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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림초 5학년 사회 역사신문 by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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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자기 이름 제목에 꼭 쓰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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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27 01:54: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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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하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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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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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27 02:02: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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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종대왕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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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조 제4대 임금. 성은 전주 이씨(全州李氏),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시호는 장헌(莊憲), 묘호는 세종(世宗), 능호는 영릉(英陵).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비(妃)는 심온(沈溫)의 따님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沈氏). 태종 8년(140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태종 12년(1412)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가 폐세자(廢世子) 됨에 따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음력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br><br>세종 2년(1420)&nbsp;집현전(集賢殿)을 확충, 궁중에 설치하여 학자를 키우고, 학문을 숭상하며, 옛 제도를 연구 검토하게 함으로써 정치와 문물제도를 정리하여 행정체제를 확립하였다.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천문, 도덕, 예의,&nbsp;문자, 운학, 문학, 종교, 군사, 농사, 의약, 음악 등에 관한 각종 저서를 하게 함으로써 문화 생활에 막중한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br><br>한편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새&nbsp;활자를 만들고 판짜기를 개량하여 인쇄 능률을 올렸는 바, 새로&nbsp;주조한 활자는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와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와 효시의&nbsp;한글&nbsp;활자가 그것이며, 이 중 갑인자와 한글 활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활자들이다.<br><br>세종 15년(1433) 천체측각기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고, 세종 16년(1434)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하고, 세종 23년(1441)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수(河川水)를 재는 수표(水標)를 발명하였으며, 천문, 역서(曆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과 《제가역상집(諸家曆象集)》을 펴냈다. 그 중 측우기의 발명은 이탈리아 사람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o&nbsp;Gastelli)의 측우기(1639)보다 거의 2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다.<br><br>화전(火箭), 화포(火砲)를 개량하여 우리 나라 무기사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도량형(度量衡)의 고정(考正) 실시로 물량거래(物量去來)의 공정을 기하고, 경제적인 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상의 제도 마련 기준에 공헌하였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케 하여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 조세제도(租稅制度)를 정할 때 온 백성의 민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전국 8도의 관민(官民)에게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를 조사(민주적 여론조사)하는 한편,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종래에 모순이 많았던 조세제도를 연분구등(年分九等), 전분육등(田分六等)의 54등급으로 확립 실시하여 조선조 5백년 간의 조세제도를 확립하였다.<br><br>의료기관을 정비하고,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류취(醫方類聚)》 등의 의서를 편찬하여 향약(鄕藥)을 개발함으로써 의료 활동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죄수(罪囚)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옥 시설을 개선해 주는 한편, 남형(濫刑)을 금하고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삼심제도(三審制度)인 삼복법(三覆法)을 실시하였고, 배태법(背胎法)을 둔태법(臀笞法)으로 바꾸어 등과 같은 인체의 중요 기관을 치는 고문을 엄금시키었으며,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 발간함으로써 인명치사(人命致死)의 사건이 생겼을 때에는 살상 검증(殺傷檢證)에 관한 검시(檢屍)의 제도를 실시하게 되니, 형정(刑政)에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br><br>15세 미만인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늙은이는 살인죄나 강도죄가 아니면 가두지 못하게 하고,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인 이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더라도 가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천민인 노비(奴婢)를 하늘이 낸 백성으로 인정해 주었다. 관비(官婢)의 출산 휴가를 대폭 늘려 주었다.<br><br>세종 25년(1443) 친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이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집현전 학사 등에게 하게 하여 만든 해설서인 《훈민정음》이란 책을 만들어 이와 함께 세종 28년(1446)에 반포하고, 《용비어천가(龍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하고, 운서인《동국정운(東國正韻)》,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등을 편찬 발간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어 내기도 하였고, 한문으로 된 경서(經書)와 문학서 및 불경(佛經)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또 이과(吏科)와 이전(吏典)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힘썼으니, 우리 문자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br><br>박연(朴堧)을 시켜 향악(鄕樂)과 아악(雅樂)을 짓거나 정리하고, 편경(編磬)과 편종(編鐘) 등의 악기(樂器)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은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세종악보(世宗樂譜)》는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일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 음악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이다.<br><br>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고, 《효행록(孝行錄)》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지어 풍속을 권려하였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지어 후세에 제왕의 일락(逸樂)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엮어 흥망 성쇠를 본받도록 하였고,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엮어 전쟁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전주 출척(銓注黜陟)의 법이 지극히 정밀하고 잘 갖추어져 현량(賢良)이 등용되었다.<br><br>종교에 있어서도 유교를 장려하여 도의 정치를 구현하는 한편 세종 6년(1424)에는 불사(佛寺)를 정리하여 선종(禪宗), 교종(敎宗) 36사(寺)만을 남겨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하였으며, 세종 30년(1448)에는 경복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교 서적의 국역 간행 배포와 과거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 발달에 노력하여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道敎)가 조화된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br><br>세종 원년(1419) 이종무(李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여 항복을 받음은 물론 경상도에 예속시켰고, 세종 15년(1433)에 최윤덕(崔閏德)에게 명하여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야인들을 토벌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세종 16년(1434)에는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 변경 지방의 여진(女眞)을 토벌하여 육진(六鎭)을 설치함으로써 동북과 서북쪽의 땅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장, 우리 강토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나라안의 지리(地理)를 조사하게 하여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게 하고, 실측지도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정척(鄭陟)과 양성지(梁誠之) 등에 의해서&nbsp;세조&nbsp;9년(1463)에 편찬된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이렇듯 세종은 겨레 생활을 존중하는 모든 제도의 완성을 이루어 국태 민안 문화 찬란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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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귀여미설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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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순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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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시대의 장군으로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div><div><br><a href="https://m.terms.naver.com/imageDetail.naver?docId=1134958&amp;imageUrl=https%3A%2F%2Fdbscthumb-phinf.pstatic.net%2F2765_000_20%2F20180912181110889_T5D3NX6HZ.jpg%2F28873.jpg%3Ftype%3Dm4500_4500_fst%26wm%3DN&amp;mode=entry">이미지 갤러리 가기</a></div><div><strong><br>이순신</strong><br>조선 중기의 무신.</div><div>출생-사망 | 1545 ~ 1598<br>본관 | 덕수(德水)<br>자 | 여해(汝諧)<br>시호 | 충무(忠武)<br>국적 | 조선<br>활동분야 | 군사<br>출생지 | 서울 건천동(現 인현동)<br>주요저서 | 《난중일기》<br>주요업적 |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침<br>시대 | 조선시대</div><div>본문</div><div><strong>출생</strong></div><div>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div><div><strong>무과급제와 함경도 근무</strong></div><div>1572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2059&amp;ref=y">선조</a>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와 함경도의 동구비보(董仇非堡)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8062&amp;ref=y">권관</a>(權管), 발포수군(鉢浦水軍)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1515&amp;ref=y">만호</a>(萬戶) 등을 거쳐 건원보(乾原堡) 권관,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을 지냈다.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3100&amp;ref=y">명</a>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일(李鎰)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은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杖刑)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div><div><strong>전라도 </strong><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098&amp;ref=y"><strong>수군절도사</strong></a></div><div>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4161&amp;ref=y">이광</a>(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2048&amp;ref=y">선전관</a>(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2641&amp;ref=y">좌수영</a>(全羅左水營)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div><div><strong>임진왜란과 해전</strong></div><div>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1083&amp;ref=y">원균</a>(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8910&amp;ref=y">옥포해전</a>), 다음날에도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9238&amp;ref=y">적진포해전</a>).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家善大夫)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泗川)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8356&amp;ref=y">거북선</a>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唐浦)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7436&amp;ref=y">당포해전</a>),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7437&amp;ref=y">당항포해전</a>).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div><div><br></div><div><br></div><div><strong>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다</strong></div><div>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7440&amp;ref=y">한산도</a>(閑山島)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1302&amp;ref=y">한산도대첩</a>). 그리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釜山浦)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div><div><strong>삼도</strong><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5100&amp;ref=y"><strong>수군통제사</strong></a><strong> 임명</strong></div><div>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div><div><strong>원균과 갈등 그리고 파직되어 백의종군</strong></div><div>하지만 당시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5147&amp;ref=y">붕당</a>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5469&amp;ref=y">가토 기요마사</a>[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83207&amp;ref=y">도원수</a>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8240&amp;ref=y">권율</a>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div><div><strong>명량해전에서 대승</strong></div><div>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3135&amp;ref=y">명량대첩</a>).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div><div><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6838&amp;ref=y"><strong>노량해전</strong></a><strong>에서 전사</strong></div><div>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折爾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1856&amp;ref=y">조선왕조실록</a>》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1852&amp;ref=y">선무공신</a>(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div><div><strong>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됨</strong></div><div>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div><div><strong>유품과 기록물</strong></div><div>이순신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시조 및 한시와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을 남겼다. 그의 유품 가운데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들인 통영의 ‘충렬사팔사품(忠烈祠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있다.</div><div><strong>아산 현충사 배향</strong></div><div>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忠烈祠, 1614년 건립,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麗水忠愍祠, 1601년 건립,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顯忠祠, 1706년 건립,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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