><![CDATA[<div>&nbsp; 『일본의 가장 긴 하루』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머리를 떠다녔다. 도대체 천황은 무엇인가? 현대 공화제 민주주의 외의 사회구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생경한 장면들이었고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당대의 광기가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 전반에 걸쳐 쇼와 천황의 대사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언제나 스즈키 총리, 아나미 대신과 같은 초점 인물의 시선에 비춰지는 모습으로 나올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물에게 있어, 모든 화소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천황 그 자체이다. 영화상의 묘사로 보면 당대 일본인에게 있어 천황이란 국가의 상징임과 동시에 국가와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군주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믿음(풍습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은 근현대의 정치 지도자에 대해 적용시키는 개인이 적지 않을뿐더러 전근대 시대에 매우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제국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긴 했으나 사회, 제도 및 인식적 측면에서 전근대적 요소를 많이 유지한 채 성립되었기에 이러한 믿음이 팽배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이 불분명한 시기가 되면 이 믿음은 깨지기 마련이다. 군주가 곧바로 축출되는 경우도 있으며 적어도 산발적이고 제법 성공적인 쿠데타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패전을 앞두고 국가의 존망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쇼와 천황에 대한 이 믿음이 깨지지 않고 오히려 이 믿음에 대한 보위성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일본의 특이한 일면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br><br>&nbsp; 궁성 사건은 당대에 팽배한 광기를 잘 보여준다. 옥음 방송만 막는다면 항복도 막을 수 있다는 믿음, 본토항전을 한다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거짓 명령서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는 인물들 등에서 명백히 잘못되었고 어리석은 생각의 만연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일본인들이 다른 시대의 인물들보다 특별히 악하거나 특별히 어리석을 리는 없을 터이다. 모든 사람은 시대에 박혀있는 존재이다. 그 어떠한 특출난 작가, 예술가, 정치인, 사상가, 기술가도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곧 당대가 당대인을 만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제국 말엽이라는 시대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도조 히데키와 같은 ‘악마’들이었을까? 그렇다면 ‘악마’들은 정말로 시대와 무관하게 특별히 악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을까? 적어도 일본제국 말엽은 당대인들에게 옥음방송 스크립트에 쓰인 것처럼 ‘시운이 흘러가는 바’였으며, 또 작중 아나미 대신의 대사대로 ‘세계 제일의 貧乏くじ’였을 터이다.<br><br>&nbsp; 얼마 전 우연히 상황 아키히토와 상황후 미치코가 도쿄 역사를 이용하는 영상을 보았다. 옆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인이 잔뜩 붙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노부부로 보였다. 역 내를 나가며 상황 부부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군중은 말없이 사진을 찍거나 자그마히 안부의 말을 건넸다. 영상 말미에 군중 속 어떤 남성이 「天皇陛下、万歳」라 크게 연호했다. 상황 부부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div>]]></description>
         <enclosure url="https://www.youtube.com/shorts/01bxRYb8x5g" />
         <pubDate>2022-04-14 17:33: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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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5 이세영 &#39;반딧불이의 묘&#39; 감상문</title>
         <author>jennyda10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721227</link>
         <description><![CDATA[<div>이 작품의 감상을 단순히 ‘전쟁에 의한 두 등장인물의 가여운 처지’에만 치중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부가 요소들이 존재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인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주인공인 세이타의 행동과 판단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통에 해군인 부친이 산 채로 이겨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 모습이 어리고도 어리석어 보였다. 신세를 지고 있는 친척 아주머니께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말을 꺼내자 세이타는 세츠코를 데리고 집을 나와버린다. 필히 그곳이 더 안전하고, 위생적일 텐데 말이다. 마을 아저씨가 현재 상황에는 집단에 소속되어야 보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며 다시 친척 집으로 돌아가라 충고하지만 세이타는 듣지 않았다. 세이타의 이런 고집은 과거 유복했던 시절에 대한 안주에 따른 현실 직시의 불능에서 비롯되었다.<br><br></div><div>‘반딧불이의 묘’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이타-세츠코 남매이고, 세츠코는 나이가 어린 동생으로 세이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다. 세이타가 친척 집을 떠나면 마찬가지로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즉, 세이타의 결정에 따르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둘의 입장과 관계를 세이타는 일본 정부, 세츠코는 일본 국민으로 비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일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 정부’, ‘국민’으로 범위를 확장해도 된다). 전쟁의 본질적인 주체는 나라의 국정을 살피는 정부, 즉 고위 관직자들이다. 그들의 결정으로 전쟁은 발발했고 일반 민중들은 목숨 및 저마다의 터전과 가족 구성원을 잃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작중 세이타 또한 그들 중 한 명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나 세이타와 세츠코 둘만을 놓고 따져본다면 세이타의 고집이 깃든 판단의 결과는 세츠코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킨 일본 제국의 무모한 욕심과 고집은 일본 국민들의 희생을 낳았다. 앞선 비유와 맞아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한다.<br><br></div><div>‘반딧불이의 묘’는 개봉 당시 전범국의 피해자 코스프레라며 한국에서 숱한 비판과 저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보다는 전쟁의 참극, 전범을 일삼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막연히 전쟁을 일으킨 가해국 주제에 전쟁의 피해를 받는 영화를 만드냐고 득달 같이 물어뜯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일제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입장에서는 1차적으로 불쾌함이 드는 건 당연하다. 위에 언급한 나의 감상 주제에서 더 나아간 +@가 있었더라면 손에 꼽는 명작이라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철저히 자국의 피해만을 담았으니 말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전쟁의 참극을 알리고 싶었다면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났었던 역사의 사건인 만큼, 그리고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국민인 만큼 ‘반딧불이의 묘’를 감상하는 데 있어 날이 세워지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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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6:55: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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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영원의 제로&gt; 황목자 2020113205</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727777</link>
         <description><![CDATA[<div>&nbsp;이번이 내가 일본의 시각에서 2차대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처음이다. 전쟁은 참혹했고, 2차대전은 세계인민의 아픈 추억이었다. 영원의 제로는 주인공이 외할아버지의 전우를 찾아 결국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차근차근 탐구하는 내용이 있다. 영화 전체가 '살아남'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영화에서 미야베는 자신의 아내 딸을 사랑하고,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부대 내에서 해군 제일의겁부이란 소리를 듣는다. 미야베는 출전 때마다 부상 없이 기지로 돌아온다.그의 목적은 단지 살기 위한 것이다. 전쟁 후기가 되다. 에이스 파일럿인 그는 자신의 학생들이 가미카제 특공대에 참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미야베의 마음도 달라졌다. 그는 살아갈 기회를 후배에게 물려주었다.스스로 죽음을 결행하다. 미야베는 개인적인 의지로 저항하려 했지만 그런 광란의 시대에는 약해 보였다.<br>&nbsp; &nbsp; &nbsp; &nbsp;이 영화는 반전영화가 아니라 반전패영화라는 생각한다. 영화에서 미야베의 손자는 동료에게 "특공은 공포분자가 아니라 항모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리친다. 영화 말미에 미야베의 손자는 도시 거리에서 외할아버지가 비행기를 몰고 돌아오며 미군 항모를 들이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전쟁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이는 완전히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영화는 이런 줄거리로 군국주의를 미화한다. 나는 일본에게 나라를 침략당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다른 나라에 입힌 고통은 그가 입은 상처보다 훨씬 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는 결코 상대방의 시각에서 전쟁을 보여준 적이 없다. 미야베가 진주만에서 죽은 조종사에 대해 탄식하고 있을 때. 하지만 미국 애리조나호에서도 수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br>&nbsp; &nbsp; &nbsp; &nbsp;전쟁은 참혹하다. 전쟁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악몽이다.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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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7:09: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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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30009 우스키 스미레  &lt;영원의 제로&gt;</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762101</link>
         <description><![CDATA[<div>영화 &lt;영원의 제로&gt;는 태평양 전쟁 말기 자폭 특공대 ‘神風（가미카제）’ 를 타게 된 조종사, 미야베 큐조의 신념과 갈등, 또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그린 영화이다. “살고 싶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 아내와 딸을 위하여 끊임없이 특공대 참여를 거부한 미야베의 내면성, 인간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며 일본에서 흥행수입 87억엔을 기록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div><div>그러나 이 영화의 평가에 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다. 전쟁 및 특공대 미화라고 보는 의견이나 ‘우익 영화’, ‘군국주의 긍정화’라는 비판도 많은 반면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보는 사람이나 ‘특공대’ 및 ‘죽음’을 거부하는 캐릭터, 미야배 규조를 설정함으로써 일본군의 군사주의, 특공대 강요를 반대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어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nbsp;</div><div>사람마다 반응, 찬반이 상당히 엇갈리고 있으며 쉽게 언급하기가 어려운 작품이지만 내가 유일하게 이 작품에 관하여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강요하는 풍조는 그른 것이며 절대 있으면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div><div>&nbsp;</div><div>&lt;영원의 제로&gt;에 등장하는 ‘특공대’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시도한 비행기 자폭 테러 전술과 이를 위한 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nbsp; 1944년 10월, 일본해군이 편제한 ‘가미카제 특공대’가 필리핀 인근 바다에서 미군 함선에 돌입한 것을 계기로 그 이후 ‘오키나와 전’을 비롯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폭탄을 실은 1인용 어뢰로 적 함선에 충돌하는 작전도 동시기에 감행되었다. 特攻隊戦没者慰霊顕彰会에 따르면 특공에 의한 사망자는 6418명에 이른다고 한다. 영화 안에서는 특공대 참여를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나 출격 직전에 조종사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시고 적지를 향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그 당시 특공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nbsp;</div><div>&nbsp;</div><div>&nbsp;이러한 “집단 자결=미”라고 여기는 풍조,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풍조는 남자군인 뿐만 아니라 여자학생들에게도 강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ひめゆり 学徒隊（히메유리 학도대）’이다.</div><div>‘히메유리 학도대’는 ‘오키나와 전’에서 종군간호 역할을 맡은 일본 육군 소속 여학생 학도대이다. 육군은 "1주일만 복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복무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징집했으나 실제로는 90여 일 동안 고통을 당했고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특히 그 중 10명은 「日本の女性として恥ずかしくない死を」라고 집단 자결을 명 받아 수류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nbsp;</div><div>&nbsp;</div><div>&nbsp;이처럼 전쟁 때는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지원한 젊은 군인들의 심정, 수류단을 손에 든 소녀들의 심정을 상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은 찬반양론이 있지만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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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8:14: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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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6 고가연 &lt;반딧불이의 묘&gt; 코멘트</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803534</link>
         <description><![CDATA[<div>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영화, 반딧불이의 묘다.</div><div>이 영화를 만든 타카히카 이사오 감독 또한 일본의 한 잡지사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div><div> “지금의 일본인들은 남매에 공감하고 숙모에게 반대한다. 이런 양상이 지속되길 바란다. 나중에 가서는 반대가 될까 두렵다.”</div><div>실제로 현재 일본인들이 매스미디어에 올린 반딧불이의 묘 리뷰를 보면 숙모가 옳았고, 남매가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의견이 다수라고 한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가진 그들이 간접적으로 전쟁에 동조를 한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div><div>&nbsp; &nbsp;</div><div> 왜냐하면 이 영화는 ‘불완전한 반전주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앞서 양날의 검이라고 표현한 것 또한 결을 같이 한다. 숙모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등과 같이 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을 패망으로 몰아넣은 당시의 일본 집권층을 비유한다. 그리고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는 이러한 집권층에게 반대한 당시 몇 없던 일본 소수의 국민을 비유한다고 생각한다. 세이타의 판단으로 인해 차별 받던 숙모의 집에서 나온 것이 남매의 죽음의 원인이므로 이를 어리석은 개인 자존심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감독이 당시 집권층의 사상에 반대한, 즉 제국 및 군국주의에 따르지 않았던 국민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일본의 어두운 현실을 꼬집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숙모는 세이타가 자립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지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그들이 독립을 하려 하는 이유 등 직접적인 제지를 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집권층이 보였던 이기적인 정치 행태와 자국민에겐 무심했던 모습을 그려낸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세이타와 세츠코에게 숙모의 집으로 돌아가라며 권하던 주위 등장 인물들은 제국주의 사상에 동조했던 국민들을 뜻하며, 이러한 일본의 사회적 현상과 사상을 따랐던 인물들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과거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이자 설정이라고 생각한다.&nbsp;</div><div><br></div><div> 그렇다면 왜 불완전한 반전주의 영화일까.</div><div>감독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nbsp;</div><div> “일본이 저지른 전쟁이 타국민에게 안겨줬던 참상을 전달하고 그것을 일깨울 수 있어야 진정한 반전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이를 영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능에 가깝다.”</div><div>이와 같은 발언과 해당 영화는 반전 영화가 아니라는 감독의 말처럼 ‘전쟁 미화’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은 반박할 수 없다. 관객들로 하여금 남매의 죽음에 동정하게 만들고, 전쟁으로 인해 타국민 뿐만 아니라 자국민이 받았던 고통 또한 상당했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했고, 앞 문단에서 언급하였던 것과 같이 남매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세이타의 얄량한 자존심으로 포장해 그 원인의 내막과 내면, 더 멀리 내다 봐야할 시각을 차단했다는 점도 분명 존재한다.</div><div>&nbsp; &nbsp;</div><div> 어떤 시각에서 그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느냐가 해당 영화의 주 요지이자 감독이 진정 내세우고자 했던 주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반딧불이의 묘는 토토로와 같은 시기에 개봉해 큰 흥행을 이끌지 못했으며, 토토로를 먼저 보고 반딧불이의 묘를 본 관객들은 중도에 퇴장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분명 일본 국민들 또한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나처럼 전쟁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점이 80년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본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여타 국가의 국민들과는 다른 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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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9:50: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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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7 두다혜 &lt;반딧불이의 묘&gt;</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831147</link>
         <description><![CDATA[<div>반딧불이의 묘를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주장하는 해석이 있다는 것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은연중에 적어도 그런 해석이 나올 만한 의도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게 왜 피해자 코스프레지?’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단적인 사실만 살펴보면 일본인인 주인공 남매가 전쟁으로 인해 죽게 되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피해자인 척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주인공들의 설정이나 행동 등, 간과한 부분이 너무 많다. 우선 주인공들을 일본의 일반적인 국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인공 남매의 집안은 일반 시민들이 구경하기도 힘든 음식을 단지 먹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버릴 수 있고, 전쟁 중 물가가 폭등한 상황에서 몇 번에 걸쳐 빼 쓸 만큼의 돈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게다가 남매 아버지의 직업은 해군 대위였다. 만약 이 영화를 통해 일본 국민 역시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영화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주인공들의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가 매우 궁금해진다. 전쟁을 시작한 것이 일본 자국인 이상, 시민을 대표하는 극히 평범한 집안의 자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모든 책임을 아예 ‘당시의’ 정부로 몰아가는 것이 피해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더욱 쉬웠을 텐데 말이다. 이 의문은 주인공들, 특히 오빠 세이타의 행동에서도 느낄 수 있다. 피해자는 말 그대로 자신 이외의 것으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이미 입은 자를 가리키기에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얼마든지 보는 사람의 의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살해당한 피해자가 과거에 가해자를 괴롭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정도에 따라 극단적으로는 죽어도 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대로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이거나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처음 피해 사실만 들었을 때보다 몇 배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특히나 영상 매체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장치나 설정, 연출을 이용하여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오히려 로봇이 만든 영화가 아닌 이상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러한 의도는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기 마련이다. 반딧불이의 묘 역시 마찬가지다. 남매에게 눈치를 주어 집에서 나가게 만드는 친척 아주머니는 과연 정말 명백한 가해자일까. 물론 남매가 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집중한 부분은 그녀를 악역으로 전하는 것이 작품 자체의 의도였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척 아주머니는 남매 어머니의 옷을 팔아 쌀로 바꾼다. 하지만 남매를 괴롭히려는 의도였다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본인의 옷도 많이 팔았다고 했으며, 판 것이 이미 죽은 남매 어머니의 옷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유품을 빼앗은 나쁜 사람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실질적으로 부모가 없는 것과 같은 남매에게 노동을 요구하지도, 집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바꿔 온 쌀 역시 나눠주었다. 남매는 그것이 원래 모두 자신들의 것이었다고 불평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자신들이 발붙이고 있는 그 공간 역시 온전히 아주머니의 것이다. 먹고 마시고, 게다가 목욕탕 역시 아주머니가 주인에게 부탁하여 마련해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아주머니는 남매에게 가진 돈에 대해서는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남매에게 죽을 줄 때는 ‘집에만 있는’ 자신 역시 죽을 먹었다. 남매가 풍금을 가지고 놀 때도 단지 듣기 싫었다기보다 전쟁이라는 상황과 주변의 눈치를 살핀 것에 가깝고 그냥 던져놓은 설거지까지 해준다. 만약 피해자로서의 남매를 부각하려는 의도였다면 그녀는 압도적이고 선천적인 악인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 이런 연출은 오히려 그녀가 다정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인공도 아닌 친척 아주머니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세밀한 디테일을 넣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공들인’ 아주머니의 존재가 세이타라는 인물을 더욱 잘 보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세이타는 해군 장교의 아들로 매우 부유한 계층이었으며 나이도 당시로 치면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가 시켜서 아주머니를 찾아간 것 말고는 제대로 생각하고 해내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일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공부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아주머니에게 빌붙으면서도 그녀가 눈치 주는 것에 화가 나 집을 나간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듯 이것이 최초이자 최악의 선택이 된다. 나는 남매가 국가적 상황으로 봤을 때는 피해자이더라도 목숨을 잃는다는 극단적 피해를 입은 것은 결코 그 누구의 강요도 없었으며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친척 아주머니의 행동에서 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또한 당시 지도층에 속했던 해군 대위의 아들인 세이타가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며 잘못된 선택을 하는 모습이 당시 일본 정부 및 부유층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아무런 분별력 없이 맹신했던 시민 자체의 모습과 겹쳐보인다는 생각 역시 어느 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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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11:05: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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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4969232</link>
         <description><![CDATA[<div>감상할 영화를 고르기 위해 세 가지의 영화에 대해 검색해봤다. 세 영화 모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본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서 평에는 '피해자 코스프레' 란 단어가 많이 보였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색안경을 끼고 작품을 감상할 것 같았지만 반딧불이의 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 많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라서 그나마 감상이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감상을 마친 후 최종적으로 든 생각은 피해자 인척 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br><br>&nbsp; 반딧불이의 묘는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시민 중에서도 가장 약한 아이들이다. 앞서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배경이고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를 겪기 까지 했으니 무조건 부정적으로 작품을 보게 되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시각, 입장,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영화와 같은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역할을 잘 해준 것 같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여도 일반 시민들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다른 나라의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받았고 이런 점을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더 극대화해서 전달했다.<br>&nbsp;<br>&nbsp; 세이타와 세츠코 두 아이들을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세츠코는 정말 아무 잘못 없는 아이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인물로 느껴진다. 그러나 세이타라는 인물을 볼 때는 마냥 이런 안타까운 마음만 든 것은 아니었다. 세이타도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동생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을 감추고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숙모네 집에서 살 때는 구박까지 받았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숙모가 아이들을 품어주지 않는 이기적인 어른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다 같이 전쟁을 겪는 상황에 숙모가 아이들을 품을 마음과 여유가 되지 않았을 수 있고 정말 집에만 있는 세이타가 불만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타가 숙모 집에 있을 때 자신들에게 잘 곳을 마련해주고 밥을 준 숙모에게 도움이 되도록 능동적으로 행동했으면 숙모의 태도가 좀 다르고 어쩌면 둘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세이타가 해군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일본제국이 졌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이 대사를 들을 때 살짝 흠칫 했었지만 세이타는 일본의 국민이고 아직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할 수 있고 그저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후에 이 부분을 나름 이해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여러 말들을 불러올 수 있는 장면이라고 인지했다.<br><br>&nbsp; 반딧불이의 묘에서는 전반적으로 계속 마을이 폭격 당하고 시민들은 매번 도망치던 모습과 함께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봤을 때,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 조차 일반 시민들은 고통 받으니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메세지가 가장 강하게 전달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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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15:06: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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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084699</link>
         <description><![CDATA[<div>&nbsp;[반딧불이의 묘] 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남매의 피난생활과 겪게 되는 여러가지 고난을 그려낸 애니메이션이다. 대체적으로 일본 내의 평가 뿐 아니라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 필자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본작이 개봉된 당시 국내에는 전쟁 옹호 영화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는 뉴스 기사도 본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br>&nbsp;우선 본 영화의 배경이 되는 태평양 전쟁을 짚어보고 이야기를 구체화해보려고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특히 태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일본 제국과 미국이 격돌한 전쟁으로,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이 전쟁이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을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본 작에서는 전쟁이라는 급격한 사회의 혼란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br>&nbsp;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한 후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 영화가 반전 영화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해이지만, 이번엔 등장인물들의 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먼저 언급해보고자 한다. 결국 [반딧불이의 묘]는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영화이고, 그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를 주는 영화이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등장하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주인공인 세이타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다. 친척집으로 돌아간다는 해결방안을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고 결국 본인과 동생 세츠코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결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본인은 전혀 바뀌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주인공의 이야기. 이를 통해 과연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반전의 메시지를 가진 영화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br>&nbsp;이 영화는 전쟁을 반대한다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주는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시 상황에서 아이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반전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세이타와 세츠코의 죽음이 원론적으로는 세이타의 미숙한 판단 때문이었을지라도, 이들은 결국 성인이 아닌 어린이이며 이런 비극적인 결말과 고집스러운 판단마저도 '실제로 있었을 법 한' , 전쟁 속 고아들이 실제로 이렇게 죽어갔을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서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어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아둔한 판단을 한 것은 당시 일본 국민들에 대응된다.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한 지배층에 크게 반대하지 못하고 흐름에 빨려들어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결말이 본 작품 속 등장인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br> [반딧불이의 묘]는 이렇듯 다양한 측면에서 세밀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면서, 그 다양한 해석들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메시지들이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지브리의 명작이자 애니메이션계의 수작이라고 평가 받는 영화이니만큼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이지 않았나 생각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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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18:00: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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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일본의 가장 긴 날&gt;에서 보이는 집단 광기를 정당화를 통해서 해소하는 과정과 그에 관한 생각</title>
         <author>tinytedkim</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149835</link>
         <description><![CDATA[<div><em><sup>2016110279 김하선<br></sup></em><br>&nbsp;&lt;일본의 가장 긴 날&gt;을 보았다. 할 말이 정말 많지만 먼저 무엇을 중점적으로 다룰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적 광기와 이성의 마비에 대한 것이다. 도대체가 왜 이 영화의 군 상부는 거의 다 평화주의자인가? 이렇게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수뇌부들이 애초에 전쟁을 왜 일으켰는가? 일본인은 왜 천황 히로히토를 잔인하게 만들 수 없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div><div>&nbsp; &nbsp;</div><div>&nbsp;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시작해보려고 한다. 영화 이야기는 뒤로 밀리겠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어릴 적 일본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도 일본에서 졸업했고 한글보다도 일본어를 먼저 배웠다. 나에게 있어서 일본은 외국이 아닌 고향이다. 가끔 향수를 느낄 때면 항상 나는 도쿄 카츠시카의 소소한 아키치(빈터)와 공원, 한여름에 베란다에서 보던 하나비, 자전거 주차장에 꽉 찬 자전거, 어머니가 사주던 500엔짜리 타코야키를 떠올린다. 나는 여전히 일본을 사랑한다.</div><div><br>&nbsp;그러나 나에게도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의 교육이었다. 나는 학교 교육을 듣기 전에 어머니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는데, 내 어머니는 역사관이 아주 뚜렷했으며 어머니 세대에서 심지어 시골 출신의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어머니는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 우주’나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와 같은 서적을 즐겨 보았고 과학적 지식에도 해박했음은 물론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 사서삼경과 불교 경전까지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 거의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배웠다. 일본어를 빨리 익혀야 한다는 아버지에게 그러면 아이가 본래 모국어인 한국어를 못하게 된다며 어머니는 절대로 집안에서 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집 밖에선 일어를 사용하고 집 안에선 한국어를 사용하며 두 가지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br><br></div><div>&nbsp;어머니 자랑은 이쯤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나는 거의 모든 기초교육을 어머니한테 배웠는데, 어머니가 가르쳐주는 것 중에서 항상 괴로웠던 것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귀를 막곤 했다. 어릴 적부터 슬픈 영화 줄거리만 들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던 나에게 한국 근현대사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임진왜란부터 시작된 아픈 역사를 나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어린 내게 있어 일본이란 나라는 참 복잡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나의 선생님은 너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내 친구들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들이었다.<br><br></div><div>&nbsp;하지만 어느 날 역사 수업 때, 그날 우리가 배울 것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과연 어떻게 가르쳐줄까? 어머니가 이야기 해 준것과 얼마나 다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수업을 받아 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의 예상은 틀렸고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은 두껍디두꺼운 역사책에서 단 한 페이지였다. 내용이라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쳐들어갔다는 내용이 위주였고 그 어디에도 피해자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았다. 단지 오른쪽 구석에 조그마하게 이순신과 거북선을 3,4줄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수업 시간에 눈물을 흘렸다. 역사 선생님은 그런 나를 잘 이해해 주었고 나는 밖에서 울음을 그치고 다시 수업을 들었다.<br><br></div><div>&nbsp;그러나 내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나는 아침 조회마다 불렀던 키미가요는 정말 최선을 다해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미치광이 천황 숭배자라서 그랬던 것일까? 물론 몰랐다. 그저 아침 조회에 다 같이 열심히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물론 옆에서 다 같이 불렀던 내 친구들 또한 전쟁주의자는 아니다. 이들은 천황 숭배자일까? 그렇지 않다. 다들 너무 친절하고 선량한 내 소중한 친구들이었고 나와 내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군국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키미가요를 열심히 목청껏 불렀던 나는 무엇이었고 그들은 무엇이었을까?<br><br></div><div>&nbsp;“그냥 몰랐으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그보다 쉬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것이, 혹은 역사란 것이, 혹은 국민성이란 것이 그리 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몰라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에 알았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그들은 왜 반성하지 않았고 역사는 왜 곡해하며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였는지 그 무엇도 설명해 낼 수 없다. 나중에 성인이 된 나에게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고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나는 내 소중한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그저 무지한 바보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군국주의자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나도.</div><div><br>&nbsp;그렇다면 일본은 도대체 왜 그렇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천황과 때어놓을 수 없다. &lt;일본의 가장 긴 날&gt;에서도 천황 히로히토는 너무나도 선량하고 자국민을 우선시하는 반전주의자로 나온다.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먼저 선제공격하고 이런 사고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인과적으로 원인은 분명 나한테서 파생된 것이니 말이다. 내가 친구를 때리고 "나는 싸움을 싫어해"라고 하는 모양세다. 하지만 일본에서 '평화주의자 일본인' 이라는 사고방식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옛날이야기를 해보자. 1937년 헬렌 켈러가 일본을 방문했었다. 성인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 위인이 일본에 온다는 사실에 일본은 그를 대환영했다. 그러나 환영식 도중 누가 헬렌 켈러의 지갑을 훔쳐 간 것이다. 신문은 대서특필로 “‘성녀’의 현금을 훔친 도둑”과 같은 제목으로 신문이 찍혔고, 신문을 본 일본인들은 도둑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사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헬렌 켈러에게 “일본이 이런 나라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최소 10만명, 많게는 30만명을 넘게 죽인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다. 1923년에 관동 대학살을 자행한 일본인, 지갑 하나를 훔친 것에 너무나도 수치스러워하고 사죄하던 일본인, 그리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인. 이들은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br><br></div><div>&nbsp;그렇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광기 앞에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이성이 마비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역사에 기록되는 철학적 위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 중 하나인 독일은 세계 2차대전의 주인공이고, 여행 가면 너무 친절한 사람이 많다는 일본도 역시 2차대전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또한 베트남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사살했다.&nbsp;<br>&nbsp;<br>&nbsp;군대에 있었을 때를 떠올린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권위에 대항하는 아이콘이었다. 무조건 적으로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궁굼한 것은 모든지 물어봤고, 내 이성적인 판단 후 아닌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 덤벼들었다. 친구들은 항상 나를 용감한 인간으로 평가해 주었고 나 또한 항상 자신 있게 내 의견을 피력하고 후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에 있을 때 나는 그저 복종하는 노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임들은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부조리로 후임들을 괴롭혔고 정체가 보이지 않는 음습한 괴롭힘에 나는 너무 힘들었고, 상관들의 이해되지 않는 무의미한 명령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할 말을 다 해도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사회와 한 마디 잘하지 못하면 내 군 생활이 통째로 곤란해지고 다툰 상대와 옆자리에서 잠들어야 하는 군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를 이성적 인간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지만 다수와 강력한 권위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이성적이며 용감한 나와 권위에 복종하고 비굴한 나는 같은 사람인가? 그렇다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양면적 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며 정당화했다. 이건 내가 미치광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러한 것이다.<br><br></div><div>&nbsp;하지만 나약한 나도 여전히 나이지 않은가. 일본도 그렇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지금은 전쟁이고 자시고 애초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애초에 한국에선 일본이 어떤 논리로 전쟁을 일으켰는지도 모르는 사람 투성이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이 서구열강 때문에 힘겨운 삶을 보내는 아시아를 본인들의 힘으로 구해내기 위한 히어로였다는 말을 한다. 이게 진실이란 말도 아니고, 일본은 그럼 순수한 선의만 가지고 있었으며 군국주의와 야욕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정말 이렇게 생각했었고,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한 정의로운 군인과 아무런 죄 없는 인간의 목을 참수한 잔인한 군인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어도 살아가야만 한다. 만약 내 주변이 다 광기로 가득 찼다면 나는 막을 수 있을까. 주변에 내 소중한 친구, 동료가 전부 누군가를 처참히 짓밟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군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산부인과와 아이들이 가득한 건물에 폭격을 날렸을까. 분명한 것은 그런 지옥도에서도 스스로 이성적 능력을 사용해서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능동적으로 움직인 러시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안 그런 러시아 군인들도 있다. 나는 최근까지도 우크라이나 전시 상황을 자주 찾아보는데 이제는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강간하는 러시아군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랬을까? 그저 주변에 친절한 이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나는 이들을 전쟁이란 비극에 어쩔 수 없이 미친 사람으로 면죄부를 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애초에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집단적 광기란 인간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기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것이다.<br><br></div><div>&nbsp;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일반적인 일본인. 즉, 민간인은 선량하고 문제는 일본 수뇌부와 전범들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당시 일본은 거의 다 미쳐있었다. 선량한 일본인과 광기에 찬 일본인은 동일 인물이다. 일본이 기존의 전쟁 미화 영화와 마찬가지로 &lt;일본의 가장 긴 날&gt;에서 수뇌부를 아름답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로 그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본에는 선량한 자들에 의한 좋은 의도만이 존재할 뿐 악의 같은 것은 의도적으로 버렸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의 수뇌부들은 현재 일본인들의 거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디겠는가? 당신이라면 상냥했던 당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모가 미치광이에 살인마고 당신은 그 후손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결국 일본은 자신들의 손으로 전범을 재판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범이고 자시고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인이 전범 수감자들을 즉시 석방하길 바랐다. 전후 당시 전범 석방을 원하던 일본인이 4천만명이 넘는다. 당시 일본 인구가 9천만 정도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노인과 청소년을 뺀 거의 모든 성인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과 전범 사이에 크나큰 벽 같은 것은 없다.<br><br></div><div>&nbsp;작중의 등장인물들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다. “鈴木は軍人が政治には関わるなと、明治天皇に教わられそれをモットーとして生きてきました。”, “自分は如何になろうとも万民の命を救いたい。” 대사에 온통 평화에 대한 사랑이 묻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판단보다 항상 천황의 판단을 우선시한다. 천황이 전쟁을 그만두느냐 아니냐가 이들에겐 엄청나게 중요하다. 개인의 신념보다 복종이 우선시 되어 있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천황, 천황은 그들에게 신이자 인간이다. 살아있는 신인인 천황에게 그들은 충성을 바치는 것에 그리 큰 고민을 요구하지 않았으리라.</div><div>&nbsp; &nbsp;</div><blockquote><strong>海行かば</strong><br>海行かば水漬く屍<br>山行かば草生む屍<br>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br>かへりみはせじ<br>&nbsp; &nbsp;<br><strong>바다에 가면</strong><br>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br>산에 가면 풀이 자라는 송장<br>오오키미(천황)의<br>곁에서 죽으리라<br>뒤돌아보지 않으리라<br>&nbsp; &nbsp;</blockquote><div>&nbsp; &nbsp;</div><div>&nbsp;'바다에 가면'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키미가요와 함께 많은 일본군들의 눈시울을 붉힌 곡이다. 이는 만엽집에서 따온 곡인데 만엽집이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집이다. 즉, '바다에 가면'은 전통성과 대중성을 둘 다 가춘 훌륭한 곡이였다는 소리다. 만엽집의 의의란 엄청난 수의 시가들을 누구나 즐겼다는 서민문학의 산 증인, 일본의 국가적 자랑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당시 귀족들이나 즐기던 시가 형식을 서민들이 완벽하게 지키고 있으며 한문과 같은 고급 언어도 자연스럽게 시가에 사용되는 점에서 이와 같은 만엽집이 백성들이 즐기는 문화적 유산이었는가는 의심스럽다. 즉, 만엽집의 가치는 근대 일본이 채굴해 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일본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키미가요와 바다에 가면을 부르면서 일본의 전통적 신념과 천황을, 그리고 일본 자체를 지키리라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은 누구인가.<br><br></div><div>&nbsp;인간의 선량함과 광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광기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가?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인터넷을 켜보자. 댓글 창을 열면 많은 글이 보인다. 착짱죽짱, 일베충, 꼴페미, 씹덕, 개슬람, 씹선비, 맘충, PC충, 한남충, 똥꼬충…… 이런 말을 놀이처럼 사용하는 작금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기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타자에 대한 악의가 커다란 폭력으로 발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다 미치광이일까? 내가 평소에 가는 편의점에 친절한 알바의 모습이라면? 내게 인사하는 옆집 아이라면? 혹은 이게 나라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nbsp;<br><br>&nbsp;광기는 가까이 있다. 스스로에 대한 과오를 뉘우치지 않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볼 힘이 없다면 언제나 내 스스로가 광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과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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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20:08: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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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딧불이의 묘, 영원의 제로] 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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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이번 과제 기간은 지난 과제들보다 조금 길었기에, 두 작품을 감상할 여유가 생겨서 두 개 다 보게 되었다. 두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전쟁, 일본인들의 전쟁책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일본은 전쟁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감상했다. 그리고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생각해보고, 거기서 일본인들의 전쟁에 대한 시선을 생각해보았다.<br><br>&nbsp;지브리 영화를 좋아하지만 몇 개 안 본 작품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반딧불이의 묘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바람이 분다'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는데, 바람이 분다와 반딧불이의 묘는 전쟁에 대해서 만든 작품이니 작품의 퀄리티나 말하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이든 일단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그렇게 일본이 전쟁을 미화하고 왜곡되게 기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와 국가간의 다른 역사의식때문에 마찰이 생길 수 있지만, 영화를 몰입해서 보면서 주인공남매의 일생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전쟁에 대한 민간인들의 보편적인 아픔이었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떼어놓고 봤을 때 한국전쟁에서도 주인공 남매같은 케이스가 정말 많았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기모노가 아닌 한복을 입고 주인공과 여동생이 게타가 아닌 고무신을 신는등 배경이 일본의 전쟁말기~패전이 아닌 한국전쟁이었어도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한국전쟁 이후 어린 나이의 피해자들, 남북으로 나뉘어져 고아가 되거나, 폭격과 사살로 고아가 된 아이들도 다 이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br><br>&nbsp;일본 속에서 미군의 포격으로 고아가 된 남매의 이야기지만, 일본의 식민지배로 수탈당한 조선인들 속에서도 저런 처지가 된 아이들이 있었을테고, 한국전쟁으로 저런 처지가 된 아이들도 있을테고, 남북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저런 처지가 된 아이들도 있을테고, 또한 한국군이 다른 나라에 가서 저지른 짓을 통해 힘든 처지가 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br><br>&nbsp;아이들이 어리광과 고집을 피우더라도 그것을 받아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올바른 사회이다. 아이들의 '와가마마' 를 바르게 잡아주지 않고 방관하는 사회 속에서 주인공 자매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 전쟁은 약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전쟁 속에서 민간인들의 피해를 '부수적 피해' 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처럼.&nbsp;<br><br>&nbsp;영원의 제로는 제로센을 미화했다는 주장도 무시할 순 없지만, 그저 살아가고 있던 서민들과 전쟁에 대해 생각이 없던 개개인들에게 이 영화는 공감이 되었을 것이다. 국가 대 국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보면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자신들의 악행을 미화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를 떠나서 개개인으로서의 시선으로 본다면 다르게 볼 수 있다.<br><br>&nbsp;영화 내에서 주인공이 키운 병사들이 다 특공으로 죽는 것에 대해 자책하고 정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바람의 분다' 의 호리코시 지로가 자신이 설계한 전투기가 결국 카미카제로 희생됨을 보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거나 자신의 꿈을 쫓아갔지만 결국 그 끝은 국가에게 이용당하고 참담하다는 것을 보며 자책하는 것이다.<br><br>&nbsp;영원의 제로 마지막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혼란, 복잡한 인간관계를 급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보여주는 것은 전쟁 말기 일본의 제국주의 광기와 패망 전의 발악, 그리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개개인들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br><br>&nbsp;반딧불이의 묘와 영원의 제로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전쟁 속에서의 개개인,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힘듦에 표현한 것이다.<br><br>&nbsp;식민지배를 당한 피해국가의 사람으로서 두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일본의 옛 황토색 군복, 제로센을 보고 있으면 뭔가 언짢은 기분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으로 영화를 보고 철저히 피해국의 시선에서 보는 것은 이미 학창시절 학교 다니면서 많이 했었고 또 그런 감상문 또한 많을 것이다.<br><br>&nbsp; 문득 든 생각은 일본의 역사의식과 한국의 역사의식의 차이는 정확히 어떤 부분일까? 라는 것이다. 얼마나 다르길래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건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영화로만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국민적으로 역사에 대한 경각심이나 관심은 적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영화를 보면 잘못된 인식이나 전쟁을 미화시켜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해서 모두가 올바른 역사의식이나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너무 한 쪽으로 편향된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 국가를 불문하고 역사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고 영화를 감상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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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05:39: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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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 정붕거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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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반딧불이의 묘'는&nbsp; 전쟁의 비극 속에서 가족애와 죽음을 그린 영화다.이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일본 공습 때 전쟁으로 세이타의 가족이 하나둘씩 죽고, 결국 자신도 굶주려 죽는다는 이야기다.영화의 오프닝은 쇼와 20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 대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피범벅이 된 붉은 빛 속에서 한 소년이 추억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미 죽은 영혼의 추억이었다.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br>&nbsp;'반딧불이의 묘'는 군국주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보다는 반전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다.그 취지는 역시 민간인의 입장에서 전쟁을 생각하려는 것이었다.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틀림이 없고, 백성의 눈으로 보는 것은 나무랄 바 없으며,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는 것도 마땅하지만, 전쟁의 발단에 대한 반성과 고소는 또한 중요하다.어떤 전쟁작품도 사건원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지만, 2차대전 작품만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2차대전이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대전일 뿐만 아니라, 가장 규모가 크고 사상자가 많고 손실이 많은 1차대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우수한 2차대전 작품은 전쟁원인에 대한 반성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정치에 굴종한다면 좋은 작품이 아니며 진정한 의미의 서민적 작품이 아니다.<br>&nbsp;'반딧불의 묘'는 정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영화로 서민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도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결국 2차 대전으로 연결돼 정치적 요소, 특히 2차 대전의 피해국들은 민감한 역사적 배경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감동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전쟁 중 민간인의 비극만 부각됐을 뿐 전쟁의 원인에 대한 묘사는 부족하다는 점에서 피해국 관객의 감정은 외면한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실패한 점이다.반딧불이의 무덤은 우익에 굴종한 반전 작품으로 피해국을 묘사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해야 한다.저는 '반딧불의 묘'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영한다면 남녀 주인공의 비극을 더 잘 표현하고 '민간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중심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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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05:42: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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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3059 최재혁 &#39;일본 패망 하루 전&#39;</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400509</link>
         <description><![CDATA[<div>&nbsp;포츠담 선언, 도쿄대공습,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소련의 불가침조약 파기로 인해 일본 본토가 결국 항복 수순에 들어가고 말았다. '스즈키 긴타로'는 수상의 자리에서 꽤나 정치적인 예리함을 보였는데 그는 소련의 참전을 우려하고 일본이 가능하면 빨리 항복 수순을 밟는 결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연합국들이 일본을 쪼개서 나라를 점령하는 방식을 방지했다.&nbsp;<br>&nbsp;영화에서는 주로 항복파와 항전파가 대립하는데 항전파 내에서도 육군성과 해군성이 기싸움을 하면서 사태의 해결에 대한 방식도 제각기 달리했다. 육군성의 일부 장성과 장교는 국가쿠데타를 주도하면서 결사항전을 마다하지 않는데 그들의 초국가주의적 사상과 신념이 객관적인 시각을 마비시키지 않았나 싶고 광기에 절인 모습이 화면을 통해 다가왔다. 군대를 동원 시키기 위해 관할 장성을 살해하는 하극상까지 벌이고 수상인 스즈키마저 암살음모를 계획하였다.(스즈키는 관저에서 대피한 상태로 살해당하지 않았다)<br>&nbsp;도조 히데키는 히로히토 천황이 어전에서 종전의견을 제멋대로 해석해 결사항전을 주도한 인물로서 그는 이대로 항복을 하게 된다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도쿄재판에서 A급전범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수감소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치료를 통해 회복을 하고 사형집행이 내려졌다.&nbsp;<br>&nbsp;분할정치를 막고 미국 단독의 점령정책이 펼쳐지면서 일본의 군대는 해체되고 민주주의가 일본 전체에 퍼졌다. 천황은 평화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남게되고 죽음을 면했다. 히로히토의 아들인 아키히토는 2차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참상을 아버지의 등 뒤에서 여과없이 지켜본 인물이다. 아키히토는 이런 광기에 서린 일본을 회고하면서 평화를 주창하고 종종 내각과 대립을 선 인물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다시 제국주의의 파도를 타는듯한 헌법개정을 원하는데 이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에 나온 것처럼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라는 내용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것은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으면 일본내각이 현재 헌법개정을 열렬히 원하는 것이 과거에 투영된 일본 제국주의가 보이는 듯 했다.&nbsp;<br>&nbsp;앞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될지 행보가 궁금하다. 지금 현재 나토와 얽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유럽 일대는 긴장상태에 놓여있으며 경제나 물가 또한 불안에 휩싸여있다. 러시아 또한 우크라이나를 '이익선'을 설정하여 소련이라는 향수병에 취한게 아닌가 싶다. 이것은 독일이 재군비 확충의 결과로 이어지고 러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일본도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다시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문제로 인해골이 깊어진다면 사태는 가파르게 진행될 것만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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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08:47: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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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2 김기려 반딧불이의 묘</title>
         <author>Giry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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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지브리하면 환경에 대해 영화를 만든다는 이미지가 쎈 편이어서 전쟁에 대해 다룬 영화라는 점이 신기했던 것 같다.<br></strong><br></div><div><br></div><div>첫 장면부터 시체들, 특히 청소년 시체들이 전철역에 줄줄이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집이 폭격당하는 걸보고 언제든지 집을 떠나야할 수도 있다는 재촉감, 급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제정신으로 있기가 힘들 것 같았다. 나는 지금 해야할 것들이 생겨도 재촉감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전쟁피해자들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것 같다.&nbsp;</div><div><br></div><div>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이기에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고 들었다. 그런 죽음이 코앞에 있고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싫다.</div><div><br></div><div>전쟁을 일으키면 언제나 피해자는 약자와 민간인들이라고 늘 배우면서 봐왔지만 볼 때마다 끔찍하다. 죽은 사람이 흔하게 길에 널려있고, 주인공 또한 엄마가 죽은 것에 대해 슬퍼하긴 하지만, 어떤 대상을 상대로 원망하지는 않는다. 죽음이가깝게 만연해있는 환경에 놓여있고 죽음의 이유가 확실해서일까.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주인공은 이미 지친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 마을이 통째로 없어지고 엄마가 죽고 재산이 없어졌는데도 동생을 위해서 엄마가 죽은 걸 숨기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다.</div><div><br></div><div>난 특히 오빠역할을 안타깝게 봤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하고 모든 걸 어린나이에 짊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였으면 동생이 칭얼거리고 울고 찡찡거리는것을 보면 아무리 동생이고 상황이 상황이라도 화가 났을 것 같다. 근데 화를내지 않는 주인공이 인상깊었다. 주인공이 너무 섬세하고 착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책임감이 멋졌다.</div><div><br></div><div>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가족의 힘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던 것 같다.</div><div><br></div><div>또한 영화의 시점이 특이했는데 죽은 상태에서 바라보고 있는게 신기했다. 이런 시점이 영화를 더 강렬하게 기억하게 했던 것 같다. 보통 주인공이 죽은 게 먼저 나오면 스포일러라고 보였을텐데, 주인공의 죽음이 처음과 끝에 나옴으로써 비극적인 죽음이 극대화된 것 같다. 마지막에 주인공 남매가 현대시대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게 됐다. 발전과 평화를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div><div><br></div><div>그냥 지나간 장면 중 하나지만 반딧불이가 짜부라져서 죽었는데 불쌍하다던가 그런 멘트가 없었던 남매를 보면서 섬칫했다. 생명에 대한 생각이 얕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nbsp;</div><div><br></div><div>또 한국의 ‘지옥’이라는 작품이 생각이 났다. 환경은 다르지만 두 작품 다 잘못이 있을 수 없는 어린아이의 생사를 다뤘다. 어린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세계가 시끄러운데 얼른 해결되길 바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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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09:27: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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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딧불이의 묘 감상평 (2021110261 서가은)</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414747</link>
         <description><![CDATA[<div>     영화 반딧불이의 묘는 태평양 전쟁 중 고아가 된 남매가 피난길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4살인 세이타는 4살인 세츠코를 업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nbsp;</div><div>      영화를 보면서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전쟁을 미화한다라는 생각이 들기보단 이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슬펐다. 영화가 전쟁 중 피난길에 있는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주체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후유증이 나타나며,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정치적 고위 관리자가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국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이 영화를 이번 수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뉴스나 기사 등에서 폭격 상황이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모습과 사망자가 몇 명이고, 그중 아이들은 몇 명이라는 언론의 보도에서 영화 속 장면들과 세이타와 세츠코가 폭격을 피하는 장면과도 겹쳐 보였다. 전쟁은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아이들은 전쟁 고아로 만들어 버린다. 전쟁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도 수많은 피해자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일으킨 그 나라가 패전국이 되었다고 해서 절대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이타와 세츠코같은 이들은 피해자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nbsp;</div><div>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와 아픔뿐, 더 이상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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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09:36: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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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딧불이의 묘, 일본 패망 하루 전 2019110264 이현정</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467412</link>
         <description><![CDATA[<div>두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일본은 어째서 전쟁을 저질렀는가?이다. 공습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떠돌다 나중에는 결국 자신들의 목숨을 잃는 세이타-세츠코 남매처럼, 계속되는 공습에 집이 불타버리고,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수많은 사람, 특히 일반 국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데도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 '일본 패망 하루 전'에서의 육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들은 전쟁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며 결국에는 자신의 상관을 죽이고 쿠데타까지 일으키려 한다. 종전을 결정한 천황의 결단까지 거역하면서 말이다. 시대적 흐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형성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와 동시에 국가의 명예, 그리고 이를 위해 싸우는 군인으로서의 명예가 국민의 안전, 그리고 세계의 평화 위에 설 수 있는 가치인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nbsp;<br><br>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전쟁을 겪은 적은 없지만 '옳지 않은 일'이라고 배워왔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했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혹은 국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참전한 국가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점에서 피해자/가해자 차원에서 전쟁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한국인으로서 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들이 쉽게 잊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nbsp;<br>&nbsp;하지만 조금 더 넓게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이유보다는 아주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살펴보려 할 때, 그리고 선과 악, 가해와 피해의 차원을 넘어 전쟁을 바라보고자 할 때 우리는 일본 사회와 문화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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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12:35: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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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20110355 서혜연 &lt;일본의 가장 긴 하루&gt;</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514319</link>
         <description><![CDATA[<div>모든 역사가 그러하지만, 사학과이면서 일본학과에서 복전을 하는 입장에서 근현대 역사는 참 어렵게 느껴진다. 편협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바라보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일본의 가장 긴 하루’라는 영화는 그 제목이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한국인으로서 모든 부분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일본이 가진 그들의 역사에 대해 볼 수 있었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2차 대전 시기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한국 평점을 보니, 일본의 행위에 대한 미화 영화라고 비난하는 평점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무조건적인 미화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고, 일부 미화가 된 부분도 있었지만, 감정에만 치우쳐 역사를 바라본다면 세상에는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는 역사는 없을 것이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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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14:29: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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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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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0 시문옥 반딧불이의 묘 감상평</title>
         <author>moono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520884</link>
         <description><![CDATA[<div>영화가 시작되자 清太는 역에서 숨죽여 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그와 같이 말라빠진 뼈가 앙상한 아이들도 많았다.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대폭격으로 양친을 잃은 전쟁고아들과 가족들과 함께 길을 잃은 아이들은 모두 떠돌이 아동으로 변해 졌어 길거리에 모여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고 도둑질까지 하며 배를 채웠다.대폭격이 닥쳤을 때 清太의 엄마는 여동생을 데려 방공으로 달려가라고 했고 자신은 포화에 중상을 입었다.清太가&nbsp;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엄마는 이미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고 온몸이 두꺼운 붕대로 되어 있었고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자 엄마의 시신이 실려 나왔다.구더기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울었다.사람들이 그 구더기들을 밟고 지나갈 때 나는 정말 전쟁의 고난에 충격을 받았다..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진정한 의미의 반전이 아니라 감독님이 동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 영화는 전쟁이 일반 백성들에게 주는 파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를 감동시킨 건,형제둘이 먼 사돈집에 기거하는 에피소드도 있다.먼 친척은 처음부터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태도가 반전되어 형이 여동생을 데리고 동굴로 이사하는 결백하지만 쉽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 왔다.그러나 그 시대에는 백성들을 통하게 하는 생활이 모두 힘겨워한다.<br>영화 속에서 순진한 여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오빠에게 왜 반딧불이 그렇게 빨리 죽느냐고 묻는다.나도 왜 그렇게 나이가 어려서 제일 좋았을 때 빛났어야 할 여동생이 그렇게 빨리 죽었나라고 묻고 싶다.그들의 그 이기적인 아주머니를 탓해야 할까?어머니 옷으로 치환한 쌀을 들고도 묽은 국물만 먹여주는 괘씸한 여자였다.그런데 비상시국에 누가 진심으로 귀찮게 하는 것을 데리고 싶어할까.아니면 오빠를 탓해야 될까?왜&nbsp; 친동생을 잘 돌볼 능력이 없고 한 발자국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 값진 자존심 때문에 이모네 집을 떠나야 하는 걸까?오빠는 이미 충분히 잘 해냈고 바닷가로 데려가 과일사탕 여동생에게 내주고 포화 속을 뛰어다니며 물건을 훔쳤고 여동생이 괴로워하지 않으려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까지 혼자 묵묵히 가라앉았다.아무도 잘못이 없고 잘못된 것은 전쟁이다.잘못된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 천황이고 잘못된 것은 그 칼을 든 일본 토병과 장교들이다.이 사람들이야말로 죄를 용서할 수 없다.포화를 맞은 민간인이 아니고 세상을 아직 잘 못 본 아이들이 아니다.<br>사실 전쟁이 정말 무서운 것은 우리의 삶과 질서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에서 만든 현실의 버팀목을 망치는 것이다.전쟁은 우리로 현실에 대한 체감을 상실하게 한다.전쟁 혼돈이 저렇게 멀어 보이는 까닭에 우리는 늘 허겁기만 하고 눈앞에서 살아가는 질서정연하게 전쟁의 침입을 차단하려는 신호로 잔혹한 폐허의 총성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이 영화가 정말 서글픈 것은 형제둘이 사실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비록 전쟁의 그늘 아래 처하지만 그들은 구조를 거절하기로 선택했다.실제로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존재와 전쟁이 그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그래서 둘이 서로 의지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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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14:43: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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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71 김영</title>
         <author>rladud010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5527082</link>
         <description><![CDATA[<div>&nbsp;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쿠데타를 시도했는가 - 일본 패망 하루 전</div><div>&nbsp; &nbsp;</div><div>일본 패망 하루 전은 일본의 항복 직전 발생한 군부의 쿠데타 시도 소위 ‘궁성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감상하면서 느꼈던 것은 일본 영화인 것을 감안한다면 꽤 중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내각의 항복 여부를 둘러싼 대립과 군부의 비이성적 폭주, 당시 일본이 계획한 본토 결전 속 무모함과 인명경시사상 등은 잘 묘사된 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쿠데타를 감행하는 세력을 나름 구국을 위해 움직인 사람들이라 묘사한 것과, 천황을 신료들과 신민들을 위하는 성군으로 묘사한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div><div>우선 천황부터 바라보자 일본이 지금도 천황제로써 운영되는 나라임을 생각해보면 이미 2대전 천황이라 하더라도 묘사하는 것부터가 부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쇼와천황의 전쟁 책임론은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되고있는 만큼 국민과 나라를 위한 항복을 결단했다는 장면은 머리에 물음표를 띠게 만든다. 특히나 옥쇄를 하는 이유가 천황의 옥체 보존이였다는 점에서 더욱 모순성을 보여준다. 그가 처음부터 국민을 생각했다면 중일전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어야 한다. (군부 내각이 결정하고 천황은 인가하는 것이 관례화되어있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일본에서 천황이 가진 권위와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나름의 정치참여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쇼와천황은 분명한 억제력 행사가 가능했다.)</div><div>그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장교들이다. 당시 일본은 원폭 투하 이후에도 연합군의 본토 상륙에 맞서 결호작전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파와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된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는 양 측으로 나눠져있었다. 당시 일본의 대도시들이 공습을 받음으로써 전쟁수행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었고, 옥쇄를 위해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무기가 화승총, 농기구, 죽창 등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결호 작전이라는 것이 민간에게도 사실상 자살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쿠데타 세력은 비이성적인 작전을 수행하고자 했을까. 당시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기득권이었던 그들이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설명부터, 문민정부에 대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세워진 군부 내각을 본 그들이 자신의 사상과 반하는 정부에 대해 배운 것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궁성사건 이전에도 군부가 정부에 반하여 폭력을 통해 집권을 시도하려는 행위는 도조 히데키 군부 내각 설립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5.15사건-해군의 민간 각료 암살, 2.26 사건-육군 내 청년 장교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쿠데타 시도 참고)&nbsp;</div><div>또 다른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그들이 현실부정과 자기세뇌를 통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 미국을 상대로 나온 프로파간다에서 ‘정신론’(일본의 야마토 정신이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에 비해 강력하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nbsp;<br>이들은 나름 베트남전과 같은 결과를 노렸을 수도 있다. 미군의 피해가 지속된다면 그를 감내하기 힘든 미국의 민간인들이 정부에 종전압박을 넣을 가능성에 대해 말이다. 그러나 (조작이었지만) 미 군함이 공격받아 참전한 베트남전과 달리 당시 일본은 미국의 본토를 직접 기습 선제공격하였고,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복수전이었던 만큼 전쟁에서 이겼다는 명확한 증명 없는 종전이야말로 오히려 미국 정부가 압박을 받을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프간전의 사례를 생각해본다면 이들이 게릴라가 되어서 혼슈 전체의 유격전을 벌였다면 양상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종전 직전에 이미 민간의 전쟁수행의지가 바닥난 상태였고, 미국의 본토 진입시 추가 원폭 투하 및 증원계획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전략안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를 생각볼 수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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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6 14:58: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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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84 반딧불이의 묘 감상문</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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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는 세계대전에서 한 남매가 굶주림과 싸우다 차례대로 쓸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내용이었다. 보는 내내 정말 슬픈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딧불이의 묘는 전쟁의 서사, 또는 전쟁의 모습 보다도 죽어가는 남매의 ‘형제애’에 집중한 것 같이 보였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슬픈 느낌을 주며 끝이 났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남매가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그려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이 생기게 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nbsp;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에 이 애니메이션이 방영된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전쟁영화를 보여주면서 바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애니메이션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냄으로써 그들이 피해자로 보이려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반딧불이의 묘를 보면서 느낀 건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먼저 욕심 부리고 먼저 다른 나라를 공격해서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욕심이 화를 불러온 것 인 데도,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남매의 불쌍한 모습을 강조하면서 일본인들이 ‘피해자’라는 모습만 부각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전쟁영화는 대체로 진실을 알리기보다 그들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거나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특히 반딧불이의 묘는 그러한 전쟁영화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첫 부분부터 연합군의 공습을 보여주면서 외세로 인해 일본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인식을 받게 한다. 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했던 행동은 일체 보여주지 않고 그들의 아픔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영화 중간중간 천황을 위한다든지 대일본 제국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한 부분에서는 애니메이션에서 조차도 일본인들의 사상을 주입 시키려 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기까지 했다. 또 영화를 보다 보면 굶주림으로 죽었다가 영혼으로 살아난 주인공 세츠코와 세이타가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두 아이들이 바란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보다도 그들이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러한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시선을 끌면서 그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피해만을 강조하는 모습이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보았다면 마냥 슬프기만 한 영화였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전쟁의 진실을 알고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저 자신들의 잘못을 다른 나라에게 떠넘긴 채 아이들의 눈물로 자신들의 잘못을 승화하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nbsp;<br><br></div><div>&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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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7 12:05: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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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215472 윤건희 일본 패망 하루 전</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6439597</link>
         <description><![CDATA[<div>이 영화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원작 소설인 " 일본의 가장 긴 하루" 라는 책 읽어보고 내 생각을 적어본다.<br><br>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시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항복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에도 일본 정부는 신념과 이념 때문에 항복해야한다 항전해야한다 이렇게 둘로 의견이 갈라졌다. 이부분에서 전쟁도 전쟁이지만 전쟁은 외부적인 문제이면 내부적인 문제에서는 절체 절명인 상황속에서도 실리와 명분떄문에 항복하지 못하는 딜레마가 보여서 새롭게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고 그 무게는 국민들이 짊어지게 되고 패배하게되면 모든 걸 잃어버린다. 의외라고 생각되는 장면은 8월10일 오후2시 방공호에서 열린 회의에서 항복해야한다 끝까지 싸워야한다 중에서 투표가 동률로 3:3이 나왔는데 일왕 히로히토가 “공습이 격화되어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문화를 파괴하며 세계 인류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다. 나의 임무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메이지 천황의 삼국 간섭 시의 심정을 헤아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외무성에 찬성한다” 라며 항복에 찬성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결국 일왕도 마지막에는 국민없이는 나라가 없다라는걸 알고있고 현실을 마주하는 일본이 승산이 없다는걸 알고 마지막에는 최선이 판단을 하는 일왕 히로히토의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이 들었다. 최후에는 실리를 챙기는 모습에 현실에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끝까지 항전할꺼 같은 일본제국의 현실을 본 느낌을 받았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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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8 02:15: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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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자가자 신군을 통해 보는 천황제</title>
         <author>teseus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49637412</link>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eqVqZhHftk0"><br></a><a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JlapafzVHQTHLlI8J5w1BaLmG1eyKjPh?usp=sharing">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JlapafzVHQTHLlI8J5w1BaLmG1eyKjPh?usp=sharing</a></div><div>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자가자 신군)</div><div><br></div><div><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ycoiLXo5sks">https://www.youtube.com/watch?v=ycoiLXo5sks</a>(가자가자 신군 중국어자막본)<br><br><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eqVqZhHftk0"><br>https://www.youtube.com/watch?v=eqVqZhHftk0</a></div><div>MBC 다큐 천황의 나라 일본 4부 &lt;충성과 반역&gt;</div><div><a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JlapafzVHQTHLlI8J5w1BaLmG1eyKjPh?usp=sharing"><br></a>코멘트는 24일 일요일 저녁9시까지 올려주시면 됩니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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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0 02:47: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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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0113218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mika6565j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1746395</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결국, 나는 헤매했다. 오쿠자키 켄조는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초반에 봤을 때는 이 사람 장난 아니구나 했는데 보다 보니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그렇지만 역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구별할 수 없다.그런데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은 지금은 절대로 만들 수 없는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strong></div><div><br></div><div><strong>정의라는 대의는 약물의 달콤한 유혹과 같다.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도 억눌렀을 에너지를 개방해 버릴 수도 있다. 악을 성패하기 위해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누군가의 묘한 적극적 행동에 그럴듯한 대의를 내걸었다면 눈여겨볼 일이다.자신의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살인을 포함한 비합법적인 행동이라도 주저할 것 없는 남자.은폐고 뭐고 없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경찰 앞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지.나름대로 도덕감정으로 발언하고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게다가, 저마다 인간의 고통은 천벌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 인과를 맹신하고 있다.</strong></div><div><br></div><div><strong>오자키 겐조가 마지막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뒤 '신의 애노’라는 작품을 찍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이상을 위해서-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황군을 풍자하고 싶은 거죠.&nbsp; 나는 신의 애노를 자세히 안 봤지만 소개를 보면 영상중에서는 관장, 식분, 대변, SM 등등의 메스꺼운 장면이 , 정상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77세(당시)의 어르신이… 이런 일을 맡기에 얼마나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는가…. 충격을 받았다.&nbsp;</strong></div><div><br></div><div><strong>그동안 나는 그의 이런 극단적인 사상에 대해 매우 이해하지 못했다.정의를 표현하려다 정의로운 이미지를 더럽히고 자신의 후광을 손수 지웠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모순체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아 돌아온 병사에게는 죄를 인정하라고 했다. 하지만 군에 간 그는 인간성과 사회 암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모두가 역사를 직시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것에 환호했다. 그는감히 정부 국가에 반항하는 고독한 투사이다.그러나 그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타락한 방법으로 수행했다. 달리 말하면 그도 타락한 것이 아닐까?</strong></div><div><br></div><div><strong>오자키 겐조의 편집증은 태평양 전쟁에서 그가 받은 자극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식인육 사건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다니고, 환경적으로 악몽에 기복을 일으켜 정서적 불안을 초래하고, '신의 애노'에서 그가 보여준 '혈전 용해법'의 '헬스' 체조는 강박증의 단면을 감추고 있다.</strong></div><div><br></div><div><strong>오자키 겐조는 냉정하고 폭력적이며 이지적이고 반항적이며 진실을 캐내면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복잡한 사람이다.그가 말하는 폭력의 합리화와 정당화는 현대 법으로는 유죄지만 역사적으로는 어떤가….? 사람을 잡아먹은 사람, 사람을 죽인 사람, 죄가 없는가 ? 그런데 이들에게 벌을 내릴 법은 무엇인가?&nbsp;</strong></div><div><br></div><div><strong>나는 그를 존경한다 . 그가&nbsp; 많은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결과가 좋으면 폭력은 정당하다.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내 판단에 따라 움직이다”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결말이 좋은 결말일까? 그 자신이 판단하는 기준은 또 무엇인가?&nbsp;</strong></div><div><strong>나는잘모른다…… 상상할수도없다.</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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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1 09:04: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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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9110118 유은우 충성과 반역 코멘트</title>
         <author>6cnb57g7r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2284841</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역사는 과거진행형인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를 향해 천황의 궐기를 요구하며 한 할복 자살은 정치적 집단의 동기를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의 행위를 통해 연관이 없는 것 같은 전태일 열사가 생각났다.&nbsp;<br>인간의 극단적 행위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한 개인이 사회를 이룬다고 하지만 수직적인 소통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은 일본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였고 전태일 열사는 한국 노동 좌표에 대한 경고였다.&nbsp;<br>다만 모든 죽음은 그 이후가 중요하다.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이후 오히려 우익의 반발과 의견이 강세가 되었다. 이는 역사가 진행중이라는 큰 증거로 볼 수 있을법하다. 이를 통해 현재의 일본 개인주의 또한 완벽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nbsp;<br>사실 이번 주제는 어려웠다. 중립적으로, 학문적으로 일본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강의었는데 이번 다큐멘터리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본인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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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1 15:57: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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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0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평</title>
         <author>leedahyeon01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3132265</link>
         <description><![CDATA[<div>&nbsp;이 다큐멘터리 작품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이 행하는 행동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다큐에서 보여주는 행동만 보면, 오쿠자키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문제아’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찾아가 그 당시의 일을 추궁한다. 그러다 상대가 답을 회피하려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를 취하면, 폭력을 휘두른다. 다나카 가쿠에이를 처단하라는 현수막과 온갖 글씨로 도배한 자동차를 끌고 모든 곳을 누빈다. 이전에는 천황에게 파친코 구슬을 쏜 적도 있을 정도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마다 경찰에게 주의받는 결말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br><br></div><div>&nbsp;하지만 별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쿠자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이며,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비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오쿠자키 본인이 소속되어 있던 연대에서 병사들을 총살하고 그 인육을 먹은 사건에 대해 집착하듯 파고든다. 그럼에도 전쟁이 낳은 피해자인 한편, 오쿠자키 본인도 살인자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해자인 것을 여과 없이 카메라에 비춰지며 마냥 동정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느껴진다.<br><br></div><div>&nbsp;전쟁에서의 사건과 참상이 오쿠자키에게 강한 트라우마와 반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의 주장들도 확실히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전쟁의 폭력성에 아픔을 가진 인물이, 전후에 또 다른 폭력의 가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국가와 개인이라는 입장 상 그 폭력성의 크기 차이는 매우 크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오쿠자키가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미약한 본인 개인이 보복을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이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된 전쟁의 폭력성 모방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계속되는 악순환인 것이다. 오쿠자키와 같이 열렬하게 선전에 나서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전쟁에서 겪은 사건을 가슴 속에 감춰둔 사람들에게도 폭력성은 끝없이 잔존한다. 그것이 물리적 폭력이든 본인 자신을 깎는 혐오든 아무도 모르게 불태우고 있는 무언가를 향한 분노든. 다만 그것을 현실이라는 누름돌로 자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br><br></div><div>&nbsp;과거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주장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을 조정할 힘이 있는 정치적 상류계급층의 행보를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일반 시민이 이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오쿠자키처럼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려고 하면서까지 나설 수 있는 개인은 많지 않다. 약함의 순응성이다. 그렇다고 무지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오쿠자키를 보면서 한편으론 동정하고 한편으론 비판하는 것처럼, 하나의 큰 틀에 집착하지 않고 실제 당사자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br><br></div><div> 오쿠자카는 파친코 구슬을 천황에게 쐈다. 파장과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행동을 벌인 것은, 천황과 전쟁에 대한 격렬한 보복심이다. 그런 보복심이 과연 오쿠자키 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전쟁을 지나온 그이들에게 무궁한 분노 표출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천황의 자리는 수많은 파친코 구슬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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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05:20: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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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가자가자신군 (서가은,2021110261)</title>
         <author>geseo052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3233943</link>
         <description><![CDATA[<div>가자가자신군은 누군가가 무참했던 죽음과 전쟁에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했던 오쿠자키 겐조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가 처음부터 천황에게 반감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인간의 비극적인 참상을 보았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천황에 모습에 화가난 것이다. 그래서 히루히토 천황 즉위식에서 테러를 했고, 이는 천황을 향한 최초의 테러가 되었다. 그는 천황이 전쟁에 대해 사과를하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있다.&nbsp; 그렇기에 죽기전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었다.</div><div>일본의 천황이 원래 상징적인 자리가 아니라 전쟁 이후에 군국천황에서 평화의 천황으로 바뀐것이다. 전쟁 중에는 일본의 천황이 군사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서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일본 내에서도 많다. 하지만 오쿠자키 겐조가 죽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없는 경향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div><div>일본의 천황에 대해 표면적인 것들만 알고 있어, 천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일본인들은 천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nbsp;</div><div>다큐멘터리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였으며,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천황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 되었다. 더 많은 이들이 오쿠자키 겐조처럼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더라면, 어쩌면 천황의 자리가 지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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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07:16: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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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210988 버려진 신의 군대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평 </title>
         <author>minhomino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3237802</link>
         <description><![CDATA[<div>&nbsp;가자가자 신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 뉴기니(현 파푸아뉴기니)로 전출 간 '오쿠자키 겐조'의 모습을 밀착취재하며 그의 행동들과 발언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1969년 쇼와 덴노에게 파칭코 구슬을 쏴 맞출뻔하기도 하였으며 다나카 카쿠에이 전 수상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소속부대였던 36연대의 상관들을 찾아가 그때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br><br>&nbsp;그는 전쟁 당시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고 했으며 상관의 명령으로 가장 계급이 낮은 인원 둘을 죽인 뒤 식인을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nbsp; 그때 자신의 마음 속에 씻어지지 않는 죄책감이 새겨졌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만의 정의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하였다. 천황 저격 사건, 카쿠에이 수상 암살 미수, 상관 폭행 등... 그 모습을 보며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했던 "폭력은 어떠한 정당성도 부정한다."라는 말이 생각났다.<br><br>&nbsp;하지만, 그가 행한 폭력의 대상들은 이미 어떠한 정당성도 부정되어 있는 존재였다. 동아시아의 정당성을 위해 폭력이라는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정한 일본과 전쟁의 최고위자인 천황, 배고픔을 잊기 위해 가장 계급이 낮은 병사 두 명을 죽이도록 명한 상관. 그들 또한 어떠한 정당성도 부정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곳에 겐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또한 배고픔을 잊기 위해 동료의 시신을 먹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 그 손으로 천황에게 구슬을 쏘고, 상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nbsp;<br><br> 이러한 겐조씨의 모습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배자인 '천황'에게 반역을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충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그 안에서 희생시킨 많은 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넴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가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고자 한 '충성'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br> <br> 마지막으로 다큐를 보며 '전쟁'은 힘 있는 자들이 일으키지만, '전투'는 힘  없는 자들이 나가 희생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힘 없는 자들은 힘 있는 자들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일 뿐, 그들이 그 싸움에서 얻는 것은 죽음 혹은 불구가 된 자신의 몸 등 자기파괴적인 것들만 품에 안게 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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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07:20: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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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자가자신군] 2020113262 박진규</title>
         <author>qkrwlsrb</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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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자가자신군)을 통해 일본 속에서의 전쟁책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중심인물인 오쿠자키 겐조의 가치관과 사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br><br>&nbsp;가자가자신군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명랑해보이는 이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다큐를 감상하면서 예상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큐 속 중심인물인 오쿠자키 겐조는 반국가주의, 반천황제 가치관을 갖고 있는 굉장히 급진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인물이다. 그는 국가는 사람 사이의 벽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단결을 가로막는 벽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가족도 하나의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결국 인간을 고립시키고 유대감을 단절시킨다는 사상을 갖고 있는 굉장히 급진적인 인물이다.<br><br>&nbsp;그는 전쟁시기 당시 사건사고들을 파헤치고 해명하고 다닌다. 그런 그의 행보를 담은 '가자가자신군'은 다큐 속에서 돌발행동마저 여과없이 보여준다. 오쿠자키 겐조는 막무가내와 폭력을 종종 행사하는 품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파칭코 알로 천황을 맞히려는 등 자신의 반사회적인 행동과 그 죄목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성격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상대방과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인다는 점이다.<br><br>&nbsp;오쿠자키 겐조는 요지사와와 노무라의 처형사건과 관련된 무라모토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공소시효 만료로 민형사상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신의 재판에서는 벗어나지 못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유죄라고 생각한다." 라며 스스로 무라모토를 단죄하려고 한다.<br><br>&nbsp;또한 오쿠자키 겐조는 결과가 좋으면 폭력은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자체적인 판단으로 계속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br><br>&nbsp;결국 나중에 오쿠자키 겐조는 전 상관 아들을 총상으로 중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전국에 수배되고 고배 시내에서 체포된 후 구속되어 12년형을 선고받는다.<br><br>&nbsp;오쿠자키 겐조에게 전쟁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전쟁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망령이 된 사람들, 전시에 즉결처분당한 사람들, 전쟁통의 혼란 속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과몰입한다. 그들의 혼을 위로하고 기리며 그들의 피해와 죽음을 규명하려는 오쿠자키 겐조의 행보는 매우 이타적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의 언행 또한 평화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쿠자키 겐조의 과거의 언행은 참회하지 않고 스스로 정당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의 교육수준, 오쿠자키 겐조가 전쟁 속에서 입은 정신적인 피해를 고려한다면 그럴 법도 하고..<br><br>&nbsp;그는 전쟁시기엔 천황을 받드는 병사였지만, 전쟁의 참상을 몸소 느끼고 천황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반국가적, 반천황제의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다닌다. 현재 일본인들에겐 천황은 평화와 화합의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당시엔 절대복종하고 신처럼 여기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 사회와 제국주의 속에서 고생하고, 인육을 먹는 등 인간의 품성이 밑바닥까지 밑돌다 희생된 자들이 다큐에 나온 인물 말고도 훨씬 많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쿠자키 겐조의 태도와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사실 천황에 대한 겉핥기 뉴스는 종종 봤어도 이런 일본인들의 진짜 인식들과 사연은 처음 보기에 굉장히 신선하고 또 더 알아봐야겠다고 느꼈다. <br><br>&nbsp;가자가자신군은 지금까지 본 다큐멘터리중 가장 혼란스럽고 폭력적이며 날것인 다큐멘터리였다. 약자와 강자의 논리를 지켜세우며 피해자를 강조하는 오쿠자키 겐조였지만, 그의 언행도 다큐를 보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진짜 망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영웅심리에 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헷갈렸다. 물론 현재는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천황제와 일본인들의 인식에 대해선 잘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이 다큐를 본 다른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교수님의 수업도 듣고 싶어졌다.<br><br>&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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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09:12: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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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평  2018113415 주찬</title>
         <author>iltycb</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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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 &nbsp;이번 주에 본 영화는 지난 몇 주 동안 본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이번에 본 것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이야기다. 영화처럼 대부분 허구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에 볼 때 더욱 충격적이다.<br>&nbsp; &nbsp;먼저 &lt; 가자가자 신군 &gt; 이 다큐멘터리는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이 천황에 반항하는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천황에게 여러 차례 무서운 불경과 암살 행위를 했다. 나처럼 처음 본 사람은 처음에는 그가 나쁜 사람이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서서히 방영되면서 관람객들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와 그 뒤에 관련된 더욱 무서운 진실을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매우 큰 악행을 저질렀다. 바로 인육을 먹는 것이다. 그들은 먹는 사람을 돼지라고 비하할 뿐만 아니라 기니의 전쟁터 현지 사람들을 "흑돼지", 백인을 "백돼지", 심지어는 마지막에 자신의 전우까지 먹게 될 정도로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다. 오쿠자키 겐조가 있는 군대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이유 없이 총살당했다. 그는 의심으로 계속 추적해 결국 이 공포의 진상을 찾아냈다. 분노가 그로 하여금 이전의 그 행위들을 하게 했다. 나는 그의 분노가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인육을 먹고 심지어 자신의 병사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아무도 이런 행동을 기억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이 사실을 듣기만 해도 이미 매우 화가 났는데 전쟁과 전우의 죽음을 경험한 오쿠자키 겐조 본인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br>&nbsp; &nbsp;그렇다면 이 결과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일본의 천황제도를 언급해야 한다. 일본의 천황제도는 항상 피비린내를 동반하며, 많은 천황들이 친족의 시체를 밟고 계승한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제도도 천황 자체의 냉막 및 일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정신의 상징이기 때문에 최고다. 천황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향으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승리를 위해 천황에게 충성하기 위해 인육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병사들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죄책감도 없이, 그들은 이 모든 것이 필요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인들이 천황에 대한 정신 숭배의 깊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큰 배경에서 오쿠자키 겐조는 계속 이런 불공평함에 항쟁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가 매우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다.<br>&nbsp; &nbsp;나는 일본이 자신의 죄를 잘 반성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 일뿐 아니라 다른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것도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초심일지도 모른다. 일본이 자신의 잘못과 역사를 직시하고 개과천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더 오래 갈 수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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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13:27: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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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6 고가연 다큐멘터리 천황의 나라 일본 - 충성과 반역 코멘트</title>
         <author>ggykmh</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3806258</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천황제는 요란한 빈수레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내내 느꼈다.&nbsp;<br>일본인들에게 천황이란 무엇일까.&nbsp;<br><br>패전 이후 살아있는 신을 표방했던 천황은 스스로가 인간임을 인정했다. 이는 천황을 향한 무분별적 충성과 희생을 거두어도 된다는 암묵적인 의사이기도 했다. 이후 천황은 절대적 충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일본 내 평화와 국민 통합의&nbsp; 평화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에게 신년참하를 행하는 등 그들의 국민 통합을 위해 '상징 천황제'를 구축해왔다.<br><br>그러나 여기 신년참하에서 천황에게 파칭코 탄환을 쏜 한 인물이 있다. 오쿠자키 겐조. 그는 놀랍게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천황에게 충성하던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전쟁의 참상과 잔혹한 이면을 몸소 체험하며 이 모든 것들이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자였다.&nbsp;<br><br>여기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미시마 유키오. 일본의 저명한 작가였던 그는 이전 천황제로의 복귀와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며 결국 할복으로서 본인의 강력한 의지를 사회에 표출한 인물이다.&nbsp;<br><br>천황제란 과연 일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일까. 일본의 국민 안에서도 극명하게 갈리는 천황과 그 제도에 대한 시선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바라보며 그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오쿠자키 겐조를 담아낸 부분을 보며 일본 천황에 반감을 가진 일본 국민은 결국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사회적 구조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그의 폭력적인 대응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사상과 주장을 내세우게 된 그 배경과 실체를 들여다보지 않고 그를 사회적 문제아, 즉 오쿠자키 겐조가 스스로 '사회적 자살'을 행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한 일본 사회는 과연 진정 과거의 절대적 천황제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생긴다.<br><br>천황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인물도 있지만 반대로 예상치 못한 희극을 맞이한 인물도 등장한다. 마지막 황군 오노다 히로오다. 종전 이후에도 군사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필리핀의 한 섬에서 숨어지낸 그는 일본 언론과 정부로 인해 원치 않은 희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그가 직접 전쟁 당시 상관의 명령 해제서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그를 국가에 충성한 영웅으로 추앙하였다.&nbsp;<br><br>무엇이 충성이고 무엇이 반역인가. 일본 내 천황의 충성과 반역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상징 천황제라고 하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일본의 천황제를, 그리고 여전히 그것을 따르고 있는 일본의 국민성을 우리는 무작정 비판하고 비난하기 전 그 이면과 그로 인해 일어난 다양한 일들을 고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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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2 16:01: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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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30009 우스키 스미레 &#39;가자가자 신군&#39;</title>
         <author>sumire1122us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366007</link>
         <description><![CDATA[<div>&nbsp;오쿠자키 켄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破天荒’이다. ‘破天荒’는 원래 그전까지의 사람은 할 수 없었던 것을 새로이 해내거나,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뜻이었으나 요즘에 들어 행동이 대담하고, 폭력적이고, 틀에 박히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그 의미가 변화했다. 오쿠자키는 이 양쪽 측면을 가지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nbsp;</div><div>&nbsp;</div><div>&nbsp;오쿠자키의 행동은 ‘破天荒’ 그 자체이며 이해가 굉장히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예전의 상관을 찾아갔을 때, 처음에는 이성적이고 침착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폭언, 폭행을 하는 모습. 반대로 심하게 폭행을 하다가 갑자기 사과를 하고 스스로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 그의 행동은 일견 연관성, 일관성이 없고 도저히 이해가 못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체로는 그 근간에 확고부동한 신념, 즉 전쟁 및 천황에 대한 반대의사가 있어 오쿠자키는 이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점점 알게 된다.&nbsp;</div><div>&nbsp;</div><div>&nbsp;오쿠자키의 행동에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폭력, 때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자꾸 눈이 가는 이유, ‘가자가자 신군’이 일본에서 굉장히 흥행하여 2021년에도 재개봉된 이유는 바로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 있을 것이다.&nbsp;<br><br> ‘평화의 상징’인 천황에게 만약에 머리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거나 하물며 전쟁 책임을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쿠자키는 이를 아주 쉽게, 게다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낸다. 거기에는 확고한 신념, 명확한 도달 목표가 존재하여 단순히 폭력을 좋아하거나 눈에 띄려고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이러한 모습에 우리는 통쾌함을 느껴 그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破天荒’ 그 자체인 오쿠자키 켄조라는 인믈을 영화 ‘가자가자 신군’을 통해서 만날 수가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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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04:33: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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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영준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문</title>
         <author>dud904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436210</link>
         <description><![CDATA[<div>냄새 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臭い物に蓋をする)는 일본의 국민성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예와 책임이 중시되기 때문에 애초에 명예에 손상이 갈 만할 일을 만들지 않고, 책임져야 할 일은 덮어 둔다. 자신이 저지른 치부는 가슴 속에 가만히 묻어놓고 아무 일 없었던 척을 한다. 일본제국 시절 식민지에 벌였던 수많은 악행을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가 그렇고, 이 영화에서 오쿠자키가 추궁하는 전쟁 생존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냄새나는 치부에 뚜껑을 덮어 숨기고자 한다. 오쿠자키는 그런 뚜껑을 어떻게든 열고자 한다.</div><div>2차 세계대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와 천황제에 강한 회의를 품은 오쿠자키 겐조는 신군(神軍)을 자처하며 천황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과거 전시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한다. 오쿠자키가 찾아간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물거나 거짓말로써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오쿠자키는 폭력을 써서까지 끝끝내 진상을 드러낸다. 그로써 밝혀지는 ‘인육 섭취’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당사자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이 털어놓는다.</div><div>영화 &lt;가자가자 신군(국내 제목 &lt;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gt;)&gt;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의 행적을 매우 담백하고 건조하게 비춘다. 아나키스트이며, 경찰에게 막말을 하고, 폭력을 쓰는 것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안타깝게 죽은 전우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전적으로 시청자에게 맡겨졌다.</div><div>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야마다 키치타로가 ‘자신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공양하고 있다’고 하자 오쿠자키가 격앙하면서 야마다의 멱살을 잡았던 부분이다. 그가 그 부분에서 격앙한 이유를 당사자가 아닌 나는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추앙하는 것이, 그 자신이 저지른 죄에 아무런 책임감도 못 느끼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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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08:21: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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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113414 강영화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문</title>
         <author>9rjbjr8xjj</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481596</link>
         <description><![CDATA[<div>奥崎谦三는제 2 차세계대전당시일본군제 36 독립공병연대전체생존자 6 명중한명이다. 일본으로돌아가기전에호주포로수용소에서남은시간을보냈다. 그러나포로수용소에서는전우몇명을보이지않았다. 일본으로송환된뒤奥崎谦三는일본각지에서자신의전우처형을명령했다고생각한전장교들을추궁했다. 뉴욕타임스가 '사이코패스'라고부르는스타일로인터뷰했는데, 어떤경우에는폭력으로까지비화되기도했다.&nbsp;<br><br></div><div>그는처음에시마모토의집에가서돌아가신시마모토에대해이야기하고어머니는손으로얼굴을가리고아들을잃은아픔을참아내는데…</div><div>전쟁때문에원래저는일본에대한증오심을갖고있었지만이다큐멘터리를보면일본의민중도피해자이다. 전쟁으로인한고통은모두서민들이겪고있다.<br><br></div><div>奥崎谦三는 복잡한 사람이어서 진실을 캐고 싶지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카메라는奥崎谦三에게진실을추적할수있는용기를주었지만, 만약오자키가그들을방문했을때카메라가없었다면그가원하는진실을쉽게얻을수있지않았을까?<br><br></div><div>그렇다면그진실을알려는것보다그의노력때문에모두가진실을알수있다는것을알리는게더신경을썼을것이다.<br><br></div><div>그리고폭력으로상대방을설득해대답을시도한다. 이러한폭력행위를 통해 진실을 알리는 것은모두잘못된것이라고생각한다.<br><br></div><div>任命의인터뷰에서妹尾幸男는상부의명령을받고사람을죽였다고말했다.  그러면 1987년태평양전쟁후반에일본군이굶주림때문에동료를먹었다는사실을폭로그렇지않습니까? 의외로윽박지른뒤 '짤막한진실'을토해내는이들도적지않다.<br><br></div><div>진상을조금씩알게되면그들이말하는흑돼지나백돈은모두인육에불과하다.&nbsp;<br><br></div><div>흑돼지는지역원주민으로피부가검다고해서흑돼지라고부른다.</div><div>제조사에서도이런기록이있다는것을알게됐다.</div><div><br></div><div>차대전당시유명한식인사건중하나였던 '부도사건'(오가사와라제도의본섬)을언급한대목이었다.</div><div><br></div><div>오가사와라제도부도를지키던일본육군과해군은 1945년 2월 23일부터 3월 25일까지수감중이던미해군조종사 8명을차례로살해하고이중 5명의고기를먹었다.</div><div><br></div><div>이다큐멘터리를통해우리는뉴기니에서일어난사람을먹은사건이 진실이고 집단적이고 질서화된 먹이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div><div><br></div><div>奥崎谦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실은 발견되지 않았을 겁니다.</div><div>&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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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10:17: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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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3 정은채 </title>
         <author>spring_crb</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605031</link>
         <description><![CDATA[<div>전쟁을 직접 겪은 오쿠자키 겐조가 두 사람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일본 곳곳을 다니며 당사자들과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는 전쟁의 원인인 천황을 증오하고 파친코 알을 그에게 던지는 시도를 하는 등 굉장히 직설적이고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들어내는 행동들을 행한다. 오쿠자키는 종전 후에 자신이 근무하던 뉴기니에서 탈영죄로 총살당한 두 일본 병사의 사연을 듣게 된다, 죽은 병사들의 상관과 동료 등 처형에 참여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죽음의 비밀을 알아낸다. 그 진실은 부대 내 식량이 떨어지자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부대원들이 가장 허약하고 계급이 낮았던 두 사람을 처형해 식인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원주민을 검은 돼지, 미국인 혹은 일본인을 하얀 돼지라고 부르며 식인 행위를 그저 가축을 먹는 행위로 취급하며 인간성의 상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식인 행위를 자행했다고 끊임없이 되풀이 했지만, 그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div><div><br>그들은 그들의 안위를 위해 그들의 과거를 드러내기를 무서워했다. 그저 명령에 따랐다고 주장하고 명령을 내린 사람은 그저 책임을 회피하고 그저 과거로부터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응징하고, 공권력의 대표인 경찰이 그를 연행해가도 덤덤한 모습만 보였다. 희생자들의 묘에 가서 초라한 밥과 우메보시만 올린채 그들을 위로해야며 눈물을 흘린 그를 보면서 전쟁의 찬혹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div><div><br>결국 진실을 찾은 오쿠자키는 자신에게 인육을 강요했던 상관을 살해하려하고 그의 동생을 총으로 쏜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끝없는 참혹함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전쟁의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생각이 멈추었다. 이 거대한 진실을 마주한 순간 다시 한 번 전쟁의 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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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14:42: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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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5 이세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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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가자 가자 신군’은 하라 카즈오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로, 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었던 오쿠자키 겐조를 주인공으로 한다. 오쿠자키는 태평양 전쟁 중 뉴기니 전선에 파병됐다가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는 으레 다른 일본 국민들처럼 천황을 신으로 여겼었는데, 뉴기니에서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후 천황제에 엄청난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천황의 이름으로 전시에 저질러진 범죄를 조사하던 어느 날 오쿠자키는 종전 직후 뉴기니에서 탈영죄로 총살당한 두 명의 일본 병사의 사연을 접하고, 죽은 병사들의 유족과 동료를 통해 진실을 파헤치며 총살 뒤에 숨겨진 끔찍한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식량 부족 사태 속에서 허기짐을 견디지 못한 일본군들이 동료를 죽여 인육을 먹은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너무 빨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같은 병사들 중 상대적으로 약한 자가 타깃이 되었다. 오쿠자키는 적군들에게서조차 볼 수 없었던 비인간적 참상이라고 여겼다.<br><br></div><div>쇼와 천황이었던 히로히토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대일본제국군 최고 지휘관이자 군 통수권자였다. 패전 이후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와 정치적 거래를 통해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으며 천황제를 존속시킨다는 약속을 받는 대신 천황의 신격을 부인하는 인간선언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천황제를 폐지해야만 했었다. 신격을 부인하는 선언을 해봤자 고대부터 몇 천 년 간 지속되던 천황의 존재의 의미가 국민들에게서 쉬이 바뀔 리 만무하다.&nbsp;<br><br></div><div>천황의 나라 일본 4부 &lt;충성과 반역&gt; 속 ‘나카노 유키아’라는 자는 전쟁 조서가 있었기에 오늘 날의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라 말한다. 천황의 종전 선언은 신의 목소리라고 추앙하며 매년 8월이 되면 생각이 나서 꺼내 듣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부도, 군부도 끝내지 못했던 전쟁이 천황의 덕택으로 끝났다고 여긴다. 정부와 군부 내에서 ‘전쟁을 멈춰야 한다’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의 입장이 반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천황이 판단을 내려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정확히는 멈춰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뒤이어 ‘만세를 위한 태평을 열다’라는 제목의 종전 선언이 나오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br><br></div><div>“나의 육해군 장병이 용감히 싸우고 나의 모든 신하가 열심히 일하고 나의 일 억 신민이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혹한 폭탄을 사용해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였으니…….”<br><br></div><div>이 문장이 어떻게 본인들을 구원해준 신의 목소리일 수 있을까. 애초에 전범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위로부터의 종전 선언을 통해 평화가 찾아왔다는 말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으며 기묘하게 느껴진다.<br><br></div><div>오쿠자키가 황궁 신년 축하식에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파칭코 알을 투척한 ‘천황파칭코사건’은 천황을 향한 거의 최초의 테러라고 한다. 이처럼 오쿠자키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개인 성향이 다소 폭력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 당시 뜻을 함께 하는 이 하나 없이 더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홀로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혁명을 일궈 내기 위해서는 필히 보이고, 끊어야 할 시작점이었을 것이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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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19:57: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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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윤녕후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평 - 오쿠자키 겐조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926624</link>
         <description><![CDATA[<div>&lt;가자가자 신군&gt;은 하라 가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공병대대 소속으로 뉴기니 지역에 파병되어 온갖 고난을 겪고 생환한 '오쿠자키 겐조'의 이야기이다. 그는 부동산 업자 상해치사, 천황을 비방 및 불법 전단물 살포로 13년간 독방에서 복역한 인물이다. 천황을 성토하는 글을 빼곡히 적어 놓은 현수막을 차에 붙이고 도쿄 한복판에서 확성기를 통해 천황을 비판하기도 하고 뉴기니 전선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을 찾아가 당시의 진실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 중, '야마다 키치타로'를 찾아간 장면은 오쿠자키 겐조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가히 경악할 만한 행동을 보여준다. 중병을 앓고 병석에 누워있는 야마다 키치타로에게 오쿠자키 겐조는 '죄를 지은 사람은 편히 살 수가 없다.'든가 '천벌이다.'등의 저주를 아주 평온한 얼굴로 내린다.&nbsp;<br>&nbsp;영상이 진행되는 2시간 내내 오쿠자키 겐조는 아주 활발해 보였다. 차를 몰고 시위를 하고, 경찰과 맞서고, 뉴기니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열변을 토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다. 비슷한 연배의 뉴기니 생존자들, 심지어 그의 아내와 비교해보아도 훨씬 젊어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육신의 노화를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늙지 않았고 더욱더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절박한 행동을 통해 뉴기니에서의 끔찍한 일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br> 물론 오쿠자키 겐조의 폭력적인 방식은 한계가 있다. 그는 이 일에 카메라를 끌어들였고 그가 방문하는 모든 인물들을 재단하듯이 공격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또한 그의 억울함이 결국 해결되지 않았던듯, 영상 말미에는 그가 권총을 발포하여 전 상관의 아들을 저격했다는 신문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의 폭력성을 들어 그 방식을 비판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누가 그의 말을 들어줄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뉴기니에서 벌어진 반인륜적인 행위에 관해 일말이라도 증언을 들을 수 있었나. <br>&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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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3 23:39: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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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49 소유란 -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happycow20</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4961823</link>
         <description><![CDATA[<div>하라 가즈오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lt;가자가자 신군&gt;은 오쿠자키 겐조의 과거를 그린 작품이다. 오쿠자키 겐조는 쇼와 천황인 히로히토에게 파친코 구슬을 쏘는 등의 직접적인 행동들로 천황을 향한 반감을 여과없이 드러낸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듯 천황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오쿠자키 겐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천황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여겼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있는데 천황이라는 사람은 그러한 비극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쿠자키 겐조는 천황이 끝내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비판하다가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br><br>이와 반대로 일본의 천재 작가라 불리던 미시마 유키오는 이전 천황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전통적인 사무라이들의 자결 방식이었던 할복 자살을 택했다. 천황이라는 '절대적 목소리'가 무너졌을 때 할복 자살을 통한 '죽음'은 그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충성이었다.<br><br>이렇듯 한 나라에서 천황을 향한 평가가 상이하게 달라지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작품이었다. 그 나라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그 나라를 제대로 알기 힘들듯이, 한국인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를 온전히 알 수 없었다. 전쟁의 참극은 왜 되풀이되는가? 그러한 전쟁에 대해 천황은 어떤 행동을 보였고 국민들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가? 나였다면 충성을 택했을 것인가, 반역을 택했을 것인가? &lt;가자가자 신군&gt;은 전쟁과 절대적 천황제에 관한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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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1:35: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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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62 김기려 가자가자신군 </title>
         <author>Giryo</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017900</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가자가자 신군<br></strong><br></div><div><br></div><div>&nbsp;오쿠자키 겐조는 뉴기니의 두 병사가 종전 이후 탈영병으로 몰려 총살당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 하고, 하라 가즈오는그런 오쿠자키 겐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내용이다.&nbsp;</div><div><br></div><div>&nbsp;우선 수업을 들으면서 전쟁 영화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전쟁이라는 주제에 대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 영화는 하나하나 다 다른 느낌으로 끔찍하게 다가온 것 같다. 오쿠자키 겐조가 뉴기니에서 먹을 것 없이 극한의 상황에서버텨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쟁의 책임자들을 비난하는 것에 공감이 갔다.&nbsp;</div><div><br></div><div>그리고 두 탈영병 사건의 실체가 허기를 채우기 위함이었음을 알았을 때 너무 끔찍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고밝히기 위해서 배짱있게 행동한 점이 신기했다. &nbsp; 나오는 대사 중에 “나는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진 사람이다”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배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div><div><br></div><div>&nbsp;전쟁의 악영향을 보여주는 것이 오쿠자키 겐조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내용과는 약간 멀어질지도 모르지만, 오쿠자키 겐조의 태도에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기록해야 되는 강박, 그리고 출옥 후 노인의 몸으로 성인용 포르노에 출연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피폐함의 극한까지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div><div><br></div><div>그의 행동이 어찌 보면 용감하기도 하지만 반면 폭력적이기도 하다. 총을 쏘고, 살인을 하려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런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이미 많이 망가졌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만약 두 탈영병이나 전쟁이 아닌 다른 주제에대해 집착하게 됐다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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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4:18: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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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 가자가자 신군 </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057316</link>
         <description><![CDATA[<div>&nbsp;'가자가자 신군'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쿠자키 겐조의 종전 후 두 명의 탈영병 처형 사건에 대해 파헤치는 그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전쟁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과 같이 참혹함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와 달리 오쿠자키 겐조가 파헤치는 사건과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 달랐고 명확히 분리되어 느껴졌다.&nbsp;<br>&nbsp;먼저 36연대 패전 잔류 부대에서 발생한 부하 총살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 참혹함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겐조가 사건 관련자들인 6명의 총살 집행인, 명령을 내렸던 중간자와 상관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전부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겐조가 강한 어조와 태도로 심지어 폭력까지 써가면서 그들에게 물은 끝에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식인 행위를 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탈영이라는 명목하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전쟁 시기 배고픔은 현재의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엄청 났을 것이고 그 외의 모든 사고회로가 지금과는 달리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행위는 잘못이었고 피해자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고 유족들은 그 진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 사실은 탈영이라는 거짓으로 싸여있어서는 안되었던 것이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필요했다. 겐조는 이 사실이 밝혀지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고 본인이 직접 영화 의뢰를 하면서까지 진실이 카메라에 담기게 했다. 뉴기니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은 영화로 접하는 나에게도 끔찍함으로 다가왔고 상상하는 것조차 힘든 정도였다.&nbsp;<br>&nbsp;이렇듯 오쿠자키 겐조는 엄청난 진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렇게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는 그가 진실을 밝혀낸 멋진 사람이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감정보단 당혹감과 혼란스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지옥 같던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고 이후 천황 등 윗사람에게 책임을 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4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전쟁 관련 참상을 파헤치고 다니는 것만 봐서도 전쟁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전쟁으로 인해 여전히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전부가 정당한지에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살아돌아왔기 때문에 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시에는 폭력도 휘두르고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해도 당당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완전히 옳지 못하다는 것은 뉴기니에서의 사건을 파헤치러 다닐 때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관련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중 2명정도와는 피해자 노무라의 가족들과 동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생병이었던 하마구치 마사치이까지만 오쿠자키와 동행하고 그 뒤에는 동행하지 않는다. 총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널리 알려져야하지만 그 중&nbsp; 진실은 유족들이 가장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족들은 그의 방식이 사건을 파헤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는 오쿠자키 겐조와 동행하지 않았다. 유족은 오히려 오쿠자키 겐조가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에 고마워하며 더 함께 다니며 진실을 들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nbsp; 보고 그의 방식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에 유가족들이 그와 함께 다니지 않자 그는 유족 대역까지 쓰며 다닌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대역이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으면서 겐조가 온 마음을 다해 억울한 그들을 위해 사건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랑으로 여길 또 하나의 행동을 위해 그리고 이것이 지금 자신의 요청으로 영화화 되고 있는 영상물에 기록되기 위한 행동, 일종의 쇼인 것도 없지 않아 있다는 개인적인 추측이 계속 들었다.&nbsp;<br> 오쿠자키 겐조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영화 감상자마다 다른 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오쿠자키 겐조가 진실을 파헤친 것 자체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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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6:17: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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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3401 주현우 가자가자신군 </title>
         <author>jhw01049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062379</link>
         <description><![CDATA[<div>전쟁은 인간을 파괴한다. 오쿠자키 겐조는 파괴당한 인간이었다. 오쿠자키의 행동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는 천황을 부상입히고자 시도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자동차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척살해야 한다는 등 온갖 글자들로 뒤덮혀 있으며, 그는 거리에서 자신이 천황을 향해 쇠구슬을 쏘았음을 자랑스럽게 설파한다.&nbsp;<br><br>그러나 다큐멘터리의 후반부로 갈 수록, 그가 그렇게까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했다. 그 속에서 동료의 살인을 목격했고, 그들에 대한 식인을 강요당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오쿠자키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제정신으로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br><br>1945년 종전 직후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두고 등장인물들은 충돌한다. 그 사건을 다시 꺼내려고 하는 자,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묻어버린 자들이 등장한다. 누가 처형을 명령했는가? 누가 총을 쏘았는가? 누가 두 하급자들을 죽였는가? 이 질문의 대답을 얻기 위해 오쿠자키는 파고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는 폭력도 불사되며, 오쿠자키의 가치관에 따르면 이는 정당화된다.&nbsp;<br><br>사건을 파헤치려는 오쿠자키도, 사건을 망각의 영역에 놓으려는 자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들에게 있어 그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진상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대립할 수 밖에 없다.&nbsp;<br><br>오쿠자키는 증언을 얻기 위해 설득과 협박, 폭력의 세가지 방법을 쓴다. 그 중 이중 협박과 폭력이 아닌 설득을 통해 중요한 증언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br><br>한국에도 참여정부 시절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설치되어 과거사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고자 했고,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의 진상을 파헤치려고 한다. 위원회의 활동을 다룬 기사의 일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nbsp;<br><br>"당시 군인이었던 이들의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는 행정안전부와 통신사에 조회를 요청해 받고 있다. 5·18진상규명법에 명시된 조사위의 법적 권한이지만,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고함을 지르며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외출 중일 때 문을 열어준 가족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사관의 명함을 들여다본다. 대부분 자신의 남편 혹은 아버지가 5·18 때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br><br>조사관들이 선 현관문은 그 순간 ‘진실의 문’이 된다. 그 문이 열려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퍼즐 한 조각을 맞출 수 있다. 막히면 다시 시도해야 한다. 온갖 경계와 불신을 뚫고 그들에게 말을 붙이는 건 오롯이 그 순간 현관에 서 있는 조사관들의 몫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명함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갑자기 집 안에서 튀어나온 개에게 물린 적도 있다.&nbsp;<br><br>그래도 다시 한번 명함을 주고, 명함을 받지 않으면 문틈에라도 끼워 넣고 ‘꼭 한번 연락 주시라’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런 다음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던 중 간혹 한밤중에 전화가 오는 경우도 있다. 모르는 번호가 떠서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택배인데요”라는 말에 맥이 탁 풀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br><br>류시연 조사팀원은 이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계엄군들도 광주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걸 정확히 몰라요. 제가 ‘165명(1980년 6월 광주지검 발표)입니다’라고 말하면, 다들 깜짝 놀라서 되물어요. 그렇게 많이 죽었느냐고. 정말 몰랐다고.&nbsp;<br><br>그러니까 이분들도 자신이 광주에서 직접 보고 겪은 장면만 알지 큰 흐름은 모르셨던 거예요. 바꿔 말하면, 이분들은 ‘내가 지금 와서 입을 연들 뭐가 달라지냐’고 하시지만 그 기억 하나하나를 모아보면 큰 그림이 그려지는 거죠.”<br><br>지난 35년 동안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등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허연식 과장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랫동안 공수부대원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다행이다’라고요.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가책 그 이상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nbsp;<br><br>국가는 이 트라우마를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고요. 조사위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이들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라도 귀담아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이 사람들도 억눌린 부담과 증오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화해와 회복적인 정의로 가는 단계인 거죠.”"<br><br>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35</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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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6:32: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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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4 이현정</title>
         <author>hjlee00616</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066062</link>
         <description><![CDATA[<div>지난 주에 이어 일본 전쟁 관련 영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일본에서 천황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가자가자 신군에서 주로 다뤄지는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처럼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으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영상 속에 등장했던 우익 단체 등 천황을 신으로 받들며 추종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헌법이 개정되며 천황은 국정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일본이라는 국가의 상징으로 존재하며 그의 존재 자체가 일본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상 속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일본 내의 TV나 영화관에서는 상영이 되지 않았던 것이 인상깊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되어있는 천황의 존재감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div><div>&nbsp; &nbsp;</div><div>오쿠자키 겐조가 제작진과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라면 틀릴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에는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여러 국내외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을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그 뒤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 어쨌든 전쟁으로 인해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에 대한 사과나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럼에도 여전히 선과 악의 프레임에서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일본의 ‘천황’이란 다른 국가의 군주와는 사뭇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천황이라는 존재를 선과 악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도 역사적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겠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천황이란 일본에서 어떤 존재인지, 천황제는 일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일본 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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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6:41: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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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7 두다혜 &lt;충성과 반역&gt;</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40900</link>
         <description><![CDATA[<div>다큐멘터리 &lt;충성과 반역&gt;에서는 말 그대로 천황에게 충성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의 현대 모습과 그 뿌리가 된 과거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어떤 의문이라고 해야 할지 모순 같은 것을 느꼈는데, 그전에 내가 이해한 것을 먼저 정리해보려고 한다.</div><div>우선 흔히 우익 세력이라고 불리며 천황을 따르는 쪽이 있다. 영상에서 보인 모습에 따르면 이들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곧 반역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며 지금까지도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고 그의 기념관을 건설하는 등, 천황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표한다. (“우리나라가 종전 후 혼란기를 뛰어넘어 오늘날과 같은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노력은 물론이고 나아가 쇼와 천황이 국민 한명 한명을 따뜻하게 보살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기 때문이다.” -쇼와 천황 생일 기념 연설 중-)</div><div>다음으로 우익 세력에게 강력한 비난을 받으며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하는 쪽이 있다. 이들은 쇼와 천황 생일 기념을 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전쟁을 천황의 역사라는 치우친 시선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명백히 존재하는 가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황은 자기의 삶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 -오쿠자키 겐조- “전쟁에는 천황의 역사만 있지 가해의 사실은 담겨 있지 않다.” -니시노 루미코-)</div><div>마지막으로 천황을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받드는 쪽이 있다. 이들 역시 태도적인 면에서 굳이 따지자면 우익 세력에 속하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들은 위의 우익 세력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집단으로 정리해보았다. 이들 중 다수는 전쟁의 종결을 직접 겪은 국민들로 보였다. 이들은 정치권과 묶여 천황을 국가적 아이덴티티로 내세우는 우익 세력과는 달리 천황을 마치 신처럼 받든다. 이는 종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종전 방송은 마치 신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이들은 천황이 전쟁의 시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국민을 생각한 자애로운 천황이 전쟁을 멈추기로 결정했다’는 방송을 듣고 그 ‘신성한’ 결단을 현재까지도 찬양하고 있었다. 즉 이들에게 천황은 전쟁의 종결이라는 당시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전지전능한 평화의 신인 것이다.</div><div>이러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전문가들은 국가주의 혹은 집단주의를 들며 지적했고, (“국가 안에 개인이 있기에 개인은 같은 국가의 국민으로 묶이며, 그렇기에 같은 국가의 국민은 다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모리 요이치-) 결론적으로 현대 일본인들은 천황이 곧 일본 문화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천황이 책임지지 않는 것은 일본인이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에바시 다카시)</div><div>여기까지가 내가 영상을 보고 정리한 것이다. 영상에서는 특히 천황을 비판하는 쪽에서 전쟁에 군인으로 투입되었던 오쿠자키 겐조라는 사람에게 주목하는데, 내가 생각한 의문 역시 이런 흐름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오쿠자키 겐조는 전쟁 당시 뉴기니아 섬에서 병사를 사살하라 명령했던 상관을 찾아가 진상을 규명하려 한다. 그런데 거기서 상관이 한 대답은 “시미즈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군의 명령으로 한 것이었다.”이다. 이 대답이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군부가 독단한 것인지 천황이 내린 명령인지는 알 수 없다. 전쟁 당시에는 군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반대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천황이라는 한 사람에게 충성을 모으기 위해 ‘천황께서 하사한 보급품’, ‘천황께서 하시는 응원’이라며 부풀려졌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든 정치적 계산이든, 어쨌든 천황을 내세웠고 천황 역시 해명하지 않은 이상 전쟁에 대한 비판을 받을 각오 역시 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판을 입에 담기만 해도 반역이 되어버렸으며 천황을 대신하여 직접 생사를 넘나든 사람들과 그 가족은 가족을 죽인 전쟁을 탓하며 순수하게 슬퍼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죽일 거라 외치고 다닌 사람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범인은 없고 잘 죽었다고 칭찬받는 듯한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천황의 사이판 방문 역시 그렇다. 현지에 사는 우익 세력은 천황의 방문에 죽은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가해자에 대해 물어본다면 오쿠자키의 상관이 한 것과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죽으라고 시킨 자가 찾아와서 잘 죽었다는 말을 건네는 것에 기뻐하는 걸까? 내가 너무 부족한 생각으로 이해하려 하다 보니 또 다른 치우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뭐라 단언할 수 없는 의문과 혼란을 가득 느끼게 된 영상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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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9:33: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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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2강서문 </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41920</link>
         <description><![CDATA[<div>보고 나니 찡하고 2차 대전의 일본인들은 괘씸한 데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선택할 수 없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당하고, 오직 흉포한 일왕의 지령에 의해서만 전쟁을 치르게 되는 불쌍한 구석이 있다.위의 어떤 공유가 말했듯이, 다큐멘터리는 마치 '로생몬'처럼 오자키를 따라다니며 인육을 먹었던 진실을 찾고, 하나 둘 교차방문을 통해 마침내 명령한 장관을 찾아내고, 왜 그러냐고 마주 묻는다.<br><br>그리고 그 뒤에 그가 전우의 어머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가려고 했을 때, 그쪽은 정말 나를 헷갈리게 했다(당시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오직 그 혼자만 과거를 직시하며 역사의 아픔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길을 찾으려 했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때, 전우의 어머니도 여권을 만들어 놓았을 때,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오자키가 진실을 찾아낸 결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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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9:36: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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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9 오소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49513</link>
         <description><![CDATA[<div>&nbsp;오쿠자키 겐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독립공병대 제36연대 병사들을 위해 파푸아뉴기니에 주둔한다.전후 오쿠자키 겐조는 평온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투쟁의 길을 걸었다.그는 사람을 죽여 10년간투옥되기도 했고, 새해 천황 조배식에서 새총으로 천황을 쏘기도 했으며, 이후 2차 대전 중 천황의 죄를 극렬하고 끈질기게 추궁하기도 했다.한편 오사키는 종전 23일째인 이날 36연대에서 병사 2명이 총살당한 일본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그이면에는 잔혹한 피비린내와 섬뜩한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그는 자신의 내면도덕적 부름에 책임을 지고 살아날 것을 결심한 병사가 죄를 인정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진실을 인정한다.</div><div>&nbsp;사회적으로 극단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감각하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알게 됐다.그는 가장 극단적인 타락방식으로 최후의 반항을 했다.일생을 20년 넘게 감옥에서 살아도 끝까지 싸운 그의 불꽃을 꺾을 수는 없었다."모두가 전사했고, 운명이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것은 진실을 고백할 사명이 있는 것이지요."</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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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09:49: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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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195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60139</link>
         <description><![CDATA[<div>다큐멘터리는 영화의 허구적인 줄거리보다 일본 노병들이 어떻게 전쟁의 기억을 인양했는지를 더 사실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오쿠자키 겐조를 주인공으로 하여 오쿠자키 겐조 항쟁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일본의 역사를 성찰하고 군국체제를 비판한다. 다큐멘터리의 초반부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다른 전쟁터에서 2차 세계 대전 퇴역 참전용사로서의 오쿠자키 겐조의 "눈부신" 전적을 보여준다.<br><br>-1956년에 불량부동산 업자를 살해하여 10년을 선고받았다.<br>-1969년에 천황에게 탄자을 투사하여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br>-1972년과 1976년에 천황에 대한 불경스러운 언행을 퍼뜨렸다.<br>-1981년, 다나카 가쿠에이 살인 계획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br><br><br>명백히 이것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다큐멘터리이다. 전쟁이 끝난 후 며칠 동안 일본 군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총살하고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오쿠자키 겐조가 밝혀내려는 과정을 둘러싸고 있다.2년의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참전 노병들은 오자쿠키 겐조의 폭력에 의해 마침내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두 군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최종 답은 내놓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인육을 반대해 무참히 살해됐거나, 모두가 먹이로 삼았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전쟁이 끝난 후의 처형이란 살인과 박해에 불과하다.<br><br><br>박해를 경험했거나 겪어본 사람들은 그 박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있다.그들이 피하고 발뺌하는 것은&nbsp; 2차 세계 대전에 직면한 전후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오쿠자키 겐조의 끊임없는 추궁은 과거사를 기피하는 일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것 같기도 하다.<br>오쿠자키 겐조는 항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지만, 적어도 전쟁의 부정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멍청하고 심지어 사실을 왜곡하려는 일본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에 비하면, 적어도 진실하고 용감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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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0:11:16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60139</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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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05 황목자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61029</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 주에는 '가자가자, 신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나는 오쿠자키 겐조가 독한 사람이자 기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일본에서 전 국민이 거의 천황을 숭배하는 시대다. 그는 새총으로 천황을 향해 작은 강철 구슬을 여러 개 쏘았다.그리고 감히 공공장소에서 천황을 비난한다. 그가 천황을 습격한 이유는 오쿠자키 겐조가 전후에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생활고를 군 입대 경험 탓으로 돌렸다.그래서 천황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이다.<br>&nbsp; &nbsp; &nbsp; 1982년이 되자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이 전쟁에서 복무한 제36연대에서 2명의 병사가 무고하게 살해당한 것을 떠올렸다. 오쿠자키 겐조는 옛 사람을 찾아다니고 감독을 데려가 진실을 찍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가자가자, 신군'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유래다. 다큐멘터리에서 전쟁범죄를 이고 나온 고참병들은 오쿠자키 겐조의 질문에 계속 변명만 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에 대한 사과조차 거부했다. 오쿠자키 겐조는 "천황이야말로 최대의 전쟁범죄자이지만 천황은 면제를 받았다"는 말을 잘했다. 전후 천황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천황은 전쟁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br>&nbsp; &nbsp; &nbsp; 제2차 세계대전에는 일본의 제도인—-천황제와 관련이 깊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열광했던 군국주의자들은 천황의 인민 마음속 지위를 이용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천황을 미친 듯이 숭배했다. 그들은 천황을 위해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그들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극중 인육을 먹는 장면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그들은 현지 주민을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전우조차도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오쿠자키 겐조가 그들에게 질문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회개하는 사람이 없다. 비록 오쿠자키 겐조가 폭력으로 몰아붙여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지만.극단적이지만 진실을 위한 그의 정신은 존경할 만하다.<br>&nbsp; &nbsp; &nbsp; &nbsp;다큐멘터리 말 뉴기니의 기록 유실은 아쉽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쟁에 대한 더 많은 진실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전쟁이 주변국에 끼친 재해를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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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0:13:06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61029</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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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8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62812</link>
         <description><![CDATA[<div>원래&nbsp; 오쿠자키 겐조는 1920년대 태어난 일본인으로 평범한 소년이었다.그러나 곧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nbsp; 오쿠자키 겐조는 군에 입대해 파푸아뉴기니에 파병됐다.매일 총탄과 굶주림, 말라리아 등에 시달리고 호주군의 강력한 화력에 눌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먹을 것도 부족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이었다.이곳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사상자가 가장 컸던 전쟁터 중 하나였다.파견된 일본 병사의 90% 이상이 섬멸됐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오쿠자키 겐조가 소속된 천명군대도 그를 포함해 30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귀국 후 사업 등을 해봤지만 좀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그는 충동적인 사람으로 충동적일 때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토지 업자를 살해하여 징역 10년을 선고받기도 했다.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며 당시 일왕은 전쟁으로 인한 모든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많은 일을 했다.새총으로 천황을 쏴 1년 반 동안 처형당하는 식이다.심지어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를 암살하겠다고까지 했다.다큐멘터리에서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황군'과 대립하는 이름인 '신군'을 지어 반전 문구가 가득 적힌 차를 몰고 당사자를 찾아다닌다.일왕의 항복 선언 후 23일 만에 소대장이 6명의 하사관에게 명령해 병사 2명을 처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당시 전쟁은 이미 끝났고, 군에서는 누구도 병사를 처단할 권한이 없었다.계속된 인터뷰에서는 보급로가 끊겨 식량이 부족하자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자국민이 부족할 때 일본군이 일본군인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다른 사람들도 나타나 병사 처형이 탈영병 때문이라는 것과 자국민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르다.그 이면에는 반드시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그가 전 중사에게 끈질기게 매달리자 음식을 훔친 병사 한 명을 직접 죽인 뒤 시신을 먹어치웠다고 말했다.방문 과정에서 오쿠자키 겐조의 욱하는 모습도 보였다.공손하게 선물을 챙겨 찾아갔던 그는 몇 번의 부탁에도 아픈 노인이었음에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외치며 그대로 넘어뜨리고 주먹다짐을 한다.두 병사의 사망 원인에 대한 최종 해답은 나오지 않은 채 인육을 반대하다 참혹하게 살해당했을 수도, 먹이로 이용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 내비쳤다.그러나&nbsp; 전쟁이 끝난 뒤의 처형은 모살이라고 생각에 불과했다.오쿠자키 겐조는 죽은 때까지 사실도 똑똑히 알아내지 않았다.저는끝까지 결과를 알았는지 안 알았는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이 정신이 소중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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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0:16: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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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55 서혜연 &lt;가자 가자 신군&gt;</title>
         <author>haibara46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193443</link>
         <description><![CDATA[<div>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수많은 청년을 전장으로 보냈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의미 없을지 모를 죽음은 천황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lt;가자 가자 신군&gt;의 진행의 중심이 되는 오쿠자키 겐조 또한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 파병된 군인으로 어쩌면 당시에는 천황의 충실한 군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전쟁의 참혹함과 그에 대한 천황의 책임에 대한 시위를 진행한다. 여기서 의외였던 것은 그는 그 진상과 책임을 알리기 위해 상대에게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전쟁 당시 천황을 위해 신의 이름 아래 목숨을 바쳤던 이들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상을 밝히기 위한 그의 행위는 필요하고 높이 평가하겠지만, 그 과정에 있는 행위마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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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21: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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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02752</link>
         <description><![CDATA[<div>처음엔 오쿠자키 겐조가 정말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전우들 죽음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가 나온 폭행과 강요 등 격렬한 행동에 대해서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어리숙한 척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방관자로서도 조급해지며 폭력을 휘두르는 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오쿠자키 겐조가 사과하며 구급차까지 불러줬지만 반성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않았다. 나는 그가 폭행을 통해서 그들이 진실을 말하게 할 수 있으면 계속 하겠다는 말에 인상적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진짜 진상을 밝히고 싶었다는 결심도 보여주었다.</div><div>&nbsp;</div><div>나는 오쿠자키 겐조가 전우 시마모토의 어머니를 찾아간 장면이 좋다. 여기서 오쿠자키가 상당히 부드럽고 다른 당면과 되게 다르다. 심지어 어머니께 뉴기니로 데려가 아들을 찾겠다고 약속해주고 여권까지 만들었다. 마지막에 어머니는 뉴기니에 가서 아들의 장지를 알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적어도 임종 직전에 오쿠자키를 만나서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 장면을 보고 오자키의 용맹과 폭력은 어쩌면 자신을 무죄로 생각하는 뻔뻔한 사람들을 겨냥한 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iv>&nbsp;</div><div>&lt;가자가자 신군&gt;의 결말은 그렇게 훈훈하지 않아, 오자키 겐조는 대장 고 기요미쓰의 아들을 살상하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영화는 끝났지만 오자키 겐조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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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40: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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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0 시문옥 가자가자 신군 가상문</title>
         <author>moonok</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04264</link>
         <description><![CDATA[<div>우선 지난 학기가 읽었던 &lt;국화와 칼&gt;이라는 책에서 일본인은 천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렇다면 일본이 천황을 이렇게 존경하는 곳에서도 오쿠자키의 행동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예를 들어&nbsp; 부동산업자를 살인하고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지는 이미 그를 감옥에서 10여 년을 보내게 하였다.하지만 그는 신의 뜻이라 믿고 있으니 또 천황을 비난하는 문구가 붙은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닌 행동을 했다.<br>오쿠자키 겐조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의 일원이며 전쟁 말기는 먹이가 없는 극한 상황을 견뎌낸 몇 안 되는 군인 중 하나였다.나는 그가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두 병사를 탈영병으로 삼아 총살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그는 총살당한 두 병사의 형제와 함께 사형에 연루된 옛 동료와 상관을 찾아가 직설적으로 책임을 묻는다.실제로 오쿠자키 겐조가 두 병사의 죽음을 조사할 때 그는 의식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떠안으려 한다.’나는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진 사람이다’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배짱을 과시하기 위한 대표적인 행동이다.그는 모든 결과를 무릅쓰고 오로지 사건의 진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의연하게 나섰다.그런데 어떻게 보면 너무 생각 없이 하는 거 아닌가?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진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느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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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43: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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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143 김준형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joonjoon082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07763</link>
         <description><![CDATA[<div>『가자가자, 신군.』은 전쟁 중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행동하는 오쿠자키 켄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 오쿠자키라는 인물의 행동은 숭고하면서도 동시에 기괴하다. 폭력에 희생된 인물들을 위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 기도까지 하는 한편 그가 다른 참전 군인들 앞에서 말한 ‘천벌’이니 ‘신’이니 ‘내가 당신보다 인간답다’니 하는 발언 등은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한지 의문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쿠자키의 행동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이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참전 군인들의 발언이나 행동이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공통적인 행동을 보였다. 전쟁 당시의 일을 얘기해 달라는 유족들이나 오쿠자키의 말에 이들은 대체로 언급을 피하거나,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거나, 오쿠자키에게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저마다의 사고방식이 있는 법이야’라고 말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것이 전쟁에 휘말린 ‘보통사람’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들이 말한 ‘저마다의 사고방식’ 역시 긍정되어야 할까?</div><div><br>오쿠자키의 평화를 지향하고 전쟁을 기억함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광적인 전쟁 애호가가 아닌 이상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참전 군인들이 말한 저마다의 사고방식에 해당하는 생각은 어떠할까. 저마다 저의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묻어두는 것, 자신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는 것, 혹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가령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추도하는 것에 해당한다. 저의가 어떠하든 간에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피하는 행위이다. 오쿠자키도 다른 참전 군인들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생각을 덮어놓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거나 살아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살기 위해서 혹은 그런 분위기라서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원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를 면해야 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석연찮다. 이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하면 보다 상급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휘말려든 셈이기에 역시 죄를 묻지 않아야 한다. 이들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다 하면 시대적 요구와 국익의 증진, 국제 사회에서의 생존 경쟁에 휘말린 각국의 수뇌부도 죄를 묻지 않음이 타당할 것이다. 다소 거친 논의이며 비약이 심한 생각이긴 하지만, 개인의 책임과 사회의 책임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인지 또 정말로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은 누군가가 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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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51: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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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9 (가자가자신군)</title>
         <author>songkim158a</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10760</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에 "가자가자신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수업을 통해 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오쿠자키 겐조"라는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nbsp;<br><br>당시 일본에서 천황이라 함은 말 그대로, 단어 그대로 신이라는 뜻이다. 마치 신처럼 모든 국민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한 몸 다 바쳐 전장에 나아간 많은 청년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당시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쿠자키 겐조가 한 행동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업자를 살인하고 파침코 알을 새총으로 천황에서 쏘는 행동은 진짜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걸 일본 역사와 수업을 들으면서 알고 있지만 그저 미친 사람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전쟁범죄를 이고 나온 고참 병사들이 피해자 가족에 대한 사과도 하지 않고 그저 변명한 내놓는 것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스스럼없이 행사하기도 하며 무서우면선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br><br>오쿠자키 겐조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진행하고, 왜곡된 진실과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알리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가 진상 규명을 하기 위해 앞장서서 한 의도는 높이 평가될 수 있겠지만, 결코 폭력을 휘둘르는 것은 그가 몸 담구고 후회하는 전장의 참상과 결코 다르지 않는 방식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br>&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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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57: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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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9215472 윤건희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jkheeyoo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11588</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div><div>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자가자신군) 다큐멘터리를 감상을 했다.</div><div>&nbsp; &nbsp;</div><div>이걸 보고 난 뒤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입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삼깨닫게되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서 책임을 질때도 부분적 책임만 지고 결국 큰 책임을 지지않았고 일본인들 한테 물어보면 일본에서 천황은 “ 전통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 존재” 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의 다수는 아직 “천황의 존재가 필요하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국민의 80프로이상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천황이 존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천황의 입지를 부정하고 스스로 인간이라고 선언해 버린 천황에 대해 오쿠자키는 깊은 생각을 하게된다. 천황이 이름을 건 군대로 싸웠고 옆에서 동료가 죽어도 인육을 먹게 되어도 구원해 줄것이라고 믿어왔다. 근데 천황은 왜 이제 회피하는가? 라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오자카지는 천황이 자신들과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속인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경멸해 한다.<br><br>천황에게 파칭코알을 쏘는 행동 부동산업자를 살인하는 행동은 일본 정서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행동이고 남들에게 안좋은 시선을 받게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그자세에는 마땅히 존중할수 밖에없는거 같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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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59: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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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20110283 정붕거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11728</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이번 주에는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봤다.이 다큐멘터리는 과장된 배경음악은 없지만 그 어떤 수단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2차 대전에서 돌아온 병사 오쿠자키 겐조가 전우의 가족을 위해 진실을 찾는 일을 다큐멘터리화한 것이다.오쿠자키 겐조가 총살당한 병사 가족을 이끌고 사건 진상을 캐러 갔을 때 새총으로 천황을 습격하고 2차대전 때 천황이 저지른 죄가 적힌 차를 몰았다는 언급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천황이 저지른 최행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오쿠자키 겐조도 이 일로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그러나 출소 후에도 총살당한 병사 가족에게 진실을 알 권리를 주기 위해 재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오쿠자키 겐조는 그 시절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마침내 그해 그 두 병사를 살해한 진상을 발견했다.사건의 진실은 뜻밖에도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계급이 가장 낮은 병사 두 명을 살해한 것이다.</strong><br>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는 매우 놀랐다.우리 군인들은 항일전쟁 때 식량이 없어도 나무껍질을 먹고 혁대를 끓여 굶어죽더라도 절대 사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런데 전우의 살을 먹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인육을 흑돼지 백돼지에 비유한다.또 이들이 먹어치운 병사의 가족들 앞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피해자 가족에 대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오쿠자키 겐조는 카메라 앞에서 모두가 전사했고 운명이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진실을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했다.카메라 앞에서 오자키 겐조는 이 재향군인들에게 강온하고 폭력적인 태도로 맞서 전쟁 때 더러운 일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한다.다큐멘터리에 오쿠자키 겐조는 극단적인 성격의 인상을 주지만, 그런 한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이 평화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오쿠자키 겐조는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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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1:59: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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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7110271 김영 가자가자 신군 – 전쟁은 무엇인가.</title>
         <author>rladud010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12285</link>
         <description><![CDATA[<div>다큐멘터리 ‘가자가자 신군’의 주된 내용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아나키스트적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두 병사의 죽음에 관한 진상과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해 생존자들을 찾고 돌아다닌 기록이다. 해당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나키스트, 괴짜, 범죄자, 복수광 그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오쿠자키 겐조의 정의는 ‘일본의 전쟁 결과물’이다.&nbsp;</div><div>2차대전의 일본군이 참여했던 수많은 전역 중에서 그 잔혹함의 우열을 따질 수 없겠지만, 적어도 문명이 존재하는 곳이었던 중국 전역과는 달리 남태평양 전역은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오로지 정글만이 존재하는 문명 밖의 세상에서 적과 싸워야 하는 곳이었다. 이는 일본군, 미군 모두에게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나마 미군의 경우 우세한 해군 전력과 막강한 보급 능력을 통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전투가 가능했던 반면 일본군의 경우 해군의 패배 및 해상 포위로 인한 보급 불가 속에서 말라 죽어가는 가는 경우가 흔했다. 문명에서 수만 킬로미터 밖의 야생, 경직된 조직체계, 시시각각 들이쳐오는 적습. 인간성이 상실되기 딱 좋은 극단적인 환경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정상인으로써 오쿠자키 겐조는 이미 뉴기니에서 죽고 가자가자 신군 속의 오쿠자키 겐조가 생겨났을 것이라 볼 수 있다.&nbsp;</div><div>다큐멘터리의 주된 내용인 두 병사의 처형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쟁이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전쟁은 이역만리에서 죽고도 시체 조차 고향에 묻히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은 사인 死因도 불분명하게 죽는 것이다. 전쟁은 배고파 사람고기마저 먹는 것이다. 전쟁은 살아 돌아와도 광인이 되거나 광인에게 쫓기는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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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2:00: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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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4 충성과 반역 감상문</title>
         <author>yoonsoo246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223167</link>
         <description><![CDATA[<div>1970년,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다. 자위대의 총궐기를 요구하고 자위대는 총궐기를 요구하고 자위대는 천황을 위한 군대여야 한다며, 일본에서 주목을 받고 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 자살을 강행한 것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테노카이’ 라는 우익 청년 결사단체를 결성했고 천황제의 부활, 그것을 위해서는 쿠테타도 해야한다고 믿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천황에게 바치는 충성이었다. 또 22살 때 필리핀 전쟁터로 나가 52살이 되어서야 명령을 받들어 귀환한 병사 오노다 히로오의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30여년을 밀림 오지에 살면서 전쟁이 끝났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천황의 명령, 상관의 들어오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밀림속에서 혼자 남아있었다는, 믿기지않은 이야기가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궜다. 특이한 것은 그 어느 언론에서도 그의 밀림 속 생활은 뒤로한 채 그의 살아있는 군인정신에 더 관심이 기울여졌다는 점이다.<br><br></div><div>&nbsp;또, 이에 대비되는 또 한 명의 전쟁 희생자 오쿠자키 겐조가 있다. 그는 천황에게 고무 새총 네발을 날린 최초의 테러자이다. 그 후에도 히로히토의 생일날, 전쟁의 책임을 묻는 발언을 하다 수년간 복역을 하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천황의 전범에 대한 일기를 썼다.&nbsp;<br><br></div><div>일본의 중심은 천황이고 그 중심을 나눠서 확연히 구분되는 좌파와 우파가 존재한다. ‘충성과 반역을’을 시청하면서 천황이라는 한줄기 아래 두갈래로 나뉘는 독특한 국민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이중성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천황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보이다가 전쟁이 끝나고 포로가 되자 연합군의 편에 서서 일본의 기지를 연합군에게 일러주는 등 연합군의 작전에 동참하는 일본인들. 일본의 분열된 국민성과 국화와 칼 에서 언급되는 일본인들의 이중성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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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2:18: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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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7113059 일본학과 최재혁 가자가자신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311454</link>
         <description><![CDATA[<div>가자가자 신군에서의 주인공인 '오쿠자와 겐조'는 전쟁의 책임과 사죄를 천황에게 요구한 인물이다. 여기서 천황이라는 지위가 일본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인지 짐작이 가는 자료였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라 하면 필연적으로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거기에 있어 죽어버린 사람들은.... 정말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 각 개체들이 지니고 있던 인생사와 추억들이 포탄 한방, 총 한방으로 무참히 그리고 단숨에 없어진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이 군대라는 것을 조직하고 정신을 개조하면 개인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설령 내가 아무리 자유롭고 집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저항을 한다고 생각해도 과연? 내가 그것에 있어서 진정 제대로 사고할수 있을까? 전쟁은 멀리서봐도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욱 더 비극적이고 처참하고 잔인하다. 그리고 비단 각각의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파장과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아들과 나의 친구.. 그리고 나의 조카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nbsp;<br>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주목받고 있다. 나는 이 전쟁에 있어서 러시아를 비판하고 싶다. 서방국가들이 러시아를 위협한다고 러시아는 주장하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지금의 모습에는 소련의 옛 영광 즉 찬란했던 과거의 영토를 수복하고 싶어하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우크라이나의 병사들은 열세한 상황속에서( 물론 미국과 서방국가들한테서 지원을 받고있지만)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국가존립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러시아의 병사들 또한 푸틴의 꼭두각시로서 '군대'의 조직아래하에서 전쟁터로 몰리는 것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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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4:39: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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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lt;가자가자 신군&gt;을 통해서 볼 수 있는 &#39;도구적 인간&#39;과 &#39;주체적 인간&#39; 사이의 윤리적 판단 능력과 그에 관한 가능성에 대하여</title>
         <author>tinytedkim</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5320172</link>
         <description><![CDATA[<div><em><sup>2016110279 일어일문 김하선</sup></em></div><div><br></div><div>&nbsp;&lt;가자가자 신군&gt;이란 작품은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은 무엇이 다를까? 다큐멘터리는 현실적이고 픽션은 비현실적이라는 것? 역설적이게도 픽션은 누구보다 현실을 비추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짙다. 반대로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지만 필름 안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오히려 창작성을 띠고 의도성이 짙다는 것이다. 그렇다, 가자가자 신군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그저 현상을 포착하기만 한 카메라 필름이 아니라 감독이 큰 소리로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div><div>&nbsp; &nbsp;</div><div>&nbsp;오쿠자키라는 인물은 특이하게 보인다. 그야말로 수오지심의 화신이다. 폭력적이면서 정의롭다. 언뜻 들으면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관계로 보인다. 야수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정의로울 수 있을까? 이런 성격이다 보니 아무래도 처음 오쿠자키라는 인물을 볼 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쿠자키는 나라도 필요 없다고 하고 가정도 필요 없다고 한다. 정중히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을 불러달라는 피해자의 말에 자기가 직접 자기를 잡기 위한 경찰을 부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보면 볼수록 그가 밉지 않다. 오히려 그가 정당한 것 같은 강렬한 설득마저 당하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설득당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람을 패는 건달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쿠자키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div><div>&nbsp; &nbsp;</div><div>&nbsp;먼저 우리가 왜 오쿠자키에 거부감을 느꼈는지 알아봐야 한다. 왜 상대를 때려눕혀서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는 오쿠자키가 왜 불편할까?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옳지 않다.’라는 보편적 도덕·윤리 개념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명제가 보편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명제는 그리 튼튼한 명제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폭력이란 게 이제 저 멀리 있는 존재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폭력에 대한 욕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만약 폭력이 절대적인 악이라면, 진정 반박할 여지 없이 나쁜 것이라면, 격투기는 왜 있으며 웹툰 ‘비질란테’ 나 영화 ‘배트맨’ 같은 자경단의 정의를 그리는 작품은 왜 있고, 애니메이션 ‘원펀맨’ 같은 폭력을 통해 모든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하는 작품은 도대체가 왜 소비되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역사를 보아라.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장수들은 영웅이고 시민을 5명 죽인 미치광이는 연쇄살인마다. 누구는 영웅이고 누구는 살인마인가? 어디까지가 부당한 폭력이고 어디까지가 정의로운 폭력일까? 혹은 애초에 폭력은 정의로울 수 있는 가능성 조차 없는가? 폭력을 무비판적으로 부정하기는 쉽겠지만, 인간 안에 폭력에 대한 욕망이 숨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안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협의했다.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이를 해석할 때, 우리는 폭력을 허용할 시, 우리도 누군가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이를 윤리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폭력을 제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을 제한 하자니 우리는 어떤 폭력은 받아들이고 어떤 폭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폭력이 무엇인지 다시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름대로 폭력의 범위를 정의해 보자.&nbsp;<br>&nbsp; &nbsp;</div><div>&nbsp;자, 나는 지금부터 폭력을 한 번 행사하고자 한다. 사고 실험을 한 번 해보도록 하자. 내가 오른손을 높게 들어 당신을 주먹으로 때렸다면 나는 폭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내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고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주먹으로 때리지 않고 발로 때렸다면? 이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를 시켜서 당신을 때렸다면? 이것도 폭력인가? 이건 애매할 수도 있겠다. 내가 직접 때린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명령을 수행한 사람만 책임이 있을까? 본인의 폭력 의지는 없더라도 ‘직접 때린 사람’을 가해자로 판단해야 할까? 그런데 애초에 내가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가 당신을 때릴 일이 없지 않은가? 여러모로 복잡하니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사람 말고 도구를 생각해 보자. 내가 글러브를 끼고 당신을 때렸다면 내가 때린 것인가? 아니면 글러브가 당신을 때린 것인가? 별 시답지 않은 소리라고 느껴지는가? 당연히 내가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글러브가 아니라 내가 때린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범위를 약간 넓혀 보자. 내가 로봇을 조종해서 당신에게 로봇이 펀치를 때리게 버튼을 눌렀다면 이건 내가 때린 것인가? 로봇이 때린 것인가? 물론 이것도 내가 때린 것일 것이다. 로봇은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나는 로봇과 동일시된다. 즉, 로봇은 글러브랑 같은 위치를 가지게 된다. 이때, 글로브는 내 주먹의 확장이 되는 것이고 로봇은 나의 팔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글러브로 때리든 야구 배트로 때리든 로봇을 조종해서 때리든 다 이것은 나의 팔의 확장이거나 발의 확장이다. 도구라는 것은 애초의 나의 신체 확장이다. 도끼는 손톱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명령한 사람이 당신을 때렸다면 이것은 내 신체의 확장일까?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명령을 당하더라도 결국 선택하는 개인의 의지가 있다고 가정할 때, 명령자와 명령수행자는 그저 주인과 도구의 관계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판단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연 도구가 될 수 있는가?<br><br>&nbsp;그런데 또 큰 문제가 있다. 도구와 신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구와 신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때, 점차 내 5감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나의 신체의 확장이라는 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직접 야구 배트로 누군가를 때리는 것과 총으로 멀리서 누군가를 쏘는 것은 다를 것이다. 도구와 내 몸이 멀어지고 도구를 사용하는 감각 데이터를 포착하기 어려워질 때, 점차 도구를 사용하는 대상에 대한 피해의식과 죄책감이 사그라든다. 내가 나의 신체를 도구를 통해서 확장할 때, 내 손으로 직접 목을 졸라서 토끼를 죽이는 것과 칼로 찔러 죽이는 것, 도끼로 내려치는 것, 화살을 쏘아 죽이는 것, 총을 쏘아 죽이는 것, 폭탄을 던지는 것, 그리고 비행기 위에서 융단 폭격을 날리는 것, 사령실에서 폭탄 스위치를 누르는 것,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스위치를 누르라고 명령하는 것, 개인실에서 폭탄 스위치를 누르는 것에 대한 허가를 내려달라고 해서 도장을 찍어주는 것. 후로 가면 갈수록 개인은 도구와 멀어져간다. 나는 점차 토끼가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토끼의 괴로움과 멀어져 간다. 점차 토끼는 물론, 주변에 불타오를 동식물과 수많은 고통이 멀어져만 간다. 내가 신체를 확장하면 할수록,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폭력에 대한 죄책감과 공감능력은 줄어들어 간다. 하지만 처음에 보았듯이 내가 글러브로 때리나, 로봇을 조종해서 때리나, 둘 다 내가 폭력을 행사한 것에 큰 차이는 없다. 그런데 대상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무언가 희미해져 간다. 폭력의 책임은 어디서부터인가? 도대체 어느 수준까지 책임져야 하고 어느 순간까지가 폭력의 주체일까?</div><div>&nbsp; &nbsp;</div><div>&nbsp;이러한 폭력에 대한 주체와 그 책임에 대한 의문이 &lt;가자가자 신군&gt;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 개인이 천황의 도구가 될 때, 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천황의 신체 확장에 이용될 뿐인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천황과는 별개로 나 스스로 광기의 폭풍에 사로잡혀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리고 이것들을 제대로 판단해야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은 그저 도구일 수 있을까? 혹은 그저 주체적일 수 있을까? 인간의 도구성에 대해서는 &lt;군인칙유&gt;에서 잘 볼 수 있다.&nbsp;</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blockquote><strong>わが国の軍隊は代々天皇の統率したまう所にある。</strong><br>&nbsp; &nbsp;<br> 朕は汝(なんじ)ら軍人の大元帥である。朕は汝らを手足と頼み、汝らは朕を頭首とも仰いで、その関係は特に深くなく てはならぬ。 朕が国家を保護し、天の恵みに応じ祖先の恩に報いることができるのも、 汝ら軍人が職分を尽くすか否かによる。 <br>国の威信にかげりがあれば、汝らは朕と憂いを共にせよ。<br>わが武威が発揚し栄光に輝くなら、朕と汝らは誉れをともにすべし。<br>汝らがみな職分を守り、朕と心を一つにし、国家の防衛に力を尽くすなら、<br>我が国の民は永く太平を享受し、我が国の威信は大いに世界に輝くであろう。<br>朕の汝ら軍人への期待は、かくも大きい。<br>&nbsp; &nbsp;<br><strong>우리 국가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의 통솔에 따라 왔다.</strong><br> <br>나는 너희 군인들의 대원수다. 짐은 너희를 손발 삼으며, 너희는 짐을 머리와 목처럼 받들며, 그 관계는 특히 깊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짐이 국가를 보호하고, 하늘의 뜻에 응하여 선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도 너희가 군인의 본분을 다하느냐 아니냐에 있도다.<br><em>나라의 위신에 모자람이 있다면,</em> 너희는 근심과 걱정을 함께&nbsp; 하라. 내 무력과 위엄이 발휘하여 영광스럽게 빛난다면 너희는 명예를 함께 누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짐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가의 방위에 힘을 다한다면,<br>우리의 백성들은 영원히 태평할 것이며 우리의 국가적 위신은 세상을 향해 빛날 것이니.<br>짐이 너희 군인에게 거는 기대는 이리도 크다.<br><br><a href="https://toboe.onenote.co.jp/wp-content/uploads/2021/02/%E8%BB%8D%E4%BA%BA%E5%8B%85%E8%AB%AD.pdf">https://toboe.onenote.co.jp/wp-content/uploads/2021/02/%E8%BB%8D%E4%BA%BA%E5%8B%85%E8%AB%AD.pdf</a></blockquote><div><br></div><div>&nbsp;과연 인간은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독일 나치 장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 역시 본인은 상관과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한다. 600만 가까이 홀로코스트를 통해 죽었는데 이런 행위를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돋지 않는가? 우리는 언제나 악인이 될 수 있으며, 강력한 권위 앞에선 판단능력을 상실한 인형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실험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밀그램의 복종실험’이 있다. 만약 권위자의 명령이라면 누구나 복종적으로 된다는 인간의 복종에 관한 실험이다. 이 실험은 누구나 명령이라면 아무런 일면식 없는 사람한테 전기충격을 서슴없이 주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은 인간에 관해 냉소적인 사람들이 만인의 투쟁상태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지한지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 실험이다. 하지만 실상은 스탠리 밀그램이 애초에 결론을 정해놓고 인간의 성질을 부정적으로 상정하고 잔인한 인간을 보여주고 싶어서 실행한 실험이었기에 실험 분위기도 강압적이었고 실험 결과도 잔인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실험 결과를 조작하려고 한 흔적도 보인다. 그리고 사실 타인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에 거부한 실험대상자들이 훨씬 많았다는 결과가 후에 밝혀졌다. 하지만 비슷한 실험을 추가로 진행했을 때, 인간이 권위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인간 내면이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이성과 선한 마음이 먼저인지는 너무 오랜 기간 다뤄진 내용이다. 쉽게 정답이 나오는 질문도 아니며 쉽사리 말해도 되는 내용도 아니다.<br>&nbsp; &nbsp;</div><div>&nbsp;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인간 내면의 상냥함과 양심을 믿고 싶다. 오쿠자키가 신문한 5명 중에 그 누구도 죄책감 없이 당당한 인간은 없었다. 그들은 좋던 나쁘던 정말 많은 정당화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부하를 쐈고 죽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는데 있다. 누구는 헛발을 쐈다던가, 자기는 구경만 했다던가, 나는 빗겨 쐈다고 하는 사람 투성이다. 사살 당한 사람은 있는데 쏜 사람은 없는 기괴한 현장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을까? 그들 또한 당시에는 광기와 권위에 굴복했을지언정 자신의 행위가 편안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본인들의 태도를 통해서 증명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에 오쿠자키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 했으나 사실 오쿠자키는 그들보다 오히려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오쿠자키는 수단으로 폭력을 실행할지언정 자신의 언행은 일치하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고, 전쟁 책임에 대하여, 천황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잘못된 일에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는 그는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다. 하지만 심문대상들은 다르다. 자신이 부하를 죽이고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나, 인육을 먹는 것은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끝까지 숨기려고 하고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 이들은 모순적이고 복잡하다. 삶의 의지와 행동이 일치되지 않고 세상과 자신과의 화해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복잡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가로 살고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나, 친일파로 살아서 죽을 때까지 친일하면서 산 사람들은 의지와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을 한 사람, 친일 성향이었는데 독립운동가로 갈아탄 사람. 이들은 복잡하다. 나는 이런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순적 인간들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강인하고 우직하기만 하기도 힘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비겁하고 이기적이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의식 깊숙한 곳에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순성 안에서 빛나는 이성과 선의지를 따라가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br><br>&nbsp;인간이 도구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희미한 빛일지라도 그것을 찾아내는 세밀함에 있다. 정답은 내 안에 있다. 그릇된 일을 할 때, 분명 제일 먼저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나 자신이다. 당신이 당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다른 곳에 나의 판단기준을 삼지 말고 나 자신을 등불 삼아 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자도 실수해서 잘못된 길을 밟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빛을 찾아 나아갈 힘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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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4:52: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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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 조규상 [가자가자 신군]</title>
         <author>2018110283</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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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가자가자 신군]은 하라 가즈오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2차대전 시기의 일본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주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어지는 내용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서술해보고자 한다.<br>&nbsp;이 다큐멘터리는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천황에게 파친코 구슬을 던진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 행위가 중요하게 고려되는 이유는, 이 당시의 일본인들이 천황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이 굉장히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오쿠자키의 행동은 '미치광이'의 행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후 인간 선언을 하며 이미지 수습을 하던 천황을 보며 오쿠자키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겪어야 했던 비인륜적인 행동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br>&nbsp;오쿠자키는 또한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인육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감독을 찾아가 자신이 그 상관을 살해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달라 요청하기까지 한다. 하라 가즈오 감독과 오쿠자키가 이러한 영상에서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br> 2차 대전 시기의 일본 사회의 진행 방향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양한 시각이 있다. 이 중 현대 일본인들의 역사관 속에는 '군부의 손에 놀아나 전체주의의 늪에 빠진 불쌍한 천황과 민중' 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라가라 신군]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집단 속에 숨어있는 다수의 대중의 비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러한 행위를 위선적이고 비겁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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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4 15:42: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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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53 엄희경 </title>
         <author>cord20010306</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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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lt;가자가자 신군&gt;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처음 접했을 때, 밝은 느낌의 이름과 걸맞는 밝고 당찬 소재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가자가자 신군은 1943년 육군에 입대해 뉴기니로 전출을 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패전을 맞은 오쿠자키 겐조를 1년간 취재하며 오쿠자키 겐조와 그의 발언들을 꽤나 무거운 소재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nbsp;<br><br>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으로 복무한 오쿠자키 겐조가 뉴기니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후 현재까지도 천황을 비판하고 자신이 소속되었던 부대에서 탈영병을 처형했던 상관을 찾으며 그 때의 진실을 규명하자고 노력한다. 또한 오쿠자키 겐조는 천황에게 파칭고 볼을 던지고 포르노를 합성한 천황의 저난지를 번화가에 배포하는 등 전쟁하에 벌어진 무책임한 체재와 이에 동조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br><br>&lt;가자가자 신군&gt;을 감상하며 인상에 남는 것은 오쿠자키 겐조의 행동이다. 가자가자 신군은 오쿠자키 자신에게 인육 섭취를 강요했던 상관의 아들을 총으로 쏴 살인 미수로 징역을 살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그를 총으로 쏘기 전까지, 상관의 거처를 찾아가 지식인으로써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오쿠자키가 이성을 잃고 상관의 아들에게 폭행을 휘두르고 총을 발포하는 모습과 상반된다. 또한 발포 후 도망치거나 그를 훼손하지 않고 직접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부르는 행동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오쿠자키 개인과 자신이 겪은 전쟁과 천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신념이 부딪힌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nbsp;<br><br>나는 오쿠자키의 폭력, 그리고 살인 미수가 여느 폭행죄를 저지른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행위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같지만, 개인의 사적 인 감정, 혹은 자신이 하고싶다는 이유만으로 저지른 폭행 및 살인 미수가 아닌 점에서 여느 폭행죄를 저지른 이들과 오쿠자키는 차이가 ㅣㅆ다고 생각했다.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천황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천황 폐위하라는 등, 천황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오쿠자키는 천황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등 가자가자 신군을 통해 필자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불편한 '소수'라고 일컬어 지는 오쿠자키의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엿볼수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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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5 01:03: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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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7 김여경 &lt;가자가자 신군&gt;  감상문</title>
         <author>yeokyoeu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sq7ck5yg25tm93r0/wish/2156279532</link>
         <description><![CDATA[<div>2020110277 김여경 가자가자 신군 감상문</div><div>&nbsp; 이 작품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에 대한 첫 인상은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미친 사람이었다. 천황을 새총으로 쏘기도 하고, 히로히토의 얼굴을 외설적인 사진과 합성하기도 하는 등의 전과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결혼식에서 스스로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오쿠자키 겐조는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천황을 비난하는 문구가 적힌 차를 타고 다니며 시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종전 직후 두 병사를 탈영병으로 몰아 총살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며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과격한 모습도 보여지지만 누구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일들에 목소리를 높여 임하는 것이 한 편으로는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nbsp;<br><br></div><div>&nbsp; 지난번 반딧불이의 묘를 보면서도 들었던 의문점이지만 과연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쿠자키 겐조가 밝히려고 노력했던 사건의 진상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배가 고파 두 명의 병사를 죽여 인육을 섭취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다시 한 번 전쟁은 피해국에게도, 가해국에게도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아무도 전쟁의 참혹성에 대한 불만을 제시하지 않을 때 혼자 전쟁의 원인이 되는 천황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그의 대담함은 그를 더더욱 응원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만약 그에게 동조자가 많았더라면,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잔인함을 알고 그와 함께 시위를 하고 전쟁에 대한 천황의 사과를 요구했더라면, 그리고 최종적으로 천황의 사과까지 받아냈더라면 최근까지 문제시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나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 등으로 인한 분쟁이 조금은 덜 심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던 것 같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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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25 10:23: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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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국부터는 새로운 패들릿에 작성해주세요 </title>
         <author>teseus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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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5-07 08:28: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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