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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 S. 루이스의 이야기들 by 박정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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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책을 읽고 난 후 여러분의 감상들을 써주세요!</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5-07-15 08:39: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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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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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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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15 08:39: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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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책 감상 계획</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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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C.S 루이스의 &lt;스크루테이프의 편지&gt;를 읽기로 결심한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p><p><br/></p><p>먼저 이 책을 '2주'의 기간 동안 읽는 것이 목표입니다. 책을 읽고 정해진 분량에서 자신의 감상 제목 혹은 해당 이야기를 요약한 자신 만의 제목을 써주신 후 챕터마다 인상 깊었던 문장 또는 질문을 페들렛에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p><p><br/></p><p>읽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챕터마다 기한도 정해 놨으니 맞춰서 따라오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자신만의 독서 습관이 있다면 굳이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p><p><br/></p><p>이렇게 페들렛으로 함으로써 같이 읽는 다른 사람들의 감상도 읽어보며 반응을 남기는 것도 환영입니다!</p><p><br/></p><p>그럼 시작해봐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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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17 05:48: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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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페들렛 작성 가이드북(해명 간사님Version)</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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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p><p>책을 읽고 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겁니 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어떻게 기록하고, 남기는지에 따라 기억이 조금 더 나거든요.</p><p>아래에 제시된 내용으로 찬찬히 따라오세 요. 그러면, 읽은 책 내용이 우리의 삶과 행 동으로 흡수되고 연결될 것입니다.</p><p><br/></p><p>1. 챕터별 읽고, 인상깊은 문장/문단을 밑줄치세요.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읽기'는 깊이있게 사 고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모든 내용 을 다시 읽을 수는 없기 때문에 밑줄 을 치며 다시 읽을 문장을 발견합니다.</p><p><br/></p><p>2. 밑줄 친 문장/문단을 여기 패틀릿에 옮겨 적습니다. 뒤에 간단하게 나의 생 각을 정리해봅니다.</p><p>• (1) 공감, 재서술 : 동의하는 부분 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입니다.</p><p>• (2) 생각 추가 :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인지하고 어떤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는지 기술합니다.</p><p>• (3) 내 경험(과거) : 해당 문장 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경험을 소개하고 느꼈던 점을 기술합니다.</p><p>• (4) 적용점(미래) : 해당 문장을 통해 앞으로 어떤 행동, 실천을 하고자 하는지 기술합니다.</p><p><br/></p><p>3. 질문을 작성합니다. 읽으면서 발견한, 나의 가슴과 머리에 남아있는 질문을 적어봅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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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17 05:54: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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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체 일정</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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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07/21~22 1-5번째 편지</p><p>-07/23~24 6-10번째 편지</p><p>-07/25~26 11-15번째 편지</p><p>-07/27~28 16~20번째 편지</p><p>-07/29~30 21-25번째 편지</p><p>-07/31~08/02 26~31번째 편지</p><p>-08/03 책 감상 후기</p><p>&nbs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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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17 05:56: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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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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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41p</p><p>&lt;생각보다 교묘하고 치밀한 화자&gt;</p><p>일단 처음부터 3번째 편지까지 봤을 때는 화자에게 속은 듯하다. 화자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p><p>고 읽었다... 너무 단호하고 확신에 찬 말로 조언을 하길래 하나님이라고 마냥 생각했던 것 같</p><p>다... 그러다 4번째 편지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p><p>p35</p><p>‘그 합성물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너는 환자가 바로 그것 자신을 만든 그 위격이 아니라 자신</p><p>이 만들어 낸 그것에 대고 기도하도록 붙들어 매야한다.’</p><p>에서 정말 소름끼쳤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자주 죄를 짓는 것이 나의 욕구가, 나의 주</p><p>장이 더욱 강해질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아주 잘 건드려서 교묘하게 침투한다는 것을 볼</p><p>수 있었다.</p><p>p39</p><p>‘이때껏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수만명의 인간들이 자아보다 고귀하다고 믿는 가치와</p><p>명분에 눈길을 돌릴 수도 있지.’</p><p>정말 화자 즉 악마, 사탄은 우리를 악의 모습도 정말 잘 아는 것 같지만 다시 회심으로 가는</p><p>모습의 길도 잘 안다는 생각에 놀랐던 것 같다. 정말 못됐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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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2 06:16: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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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5번째 편지에 관한 생각」</title>
         <author>gdp20</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6172367</link>
         <description><![CDATA[<p>박경덕</p><p><br/></p><p>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나니아 연대기』와 『순전한 기독교』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소설로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그의 조카 '웜우드'에게 업무상 조언을 전하는 31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인 영적 투쟁을 그리지 않는다.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에서 참과 거짓, 선과 선의 결핍, 왜곡으로서의 악이 한 인간(작중의 '환자)의 '중심(마음)'을 놓고 어떻게 쟁투하는가를 '스크루테이프'의 시선에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p><p>     이 책에서 가장 중심되는 주제는,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듯,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거나–즉,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선과 악, 가장 궁극적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한 투쟁이 순전히 유물론적 쟁론이라 주장하는 것–또 악한 영의 일에 관해 불건전한 관심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성과 죄와 타락의 속성, '속이는 자'로서의 악마의 속성을 조망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영적인 분별과 참된 영성을 위해 사람이 싸워야 하는 싸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p><p><br/></p><p>     첫 번째 다섯 편지의 주제는 장별로 각각 '개인의 지적 탐구'/'교회 생활'/'가정 생활'/'기도 생활'/'전쟁(그밖의 장기간에 걸친 고난)이 영적 투쟁에 차지하는 위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중에 특히 인상깊었던 대목은 1번째 편지와 4번째 편지의 몇몇 문장들이었다.</p><ul><li><p>"(전략)...그래서 어떤 교리를 보아도 '참'이냐 '거짓'이냐를 먼저 따지기보다는 '학문적'이냐 '실용적'이냐, '케케묵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인습적'인 것이냐 '과감한' 것이냐'를 따지게 되었지." (pp. 16)</p></li><li><p>"그러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붙들어 두어야 해. 그것이야말로 '실제의 삶'이라고 믿도록 가르치되, '실제'가 무슨 뜻인지는 절대 묻지 못하게 하거라." (pp. 17)</p></li><li><p>"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strong>일상성</strong>을 환자한테 주입해야 해." (pp. 19)</p></li><li><p>"환자가 제 마음속만 줄창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게 만들거라......(중략)......제가 원하는 감정을 꾸며 내는 데 성공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기도의 성패를 평가하게 만들라구." (pp. 33)</p></li><li><p>"(전략)...'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계시는 당신'...(후략)" (pp. 35)</p></li></ul><p>     1-5번째 편지는 언뜻 보면 각기 다른 화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가 우리 생활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반복되는 '업무방침'이라고 할 만한 것은 결국 '감각적 경험을 통해 실제를 호도하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p><p>     개인의 지적 경험에 있어선, 실제의 구성 요소인 '관념'과 '사물'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하고, '유행'으로 '진리'를 대체하게 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을 대체하는 것이 마귀의 주요한 흉계로 제시된다. 실제의 총체성을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물의 편린이나 '감각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게끔 한다. 그 단편으로부터 다른 모든 지식이나 감정이나 실천을 정당화하고, 결국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아닌,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승인하고 판단하겠다는 인간의 교만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p><p>     교회 생활, 가정 생활,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사실'에 집중하게끔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의 어느 단편에 집중하게끔 한다. '영적인 것'에 치중하면서 현실의 문제는 외면하도록 유도하라고 한다. 사람과 교회에 대해 성경적인 인식 속에서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잣대로 교회 공동체에 관한 기대와 실망을 키워간다.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감정적 작용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그것에만 치중하여 기도의 본질,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을 망각한다. 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기도의 제목으로 삼지 않고 우리의 정념을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도록 충동한다.</p><p>     정리하자면, '속이는 자' 마귀가 하는 일은 '사실'의 편린을 가지고 '전체'를 호도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람에게 어떠한 감정이나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영과 육으로 범죄한다. 그러나 마귀가 하는 일은, 성경과 일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일, 주지주의, 주정주의, 주의주의, 관념론, 유물론과 같은 현학적인 단순함으로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p><p><br/></p><p>다음 정리글부터는 좀더 개별적인 주제에 집중해 봐야겠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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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2 16:23: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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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un Myeong</title>
         <author>a01082259861</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7020008</link>
         <description><![CDATA[<p>&lt;주님을 가리는 일상성&gt;</p><p>"이제는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 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일상성을 환자한테 주입해야해." (17p)</p><ul><li><p>우리가 말씀, 설교, 기도 등을 통해 주님께 다가가려는 것을 막는 커다란 원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계속 다가가려고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주님의 말씀보다는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진짜라고 믿고 주님을 한 발짝 멀리 떨어뜨림으로서 일상과 하나되는 신앙적인 삶을 막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p></li></ul><p><br/></p><p>&lt;우리 모두는 결함이 있다&gt;</p><p>"단지 환자의 머리 속에 이런 질문만 떠오르지 못하게 하면 돼. '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만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 할 수 있겠는가?" (24p)</p><ul><li><p>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남의 결함을 돋보기로 보기 보다는 우리 모두는 각자마다 부족한 점과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p></li></ul><p><br/></p><p>&lt;우리가 만든 가짜 하나님&gt;</p><p>"그 합성물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너는 환자가 바로 그것 - 자신을 만든 그 위격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그것 - 에 대고 기도하도록 붙들어 매야 한다. 환자를 잘 부추겨서 자신이 만든 합성물의 내용을 끊임없이 바로잡고 향상시키는 일에 튼 의미를 부여하게 하고, 기도하는 내낸 그 합성물을 눈앞에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 (35p)</p><ul><li><p>우리는 보통 기도를 할 때 주님께 솔직한 나를 내어드리는 대신 우리가 원하거나 어릴 때 배웠던 형식적인 기도를 통해 가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 같다. 단지 내 기분이 편해지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서 등등으로. 이러한 기도는 나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기도이다.</p></li></ul><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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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3 13:32: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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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7761602</link>
         <description><![CDATA[<p>&lt;너무 쉽고 나약한 인간..&gt;</p><p>p45</p><p>‘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p><p>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p><p>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p><p>이 구절을 읽으니 더욱 확신해졌다. 어쩌면 내 삶에 악마가 위에서 나를 지배하며 쳐다보고</p><p>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나 또한 선의는 왠지 모르게 더 어렵고 먼 곳에 있고 굉장히 추상적</p><p>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악마에 이미 져버린걸지도..</p><p>p54</p><p>‘원수는 자신을 작게 복제해 놓은 이 혐오스러운 인간들’</p><p>정말 불행 중 다행인걸까 내가 악마에게 졌을지 몰라도 그 나의 하나님은 악마보다도 더 위에</p><p>계시고 그것을 악마 또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하는 말들도 많이 나오는 것 같다.</p><p>그리고 또 어쩌면 나보다 악마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p><p>p58</p><p>‘어떤 쾌락이든 건전하고 정상적이며 충만한 형태로 취급하는 건, 어떤 점에서 원수를 유리하</p><p>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거라.’</p><p>나는 최근들어 나의 기분이나 상태들을 보고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합리화를 시키곤 한다. 그것</p><p>은 내가 오직 인간이라서 타락한 상태라기보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나약하고 한없이 부족</p><p>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점에서는 그냥 쾌락에 빠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지만</p><p>이 쾌락 또한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원수가 이기지 못한다고 더 위대하다고 더욱이 나의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었다.</p><p>p60</p><p>‘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p><p>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p><p>지.’</p><p>역시 세상 사람들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종종 유튜브나 릴스를 보다 보면 기독교에</p><p>대해 믿는 것도 적당히 믿어야 한다고, 지나치면 광신도 같아서 싫다고 하는 댓글들을 본 적</p><p>이 있다. 하마타면 그렇게 생각할 뻔도 했다. 고민도 했었다. 적당히 믿는 것은 대체 무엇이</p><p>고, 그게 맞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만큼 진</p><p>심을 다해 믿었던 것 같다. 그건 후회하지 않는다. 이 구절을 읽으니 악마에게 위협당하는 나</p><p>를 회상하게 되었던 것 같다.</p><p>p64</p><p>‘환자가 충분히 쓸만한 얼간이라면, 친구들이 곁에 없을 때에만 그들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p><p>함께 있을 때에는 모든 비판력을 싹 실종시킬 수 있지.’</p><p>내가 딱 이 말대로 학교생활 한 것 같다. 친구들이랑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p><p>으로 살기보다는 평범한 그 세상 나이대에 맞는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p><p>다가 친구들이 아닌 아벱동아리나 교회에 갔을 때는 엄청 은혜로운 자리에서 믿음을 고백하곤</p><p>했다. 이런 나의 이중성이 참 말이 안되지만 어쩔 수 없단 핑계로 합리화했던 것 같다. 여기</p><p>화자가 말하는 대로 매번 다른 사람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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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4 08:32: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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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준명</title>
         <author>a01082259861</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7935792</link>
         <description><![CDATA[<p>&lt;멀리 떨어져 있는 선의&gt;</p><p>"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45p)</p><ul><li><p>선의를 품어야 하는 대상은 모호하게 하면서 악의를 대상들은 명확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세상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차 우리가 선의를 품지 않아서 이지 않을까? </p></li></ul><p><br/></p><p>&lt;하나님의 사랑보다 중요한 대의 명분&gt;</p><p>"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51p)</p><ul><li><p>우리의 목적에 하나님이라는 수단을 끼어 넣을 때 더욱더 우리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실상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상일 뿐인 것 같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나 IVF에서 하는 일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주님의 사랑의 섭리가 들어가 있는지, 그게 아니면 단지 우리의 욕심인지를 스스로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p></li></ul><p><br/></p><p>&lt;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자 아들&gt;</p><p>"원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 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에도 의지의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물로 자라가는 게야. 그러니 이렇게 메마른 상태에서 올리는 기도야말로 원수를 가장 기쁘게 할 수밖에." (55p)</p><ul><li><p>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랑을 바라지만, 주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장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해야하는 것도 있다.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의지로 이루어내야 한다. </p></li></ul><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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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4 13:56: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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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pp. 66, 박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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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애국심이든 평화주의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일부로 생각하게 하거라." (pp. 50)</p><p>"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니 마찬가지지." (pp. 51)</p><p>- 신앙을 하는 일은 단순히 율법주의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이유도 주님에 대한 외경심과,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하나되고자 하는 마음의 발현이고, 우리로선 언제나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일'의 기준을 우리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 같다.</p><p>     사회적 어젠다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인간에 대한 기대를 총체적으로 담지하지 않고,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기준을 상정하고 거기에 준해 믿음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일반 성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목회자, 성직자들도 마찬가지다.</p><p>     이것에 대한 해독은 무엇일까? '따분하고', '꽉 막히고', '학술적이지 않고', '세련되지 않은' 답일 순 있겠지만, 결국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계신 것들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p><p><br/></p><p>"원수가 바라는 건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전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pp. 54)</p><p>- 사랑이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이 말들이 참 적절한 것 같아 골라봤다. '함께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과 동행하는 것'.</p><p><br/></p><p>"인간은 자신이 가장했던 대로 변하는 법이니까." (pp. 63)</p><p>- 이 편지에서 '가장'의 문제는 단순히 작중의 '환자'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데만 주효한 전략이 아니다. 그가 인생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를 훼방놓기 위한 것이다. 그의 생활의 내면과 외면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막고 표리부동한 인간관계로 끌고 가기 위한 술책으로 제시된다. 그러면서 그의 양심은, 성도로서의 내면과 외적 생활의 총화를 이룸으로써 더 성숙한 영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 다중인격적인 크리스천을 세상에 뿌리는 것이 사탄이 원하고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p><p><br/></p><p>"이 '청교도주의'라는 말에 부여한 가치야말로 지난 백 년 사이에 우리가 얻어 낸 확실한 승리 아니겠느냐?" (pp. 64)</p><p>- 미덕과 검소하고 간소한 삶, 경건한 삶과 같은 주제는 어느샌가 우리 사회에 일반에선 찾아볼 수가 없는 화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선과 악, 미덕과 악덕의 문제는 없어지고 개인의 외양과 재물에 관한 화제가 모든 것을 잠식해버린 것 같다.</p><p>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영적인 경건과 성숙을 얘기하면 낯간지럽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예수님도 아니고" 하는 말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경건하고 절제된 삶과 지금 우리의 현실을 절충/타협하기 위해 곧잘 쓰이는 변명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마5:48). 성경이 하라고 한 것 가운데 우리가 하지 않았을 때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성경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범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항변할 순 없는 일이다.</p><p>     우리는 연약한 존재기에 매사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를 간구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세상의 기준에서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너무 '과하고', '힙하지 않고', '세련되지 않아서' 라는 이유로 우리의 기도제목이 하나님께서 우리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들에서 멀어져서는 안될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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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4 23:16: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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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준명</title>
         <author>a0108225986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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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lt;점점 주님과 멀어지는 길&gt;</p><p>"그는 원수를 진짜 만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기도가 비현실적인게 되길 바라거든. 그의 목적은 되도록 양심의 가책을 일깨우지 않는 것이지." (74p)</p><ul><li><p>우리는 말로는 주님께 회심을 바라면서 정말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회심되어야 하는 것들이 생각나면 내가 이것을 정말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고 이전에 것들을 포기하기 힘들게 되는 것 같다. 주님께 바뀌고 싶어도 내안에 생기는 이전 것에 대해 다시 돌아가고 싶은 탄력성은 우리를 회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거나 지연 시킨다. 75p에 "이제 보니 나는 해야 할 일도 하나 못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나 못 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 버렸구나"에서 느낀 것은, 악마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모호한 불안함과 죄에 익숙해져서 주님께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이 생각을 버리고 내가 연약한 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 그럼으로 인해 다시 주님과 나아가는 것이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 같았다.</p></li></ul><p><br/></p><p>&lt;우리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gt;</p><p>"원수가 자아를 버리라는 건 아집으로 소리치고 주장하기를 그만두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집을 버리고 나면 진짜 각자의 개성을 전부 돌려준다구. 원수는 인간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정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79p</p><ul><li><p>악마는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고 하길 원하는 것들에 집중하기 보다 세상에 관습, 유행에 따르게 하고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서 진정한 우리를 잊게 만든다. 진정한 우리를 찾으려면 주님 앞에서 솔직한 나를 드리는 것으로 찾을 수 있다. 세상과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적극적인 습관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이유를 잘 모르는 습관을 드릴 수록 우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우리가 결심한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p></li></ul><p><br/></p><p>&lt;겸손 그 진정한 가치&gt;</p><p>"원수는 결국 인간이 자신에게 유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이웃이 가진 재능을 보 때와 똑같이, 해 뜨는 광경이나 코끼리나 폭포수를 볼 때와 똑같이, 자신의 재능 또한 솔직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길 바라는 거다" (85p)</p><ul><li><p>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세상에 비교함으로서 내가 몇 번째로 나은 사람이구나 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아마 열등감도 이렇게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내가 가진 재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겸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현재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미래의 두려운일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해 봐야 한다.</p></li></ul><p><br/></p><p>&lt;현재의 생각해야 한다&gt;</p><p>"다만 내일 실천해야 할 정의나 자비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길 바란다.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오늘의 의무니까. 모든 의무가 그렇듯이, 그 재료야 미래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현재 아니냐." (90p)</p><ul><li><p>우리는 현재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미래를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것도 결국 현재에서 하는 일이고 현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의 일어날 일에 불안에 휩싸여 아무런 일도 못하는 것이야 말로 악마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 맡기고 감사와 인내로 나아가야 한다.</p></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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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6 08:53: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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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9845961</link>
         <description><![CDATA[<p>&lt;악마가 좋아하는 삶은 어쩌면 이도저도 아닌 방황하는 삶??&gt;</p><p>p76</p><p>'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데다가, 갈랫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p><p><br/></p><p>우린 이러한 길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고 취향도 없는 채 그냥 숨쉬기만 반복하는 의미없는 삶이 일상이 되어가는 채 지옥행인지도 모르는 길로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표를 확실히 정하고 쉽지 않는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p><p><br/></p><p>p81</p><p>'이 새로운 회개에 대해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전혀 문제 될 게 없어.'</p><p><br/></p><p>'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 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p><p><br/></p><p>너무 공감하는 말이다. 내 의지가 있는 한 습관은 잘 형성되지만 없다면 안하게 된다. 나 또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행동으로 실천을 하다가 안하니 습관이 들여지지 않고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다 결국 느낄 수 조차 없게 된다면 아주 악마에게 유혹당하고 지는 게 아닐까 싶다..</p><p><br/></p><p>p90</p><p>'따라서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p><p><br/></p><p>'모든 의무가 그렇듯이, 그 재료야 미래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시점은 현재 아니냐.'</p><p><br/></p><p>과거와 미래 현재 등을 이러한 시점에서 바라본 적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항상 되돌아보니 감사였고 야망과 정욕들은 내가 이렇게 하고싶다, 하겠다 라는 다짐에서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할 수 있는 현재가 아닐까 싶다.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랑을 행할 수 있는지, 행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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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8 05:07: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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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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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lt;시대에 따라 달라는 악의 인식?&gt;</p><p>p101</p><p>'우리가 보기엔 감각이 지금처럼 까다롭지 않았고 다른 것에서 얻는 쾌락들도 많아서 식탁의 쾌락에 이 정도까지 매달리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p><p><br/></p><p>지금 이 시대 사회는 너무나 느낄 풍족한 음식과 자원들이 많아서 전에는 까다롭지 않았던 게 까다롭게 되고 엄격해지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 풍족에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p><p><br/></p><p>p106</p><p>'한 자아에게 좋은 것은 다른 자아한테도 좋은 것이고, 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천편일률적인 만병통치약은 그 작자가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작자의 모든 성품 저 자신의 주장에 따른 성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에서도 감지해 낼 수가 있다. '</p><p><br/></p><p>이 하나님의 진리를 원수인 악마도 너무나 잘 알고있는 듯하다. 나에게도 좋은 게 다른 사람에게도 좋고, 다른 사람이 좋은 게 나에게도 좋아지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몸으로 느껴보질 못하고 있다. (이것도 악마의 짓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러한 성품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는 걸 알지만 아직 잘 모르겠고 꼭 인격적으로 만나고 느껴서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싶다..</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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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8 05:20: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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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준명</title>
         <author>a01082259861</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29977080</link>
         <description><![CDATA[<p>&lt;교회 비평가&gt;</p><p>"원수가 바라는 건, 거짓된 것이나 무익한 것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진정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 즉 자신이 거부하는 대상에 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앞으로 양분이 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토를 달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 전적으로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야." (94p)</p><ul><li><p>나에게 필요한 것이나 나의 일상에서 잘못되고 거짓된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설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실재로 최근 설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 기억에 남고 또 그런 부분을 찾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p></li></ul><p><br/></p><p>&lt;하나님의 진짜 동기?&gt;</p><p>"사랑에 관해 그 작자가 한 말들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위장술이 분명하다. 인간을 찾도해 놓고 그렇게나 수고스럽게 애쓰는 데에는 무언가 숨겨진 진짜 동기가 있는 게야" (111p)</p><ul><li><p>왜 작가는 악마 입장에서 이렇게 썼을까 궁금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악마입장에서 이해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짜 동기가 정말로 있는 건지.</p></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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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28 08:40: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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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32611904</link>
         <description><![CDATA[<p>&lt;악을 이기고 있는 환자?&gt;</p><p>p136</p><p>'우리가 바라는 바, 정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인간들이 기독교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이용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라도 하다못해 사회 정의를 위한 수단으로라도 삼게 해야지.'</p><p>p137</p><p>'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 수법이야.'</p><p><br/></p><p>나 또한 기독교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을 찾는 많은 이유 중에 자기가 힘들어서 기도하고 교회에 나가는데, 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라도 근근본적으로 이유를 찾아가다보면 나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찾는 것이 맞는 지 나 또한 많은 고민으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것에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기독교가 진리라고만 믿고 생각한다면 수단으로 이용해도 하나님은 그것마저 기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 그자체로 생각한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p><p><br/></p><p>p145</p><p>'이렇게 인간에게는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원수는 인간이 먹는 걸 즐기듯이 변화도 즐기게 해놓았다.'</p><p>'그러나 먹는 것이 그렇듯이 변화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곤란하니까 불변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어 변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균형을 맞추어 놓은 게야. 그러고는 변화와 불변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이 두 취향이 다 만족될 수 있도록 고안해 두었지.'</p><p><br/></p><p>악마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함을 묵상할 수 있었다. 뒤에 나오는 내용에서도 계절이 해마다 같지만 다르게 해놓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정말 정교하고 치밀하게 세상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놀라웠다. 이 불변과 변화의 결합 때문에 익숙하다가 지겨울 때면 또 새로운 계절로 다시 새 마음을 주시는 것 같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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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31 04:34: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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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준명</title>
         <author>a01082259861</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32828222</link>
         <description><![CDATA[<p>&lt;내 것이라는 욕심&gt;</p><p>"현대 세계가 순결에 그렇게나 반발하는 것도 '내 몸은 내 것' 이라고 믿는 탓이다. 육체라는 광막하고 위험천만한 땅, 세상을 만들어 낸 에너지가 고동치는 그 땅에 자신들의 동의로 거하게 된 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이' 의 뜻에 따라 그 땅에서 물러나야 하는 주제에들말이지!" (124p)</p><ul><li><p>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을 막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욕심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나누기를 꺼려하는 것을 넘어서 배려, 사랑 등을 그들에게 주는 것을 막는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 선물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 자각해야만 한다.</p></li></ul><p><br/></p><p>&lt;진정한 쾌락&gt;</p><p>"원수는 내심으로는 영락없는 쾌락주의자다. 금식이니 철야기도니 화형주니 십자가 같은 건 눈속임에 불과해. 아니면 바닷가에 밀려드는 물거품 같은 것이거나. 원수의 바다로 나가보면 쾌락, 더 많은 쾌락이 넘실거린다. 원수도 이 사실을 숨기려하지 않지. 그 작자 우편에 '영원한 즐거음'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128p)</p><ul><li><p>쾌락주의자라고 하면 부정적인 것이 먼저 떠오르는데 예수님을 쾌락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이 신기했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쾌락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쾌락이 아닌 하나님안에 거하면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말하는 것 같다. 특히 앞장에서 쾌락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것에서 인상깊었었다.</p></li></ul><p><br/></p><p>&lt;역사적 예수&gt;</p><p>"그러니 새로운 '역사적 예수'를 만드려면 이미 있는 기록에서 어떤 점은 묵살하고 어떤 점은 과장하며, 일상생활에서는 단 10실링도 걸지 않을 추측(우리는 이럴 때 기발하다는 말을 쓰도록 가르치고 있다)들을 동원해야 하는 게야" (134p)</p><ul><li><p>성경에 있는 여러 분문들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다는 것이 인상 깊었는데 실제로 기독교의 흑역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실재로 했던 것들이 성경의 내용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왜곡해서 사람들을 착취, 선동, 정당화 시키는 것들이 이런 것인 것 같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한 가상의 예수님을 믿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할 명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무서운 것 같다.</p></li></ul><p><br/></p><p>&lt;영적 교만&gt;</p><p>"그네들은 자기들과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들은 그야말로 어리석고 우스운 사람들일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억측을 가지고 있다." (138p)</p><p><br/></p><p>"이 모든 생각에 은근한 자긍심을 뒤섞어놓되, '내가 정확히 무엇에 자긍심을 느끼는 걸까?'라는 의문만은 절대 품지 못하게 하는 거다." (142p)</p><ul><li><p>우리의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라는 기준이 정말로 영적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서로 맞는 것이 많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이곳을 편히 느끼고 있어서로 가면 안된다. 사실 우리가 앞으로 만날 공동체는 나한테서 불편한 사람, 공동체일 경우가 더 많은데 그런 공동체를 그저 영적으로 부족한 그런 공동체로 취급을 하게 될 경우 주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가지 않는다. 특히 내가 더 지식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그들을 얕보는 행위도 그러한 것 같다. 어느 책에서 영적 성장은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비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랑 비슷한 것 같다. 나도 IVF에서 특히 옛날 연대 IVF에서 느꼈던 느낌을 다른 공동체 비교하고 평가했던 때가(최근에 까지)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부족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에게 편한 사람들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p></li></ul><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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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31 08:35: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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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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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ul><li><p>"경박함은 다른 웃음의 근원들과 달리 위험요소가 전혀 없지. 기쁨과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가 지성의 날을 벼리는 대신 무디게 만들며, 그렇다고 함께 웃는 사람들 사이에 애정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거든." pp. 71</p></li></ul><p>   유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관조하며 가볍게 넘기는 데 좋은 수단이다. 적절한 농담으로 인한 웃음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때때로 농담이 단지 어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상대의 정당한 지적과 반응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p><p>   적절한 해학과 경박함을 구분하는 경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신 말씀처럼(마7:16) 우리의 말이 성령의 열매(갈5:22)를 맺는지를 유심히 보고, 말을 하는 사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p><p><br/></p><ul><li><p>"고통과 쾌락은 너무나도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속되는 한 현실의 시금석 노릇을 하게 될  뿐이다." pp. 78</p></li></ul><p>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얻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가 쓴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현재와 약속된 영원에 관한 확고한 감각으로 살기 보다는 우리 안에 떠오른 막연한 환상을 근거로 기대를 품거나 두려움을 갖는다.</p><p>   고통과 쾌락과 같은 감각은 우리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로 다시 불러들인다. 우리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 아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우리의 감각을 집중시킨다. 고통을 초래하는 결핍과 쾌락을 주는 충만을 통해 우리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언지, 나의 허위의식과 모순을 드러낸다.</p><p>   외적인 현실과, 감각적인 경험과, 인지적인 작용이 가장 뚜렷한 통일성을 가졌던 시기는 내가 나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명확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p><p>   어쩌면 하나님께선 우리의 현실감각을 위해, 기대와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우리를 만드시려고 고통과 쾌락을 만드셨는지도 모르겠다.</p><p><br/></p><ul><li><p>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pp. 81</p></li></ul><p>   국군대구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병원 내 교회에 계신 전도사님으로부터 교리문답을 빠르게 3일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에 화인(火印)을 남긴다.'</p><p>   물집이 벗겨지면 굳은살이 배기듯, 화상을 입으면 피부가 회복되더라도 촉각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는다고 들었다. 적극적인 습관으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지 못한다면, 결국 수동적이지만 확실한 죄악이 우리의 영적 감각을 마비시킨다.</p><p>   우리의 영적인 지성과 감수성이 의지와 실천의 영역으로 이어지지 않고, 영적인 성숙이 정체된다면, 결국 우리가 소홀했고 취약을 드러냈던 지점에서부터 우리의 영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p><p>   요즘 내가 어떤 지점에서 무너지고 있는지, 어디에서부터 회복해야 할지 잘 진단해 봐야겠다.</p><p><br/></p><ul><li><p>"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pp. 84</p></li></ul><p>   긍정과 낙관은 다르고, 사실과 비관도 다르다. 겸손과 부정도, 비판과 허영심으로 말미암은 냉소 또한 그렇다. 이 책의 모든 편지들을 첫째 날 다 한 번씩 읽어보았다. 작중 '스크루테이프'의 괴계 중 가장 일관된 시무방침이라고 할 만한 것은 '기망'이다.</p><p>   무엇을 어떻게 속이는가? 참인 것을 거짓이라 속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거짓과 거짓 가운데 참을 고르라 속이는 것에서부터,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까지, 다양한 문제와 공식을 제시하지만 결국 본질은 속이는 일인 것이다.</p><p>   겸손의 문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 오도하기 쉬운 대목인 것 같다. 특히 개인의 자질에 관한 평가는 많은 경우 상대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평가자가 그 상황에서 비교하고 있는 표본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의 평가는 그 평가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맥락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적당한 호의를 표시하거나 아첨하기 위해, 혹은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p><p>   많은 '평가'와 '평론'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자질에 관한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설령 그것이 단순한 칭찬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겸손'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판단을 부인하거나 심한 경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남들이 세운 칭찬의 탑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또는 단순히 내가 상대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p><p>   우리의 미덕, 혹은 역량 가운데 거짓과 가식의 싹을 조기에 뿌리 뽑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어진 상황에서 정직하되 다른 이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무례하지 않는 것, 삼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p><p><br/></p><ul><li><p>"우리가 바라는 건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모든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pp. 91</p></li></ul><p>   42쪽부터 46쪽까지의 여섯 번째 편지의 내용과 결부해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또 26쪽부터 30쪽까지, '환자'와 '어머니'의 관계를 어떻게 활용할 지에 관한 '스크루테이프'의 조언과도 연결할 만한 대목인 것 같다.</p><p>   신앙생활에 열의를 품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목표와 꿈을 크게 잡기 마련인 것 같다. 개인의 생활에 있어선 과거의 성인과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고 싶을 것이고, 지성에 있어선 교회사의 위대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있고자 할 것이고, 공동체적 실천에 있어선 교회 안팎에서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내거나 교회의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할 것이다.</p><p>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계명을 통전적으로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섬기고 누리게 하신 모든 것 가운데 일부를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부를 위해 희생제물로 살라버리는 범죄를 범하는 것 밖에는 안될 것이다. '복음'을 위해 '이웃'을 희생한다면, '이웃'을 위해 '복음'을 희생한다면, 그 외에 다른 어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가벼이 여기고 다른 어떤 것은 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이미 독성죄, 참람죄(blasphemy)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p><p>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 말씀이 우리의 비전과 목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가운데 살도록 부름받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치유되어야 하는 아픔이 있고, 교제해야 할 사람이 있고, 기도해야 하는 제목이 있다. 누려야 할 즐거움이 있고, 겪어내야 할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일만 고민하기에도 부족하고 지치는 인생인데, 내일의 일이나 먼 곳의 일을 위해 괴로워 하는 것이, 비록 꼭 필요한 일임에도, 항상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만은 않는 것 같다(마6:34).</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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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31 08:51: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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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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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교회 출석이라는 이 증세가 나아지지 않을 시에는, 차선책으로 자기한테 '맞는' 교회를 찾아 주변을 헤매다니다가 결국은 교회 감별사 내지 감정사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pp. 93</p><p>   군대를 전역할 즈음에 전역하고서 등록할 교회를 찾고 있었다. 그때 사단 군종병으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처음부터 막 가까워지지는 말고 유보적인 태도로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기억이 있다. 또 복학한 후에 '맞는 교회'를 찾아 여러 교회를 돌아다닌 뒤 성공회 교회에 정착 형과 함께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한창 신앙적 열심이 극성이었을 무렵, 그 형이 '너는 절대 고신 성향은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p><p>   COVID-19 팬데믹 기간을 전후해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고, 국내의 여러 교회의 설교 영상들이 다양한 플랫폼에서 여러 형태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이따금 주일 오전 예배 때 설교에서 목사님께서 '듣지 말아야 할 목사, 설교'를 지나가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간간히 있다. 대체로 인기 있는 국내 목사 가운데 당신께서 보시기에 '성경적이지 않거나' '정파적인'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주로 거론하신다.</p><p>   각종 신앙서적뿐만 아니라, 온갖 매체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 우리는 분별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교회에서, 모임에서, 선교 단체에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혹은 어떤 교회/교파가 나와 맞는지 판단하는 일에 유익이 있다고, 또 그 가운데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p><p>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 교회와 신학을 떠나선 구원이 없으며, 오직 '올바른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말을 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여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사의 대부분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교회 혹은 교파를 고를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근대 이전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가 가톨릭이면 가톨릭 교회를, 루터회면 루터회 교회를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발칸과 러시아, 이집트를 비롯한 동방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중요한 선택은 이 교회냐 저 교회냐가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시인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한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였다.</p><p>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어 올바른 교회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변화된 심성을 얻지 못하고, 은혜 없이는 믿음 가운데 성화된 삶을 누릴 수 없다. 세상 읽기 어려운 복음서와 계시록을 남긴 사도 요한이 정작 자신의 서신서에서는 오직 사랑만을 유독 강조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신앙의 본질은 복잡한 이론이나 신학이 아닌 간명함과 단순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p><p><br/></p><p>"(전략)...우리한테 흡수란 강한 자아가 약한 자아의 의지와 자유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한다'는 뜻이야." pp. 105</p><ul><li><p><em>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em>(사5:8)</p></li></ul><p>   교회에서 설교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시사적인 이야기도 나오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성경을 곧이 곧대로 인용하면서 국가나 사회에 관해선 그러는 경우나 설교를 잘 본적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특히 사회 제도에 있어서, 국가 경영에 있어서 윤리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는 많이 이야기하더라도,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문제 삼는 구절들은 인용되는 경우를 적어도 내 일천한 경험 가운데선 잘 보지 못했다.</p><p>   그리스도께서도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분명히 선포하셨다(마5:18). 그런데 근 수년 간 교계의 동향이나, 일상에서의 화제를 생각해보면 어떤 것은 율법이고 어떤 것은 계명이 아닌 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사안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일이고, 어떤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서도 말이다.</p><p>   우리는 시대와 사회라는 특수성 속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이루라는 부르심을 받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인간적 한계를 시인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강령과 원칙에 있어서 무엇은 더하고 무엇은 빼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제자된 도리를 져버리고 있는 것과 다름아닐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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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7-31 10:43: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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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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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trong><em>"인간들은 단순히 불행이 닥쳤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불행이 권리의 침해로 느껴질 때 분노한다. 이렇게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의식은 자기의 정당한 요구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거야." pp. 121</em></strong></p><p>   바야흐로 '공정'을 갈망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말로 사람들은 공정을 바라고 있을까?</p><p>'공정'을 바라면서 공정을 위한 형평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형평에 있어서도 어떤 정책은 '공정'에 기여하고, 다른 어떤 것은 해악이 된다는 둥, '공정'을 위한 '공평'을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p><p>   나는 근래의 사회적 논의의 향방에 관해 별로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감정적 언어를 보건대, 그 중심이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p><p>   물론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특별한 열심으로, 존경할 만한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 논쟁장의 최전선에서 대화와 실천으로 투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해 있는 전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의 조류가 참여하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비전을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걸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 흐름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 아닌 '자신'(혹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 삶, 미래'를 '침해'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반대와 항쟁이다.</p><p>   지난 십여 년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 편만해진 분노의 언어는 '정당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녀찾기'의 언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치인, 특정 정파적 입장, 특정 사회•경제적 계층 등등, 단순한 혐오의 분출이든지, 책임 있는 사람을 추궁하기 위함이라는 세련된 명분을 입고 있든지 매한가지다. 탓할 대상을 찾고 있을 뿐이다.</p><p>   당장 맞닥뜨린 현실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과업을 위히 각자 책임질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기 보단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 담론과 정파적 논쟁에 골몰하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서 행복과 사랑, 그리고 헌신에 관한 논의는 요원해 보인다.</p><p>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권리'가 있기 때문에 창조하지 않으셨다.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으로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편무적인 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으로 드러내셨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그러할 것을 주문하셨다고 생각한다.</p><p>   한 주체가 베푸는 사랑이 '정당하고' 한다면, 그 말엔 이미 호의와 사랑에 조건을 결부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사랑의 개념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 것이다. 한 주체의 사랑이 그 대상의 '권리'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상대의 사랑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상대의 '사랑'을 사랑이 아닌 상대의 자신에 대한 '의무'로 치환하고 있는 것과 다름아니다.</p><p>   최근 전개되고 있는 공정에 관한 논의와 불건전한 분노의 표출을 보고 있을 때, 책임과 헌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적고, 권리와 배려, 배제와 방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주로 눈에 띈다. 정당한 권리와 공정이 무엇인지 논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하겠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p><p>   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다닐 것이라면, 내가 먼저 책임지고 헌신하고 사랑하느라 지친 후에 그리스도께서 싸매 주시길 기다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판단하고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다니는 것보단 지금 내 자리에서 헌신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한 것이 더 유익한 것 같다.</p><p>   어렵겠지만, 조금씩 살아가다 보면 연습이 되겠지.......<br></p><p><strong><em>"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가 어떤 인물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pp. 134</em></strong></p><p><strong><em>"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 수법이야." pp. 137</em></strong></p><p>   기독교 신앙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하고 그것을 준거로 행동하는 것으로 성장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러나, 특히 지적이고 시사적인 관심이 투철하거나 기독교 신앙에 거는 기대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사람일수록, 통전적인 진리에 소망을 두기 보단 자신이 안고 있는 갈등과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몰두하는 것 같다. 물론 성경과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문제인식과 의식이 성경과 같은 축을 이루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p><p>   성경은 세상에 들어온 죄의 문제에 관한 책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죄의 문제에 관한 해독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이 하나를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어떤 죄악을 위해 다른 죄악을 제물로 사르는 일에 치중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p><p><br/></p><p><strong><em>"따라서 네가 할 일은 이 모든 생각에 은근한 자긍심을 뒤섞어 놓되, '내가 정확히 무엇에 자긍심을 느끼는 걸까?'라는 의문만은 절대 품지 못하게 하는 거다." pp. 142</em></strong></p><p>   교회의 전통과 믿음의 선진들에 관해 합당한 존경을 품는 일은 바람직하고 건강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긍심'으로 전화했을 땐 자신이 이루지 않은 일에 관해 스스로 인정하고 포상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교만과 독선과 아집으로 이어지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직접 획득하거나 성취하지 않은 지위를 역사와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상속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인 것 같다.</p><p><br/></p><p><strong><em>"우리의 바람은 이왕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와 무엇무엇'이라는 심리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중략)......신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유행을 들어앉히거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감정을 파고들라 이 말이야." pp. 144-145</em></strong></p><p><strong><em>"각 세대마다 가장 덜 위험한 악은 반대하면서 우리가 그때 그때 퍼뜨리고 싶은 악에 가장 가까운 미덕은 찬성하도록 유행의 구호를 몰고 가면 된다구." pp. 147</em></strong></p><p>   뭔가 고르는 문장마다 계속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IVF에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있으면서 느낀 점과 맞닿아 있는 주제라 계속해서 고르고 있는 것 같다.</p><p>   어떤 주제를 세련되거나 돋보이게 만드는 작업 중 대표적인 것이 원래의 주제에 새로운 키워드를 가져다 붙여보는 일이다. 이는 해당 주제에 관해 새로운 측면을 부각하거나, 기존에 우리가 간과했던 어떤 측면을 재조명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키워드들이 그 주제에 대한 한정사로써 기능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창조적이기 위해 이런 언어를 썼지만, 신앙의 현장에선 시야가 좁아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p><p>   특히 본질이 아닌 어떤 특성과 성품 자체를 좇게 될 경우, '혁신성'이라든지 '전통성'이라든지, </p><p>본질을 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br></p><p><strong><em>"원수는 상투적인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 인간들이 행동을 하기에 앞서 아주 단순한 질문들을 던지길 바라지. 이를테면 '옳은 일인가', '신중한 일인가', '가능한 일인가' 하는 따위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그 대신 '우리 시대의 전반적 조류에 부합하는 일인가', '진보적인 일인가, 반동적인 일인가', '역사에 흐름에 맞는 일인가'를 질문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진짜 필요한 질문들은 무시하게 될 게다.</em></strong></p><p><strong><em>   물론 이런 건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들이야. 인간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를 뿐 아니라, 그 미래의 모습이란 게 사실은 상당 부분 지금 자기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그들은 오히려 미래에 기대어 지금 선택을 내리려고 들지...(중략)...게다가 우린 이미 큰 일을 하나 해 놓았다...(중략)...'불변하다'라는 기술(記述)적 형용사를 '정체되다'라는 좀 더 감정적인 형용사로 바꾸어 버렸거든." pp. 148-149</em></strong></p><p>   졸업이 눈앞을 둔 지금, 어느때보다도 미래에 기대어 지금 선택을 내리려고 하는 중인 것 같다. 스스로도 어딘가 이상하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럴듯한 무언가를 잡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내 미래를 멋대로 상상한 후에 그거에 준해 비현실적인 판단들을 내리곤 하는 것 같다. 물론, 인용한 본문은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있진 않다. 다만 현실과 진리의 확고한 토대 위에 서서 분별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교훈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아서 한 번 스크랩 해봤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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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8-01 07:50: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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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준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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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lt;비이기주의&gt;</p><p>"상대방이 뭘 진짜 바라는지 알아 낼 수 없을 때가 자주 있다는 거야. 운이 좋으면 둘 다 전혀 바라지 않던 일을 해 놓고도 자기 의에 취해서 만족하며, 자신의 비이기주의에 합당한 특별 대우를 은근히 기대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의 희생을 너무 간단히 받아들인다는 불만까지 슬쩍 품게 할 수 있지." (152p)</p><ul><li><p>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하기 보다는 그러한 행동을 한 자신에게 만족하고, 그럼으로 인해 나에게 그 사랑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이기주의인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자신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행위이다.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이 더 우선되어야 사랑인데, 비이기주의는 상대가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에 이기주의 인 것 같다.</p></li></ul><p><br/></p><p>&lt;주님은 우리의 현재에 계신다&gt;</p><p>"원수는 인간들이 자유롭게 미래에 기여하는 바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한없는 현재'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거든. 어떤 사람이 무언가 하는 걸 지켜보는 것과 그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로 시키는 것은 확실히 다른 일이다." (160p)</p><ul><li><p>주님께서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미리 정해두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곁에서 함께 이루어나가신다. 물론 주님께서 미래의 일을 모르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삶들이 이미 재단 되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 주님의 뜻대로 되겠지 하면서 내 일을 놓아버려서는 안된다.</p></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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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8-03 10:58: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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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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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trong><em>"(전략)...실상 이 모든 분노는 좌절된 자기 의와 고집과 지난 10년간 쌓여 온 불만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알아챌 리가 있나."</em></strong></p><p><strong><em>"어떤 분별 있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중략)..."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부류의 여자였다. 그런 헌신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쫓기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말도 했지." pp. 154</em></strong></p><p>   언젠가 유튜브를 보다가 조던 피터슨 교수의 부인 되시는 분이 출연한 팟캐스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온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다. 피터슨 교수 당신께로부터 청혼을 받던 당시의 일화였다. 정확한 토씨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p><p><em>      '우리가 결혼할 거라면 서로에게 반드시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em></p><p>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서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서로 신뢰하고 생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환자'의 연애생활을 놓고 '스크루테이프'가 말하는 비정직성의 문제를 보면, 이것은 단순히 서로의 신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도 기능한다.</p><p>   인격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정직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변덕스럽고 즉자적인 정동을 그때마다 되는대로 '솔직하게' 소통하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정 기간 누적된 감정을 계속 쌓아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언제고 '좋은 사람'이고픈 우리의 욕망이 상대에게 우리 자신이 느끼는 바를 정직하게 소통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스스로 만족하고 인정을 얻기 위해 상대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헌신을 하기보단 자기 중심적인 '비이기주의'를 선택하곤 한다.</p><p>   꼭 연애에 관해서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가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관계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는 것 같다. 책이 지적하는 것처럼, 차라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졌으면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자 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문제가 커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이 솔직하기 보다는 감추는 편을 택하는 현실을 '스크루테이프'의 입을 통해 지적한다.</p><p>죄 많은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존재이다.</p><p>   그가 '부정직한 상황'을 통해 획득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나 자신에게조차 부정직한 경우기 많은 것을 보곤 한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이것은 지혜롭게 타인과 나눌수 있게 되는 것이 정직하고 '통전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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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8-06 07:19: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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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덕</title>
         <author>gdp20</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36826759</link>
         <description><![CDATA[<p>블로그에 쓴 글이 있어 이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p><p><br></p>]]></description>
         <enclosure url="https://padlet-uploads-usc1.storage.googleapis.com/4078728290/51c129a0404538b4a6ca6b8221cd2d8e/Screenshot_20250806_221708_Samsung_Internet.jpg" />
         <pubDate>2025-08-06 10:49: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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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42326208</link>
         <description><![CDATA[<p>&lt;악마보다 더 위에 있는 하나님&gt;</p><p>p166</p><p>'우리한테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는 원수가 허용해 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보면 알 수 있어. 인간 중 다수는 유아기에 죽어 버리고 그나마 살아남은 인간도 상당수 청년기에 죽고 만다. 원수한테 인간의 출생이란 죽을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기에 중요하고, 죽음이란 오직 다른 종류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에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는 인류 중에서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공작한 기회를 허락받은 셈이야.'</p><p><br/></p><p>이 악마는 어쩌면 나보다도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문장에서 악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악마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들은 나를 외려 안심시켰던 것 같다. 아무리 악마가 나를 유혹하더라도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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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8-13 11:45: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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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현</title>
         <author>linda0416yy</author>
         <link>https://padlet.com/linda0416yy/jj2nu7c1kk31lqmn/wish/3542335666</link>
         <description><![CDATA[<p>이 책을 읽고 악마가 이렇게나 교묘하고 치밀하다는 것을 세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나의 행동을 돌아보니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악마는 일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유혹당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환자는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고 악마는 실패하게 되는 결말인 것 같은데, '나'라는 환자는 악마도 실패하게 되는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p><p>그리고 악마도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을 나는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p><p>또한 생각나는 이야기는 악마는 엄청 괴롭거나 행복한 것도 아닌 자신도 잘 모르는 방황 모호함 속에서 더 일하고, 무엇이든 자기가 했다는 자만감과 혹은 반대의 좌절감 속 모두에서 활동하고 더욱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연약해지는 순간 빈틈없이 찾아올 악마의 유혹이 무섭고 싫다. 하지만 더 높으신 하나님께 좌절을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마지막은 주된 기도제목으로 기도로 간구하면 환자의 결말을 우리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p><p>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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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8-13 11:59: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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