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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사 3반 by 신성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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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5-10-21 00:36: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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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5 이정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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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박차정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일신여학교에 다니며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떴다.</p><p>1920년대 후반 근우회 등 여성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p><p>여성의 사회참여와 독립의식을 결합한 활동을 펼쳤다.</p><p>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해,</p><p>의열단과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했다.</p><p>그녀는 남편 김원봉과 함께 무장투쟁의 전선에서 싸웠으며,</p><p>정보 수집, 자금 조달, 부상병 지원 등 실질적인 조직운영을 맡았다.</p><p><br></p><p>박차정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탁월한 리더이자 조직가였다.</p><p>조선의용대 내 여성 조직을 만들고,</p><p>구성원들의 역할을 배분하며 훈련체계를 정비했다.</p><p>이러한 모습은 현대 경영에서 말하는 ‘조직 경영 능력’과 ‘변혁적 리더십’에 가깝다.</p><p>그녀는 힘이 아닌 신념으로 사람들을 움직였고,</p><p>조직을 목표 중심으로 이끌었다.</p><p><br></p><p>1944년,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충칭에서 순국했지만,</p><p>그녀의 정신은 이후 여성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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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4 01:02: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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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9번 백민규</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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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강기동(1893~1950)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 조직과 군자금 모집, 무기 조달 등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단 등 항일 무장단체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의 병력 충원과 후방 지원을 담당하였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잔존 부대를 재정비하며 무장투쟁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유지하며 군자금 전달, 독립선언문 배포, 항일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강기동은 주로 후방 지원과 정보 전달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군과 임시정부 간의 연계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하여 청년 교육과 사회 계몽 활동을 이어갔으며, 독립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의식 고취와 후대 교육에 힘썼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무장투쟁과 독립운동 지원에 참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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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4 01:04: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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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20정규범</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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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정정화(1900~199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숨은 조력자로, 여성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일찍이 항일 의식을 품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남편 김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자금과 정보를 전달했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공동체를 지탱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수차례 밀항하며 자금을 전달하는 등 묵묵히 헌신해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도 정정화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장강일기》를 남겨 후세에 독립운동의 진실을 전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성의 위치에서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로, 사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정정화의 삶은 이름 없는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상징하며, 조국의 자유를 위한 헌신과 용기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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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4 01:06: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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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1 권태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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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박차정 의사(1910~1944)는 우리가 잘 아는 김원봉 장군의 아내이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이십니다. 그녀는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여성 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하며 여성 권익 향상에도 힘썼습니다.</p><p>  박차정 의사는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남성 못지않게 치열하게 싸웠으며, 1939년 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1944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녀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 중 한 분이시지만,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보여준 용기와 헌신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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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4 01:19: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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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5 김윤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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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김용관(金容瓘, 1897년 3월 21일~1967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공학자, 민족운동가다.</p><p>1924년 10월 1일, 경성고공 동문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써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목적으로 한 발명진흥운동을 제창하여 발명학회를 설립, 그 지도자로 활동했다. 발명학회가 기금 부족으로 활동을 중단한 뒤 1932년 민족변호사 이인을 변리사로 영입하여 발명학회를 부활시켜 무학의 자수성가형 발명가들의 특허·실용신안 출원을 돕는 일을 했고, 1933년부터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발행했다.</p><p>발명진흥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만들고자 윤치호, 여운형, 송진우 등 사회 명사들을 영입해 1934년 4월 19일 과학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과학데이 행사가 1934년 7월 과학지식보급회 발족과 과학대중화운동으로 발전하자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을 모두 참여하며 대표적 민족공학자로 활동했다. 경성방직이 총독부 지원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경성방직계열이 친일화되자 김용관의 과학대중화-발명진흥운동에 동조하는 반제비타협주의 세력이 물산장려운동의 후기 주류가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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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4 13:46: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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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9임성민</title>
         <author>maranata0312</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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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황학수 독립운동가는 1879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53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해 육군유년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전념했다.</p><p>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과 군무부 비서국장을 지냈다. 이후 남만주 서로군정서 참모장과 북만주 신민부 중앙집행위원 및 참모부장 등 무장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1938년에는 다시 임시정부 군사위원, 1939년 임시의정원의원에 재선되고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겸하기도 했지. 1945년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고,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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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5 17:07: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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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1석윤호</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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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김붕준은 1888년 9월 27일 평안도 용강현 신정방 구룡동에 태어났습니다. 1904년엔 스미스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서양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907년, 김붕준은 신학문을 더 자세히 익히기 위해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고 1908년에 보성중학교 농림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보성중학교에 재학하면서 애국계몽 운동을 위해 세워진 서북학회에 가입해 비밀결사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담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신민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김붕준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로 내려가 화를 피했습니다. 이후 서울 승동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와 여운형 등과 함께 승동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이후 1916년 부터 대동강 하류 대안에 걸친 갈밭 개간에 착수했으며, 마을에도 관개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그 결과 밭농사를 하기에 충분한 많은 땅들이 조성되었고, 지역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켜 주셨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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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5 19:40: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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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4 김시율</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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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채기중(1873~1921)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초기에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후 대한광복회 결성에 참여해 무장투쟁과 자금 확보 활동을 주도했다. 특히 일본인 금광을 탈취하려 한 계획과 친일 부호 장승원, 아산 면장 박용하 등의 처단에 가담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채기중은 국내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직접 맞선 인물로,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항일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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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10:29: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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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6 이주헌</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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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일제강점기 시기 무장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에 헌신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하와이에서 한인사회를 조직하고, 국민회와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독립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사상을 전파했습니다. 박용만은 교육과 군사, 언론을 통해 실질적인 독립 역량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1920년대 초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928년 중국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며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용만은 ‘교육과 군사로 독립하자’는 신념 아래 실천적인 독립운동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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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12:31: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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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3 신승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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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최능진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식을 키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공식직보다는 외곽 조직에서 활동하며 연락, 자금 조달, 청년 조직 결성 등 실무적 역할을 맡았다. 특히 군자금 모금과 정보 전달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무장투쟁보다는 교육과 조직, 사상적 독립을 중시했던 그는 청년들에게 자주정신과 민주공화국의 미래상을 강조하며 독립 이후의 국가 건설을 준비했다. 광복 후에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새로운 나라의 방향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와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존엄을 위해 묵묵히 헌신한 숨은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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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13:29: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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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7이지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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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윤현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는 총과 무기로 싸우는 대신, 경제를 통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믿었습니다.</p><p><br></p><p>1918년, 윤현진은 도산 안창호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립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큰 영향을 준 단체입니다. 윤현진은 그곳에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조직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p><p><br></p><p>이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 임명되어, 정부의 재정을 책임지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관리했습니다. 해외 동포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의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는 등,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경제적 뒷받침’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헌신하다가 1921년 과로로 순국하였습니다.</p><p><br></p><p>윤현진은 경제적 독립이 곧 진정한 독립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정치적 해방뿐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자립 의식의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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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22:37: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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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0서유준</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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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이갑성은 188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며, 기독교 선고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개신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그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학생 시위와 전단 살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p><p>독립운동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고, 총 16년간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3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신간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등으로 다시 체포되어 수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p><p>광복 이후에는 정치와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민의원 의원, 자유당 최고위원, 공화당 발기위원 등 다양한 정치 직책을 맡으며 국가 운영에 참여했고, 광복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와 권익 향상을 위해 힘썼다. 또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로서 독립운동 관련 사업을 이어갔다.</p><p>이갑성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많은 영향을 남겼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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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4:11: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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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4 이연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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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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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15: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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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6</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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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891년 10월 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孝悌洞)에서 이태성(李泰晟)과 고소우리(高所禹里)의 5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p><p>관립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女學校) 기예과에 입학해 다니다가, 경술국치 후 바뀐 교명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13년에 졸업하였다. 어릴 적 옆집에 살던 김상옥(金相玉)과 함께 연동교회(蓮洞敎會)에 다니면서 오누이처럼 지냈고, 후일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다.1919년 4월 초 김상옥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 혁신단(革新團)이 간행한 『혁신공보(革新公報)』 배포와 단원 간 연락을 도왔다. 5월 하순 여고보 동창생 신의경(辛義敬)의 주도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및 성금 헌납, 정부 요인과 국내 지사들 간의 비밀연락 협력 등을 강령으로 결성된 경성애국부인회(京城愛國婦人會)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여성단체들이 합쳐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가 결성될 때 참여하여, 밀고로 조직이 파괴되는 11월까지 활동하였다.1920년 5월 김상옥·김동순(金東淳)·윤익중(尹益重) 등의 주도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이 조직된 다음, 6월에 신화수(申華秀)가 작성한 취지문 300장을 등사해주었다. 8월 암살단의 서울거사가 실패하니 상하이로 탈출했던 김상옥이 1922년 12월초 임시정부 활동자금 모집과 폭탄거사 결행을 위해 서울로 잠입하자, 같은 달 4일경부터 이듬해 1월&nbsp;9일까지 사이에&nbsp;7~8일간 자택에 숙박시켰다. 1923년 1월 17일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피신한 김상옥이 집으로 찾아오자 건넌방에 숙박시키고, 모친과 함께 치료해주었다. 김상옥이 장충단 돌다리 밑에 숨겨둔 쌍권총을 가져다주었고, 홍성(洪城)의 윤익중이 그곳 공립보통학교 교사인 동생 이은영(李恩暎) 편에 보낸 거사준비금 100원을 전해주기도 하였다.1월 22일 새벽 김상옥의 은신처를 알아낸 일제 경찰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하자 김상옥은 총격전 끝에 자결하였고, 그녀는 연행되어 모진 취조를 받고 기소되었다. 고문 후유증인 늑막염 및 우측 다리 골절과 탈진으로 인한 병보석 상태에서&nbsp;5월 중순 재판 때 출두하지 못하였다. 6월 말의 분리심리 때 법정에 실려왔으나 문답조차 불능으로 혼수상태여서 다시 연기되었다. 1923년&nbsp;12월&nbsp;25일 경성지방법원에 마차로 실려가&nbsp;들것에 누운 채로 신문 받고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범인장닉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계속 치료로 겨우 기동이 가능해진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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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17: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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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8 박성준</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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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유여대 선생님은 1878년에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셨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서당 훈장으로 일하시다가, 1898년에 선교사님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셨다. 이를 계기로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 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의주에 일신학교와 여성 교육 기관인 양실학원을 세워 교육 사업에 힘쓰셨다. 1915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p><p>3.1 운동 당시인 1919년 2월, 선천에서 이승훈 선생님을 만나 곧 있을 독립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로 약속하셨다. 경성의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명룡 선생님에게 도장을 맡겨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셨다. 이후 자신이 세운 양실학원을 중심으로 의주 지역에서 3.1 운동을 이끌었다. 의주 서교회 공터에는 양실학교 학생 100명을 포함해 8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워 찬미가와 기도를 했고, 직접 만든 2.8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선천에서 도착한 독립선언서 200여 매도 배포됐다. 당시 유여대 선생님은 군중에게 일제 관헌의 구타에도 저항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군중 규모는 1,600명으로 늘어났다. 시가 행진 이후 지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등 의주 만세 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p><p>체포된 후에는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조사를 받고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약 2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16일 출옥하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깊어졌으며,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일에 힘을 쓸 뿐”이라는 뜻깊은 소회를 남겼다. 출옥 후에는 의주 동교회로 돌아와 목회 활동을 이어가면서, 3.1 운동 당시 폐쇄됐던 양실학교 재건을 위해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1925년에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p><p>유여대 선생님의 삶은 교육과 신앙, 그리고 독립운동을 향한 헌신으로 점철된 것으로, 특히 의주 지역 3.1 운동의 중심을 이끌며 민족의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셨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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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28: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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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3 김승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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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권용두 선생은 일제강점기 동안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항일운동가이다. 그는 대전중학교 재학 시절, 학생단체인 선우회에 가입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동료 학생들과 함께 독립사상을 퍼뜨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31년 비밀결사 ‘충남전위동맹’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청년들을 조직해 항일 사상을 전파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p><p>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권용두 선생은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끝까지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p><p>광복 이후에는 교육자이자 문학인으로서 사회 계몽과 후진 양성에 힘쓰며, 시조집 《새맑은 바람》 등을 펴내어 민족정신을 문학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독립정신과 해방 후에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p><p>권용두 선생은 평생을 통해 항일운동, 교육,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참된 애국지사로 평가받는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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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30: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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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8 이호준</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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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채상덕 선생(1862~1925)은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병으로 시작하여 만주 지역 무장항일투쟁의 중추적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일찍이 나라의 위기를 목도하고 항일의 길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스승인 최익현 의병장의 문하에 들어가 의병 활동에 투신했으며, 사리원·재령·해주·신막·안악 등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안항일전선을 형성했다. </p><p> 1906년에는 호남의 곽한일·이남규 등에게 의병을 일으켜 달라고 호소하는 등, 전국적인 항일의 물결을 이끌고자 하는 통합적 리더십을 보이기도 했다.</p><p>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라가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하자, 채상덕은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한인 사회와 독립군 단체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의 새로운 기반을 다졌다.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조직 간의 통합과 협력을 중시하며, 무장독립운동의 전략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p><p>1922년에는 여러 독립군 조직이 연합해 결성한 대한통군부에서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같은 해 8월에는 대한통의부가 창설되자 부총장으로 활동하며 조직 통합과 독립군의 체계적 운영을 위해 힘썼다. </p><p>그러나 독립군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1923년 새로 조직된 대한의군부에서는 총장으로 추대되어 더욱 직접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1925년 3월, 만주 집안현 고마령 계곡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논의하던 참의부의 군사회의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전사하는 ‘고마령 참변’이 발생했다. </p><p>이 소식을 접한 채상덕은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 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말을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함으로써 항일운동 지도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p><p>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p><p>채상덕은 단순히 ‘의병장’ 혹은 ‘무장독립군 지도자’라는 표현에 그치지 않고, 지역을 넘어 조직을 통합하고 통일적 항일 회로를 구축하려 했던 전략적 인물이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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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32: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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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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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21 천영훈</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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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기독교 신자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2년 수료한 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일본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해 1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어 광복군총영에 가담해 군자금 모금과 전달 활동을 했으며, 1920년 8월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에 참여해 일제 경찰 2명을 사상케 했습니다. 이 의거는 일제에 큰 충격을 줬고, 안경신은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매우 용맹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체포된 후에도 갓난아기를 안고 재판을 받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강력한 독립 의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처럼 안경신은 독립운동의 많은 방면에서 헌신하며 여성 운동가로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요약하면, 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신 기독교인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 후 3.1운동을 비롯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광복군총영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1920년 평안남도 도청 및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는 과감한 의거를 감행해 일본 경찰 두 명을 사상케 하며 무장투쟁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체포되어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은 그녀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희생과 용기의 대표적 인물입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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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7 06:48: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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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22 최민석</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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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장지락(張志樂, 1905~1938)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혁명사상가로, 필명 김산(金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자라며 강한 민족의식을 품었다. 1920년대 초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 해방 이념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과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단순히 무장 독립운동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기술의 자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중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교육하며 공업·기계기술·전기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고, 이를 통해 <strong>‘기술을 통한 독립’</strong>이라는 독창적인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p><p><br></p><p>장지락은 특히 중국 공산당 및 조선 혁명가들과 함께 협력하여 항일 전선에서 활동했다. 북경, 상하이, 광둥 등지를 오가며 조직 활동과 선전 활동을 펼쳤으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 청년들을 규합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그는 “독립은 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공업의 힘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정치가나 군인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통한 실질적 독립을 모색한 지식 기반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p><p><br></p><p>하지만 1938년 중국 옌안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아 체포된 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미국인 언론인 님 웨일즈(Nym Wales, 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우)가 그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아리랑』을 출간하면서 그의 생애와 사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이 책은 식민지 청년이 겪은 분열과 이상, 그리고 혁명에 대한 고뇌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기록으로, 김산(장지락)을 20세기 초 동아시아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게 했다.</p><p><br></p><p>오늘날 장지락은 단순한 사회주의 운동가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그는 억압된 현실 속에서도 과학기술과 산업 역량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의 토대라는 점을 꿰뚫어본 선각자였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의 국방과학·첨단기술을 통한 자주 국방이라는 개념과도 통한다. 따라서 장지락은 무기 대신 지식을 무기로 삼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기술과 교육을 통한 민족 자립을 꿈꾼 공학적 실천가로서 기억될 가치가 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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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30 07:24: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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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12손준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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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나는 화폐 도안 인물로 조명하 의사를 선택했다.조명하 의사는 1905년 4월 충청남도 홍선군에서 태어나 1932년 10월 대만 타이중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조명하 의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중요한 인물을 향해 폭탄을 던지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가 1926년 대만에서 일본 왕의 장인인 다케다 남작을 공격한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나라를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체포된 뒤에도 자신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당당히 말하며 끝까지 신념을 지킨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조명하 의사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나는 조명하 의사가 화폐에 들어가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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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30 07:28: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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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307 박민우</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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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유일한은 189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사상을 가진 분으로, 아들에게 서양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유일한은 일찍부터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p><p>1904년, 아홉 살이 된 유일한은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공부하며 미국의 문화를 배웠다. 오벌린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며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p><p>하지만 그는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와 재미 한인청년회 활동을 통해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도 도왔다. 또한 그는 공부를 통해 힘을 길러, 언젠가는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p><p>그는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26년 고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유한양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제약회사 중 하나였다. 유일한은 회사를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업의 목적은 사회봉사에 있다”는 철학을 가지고, 정직한 경영을 통해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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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2 11:18: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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