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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교재 팀플 by 김근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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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4-03-26 03:48: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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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윤동주」 _ 최은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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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 출생 연도 : 1917년 12월 30일</p><p>사망 연도 : 1945년 2월 16일</p><p>본관 : 파평</p><p>출생지 : 북간도 명동촌</p><p><br></p><p>윤동주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1917년에 태어나 1945년에 사망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를 썼고,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그 해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실패했으며, 1943년 귀향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은 뒤 광복을 앞두고 28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광복 후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p><p><br></p><p>[출처]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윤동주’</p><p><br></p><p>2) 명동소학교 시절 윤동주 </p><p>1925년,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 명동마을과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 그가 27년 남짓한 생애에서 절반 이상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 것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 감수성의 골격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p><p><br></p><p>윤동주의 일생에서 명동 시절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절은 다시 없었음. 자연 환경도, 가정적인 거주 환경도, 또 시국 상황까지도. 명동의 자연 환경은 윤동주의 소학교 동창생이며 외사촌인 시인 김정우 선생의 글에 잘 묘사되어 있다.</p><p><br></p><p>‘명동촌의 자연 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중략) 동주의 집은 학교촌에 소속되어 있으며 잘사는 편이었다. 그 당시 벼농사를 하는 집이란 그 큰 마을에 몇 가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몇 집들 중에 동주의 집도 끼여 있었다.</p><p><br></p><p>그의 집은 학교촌 입구 첫 집이었다.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 기슭에 교회당이 있고 그 교회당 옆으로 두 채의 집이 있는 앞집이다. 그의 집은 정남향 큰 기와집으로 후면과 좌우에는 그리 크지 아니한 과수원이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그의 시 「자화상」에 영향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물맛으로 유명한 수십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동주와 같은 과수원 울타리로 되어 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기도 했으며,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우물 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p><p><br></p><p>3)윤동주 생에 첫 좌절</p><p>1953년 새해 들어서자 용정 은진중학교 제3학년 반은 송몽규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할 학생들과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야 할 학생들로 나뉘어 분위가 아주 뒤숭숭해졌다.</p><p><br></p><p>새 학기가 되자 급우들의 자리가 비어있었고 동주의 친우들만 해도, 송몽규는 중국으로 가고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로 갔다. 윤동주도 숭실학교로 전학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은진중학교에서 4학년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은진을 다니면서도 계속 졸라댄 결과 4학년 가을학기에는 전학하기로 어른들이 설득되었다. </p><p><br></p><p>그런데 막상 전학하는 과정에서 숭실 측에서 윤동주의 시험 결과를 놓고 4학년이 아니라 3학년으로의 편입 자격밖에 인정하지 않은 ‘낙제‘한 것과 같은 결과에 윤동주는 생애 최초의 큰 좌절을 겪었다. </p><p><br></p><p>윤동주는 이때 누이동생인 혜원 씨 앞으로 편지를 보내 “그들이 나를 제 학년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서글픈 말로 이 일을 집에 알렸다. 그 소식에 노한 집안 어른들은 그의 편입시험 실패를 나무라고 꾸짖는 편지를 동주에게 보냈고 그 편지를 읽은 그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릴 정도로 몹시 괴로워 했다.</p><p><br></p><p>이런 현실에서 윤동주는 ’부끄럼‘이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p><p><br></p><p>4) 윤동주가 느낀 ‘부끄럼‘</p><p>편입시험의 낙제는 여러 측면에서의 낭패를 의미했다. </p><p><br></p><p>은진으로 되돌아가면 제 학년에 다닐 수 있었지만 4년제를 졸업하게 되어 학제 문제가 그대로 남게 되고 또 기껏 전학한다고 평양에 갔다가 편입시험에서 낙제한 처지가 되어 은진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평양에 그대로 남아 한 학년 아래로 편입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p><p><br></p><p>이 시절의 윤동주는 이미 명동촌 최고 부자 시절이 아니었다. 공산당 테러를 피해 용정으로 이사 나오면서 농토를 전부 소작인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즉각 곡물 생산량이 절반 이하로 줄었고, 또 그의 부친은 벌이는 사업마다 시원치 않아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모를 조르고 졸라 뒤늦게 그리고 어렵게 온 평양이다.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다는 오로지 그 자신의 잘못 때문에 부모로 하여금 1년간이나 학비를 더 부담하게 만들었다. 그가 편입시험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전혀 불필요했을 시간과 금전의 낭비였다.</p><p><br></p><p>그리고 윤동주가 평소 남보다 뒤떨어지는 열등생이었다면 쉽게 또는 당연하게 그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리라. 그러나 그 반대였다. 그는 평소에 우수한 학생이었다. 뛰어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실패한 것이다.</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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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3-30 07:58: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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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작품 &lt;자화상&gt; 정보 - 신가은</title>
         <author>qhf8wkk4mn</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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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ol><li><p>발표 시기 : 1939년 9월 연희전문학교 교지 &lt;문우&gt;에 발표 / 1948년 &lt;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gt; 초간본에 실림</p></li></ol><p><br></p><ol start="2"><li><p>작품 내용 분석 :</p></li></ol><p><br></p><p>1) 1연의 1행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혼자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에서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이 보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자아성찰의 매개체로 볼 수 있음 -&gt; 1연 : 우물을 찾아 자아성찰</p><p><br></p><p>2) 2연의 1행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에서 ‘파아란 바람’은 공감각적 심상 (촉각의 시각화)를 사용하였으며, 우물에 비친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각적으로 묘사함 -&gt; 윤동주의 서정적 표현 기술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나타남), 2연 : 우물 속의 평화로운 정경</p><p><br></p><p>3) 3연의 1행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에서 ‘사나이’는 ‘윤동주’ 자기 자신을 뜻함, 평화롭고 아름다운 우물 속 풍경과 대비되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사나이의 모습을 표현함 / 3연의 2행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에서 시인 윤동주는 작품 속 우물에 비춰진, 즉 자아성찰을 하며 본 자기 자신의 모습이 ‘밉다’고 느끼고 있음 이는 식민지 현실 (일제강점기인 시대적 배경)에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혐오감과 미움이 드러남 -&gt; 3연 :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p><p><br></p><p>4) 4연의 1행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낌 -&gt; 4연 : 자아에 대한 연민, 가엾음</p><p><br></p><p>5) 5연의 1행, 2행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에서는 화자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화자의 순수했던 과거의 내면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고, 자기 자신이 밉고 혐오스럽다가도 연민을 느끼는 ‘애증’을 보여 주고 있음</p><p><br></p><p>6) 6연의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에서 2연이 반복되어 구성상 안정감과 균형감이 부여됨 (수미상관 구조), 또한 우물에 비친 현재의 모습에서 ‘추억’이라고 언급하며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려 하는 화자의 태도를 통해 초라하고 혐오스러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과거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것, 즉 일종의 두 자아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음 -&gt; 6연 : 추억 속 자아에 대한 그리움 (과거의 이상적인 자아)</p><p><br></p><ol start="3"><li><p>주제 : 자아 성찰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미움 (화자가 ‘우물’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며 자신에 대한 애증을 노래하고 있음</p></li></ol><p><br></p><ol start="4"><li><p>특징 : 평서문을 활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화자의 심리 변화를 형상화함, 구어체 (~ㅂ니다 반복) 사용, 화자의 정서가 미움 - 연민 - 미움 - 그리움으로 변화, 수미상관 구조 사용,</p></li></ol><p><br></p><p>출처 : 2021학년도 수능특강 문학 (해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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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3-31 11:13: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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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대 - 김근우</title>
         <author>kimgw7866_</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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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윤동주 1917.12.30. ~ 1945.02.16.</p><p>일제강점기 1910.08.29. ~ 1945.08.15.</p><p>&nbsp;</p><p>윤동주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시기였으면 광복 직전에 윤동주는 사망하였다.</p><p>&nbsp;</p><p>&lt;일제의 식민 통치&gt;</p><p>&nbsp;</p><p>(1) 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 1910~1919)</p><p>- 헌병경찰 배치 : 2만여 명의 헌병경찰 및 헌병보조원이 배치되어, 치안과 일반 행정 및 사법 행정에 관여하여 한국 통치의 주역을 담당하였다.</p><p>- 공포분위기 조성 : 관리는 물론 학교 교원들에게까지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여 한국인을 위압하였다.</p><p>- 언론·출판의 자유 박탈 : 민족의 언론지와 기관지를 폐간시키고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 친일신문과 「조선공론」 등 친일잡지 만의 발행을 허용하였다.</p><p>- 민족 교육 금지 : 일제는 조선교육령(1911)과 사립학교규칙,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민족교육을 탄압하고 일본어를 중심으로 교과목을 편성하고, 초보적인 기술과 실무적인 내용만을 가르쳤다.</p><p>&nbsp;</p><p>(2) 문화통치(보통경찰통치, 1919~1931)</p><p>-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한민족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실시한 식민통치 형태</p><p>- 보통경찰제 실시 :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제복만 바꾸어 입은 것으로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시켰다.</p><p>- 언론·출판·집회의 부분적 허용 : 「동아일보」·「조선일보」·「시사신보(1920)」·「시대일보(1924) 등의 신문과 「개벽」·「신생활」 등 잡지가 발행되었으나,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일제의 통치에 거슬리는 언론·집회·결사를 탄압하고, 신문과 잡지에 대해 검열을 통한 삭제·압수·정간 등이 강화되었다.</p><p>- 교육기회의 확대 : 제2차 조선교육령(1922)을 발표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을 인가하여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교육시킨다고 표방하였으나, 이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이간·분열시키고 민족 근대의식의 성장을 오도하기 위한 기만적인 술책이었다.</p><p>&nbsp;</p><p>(3) 민족말살통치(황국신민화 통치, 1931~1945)</p><p>-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위해 한민족의 민족성을 짓밟기 위한 일제 식민 통치 형태</p><p>- 신사참배 강요: 남산에 신궁을 세워(서울) 궁성요배를, 1938년 1면(面) 1사(社) 원칙을 정하여 각 학교와 면에 신사를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p><p>- 창씨개명 강요 : 창지개명과 함께 성씨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이에 불응하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규정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p><p>- 민족문화 말살정책</p><p>① 내선일체(內鮮一體) : 내(內)는 내지인 일본을 선(鮮)은 조선을 가리킨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 시키려 한 것이다.</p><p>②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이 같다는 이론으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근원적으로 말살하기 위한 것이다.</p><p>③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요지이다.</p><p>④ 국학 금지: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게 하였다.</p><p>&nbsp;</p><p>출처 : (주) 도서출판 미래가치, 공무원 한국사(2021)</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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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4-01 05:57: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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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대 - 최서인</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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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일제강점기]</p><p> :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의 민족 수난기이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p><p>1. 무단 통치 (1910~1919)</p><p>-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였다.</p><p>- 일제는 2만여 명의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여 강력한 무단 식민 통치를 실시하였다.</p><p>- 대한 제국 시기에 제정한 신문지법, 보안법, 학회령, 출판법을 적용하여 일제는 조선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다.</p><p>2. 문화 통치 (1919~1931)</p><p>- 무단 통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단결력이 고취되고, 일제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되었다.</p><p>- 친일파 양성을 통한 민족 분열과 이간을 유도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p><p>- 일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사전 검열을 통한 정간·폐간 및 기사 삭제·수정을 자행하였다.</p><p>3. 민족 말살 통치 (1931~1945)</p><p>- 병참 기지화 정책 : 일제는 대륙 침략을 강행하며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운용하였다.</p><p>- 황국 신민화 정책 : 민족 정신 말살(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선전) / 민족 문화 말살(교육 탄압, 신문 폐간) / 민족 근원 말살(창씨개명, 교육 탄압, 일본어 상용 운동)</p><p> [문학 활동]</p><p>(1) 1910년대의 문학 : 1910년대의 문학은 계몽 문학적 성격을 띠었으며 이광수, 최남선 등이 활약하였다. 특히 매일신문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무정」 (1917)은 계몽기의 신문학을 총결산할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p><p>(2) 1920년대 초반의 문학 :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통치를 내세우자 지식인의 일부가 일제와 타협하여 변절하였다.</p><p> ① 동인지의 간행 : 김동인이 중심이 된 『창조』(1919), 김억·남궁 벽의 『페허』(1920), 나도향· 이상화의 『백조』(1922) 등의 동인지가 3·1 운동 이후 간행되었다. 동인지는 예술성만 강조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p><p> ② 문학 잡지의 간행</p><p>  ㉠ 종류 : 『개벽』(1920), 『조선지광』(1922) 등의 종합 문학 잡지가 발간되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의 폭이 확장되었다.</p><p>  ㉡ 탄압 : 항일 운동을 암시하는 작품을 게재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p><p>(3) 1920년대 중반의 문학</p><p> ① 신경향파 문학의 대두</p><p>  ㉠ 특징 :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여 식민지 현실 고발과 계급 의식 고취를 강조하였으며 이후 저항 문학, 프로 문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김기진과 박영희 등의 신경향파 문인들은 1925년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를 결성하였다.</p><p>  ㉡ 대표작 : 「탈출기」, 「기아와 살육」(최서해)</p><p> ② 동반 작가의 활약 :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현실 비판에 동조하는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빈처」), 염상섭(「삼대」) 등의 동반 작가들이 등장하였다.</p><p> ③ 민족 정서 강조 : 「진달래꽃」(김소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님의 침묵」</p><p>(한용운) 등</p><p> ④ 국민 문학 운동의 전개 : 민족주의 계열의 문인들이 신경향파 문학의 계급주의에 반대하고 민족의식 고취와 모국어 사랑, 전통 문화의 부흥 등을 강조하는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p><p>(4) 1930년대의 문학</p><p> ① 순수 문학 :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정지용과 김영랑 등은 『시문학』 동인으로 예술성과 작 품성을 강조하는 순수시 운동을 전개하여 순수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p><p> ② 반일 저항 문학 : 이육사, 윤동주 등 전문적인 문인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작품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p><p>(5) 1940년대의 문학</p><p> ① 문학의 침체기 :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문학 활동도 극심하게 탄압하였다.</p><p> ② 친일 문학 :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주요한, 김활란, 노천명 등의 문인들은 일제의 침략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친일 활동에 동원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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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4-01 15:54: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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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물 - 윤동주의 생애</title>
         <author>wzz8hgqcm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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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 북간도에서의 삶</p><p><br/></p><p>북간도는 대한제국시기까지 우리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던 중국내 대표적 한인 거주지였다. 지역에 한인들도 많았고 강한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9년 일제와 청나라의 간도 협약으로 이 지역의 관할권은 청나라에게 빼앗겼다.</p><p>그렇게 중국의 영토로 속하게 됐지만, 간도 지역은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였고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로 인해 간도 참변 등으로 인명 재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간도 지역의 한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지켰다. 이런 지역의 분위기는 윤동주의 가치관 형성과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p><p>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항상 남을 배려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집안의 장남으로 큰 기대를 받기도 했다. 명동촌 내 명동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그의 부친은 윤동주가 의사로 성공하길 기대했다.&nbsp;</p><p>하지만 윤동주는 문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작품 창작을 했다. 1934년 그의 사촌이자 절친인 송몽규가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됐다는 소식은 윤동주에게는 마음 한편에 부러움과 함께 창작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일이 됐다.&nbsp;</p><p>윤동주는 청소년기 작품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조국과 민족의 현실, 그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p><p>의사로 성공하길 기대했던 부친과 문학가의 삶을 살아가려 했던 윤동주는 미래 진로를 관련해 갈등을 겪었다. 부자간의 갈등은 윤동주의 꿈을 존중한 조부의 설득으로 마무리됐고, 이후 윤동주는 집안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nbsp;</p><p><br/></p><p>2) 연희 전문 학교</p><p><br/></p><p>1938년 윤동주는 고향 북간도를 떠나 경성(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경성은 신문화가 빠르게 유입되고 유행에도 민감한 가장 서구화된 도시였다. 고향과 다른 풍경과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p><p>윤동주는 그곳에서 또 다른 절친 강처중을 만났고 그를 따르는 후배 정병욱을 만났다. 이들은 윤동주의 삶에서 매우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이들과 윤동주는 현 시국을 그리고 문학을 논했으며, 타향살이의 외로움도 덜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가로서 시인으로서 더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nbsp;</p><p>이와 함께 윤동주는 당대 최고 국어학자의 최현배의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작에 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윤동주가 그의 작품에서 순우리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건 그 영향이 컸다. 이처럼 경성에서의 유학생활은 시인 윤동주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p><p>하지만 시대 상황은 윤동주가 시인으로 창작에 매진할 수 없게 했다.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시작한 중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일제는 전시 총동원령과 함께 전시체제를 유지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더 억압됐고, 언론과 출판의 검열은 더 강화됐다.</p><p>이에 더해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있어 내선일체 황국 신민화를 목표로 한 민족말살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치안유지법을 통해 더 강하게 이를 억압했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p><p>그나마 외국어로서 학교에서 교육됐던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국어인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는 윤동주가 유학생활을 하던 연희전문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윤동주가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국어 강의가 폐지됐다. 윤동주는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그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우리말 시 창작을 할 수 없게 됐다.&nbsp;</p><p>당시 시대상에 대한 그의 마음은&nbsp;1941년 11월 20일 완성한&nbsp;그의 작품 '서시'에서 드러난다. 일제의 억압이 한층 더 거세지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 우리 민족과 조국의 고통,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 담겨있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시대에도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소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nbsp;</p><p><br/></p><p>3) 일본 유학</p><p><br/></p><p>고통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가로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nbsp;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조국에서는 더 이상의 배움의 기회를 찾기 힘들었다. 그는 문학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그는 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필요했다. 그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힘들게 했다.&nbsp;</p><p>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그의 절친인 송몽규와 함께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신청했다. 그에 앞서 1월 24일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복잡한 마음을 담았다.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한계와 비애, 일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음에 묻고 해야 했던 창씨개명과 일본 유학을 하는 그의 처지에 대한 비통함이 시에 담겼다.&nbsp;</p><p>그렇게 윤동주는 도쿄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그가 쉽게 감당히기 어려운 현실로 가득했다. 이미 전시 동원 체제 속에 있었던 일본의 대학 역시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는 대학 입학 직후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고 정규과목에 있었던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매우 억압된 분위기는 그가 문학가로서 자유롭게 사유하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했다. 윤동주는 이런 현실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nbsp;</p><p>이후 그는 절친 송몽규가 머물던 교토의 대학으로 편입했다. 교토는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고 억압적인 분위기도 덜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절친 송몽규의 수시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 윤동주에 큰 위안이었다.&nbsp;</p><p>두 사람은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교토에서 수시로 만나 타국살이의 어려움을 문학과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달랬고 서로에 위안이 됐다. 하지만 이는 윤동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이미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던 송몽규는 일제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 소위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절친한 인물들 역시 감시 대상이었고 윤동주도 마찬가지였다.&nbsp;</p><p><br/></p><p>4) 감옥에 수감</p><p><br/></p><p>1943년 7월 일제 경찰은 송몽규를 '재 경도(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과 관련해 체포했다. 그와 함께 그와 절친인 윤동주 역시 체포됐다. 당시 윤동주는 전시 체제가 심화되고 강제 징용 등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고향으로의 귀환을 하려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윤동주 등에게 적용된 법은 신 치안유지법이었다. 1925년 제정된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일왕의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목적이었다.</p><p>이 법은 사회주의자들을 겨냥한 법이었지만, 이후 체제 반대 인사들을 포함해 그 범위가 넓어졌다. 일제에 맞선 우리 독립운동가들 역시 이 법에 적용을 받았다. 치안유지법은 그 적용이 권력에 의해 쉽게 악용될 수 있었다. 또한, 그 자체로 매우 비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악법이었다.&nbsp;</p><p>이 법은 1941년 그 범위를 훨씬 넓힌 신 치안유지법으로 개정되어 시행됐다. 전시 체제 속 일제는 이 법을 근거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더 악랄하게 탄압했다. 이 법은 일제 패망 후 폐지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의 기초가 됐다.&nbsp;</p><p>송몽규와 윤동주는 이 법에 근거 조선의 독립 등을 논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았다. 아울러 윤동주에게는 일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를 사용해 시를 집필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유지 보전했다는 죄가 추가됐다.&nbsp;</p><p>결국, 치안유지법에 따라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1944년 3월 31일 2년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됐지만, 윤동주는 20대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고 수감 생활을 고초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됐다. 그리고 광복을 6개월여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투옥 중이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nbsp;형무소 측은 그의 사인을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지만 정황 상 윤동주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이 더욱 힘이 실린다.</p><p><br/></p><p>5) 우리말 시집 발간</p><p><br/></p><p>그의 지인들의 노력으로 그의 작품들은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우리말 시집으로 발간됐다. 1948년 1월 그의 유일한 작품집이자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이 마침내 세상에 그 모습을 보였다. 이 작품집에는 윤동주가 집필한 31편의 작품이 실렸다.<br>이 작품집에는 애처 그가 연희전문학교 시절 발간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우리말 시집 원고와 함께 그의 절친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유품에 포함된 그의 작품이 포함됐다. 앞서 그의 원고는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 후배 정병욱이 각각 1부씩을 보관했다. 이 중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의 원고는 소실됐다.<br>정병욱의 원고 역시 그가 강제 징용되면서 유실될 위기에 놓였지만, 정병욱은 징용되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전남 광양의 고향집에 그 원고를 맡겼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이니 꼭 지켜달라는 당부를 전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 원고는 집안 깊숙이 숨겨졌다. 마침내 광복이 찾아오고 정병욱은 극적으로 전쟁에서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윤동주의 원고 역시 무사했다. 그렇게 그의 중요한 원고가 지켜졌다.&nbs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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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4-01 19:05: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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