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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국대 22-2 일본 근현대정치외교사 by 김태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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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과제와 토론을 위한</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2-09-29 01:44: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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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4</title>
         <author>bokyoung71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199961</link>
         <description><![CDATA[<div>- 야마가타의 외교정략론의 목적이 ‘빠르게 변해가는 국제 상황 속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한 대비책’이었던 점은 국가를 위해서 필요했던 준비이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써낸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 실제 슈타인의 개념을 이용해 일본에 맞게 주권선과 이익선을 재구성한 점을 보아 일본의 안위에 대해 깊이 걱정하고 고민했음이 느껴졌다.&nbsp;<br><br></div><div>- (야마가타가 이끌었던 조약이 아닐 수 있지만)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만든 조약을 체결한 주체가 일본인데,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이중적인 모습이 외교정략론에 나타난 듯하다.</div><div><br>- 수업 중, 기존 화이질서 개념에서 근대 국가 개념으로 변화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 변화 사이에 한 단계를 더 거쳐서 일본에서 국가의 개념이 변화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해본 일본에서의 그 중간 단계는, 기존 화이질서와 비슷하지만 조공과 사대를 받는 국가가 중국이 아닌, 중국보다 더 강력해진 ‘일본’ 이라는 인식을 거쳐 근대 국가의 개념(자주국)으로 변화되었다고 느껴졌다.<br><br></div><div>- 물론 읽어보지 못한 이 시대의 자기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고민해보고 앞세운 주장들이 매우 많겠지만 야마가타의 애국심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나만의 애국이 아닌 모두의 애국을 바라고, 그 애국을 키우기 위한 방법까지 강구해낸 점에서 특히나 그렇게 느낀 듯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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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05:49: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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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야마가타 아리토모 &lt;외교정략론&gt; 2014110282</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301965</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군의 아버지’ 라고 불렸을만큼 일본군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당시 격동하는 세계 정세에 발맞추어 일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lt;외교정략론&gt;을 통해 제시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서구 열강 국가들을 모델로 하여 제국주의 국가의 역량을 쌓아가던 일본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권세광역과 이익광역 개념을 모방하여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제시했고 이익선의 대상으로 가까운 조선을 강조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선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외교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영국, 러시아 등의 열강이 아시아에서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고 있었고 그 영향력이 조선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공사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고 철도가 완공되면 러시아의 동아시아 내 영향력이 증대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청 역시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일본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리적 위치를 감안했을때 야마가타는 열강들 사이에서 일본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역량으로는 강대국들을 적으로 두고 조선을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유럽의 스위스 등의 중립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조선을 중립국화 하며 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 세계질서 속의 일본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가 앞장서 각국을 유도하여 스스로 연맹 조약의 맹주가 되기에는 정세가 허락하지 않는 바가 있다.’며 일본의 역량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와 동시에 연맹 조약의 맹주를 차지하는 국가가 나온다면 그것은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인용한 ’와신상담‘ 이라는 사자성어가 그의 생각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nbsp;<br>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장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자기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 육군의 대표로써 국제질서 내의 일본의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하였고 서구 열강과 직접적인 대치를 피하면서 이익선을 지켜낼 방도를 고안했다. 또한 군비확장이나 외교 등 외부적인 요소와 더불어 일본 국민의 계몽의 필요성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사상에 따른 일본의 역사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일 수 있지만 한 국가의 리더로써 제시한 치열한 현실인식과 판단력은 높이 살만 하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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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07:43: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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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824</title>
         <author>dhfhwl7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306014</link>
         <description><![CDATA[<div>-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니 일본이 공략 대상으로 조선을 선택한 것은 어떠한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조선이 이익선으로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국가였을 뿐’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div><div>&nbsp; &nbsp;</div><div>- (오야마 이와오의 조선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서에 의하면) 일본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일 때는 국방에 유리하지만 반대로 강대국에 의해 조선이 점령당했을 때는 국방에 불리해진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이익선이 조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 강대국에게도 조선은 이익선의 초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을 지키는 것이 자국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div><div>&nbsp; &nbsp;</div><div>- 하지만,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을 침략했다고 볼 수만은 없는 점도 분명히 있었다. 당시 일본의 행보를 보면 자국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힘을 내세우는 것 또한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nbsp;</div><div>&nbsp; &nbsp;</div><div>- 당시 조선이 여러 나라의 공략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만약, 일본이 아니었더라면 조선은 다른 나라에 의한 침략 시기를 겪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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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07:47: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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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7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316331</link>
         <description><![CDATA[<div>&nbsp;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을 읽어봄으로써 이익선과 주권선의 개념을 중심으로 당시 일본이 처해있는 상황은 어떠했으며, 왜 팽창의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div><div>&nbsp; &nbsp;</div><div>일본의 팽창에 대해 명확하고 심지어는 설득력 있는 기조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야마가타는 &lt;외교정략론&gt;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익선이 침해되면 주권선 또한 침해된다고 했다. 여기서 이익선을 조선으로 설정하고 당시 일본이 처한 국제적 위험(러시아의 남하와 같은)을 제대로 파악하였는데,  당시 국제 상황과 지정학적인 분석을 상당히 철저히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div><div>&nbsp; &nbsp;</div><div>한국을 넘어 러시아, 영국, 중국 등 세계 곳곳으로 시야를 돌려보니 일본의 국내적 문제 뿐만이 아니라 당시 국제적 상황, 러시아의 남하, 약육강식의 풍조가 일본이 팽창의 길을 가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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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07:56: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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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45</title>
         <author>lee00096k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356775</link>
         <description><![CDATA[<div>- 시베리아 철도에 관한 야마가타의 우려는 기술의 진보에 영향 받을 앞으로의 판도를 예측하려는 시도 같았다. 철도 부설에는 여러 방향으로 팽창을 시도했던 러시아의 야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국에 의해 서쪽 바다로의 진출이 막힌 후 러시아가 눈을 돌린 곳은 동쪽의 시베리아였다. 광대한 영토가 동서로 연결되면 물자의 수송과 사람의 이동이 편리해지고 팽창은 더욱 용이해진다. 이는 일본에게 직접적인 위협이자 대륙으로의 진출을 방해한다. 야마가타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게 연결 된 국가 없이 바다로 둘러쌓인 지정학적 위치는 안타까운 콤플렉스였다. 고립 된 주권선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대륙으로 뻗어나가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익선이 있었다. 북수남진이냐 북진이냐 의견은 갈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 교집합이 되는 곳, 바로 한반도이다. 이후 파생 될 식민지배나 전쟁 범죄에 대한 관점과 개인적인 견해는 잠시 분리해서 바라보았을 때, 야마가타의 주권선, 이익선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경계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류를 잘 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nbsp;<br><br>- 처음에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경계하는 야마가타의 이미지와 러일전쟁을 떠올리며 읽어서 그런지 처음 청일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을 지지하고, 영국이 청의 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두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자국에게 이익인지 아닌지에 따라 대립하다가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칠 결과에 맞춰 입장을 바꾸었다. 러시아는 부동항, 시베리아 철도의 만주 횡단 루트를 위해 삼국간섭을 했고,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목적이 일치해 동맹을 맺었다.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꼭 막부와 천황이 대립하다 개국에 대한 입장이 뒤바뀐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또한 국제질서에서는 이익에 따른 힘의 논리가 강하게 지배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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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08:31: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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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황목자 2020113205 </title>
         <author>h157726600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470050</link>
         <description><![CDATA[<div>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외교정략론에서 주로 두 줄의 주장을 펼쳤다.하나는 주권선이고, 하나는 이익선이다.유럽 세력이 아시아 각국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있다.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막강해지고 일본은 열도에 완전히 갇히게 된다.그래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을 이익선에서 주권선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였다.<br><br>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사상이었고, 조선은 예로부터 대륙과 일본의 싸움에서 언제나 반드시 쟁탈하는 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그 지리적 위치는 조선을 점령하면 대륙을 더욱 잠식할 수 있었다.그의 외교정책은 훗날 일본의 군국주의 대외침략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br><br>  당시 청나라 정부가 이홍장에게 약간의 금전적 지원과 유신파에 대한 포용을 베풀었다면 역사도 다시 썼을 것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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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0:08: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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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6</title>
         <author>wjdxorbs</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480980</link>
         <description><![CDATA[<div>- 야마가타 아리모토의 외교정략론을읽고 그가 일본군의 아버지, 원로 중의 원로 등으로 불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국가와 정부가 나아가야 할 길, 이를 위한 계획과 그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 모습에서 국가를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nbsp;</div><div>&nbsp; &nbsp;</div><div>- 야마가타가 조선을 이익선으로 간주하고 이를 타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흥미로웠으나 이후 책 &lt;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gt;에 서술되듯 조선중립론을 와해시킨 당사자 역시 일본 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행보에 더욱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div><div>&nbsp; &nbsp;</div><div>-야마가타는 이익선으로서의 조선을 방어해야 하는 근거로 시베리아 철도의 준공을 이야기한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많은 서양 세력이 조선을 시작으로 동양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고 이를 일본이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훗날 일본이 펼치게 될 대동아공영권의 모습을 겹쳐 볼 수 있었다. 또한 ‘국가의 병력은 이를 가지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하면 적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를 가지고 사람을 손짓하여 부르면 친구가 되는 법이라고 했다.’는 한 서양인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 이 외교정략론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해졌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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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0:18: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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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3392</title>
         <author>yoondy7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503939</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외교와 군사정책에서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다. 일본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던 시기의 외교 및 군사정책에 그가 어떠한 전략론을 펼치면서 일본의 대외정책을 움직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nbsp;</div><div>&nbsp;특히 그 당시 일본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정세에서 국외중립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첫번째로 만약 일본이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조건이 좋은 항구가 위치한 일본은 전쟁에 휘말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 일본 간의 복잡한 관계때문이다. 일본이 국외 중립을 선택할 경우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혹은 영국, 청국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되므로, 어느 쪽도 일본으로서는 원치 않는 정세의 출현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nbsp;</div><div>&nbsp;즉 국외중립을 선택하면 일본에게는 위험요소로 다가오고 불편한 상황을 맞이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일본이 특정 세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군사적 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할 것이 핵심이 되었을 것이다. &nbsp;</div><div>&nbsp;이러한 생각에 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한반도를 ‘분쟁지대’라고 간주했을 것이며 불안 요소가 되어버린 한반도에 대한 구상의 재고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일본의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설정한 것의 배경이 된다.&nbsp;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한반도라는 공간을 이익선으로 설정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자연스럽게 묶어 두려는 일본의 국방전략을 제시했다. 이익선 한반도 확보는 일본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안전보장을 위한 선결 과제임을 당연한듯이 밝혔다. 이에따라 청국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으며, 이후 청일전쟁의 승전으로 일본은 이익선 한반도에서 청국의 영향을 배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교두보로서 한반도를 지정하여 국가 전략을 펼쳐 나아갔다. </div><div>&nbsp;그가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제시한 것은 이후 부국강병 건설(군사적 대비)을 위한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본에게 현재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며 국가전략을 이끌어가는 사고의 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nbsp;</div><div>&nbsp;세계의 각 나라들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자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나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자국의 안전 보장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시각을 지님으로써 국가 전략을 세워 나아갔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의 대외정책과 사고의 틀로 근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매커니즘이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지 과거를 거슬러 분석하는 것은 한반도의 입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nbsp; &nbsp;</div><div>&nbsp;&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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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0:39: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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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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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2018110294<br><br>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당시 자국을 지키기 위해 슈타인의 사상인 주권선과 이익선 두 가지 이론을 제창했다.<br>이익선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을 택해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다.결과 이익선을 둘러싸고 일어난 청일전쟁,러일전쟁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근대화를 이뤄냄으로써 동아시아 중 유일하게 자국의 독립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br>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조선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생명선이 되었고,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명선인 조선을 억제해야 됐었다. 자국의 자위를 위해서였지만 조선을 억제한다는 생각이 제멋대로 생겨난거에 대해서는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br>또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억제일 뿐이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선택으로 인해 일본의 정세가 바뀌었다는게 인상 깊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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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0:47: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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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외교정략론&gt; 2018110267</title>
         <author>endltgld</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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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내가 원래 알고 있던 흐름은 대충 말해서 ‘청의 간섭에서 조선을 빼내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다.’ 였다. 이는 한국사 공부를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한줄요약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외교정략론을 읽고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이해를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인상깊다고 느낀 점이 딱히 없는 것 같다. 다만 왜 하필 조선이 중요했는지, 그리고 외교정략론이라는 생각이 어떤 흐름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등 대충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br><br></div><div>우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시한 외교정략론의 모든 근원이자 목적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존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존립 의지의 근거가 된 것은 그의 애국심이다. 그는 외교정략론의 시작부터 애국심을 드러내고 있다. 나라에 속한 국민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독립 유지와 확장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몇 장 뒤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국가의 힘은 국민의 충애에서 나오고 국민의 애국심은 오로지 교육으로 양성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애국심은 그 나라에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쩌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여러 교육을 받으며 먼저 애국에 눈뜬 자로서 ‘당연히’ 자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발전 이전에 서양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존재를 위협받고 있었으므로 외교정략론 말미에서도 밝히듯 존립, 아니 존립을 향한 밑바탕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br><br></div><div>그렇다면 이제 일본의 존립을 확실히 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해진다. 여기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및 당시 일본 정부가 선택한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외교정략론이었다. 그 이유가 앞 개념의 최초 창시자이자 프로이센식 입헌체제라는 것을 알려준 슈타인 박사에 있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당시로서는 새로운 국방론이었다는 것처럼 당연히 이를 믿고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정치외교적 지식 및 선구안도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뚜렷한 움직임과 과거부터 다른 누구보다 잘 알아 온 청 및 조선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방정식에 어떤 대입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대에서 현대식 교육을 받고 살아온 나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br><br></div><div>그렇게 일본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중립론은 책에도 그대로 나와 있듯 다름 아닌 일본 자신에 의해 깨졌다. 당시 청과 조선에게는 당연히 기절초풍할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정세를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 것도 같다. 여기서 당연한 일이란 물론 전쟁의 승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청국’의 존재가 일본을 이기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거란 생각은 나 역시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일이란 그 후의, 한반도 지배권과 관련된 것이다. 영토는 아니나 영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조선, 즉 이익선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br><br></div><div>지금까지 정리한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정리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청의 간섭에서 조선을 빼내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다.’라는 기존의 생각이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일본은 여러 가지 이용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이번에는 그 이유가 ‘서양이라는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서’였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외교정략론이 없었다면 선택지는 더욱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을 도모하는 이상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도망이나 항복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건너 굳이 다른 나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어떤 선택을 하든(일시적으로는 중립국 형태를 취한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어떤 순서로든 눈앞의 한껏 약해진 청과 조선을 노리는 편이 효율적이자 실현 가능성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자국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다면 물론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혹은 더욱 먼 곳으로 침략 혹은 도움을 청해도 국가 상실이라면 다른 방법이 없어서라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약소해진 옆 나라’를 이용하지 않았을까?</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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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0:59: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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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303</title>
         <author>hsuwei85</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534721</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처음으로 &lt;외교정략론&gt;에서 명확하게 이익선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lt;외교정략론&gt;은 일본 군국주의가 대외적인 침략의 확장이론이며 일본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lt;외교정략론&gt;으로 야마가타의 군국주의자의 이미지하고 그의 야심이 엄청 큰 것을 느껴졌다.<br>1.주권선과 이익선-야마가타가 말한 이익선은 바로 조선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무력으로 이익선을 조선으로 확장할 수가 있었다. 또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삼키고 조선은 일본의 주권선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주권선과 이익선을 수호하는 주장인데 점점 남을 침해해게 되어, “우리의 이익을 손실하면 안돼서 먼저 공격해야 된다”는 느낌이 주었다. 일본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로 확장하여 사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익선의 수호는 국력을 넘어섰고 그 결과는 국가의 와해일 것이다.<br>2.군국주의-야마가타은 군인사상을 갖고 있어서 결정과 명령은 수직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한다. 야마가타는 너무 전쟁의 승리에서 취한 것 같아서 계속 강력하게 군국주의를 주장해, 국가를 잘 못 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정책을 내리는 과정은 시간을 좀 걸리며 번거롭지만, 다양한 의견을 수집해서 민의를 제대로 반응할 수 있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br>3.부국강병-존와양이에 참여했던 야마가타의 국가에 대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천황을 따르고 구긴을 단결시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고, 따라서 정당정치를 국가적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어 민주적 자유활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 인민의 세금을 더 걷어야 되고, 정당정치를 막으려고 고액세금만 내는 인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애국주의를 고취하며 대외침략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국력이 그 대외침략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나라가 무너지고 실패로 돌아갔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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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1:06: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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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3195</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560814</link>
         <description><![CDATA[<div>-이 장에서는 근대 일본의 대외전략 및 동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위상변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각각의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서명한 조약을 삽입하고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 내용을 바탕으로 이익선과 주권선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근대 지배력이 어떻게 한 단계씩 상승했는지를 서술하였다.</div><div>&nbsp;</div><div>-이익선 보호와 주권선 수호: 이익선은 조선. 이익선을 지키는 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보장하고, 조선을 통제함으로써 일본 본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다른 나라를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일제의 의도로,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한반도를 완전히 식민화하고, 나아가 조선은 이익선에서 주권선으로, 중국의 만주는 일본의 이익선으로 바뀌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만주는 일본의 이익선에 머물지 않고 '주권선'과 비슷한 개념의 '생명선'으로 부상했다.</div><div>&nbsp;</div><div>-그러나 이익선과 주권선에 대한 과잉 방위로 대외 확장의 괴리에 빠져들었고, 훗날 전멸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은 그 후로도 잘 알려져 있다.이 장은 일제가 어떻게 차근차근 확장해 나갔는지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왜 저자가 일본에 의해 체결된 수많은 조약들을 서술하고 있는지, 당시의 일제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한 책인지도 모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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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1:29: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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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55</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581689</link>
         <description><![CDATA[<div>  외교정략론은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야마가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러시아 굉장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의 지리적 위치가 큰 이유를 차지했을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느낀 것에는 일본 뒤에 영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영국으로서도러시아의 팽창은눈엣가시였기때문이다. 훗날 있을 러일전쟁까지 이어 생각해보면 일본이 러시아를 조급할 정도로 경계를 한 것은 어쩌면 영국이 이때부터도 일본을 이용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div><div>  또한 야마가타는 조선을 이익선으로 보고 이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중립국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훗날 일본에 의해 와해되게 된다. 우리가 한국사에서 이 시기를 배울 때, 일본은 조선을 독립된 국가로 만듦으로서 일본 본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낸다고 배우고, 이는 당연한 이론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야마가타도 이러한 미래를 보고 이 이론을 구상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야마가타의 목적이 어떠했든 결론적으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을 과연 조선을 중립화 시키자는 이론의 연장선으로 자국을 지키기 위함으로만 볼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국을 지키기만을 위함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정학적인 콤플렉스를 지닌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나름 빠르게 서구화를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섬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보다 큰 영향을 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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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1:47: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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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581878</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국가의 독립과 자위를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 ‘주권선’과 ‘이익선’을 제시한다. 야마가타는 이 ‘이익선’의 개념을 조선으로 지칭했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펼쳐 그 영향이 조선을 건너 일본에게도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 러시아나 영국, 중국과 같은 열강들이 조선을 통해 자신의 나라까지 집어 삼키는 것이 충분히 두려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외교정략론은 여느 나라의 주장문과 다를 것 없이 조선은 생각 못하고 철저히 자기 나라인 일본의 입장에서만 쓰였다고 느껴졌다. 야마가타가 주장한 것은 동아시아의침략의 방안으로 조선의 중립화이긴 했지만 일본은 결국 이 방안대로 하지 않고 자신이 우려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조선을 중간에서 가로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써 고통받는 세월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외교정략론은 조선의 중립화가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조선을 침략하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선을 보호하자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외교정략론의 주장을 통해 이 당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의 남하 정책으로 조선은 무엇을 하던지 어떤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근거로는‘우리들은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는 날이 곧 조선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때가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의독립은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을 고함과 함께 실로 힘든 운명에 하게 될 것이다.’ 등 외교정략론에 나온 구절들이 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으려 조선을 가로챈 야먀가타의 주장에서 그저 다른 나라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조선이 안타까웠다. 다른 나라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일본이나 러시아, 영국처럼 자기 나라 고유의 세력을 키우고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면 조선이 식민지화 된 사건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이어진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역사시간에 배운 기억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를 먼저 침략해서 전쟁이났지, 우리나라가 먼저 일으킨 전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nbsp;</div><div><br></div><div><br></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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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1:48: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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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26719</title>
         <author>20212671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640294</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모토의 &lt;외교정책론&gt;에서 제시한 주권선, 이익선 개념은&nbsp; 오스트리아의 슈타인의 권세강역과 이익강역의 개념을 재구성한 국방전력이었다. 이를 통해 그의 서구 열강을 본받아 국가의 독립과 발전하려 했던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br>&nbsp;<br>섬나라라는 특징으로 바다를 통해 방어하던 일본에게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 개발은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성된다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이익선과 주권선이 위협 받는 일이자&nbsp; 러시아가 유라시아 주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 라는 불안함을 가져왔다. 이를 막기 위해 야마가타는 조선 중립화를 제시했다.&nbsp;<br>&nbsp;</div><div>이를 통해 당시 러시아, 영국, 중국, 조선 등 국가의 국제사회 흐름을 알 수 있었으며 당시 일본의 당시 지정학적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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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2:29: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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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9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641422</link>
         <description><![CDATA[<div>외교 정략론의 등장 배경이 되었던 1890년대 초에는 열강들 간의 조선을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일본이 서양의 열강들에 대하여 느끼고 있었던 위기의식이 잘 드러나 있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개설을 시작으로 서양 세력에 비해 개발되지 않은 일본을 포함한 동양의 세력들이 조선을 중심으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이전에 페리 제독의 내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겪은 서양 세력의 포함 외교를 통해 서양 세력의 기술력과 지정학적 배경을 인지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력이 있었을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동양은 화이 질서로 인해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고 그전까지는 일본의 지리적인 입지에 국한하여 일본만을 중심으로 국방을 실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 중립화 문제가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시행하거나 혁신적인 내부 제도의 개편으로 극복할 수 있기는 어렵고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장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같다.</div><div>&nbsp; &nbsp;</div><div>하지만 역사가 진행되면서 조선중립론이 일본 외에도 여러 열강 국가들의 대립 구도로 인해 유지될 수 없고 임시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아편전쟁의 영향으로 약화되어 있던 중국은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열강세력들의 관심이 크림전쟁, 남북전쟁 등에 있었다는 것도 더불어 일본이 대내 체제를 정비하고 열강 세력으로 크게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는데 열강 국가들의 움직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직접적으로 계획했던 바는 아니지만 외교정략론에 따라 대내 체계를 정비하고 이익선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후 일본이 주권선을 조선에서 더 확대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구조로 만든 것은 외교 정략론이 국방을 취지로 하고 있지만 점차 끊임없는 확장을 바탕으로 한 공격 중심의 제도로 변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단순히 과도한 세력 보호의 확장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시 열강세력들이 조선을 중심으로 개발한 철도 부설 지도를 보니 영국과 러시아가 치밀하게 국제적 정세에 따라 동맹을 바꿔가면서까지 세력 확장으로의 움직임을 보였고 프랑스와 독일 역시 각각의 국경을 약화시키기 위해 동맹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일본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 세력들에 대해 새로운 주권선과 이익선을 펼치게 된 배경을 국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외교 정략론과 그 배경이 된 열강 세력들의 대립 구도는 당시의 일본 외에도 많은 열강 세력들이 전쟁과 식민 지배를 바탕으로 한 국가 세력의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서양 열강 세력들의 관심과 대척점의 변화에서 일본이 유리한 입지에 있었기에 외교정략론이 결과적으로 당시의 국제적 상황을 잘 분석한 것으로 평가받았다고 생각했다. 중국에도 리훙장을 중심으로 외교정략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조선에서도 이러한 분석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외교정략론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역사적 움직임이 단순히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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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2:29: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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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5</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682699</link>
         <description><![CDATA[<div>-한국사를 배우며 일본이 조선에 집착한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생각을 읽어보며 냉철하게 세계정세의 흐름을 판단하여 전략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br>-주권선, 이익선의 개념을 잡아 당시 조선이 주변나라들의 관계속에서 핵심이 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에 따른 향후 방향점을 생각했다는 것이 좋았다고 본다.<br>-중립국가화라는 개념은 당시 상황에서 실현되었다 할지라도 그 체제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의문이며 일본은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완공을 통한 남하를 신경쓰고 있었는데 중립국가화는 철도 완공의 시간을 오히려 제공하여 후에 이점보다 단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중립국가화가 실현되면 류큐문제로 인한 청과의 원한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너무나도 낙관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br>-오히려 섬이라는 지리적 단점이 당시 국제상황에서는 관심 밖의 영역으로 벗어나 국내의 체제를 정비하는 시간을 확보하여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승리의 요인 중 하나가 된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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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2:52: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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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5</title>
         <author>jsjang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691901</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은 그 이름처럼 ‘이익선’으로 정의되는 국제사회,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본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어떤 전략을 생각했는지를 보여주었다.</div><div>&nbsp;그는 ‘이익선을 방어해야한다.’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익선이란 주로 조선을 의미하고 있다. 고로 그는 ‘조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게 조선은 청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한 중간국으로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역시 청으로 가는 중간단계에 불과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들에게 조선의 존재는 항상 전전긍긍하고 신경이 갈 수 밖에 없는 관심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우리 조선을 청에게서, 다른 나라들에게서 방어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의 흐름은 아주 자연스럽다.&nbsp;</div><div>&nbsp;다만 본인이 이 대목을 보며 들었던 한가지 궁금증은 일본이 조선을 견제하는만큼 청도 조선을 신경썼을까? 라는 것이다. 사실 청은 일본만큼 조선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위에 러시아가 붙어있기도 하고 위치적으로 일본보다 다른 나라와 교류하기도 쉬워 청의 이익선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체할 나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견제하는만큼 조선이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면 좀 더 단단한 입지를 구축해 힘을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든다. 물론 당시 조선의 보수적인 정치와 여러모로 약한 군사력(외교정략론에서 조선을 ‘방어’, ‘보호’한다고 하는 뉘앙스 역시 조선을 약소국이라고 생각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일본이 견제하는 부분을 약점으로 잡아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바꿀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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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2:57: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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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50 </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04669</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왠지 모를 불쾌감과 찝찝함이었다. 이건 아마 내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일본 그리고 당시 서구 열강들이 전략적 요충지로써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조선, 지금의 대한민국의 국민이어서 라고 생각한다. 야마가타는 &lt;외교정략론&gt;에서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보전하기 위한 두 가지 핵심개념으로 주권선과 이익선을 제시한다. 주권선에 대해서는 하나의 자주독립국가가 영토와 연관을 지으며 타국으로부터의 침입에서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이익선에 대해서는 각국이 맞대고 있는 지형적인 유리함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에 야마가타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계정세에서 일본이 독립국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이익선을 방어해야하며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한다. 당시 조선은 시베리아 철도의 준공 완료가 되면 서양에게 있어서는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지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일본에게도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위한 이익선의 초점이었다. 내가 찝찝함을 느낀 것은 이 지점이다. 조선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있는 이익선의 초석이 되었을 때, 당사국인 조선의 이익선과 주권선은 도대체 어디서 논의되고 있냐는 것이다. 물론 조선 내에서 이것과 관련하여 논의가 되어왔을 수도 있으나 나에게는 대부분의 주류가 조선을 주권선과 이익선을 왈가왈부할 독립국가로 인정하기 보다도 단순히 일본과 서구 열강 자신들의 이익만을 충족시켜줄 땅으로서만 인식된 것처럼 느껴졌다. (관련 내용에 대한 나의 조사나 배경지식일 부족해서 이렇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조선의 중립화'라든지 '조선의 공동보호'라든지 이러한 안건이 오가는 와중에 정작 당사국인 조선의 의사는 고려되었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이 청과 함께 '조선의 중립화'를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그것을 무너뜨리고 청과 조선의 연결고리를 와해시키고 종국엔 중립화 시키고자 했던 초기의 목표조차 사라진 채 조선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만든 후 식민지화 했다는 지점도 조금 모순되게 느껴졌다. 이후 일본이 주창했던 대동아공영권을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조선의 중립화는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확실히 쥐기 위한 적당한 구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nbsp;<br><br>그럼에도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야마가타의 외교정략론은 타당한 대외전략이라고는 생각한다. 그가 러시아와 영국 등의 동태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자국의 이익과 국방을 최우선시하는 합리적인 정략론을 세웠음에 동의한다.&nbsp; 솔직히,&nbsp; 영토와 세력확장에 앞장 서왔던 당시의 제국주의 흐름에 있어서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바탕으로한 국가안보론을 부정할 국가지도층은 없을테니까. 아마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입장에서 외교정략론을 접했더라면 분명 복잡하거나 긴 줄글로 되어있는 근거자료를 들이밀지 않아도 순순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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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02: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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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 정붕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26098</link>
         <description><![CDATA[<div>메이지 시대 일본의 외교 안보 방비 전략의 실행은 주로 야마현 아리토모가《외교 정략론》에서 제시한 '이익선'과 '주권선'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주권선은 국가의 강토를 가리킨다.이익선은 북한을, 이익선은 북한에 대한 일본의 절대적 통제권을 보장하고 북한을 통제함으로써 일본의 국토안보를 실현하는 것이다.메이지 정부 수립부터 일본은 대외적으로 조선을 확장해 병탄하려 했지만 조선의 종주국이 청나라였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따라서 일본은 군사적 탐색, 외교적 주선, 대내적 군사정치 개혁 등을 통해 대외침략의 확장에 대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br>청일전쟁의 발발은 실질적으로 일본이 '이익선'을 확대한 결과였고, 일본 정부가 '이익선' 이론을 관철시켜 거둔 첫 승리였다.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일본 정부의 대외 확장 야망을 급속히 팽창시켰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무력으로, 즉 자국의 '이익선'을 보호하려는 염원을 실현하였으나, 극동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우려하게 되었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시 '이익선'을 무력으로 방어하여 러일전쟁의 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러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은 '이익선'에서 '주권선'으로 바뀌었고, 중국의 만주 지역은 일본의 '이익선'이 됐다.<br>그러나 일본의 '이익선' '주권선'에 대한 과잉방위는 일본을 대외적 확장과 과잉방위의 순환에 빠뜨렸고, 이는 결국 훗날 패전의 한 원인이 됐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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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13: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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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8 이건희</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30656</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야마가타</strong> <strong>아리모토가</strong> <strong>집필한</strong> “<strong>외교정략론</strong>”<strong>에서는</strong> 1890<strong>년대</strong> <strong>열강</strong> <strong>반열에</strong> <strong>오른</strong> <strong>일본이</strong> <strong>조선</strong> <strong>및</strong> <strong>청나라</strong>, <strong>러시아</strong> <strong>등주변국에</strong> <strong>관한</strong> <strong>시선이</strong> <strong>잘</strong> <strong>나와있는</strong> <strong>것</strong> <strong>같다</strong>. <strong>특히</strong> <strong>주변</strong> <strong>열강</strong> <strong>국가인</strong> <strong>러시아에서</strong> <strong>시베리아</strong> <strong>횡단철도를</strong> <strong>통해</strong> <strong>동부</strong> <strong>지역에서의</strong> <strong>영향력이</strong> <strong>높아진다는</strong> <strong>견제하는</strong> <strong>견해가</strong> <strong>담겨있다</strong>. <strong>영국의</strong> <strong>봉쇄정책으로</strong> <strong>인해</strong> <strong>서쪽의</strong> <strong>영향력이</strong> <strong>줄어들며이에</strong> <strong>따리</strong> <strong>동쪽으로</strong> <strong>영향력을</strong> <strong>높이려는</strong> <strong>계획이라</strong> <strong>특정할</strong> <strong>수</strong> <strong>있다</strong>. <strong>서부의</strong> <strong>상트테페르부르크</strong>, <strong>모스크바와</strong> <strong>동부의</strong> <strong>블라디보스톡을</strong> <strong>연결하기</strong> <strong>위해</strong> <strong>시배리아</strong> <strong>횡단</strong> <strong>건설</strong> <strong>했다</strong>. <strong>일본이</strong> <strong>이런</strong> <strong>러시아의</strong> <strong>행보를</strong> <strong>견재하여</strong> <strong>동아시아</strong> <strong>패권국으로</strong> <strong>발돋움</strong> <strong>하려는</strong> <strong>것으로</strong> <strong>보인다</strong>. <strong>한마디로</strong> <strong>군국주의</strong> <strong>일본의</strong> <strong>첫걸음이라</strong> <strong>볼</strong> <strong>수</strong> <strong>있다</strong>.&nbsp;</div><div><br></div><div><strong>야마가타가</strong> <strong>이</strong> <strong>보고서를</strong> <strong>작성한</strong> <strong>이유는</strong> <strong>군국주의</strong> <strong>일본의</strong> <strong>궁극적</strong> <strong>목표를</strong> <strong>설정하고</strong> <strong>이를</strong> <strong>이행하고자</strong> <strong>인</strong> <strong>것</strong> <strong>같다</strong>. <strong>특히</strong> <strong>영국</strong>, <strong>미국</strong> <strong>등</strong> <strong>전통적</strong> <strong>서강</strong> <strong>열강</strong> <strong>국가가</strong> <strong>조선에</strong> <strong>영향을</strong> <strong>미치지</strong> <strong>않기</strong> <strong>하기</strong> <strong>위해</strong> <strong>운요호</strong> <strong>사건을</strong> <strong>일으켜</strong> <strong>강화도</strong> <strong>조약을</strong> <strong>일으키고</strong> <strong>조약</strong> <strong>상으로는</strong> ‘<strong>조선의</strong> <strong>자주권</strong>’<strong>을</strong> <strong>부여하고</strong> <strong>이후</strong> <strong>일본이</strong> <strong>조선을</strong> <strong>집어삼키기</strong> <strong>위한</strong> <strong>큰그림으로</strong> <strong>볼</strong> <strong>수</strong> <strong>있다</strong>. <strong>특히</strong> <strong>일본의</strong> <strong>본토가</strong> <strong>섬이라는</strong> <strong>특징</strong> <strong>때문에</strong> <strong>가장</strong> <strong>가까운</strong> <strong>대륙</strong> <strong>시작점인</strong> <strong>조선을</strong> <strong>집어삼켜</strong> <strong>만주</strong>, <strong>청나라</strong> <strong>뿐</strong> <strong>아니라더</strong> <strong>많은</strong> <strong>영토를</strong> <strong>얻기</strong> <strong>위함이라</strong> <strong>볼</strong> <strong>수</strong> <strong>있다</strong>. <strong>조선은</strong> <strong>내부적으로</strong> <strong>매우</strong> <strong>혼란한</strong> <strong>시기</strong> <strong>였고</strong> <strong>기술력과</strong> <strong>경제적으로</strong> <strong>매우</strong> <strong>뒤쳐진</strong> <strong>상황이였는데</strong> <strong>이는</strong> <strong>일본에게</strong> <strong>아주</strong> <strong>맛있어보이는</strong> <strong>먹잇감일</strong> <strong>뿐으로 보일 것 같다.</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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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15: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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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6</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66205</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의&nbsp;&lt;외교정략론&gt;은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당시 일본이 나아가야할 외교적, 군사적 정책을 말하고 있다. 이때 분명 &lt;외교정략론&gt;은 주권선, 이익선 모두 자신들의 자주와 이익을 위한 타국에 대한 견제와 방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오히려 일본의 팽창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당시 야마가타가 언급했듯 캐나다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의 완공을 앞둬 동아시아에 영국과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도중이었다. 또 원하기만 한다면 항공모함, 전투기를 빠르게 띄울 수 있어 군사력의 이동이 비교적 빠른 지금과는 다르게 임진왜란 때와 비슷한 목적으로 일본에 있어 조선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요한 이익선임에도 불구하고 속국취급을 받을정도로 사실상 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청국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그 영향력을 조금씩 키우는 중이었다. 일본은 그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조선이라는 교두보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이익선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동학 농민운동 이후로 진행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뒤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을 독립국이자 중립국으로 격상시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상실시켰고 후일 조선은 자주권을 강탈당한다. 즉 이익선은 단순히 일본의 이익을 위해 지켜야 할 국외의 선이 아니라 일본이 세계의 열강으로 팽창하기 위한 초석을 조선으로 낙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lt;외교정략론&gt;이 갖는 의의는 단순히 자국을 위해서 이익선을 지켜내어 부국강병을 꿈꿔야 한다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프러시아의 슈타인이 말한 이론을 변형시킨것인 만큼 전세계의 열강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주장이었겠지만 그런것이 생소한 동양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도 있다.그렇지만 앞서 말한대로 단순히 부국강병을 넘어 일본이 열강으로 팽창하기 위한 초석, 그 방향을 정해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열강, 제국주의적이라고 비판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당시의 세계를 움직이는 주류였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일본이 아니더라도 조선이 자주독립을 하거나 식민지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시말해 야마가타의 &lt;외교정략론&gt;은 당시 시대의 물결에 적극적 효율적으로 편승한 과정이자 결과라고 생각하는 바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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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31: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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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92</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68238</link>
         <description><![CDATA[<div>정치란 결국 명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장한 주권선과 이익선은 너무나 그럴 듯한 말이다. 자신을 지켜야 할 힘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 힘이 충분할 때에는 위협이 곧바로 자신에게 오지 않도록 주변을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국가에게도 통용되는 이치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이 이익선이듯, 러시아와 청나라도 조선이 이익선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서로의 이익이 상충되는 곳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하지만 무논리에 기반한 힘의 충돌은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에 아리토모는 다시 주장했을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이며 조선을 중립화 시키고자 하는 일본의 무력은 정당한 것이다.” 즉, 조선을 향한 무력은 일본의 자위를 위한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자신들의 욕심을 숨기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div><div>이것은 국가 간의 동맹 속에서도 드러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역사에서, 특정한 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자신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장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는 지배자들이 있을 뿐이다.</div><div>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정치란 결국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명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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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32: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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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4 </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796720</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지금까지 내가 역사에 대해 얼마나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반성이었다. 외교정략론만 봐도 얼마나 많은 서구 열강국들과 아시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알 수 있고 각 국의 목적을 위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키는 등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수업 시간에도 언급되었듯이 역사라는 것은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운동회처럼 ‘우리 편 파이팅’ 식의 선악을 나눌 수 있는 이분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nbsp;</div><div>&nbsp;</div><div>&nbsp;그는 슈타인의 개념을 재구성하여 일본의 국방전력의 핵심 개념으로 ‘주권선’과 ‘이익선’을 제시하여 결론적으로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당시 화이질서에 의한 청과 조선의 종주관계를 배제하고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킨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 조선을 독립국이라 칭하는 것이지 결국엔 조선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함이기 때문에 독립을 통해 결국 또 어딘가에 종속된다는 것이 솔직히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div><div>&nbsp;</div><div>그가 당시 가장 경계했던 것은 러시아였는데,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한반도로 내려와 기지를 만들면 그대로 일본에도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부분은 청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가 일본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동시에 청의 힘을 약화시키면 청국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고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하여 일본까지 축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러일 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게 된다.&nbsp;</div><div>&nbsp;</div><div>존왕양이를 외치던 일본이 서구 열강들과 동맹을 맺거나 청일전쟁, 러일 전쟁을 하며 부국강병(혹은 강병부국)을 추구하는 근대 일본이 되기까지의 일어난 격렬한 변화들이 흥미로웠다. 또한 섬나라로서 국방이 약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으로 취약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방과 안위를 위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가히 ‘일본 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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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44: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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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5 이준호</title>
         <author>cazzjhlee</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814529</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는 &lt;외교정략론&gt;에서 슈타인의 '권세강역'과 '이익강역' 개념을 재구성한 '주권선'과 '이익선'개념을 바탕으로 자국의 주권선과 이익선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의 확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군비확장과 더불어 일본의 이익선인 조선을 수호하기 위해 조선을 화이질서에서 독립시켜 유럽의 4개국과 같이 영구 중립의 위치를 가지게 해야함 또한 강조하고 있다.<br><br>책에서는 당시 일본이 가장 위협으로 간주하던 나라는 러시아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문득 러시아의 입장에서의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이 궁금해졌다. 간단한 조사를 통해 찾아보니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와 극동에서의 전략적전쟁중이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달리 자국의 주권선 수호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거대한 영토를 방어하는데의 불리함과, 지리적 특성때문에 부동항의 부재로 해군력이 약해 빠른 수송과 이동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지리적 특징인 섬이라는 점과는 또 다른 불리함이었다.<br>러시아는 자국의 이익선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서구열강들이 즐비한 유럽보다는, 중앙아시아 지역인 아프가니스탄, 동아시아의 조선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해 조선에서 청나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영국과의 군사동맹으로 압도적인 해군력을 갖게 되었고 후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게 된다.<br>러시아의 패배 원인은 앞서 말했듯 주권선 수호에 어려움을 겪어 이익선 수호에 많은 군사력을 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나는 섬나라라는 특징 때문에 자국의 주권선 수호에 유리한 일본은 이익선 방어에 더욱 많은 군사력을 소모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에서 강세를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강국인 영국도 섬나라니 말이다.&nbsp;<br>결국 역사의 결과를 모두 안 상태로 &lt;외교정략론&gt;을 읽어보니 아리토모의 주장은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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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3:53: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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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6</title>
         <author>2021110236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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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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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00: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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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1 김은오</title>
         <author>helen1317</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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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lt;외교정략론&gt;을 읽기 전에 간단히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나서 내용을 읽어보았는데, 조슈번 출신에 반막부파였던 야마가타의 의식이 잘 드러나는 글이었다.<br><br>야마가타가 국가의 독립과 자위를 위해 내세운 것은 주권선과 이익선이었고, 이익선을 방어하여야 한다며 그 이익선은 조선임을 주장했다. 이뿐만아니라 일본의 이해관계상 중요한 것은 조선의 독립 및 중립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다음 문단에서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조선이 단순히 독립을 하는 것만으로는 금방 다른 나라에게 점유당할 위험이 있고, 베트남과 버마가 좌절된 상황에서 그 위험은 청과 일본에게도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청과의 세력 크기가 제법 비등비등해져가는 상황에서 조선이 계속해서 청의 아래에 있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을 일본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을 유럽의 '스위스', '벨기에', '세르비아', '룩셈부르크'와 같이 주변국인 청, 일본의 이익에 맞추어 영구 중립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가 세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야마가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br><br>다음에 야마가타가 이익선을 보호하기 위한 외정에 대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군비, 교육을 내세운 부분을 읽었다. 군비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국민 애국, 군인은 용맹한 사무라이와 같이, 관직은 순량한 관리처럼, 일대주의 등의 문구들이 등장하는 것을 읽었는데, 이 부분에서 특히나 일본 특유의 각득기소 문화와 야마가타의 군국주의적,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br><br>야마가타의 &lt;외교정략론&gt; 상 일본의 이익선이었던 조선 사람으로서 읽기로는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시작을 보여주는 글인 것 같기도 했고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동서양의 정세 속에서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시기까지도 청에게 군사 출병을 요청할 정도로 청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다만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서양과 교류를 하고 있던 만큼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까지 각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그 점을 일본의 군사력 형성 및 증강에 잘 적용한 점은 대단하게 느껴졌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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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14: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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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215696</title>
         <author>chungcarin</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883281</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을 읽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주권선'과 '이익선'을 제시한 야마가타('로렌츠 폰 슈타인'의 '권세강역'과 '이익강역'의 개념을 재구성한 것)가 '주권선을 수호하며 타국의 침해를 용인하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는 부분이었다. 이 점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당시의 국가를 위하여 제시한 주권선의 내용이다. 솔직히 이부분은 '국가'가 있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div><div>하지만 잠시 먼 생각이지만, 이를 보며 개인적으로 든 생각은 '한국은 왜 제국이 되지 못하였나' 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당시에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눈에 띌 만큼의 국가가 아닌지라, 여러 가지로 어려웠을 터이고, 마땅한 리더의 인재도 나설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항상 피해만 보고 한국은 무언가를 개척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것이 확연히 뒤떨어진다는 점이 조금 마음 아팠다.</div><div>덧붙여서, 이익선을 제시한 야마가타는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입장에서는 이 당시의 이익선인 조선이 일본이 아닌 다른 위협이 되는 나라의 주도권 하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본인의 나라,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내놓은 그 당시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이 머릿속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기록을 보며 감상문을 쓰고 있는 대학생의 시선으로는 이 시대의 한국은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iv>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미뤄두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군의 아버지' 이 인물의 &lt;외교정략론&gt;만을 놓고 보면, 솔직히 대단하다. 주권선과 이익선 외에도, 서양의 군사제도를 받아들이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일본이라는 국가를 굳건히 하는 데에 굉장회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강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승화시키며, 자신의 나라인 일본의 위치적 약점과 이 외의 강점을 파악하고, 오로지 자신의 국가를 생각하는 애국심, 그리고이러한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실행력 이는 타고난 리더의 자질이다.</div><div>이 당시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행적은 가히 '일본군의 아버지'와 같은 타이틀은 충분히 새길 수 있었다.&nbsp;</div><div>결론적으로 이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행적은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아주 힘든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일본에서는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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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24: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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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7</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22605</link>
         <description><![CDATA[<div>&nbsp;감상의 본 내용을 떠나 여담을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의 도입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제국의 신민이 된 자는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그 나아갈 길을 하나로 하여 영원토록 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루스 베네딕트의 &lt;국화와 칼&gt;에서는 일본인을 ‘철저히 일본 정신을 발휘해야만 하는 것’, ‘천황의 뜻을 받들어 모시어’ 등으로 평가하며 그들이 가진 전체 주의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 일본인을 관찰한 내용을 실제 일본인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공통되게 드러났다는 점이 꽤나 흥미로웠다.&nbsp;</div><div>&nbsp;야마가타는 본 이론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론이 주장되었던 1890년은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까지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삼국의 가운데 당시 조선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어떤 나라든 조선을 차지한다면 군사적으로써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lt;외교정략론&gt; 속에서 조선은 이익선의 초점으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일본의 입장에서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면 자신의 이익선을 빼앗기게 되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강력했던 청나라를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명목상으로 그들에게 조선이라는 국가는 본인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면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조선과 일본이 맺었던 조일 수호 조규에서도 ‘조선은 자주의 나라’임을 표기했다고 생각한다.&nbsp;</div><div>&nbsp;침략을 당했던 국가의 후손으로서 이 내용을 보았을 때 사실 썩 기분좋게 보지는 못했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자주적인 국가로 인정받은 것도,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도 모두 국가들끼리의 눈치 싸움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역사적인 관계를 떠나 야마가타의 정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는 당시 시대를 잘 읽을 수 있었기에 빠르게 다른 서구 열강과 손을 잡을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마 당시 국제 정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 고유의 국가주의적인 성향은 잃지 않으면서, 시대 흐름에 맞게 새로움을 빠르게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점에서 야마가타는 훌륭한 정치가라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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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42: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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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39929</link>
         <description><![CDATA[<div>&nbsp; 우선 외교정략론을 읽고 알게 된 가장 큰 사실은 일본이 러시아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국사를 배울 당시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간의 갈등에 초점을 두기에 주변국의 정세는 고려하지 못했다. 아무리 주변국이라고 한들, 역사가 삼국 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너무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읽기 활동을 통해 조선을 둘러싸고 주변국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알게 되면서 역사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br><br>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행적을 보고 그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거나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그가 한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열강들 사이에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주권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익선을 방어하여 항상 유리한 지형에 서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그가 조선을 이익선의 초점으로 설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체 어떤 점에서 보호를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그는 조선의 독립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당시 조선은 스스로를 지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국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나라가 독립국이므로 조선은 그가 말한 독립국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이, 타국이 나서서 보호해준다는 것 자체가 모순되는 점이라고 느꼈다. 결국 이익선은 말 그대로 이익을 취하기 위한 선이며, 이 범위에 들어온 나라는 언제든 자국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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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50: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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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6</title>
         <author>bcuemily</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57166</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과 &lt;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gt;을 집필하신 서승원 교수님의 글을 읽고 전반적인 세계의 근현대사적인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당대 시대를 바라보면서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nbsp;</div><div>야마가토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은 러시아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러시아를 견제해야 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이 러시아를 상당히 경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으로서 러시아가 조선을 넘어 일본으로 영향력으로 행사하게 될 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조선 다음으로 자신이 그 다음 타겟이 될지 두려워서라는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러시아가 주도하여 그 영향력을 빼앗기는 게 두려운 부분도 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nbsp;</div><div>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 동맹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입장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자신들의 입장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인이지라 그 점이 지금의 나로서는 굉장히 씁쓸하게 느껴진다.</div><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 내용 외에도 전반적으로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세계적으로 소위 열강이라는 부르는 국가들 사이에는 수많은 동맹이 체결되었지만 또 수많은 체결이 와해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되지 않으면 생각보다 그 동맹은 쉽게 사라졌고 또 반대로 이해관계에 맞는다면 쉽게 체결되었다. 마치 이를 보면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나라 중심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그러한 흐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와 나라가 맺는 협약이라든지 수교라든지 지금의 외교는 상대 국가에 대한 친밀함 정도가 높고 그 약속이 상대적으로 깨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대 근현대사적인 동맹은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는 생각을 했다.&nbsp;</div><div>그리고 &lt;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gt;에서 청일전쟁 부분을 설명한다. 청일 전쟁은 알다시피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나라 정부 힘으로만 동학농민운동을 저지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외세의 힘 즉 청의 힘을 빌리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일본까지 합세하고 청일 전쟁까지 번지게 되는 일이 역사의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동학 농민운동군과 잘 합의를 보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우지 않았을까? 라는 점에서 늘 아쉬움이 남는다.</div><div>끝으로 우리는 과거 일제강점기로 인해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이 자행했던 일들에 대해 결코 옹호해서도 안 되고 그럴 마음도 없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하는 점은 단순히 이러한 일련의 결과가 오롯이 일본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이 조선을 향해 자행했던 행위들 모두 서구 열강도 그에 못지 않게 다른 국가에 행동했으며 오히려 시작은 서구 열강이었고 일본은 이를 답습해 따라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새삼 생각해보지만 만약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는 국가들이 많았기에 다른 열강들 아래 지배당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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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57: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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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59906</link>
         <description><![CDATA[<div>‘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은 우리 공동의 목적이며 이 일정한 방향은 우선 정부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침임은 물론이거니와, 장래 정치적인 분합에 그 어떠한 변화가 발생한다고 하더라고, 무릇 제국의 신민이 된 자는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그 나아갈 기릉ㄹ 하나로 하여 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에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div><div>야마가타는 이미 일본은 주권선은 물론, 이익선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달리 주권선도 지킬 수 없어 주변국에게 의지해야 하는 국가라고 보았고, 따라서 야마가타는 일본의 이익선인 조선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다.&nbsp;</div><div>외교정략론을 읽고, 나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다른 시야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단지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 역사가 일어난 과정과, 그 일련의 과정 속에 담긴 생각과 주장을 하나하나 다 읽어낼 수 없었고 결국엔 역사의 결과만을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을 단지 조선을 침략하고 약탈한 침략국, 조선은 무력하게 모든 자치권을 빼앗긴 국가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마가타 아리모토의 ‘외교정략론’을 읽고 일본이 어떠한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져갔는지 알 수 있었다,&nbsp;</div><div>일본은 조선을 청나라와의 주종관계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에게 있어서 조선은 이익선이있으며, 주권선을 꾀할 수 없는 국가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과 청의 주종관계를 해제하기 위해 조선의 중립국화를 주장했다. 그렇게 청나라를 압박하고 나서는 러시아가 일본과 조선을 함께 위협했다.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하고 조선까지 진출한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일본이 다음 위협국이 된다는 것은 명백했다. 따라서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여러 권한을 갖게 되었다.</div><div>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단지 조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본다면 일본이 단지 조선에 대한 지배력, 자치권들을 얻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보이지만 야마가타 아리모토의 외교정략론을 통해 해석해보자면 일본은 자신의 국가뿐만 아니라 주변국인 조선을 지키기 위해, 또한 조선이 최소한의 주권선을 지키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러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div><div>이를 통해 이때까지의 내가 일본에 대해, 일본의 조선 침략과 자치권 박탈 등을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과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이 주권선과 이익선을 지킬 힘이 있었다면 야마가타의 주장이 바뀌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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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59: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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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99</title>
         <author>kam9908141</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60003</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 국가의 독립과 자위의 길은 두 가지에 있다 주장한다. 우선 먼저 첫 번째 방법은 주권선을 수호하여 타국의 침해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이익선을 방어하여 자국의 지형적 유리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하여 주권선은 국경이고, 주권선은 자주독립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이익선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이라도 병력을 통해 외국의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이익선의 초점은 조선에 있다 주장하였다. 청나라의 영향력과 이후 시베리아 철도 완공으로 인한 러시아, 영국의 동아시아 국가에게 끼칠 영향력을 고려하여, 조선을 중립국화 하여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다.&nbsp;<br>당시 어떤 국가이든 이익선은 국가의 안보 및 존립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었고, 1980년대에 청일은 누구 하나가 우위라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힘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조선을 이익선의 기준으로 둔 것이었지 이가 문제되지 않는다 생각한다. 몇몇 이는 일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을 중립국화하려는 점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비열한 행동이다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부국강병을 위하여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정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일본이 이익선을 확장하여 비교적 힘없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이익선의 확장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청나라 일본과 견주어 보았을 때 대등한 위치에 있었더라면 조선이 이익선의 기준이 되었을까?&nbsp;<br>한국인의 입장으로써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조선이 힘있는 나라였다면 일본의 대한 이런 해석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든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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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4:59: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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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9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3986261</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을 읽을 때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시 역사적인 상황과 흐름을 생각해보면서 읽으려고 노력했다.&nbsp;<br>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생각했고 조선을 확보함으로써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와 조선의 항구를 연결하는 것을 막아 일본의 주권선을 수호하려고 했다. 당시 대외적인 상황을&nbsp; 생각해보면 그의 주권선과 이익선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이야기다라는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일본인이었다면 일본만 생각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이런 주장은 일본인들의 대외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럴싸해보이지만 사실은 주권선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어 어쩔래 배째라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또한 그들이 정말 자신들의 주권선을 수호하기 위함이였다면 이익선을 확보한 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이익선의 개념은 멈춤이 없기 때문에 이 이익선을지키기 위해 또 다음 이익선을 확보해야하는 필요성이 생긴다. 즉,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팽창야욕을 주권선과 이익선 속에 교묘하게 녹여낸 것이다. 이익선과 주권선을 이야기했던 처음 순간부터 일본은 팽창을 너무나도 원하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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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5:12: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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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4098955</link>
         <description><![CDATA[<div>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 은 당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존립에 대해 고민하던 생각이 드러나있는 책으로 보인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읽어보았을 때,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짚어볼 수 있는 몇 가지 내용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언급해보고자 한다.<br>&nbsp;그 첫번째로, 이익선과 주권선의 개념을 이야기할 수 있다.&nbsp; 당시 일본 지도층이 일본의 국가 존립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했던 것은 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이 아닌 바로 러시아였다는 점이 이 지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적인 역사를 공부할 때,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마치 조선을 두고 청과 대립한 것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이는 뒤에 이어지는 러일전쟁의 원인과 일본 내의 당대 사회 인식을 고려하기 어려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을 이익선으로 생각하고, 러시아를 매우 큰 대외적 위협으로 생각했던 당대 일본이 '이익선' 으로의 조선의 영세 중립화를 언급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이어지는 주권선에 관한 내용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주권선을 '국경' 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외교정략론] 에서 톈진 조약을 건드려 국경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주권선과 이익선이 바로 '국경'과 '중립화된 조선' 이라는 것이 주된 논지인 것이다.<br>&nbsp;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은, 과연 당시의 일본은 이 2가지 요소를 왜 이야기하고 강조했던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이른바 '문명화' 된 서구 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던 상태였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또한 '제국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이익을 보존하며 존립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집중한 채 점차 '제국화' 되어가는 일본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며, 또한 [외교정략론] 이 이야기되었을 당시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일본의 행보와 군국주의화, 태평양 전쟁까지의 일본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br>&nbsp;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야욕과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의 과거 및 식민지배의 역사 등을 기억하는 우리가 [외교정략론] 의 논지를 이해해야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이 글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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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3 16:09: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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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7</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4937785</link>
         <description><![CDATA[<pre>야마가타 유토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군사 전략가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에 뛰어든 이 인물은 물론 일본군을 결성하고 강화했지만 그의 행동은 평화와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침략과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원동력이자 일본의 침략과 팽창의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다.1889년 야마가타의 내각을 조직했다.집권 후에는 더욱 광적으로 외세의 침략과 팽창을 옹호하였다. 1890년 6월 그는 정책 연설에서 소위 "이해선"의 침략 이론을 공개적으로 꾸며냈고 의회에 중국 침략 준비를 위한 군사 예산을 통과시키도록 요청했다.그는 조국의 자주성과 자위의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첫째는 자주권로선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리익로선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권선"이란 무엇입니까? 국가의 국경도 그렇습니다. "관심선"이란 무엇입니까? 즉, 내 주권의 안보와 밀접하게 관련된 영역입니다. 산현의 선동 아래 일제 침략과 팽창에 이바지한 각종 명제와 집단이 잇달아 나왔다.</pre><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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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4 03:37: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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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489</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5025662</link>
         <description><![CDATA[<div>&nbsp; &nbsp;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식민제국을 지향해 왔기 때문에 대외침략의 확장은 일본 근대 외교책의 뚜렷한 모티브가 되었다. 갓 태어난 메이지 신정부에게 국익을 지키는 것은 서구 열강이 노리는 위협에 맞서 일본의 영토 보전과 주권 독립을 지켜낸다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메이지 신정부 지도자들은 서구 문명의 학습을 통해 국력을 증강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 체제의 낙후, 국력의 약점을 종합하여 서양을 배워 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것이 시급함을 절감했다. '부국강병'은 이로써 일본이 '국가의 독립'을 확보해 국익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가 됐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대외론은 일본의 부국강병 에 큰 역할을 하였다.<br>&nbsp; &nbsp;메이지 시대 일본의 외교안보 방비전략은 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시한 '이익선'과 '주권선'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른바 '이익선'을 보호하고 '주권선'을 지킨다.'이익선' 즉 북한, '이익선'을 지키는 것은 일본이 북한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보장하고, 북한을 통제함으로써 일본 본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 수립부터 일본은 대외적으로 조선을 확장해 병탄하려 했지만 조선의 종주국이 청나라였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먼저 군사적 탐색을 통해, 이어서 외교적인 선회를 통해 대내적인 군사정치 개혁을 하는 등,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대외론인 이익선과 주권선 이 제기될 때까지 대외 침략의 확장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이익선'과 '주권선' 이론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타당성이 입증되었으며, 근대 일본의 대외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은 '이익선'에서 '주권선'으로 바뀌었고, 중국의 만주는 일본의 '이익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선 주권선에 대한 과잉 방위는 일본을 대외 확장이라는 괴리에 빠뜨려 훗날 전멸의 씨앗을 뿌렸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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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4 05:12: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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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6020748</link>
         <description><![CDATA[<div>&lt;외교정략론&gt;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과 다른듯 하면서도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일단 다른 듯한 느낌을 받은 것에는 조선의 중립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것의 이유가 일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본다면 어쨌든 조선을 점령하려 했던 일본의 기존 입장과는 모순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초반과는 달리 계속 읽어내려갈수록 '조선의 중립'을 원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 당시의 일본은 영국과 독일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시베리아 철도로 인해 더욱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며 청과 조약을 맺어 조선의 독립을 영위하려 했다. &lt;외교정략론&gt;을 읽는 내내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보기 좋은 말로 포장되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중간에 '조선의 공동보호'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위를 보호라는 말로 포장하는 느낌이 강했다. 또한 한 나라라 하면은 당연히 자국의 영토를 중요시하며 자국과 맞닿아 있는 국가에 가장 많은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일본은 서양을 너무 두려워했기에 조선을 '이익선'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나름의 '방패막'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라는 방패막이 뚫리게 되면 일본 자국에 피해가 오기 때문에 이익선 방어라는 말로 방패를 지키고 있던 것이라고 보여졌다.&nbsp;<br>&lt;외교정략론&gt;에는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본 주의 국가들에 대한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있었다. 서양을 무서워하는 것, 청과는 어느정도 힘을 합칠 수 있는 존재, 조선은 '이익선'이라는 뚫리지 않아야할 방패막. 사실 일본이 말하는 '조선'에 속하는 국민이어서 더 부정적인 해석이 가미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기분은 배제하고 보았을 때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본다는 것이 자체만으로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lt;외교정략론&gt;을 통해 기존에 알고 있던 일본이 조선에 가지고 있던 인식의 기본에 살이 덧붙여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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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4 16:05: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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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26977058</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에서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통해서 당시 일본이 주변 국가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선과 러시아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야마가타는 조선이 자국의 주권선을 지키지도 못할 만큼 미약한 힘을 가지고있다고 보았고 ‘러시아가 동양에 거대한 피란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만큼 러시아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따라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수단으로서 조선의 중립화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의 이야기일뿐이고, 한국인인 필자의 입장에서 야마가타의 입장을 읽어보니 그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합리화 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조선을 중립화하여 동양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것을 도모했으며,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설정하고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조선에 강대국이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무력을 행사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만 ‘보호와 안전’을 위한 것이지 조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 또한 침략자들이 아닌가?<br></strong><br></div><div><strong>물론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고려해봤을 때, 조선은 침몰하는 배 그 자체였고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부족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와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강대국들이 우크라이나에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아닌 무기를 지원해주는 것처럼 일본 또한 또 다른 방법으로 조선을 지킬 수있지 않았을까?&nbsp;<br></strong><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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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5 05:22: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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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6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1762288</link>
         <description><![CDATA[<div>'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일본이 조선을 독립의 보장지로 하는 것은 개국 이래의 국시이며, 현재 및 장래에도변동이 없을 것, 서쪽 조선해협이 있어 동서의 항로를 막음으로써 자연적으로 국방에 도움이 되고 따라서 조선이 우리에게 우호적일 때는 동해의 관문이 단단하여 국방에 크게 유리하지만, 이와는 달리 만약 강대국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그 위치는 곧 우리의 급소이며 거리로는 불과 몇 시간만에 도항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방에 어려움이 생기고 모든 것에 제약을받아 마침내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일본이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이득을 취하기 위해 조선이 다른 나라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자신의 지배력 하에 두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의입장에서는 그들은 국가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고 그를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고 여러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국가 안보를 위해 착취와 지배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단지 자신의 국가를지키기 위함이었다면 한국의 내정에 간섭을 하고, 외교권을 박탈하며 사법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만들어야 했을까. 처음엔 물론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을지 모르겠으나, 후에는 일본의 욕심으로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세력을 확장하기위해 한국의 식민지배를 감행했고, 이를 일본은 국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포장한 것으로 생각된다.&nbsp;</div><div>또한 가쓰라 테프트 조약에서 가쓰라 백작은, 전쟁 후에 조선을 그대로 둔다면 조선은 분명 그 부주의한 습성대로 다시다른 열강들과 협약 또는 조약을 체결하려 들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며 조선이 일본의 동의 없이 대외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요구할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을 일본 군대가 가지는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이고 극동에서의 항구적 평화에도 공헌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에도 말했듯 일본국가적 차원으로서는 조선의 행보가 걱정이 되고 그들에게 위협인 것은 분명하나 일본이 조선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그후에도 을사조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 정미조약으로 내정의 실권 장악, 한국군 해산, 한국 사법 및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로 사법권을 제한하고 결국 병합조약으로 식민지 조선을 만들었다는 것에서 단지 일본의 국가 안보 차원의 조선 보호권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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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8 08:06: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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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제1차 영일동맹~을사조약&gt; 2018110267 두다혜</title>
         <author>endltgld</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2417197</link>
         <description><![CDATA[<div>&nbsp;이번 범위의 내용은 정말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사의 범위에서 한 줄 요약된 설명을 읽었을 때도 잘 외우지 못했는데, 모든 내용을 이렇게 풀어서 보니 단순하게 어떤 말이 처음 나오는 말이고 어떤 말이 강조되는 말인지조차 잘 모르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읽은 부분은 정치 조약의 내용 그 자체였기에, 이렇다 할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족하게나마 당시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br><br></div><div>&nbsp;&lt;제1차 영일동맹&gt;에서 본 러일전쟁은 책에서 나온 ‘또 하나의 세계대전’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딱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그저 일본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러시아에 맞서 벌인 전쟁, 혹은 청일전쟁 다음에 일어난 전쟁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물론 한 줄 요약처럼 간단하게 일어난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은 물론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까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한 두 전쟁과 이후 상황에서 서로 견제했다가 동맹을 맺고 나중에는 또다시 그것이 깨지는 모습들에서 자국의 이익을 가장 중시하는 국가로서의 외교가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자국의 이익은 중시하되 국제기구나 조약들이 지켜지는 것에 중심이 있고 외교적 압박은 그 수단으로 쓰일 때가 많은 현재에 비해, 과거에는 조약이나 동맹이 오히려 무력 충돌 전의 사전 경고에 불과한 것처럼 그 무게가 크지 않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br><br></div><div>&nbsp;&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는 조선이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왜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본측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 소통과 침략의 벽이 되었던 바다가 이제는 평지와 다름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일본은 수비 지점이 과거에 비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해협의 상태가 그들의 국방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동안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다음엔 청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조선이 다른 강국의 속국이 되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 존립의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외교정략론에서도 보았듯이 조선은 일본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다만 조선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였다면 또다른 방법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메이지 시기를 거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청과 조선을 친구에서 손절의 대상으로 느끼며 돌아설 만큼 소원해졌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br><br></div><div> 일본은 &lt;포츠머스 조약&gt;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완전한 보호권을 인정받았으며 &lt;가쓰라 태프트 조약&gt;에서 미국과의 이해관계도 일치시켰다. 이런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존립을 위한 한국 보호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진 &lt;한일의정서&gt;, &lt;을사조약&gt; 등을 통한 한일병합은 내가 보기엔 일본 존립이 아닌 자국 이익을 위한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일본의 행위에서 자국 방위와 발전 사이의 경계선을 나누자면 여기를 기준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당시는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로서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시기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독주는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조약마다 공통적으로 적용되어 있던 ‘항구적 평화를 위하여’라는 목적이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누군가는 발전을 이루었고 현재의 국제연합이 생기는 데에 이바지했다 하더라도 이 모든 상황을 역사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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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9 12:05: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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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2421407</link>
         <description><![CDATA[<div><br></div><ul><li>시대적 배경에 맞게 &lt;영일 동맹&gt;은 국제정인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한 조약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국제적 중립을 추구한다고 밝혔던 2조와는 정반대로 3조에서는 만약 교전에 가담한다면 다른 한쪽도 협동하여 전투에 가담해야한다는 문구를 보고 가장 상반된 두 개의 조항이 한 조약의 포함된 것이 이질적이라고 느껴졌다.</li></ul><div><br></div><ul><li>&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를 읽고 양가적인 내용에 혼란스럽다.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에서는 힘있는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세계적인 배경 속에서, 일본 역시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한일 병합을 꾀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이 의견서를 읽고서는 일본이 (물론 조선 침략을 정당화 하는건 반대하지만) 국제적인 정서에 국가의 존립을 위협받고 있고, 국가를 존속하기 위한 의견이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받아왔던 교육으로 쌓은 나의 고정관념이 깨져서 약간 혼란스럽다고 느껴졌다. 한국과 일본 외의 전세계적인 국가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다시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li></ul><div><br></div><ul><li>태프트 장관의 의견이었던 조선이 스스로 대외 조약을 체결할 수 없도록 하는 권한이 실제 을사조약에 반영이 되었을까가 궁금하다. 물론 미국의 장관임은 사실이나, 단 한사람의 의견이었는데 이게 과연 실제 조약에 영향을 미친것인지, 미쳤다면 어느정도 미쳤을지, 또한 강대국 한 사람의 의견을 토대로 국가의 조약 체결 및 합병을 진행하는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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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9 12:14: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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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6</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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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lt;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gt;의 자료를 통해 &lt;영일동맹&gt;부터 &lt;을사조약&gt;까지의 과정과 그 결과에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때 몇가지 생각해볼만한 점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일동맹은 1902년이고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이다. 이 기간의 여러 사건들을 결과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으며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사건들을 보면서 을미사변을 떠올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을미사변은 고종과 민비가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고 친 러시아인사들을 기용해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다 일본에 의해 민비가 살해 당한 사건이다. 사실 위 사건들의 결과들을 보면 사실상 한반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들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이다. 필자가 새로 안 사실은 을미사변을 통해 조선내 친 러시아 세력을 견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완벽하게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타국의 왕비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조선국의 의사는 논외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을 떠올린 이유는 &lt;가쓰라 테프트조약&gt;의 영향도 있었다. 이또한 조선의 문제를 조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했는데 당연하지만 사실상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만을 중시했지 조선국, 그 구성원에 대한 가치는 안중에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필자 자신이 당시 국제정세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영향력, 국력에 대해 조금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을미사변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이 그 전보다 더 커졌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민비를 암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는데에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영향력을 짐작 할 수 있게해준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영일동맹의 내용을 보면 영국을 대영제국으로 일본을 일본국으로 표현하는 반면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시작으로 포츠머츠 조약부터는 일본을 일본제국으로 말하고 있다. 단순 번역의 문제인지, 일본측 인사의 인식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가정한다면 일본의 강해지는 국력을 볼 수 있음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중 하나였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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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9 15:03: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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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93 김윤성</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2776687</link>
         <description><![CDATA[<div> 영일동맹은 일본이 열강들에게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러시아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배경에는 또 다른 세계 대전이라 불릴 만큼 각 열강들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영국과 유사하게 대륙들 간의 세력 균형 유지를 통해 지정학적 게임을 했다고 보는 의견과 영일 동맹은 외교정략상의 일시적 행보에 불과하고 오히려 주적으로 상정했던 러시아와 유사하게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식민 지배를 통한 대륙으로의 영토 팽창 노선을 걷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모두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 정략론이 시대가 흐르고 구체화되어 감에 따라 변화한 과정으로 생각해 보았다.</div><div>&nbsp; &nbsp;</div><div>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부터 살펴보면 앞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 정략론에서와 같이 일본의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익선인 조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최우선 사항으로 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화사상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청의 강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청일 전쟁 발발했고 이후 약점이 드러난 청이 다른 열강들과 차례로 조약들을 맺고 약화되자 가장 큰 위협을 러시아와 미국으로 삼고 기존까지의 일본 영토 국방에서 동양 전체와 열강들의 위협으로 시야를 넓힌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외교 정략론이 한 번 그 노선을 변화하게 된 것 같다. 청일 전쟁 과정에서 조선과 청의 중화중심주의의 사대주의 문화와 일본의 근대화 사이에서 일본이 야만과 문명의 대립구도를 상정했던 것과 더불어 조선이 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일본뿐만 아니라 열강 세력들의 동양 침입은 막기 어려운 것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반도를 이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어선으로 보았고 이후 러시아를 막기 위한 대안에서 영일 동맹이라는 국가 균형을 이용하는 전략으로 수단으로서 효과적인 국방 전략을 채택한 것 같다.</div><div>&nbsp; &nbsp;</div><div> 다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존까지의 외교 정략론을 바탕으로 한 공세적 방어 개념이 자연스럽게 당시에 만연했던 열강들의 제국주의의 영향과 더불어 주권선과 이익선을 각각 한반도와 만주로 확대하는 배경이 된 것 같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가쓰라-테프트 비망록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가쓰라 백작이 필리핀에 대해 침략적 의도를 품고 있지 않음을 명확히 밝혔고, 극동에서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국제 정책의 기본 방침이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만연해있던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발맞춰 식민 지배를 하나의 수단으로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당시의 주 목적은 러시아의 남하 방지에 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div><div>&nbsp; &nbsp;</div><div> 이후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한반도 내부에서는 을사조약의 체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해 완전한 식민 지배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 식민 지배가 당대의 열강들의 힘의 섭리와 같은 작용이었던 배경과 더불어 일본은 기존까지 청과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하며 소비했던 국력을 조약 체결과 더불어 크게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러시아는 철도 건설보다 한반도 차지가 비용 절감에 효과적이라며 러일 전쟁에서 훨씬 공격적인 입지를 취하고 있었던 배경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이 러시아와 같이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당대부터 세계 정복과 같은 야욕을 드러낸 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정한론이 일찍이 등장한 배경에도 당대 사무라이들이 겪은 메이지 유신은 막부 체제에서의 갑작스러운 변화였고 기존의 사무라이들이 통치를 무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전쟁 없이는 유지되기 힘든 계급 체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교정략론 자체도 공세적 방어를 바탕으로 이익선 개념의 확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단순히 1900년대 초,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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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09 21:24: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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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4110282 일련의 일본 외교정책 사료를 읽고</title>
         <author>ynho123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2891805</link>
         <description><![CDATA[<div>&lt;제1차 영일동맹&gt; 부터 &lt;을사조약&gt;까지. 일련의 일본 외교정책 사료를 살펴보면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전략을 알 수 있다. 앞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을 통해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통해 조선을 제국일본으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청일전쟁을 통해 청을 배제하였고 극동지방에서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으려 했다. 이는 &lt;1차 영일동맹&gt; 과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 잘 드러나있다. 즉 ‘청제국’에서의 영국의 이익과 ‘한제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상호 보전하려고 했으며 동아시아 에서의 공동의 적인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배경에서 체결 된 것이 1차 영일동맹이다. 오야마 이와오는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 해상교통수단이 발달한 시대에 섬나라인 일본의 국방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을 지목했다. 중요한 조선에 대한 위협을 청일전쟁을 통해 1차적으로 방지한 바 있고 다가오는 위협적인 세력으로 러시아를 지목하여 일본의 적으로 러시아를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전쟁을 감행했고 러일전쟁을 승리함에따라 포츠머스 조약, 가-태밀약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즉, 일본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지배를 목표로 했으며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과 전쟁을 통해 구체적으로 목표를 달성해갔음을 알 수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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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1:44: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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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7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2962440</link>
         <description><![CDATA[<div>조약들로 살펴본 당시 국제적 흐름은 그저 한 줄의 글로써 아는 것 보다 더 실질적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그 당시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내가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nbsp;</div><div>&nbsp; &nbsp;</div><div>&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를 읽는 것은 당시 일본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봤는지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저번에 살펴본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에 기초해서 일본이 조선반도 지역을 상당히 중요하게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앞으로 살펴볼 일본의 외교적, 정치적 행보를 살피는데 중요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었다.</div><div>&nbsp; &nbsp;</div><div>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막고 영국은 양자강 유역을, 일본은 만주, 한반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이해관계가 맞아 맺어진 것이 바로 &lt;영일동맹&gt;이었다. 러일전쟁 후에 맺어진 &lt;포츠머스조약&gt;도 조선에 중요시 했던 일본의 안보 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 &lt;포츠머스조약&gt;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도, 보호, 감리 권한 동의, 러시아가 보유하던 랴오둥 반도에서의 이권 양도, 남만주 철도관련 이권 양도, 사할린 지영 양여를 규정하였다. &lt;가쓰라 테프트조약&gt;도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들어갔다. 결국 &lt;을사조약&gt;으로 조선의 외교적권리를 일본이 가져가면서 조선을 완전하게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div><div>&nbsp; &nbsp;</div><div>후에 일본이 제국주의적 국가로써 발딛음할 수 있었던 것에는 당시에 영국, 미국 등 다양한 국가들과의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일본의 이해관계와 잘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이해관계가 당시의 강대국들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독주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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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3:35: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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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6</title>
         <author>bcuemily</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13825</link>
         <description><![CDATA[<div>이번 기회를 통해 영일동맹, 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 포츠머스조약, 가쓰라 테프트조약, 을사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모두 읽어보면서 당시 정세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div><div>먼저 영일동맹의 경우 쉽게 이야기하자면 당시 두 국가 모두 러시아의 남하를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맺어진 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일동맹의 가장 큰 의미는 일본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이 아닌 동맹을 맺었고 무엇보다 서구 열강 중에서도 최강 해양 국가라고 불리는 영국과 체결함으로써 동방의 작은 국가라는 이미지에서 열강 반열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nbsp;</div><div>그리고 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보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lt;외교정략론&gt;이 바로 생각났다. 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작성했던 오야마 이와오 역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조선을 이익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점, 끝으로 조선의 독립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야마 이와오가 이 의견서를 썼을 당시가 1903년으로 2년 뒤에 우리가 아는 역사에 의거하면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불과 2년 전만 해도 특별히 조선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어야한다는 야욕을 내비치는 문구가 없어 의외라고 느껴졌다. 그저 조선을 이익선으로 보고 조선을 독립 상태로 두지 못한다면 일본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만을 언급하고 있다.</div><div>포츠머스 조약은 러일 전쟁 이후 미국의 중재하에 체결된 조약이다. 그 전에 이 조약의 바탕이 된 러일 전쟁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면 서승원 교수님의 &lt;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gt; 1장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와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다. 실제로 이를 보여주는 러일 전쟁 풍자화 속에는 러시아 일본이라는 선수가 나와 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열강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러일 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여러모로 큰데 일단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기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러시아라는 큰 서구 열강을 자신들이 이겼다는 점에서 그 이후 일본의 행보에 자신감의 기반이 되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영향력을 빼앗아 온 것 역시 큰 성과였다. 또한 3국 간섭으로 빼앗겼던 랴오둥반도에 대한 복수도 가능했던 전쟁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전투력은 일본보다 우세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극동함대가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나뉘었던 점 즉 병력이 분사되었던 점이 러시아에게 있어서 크나큰 전쟁의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병력이 집결되어있는 상태였더라면 함부로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공격하지 못했을 것이고 역사 속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혹여 일어났더라도 그 결과가 지금과는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체결 내용을 읽어 보면서 조항 자체도 많고 그 내용 역시 세세한 것을 통해 당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영향력을 완전히 빼앗고 싶었다는 결의가 잘 느껴지는 것 같다.&nbsp;</div><div>가쓰라 테프트 조약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조약이다. 안타깝지만 정작 필리핀과 조선의 입장 따위는 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식으로 좋게 해석하여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모습은 실로 한국인 관점에서 굉장히 불쾌한 조약으로 느껴진다. 이를 통해 당시 필리핀과 조선을 바라보는 열강들의 관점이 어떠했는지가 뚜렷이 보인다. 그저 그들의 땅따먹기 게임 속에 그들의 영역 넓히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졌다.&nbsp;</div><div>끝으로 을사조약은 우리나라에서 을사늑약으로도 부르는 만큼 한국인에게 있어서 치욕스럽다고 느껴지는 조약이며 조선이 일본 지배하에 들어가는 수순을 잘 보여준다. 그전부터 일본은 외교권과 재정에 내정 간섭까지 이미 조선 지배에 대한 야욕을 차차 실현해 오고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을사조약을 비롯한 일본의 불평등 조약은 여전히 화가 나지만 세계사적으로 비단 일본만이 아닌 여러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불평등한 일들은 만연했다. 따라서 저번 과제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이 일제강점기 시기 자행한 일을 옹호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비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이 일본이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서라기보다 다른 열강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를 일본이 답습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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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4:55: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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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91</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37548</link>
         <description><![CDATA[<div>가쓰라 테프트 조약에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밝히면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있다. 대신 미국은 조선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원인임을 인정하며<br>극동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서로<br>인정하고 터치하지 말자는 조약이다.&nbsp;<br>영일 동맹에서는 영국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해주었고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해주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보호권만 승인했을 뿐 병합을 승인하지는 않았다고 나오지만 승인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반발하거나 비판하거나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묵살했다. 다른 나라가 조선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각자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사실이 씁쓸했다.&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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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5:36: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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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8</title>
         <author>halin2378</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44084</link>
         <description><![CDATA[<div>여러 조약과 동맹, 비망록 등을 시간의 흐름에 맞춰 읽으니 그 당시의 정세에 대해 점점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지난 번의 &lt;외교정략론&gt;을 읽으면서도 일본은 자국을 위해 우리나라를 필요로 하여 이익선이라는 말로 포장시켰다는 감상을 했는데 이번 흐름을 읽고 나니 일본의 입장이 어땠는지에 대해 아주 잘 알 수 있었다.&nbsp;<br><br>일본의 한국에 대한 입장만 살펴본다면 &lt;영일동맹&gt;에서도 한국을 독립국으로 있게 하며 이익은 일본측이 좀 더 가지는 것, &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는 더 명확히 일본의 지리상 수비가 취약한데 이를 조선이라는 보장지를 통해 수비를 강화 할 수 있다고 나와있었다. 또한 &lt;포츠머스 조약&gt;에서는 러시아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이익을 갖는 다는 것을 승인하고 &lt;가쓰가 태프트 비망록&gt;은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조선의 계약 건에 있어서는 일본이 방해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최종적으로 &lt;을사조약&gt;에서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 &lt;영일 동맹&gt;을 읽을 때는 단어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내용이 명확히 이해가지 않아 몇번이고 다시 읽었었다. 그러나 점점 다른 조약들을 읽어나갈 수록 다들 비슷한 내용을 체결했다는 것이 보이며 술술 읽히게 되었다.&nbsp;<br><br>&lt;포츠머스 조약&gt;의 경우에는 이번에 읽은 5가지 중 유일하게 제 3국이 중간에서 러일의 동맹에 간섭해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것들과 내용도 길고 이질감도 들었다. 좀 내용들이 구체적이었고 명확히 하려는 것 같았다.&nbsp;<br>사실 나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던 것은 &lt;가쓰라 태프트 비망록&gt;이다. 열강이었던 미국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각각의 나라에 대해 어떻게 인지하는지 잘 드러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조선의 부주의한 습성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 계속 협약 또는 조약을 맺고 그에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를 쓰고 다른 나라와 싸울 것이니 일본에서 조선이 일본의 동의 없이 다른 국가와 조약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적혀 있었다. 일본이 정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건드리는 다른 서구 열강들과 열심히 싸웠다는 것에 허탈감을 느꼈다. 일본에게 조선은 겨우 자국을 보호하는 담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일본은 그저 그 담장을 부시려는 자들과 싸웠다는 것이 절실히 보였기 때문이다.&nbsp;<br>서구는 조선 보호 정도의 권리만 일본에 주려고 했지만 이 기회를 틈타 일본은 &lt;을사조약&gt;을 통해 내정 간섭을 시작 했다. 정말 틈을 잘 파고드는 국가란 생각을 했고 사실 을사조약의 경우가 나머지 5가지 중에서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어보니 아주 조금 화가 났다. 제5조의&nbsp; 일본국 정부는 한국황실의 안녕과존염을유지할것을보증한다는 것으로 앞 조항의 뻔뻔함을 덮으려는 것 같았다.&nbsp;<br>이전에 인지만 했던 일본의 많은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었고 시대 흐름에 맞게 읽었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에대한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시작 할 수 있었는지 프롤로그를 본 듯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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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5:48: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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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1 김은오</title>
         <author>helen1317</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51689</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동맹, 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 포츠머스조약, 가쓰라-태프트 조약, 을사조약이라는 각각의 조약 사료들을 읽다 보니 당시 정세 상황과 일본의 의도가 더 쉽게 이해되는 기분이었다.<br><br>&lt;영일동맹&gt;의 내용에서는 영국과 일본 중 한쪽이 제3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다른 한쪽은 중립을 지키며 타국이 교전에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고 다른 타국들이 교전에 가담하는 경우 나머지 한 쪽도 와서 도와야 한다는 내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저 시기의 국가와 국가 간 약속도 요즘 사람들이 싸울 때 맺는 동맹과 별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고 전투 시 동맹 내용이라는 것이 꽤 단순하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와중에도 동맹을 맺은 국가가 영국과 일본이라는 점은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의 국가들 간 관계가 잘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br><br>&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의 내용은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려고 했던 지리적 이유가 잘 드러나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선과 일본 본토 사이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은데, 조선이 타 강대국의 손에 넘어가면 일본에게도 큰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조선은 꼭 자신의 손에 넣고 싶었을 것이다.<br><br>&lt;포츠머스조약&gt;의 경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맺은 조약인만큼 일본이 조선에서 하는 행동들에 대한 인정, 만주로부터 철병, 영토나 특권 양여 등 일본에게 이득이 되는 조항이 많아 보였다. 특히 일본이 조선에서 어떤 일을 하든 러시아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은 &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 조선을 중요시했던 것에서 이어 직접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는 행동까지 오는 것이 보였다.<br><br>&lt;가쓰라-태프트 조약&gt;에서는 마침내 일본이 극동 지역의 평화를 명분으로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얻게 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병합까지 인정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에게 필리핀을 양보하고 조선을 얻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할 정도인 일본에게서 조선을 빼앗으면 또 다른 열강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국가이다보니 서구 국가들이 내버려둔 것처럼도 보였다.<br><br>&lt;을사조약&gt;은 조약의 실제 내용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거의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존재만 남겨놓고 그 위의 외교에 대해서는 모두 일본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 확실히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특히나 점점 타 국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외교의 중요성이 커져가는 상황에 외교를 막아둔 것은 조선 황실로서는 굉장히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br><br>사실 역사 분야는 나비효과가 많은 분야이기도 하고 직접 겪어본 것이 아니니 쉽게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은 낮더라도 만약에 일본이 조선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청, 러시아, 일본, 혹은 또 다른 나라 중 어느 나라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든다. 지리적 위치나 당시 국가 관계들을 생각하면 러시아나 영국 정도가 떠오르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당시 서구 열강들의 군사력, 관계와 같은 자료들을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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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5:59: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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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205 황목자</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59268</link>
         <description><![CDATA[<div>&lt;영일 동맹&gt;은 성공적인 동맹이다.이 조약은 러시아를 겨냥한 군사동맹 조약으로 향후 동북아 국제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일본은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이익을 챙겼다.일본은 영국의 원조에 힘입어 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치고 러시아로부터 중국 동북의 통제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영국은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시베리아횡단철도 완공 직전이었다.완공되면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세력은 전례 없이 커질 것이다.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 원치 않는 일이다.나는 이 조약의 체결이 각 세력이 서로 억제하고 제약하는 동맹이라고 생각한다.나라마다 생각이 다르다.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다.<br><br>다음은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이다.일본이 대륙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빨랐다.게다가 이는 러시아군이 동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러시아가 북한을 장악할 것이다.일본은 딜레마에 직면할 것이다.<br><br>일본이 막강한 러시아를 이길 줄은 아무도 몰랐다.러일 &lt;포츠머스 조약&gt;을 보면 완전한 일본의 승리임을 알 수 있다.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의 자원을 잃게 되었다.일본은 이 틈을 타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를 장악했다.동북과 한반도의 자원들이 끊임없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 것도 일본의 발전을 비약적으로 이끌었다.일본의 후속 전쟁 발발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br><br>마지막으로 &lt;을사조약&gt;이다.&lt;포츠머스 조약&gt;이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마지막 걸림돌을 완전히 제거했다.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일본도 스스로 한국을 삼키는 꿈을 이뤘다.진정한 의미에서 대륙과 연결되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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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6:11: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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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8</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070494</link>
         <description><![CDATA[<div>저번 글과 같이 이번 &lt;영일동맹&gt;, &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 &lt;포츠머스조약&gt;, &lt;가쓰라 테프트 조약&gt;, &lt;을사조약&gt;을 읽어보았다. 한줄로 요약해 보자면 “일본이 계획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려 했다”라고 느꼈다. 이 전 내용과 더불어 전반적인 내용은 일본이 어떤 조약이나 동맹 등을 통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편한 방도를 물색 하는 것 같다.&nbsp;<br><br>특히 영일동맹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야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러시아가 조선 내 부동항을 얻기 위한 행동을 보였다. 시베이라 횡단철도 건립을 통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어지는 연결망을 통해 넓은 대지를 지닌 러시아가 단점을 강점으로 변환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또한 동아시아 내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행위를 많이 보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일영은 서로의 야욕과 이익을 채우기 위해 “영일동맹”을 채결한 것을 심히 알 수 있었다.<br><br>그리고 “조선문제해결애 관한 의견서”는 조선의 영토를 탐하려 하는 일본이 어떤 방식을 이용해야하는지 써 놓은 것 같다. 후쿠오카와 쓰시마, 부산 사이를 보면 매우 근접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단계를 조선 침략으로 정한 것을 이 의견서를 통해 더욱이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유럽열강 및 미국이 아시아를 침탈하려는 야욕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를 일본에서 빼앗기지 않고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많은 노력을 가하는 것을 이번 글을 읽어보면서 볼 수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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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6:25: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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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355</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132570</link>
         <description><![CDATA[<div>&lt;영일동맹&gt;부터 &lt;을사조약&gt;까지 불과 3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체결된 조약이다. 일본은 영국과의 이해관계를 통해 &lt;영일동맹&gt;을 맺으며,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lt;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는 일본이 이익선과 주권선의 개념에서 조선을 바라보며, 자국의 위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과 &lt;가쓰라-태프트 밀약&gt;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으며, 일본이 서구 열강 사이에서 위치를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츠머스 조약을 볼 때, 이는 일본의 완전한 승리로 보기는 어렵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진짜 실력을 보여준 전쟁이었다면, 러일전쟁 일본으로서도 많이 불안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일본은 많은 국력을 소비했고,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어떻게든 이를 채워야 했다. 그러나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직접적으로 얻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원했던 사할린에 대해서도 일본은 남사할린이란 일부만 받게 된다. 당시 사할린 남부는 북부에 비하면 큰 쓸모가 있는 땅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은 전쟁에 많은 국비를 이용했고, 어떻게 해서든 배상금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상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구에서 일본을 인정해주는 위치는 딱 조선에 대한 인정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뒤에 있을 &lt;가쓰라 태프트 밀약&gt;은 미국과 일본과의 이해관계와 루스벨트의 일본에 관한 호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느낌도 있는데, 사회진화론자였던 루스벨트가 왜 그렇게 일본에 호의적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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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7:27: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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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215696</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137645</link>
         <description><![CDATA[<div>일본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한국인으로서는 화가 나지만, 다른 시각으로는 정말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지켜왔다는 생각이 든다.</div><div>솔직히 말해서, 이번에 다룬 내용들 (영일동맹,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 포츠머스 조약, 가쓰라 태프트 조약, 을사조약) 모두 한국을 배제할 수 없다.</div><div>마치 역사 속에 한국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끼인 채 휘둘리는 듯하다.</div><div>그럴 만도 한 것이, 가장 약하고 불안한 국가였던 만큼, 목소리를 내어도 그 울림이 다른 강국들에 의해 묻혀버리는 그 시대에서는 정말 슬픈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접어두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한국과 관련된 일들인 만큼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정리하여 하나씩 짚고 넘어가 보자.</div><div>'영일동맹'은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두어,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맺은 군사적 동맹이다. 이때 영국이 아시아 국가 중 일본과 손을 잡음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조선 침략을 인정하는 것이었다.</div><div>'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는 조선이 일본의 방패로서, 만약 이것이 강대국의 조선 점령으로 무너진다면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div><div>'포츠머스 조약'은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조약으로, 그 가면 안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방법이 있음을 4대 강국으로부터승인을 받아 놓은 것으로, 즉 '한국을 일본에 넘긴다'라고 생각되는 조약이다.</div><div>'가쓰라 태프트 조약' 이 조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계기가 된 조약이다.</div><div>마지막'을지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맺은 조약으로 강제적으로 진행된 조약이다</div><div>이를 보면 모두 하나같이 한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하고 억울한 내용이 많다.</div><div>하지만 이처럼 한국을 방패 삼아 자신의 국가를 지키고 굳건히 하는 일본의 영리함은 가히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한다.</div><div>다만, 이러한 일본의 판단들이 우리 한국을 얼마나 처절하게 만들었을지 또한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굳건히 함을 넘어, 점점 도가 지나친 욕심으로 번졌는지 이는 한국인이라면 바로 알 것이다.&nbsp;</div><div>오늘날의 내가 이러한 역사와 배경을 학습하며, 역사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은 일본과 겨누어도 빠지지 않을나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 몹시 자랑스러운 포인트라는 생각이 이 과제를 하며 문득문득 들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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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7:32: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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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5</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147019</link>
         <description><![CDATA[<div>제1차 영일동맹 조약은 당시 일본과 영국이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이권을 잃지 않음과 동시에 타국에 견제를 할 수 있었던 전략적인 체결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청과 조선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으로 진출할 발판을 얻었다고 본다.포츠머스조약을 통해 한국에 관한 지배와 만주에 확장을 꾀했으나 일본의 지나친 확장을 우려한 삼국으로 랴우둥반도는 반환하게 되었다. 한국에 관한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미국, 영국과 다시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후 을사조약을 체결하며 진출을 이어나갔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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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7:41: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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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6</title>
         <author>20211102361</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195207</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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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25: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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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7</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09888</link>
         <description><![CDATA[<div>&lt;영일동맹&gt;은 일본의 20세기 대외관계사에서 거장 중요한 동맹이다.이번 동맹은 군사 국방상의 전략적 의의도 있고 문화성의 영상도 있다.영국은 왜 일본과 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양국은 공동의 적이 러시아가 있기 때문에 연합하여 러시아를 배척할 수 있다.일본 입장에서는 영국의 지지를 얻으면 러일 전정의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그러나 영일동맹은 양국의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상대방 이익의 필요와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일강일약의 동맹을 통해 양국 관계를 일단 안정시켰다.</div><div>&lt;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는 일본 침략자들이 가장 명확한 언어로 자기들의 침략의 기본목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침략 정책의 전반적인 방향을 표명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문제를 이미 도상 일정에 올려놓았음을 표명하였다.</div><div>&lt;포츠머스 조약&gt;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동아시아를 독점하게 되었다. 전쟁을 끝내는것은 처음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이나 베르사유 조약처럼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 조약이 다음 더 큰 전쟁을 낳았다.</div><div>&lt;가쓰라 태프트 조약&gt;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강점을 상호 허용한다.아시아지역으로의 침략 확대의길을 닦있다.가쓰라태프트 조약은 협정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데 결정적인 전제를 제공하는 담보는 되었다.</div><div>&lt;을사조약&gt;이후는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하여 한국을 자기들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목적을 달성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그리고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고 그 대외관계는 일본에 완전히 접수되고 일본의 허락 없이는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되었다.</div><div><br></div><div>지금도 침략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예나 지금이나 침략을 통해서 자기 영토와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은 잔인한 행위라고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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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35:1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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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3392</title>
         <author>yoondy71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23993</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동맹에서 을사조약까지 결과적으로 미국 영국 일본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일본의 침탈 과정을 계획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nbsp;</div><div>&nbsp;</div><div>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대는 조선을 노령지역 인식하고 철병했던 반면, 일본군대는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었고 나아가 주한일본주차군 병력이 증강될 수 있었다. 이는 전후에도 일본군대의 한국점령을 지속 가능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을사5조약 및 한일병합을 강제할 수 있게 한 전제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nbsp;</div><div>이러한 점에서 조선과는 차별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여 상황의 판단을 빠르게 바꾸어 나간 것이다.</div><div>&nbsp;</div><div>이에따라 계획적인 일본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익 앞에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세계 정세를 잘 살피고 눈치가 빨랐고, 전쟁을 해야 할 때에는 배짱으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변화하였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다고는 했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책들이 대부분이었고 조선의 발전을 위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아니더라도 그 때의 상황을 보았을 때 결국 강대국들에게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힘이 없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nbsp;</div><div><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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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46: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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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99 </title>
         <author>kam9908141</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30238</link>
         <description><![CDATA[<div>러일전쟁 직전 오야마 이와오가 발표한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들여다 보면, 조선은 일본에게 필수적인 존재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 쌓인 일본 영토적 특성상 국방은 취약하였고, 조선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동해 국방 안전 확보는 일본제국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제국은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는 성공한듯 보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동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였고, 이는 조선에게 또한 영향이 있을 거라 판단하여&nbsp; 일본은 이를 통제하려 러시아를 침공 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전쟁은 멈춰졌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체결' 에 따르면, 러시아가 조선문제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일본제국이 조선에 대한 완전한 보호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nbsp;<br>러일전쟁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의 편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편에 섰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 진출 배후에는 프랑스 자본이 있었다.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지하는 이유는 독일의 서부 국경의 압력을 약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고,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국 또한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면, 아프리카 식민지 권한은 자연스레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일본을 지지하였다. 더불어 미국 또한 단순히 일본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일본의 필리핀 침략 포기가 있었다. 이처럼 각국은 대의를 위하는 척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것이다. 각국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어떠한 곳을 지지하면 자신에게 이득이 될까 생각하고 치밀하게 행동하였다. 이는 참 비참한 현실로 받아 들여진다.  부국강병을 위하여 최대한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비판 할 수 없다. 또한, 당시 시대에 한국이 만약 타 강대국들과 견주어 봐도 손색없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을사조약도 채결되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의 독주 또한 어려울 것이라 판단된다.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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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51: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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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3</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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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   ‘오야마 이와오’의 &lt;조선 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gt;를 읽으며 당시 일본인이 조선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껏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어 단순히 섬나라인 일본이 육지로 진출하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을 노렸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다양한 이유 중 하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즉 조선을 방패로 삼기 위한 이유가 컸다. 또한 이 글에는 일본의 자신만만한 모습 보다는 걱정과 다급함이 크게 드러난다. 이 글에는 강대국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국방에 어려움이 생긴다며 러시아와 교섭하여 조선 문제를 즉시 해결해야 한다고 쓰여있다. 당시 러시아가 일본에 얼마나 큰 위협으로 다가왔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div><div>   저번 글쓰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 모순이라고 표현했었다. 물론 일본이 진심으로 조선의 자주적인 독립을 바라지 않았을 테지만, 여러 조약 내용들을 읽으며 일본이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같은 단어라도 항상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바라는 독립과 일본이 바라는 조선의 독립은 굉장히 달랐을 것이다. 입장에 따라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에 일본이 생각한 조선의 독립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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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57: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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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37</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38880</link>
         <description><![CDATA[<div>&nbsp;고등학생 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연도별로 체결된 조약의 순서와 특성을 암기하는 것에 그쳤는데 각국의 시선에서 조약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nbsp;</div><div><br></div><div>&nbsp;1902년의 &lt;영일동맹&gt;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에 읽은 야마가타의 &lt;외교정략론&gt;에서도 언급됐듯이 일본의 ‘이익선’을 위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상당한 장애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자신의 패(牌)를 만들기 위해서도 영일동맹은 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div><div><br></div><div>&nbsp;1903년에 작성된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지금껏 한반도를 교과서같은 상투적인 말투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며 북으로는 대륙과 접해 있어 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 작용’하는 훌륭한 지형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물론 좋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이점이 뚫린다면 그들에게는 역으로 큰 피해가 생긴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새로이 다가왔다. 이 의견서를 통해 일본은 한 번 더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다.&nbsp;</div><div><br></div><div>&nbsp;1905년, 드디어 일본은 &lt;포츠머스 조약&gt;을 통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다. 러일 전쟁을 멈추기 위한 평화 조약의 성격이 강했다고 전해진다.&nbsp; 이 조약에 참여했던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조약을 통해 평화로운 마무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에 의해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전략대로 국가의 흐름이 잘 흘러가고 있다.&nbsp;</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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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8:57: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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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72928</link>
         <description><![CDATA[<div>&nbsp; 책에 나와있는 여러가지 조약들을 통해서 일본이 러시아를 얼마나 경계했는지, 그 경계심이 한국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되었다.<br>&nbsp;일본은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경계하여 1차로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한 일본은 러시아가 조선을 통해자신의 나라까지 피해를 입을까 걱정하였는데 이 부분은 오야마 이와오의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 잘 나타나있다. 이 의견서에 따르면 조선이 일본에 우호적 일때는 동해의 관문이 단단하여 국방에 유리하지만 강대국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그 위치는 일본의 급소이며 국방에 어려움이 있어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되어있다. 이 사상을 기반으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명시한 조약을 맺었고 이와 연결되어 한국을 완전히 일본 아래에 두는 을사조약까지 맺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nbsp;<br>&nbsp;조약들의 흐름과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조선입장에서 일본은 악역일 뿐이지만&nbsp; 일본국민 입장에서 보면 자국을 잘 보호하고 다른 강대국에 대한 경계심이 살아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가 여러 철도를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 상황판단을 하여 조선을 우리지배에 둬야지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한 점, 영국과 러시아와 조약을 맺은 점들을 토대로 결국 일본은 우려하던 러시아의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을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있어서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nbsp;<br>&nbsp; 일본에게 조선은단지 영토 확장과 다른 나라들 간의 수월한 교류를 위해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사료를 읽다보니 그렇게간단한 이유만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조선의 시선에서 쓰인 사료들만 보다가 일본의 시선에서 쓰인 사료를 보니 일본의 입장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열려 있는 마음으로 여러나라의 시선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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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9:21: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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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45</title>
         <author>jsjang2002</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83017</link>
         <description><![CDATA[<div>학교에서는 항상 한국을 중심으로 배우기 때문에 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에 대해서만 알았지, 일본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나라와 어떤 조약을 맺었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본이 타국과 맺은 여러 관계들을 보니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을사조약을 어떠한 경위로 맺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전부터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 일본은 조선을 말이 이익국, 독립국이지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nbsp;</div><div><br></div><div>&nbsp;또 당시 일본이 생각보다도 더욱 잘 나가는 강대국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에 대한 이해관계가 일치해 무난하게 영일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이후 포츠머스조약에서도 경계하던 러시아를 상대로 일본이 계속 우려하던 사항들(러시아의 간섭)을 깔끔히 정리하는 조항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름의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에 대한 욕심을 슬금슬금 표출하기 시작한다. &lt;가쓰라-태프트 비망록&gt; 에서는 필리핀에 대한 침략 의도는 완벽히 부인하며(미국한테 넘겨주며) 오히려 조선을 향해 칼날을 내비친다. 조선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라 지목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할 의도를 분명히 보이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조선을 자신들보다 하등한 존재, 자신들의 속국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태도라 생각한다.&nbsp;</div><div><br></div><div>이후 을사조약을 통해 그들은 앞서 언급하였던대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데에 성공한다. 을사조약 전 다른 먼 나라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일본과 달리 기껏해야 청, 러시아, 일본과만 활발히 교류하던 조선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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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9:30: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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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45</title>
         <author>lee00096k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289392</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동맹의 조항들과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읽으면서 당시의 흐름이 일본에게 참 유리하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오야마 이와오는 러시아가 극동지역으로 병력을 결집하기 전에 조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러일전쟁 때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막아 발트함대가 쓰시마해전에서 패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국력을 키우기 위한 과정들을 알기에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열강들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세계 최강 해양국가와 유일한 동맹을 맺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결국 일본 또한 그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힘도 경험도 부족해 그 흐름에서 살아남지 못했던 조선의 상황이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div><div>&nbsp; &nbsp;</div><div>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보며 국가 간의 상호 신뢰는 대등한 위치와 힘이 뒷받침 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제 3국에 의해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개입해 거중조정을 하기로 했다. 조선은 이 조항을 신뢰했고, 여러 차례 거중조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극동의 평화를 위한다지만 실상은 필리핀 지배권을 위해 서로 교환을 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라는 을사늑약의 모순적인 첫 대목과 이후 외교권, 군대 해산, 사법권 등 차차 박탈해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힘의 논리는 열강의 묵인에 기반하여 자국의 이익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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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09:36: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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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82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15503</link>
         <description><![CDATA[<div> 오야마 이와오의 의견서를 읽은 후 일본의 조선 침략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div><div>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탑승한 일본이 더 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선택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을 넘어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조선 침략은 서양 열강 국가로부터 자국과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행보를 보면 평화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nbsp;</div><div>&nbsp; &nbsp;</div><div> 러일전쟁은 전쟁 당사국 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를 보면 당시 열강 국가는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국가가 힘이 커지면 또다른 국가들이 모여 이를 제지해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div><div>&nbsp; &nbsp;</div><div> 마지막에는 일본이 러시아를 주적으로 상정하면서도 그러한 러시아를 본 뜬 것과 같은 세력 확대와 패권 추구를 하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나는 이때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변화에 함께 조선에 대한 목적이 국방의 목적에서 패권 추구의 목적으로 물들어버린 것처럼 보였다.</div><div>&nbsp; &nbsp;</div><div>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지금까지 내가 한국인으로서 배워온 관점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역사를 봐야 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그만큼 새롭게 볼 수 있는 내용이 많아서 흥미로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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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00: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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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9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35139</link>
         <description><![CDATA[<div>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체결한 영일동맹으로부터 일본이 러시아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br>또 이 의견서에서 지난 시간에 배운 이익선과 주권선을 이용해 앞으로 일본이 취할 대책을 잘 알 수 있었고, 이 의견서를 통해 다른 관점에서 조선을 왜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지 경위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식민지로 만드는 이유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단순히 지배하고 자국의 힘을 키우기 위해 식민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의견서에서는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 러시아의 세력 문제 등에 의한 자국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임) 했다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 상황을 보는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었다.<br>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조선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일본은 더 앞으로 가게 됐었다. 그 이후에 체결한 조약에서도 조선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존립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지배했지만,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보호권을 취득하고도 계속 지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존립을 위한 것인지 의문도 생겼다.&nbsp;<br>이번 시간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렇게 꼼꼼히 조약내용을 읽어본 것 같다. 그리고 역사공부할 때는 그 시기의 세계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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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17: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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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8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37737</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 동맹의 성사는 일본과 영국 모두 러시아와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획책한 '삼국간섭' 사건으로 일본은 큰 수모를 겪었고, 러일 갈등은 급속히 격화되었다.또 "일본이 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무력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만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영국인들은 환요에 대한 간섭을 거부해 일본인들은 고마움을 표시했다.이에 일부 재야 인사들은 영일동맹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그래서 영국은 일본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제1차 영일동맹의 성립은 동북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쟁탈전이 집단화로 치닫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극동국제구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열강의 힘의 대조를 바꾸어 동아시아 국제구도의 진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br>일본이 국방을 하든, 대륙을 점령하든 조선이라는 지리적 위치는 일본에 매우 중요했다.그리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서도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여 일본이 승리하고 강화조약, 즉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였다.결국 중국 땅에서 러일전쟁이 종결되었다.일본도 이 전쟁에서 한반도, 랴오둥 반도와 중국 하얼빈, 뤼순의 철도 권리를 모두 얻었다.<br>사실 '가쓰라&nbsp;테프트조약' 은 성문조약이 아니며 밀약도 아니다.일·미 관계에 관한 비망록일 뿐이다.<br>'을사조약' 은 일본과 한국이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을사조약' 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은 이 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통제함으로써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을사조약' 의 합법성과 유효성에 대해 지난 90년대까지 일본은 뜻밖에도 조약이 합법적이고 유효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그러나 우리나라 외교부 전 고문 이호배는 '을사조약' 을 불법 무효 조약 중 하나로 삼았다.나도 이 불평등 조약이 한국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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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19: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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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0275</title>
         <author>cazzjhlee</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52363</link>
         <description><![CDATA[<div>책을 읽어보고, 여러 조항들을 통해&lt;영일동맹&gt;부터 &lt;을사조약&gt;까지 3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일본의&nbsp;조선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잘 느껴졌다.&nbsp;<br>&lt;영일동맹&gt;에서는 영국과 일본이 조선과 청나라를 독립시키려는 표면적인 목적을 내세워 러시아라는 큰 적을 같이 견제하고자 함이 매우 강조되는것 같았다. 특히 2조와 3조에서 제3국과의 전쟁을 하게 될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당연히 러시아를 생각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이를 통해 &lt;영일동맹&gt;까지는 일본이 아직 조선을 러시아에게&nbsp;뺏기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느껴졌다.<br>&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도 조선이 우호적이라면 일본의 국방에 크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동쪽으로 세력을 뻗는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한다면 일본에 있어 급소가 될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게 된다면 부동항을 가지게 되어 사방이 바다라 일본을 침략하는데에 중요한<br>해군력을 크게 늘릴 수 있고, 시베리아 철도를 조선에까지 확장하면 일본에게는 군사적으로 큰 위협이 된다. 이때부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고,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조선을 사수하고 싶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br>&lt;포츠머스 조약&gt;에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간섭을 공식적으로 시작하고자 선언함과 동시에 전쟁으로 얻은 상처를 회복하려는 것 처럼 보였다. 또한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러시아의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무서워하던 시베리아 철도의 확장또한 견제하고 싶어하는것 같았다.<br>&lt;가쓰라-태프트 비망록&gt;에서는 마침내 한국에 영향력을 미국에게도 인정받으며 일본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이에 끼게 되었다. 삼국간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굴려지는 힘없는 조선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br>마지막으로 &lt;을사조약&gt;을 통해 조선을 다른 열강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br>여러 조약들을 읽어보니 일본이 처음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조선을 독립시켜 일본을 수호하고 싶었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 손잡아 러시아를 견제하다보니 제국주의 열강들의 틈새에 끼게 되어 조선을 향한 야욕을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일본의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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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33: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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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2018113195</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53056</link>
         <description><![CDATA[<div>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자 일본의 영토 확장 야심은 더욱 커졌다.그 후, 영국과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극동 러시아의 확장을 반대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맺었다.그 후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의 권익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일본이 다시는 아시아 국가를 독립적 주권국가로 존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한국과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이 조약에 따라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지배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일본과 극동을 잇는 동북아의 교량으로서 의사소통과 작전의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북한을 점령하면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셈이다.</div><div>당시 일본의 외교 정책에서'이익 노선'의 관건은 조선이었고, 조선은 육해권의 분수령으로서 역사적으로 군사에서 필히 쟁탈하는 곳이다.&nbsp;</div><div>메이지 초기부터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일본 생존과 독립의 관건으로 보았다.</div><div>'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는 일본이 대외확장이라는 기본 목표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div><div>그래서 나는 일본의 침략은 계획적이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강국들과 동맹을 맺고 단계적으로 자신의 확장 계획을 실현해 나간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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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33: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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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64</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57231</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동맹, 불러협정 등 당시 동맹들의 내용을 보았을 때, 체결국 사이의 사건 때문이 아닌 각 국이 체결국 외의 타국을 견제하기 위해 딱히 관련 없는 두 나라(아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가 동맹을 맺는 형태라고 생각했고 그 점에 의문을 가졌었다. 예를 들어 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왜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불러협정에서도 러시아는 영일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는 독일과 영국을 막기 위해 협정을 맺은 것처럼 말이다.&nbsp;</div><div>그러나 청일 전쟁 시 영국이 일본의 편에 서고 러시아가 청의 편에 섰다가 개전 이후에는 영국이 청의 편에, 러시아가 일본의 편에 섰듯이 청과 일이 전쟁을 한다고 해서 두 나라만의 일이 아닌 이런 저런 나라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여러 동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했다.&nbsp;</div><div>&nbsp;</div><div>또한 오야마 이와오의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를 읽은 후, 청일 전쟁 때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가가 되고 러일 전쟁 이후에도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기반이 되는 등, 조선은 그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늘 전쟁에 끼어있었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좌지우지되는 모습이 현재의 관점으로선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nbsp;</div><div>&nbsp;</div><div>&nbsp;사실 나는 이제껏 한국사 교육만 받았기에 소위 말하는 ‘일본은 나쁜놈’이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중거울의 예처럼 한국의 눈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중국의 눈, 일본의 눈, 영국의 눈 등 여러 나라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또한 현재의 관점이 아닌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며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를 알고 이 시기의 상황을 바라보니 원래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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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37: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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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4</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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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책에 나온 조약 및 사건들은 고등학교 시절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면서 한 번씩 들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겉핥기 식으로 배웠던 고교 시절과는 다르게 책에서는 각 조약의 조항까지도 세부적으로 나와 있어 조금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div><div><br></div><div>우선, &lt;영일동맹&gt;의 체결 배경에 대해서 말하자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본과 영국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영국이라는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은 일본은 점점 주변국을 향해 손을 뻗어갔다.&nbsp;<br><br>&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 알 수 있듯이 여타 강대국(특히 러시아)이 조선을 점령했을 시의 안보문제, 독립문제를 크게 걱정한 일본은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러시아와의 교섭을 꾀했다. 그러나 교섭의 결과는 좋지 못했고 이는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br><br>이 러일전쟁에 대해서, 어쩌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마음은 거의 없었고 러시아 때문에 러일전쟁이 촉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러시아와 교섭하여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시 교섭을 하면 병력에 호소하지 않고도 쉽게 해결을 볼수 있으며" 라는 부분을 보면 일본은 다짜고짜 무력을 쓰기보다는 평화적인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태 교과서에서 러일전쟁이 일본의 탓이라고 배웠던 것이 일본의 나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는 식민지배국의 입장에서 바라봐서 그런 거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러시아 또한 명백하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싶었다.</div><div><br></div><div>결국 러일전쟁은 일본군의 대승으로 끝이났고 두 국가의 갈등 중재를 위해 나선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lt;포츠머스 강화조약&gt;이 체결됐다. 포츠머스 조약에는 러시아 측에서 가지고 있던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 랴오둥반도와 조선에 대한 이권을 일본에 할양하는 것이 포함됐다. 이를 통해서 일본은 러시아가 조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도록 만들었고 그밖에 &lt;가쓰라-태프트 밀약&gt;과 같은 여러 조약을 통해서 러시아 뿐만 아니라 다른 강대국들 또한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br><br>이 부분에서는 조선이 힘이 없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한국 사람인 내 입장에서 봤을 때 강대국들의 이권 욕심에 따라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조선의 식민지화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에이 설마 그랬겠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숟가락을얹은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담한 수준이라 놀랐다. 뿐만 아니라 &lt;가쓰라-태프트 밀약&gt;에서 미국이 얻은 필리핀을나중에 일본이 욕심을 내게 되고, 그 욕심에 대한 보복이 결국 진주만 공습까지 이어진다는 인과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두 국가가 사이좋게 땅 나눠먹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div><div><br></div><div>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만 여겼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쓰인 글을 읽게 되면서 왜 일본이 조선을침략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쩌면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현재 일본이 역사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런입장이 반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 경계해야 한다.) 아무튼, 한 쪽의 입장만이 아닌 여러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책에 나온 역사적 사건들을 연도 순으로, 인과관계를 정리해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div><div><br></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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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0:43: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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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9110270</title>
         <author>ryangistreaming</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382456</link>
         <description><![CDATA[<div>&nbsp;영일동맹은 영국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영일동맹을 읽으면서 제1조에 나와있는 독립이라는 말의 뜻이, 자립적인 독립이 아니라 개별적인 독립이라는 의미가 강한 독립이라고 느꼈다. 영국과 일본이 청과 대한제국에서 정치 상공업적의 이익을 취하려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떠오르면서 강대국 간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맺어진 조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nbsp;<br>&nbsp;이와 더불어 영국이 당시 일본을 러시아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써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조선문제해결에 관한 의견서에 잘 나와있는데, 물론 다른 여러 이유들도 있겠지만, 일본 본토의 방어를 위해 조선을 이용한다는 점을 이전에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좀 신선했다. 일본은 조선을 점령함으로 인해 일본 본토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러시아를 견제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br>&nbsp;그리고 영일동맹에는 동맹국이 여러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을 시 함께 싸운다는 항목이 있다. 이는 영국이 어느정도 일본의 군사력을 인정하고 있었기때문에 생겨난 조항이라고 생각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청일전쟁이후 일본해군은 1896년부터 1904년까지 기존의 해군력에서 4배가까이 증강하였고, 그 외에도 군비증강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영국은 1800년대 청과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문제인 러시아를 경계하기 위하여 일본과 이와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nbsp;<br>&nbsp;이러한 영국의 뜻대로 된것이 바로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러시아에게서 인정받고 랴오둥반도에 있는 조차권 등을 장악하면서 남만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견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확실히 전쟁하나에도 여러가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점이, 역사의 한 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할 수 있게 해주어 흥미로운 것 같다.<br><br><br>국사편찬위원회<br>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2_0040_0010_0040<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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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1:00: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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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110292</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14259</link>
         <description><![CDATA[<div>영일동맹부더 을사조약까지 내용을 다시 되짚어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불편한 감정을 지운 채 바라보면 일본이 시대흐름에 맞게 현명한 대처들을 잘했다고 느껴졌다. 단순히 군사력이 강하다를 넘어서, 여러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잘 짚어내고 그것을 이용하여 최선의 동맹을 구축해나가는 일본의 정치력이 그들을 동아시아의 패자가 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되었다.<br>&nbsp;동시에 조선에 대한 아쉬움도 들었다. 많은 조약들과 동맹계약 속의 핵심은 조선인데 조선이 주체가 되거나 직접 나서서 개입하는 모습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였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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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1:30: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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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611027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34085</link>
         <description><![CDATA[<div><br></div><div>오야마 이와오의 &lt;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gt;에서 볼 수 있듯이 섬나라인 일본 제국은 수비에 필요한 지점이 많아 국방에 불리하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서쪽에 조선해협이 있어 동서의 항로를 막음으로써 국방에 도움을 얻고 있었다. 일본이 청과 전쟁을 벌인 이유도 자신의 보장지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청일전쟁으로 청의 약점이 드러나자 러시아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경향도 커져갔다. 이후에 일본은&nbsp;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러일전쟁을 승리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일본의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치루는 명분을 비판해야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전쟁을 치루게된 배경에는 외세에 위협이 있다.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받고자 조선반도를 이용한 것이 드러난다. 일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왔고,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조선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 가쓰라테프트 밀약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조선 침략 및 지배 강화는 영국과 미국의 승인하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또한 당대의 제국주의적 질서에 뒤따라가며 다른 국가들을 고통받게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외세의 침탈에 고통받을 때 일본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논리는 다소 궁색해보인다. 서구와 동아시아를 피아로 분리하고 자신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선봉에 서서 2차례의 전쟁을 치뤘다는 얘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문제도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적 영토 팽창 노선과 분리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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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1:49: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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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53</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36268</link>
         <description><![CDATA[<div>각각의 조약서 및 의견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모든 것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그 어떤 조약서에서도, 그 어떤 국가도 조선을 자주적인 독립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nbsp; 그들은 모두 조선을 단지 자국의 속국, 혹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영토 쯤으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 다시금 씁쓸하게 와닿았다.<br><br>영일동맹의 경우 영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 러시아를 의식하고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졌으며,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포츠머스 협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고 그간 우리나라의 관점에서만 단순히 보았던 러일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이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거나 가담하지 않더라도 자국에 끼칠 크고 작은 손익 때문에 전쟁을 방관하거나, 혹은 부추기거나, 전쟁을 막기 위해 다른 나라와 협정을 맺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모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전쟁과 식민지, 침략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비인도적인 것이긴 하나, 그 당시 제대로 된 인권과 법이 수립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모두들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으니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고,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양 측을 모두 겪어본 셈이다. 그러한 만큼 우리나라의 관점에서만 사건들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당시 시대의 상황들과 흐름들을 파악하고 고려하며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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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1:51: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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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1110266</title>
         <author>wjdxorbs</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45407</link>
         <description><![CDATA[<div>오야마 이와오의 &lt;조선문제 해결에관한 의견서&gt;는 &lt;외교정략론&gt;의 주장이 이미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시대의 문서를 보는 것 같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오야마가 제목에서 제기한 ‘조선문제’는 일본의 주권선으로의 조선을 러시아에게 침해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청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자 일본이 수많은 병력으로 청일전쟁을 이끌었다는 내용에서 일본에게 있어 조선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가 조선에 개입할 가능성이 생겼고 러시아는 청과 달리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삽시간에 일본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야마가 거듭 즉시 교섭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당시 일본이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볼 수 있었다.<br>사료에 적힌 대로 일본은 지형의 특성상 방어하기 힘든 위치에 있고 이에 동해의 수비가 중요했다. 아리토모 역시 이와 관련해 조선을 일본 제 1의 주권선으로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lt;조선문제 해결에관한 의견서&gt;는 이와 관련해 일본에게 있어 동해 수비의 중요성을 더욱 자세한 근거와 함께 볼 수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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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1:59: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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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26719</title>
         <author>202126719</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46829</link>
         <description><![CDATA[<div>국제사회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일본의 열망과 그를 실현하기위해 세웠던 군사계획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파트였다. 특히 지정학적 부분에서는 섬나라라는 특성이 더 이상 일본의 이점(요새)가 아닌 불리한 요인으로 돌아가자 일본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조선을 방패로 삼아 강대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려고 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꾸준히 세우고 있었다. 반면 타국과의 관계에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긴 했지만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였고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한 부분은 영일동맹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강대국 영국과의 동맹,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조선를 지배하려는 이유에 대해 지정학, 세계사적으로 알 수 있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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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2:00: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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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0113489</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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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영일 동맹은 러시아의 확장에 대응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양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를 양분하는 제국주의 군사 집단의 형성을 상징한다.극동의 국제정세와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힘의 대조를 바꾸어 동아시아 국제구도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동아시아 국제구도에서 영·일 양국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한 것은 물론 일본의 대륙 확장 기세를 부채질한 것이다.<br>포츠머스조약은 러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의해 체결됐고,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이 조약은 중국 동북부를 한 나라의 독점에서 두 나라가 남북을 나누어 지배하는 국면으로 변화시켰다.일본도 북한에 대한 통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러시아의 패배는 러시아 극동 정책의 실패를 선언했고, 러시아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고, 러시아 혁명의 도래를 가속화시켰다.<br>가쓰라 테프트조약은 아시아 태평양 문제를 다루는 일본과 미국 간의 이해 교환으로 생겨났습니다.북한을 병합해 대륙정책을 지속하는 것이 일본의 첫 번째 원칙이고 필리핀의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 미국의 아태전략의 핵심이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일·미 외교정책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비망록에서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서 특별한 권익을 누리는 것을 묵인했고, 이는 일본의 조선 병합을 위한 외교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나타낸다.<br>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은 이 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통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음을 표시하였다.이 조약은 조선 인민들의 강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각종 정치 운동과 군사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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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2:01: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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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8110283</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333484689</link>
         <description><![CDATA[<div>&nbsp;우리가 역사 수업 시간에 익히 들어봤음직한 굵직한 사건들과 조약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본 서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br>&nbsp;우선 영일동맹을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상으로도 가장 초반의 내용이지만, 영국과 일본의 동맹은 각국의 이익과도 첨예하게 얽힘과 동시에 이후 이어질 동아시아의 패권을 둔 경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급격한 발전 가운데에 있던 일본을 자신의 파트너로 삼아 러시아의 동진과 남하를 막을 수단으로 세울 수 있었으며, 일본은 영국이라는 당대 강대국과의 동맹으로 국제적 위신을 인정받고 이후 조선과 청에게 크게 영향력을 뻗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br>&nbsp;뒤이은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이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일본은 꾸준히 강대국들과의 컨택트를 시도하며, 특히 동북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파악하여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확장 이익과 미국의 외교정책 취향을 잘 조율한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짚어보아야 하는 부분은, 이 두 조약이 단순이 미국과의 관계 발전에서 머무르는 내용이 아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한 일본의 국제적 위상 향상이 눈에 띄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은 이 시점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일본을 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 정치적 파트너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방패' 나 '수단'으로도 볼 수 있지만) 로 고려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이어질 을사조약으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조선에 대한 식민지 확장과 제국주의적 정책이 서양에 의해 저지받지 않는 이유가 된다고 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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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0-10 12:30: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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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東條英機 발표팀</title>
         <author>wenjingcai5464</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401681224</link>
         <description><![CDATA[<div>東條英機<br>[소개 및 성격]<br>도조 히데키는 1884 년에 도쿄 출신이고, 일본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제 2 차<br>세계대전 A 급 전범, 중국의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요 인물 중의 한명이다. 제 40 대 일본 총리을 맡았고, 독단적이고 포악해서 관동군에서 '면도날'(가미소리, 剃刀)로 불렸다.<br>도조는 "나는 똑똑하지 않아, 노력하지 않으면 위인이 될 수가 없다"라고 말했는데 고위 장교가 된 후에 “노력과 근면은 평생의 친구이다. 왜냐하면 나는 평범한 사람일 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의 별명은 면도날로 검처럼 날카로운 머리와 성격을 나타낸다. 도조는 매우 실용적이며 모호하거나 빙빙 도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고, 그는 명확하고 충성스럽고 단순하다. 도조는 천재나 원대한 안목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라 좋은 행정관이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위선적이고 조급하며 근시안적이며 점점 횡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br>[생애]<br>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도조 히데키는 육군 중장이었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께서<br>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군인이 되기를 열망했다. 도조 히데키는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이런 검무에 열광하고, 매우 열심히 연습하여 진보가 빠르다. 그의 초등학교 교장은 당시 도조 히데키를 회상하며 "도조군은 정말 싸움을 잘하는 편이다. 성적으로 따지면 1, 2 위 안에 들지 못하지만, 완강하고 지지 않는 것을 따지면 확실히 1 등이다.”라고 했다.<br>1899 년 도조는 도쿄지방육군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도조는 아버지를 본보기로 삼아 "천황에게 충성하는 자격을 갖춘 군인"이 되고일본 출전에 공을 세우기를 열망했다. 1902 년 도조는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하며 공부하는 동안 중국 침략의 성공에 대한 일본 내 '광희'를 느꼈다. 러일전쟁 전, 일본 정부는 군비 확장하며 장교양성을 위한 전시교육방침을 실시하면서 학제를 단축하고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침략사상을 주입하는 데 주력했다.<br>1915 년에 도조는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엘리트로서 육군성 인턴에 들어갔고, 이어서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마침 히로히토 황태자가 유럽을 여행했다. 도조와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를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내 조슈번의 원로 세력을 제거하고 정당 세력의 황권 간섭을 제거할 것을 맹세했다.<br>1933 년 3 월, 도조 히데키는 육군소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 월에는 군사 조사부장이 되었다. 일본이 무력으로 중국 동북부를 강점하고 1934 년 만주국 주재 일본 기구를 재정비했다. 이때부터 관동군은 만주국의 정치·군사·외교·경제 대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도조가 맡은 헌병사령관은 규정에 따라 만주행정사무국장의 요직을 겸임했다. 도조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했다. 그때까지 관동군 헌병대는<br><br>편제 200 명 불과했다. 이 정도의 미미한 힘으로는 도조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없어 일본 본토와 대만, 조선 등지에서 유능한 자를 신속히 모아 헌병대에 요직을 배치하는 등 단기간에 충성심 있는 측근들을 양성했다.<br>[중일전쟁-태평양전쟁]<br>1937년 일본이 노구교사건(盧溝橋事變)을 일으킨 뒤, 군부 중앙에는 보수파와 급진파로<br>보수파는 참모본부 제 1 부부장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로 대표되었고, 는 육군대신 스기야마 겐(杉山元)으로 대표되었다. 보수파는 일본군이 소련을 방어하고 미국과 영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급진파는 이를<br>틈타서 더 확대하라며 석 달 안에 동아시아 전체를 점령하겠다고 아우성쳤다.<br>두 파벌의 의견에 대해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매우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급진파 도조는 아무런 군령도 받지 않은 채 3 개 혼성 여단과 일부 지원부대를 소집할 것을 자청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도조병단'이라 이름 붙이고 장자커우(張家口)를 무단으로 기습하자, 중국은 수비병력이 부족하여 힘껏 저항했지만, 7 일 만에 장자커우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되었고, 화북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도조의 무단행동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크게 표창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도쿄로 돌아와 육군차장으로 권력핵심권에 진입했다.<br>그러나 도조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연설의 강도를 높여 사방을 선동했다. 그는 일본군이 중국,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과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1941 년 10 월 일본의 대미개전이 앞 두고, 고노에는 총리직을 사임했고, 쇼와천황은 순리대로 도조를 대위에 올려 일본 총리가 되었다. 도쿄로 돌아온 지 불과 3 년 4 개월 만에 총리뿐 아니라 육군대신, 내무장관, 외교부장관, 교육부장관, 군수부장 등 8 개의 중진급 직책을 겸임한 도조는 한 사람이 내각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막부 장군에 비유하기도 했다.<br>도조 히데키가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그의 거듭된 재촉으로 1941 년 11 월에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됐다. 이후 반파시스트 동맹의 연합 공격으로 일본군은 패퇴했다. 1944 년 미군은 마리아나제도를 공격해 일본군의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돌파해서 도쿄를 공습타격에 포함시키고, 미군과의 결전을 외치고 있었지만 천황은 이미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1944년 7월 22일 도조는 총리직의 사임을 전국에 공식 발표했다. 1945 년 8 월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br>[전후]<br>2전 끝난 후, 1945년 9월 11일 연합군 경찰이 도조를 체포하러 찾아갔을 때, 도조는<br>겁에 질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가 구조되었다. 일본의 수많은 전쟁범죄는 도조에 의해 위임되기 때문에 도조는 아시아전쟁 중 사망한 천만명의 평민, 학대받은 전쟁포로, 그리고 생화학무기 사용 연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법정에서는 전체 55 개 범죄 중, 도조가 54 개를 차지할 정도로 죄질이 나쁘다. 1948 년 11 월 12 일 도조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의해 전쟁 발동, 타국 침략 등의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br>&nbsp;나뉘었는데,<br>&nbsp;급진파<br>&nbsp;&nbsp;<br>[희생양-도조]<br>2차 세계대전의 3대 원흉 중 하나로 꼽히는 도조의 권력은 히틀러와는 비교가 안 된다.<br>집권한 지 3 년도 안 돼 천황의 신뢰를 잃으면 저항할 능력도 없고, 사임한 총리가 큰 힘이 없을 것이다.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일본제국 헌법상 쇼와 천황이 실권을 가진 최고지도자라고 주장한다. 도조가 대신으로 부임하기 전 일본이 이미 중국을 침략한 지 오래됐고, 중국 민간과 미군을 살해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도조는 침략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는 쇼와 천황의 의지에 따라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도조를 A 급 전범으로 분류한 것은 연합군이 천황을 심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죄를 뒤집어씌웠기 때문이다.<br>작전 때는 군령계통으로 총참모장 관할이었고, 도조는 총참모장을 겸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륙의 교통선을 뚫기로 결정하고 물러났다. 도조 내각이 이렇게 오래 집권한 것은 쇼와 천황이 도조를 상당히 신뢰했기 때문이다. 도조는 원래 천항에 대한 존경심을 가득 찬 사람이었고, 총리 재임시 정무와 군무의 요지를 천황에게 명확하게 보고하고 천황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도조는 특히 성실하고 천황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도조를 무너뜨린 것은 그가 바로잡을 수 없는 두 가지 병폐, 일본정체의 제도적 병폐와 갈수록 악화되는 전세였다. 그는 천황의 권리가 있어도 미국이 일본의 수송선을 침몰시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싸움에 져서 천황에게 그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 도조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br>[평가]<br>도조 히데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매우 많습니다. 우선 이시와라 간지가 도조에<br>대한 평가이다. 이시와라는 도조의 적수로 간주되어, 도조를 매우 경멸했다. 예비역에 편입된 이시와라 중장은 관동군이 근무할 당시 상관이었던 도조를 '도조 상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덩치가 큰 이론가 이시와라가 보기에 도조는 부하들을 배려하는 작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쟁 중 언론 통제하에 있던 이시와라는 가차없이 도조를 바보라고 부르며, 헌병대밖에 쓸 수 없는 여성스러운 남자라며 홍소를 터뜨렸다. 또한 1924 년에 회담을 열었지만, 회담이 시작되자 이시와라가 갑자기 도조에게 “너는 전쟁 지도 능력이 없으니 당장 사퇴해라”라고 직언했다.<br>전 중화민국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은 회고록에서 일본이 제 2 차 세계대전의 패인을 총결산하며 도조를 이렇게 평가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군국교육훈련 체제의 모든 폐해를 집대성한 대표자이고, 아주 무지하고, 우매, 근시안, 대담...등. 그의 유일한 장점은 외형적인 몸가짐이 단정하다는 것일 뿐이었다."라고 했다.<br>도조 히데키의 권총 자살 미수에도 비판을 받았다.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山田風 太郎)는 “왜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처럼 칼로 자살하지 않고 외국인의 권총을 배워서 자살에 실패했는가? '살아서 포로의 수모를 다하지 마라'는 전훈(戰訓)을 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본인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했다.<br>반면에 쇼와 천황은 &lt;쇼와 천황 독백록&gt;(昭和天皇獨白錄)에서 도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도조는 일도 열심히 할것이고, 평소에도 말을 사려 깊게 하고, 좋은 점이<br><br>많았다.”<br>데이쿄대학 전사(戰史)교수인 토베(户部)교수는 실무처리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총리 시절의 도조가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현역 직업군인으로서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했다"고 평가했다. 전쟁 지휘관으로서 관동군 참모장 시절 대중(中)전쟁 초기 '도조병단'을 이끌고 차하르작전을 펼쳤다. 태평양전쟁에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보여줬다. 그는 미국 본토에 상륙해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꺾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br>도조 히데키에 대한 우리 팀의 견해는 도조가 재임 기간에 동아시아 각국에 심각한 침해를 입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 곳을 잃고, 목숨까지 잃었다. 일본의 총리로서 도조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의 외면을 받고, 불명예만 짊어진 사람이 여전히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 그 역사의 중요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저희는 중국인 그룹으로서 이런 역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만약 긴 역사에 유색안경을 써서 고집하게 일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 많이 놓쳤을지도 모른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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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1-29 10:31: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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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1130 이시와라 간지 발표팀 - 발표문 2</title>
         <author>2018110283</author>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402295210</link>
         <description><![CDATA[<div>발표문의 후반부 부분입니다. 전반부 부분도 이후 업로드 예정입니다.<br><br><strong>2. 주요 정책에서 간지의 주장과 대립</strong></div><div>: <strong>&lt;만주사변&gt;</strong></div><div>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특수를 누리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등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1929년 세계적으로 찾아온 대공황으로 경제적 불황을 겪게 됩니다. 이에 내각은 군비축소, 긴축재정 등 군부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이게 되고 이뿐만 아니라 일반 노동자, 재벌들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서 이 어려움과 불만이 모두 일본 정부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30년 런던군축회담을 통해 군축을 요구하는 미국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일본은 군축을 감축하는 타협안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 군부의 반발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결국 경제적 불황과 정부에 대한 분노의 극복을 위해 만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관동군은 내각의 명령, 천황의 명령도 아닌 일종의 항명의 형태로서 그저 스스로의 판단 하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에 만주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중심인물이 이시와라 간지입니다. 이시와라는 쇼와 3년(1928년) 10월부터 관동군 참모로 임하고 있었고 사변에 얽혔다는 책임으로 사직을 신청하지만 허가받지 못했고 1932년 8월에 대령에 진급하며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div><div><strong>&lt;주요 상업 5년 계획안&gt;</strong></div><div>이시와라가 본부에 왔을 때, 육군 정상부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평균을 이루던 소련과 재만 일본군의 병력이 10 대 3으로 일본군이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서 이시와라는 육군을 근대화하고 대륙에 상주할 수 있는 군 물자를 가지는 계획의 필요성을 느꼈고, 거기서 만주철도에 있는 미야자키 마사요시에게 부탁하여 “주요 상업 5년 계획안” 을 만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곧장 무산되었고, 그는 이어서 시급한 상업 정책을 추진하고 전쟁의 지도와 정세 판단을 주업으로 하는 전쟁지도과를 만들 것을 참모본부에 주장하였으며 이를 실현 하자마자 첫 과장이 되었습니다.</div><div><strong>&lt;중일전쟁&gt;</strong></div><div>1937년 7월 7일, 노구교(盧溝橋, 베이징 교외) 근처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건 후 현지에서는 정전협정이 성립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이라고 단정하고 중일전쟁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이시와라는 중일전쟁에 반대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드리면, 우선 당시 일본에게 전략적으로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소련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은 소련과의 대결에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라는 것인데, 그렇기에 그는 만약 일본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소련과의 무력 충돌을 준비하고 있다면 확실하게 다른 모든 군사적 충돌은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충돌 때문에 일본이 국가의 관심,자원,힘을 다른 데 낭비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특히 이시와라가 생각하기에 만주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중국과의 전면전은 피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만주국이 믿을 수 있게 관리된다면 일본에 대한 신뢰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이는 상관인 도조 히데키와 대립되는 주장이었다고 여겨지며 결국 간지는 도조 히데키에 의해 관동군의 부참모장으로 좌천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3. 정책들의 결과 및 그 이후 전개</strong></div><div>: <strong>&lt;만주사변&gt;</strong></div><div>만주사변 발발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질서에 시종 협력적 자세를 견지해오던 일본의 대외정책을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만주사변은 1928년 8월 체결되어 일본도 가입한 켈로그-브리앙 조약, 즉 부전조약(不戰條約)에 위배되었건 것인데요. 이 조약은 전쟁을 국가정책 수단으로 부정하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 방법에 의해 해결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주사변은 중국에 대한 현상유지를 다짐했던 1921년 워싱턴 9개국 조약의 합의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의 스팀슨 국무장관은 1932년 1월7일, 무력에 의해 행해진 만주 지역의 어떠한 정치적 변경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결국 국제연맹은 리튼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조사단은 만주사변 과정에서 국제연맹 규약 등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1933년 2월24일, 국제연맹에서 표결에 붙여졌는데, 42개국이 승인한 가운데 일본만이 부결의 입장을 밝히게 되자, 결국 1933년 3월 27일,일본은 국제연맹 이탈을 공식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일본은 1934년 12월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와 해군 주력함 건조비율을 제한했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서의 이탈을 표명하였고, 1936년에는 보조함의 군비축소를 합의했던 런던 해군군축조약에서도 탈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시와라 간지와 소장 장교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이루었던 ‘세계전쟁론’ 및 ‘만몽영유론’은 만주사변을 결과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1920년대 이래의 국제연맹 체제, 워싱턴 군축조약체제에서 모두 이탈하게 된 것이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연맹 체제의 모범생이었던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각종 국제규범에서 이탈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현상변경국가’, ‘도전국가’로 변모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div><div><strong>&lt;주요 상업 5년 계획안 및 만주국 독립&gt;</strong></div><div>1937년 3월 이시와라는 소장으로 진급, 7월에 藍溝橋事件(루거오차오, 노구교)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시와라가 원했던 만주의 민족협화도, 소련의 국방강화도, 그것을 위한 상업 5년 계획도 모두 다 중국과의 평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시와라는 이 사건이 커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하지만 이것에 대해 군 중앙부 내부에서 확대파와 불확대파로 나누어졌고, 결국 확대파가 우세하게 되면서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시와라가 관동군의 참모 부장으로서 다시 만주에 돌아왔을 때, 관동군의 참모장은 도죠 히데키였습니다. 그이후 이시와라는 만주국의 전반적인 구상과 통치 방식에 있어서 도죠 히데키와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주 국민들에게 자치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던 이시와라는 바로 관동군의 만주 지배를 그만 두고, 만주국의 정치 경제는 국민에게 맡기고 그 지도권은 협화회에 양도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냈지만, 결과적으로 무시당하고 좌절됩니다. 도죠 히데키와 이시와라의 대립은 성격적인 것도 있었고, 이시와라의 작전부장 시대부터 중일전쟁에서 정책에 대해 대립이 있었지만, 여기에 와서 만주국의 내전문제에서는 완전히 대립했던 것입니다.</div><div><strong>&lt;중일전쟁 및 이시와라의 동향&gt;</strong></div><div>중일전쟁 발발시 군부는 전쟁은 3개월 이내 끝난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중일전쟁은 4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쟁의 장기화, 점령지 경영의 실패, 중국의 후방 교란 공작으로 인한 전선의 교착 등으로 일본의 초조감은 높아졌고, 이에 따라 일본은 남방 진출과 독일 · 이탈리아와의 3국 구축을 이루어 난관을 타개하고자 미국 · 영국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1941년 중국으로부터의 무조건 완전 철병 등을 요구한 미국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12월 8일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중 · 일 전쟁은 태평양전쟁의 일부가 되어 세계 2차대전의 한 전선으로 확대된 것입니다.</div><div>대립했던 도조 히데키에 의해 관동군의 부참모장으로 좌천된 이시와라 간지는 그곳에서도 그는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향유하는 관동군의 지휘부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시와라는 그런 도조를 무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일본 민간인들의 군사 지식이 박약하다고 생각하여,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의 교수에 초빙되어 2년간 민간인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위험분자라고 생각했던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그는 교수직에서 해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div><div>결국 말엔 전쟁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전범 재판에 증인 신분으로 출석하였고, 이후 지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시와라 VS 도조</div><div>&nbsp; &nbsp;</div><div>이시와라는 군인이자 사상가였으며, 특히나 사상가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소련과의 전쟁을 미리 대비하고 민족협화를 이루고자 중일전쟁을 반대하였고, 협화회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만주국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론 중 하나인 동아연맹론에 입각하여 만주국의 독립과 자치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앞서 언급드린 페이지에서는 “기름을 원한다고 전쟁을 벌이는 놈도 있냐” 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죠.</div><div>이와 대조적으로 도조는 지극히 군인의 시선에서, 이시와라의 사상을 “과대망상가의 장대한 허풍” 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1차대전과 청의 멸망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진 중국을 노려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고, 이시와라가 중요하게 여기던 협화회를 내치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적 통치를 강행했습니다. 또한 전쟁에 필요한 남방자원 확보를 위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키도 하였죠.</div><div>&nbsp; &nbsp;</div><div>2. 그에 대한 생각 : 이시와라에 대한 재해석 모음</div><div>&nbsp; &nbsp;</div><div>1) 곡해된 이미지</div><div>만주사변과 세계최종전쟁론, 그리고 그 속에 깔려있는 일본 우월주의의 영향으로 극우익 혹은 전쟁에 미친 전범 등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민족협화나 평화적 동아연맹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강조한 이시와라의 발언들과, 정부를 설득하고자 했던 노력의 과정들을 어느 정도는 간과한 평가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그의 주장을 옹호하기만 할 수는 없겠지요. 분명 그의 사상과 주장으로 인해 일본이라는 국가의 당시 방향성이 바뀌고 피해자가 생긴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 간에요.</div><div>&nbsp; &nbsp;</div><div>2) 현대 일본에 미친 영향</div><div>이시와라가 예측한 것들 중에는 정확도가 높은 것들이 많습니다. 공군을 주요 전력으로 한 전쟁 방식과 대량 학살 무기인 원자폭탄 등 다양한 신식 무기와 전력들의 등장을 예견한 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통제주의 국가 파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지닌 일본군의 세계대전에서의 위세 역시 잠시나마 대단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div><div>최종전쟁이라는 사상은 또한 현대 일본 미디어 작품에서도 자주 반여오디곤 합니다. 전 인류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무기와 종말 등의 설정은 &lt;에반게리온&gt;, &lt;최종병기 그녀&gt; 등의 작품에서 드물지 않게 공유되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기 또한 상당합니다.</div><div>&nbsp; &nbsp;</div><div>3) 종교적 성향</div><div>세계최종전쟁론에는 특히 이시와라의 종교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짚어볼만 한 점은 바로 그가 정치와 군사적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성향으로 연결지었다는 점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요소들이 바로 니치렌종과 국주회인데요, 니치렌종은 승려 니치렌이 법화경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종파로, 불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다루며, 말법시대에 일어날 세계 대전쟁과 일본 국체를 중심으로 한 세계 통일을 예언하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국주회인데요, 국주회는 이시와라의 종교적 스승인 다나카 지카쿠가 니치렌종 교리를 국체론과 결합한 것입니다. 일본이 세계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팔굉일우의 질서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 주장한 내용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4) 민족주의 및 침략주의</div><div>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시와라의 사상에는 일본인이라는 혈통과 천황에 대한 우월적 의식이 대전제처럼 깔려있습니다. 자신의 혈통과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그의 생각에는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예언을 신봉하고, 그 예언대로 될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그를 완전히 옹호하기만 할 수 없다고 언급했듯이, 그의 생각이 어떠했든 간에 결론적으로 이시와라의 사상과 주장으로 인해 일본이라는 국가의 방향성이 설정된 면이 있고, 만주사변에서 알 수 있듯 침략적 행위도 분명히 실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상의 근간이 평화주의적 신념과 노력이라는 점에 있어 침략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 또한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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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1-29 17:25: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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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시와라 간지 발표문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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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인물소개)</div><div>“이시와라는 명령을 어기고 만주 침략을 주도했는데. 이번에는 반란군 진압에 앞장섰다.&nbsp;</div><div>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nbsp; 히로히토 천황의 말입니다. &nbsp;</div><div>“육군의 이단아” 라고 불리던 이시와라 간지는 주변에서 보기에 생각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의 사상을다루기에 앞서 인물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하고자 합니다.&nbsp;</div><div>이사와라 간지는 1886년 야마가타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애를 만주사변을 일으키는&nbsp;</div><div>관동군 참모시기,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는 연대장 시기, 정부와 대립하는 작전과장 시기,&nbsp;</div><div>대립 끝에 퇴역하는 관동군 참모 시기의 4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는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 관련 학교들을 졸업한 후에 독일 유학을 거쳐&nbsp;</div><div>1925년 10월에 이시와라는 관동군 참모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그는 부임 후에 만주사변을 주도하여 만주국을 세우지만, 결국 이것 떄문에 참모에서 해임됩니다.</div><div>&nbsp;그리고 다시 일본에 돌아온 이시와라는 센다이 보병의 연대장으로 2개월간 취임 후 참모본부의 작전과장으로 전출가게됩니다.그 후 일어난 노구교 사건으로 정부와 대립하게 된 이시와라는 태평양 전쟁을 막지 못한 채 만주로 복귀하였고,&nbsp; 도조 히데키의 압박으로 퇴역하게 되었습니다.</div><div><br></div><div><br></div><div>(현대평가)</div><div>그런 이시와라에 대한 현대 평가는 뛰어난 머리와 거침없는 성격으로 ‘육군의 이단아’,&nbsp;</div><div>아시아 침략주의자 혹은 동아연맹을 원한 평화주의자인가? 에 대한 침략주의 대 평화주의,&nbsp;</div><div>그리고 전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로 치르는 미국과의 결승전을 두고 망상론자. 이러한 평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div><div><br></div><div><br></div><div>(본론1-세계최종전쟁론)</div><div>이시와라 간지는 세계최종전쟁론에서</div><div>&nbsp;“최후의 대결승전에서 세계의 인구는 절반이 될지도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세게는 하나가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런이시와라는 현대 평가에서 말했다시피 침략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달려있습니다. 최후 전쟁을 외치면서 세계 평화를 기원한 이시와라의 생각에 그가 펼친 이론들을 통해서 다가가 보고자 합니다.&nbsp;</div><div>먼저 세계최종전쟁론이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이 세계최종전쟁론은 이시와라 간지가 1940년에 발표했는데요, 니치렌종의 국체론 교의 및 독일 전쟁사관에 영향받아 형성된 것으로 일본이 동양 왕도(王道)문명의 대표로서, 서양 패도(覇道)문명의 대표인 미국과 세계통일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이시와라는 이러한 인식으로 만주사변을일으켰고, 그 효과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또한 미국과 최종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은 내부적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방국가’를 건설했고,&nbsp;</div><div>외부적으로는 조선과 만주를 독립시켜 동맹관계를 맺는 ‘동아연맹’ 결성이라는 ‘쇼와유신(昭和維新)’을 추진해야 한다고일관되게 주장하였습니다.&nbsp;</div><div>이시와라는 미국과의 전쟁을 전세계와 전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전쟁이자 최종전쟁일 것이라고 예측했는데요, 그 특징은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nbsp;</div><div>첫 번째는 태평양에서 일본과 미국의 공군이 충돌할 것이라는 공군이 주력이 되는 전쟁.</div><div>두 번째는 대량의 학살 무기가 사용될 것이라는 결전 병기의 등장.&nbsp;</div><div>세 번째는 결전 병기를 사용하기에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결전전쟁.&nbsp;</div><div>네 번째는 국가가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수단을 총동원하고 싸울 것이라는 총력전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nbsp;</div><div><br></div><div>(동아연맹론)</div><div>그럼 이시와라가 주장했던 국방국가와 동아연맹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nbsp;</div><div><br></div><div>이시와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남북 아메리카, EU, 그리고 일본 중심의 동아 총 4개의 국가연합 집단으로 분화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4개의 집단 간에&nbsp;</div><div>준결승을 거쳐 최종전쟁에 이르게 되는 것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동아’와 미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div><div>이러한 미주와의 세계최종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이시와라는 인구, 식량, 기타 자원이 부족한&nbsp;</div><div>일본은 만주와 몽고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nbsp;</div><div>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민족 간의 투쟁을 피하고 만주건국의 정신인&nbsp;</div><div>‘민족협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일본이 일본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나가 되는&nbsp;</div><div>‘동아연맹’의 결성을 빨리 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nbsp;</div><div>‘동아연맹’의 결성을 통해 유럽이나 미주보다 더 큰 경제적 생산력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nbsp;</div><div>이때 동아연맹을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과 만주국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이었지만&nbsp;</div><div>중국은 반일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만주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nbsp;</div><div>단일성과 통일성이 없는 급조된 국가에 불과했습니다.&nbsp;</div><div>그 결과 만몽영유론은 만주독립론으로 전환되었습니다.&nbsp;</div><div>이는 현재 어느 정도의 정치적, 군사적 독립을 보장하는 변형된 제국주의를 의미한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div><div>그리고 이시와라는 만주국의 통치이념으로 민족협화를 주장했고,&nbsp;</div><div>이는 일본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nbsp;</div><div>결국 일본인 중심의 통치기구와 제도를 통한 지배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nbsp;</div><div><br></div><div>(국방국가론)</div><div>국방국가’ 개념은 이시와라가 생각하는 인류발전의 역사관, 혹은 정치체제의 역사관과&nbsp;</div><div>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시와라는 역사의 흐름이 전체주의에서 자유주의로,&nbsp;</div><div>그리고 다시 통제주의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nbsp; 자유주의란 서양인들의 사회로서,&nbsp;</div><div>개인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복수 정당에 의한 정치가 구현되고,&nbsp;</div><div>여론에 바탕한 외교가 전개되는 정치체제를 말하고. 이에 비해 통제주의 국가란 국책이&nbsp;</div><div>확정되어 있고, 이러한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의 정당 하에서 유기체 처럼 조직되는&nbsp;</div><div>국가체제를 말합니다. 통제주의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최고로 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를 하는 것으로서, 자유주의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정치체제이며,&nbsp;</div><div>최종전쟁이 가까운 상태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통제주의 국가가 곧 ‘국방국가’라는것입니다.</div><div><br></div><div>&nbsp;</div><div><br></div><div>(본론2)</div><div>이시와라 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div><div><br></div><div>わしが理想郷を心に描いて着手した満州国が、心なき日本人によって根底から踏みにじられたのである。在満中国人に対する約束を裏切る結果となってしまった。その意味においてわしは立派な戦争犯罪人である。独立に協力した中国人に対し、誠にすまなかったと思っている。しかし、今となってはわびのしようもない。ただ中国当局者がこれらの人々に寛大な心を持って臨まれるようお願いする次第である</div><div><br></div><div>이시와라 간지는 똑똑한 군인으로서 일본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만, 일본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른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사건들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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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1-30 00:35: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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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1205 쇼와 천황 발표팀 발표문</title>
         <author>2021110236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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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div><div><strong>1. 인물소개-송현이</strong></div><div>쇼와 천황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역대 천황 중 재임 기간이 가장 긴 인물입니다. 이 사진은 2살 때 사진입니다. 그는 1901년 4월 29일, 도쿄의 아오야마 어소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히로히토’라는 이름과 ‘미치노미야’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여기서 ‘히로히토’라는 이름은 중국의 고서인 《상서》에 등장하는 격언 ‘유내이민녕’에서 따온 것으로 “나라가 풍요로우면 백성이 평안하다”라는 뜻이고, 칭호인 ‘미치노미야’는 ‘덕을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div><div>일곱 살 때인 1908년 봄부터 히로히토는 도쿄 요쓰야에 있는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의 제국주의에 입각한 사교육, 통치술, 국제관계 등을 다루는 학문인 ‘제왕학’을 배웠습니다. 반면 이런 엄격한 교육 방식과 달리 아버지인 다이쇼 천황과는 영화감상을 즐겼고 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는 동화를 읽어주는 등 황실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한편 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재학 중, 메이지 천황이 서거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면서 히로히토는 15살의 나이로 황태자가 됩니다. 이후 히로히토가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차기 천황으로 지목되었고, 일각에서는 천황이 되기 전 서구 방문을 통해 이미지를 쌓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황태자가 해외 시찰을 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각에서는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며 계획을 세우면서 히로히토는 1921년 ‘동궁어학문소’를 졸업하고 6개월에 걸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을 방문하면서 많은 배움과 자극을 받게 됩니다.</div><div>히로히토는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1924년에는 구니노미야 나가코와 결혼하고 2년 뒤인 1926년 다이쇼 천황의 서거로 히로히토는 교토에서의 즉위식을 거쳐 제 124대 천황으로 즉위합니다. 이때 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에서 새로운 연호가 ‘쇼와’라고 공식 발표했는데, 이때 ‘쇼와’란 ‘밝은 조화’라는 뜻으로,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후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에 가담하였고, 1946년에는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을 부정하는 ‘인간 선언’을 발표하였고, 일본국 헌법 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2. 국체와 패전선언-김선아</strong></div><div>일본 군부는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 군부는 미국의 전쟁 의지를 완전히 꺾고자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전황은 점점 악화되고,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합니다. 연합국은 ‘일본국 정부는 즉시 전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 외의 일본국의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괴멸만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 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과 같은 달 9일 오전 11시 2분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날 어전회의에서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둘러싸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첨예한 대립 끝에 익일 오전, 천황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됩니다. 이는 제 1차 성단이라고 불리는데, 성단이라는 것은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을 의미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같은 날 오후 3시 경, 육군 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천황의 존속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천황제를 존속한다는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에 표명하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일본국 정부의 국가통치를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통제하에 두고, 정부 형태는 일본국 국민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라고 회답합니다.</div><div>&nbsp; &nbsp;</div><div>야마구치대 정치학연구과 부학장 고케쓰 아쓰시는 “일본에서 천황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며, 천황제를 지키는 것과 국가를 지키는 것이 동일시되었으며, 천황제, 즉 국체가 전쟁으로 훼손되거나 파괴되는 것에 대해서 천황을 비롯한 많은 일본의 정치 지도부가 큰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설명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또한, 당시 히로히토가 본토 항전을 결심했던 계기 중 하나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 계승되는 검, 구슬, 거울의 3종 신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도 있습니다. 천황은 ‘이세와 아츠타의 신기는 결국 내 신변으로 옮겨서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언어정보과 교수는 “극히 우스꽝스러운 게 삼종의 신기 자체가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천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삼종 신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신화적인 의식에 갇힌 상태였고, 어떻게 전쟁을 끝낼 지에 대해서는 거의 안중에 없었다. 천황자신이 천황제 유지를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천황제 유지를 연합국이 보장해주기 전까지는 이를 수락할 수 없었다.”라며 성단을 번복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1945년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국체호지의 보장에 관련된 거듭된 논란에 천황은 재차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이를 제2차 성단이라고 부릅니다. 히로히토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을 자손에게 전해야한다는 의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한 결정을 내린 것인데요.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패전을 고하게 되고 천황은 옥음방송을 전국에 내보내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여기서 방송된 종전 조서에서 천황은 선전포고한 까닭이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 기원에 있었으며 타국 영토침략 및 주권침탈은 자신이 뜻한 바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국체의 존속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에서 천황은 패전이나 항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전쟁의 이유를 동아시아의 안정이라 하며 일본의 개전을 자위전쟁으로써 포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천황의 종전 조서에는 천황을 평화주의자 및 반전주의자로써 탈바꿈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또한, 천황의 결정을 성단이라 강조하며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히토쓰바시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교수인 요시다 유타카는 “그가 느끼던 책임은 전쟁에 진 것에 대한 책임이고, 또 하나는 역대 천황들에게 자신의 대에서 패전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며, 이는 국민에 대한 책임감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일련을 과정을 통해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연합군 최고 사령부인 GHQ가 일본을 점령하고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일본이 재편성되게 됩니다. 또, 전범 처벌을 위한 도쿄재판이 열렸으며, 천황제 존속, 평화 헌법 등, 현재의 일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3. 천황제 존속과 맥아더-남혜란</strong></div><div>그러한 논의와 연관하여, 일본인에게 있어서 천황은 어떠한 존재와 의의를 가지는지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div><div>천황이 일본 국민에 갖는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메이지 유신과 정부에 대한 설명부터 하고자 합니다.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의 주도자들은 일본을 근대 국가 체제로 개혁하기 위해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하여 일본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식의 국가 체제와 국민통합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에 일본의 근대 국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서 천황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그 시작으로서 메이지 정부는 고지키와 니혼쇼키에 전해지는 신화를 근거로 천황을 신격화하고 천황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함으로서 신성불가침한 통치자로서의 천황 이데올로기를 일반 대중에게 수용하도록 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후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선포하게 되는데, 헌법 제1장 천황에서는 천황이 만세일계의 통치자이며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하고 육해군의 총수의 권한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합니다. 더하여 행정 각부 및 문무관을 임면하고 긴급시의 칙령 발포권, 선전포고권, 계엄선포권 등의 최고 권한 또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천황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본제국헌법에 천황에 대한 권한과 신성불가침성이 명시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천황제의 이데올로기가 전파되었고 천황은 일본을 통치하는 최고권력자이자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체론의 기본 이념의 존재로서 자리잡게 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처럼 천황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국민통합의 상징과 정신적 지주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내각은 전후 천황의 전쟁책임을 덮으려 하였고 연합군의 점령으로부터 천황제를 보호하고 존속하고자 노력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GHQ 연합군과 맥아더가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키려 노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그 의문점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미국은 대일선전포고 직후인 1942년 2월 전후 계획에 관하여 헐 국무장관을 장으로 하는 전후대회정책에 관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극동반을 조직하였고 본격적으로 대일점령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일본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행정 관료들의 협력을 얻어 점령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천황제 폐지는 일본국민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천황과 천황제는 일본과 일본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천황의 처벌과 천황제의 폐지는 일본에 큰 반발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한 것입니다. 또한 연합군은 천황제의 존속이 일본 사회의 혼란 방지뿐만 아니라, 관료에 의한 간접통치를 가능하게 하여 연합군이 직접 통치했을 시에 발생하는 언어 장벽에 따른 문제를 해결해주어 점령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미국 측의 실익과 부합하였습니다.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루 대사 역시, 쇼와 천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천황이 전쟁에 책임을 지고 퇴임해야 하지만, 전후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일본의 재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임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미군정은 패전 이후 일본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고 수월하게 전후처리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을 높은 지지를 받고있는 천황을 존속시키고 이를 대일본점령정책에 이용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인식하여 천황의 이름을 이용하는 실용적인 정책을 채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연합군의 점령과 의도 속에서 쇼와 천황은 1946년 1월 1일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전 일본 국민에게 선언하는 ‘인간 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천황은 연두조서에서 자신과 국민의 사이의 유대는 단순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현인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라 밝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황의 역할은 신성불가침의 통치자와 군주에서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인간 천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천황의 외양 측면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는 군복 대신 신사복과 중절모를 착용함으로써 총사령관 쇼와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평화주의자 쇼와로서 이미지를 대체하였다고 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쇼와천황의 인간선언과 이미지 대체는 당시 GHQ의 지휘관이었던 맥아더에 의해 계획된 것인데요, 쇼와 천황을 탈신격화 함으로써 쇼와를 군국주의 군주에서 민주주의 이념의 평화주의 군주로 바꾸어 천황제를 존속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다음은, 일본의 천황제에 대한 맥아더의 주요입장과 그의 의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5일 아이젠하워 육군 참모 총장에게 천황제 존속에 관한 중요한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그는 전후 대회 정책 자문위원회의 전문가들이 말한 것과 같이,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 부작용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천황은 모든 일본인을 통합하는 상징이다.”라고 말하며 천황제 존속에 대해 설득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이처럼 맥아더는 천황만큼 일본 국민을 잘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음을 강조하는데요, 이에 더하여 그는 일본이 개정된 천황제를 토대로 민주주의 국가로서 나아가게 되면 아시아의 공산제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 말하며 팽창 중인 소련의 경계를 위해서라도 천황제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후 맥아더는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군국주의의 군주로서의 천황보다는 상징으로서의 천황제를 성립하기 위한 새로운 개정안을 만들고 그것이 바로 &lt;맥아더의 3원칙&gt;입니다. 앞의 자료다 바로 &lt;맥아더의 3원칙&gt;인데요, 내용을 살펴보면 천황은 국가의 원수 지위에 있으며 천황의 직무 및 권능은 헌법에 따라 행사되며, 헌법에 표명된 인민의 기본적 의지에 상응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또 2조에서는 국가의 주권적 권리로서의 전쟁을 폐지하며 일본이 앞으로 분쟁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 나아가 자위 목적으로서의 전쟁 또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맥아더가 제시한 3원칙은 천황이 국사행위에 대한 내각의 조언과 동의를 필요로 하고 내각의 책임하에 헌법이 정하는 직무만을 행하도록 하는, 다시 말해 정치에 관한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하도록 명시하였습니다. 일본 측은 정치권력의 주체로서의 천황제 존속을 원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이 원칙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나 이후 천황이 수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원칙을 수용하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내용을 정리하자면, 전후 천황제의 존속은 일본 정부의 천황제 수호와 미군의 간접점령의 상호 이익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본의 헌법 또한 새로 개정되어 공표되었는데요, 평화헌법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신헌법에 대해서는 다음 차례에서 다루고자 합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4. 평화헌법에서의 천황-류은서</strong></div><div>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쇼와 천황이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은 곧 일본 국체, 즉 천황제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와 쇼와 천황은 '천황제의 존속'을 공동목표로 하여 1946년 10월 7일 신헌법을 완성했고, 1946년 11월 3일 공표했습니다.&nbsp;</div><div>신헌법은 전쟁 포기를 명시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평화헌법’으로 불리게 되었고, 천황 또한 평화주의자로 인식되도록 만든 헌법입니다. 그리고 이는 전쟁책임 회피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전후 체제의 변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일본의 전후 체제의 변화에 있어 신헌법은 군사행위 측면과 국사행위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군사행위에서의 특징으로는, 헌법 규정상 전쟁에 대한 일본의 근본적인 대처 방법이 달라진 점과 천황의 군사적 권리가 박탈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국사행위에서의 특징은, 기존의 일본 제국 헌법에 명시했던 천황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국민의 권리를 강조한 점과 아라히토가미, 즉 ‘현인신’으로서의 천황을 ‘상징’으로서의 천황으로 명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신헌법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 헌법의 조항과 신헌법의 조항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군사 행위에서의 특징에 대해 분석하고자 합니다. 일본 제국 헌법 중, 제11조에서 육해군을 통솔하는 국가원수로서의 통수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토대로, 과거의 천황은 군국주의에 입각한 천황이었으며, 군수 통치에 있어 절대권을 가졌습니다. 천황의 군사권과 연관한 제11조, 제12조, 제13조 조항은, 천황의 군수 통수권과 관련하여 전쟁책임을 추궁할 근거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신헌법 상에서 전쟁 포기 및 전력 불 보유와 교전권 부인 등을 포함한 제9조로 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정을 통해, 일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항구 평화주의를 주창하게 되었고, 천황의 군사 통수권을 박탈하여 전쟁책임을 회피할 근거를 마련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다음으로, 국사 행위에서의 특징에 대해 분석하고자 합니다. 우선 일본 제국 헌법의 제 13조와 제14조를 통해, 구헌법에서는 천황이 직접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계엄을 선고하는 등 모든 국사 행위에 있어서 천황의 절대권이 작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신헌법의 제3조와 제4조에서, 국사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국민을 위한 국사 행위만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군주로서 모든 대권을 행사하는 구헌법과 비교하면, 신헌법에서 국사 행위에 대한 천황의 절대권은 부인되고, 한정적인 성격을 띠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신헌법을 통해 천황은 절대적인 정치권을 상실하고, 내각의 승인에 의한 일부 권리 행사만이 가능해진 것입니다.&nbsp;</div><div>또한 신헌법의 개정으로, 민주주의의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구헌법에서는 제1조에서 온 세상이 천황의 핏줄 아래에 있다는, ‘만세일계’의 천황의 주권이 강조된 한편, 신헌법 제 1조에서는 ‘국민의 총의’가 강조되고 ‘상징’으로서의 천황을 명시했습니다. 또한 신헌법 제 11조에 국민의 인권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개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신헌법은 국민의 주권, 즉 민주주의를 상정하는 조항을 담은 일본 최초의 헌법이 되었고 군사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가 모두 박탈된 ‘상징’으로서의 천황을 규정하는 헌법이 되었습니다.&nbsp;</div><div>이러한 개정을 통해, GHQ의 입장에서는 천황의 군사적, 정치적 권리를 모두 박탈함으로써 천황의 상징적 권위만을 강조할 수 있었고, 쇼와 천황의 입장에서는 서구 여론에서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로 지목되었던 비민주적인 사회경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천황제를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러나 이렇게 개정된 신헌법에는 두 가지의 모순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천황의 지위에서 모순입니다. 1979년 신도 에이이치 쓰쿠바대학 조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패전 후 쇼와 천황의 측근이자 전 외교관인 데라사키 히데나리가 GHQ 측에 전달한 오키나와 극비문서에는 “천황은 미국이 오키나와 외에 류큐 열도의 군사 점령을 계속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nbsp;</div><div>즉, 쇼와 천황이 GHQ에 오키나와의 25년에서 50년, 또는 그 이상 미군의 반영구적 군사 점령을 요구한 것입니다. 현재 오키나와의 현실이 기본적으로 쇼와 천황의 발언대로 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쇼와 천황은 국사 행위를 비롯하여 정치적 권리를 모두 박탈당했는데도, 쇼와가 전후 미일 관계를 구축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관여하도록 방치했다는 점은 신헌법의 모순점이며, 신헌법을 이용해 전쟁책임을 회피한 한편, 신헌법을 관철하지 않고 미일 관계를 통해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쇼와 천황의 이중성과 모순 또한 관찰됩니다.</div><div>또 다른 모순점은 신헌법의 개정 과정에서는 국민의 의견은 거의 배제되었으며 지배계층의 의견만이 포함되었다는 점과 이렇게 개정된 헌법이 신헌법 이래로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신헌법의 내용상에서는 민주주의를 주창했고, 국민의 주권을 강조했는데도, 신헌법의 개정 과정과 주체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 모순이 개선되지 않았습니다.&nbsp;</div><div>신헌법은 전쟁책임 회피를 통한 천황제 존속을 위해 개정하게 된 헌법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나라의 헌법으로서는 이러한 모순점이 전후 체제의 구성에서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내각은 물론, 일본 신문이나 학계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 묵살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재까지도 맥아더와 쇼와의 대화나 회담에 관한 내용은 기밀로 취급되어 거의 공개되지 않았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그러나, 마쓰이 문서가 발굴되면서, 1940년대 이루어졌던 맥아더와 쇼와의 회담 내용은 기밀이라는 베일을 벗게 되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5. 일본 안보문제-백창의</strong></div><div>그럼 이제부터 쇼와 천황의 위기 중 하나인 일본 안보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본의 안보 문제에 관해 4차 회담과 4차 회담 이후 그리고 마쓰이 문서를 통해 발견된 9차, 10차, 쇼와 천황과 리지웨이 회담 내용을 통해 쇼와 천황과 맥아더 간의 생각을 알아보겠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4차 회담에서 이제 상징 천황이 되어버린 쇼와 천황은 맥아더와 신헌법 9조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쇼와 천황은 일본의 안전보장을 국제연합에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자 맥아더는 장래 국제연합은 점점 강고해질 것이라며 쇼와 천황과는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이에 쇼와 천황은 “일본의 안전보장을 꾀하기 위해서는 앵글로색슨의 대표자인 미국이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맥아더 원수의 지원을 기대한다” 라며, 본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일본이 가능한 한 국제연합의 일원이 되어 평화를 위한 마음으로 세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식의 헌법 제 9조의 이상과 국제연합의 이상을 연결하는 발언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4차 회담이 끝나고 나서 회담 내용이 누설되었고 보도가 나게 되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일본의 방위를 맡은 것을 보증했다와 같은 보도였습니다. 보도가 난 다음 날 맥아더는 그 보도는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보도된 것으로 그는 이 보도를 “진지하게 코멘트할 가치조차 없는 바보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방위에 대해서는 강화조약 조인까지는 점령군에게 맡겨진 의무이지만 강화조약 그 이후는 규정에 따를 것임을 확실히 드러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쇼와 천황은 4차 회담 후에도 “장래 일본의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 내주를 받고 있었습니다. ‘내주’라 함은 천황에게 대신 등이 일을 보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쇼와 천황은 끊임없이 일본의 안보 문제를 걱정했는데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1947년 9월 20일 쇼와 천황이 맥아더의 정치 자문인 윌리엄 시볼드(Sebald, William J)에게 오키나와에 대한 미군의 점령이 “25년에서 50년, 혹은 그 이상의 장기 대여”라는 가정하에서 계속되기를 바란다며 오키나와의 장래에 관한 견해를 전했습니다. 이 부분은 앞서 신헌법의 두 가지 모순 중 하나로 미리 소개했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리에 스케마사 일기』에서 “미국이 점령해주는 것이 오키나와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가장 좋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이라는 부분을 통해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이 쇼와 천황 자신의 의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9차 회담에서는 이 회담 두 달 전에 소련이 핵무기 보유 사실을 선언하고. 10월에는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성립하면서 이 때문에 대일 강화회의에 소련과 중국의 참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과 미국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도 ‘단독 강화인가, 아니면 전면 강화인가?’하는 논의가 비등했습니다. 강화 문제가 사회적 초점이 되고 있던 시기에 회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9차 회담에서 쇼와 천황은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하고 있고, 조선에 대한 침략 등이 있어 국민이 심하게 동요하는 사태가 생길 것이 우려된다. 소련이 조기강화를 찬성하는 것도 다름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환심을 사려는 의도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의 발발을 예측하고, ‘조기강화’론을 소련의 책략으로 보는 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쇼와 천황은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방위하는 체제를 확보하는 것이 강화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주권을 회복함과 동시에 일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일본의 재군비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을 주장하면서 강화 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표명했습니다.&nbsp;</div><div>끝으로 미국은 극동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굳게 결의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에 머물러 일본 및 동아시아의 평화를 옹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싸울 것이다.”라는 입장을 전했고 이에 쇼와천황은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0차 회담을 곧 보면 아시겠지만 맥아더의 이 생각은 아직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10차 회담에서 쇼와 천황은 국제관계 이해 문제에 관해 물었고 맥아더는 “매우 유감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대일 강화가 성립될 전망은 별로 없다.” 라고 솔직하게 비관론을 전개했습니다. 이어 본론으로 옮겨가 쇼와 천황은 미군 극동 배치의 중요성을 말했는데 이에 맥아더는 종래에는 과거 유럽 제일주의였지만 중국의 비극을 경험하고 점점 극동에 배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쇼와 천황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공통의 세계관을 가진 국가가 협력해서 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맥아더 역시 동의하는 발언을 하며 마무리하게 됩니다. 10차 회담에서 쇼와 천황과 맥아더는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 등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어긋나는 점”이 생겼습니다. “어긋나는 점이란 일본 독립 후의 미군 주둔 문제였습니다. 9차 회담에서 ”약속“했던 미군 주둔에 대해서 맥아더는 이번 10차 회담에서 마지막까지 확언을 피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리지웨이와의 3차 회담에서 쇼와 천황은 ”미일안보조약의 성립도 일본의 방위상 경축해야 할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4차 회담에서 행정협정과 관련해 ‘방위비’, 나 점령기의 시설 반환 문제 등에 일본 측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 리지웨이는 ”일본 측이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쇼와 천황은 ”요시다 내각이 국민 계몽을 위해 유효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믿는다. 나로서는 충분히 양해할 수 있으며, 국민들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결국 요약하자면 쇼와 천황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미군의 주둔이 필수적이라고 바라보았으며 실제로 미일안보조약을 경축해야 할 일이라며 흡족해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맥아더는 일본의 안보 문제에 관해 9차 회담에서처럼 미군 주둔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힐 때도 있었지만 4차 회담이나 그 이후, 10차 회담에서처럼 미군 주둔을 계속할지에 대한 확언을 피하는 입장이기도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6. 히로히토의 평판-김은오</strong></div><div>최종적으로, 히로히토에 대한 평판에 관해 논하고자 합니다.&nbsp;</div><div>히로히토에 대한 평판을 좀 더 다각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기 위해, 우선 한국, 세계 각국, 일본의 순서로 알아본 후에 히로히토와 그의 아들, 아키히토의 평판을 비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여 그의 평판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첫 번째로 한국에서의 평판입니다. 일본의 천황가는 일반 백성들과 달리 시루떡을 먹고, 식후에는 차가 아닌 숭늉을 마시며, 식사에 마늘을 넣어 먹는다고 합니다. 또 어머니를 ‘오모’라고 부르거나 숟가락을 사용하고 정좌 대신 양반다리를 하는 등 한국과 비슷한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이 발표된 적이 있는데요. 일본 황실이 조선 출신이라며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믿는다고 발언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히로히토였기도 합니다. 다만 해당 사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죠. 그보다는 한창 한국이 고통받았던 일제강점기 당시의 군주로서 전쟁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등장하고 도쿄 재판에서도 전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히토는 전후 살아있는 기간동안 한국에 방문하지 못할 정도로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부정적 인식이 우세한 편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두 번째는 히로히토에 및 전쟁 시기 일본에 대한 세계의 평판입니다. 주로 일본과 직접 전투를 겪었거나 도쿄재판 재판관이 포함되어있던 국가들을 골라내보았습니다.</div><div>먼저 미국입니다. 미국은 전후 히로히토와의 여러 번의 회담을 통해 한미일 동맹으로서 우방국 관계를 맺게 되었으나 직접 태평양 전투 등에서 적으로 마주쳤던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역시나 긍정적인 평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div><div>유럽의 경우 국가마다 인식에 차이가 있으나 아무래도 일본에게 직접 침략을 받은 경험은 잘 없다보니 젊은 세대일수록 히로히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했던 세대의 평판을 살펴보면 영국의 경우 히로히토를 ‘악마’라고 칭할 정도로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전범이라는 평판이 많습니다. 이전부터 교류로 연을 맺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국만큼 평판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일본에 대한 네덜란드의 피해 자료들이 새로 발견되면서 히로히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증가했습니다.&nbsp;</div><div>인도는 히로히토를 비롯한 일본이 아시아에 저지른 전범 행위들에 대해서는 역시 인식이 좋지 않으나, 영국에게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였던 만큼 도쿄재판을 통해 타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심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갖는 듯 보였습니다.</div><div>소련은 세계대전 당시에도 가까운 적국 관계로, 종전 이후에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 관계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이후로도 영토 분쟁 등의 문제가 있어 일본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이에 따라 히로히토에 대한 평판도 좋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div><div>중국은 난징 대학살 문제나 만주사변 이전의 장작림 폭살 사건 당시 히로히토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 등의 모습 때문에 히로히토가 살아있는 동안 중국에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할 정도로 평판이 좋지 못했던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다음은 일본 내의 히로히토에 대한 평판입니다. 앞서 본 한국이나 세계 각국의 부정적인 평판과 달리, 일본에서는 긍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 편입니다. 일본어로 히로히토에 대해 검색해보았을 때, 포츠담 선언 수락의 ‘성단을 내리셨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종전을 결정하셨다’와 같이 신성해보이는 단어들을 선택하거나 상당히 긍정적인 시선으로 천황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쇼와성덕기념재단’을 세우거나 ‘쇼와천황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히로히토의 재위 50주년을 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div><div>그러나 천황제나 히로히토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는데요,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좌익 세력 이외에도 맥아더와의 회담 당시 히로히토의 폐위를 주장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종전연락사무국 차장이었던 시라스 지로입니다. 시라스는 ‘히로히토가 전쟁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한다’, ‘사람들이 폐하가 아닌 폐하 주변인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여 퇴위에 실패했다’라는 등 히로히토에 대한 혹평을 남겼고, 이로 인해 당시 히로히토와 시라스의 관계 역시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마지막으로 히로히토와 그의 아들인 아키히토의 평판을 조금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히로히토는 전쟁이 개전하기 전에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일본의 승산을 물어보고 전쟁 개시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않는 등 꽤나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아키히토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의 참상을 겪어왔기 때문인지 반전을 주장하며 평화, 과거 반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 아버지 히로히토와는 대조적입니다. 정치적 행동을 비교해보았을 때도 히로히토는 상징 천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와의 회담 시기까지 다른 인물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 할 정도로 능동적, 적극적으로 정치외교에 개입하였다는 평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내각의 초대와 같은 일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행사가 아니면 정치나 외교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타인이 자신과 정치적으로 엮여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치인의 편지를 바로 읽지 않고 신하에게 넘기는 등 히로히토에 비해 더 온전한 ‘상징천황’으로서 행동한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히로히토의 전쟁 당시의 군주라는 지위, 상징이지만 능동적인 행동은 대부분 부정적인 평판으로, 아키히토의 평화/반전주의, 상징천황으로서의 모습은 대부분 긍정적인 평판으로 두 사람의 평판이 갈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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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2-04 14:54: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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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2.12.07. 요시다 시게루 발표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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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410869206</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요시다의 어린시절</strong></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의 사상을 크게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요시다는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아시아 대륙에서의 이익수호라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외교관이기도 했습니다. 상인적 국제정치관에 입각한 친영미파이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열렬한 존황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요시다의 사상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처한 배경과 주변 인물들에 영향받으며 점차 형성되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가 태어나고 외무성에 입성한 1878년부터 1906년까지의 시기는 청일전쟁, 영일동맹, 러일전쟁을 거치며 대륙팽창의 제국 일본을 완성해 가던 시기였는데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요시다는 실용주의, 존황주의, 제국주의 등을 학습해가며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특히 아버지와 스승의 영향을 듬뿍 받으며 자라나게 되는데요. 요시다는 태어난 뒤 얼마지나지 않아 요코하마 무역상이던 요시다 겐조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요시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굉장히 엄하게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양부 요시다 겐조로부터 요시다 시게루가 엄청난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시다 겐조는 영국 군함에 잡역부로 승선해서 밀항한 후 귀국한, 당시 사람으로써 굉장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뛰어난 사업수완을 갖춰서, 부호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시다 겐조로부터 상인적 국제 정치관, 친영미파 기질,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런데, 요시다는 양부인 요시다 겐조 마저도 일찍이 여의고 양모 요시다 고토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양모 고토코의 부친, 그러니까, 요시다 시게루의 외조부인 사토 잇사이는 저명한 유학자였다고 하고, 양명학에 정통한 학자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토 일가의 양명학, 실용주의적 태도는 양모 코토코를 거쳐 시게루에게로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요시다의 전통주의, 실용주의 모두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제 학창시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시다는 11살 때 고요숙이라는 곳에 입학을 합니다. 이 곳은 주로 한학을 교육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양학 또한 적극적으로 교육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저번 후쿠자와 유키치의 발표에서 언급이 돼서 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 의숙의 졸업생들에게 영어 등의 과목을 수학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요숙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식적인 세례 속에서 요시다는 생활을 하게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다음으로 닛폰중학에서 잠깐 동안 수학했는데 이곳은 쇼와천황이 황태자 시절에 윤리 강습을 했던 스기우라 주고의 가르침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존황주의를 습득하게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리고 교장이 존황주의자이자 아시아 연대론자 였던 가쿠슈인에서는 제국주의, 그리고 닛폰중학과 마찬가지로 존황주의를 요시다가 깊게 체화하는 계기가 됩니다.</div><div>&nbsp; &nbsp;</div><div>정리하면, 당시는 대륙팽창의 제국 일본을 완성해 나가는 시기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요시다는 아버지와 스승의 영향을 듬뿍 받으며 실용주의와 존황적 전통주의, 상인적 국제관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용주의를 기반으로하는 직업 외교관, 상인적 국제정치관에 입각한 친영미파, 존황주의자 라는 요시다의 세 개의 얼굴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2. 외교관 시절의 요시다 시게루</strong></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는 1906년 톈진 근무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고, 곧바로 펑톈으로 근무지가 옮겨집니다. 펑톈에서 요시다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점령한 만주 지역의 처분에 대해 대러, 대중교섭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요시다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대장 밑에서 근무했는데, 이는 후에 안동 영사로 임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런던 부임 이후 마키노 노부아키의 장녀 유키코와 결혼하며, 외무성 중진이었던 노부아키에 의해 천황의 측근들과 접하게 됩니다. 이는 요시다의 존황주의적인 면모를 더 확고히 했던 것 같습니다. 요시다의 현실주의적 외교의 시초는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의 아버지인 오쿠보 도시미치이기도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1912년 안동 영사에 부임한 요시다에게 있던 주요 문제는 ‘21개조 요구’ 문제와 산둥 문제의 해결이었는데, 당시 요시다는 오쿠마 내각의 ‘대 중국 21개조 요구’를 비판합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닌, 열강 특히 영미의 정치적 협조를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후에 21개조 요구에 저항하는 중국에 대해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것을 일본 외교의 승리로 회고했다고 하는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후 1922년에는 톄진 총영사를, 1923년에는 펑톈 총영사로 취임하며 대중 정책의 선봉에 다시 서게 됩니다. 이 시기 요시다의 대중 정책은 본질적으로 군부보다도 강경한 제국주의 사고를 보입니다. 중국 문제를 둘러싸고 워싱턴 협조체제가 와해하는 과정에, 요시다는 시데하라의 평화주의 외교에 대해서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적극 외교에도 저항합니다. 물론 다나카 내각의 만몽분리 정책은 요시다 시게루가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펑텐파 군벌 총수인 장쭤린(장작림)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였습니다. 다나카 내각은 국제사회 특히 영미의 여론을 의식해 동3성(펑텐, 지린, 허롱장, 만주의 별칭)을 장쭤린 지배하에 맡겨두자는 입장이었고, 요시다 시게루는 장쭤린을 제거를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는 영미의 양해와 협조를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요시다 입장에서 열강의 대중 내정간섭은 열강의 국민경제 자위를 위한 권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요시다의 의견에 따라 장쭤린은 제거되었으나, 폭살이라는 방식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런 방법은 요시다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계기로 요시다가 군부에 저항하고, 외교의 외무성으로의 통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외무차관을 맡은 시기 보조함 제한을 주제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5개국이 참가한 런던회의에서 대미 7할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타협안에 조인하게 됩니다. 이에 타협한 요시다는 군부의 입장에서는 국적(國賊)이 되었으나, 이는 훗날 전후 요시다의 입지를 지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div><div>&nbsp; &nbsp;</div><div>외무차관을 마치고 떠난 이탈리아에서는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제사회에서 고조된 대일 비판에 맞서 해명(요시다의 입장에서는 항변)하는 것에 힘을 쏟았으며, 본국 정부, 특히 군부가 주도하는 대중 강경책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견제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때 군부에 대한 경고와 견제는 제국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시다 역시 만주와 중국 등 대륙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대륙경영에만 의지한 자립경제로는 일본 생존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유럽, 미국 등과의 협조 하에서 점진적으로 대륙 진출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대국 실용주의는 그를 일본 내에서 고립되게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탈리아 대사 이후로 외교의 일선에서 물러났던 요시다는 1936년 영국 대사에 취임합니다. 이 시기는 일본과 독일이 방공협정을 교섭하던 시기인데, 요시다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는 소련에 대한 불신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뿐 아니라, 독일과의 제휴가 지니는 군사적 정치적 의미와 결과를 고려할 때, 독일과의 본격적인 군사동맹에 말려들어 영미를 직접 적대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그의 실용주의, 실리주의 외교를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는 영국에서 ‘진자이론’ 설파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온건파는 스스로 일어날 여력이 없는 현실에 처해 있기 때문에 영국의 조력이 필요하며, 소련의 위협에 대항할 필요성을 인식한 군부에서도 영국대망론이 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내부에 군국주의자와 온건파, 일영협력파와 일중협력파라는 두 개의 양대진영이 대립하고 있으며, 요시다는 자신이 온건파로서 일영협력파와 일중협력파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으며, 영국의 협조를 통해 이들의 협력을 통해서 군국주의적 성향을 제압할 수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입장에서 오히려 일본은 중국에서의 영국 이권을 노리는 커다란 위협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일본과의 협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영일동맹에 대한 요시다의 노력은 실패했으나, 주영대사를 퇴임한 뒤에도 요시다는 외교적인 노력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1940년 9월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조약이 체결되며, 요시다의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추축국에 반대하던 활동은 전후 GHQ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3. 전후 요시다의 행보. 제1단계</strong></div><div><strong>&nbsp; &nbsp;</strong></div><div>다음은, 전후 요시다 시게루의 행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nbsp;</div><div>요시다 시게루는 &lt;회상 10년&gt;에서 점령정책을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div><div>제1단계는 일본의 비군사화 민주화가 철저하게 추진되는 시기, 제2단계는 일본경제 자주화에 중점이 놓이는 시기, 제3단계는 한국전쟁 발발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르는 시기입니다.</div><div><br></div><div>제1단계는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가 철저하게 추진되는 시기로서 그 전형이 주권재민과 전쟁포기를 담은 일본국 헌법제정이었습니다. 이는 최고사령관 총사령부가 추진한 &lt;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gt;에 의거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우선, 당시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점령 개시기의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용과 항복의 의미를 일본의 국가적 생존과 연결시켜 명확하게 해야 했습니다. 점령군의 일본 장악 이후 일본 정부에 얼마만큼의 국내 통치권이 남아 있는지, 점령군은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를 행할 것인가 아닌가, 국내 통치권을 둘러싼 점령군과 일본 정부의 경계선에 대한 문제를 가진 상황에서 일본 정부에 의한 간접통치 희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div><div><br></div><div>그러나 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중립국이나 연합국 대표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금지시켰고&nbsp;</div><div>GHQ와의 교섭이 일본의 외교의 전부가 되어버립니다.</div><div><br></div><div>또한 당시 맥아더는 미국의 대일점령이 일본 국민을 노예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며 미국은 곧 일본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이렇게 맥아더를 비롯한 사령부의 권한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기초로 한 절대적인 것이기에 미국에 협조하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한 정치인이 요시다 시게루였습니다.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 외교의 근본은 대미협조라고 주장합니다.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건 미국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재군비는 제국헌법에 의해 명백하게 포기했으며, 재군비의 논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정부의 입장으로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합니다.</div><div><br></div><div>이렇게 미국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점령하면서 도쿄에 연합군 최고 사령을 설치합니다. 이때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재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포츠담 선언에 따른 일본 전쟁 지도부 처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솔리니, 히틀러와 달리 히로히토 천황은 생존했습니다. 하지만 연합국 최고 사령부의 결정은 천황을 처벌하거나 이 체제를 없애는 것보다 천황이 존재하는 것이 더 점령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천황에 대한 처벌은 묻지 않았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다음은 1946년에 제정된 평화헌법입니다. 평화헌법에는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는 인간선언. 군사력 보유금지, 주권 재민의 원칙에 따른 인권 보호 조항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주권은 민에게 있다는 것을 천명했는데 미국의 방침은 명확합니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할 수 없는 나라로 비군사, 비무장을 내세웠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 시게루는 헌법 9조를 용인함으로써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고 점령상태에서 신속히 해방되어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법 제9조를 절대로 변경할 수 없는 조항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정치적 효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헌법에 평화조약을 마련함으로써 일본이 침략국, 호전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실리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현대의 경우에는, “전쟁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전전의 외교에서는 늘 전쟁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석유부족, 고철부족, 궁핍에 빠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며, 전쟁만 안 했더라면,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즉, 요시다가 한국전쟁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재무장을 거부하면서 헌법 제9조의 수호자처럼 행동했던 것은, 이와 같은 전전의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4. 전후 요시다의 행보. 제2단계</strong></div><div>&nbsp; &nbsp;</div><div>2단계는 냉전때의 자주화로서의 중점이 놓이는 시기 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1947년 5월 일본 헌법이 시행 된 이후의 세계정세는 패전 직후와 큰 변화를 보이고 있었습니다.&nbsp;</div><div>패전직후에는 미소 협조를 전제로 한 국제연합체제가 출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었지만 1947년 이후에는 미소가 단순히 협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nbsp;</div><div>아시아에서도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조정하려고 했던 미국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1946년 국공내전이 재차 격화 되었으며, 1947년 1월에는 미국의 마샬특사가 조정을 포기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nbsp;</div><div>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하여 미국이 무엇보다 서두른 것은 헌법 제9조의 유연한 해석을 통한 일본의 재군비였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그러나 패전 직후 일본에서는 패전의 책임에 따른 반군부 정서가 팽배해 있었으며, 특히 요시다는 전전의 군부를 정치의 암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nbsp;</div><div>또한 재군비는 제국헌법에 의해 명백하게 포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군비의 논의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정세에서 2단계의 시기는 “이상주의 억제", "경제 제건", "재무장", "재군비", "역코스" 의 상황으로 변화하였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한편, 냉전이 격화 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 강화교섭을 둘러싼 최대의 문제는 독립 후 일본의 안전보장을 어떻게 하는가에 있었습니다.&nbsp;</div><div>강화 형식을 둘러싼 입장에 있어 보수세력과 혁신세력 간의 태도는 양극화되고 있었습니다.</div><div>동서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에 강화가 실현 된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국과의 강화밖에 없다는 다수강화론과 공산진영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의 강화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냉전의 격화로 인해 일본이 세계전쟁에 휘말려들게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전면강화론이 대두된 것입니다.</div><div>이 때 요시다는 1947년 중반 미국의 점령정책이 민주화 개혁에서 경제부흥으로 변화하는 것을 예의주시했습니다.&nbsp;</div><div>때마침 미소 간 대결은 그 사이에 끼인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nbsp;</div><div>그리고 그는 냉전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여 다수 강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다수강화만이 해결책인 이유는 아시다 히토시의 아시다 서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nbsp;</div><div>아시다 히토시는 1947년 7월 가타야마 데쓰 내각의 외상으로 취임한 인물입니다.&nbsp;</div><div>이 서한에서 아시다는 평화회복 후에 일본의 안전보장을 미소관계의 상황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div><div>평화회복 이후에 미소관계가 우호적이게 될 경우에는 일본의 독립보전은 유엔이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겠지만, 미소관계가 호전되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nbsp;</div><div>첫째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특별 협정을 맺고 일본의 방비를 미국에 위임하는 것. 둘째로 미국 측은 일본 정부와 합의 하에 언제라도 일본국 내에 군대를 진주함과 동시에 그 군사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제안은 미소협조에 의한 국제연합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특별협정에 따라 일본의 안전보장을 확보할 수 있고, 이 협정이 존재하는 한 일본의 독립을 해치려 하는 제 3국은 직접 미국에 적대 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그 행동을 삼가하게 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nbsp;</div><div>그리고 이것이 이후 미일안전보장조약으로 연계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협의안은 미국의 재군비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독립 후 일본의 안전보장 문제를 해결하고 조기강화를 달성하고자 한 요시다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렇다면 요시다의 전후초기와 상반되는 재군비 추진의 행동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이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 요시다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요시다 시게루는 회상 10년에서 경제기반을 갖춘 후 군비확장을 꾀하여 최종적으로 신군국을 건설할 것을 언급했습니다. 요시다의 전략의 핵심은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적인 힘과 경제적 기반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시다에게 있어서 재군비는 미국과 특별 협정을 맺을 수 있고, 그 결과 미국에게 무역증진을 위한 자금 원조, 대외원조법에의한 물자공여 등 혜택을 받으며 요시다가 원했던 경제 부흥에 가까워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두번째는 그 당시 일본 내부에서는 경제 부흥이 먼저냐 재군비가 먼저냐의 순서의 논쟁이었을 뿐, 모두 강화 이후 일본 재군비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세번째, 강화조약의 조정을 위한 미일 간의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되자 요시다는 5만의 보안대 창설을 제안하는 등 미국의 재군비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조기강화를 실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급진적이든 점진적이든 요시다는 재군비에 동의하는 형식을 취하며 강화조약과 안보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처럼 일본 재군비는 요시다 자신의 생각과 반드시 위배되는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즉 요시다에게 재군비란 군국주의로 가겠다는 포부가 담긴 의도가 아닌 경제부흥을 위한 단하나의 수단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한 그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실용적이며 최선의 방법 이었던 것입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5. 전후 요시다의 행보, 제3단계</strong></div><div><strong>&nbsp; &nbsp;</strong></div><div>다음은 점령정책 3단계로 한국전쟁 발발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을 때까지의 상황과 그에 따른 요시다의 대응에 대한 내용입니다.&nbsp;</div><div>헌법 제9조 하의 기지제공을 전제로 한 강화와 독립’ 이라는 상태를 ‘기지국가’ 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한국전쟁의 현실 속에서 ‘군대 없는 메이지 국가는’ ‘기지 국가로’ 변형되고 있었습니다.</div><div>요시다는 한국전쟁의 발발을 진영 간의 사상전으로 규정하고,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적극협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시다의 진정한 목적은 조기강화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열린 공간을 미국의 조기강화론을 강화시키는 것에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의 전면강화론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외교에 많은 변화가 발생했습니다.&nbsp;</div><div>덜레스를 비롯하여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대일점령정책을 미국의 냉전외교의 관점에서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덜레스는 봉쇄정책을 통하여 일본을 동맹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일본이 서구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맥아더 사령부가 생각한 ‘일본의 민주화’라는 초기의 점령정책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nbsp;</div><div>이렇게 변화하는 미국의 입장에 맞춰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의 대표로서 대응하고 주도하는 상황이 많아졌습니다. 간단한 예로 미국 내에서 군부의 대일 의구심으로 인해 조기강화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요시다는 헌법에 저촉될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미국에 협조했던 것이 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바탕에 두고 이 시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시기순으로 나열하며 요시다가 각 사건에 어떤 대응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div><div>먼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안보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습니다. 재일미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생긴 공백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요시다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이 아닌 실력 부대로 7만 5천명의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라고 지령을 내렸습니다. 요시다는 일찍부터 경찰력의 확충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이런 맥아더의 지령에 즉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nbsp;</div><div>8월 10일, 요시다는 경찰예비대령을 공포하고 대원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요시다의 행보에 국회에서는 재군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문에 요시다는 국내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며 재군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시다의 답과는 다르게, 후에 경찰 예비대는 기존의 해상보안청 직제개편을 통해 새로이 8천명규모의 보안대 증원대로 재편성되었으며, 1954년 경찰예비대가 결국 자위대 발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군수생산시설도 전면적으로 재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1951년 1월 덜레스 특사가 일본의 재군비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에 재방문했습니다. 덜레스는 일본의 재군비를 통해 자유세계에 공헌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교섭 시도에 초반에, 요시다는 이전과 같이 재군비에 찬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후에 덜레스와 강화조약 체결을 교섭했습니다. 이때 나온 문서가 &lt;재군비의 발족에 대해서&gt;이고 문서에는 육해군을 포함한 새로운 5만의 보안대를 창설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1951년 9월 8일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 행보 중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조약이 조인됩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입니다.&nbsp;</div><div>먼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입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평화조약입니다. 요시다 전권은 48개국과 대일강화조약을 조인했으며, 대일강화조약을 거부한 국가는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3개국이었습니다.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교외 제6병단 사령부에서 요시다 전권이 참석한 미일안보조약 조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일본의 안보체제 가입 용인과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규정한 조약으로 미군이 강화 후에도 안전 보장을 위하여 일본에 머무를 것을 규정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전진기지, 전쟁의 후방기지가 되어 있는 현실을 지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체결한 강화입니다. 1951년에는 요시다 시게루가 주도하여 조약을 맺었지만, 이후 기시 노부스케가 주도하여 신미일안보조약이 맺어집니다. 이 내용은 뒤의 기시 노부스케와의 비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nbsp;</div><div>두 조약은 모두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은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대신 일본은 미국에게 오키나와를 무기한으로 기지로 제공하며, 점령군은 ‘주류미군’ 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남게 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는 요시다가 견지해 온 고도의 실용주의, 강대국과의 동맹과 협조, 그리고 아시아 부재 시각에서 가능했던 선택이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는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는 중에도, 전후처리 외교를 자립과 안전보장을 중심으로 전개했고, 미일 양국은 일본의 외교와 안전보장을 중심으로 ‘미일안정론’ ‘요시다 노선 ’을 발전시켰습니다. 요시다 시게루의 선택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성립과 전후 처리의 틀을 제도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주변 국가들 과의 신뢰 구축은 실패하였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6. 요시다 시게루&amp;기시 노부스케</strong></div><div><br></div><div>다음으로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를 간단하게 비교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nbsp;</div><div>미야자키 마나부의 저서에서는 1950년대 보수정치를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 2가지로 구분합니다. 요시다 시게루로 헌법을 옹호하고, 경무장, 미일동맹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로부터 미일동맹을 계승하면서도 히토야마로부터 개헌을 계승하고 이 개헌과 대등한 미일동맹의 구축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과 동맹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하지만, 신미일안보조약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일본 국내의 정치적 소요에 대한 미군의 개입 가능성과 일본이 제 3국에 기지를 대여할 경우 미국의 동의권을 필요로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으로 보아 미국의 동의를 받고 움직이는 것에 문제를 느꼈고 더 자주적이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7. 요시다 총론</strong></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를 실용주의, 현실 주의자, 제국주의, 존황주의, 전후 공간의 설계사의 키워드로 정리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요시다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정확한 국제 정세 파악할 수 있는 유능한 외교관이었으나, 전후에도 천황제를 유지시킬만큼 존황주의자 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면모를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미국 주종관계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맹의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div><div>&nbsp; &nbsp;</div><div>패전 일본의 독립의 진두지휘한 요시다는 전후 일본을 미일안전보장체제의 구축을 통해 일본을 독립시킬 수 있었고, 소군비를 실현시켰습니다. 여기서 요시다가 철저한 미국 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요시다가 본인 스스로를 칭한 것처럼 영미 이용주의자로 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요시다는 국제상황을 파악했을 때 영국과 미국 노선을 타는 것이 일본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이러한 요소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div><div>&nbsp; &nbsp;</div><div>그리고 요시다 또한 대미 자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인 성장을 먼저 이룸으로써 후일 일본의 자주를 도모했습니다.&nbsp;</div><div>&nbsp; &nbsp;</div><div>결과적으로 이것은 일본 경제에 부담을 덜어주었고, 대신 일본은 모든 경제력을 전후복구에 집중 투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의 경제대국의 발판을 다져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미일안전보장체제에 따른 소군비주의 노선은 전후 일본의 이미지를 평화주의로 부각시킴으로써, 2차대전의 핵심 전범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별다른 저항없이 선진국에의 진입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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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2-06 15:42: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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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12.7 기시 노부스케 발표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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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k>https://padlet.com/teseus7/g6rdhs0xk6auj9rg/wish/2411035582</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기시노부스케의 탄생</strong></div><div>&nbsp; &nbsp;</div><div>기시 노부스케는 1898년 11월 13일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1898년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으로 기록된 제1차 오오쿠마(大隈) 내각이 탄생한 해이나, 여전히 번벌 세력이 강하여 그 해 11월에는 이 정당 내각이 내부분열로 붕괴 되고 죠슈(長州)번의 중심인물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제2차 내각을 조각한다. 기시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으므로 자동적으로 죠슈번에 편입되었으며, 이는 기시가 관료로 또한 전후 정치가로 성장하는 데에 큰 힘이 된다.</div><div><strong>&nbsp; &nbsp;</strong></div><div><strong>기시의 정치활동에 영향을 준 사상</strong></div><div>&nbsp; &nbsp;</div><div>1917년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기시는 스승인 우에스기 신키치의 가히 광신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국수주의에 위화감을 느끼는 동시에 사회주의자였던 기타 잇키의 국가 사회주의적 사고에 공감하기도 하는데 이는 후일 기시가 주요 산업에 있어 자유경쟁을 경계함과 함께 만주국과 일본제국에서 통제경제를 실행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기시는 자신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공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강조했지만 1931년 발의한 중요산업통제법을 살펴본다면 기타 잇키의 사상이 기시의 생각과 맞아떨어졌으며 그것이 정치 인생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실제로 기시는 잇키의 국가개조안원리대강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매우 가까웠고 조직적이며 구체적이었다고 회고했음)</div><div>&nbsp; &nbsp;</div><div>기시 노부스케가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한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해였다. 평범한 농업국이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소련의 5개년계획)를 통해 공업국으로 변모하는 모습은 기타 잇키의 국가사회주의적 일본 개조에 공감한 기시에게 일종의 영감을 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시는 1926년 반년간 유럽을 사찰했었고 당시 미국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을 겪을 수 있었다. 기시는 이에 일본과 서구사회는 따라갈 수 없는 격차가 있음을 느꼈고, 1930년 독일의 산업합리화운동과 국가 통제화에 주목한다. 여기서 산업합리화란 기술적으로 규격을 통일해 효율성을 높이고 중요 산업에 대해 국가가 이를 보호하며 카르텔화 하여 자유경쟁을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nbsp;</div><div>&nbsp; &nbsp;</div><div><strong>기시 노부스케와 만주국</strong></div><div>&nbsp; &nbsp;</div><div>1925년 농상무성 분할에 의해 기시는 상공성에 배속되었다. 이후 1930년 독일의 산업 합리화운동에 대해 연구했고 1931년 중요산업통제법을 발의했다. 와중 히로타 내각의 조각과 함께 상공성 내부의 인사 쇄신으로 입지가 위태로워지긴 했지만 이미 1930년 이후 만주국으로 꾸준히 측근을 보내 ‘기시 인맥’으로 이루어진 만주의 관료진을 만들어 놓은 기시는 1936년 만주국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배경에는 만주국과 관동군과의 관계가 있는데, 당시 만주국의 수뇌부는 관동군 제4과가 좌지우지하였고, 기시는 이를 전문 관료가 아닌 군인들이기에 판단, 짐작이 빗나가는 일이 잦고 제계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기에 기시는 산업 행정을 상공성의 가장 우수한 사람이 가서 넘겨받아 정상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젊은 리더였던 기시는 만주국에 부임하게 된다.&nbsp;</div><div>&nbsp; &nbsp;</div><div>이때 2.26사건 이후 군부는 더더욱 전횡을 일삼고 정당정치는 몰락했었다. 이러한 정당 세력의 몰락, 전시체제에 대응할 경제통제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총동원 체제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혁신 관료로 불리던 테크노크라트(과학적·전문적 지식·능력을 배경으로 현대의 조직이나 사회의 의사 결정과 관리·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였다. 이후 기시는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업부 차장으로 승진했고 이후엔 총무청 차장으로서 &lt;만주국산업개발5개년계획&gt;을 지휘하게 되었다. 물론 만주개발5개년계획은 이미 아시하라 간지의 두뇌집단 미야자키 마사요시 기관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미야자키 마사요시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대학을 졸업했고 혁명 중의 러시아를 체험한 러시아 전문가였다. 미야자키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계획적 통제경제 속에서 일본 국가 개조모델을 찾아내려 했고 1933년 &lt;만주국 경제건설 요강&gt;을 발표했다. 해당 &lt;요강&gt;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div><div>&nbsp; &nbsp;</div><div><em>-일본 경제를 건설함에 즈음해서는 무질서한 자본주의경제의 폐해를 거울삼아 이에 필요한 국가통제를 가하고 자본의 효과를 활용함으로써 국민경제 전반의 건전 하면서 활달한 발전을 도모하려 한다.</em></div><div><em>&nbsp; &nbsp;</em></div><div>해당 요강의 내용은 분명 기타 잇키의 &lt;국가개조안원리대강&gt;에 제시된 국가사회주의적 통제경제모델과 일치한다. 해당 요강의 방침은 분명 기시에게도 뜻깊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 요강의 발표 1년 후 만주국에 대응하는 형태로 일본에서는 &lt;일만 경제통제방책 요강&gt;이 결정되었다. 이후 이시하라는 미야자키에게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 목표 달성 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군비 확충계획을 책정하는데 필요한 종합적인 일본경제력 판단에 관한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사적 기관 일만 재정경제 연구회를 설립하게 했고, 이 연구회가 1936년 9월에 작성한 ‘만주에 있어서의 군수산업 건설 확충계획’이 &lt;만주 산업개발 5개년계획&gt;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 기시는 &lt;만주 산업개발 5개년계획&gt;을 실제로 추진하는 산업 행정 전문가로서 만주에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기시는 이때 사실상 서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계획에 이를 실행할 경영자가 없다는 약점을 간파했고 관동군의 반재벌 성향에도 불구하고 수완을 발휘해 닛산의 아이카와를 불러 만주에 닛산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는 등 여러 업무를 처리한다.</div><div><em>&nbsp; &nbsp;</em></div><div>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초 만주 개발 5개년계획은 대 소련전을 위한 군수공업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이러한 전제가 무너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군수공업 건설에 전념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에는 ‘기존의 설비 능력에 의한 증산강행과 일본에의 수송 증가’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곧 계획에 있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기시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통제경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후 기시는 이 경제 신체제를 바탕으로 상공성의 최고 책임자로서 일본의 통제정책을 이끌게 된다.</div><div><strong>&nbsp; &nbsp;</strong></div><div><strong>산업합리화, 중요산업통제법</strong>&nbsp;</div><div>&nbsp; &nbsp;</div><div>기시는 만주경 영에서 통제경제를 중요 과업이자 목표로 삼았다. 앞서 언급했듯 기시는 자유경쟁을 경계했다. 1932년의 한 강연에서 기시는 이 법률의 바탕이 되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명확하게 밝혔는데 우선 기시는 “산업합리화운동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은 각자 자신의 기업 내부에 틀어박혀 서로 대립하는 자유경쟁이 아닌 다른 기업가와의 협조이다. 즉, ‘협조’ 혹은 ‘협동’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협조의 정신이 없는 사람은 산업합리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여,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을 비판한다. 또 기업들의 경쟁에 대한 거부감은 “경제 신체제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강연에서 그는 각 기업이 자사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대립과 마찰만이 커져 결국 그 산업 전체에 폐해를 가져올 것이라는 지론을 개진하고 있다. 또 앞서 언급한 기업 카르텔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산업통제법을 발의했다.</div><div>자유경쟁은 무모하고 부당한 경쟁이 되므로 해당 산업 전체의 공정한 이익이 침해받고 국민 경제상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위험성까지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권을 발동하여 산업 통제를 도모하기 위하여 통제협정의 효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 협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미 가맹자에게도 통제력이 미치게 함으로써, 당사자의 자치적 제재에 의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가맹자의 협정위반에 대해서도 국권을 발동하여 통제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산업합리화란 결국 하나의 국민경제를 경제단위로 하여 그 번영을 기하기 위하여 서로 협조해 가려는 운동인 셈이다. 따라서 각각의 구체적인 방법도 단일 기업 내부의 개선이 아니라, 산업부문을 넘어서 국민경제의 견지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국민경제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통제경제가 이상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시는 만주라는 정치학교에 입학해 그 훈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패전 후 기시의 모습</strong></div><div>&nbsp; &nbsp;</div><div>폐전 후 기시 노부스케의 생각과 그의 모습은 그가 스가모 형무소에서 작성한 일기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11월 3일 신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기시는 스가모 형무소에 있었다. 그는 그날의 일기에서 신헌법은 패전으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즉 헌법의 내용을 문제 삼기 이전에, 그 헌법이 패전 후 미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시 노부스케의 생각이었으며, 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익 정치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또한 1954년 기시는 ‘진정한 독립 일본을 위하여’라는 글 속에서 헌법에 대한 이러한 그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em>우리는 먼저 우리 국민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우리의 헌법을 가져야만 한다. 말할 것도 없이 헌법은 독립국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법이다. 현행 헌법이 점령 하의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며, 원문이 영어로 쓰인 번역헌법이라는 것은 오늘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헌법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은 동서고금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민족적 자신감과 독립의 기백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헌법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한 헌법 9조의 개정 문제만이 아니다. 민족의 혼이 표현된 헌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일본의 흙과 피에 연결되어있는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nbsp;</em></div><div>&nbsp; &nbsp;</div><div>한편 그는 제정과정을 문제시하는 개헌 논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개헌의 필연성을 자신의 역사 인식과 결부시켜 주장하고 있다.</div><div><em>&nbsp; &nbsp;</em></div><div><em>태평양전쟁을 통하여 미국당국은 일본군의 특공대가 상징하는 용감성과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높은 규율,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무사도 정신 및 국민의 고통과 결핍을 참는 높은 도덕적 수준에 경악했다고 추측된다. 그 때문에 점령 초기의 기본방침은 일본의 군사력, 공업력의 말살은 물론, 이러한 일본인의 정신 구조의 변혁, 즉 일본 국민의 기백과 도덕을 파괴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음에 틀림이 없다. 일본인의 복수심의 싹을 잘라내고, 일본인은 구 미인종에 비해 열등하다고 세뇌하여 현재의 패배와 고통은 모두 일본인의 불법적이며 무책임한 침략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천황의 권위의 부정에서부터 전쟁범 죄인의 체포, 신도 및 신사에 대한 공공자금을 통한 재정적 지원 금지, 나아가 가부키 추신구라(忠臣藏)의 상연금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국민 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강제, 간섭, 감시가 가차 없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집대성이 현재의 일본 헌법이다.</em></div><div>&nbsp; &nbsp;</div><div>헌법이라고 하는 것이 점령군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침략 전쟁을 했다고 스스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열등감을 세뇌하는 도구였다고 주장하는 이 문장에서 기시의 역사 인식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기시 노부스케에게 있어서 태평양전쟁은 결코 침략 전쟁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가 도쿄 재판에 임할 때의 심경에 대하여 “우리는 전쟁에 진 것에 대해 일본 국민과 천황폐하께 대한 책임은 있어도, 미국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러나 승자는 패자를 벌하는 법이며, 어떠한 법률을 가지고 벌하든지, 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개중에는 자신의 행동에 관해 침략 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로서는 궁지에 몰려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후세에 남겨 둘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그 재판에 임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 인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이 침략 전쟁을 하지 않았으나, 패전국으로서 미국의 전쟁 후 처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오히려 기시의 역사 인식에 의하면, 실제로 침략 전쟁을 행한 것은 영미 세력이었다. 즉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쓴 일기에서 태평양전쟁의 원인에 대해 “2세기에 걸친 선진국의 세계침략을 통한 기득권의 이익 확보를 목표로 한 세계정책이, 후진이 번성하는 민족에게 과한 고난, 이를 타파하려고 하는 후진이 번성하는 민족의 대두,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원인이다.”라고 쓴 것이다. 따라서 기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러한 침략 전쟁의 원흉인 영미 세력에 의한 도쿄재판은 “전승국의 패전국에 대한 일방적, 자의적인 제재이며, 어떠한 법이론적 근거도 없으며, 재판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시의 역사 인식과 헌법관은 전후의 우익정치가 기시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기시는 이와 같은 역사 인식과 헌법관에 기초하여 ‘미국 점령의 잔재 타파’, ‘독립의 완성’을 자신의 정치목표로 삼고 행동하게 된다.</div><div>&nbsp; &nbsp;</div><div>한편, 기시 노부스케의 옥중일기 전체에서는 ‘불안’과 ‘기대’의 정서가 공존했다. 태평양전쟁의 정당성 주장, 도쿄 재판의 부당함 비판, 스가모 형무소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A급 전범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기시에게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였다. ‘사형에 처해지느냐 석방되어 살아남느냐’라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 앞에서 기시는 심리적인 불안함을 감추지 않고 그의 일기에서 드러내었다. 그는 기소 여부와 관련해서 “이론상 기소에서 누락 될 리는 없겠지만”이라고 하며 기소 누락을 바라는 희망을 드러내었다.&nbsp;</div><div>&nbsp; &nbsp;</div><div>또한. 기시 노부스케는 스가모 형무소에서의 미군의 처우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내었다. 1946년의 일기에서 미군 장교가 수명의 간수를 거느리고 ‘벌거벗긴 후에’ 지정한 물건 이외 모든 물건을 밖으로 반출한 일이 있었다. 기시는 이에 대해 ‘특히 서적류의 제한, 문방구의 제한은 완전한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 감옥에서 경험한 미군은 ‘억압과 인권유린과 포학을 자연스럽게 행하는 비인도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도쿄재판의 논리에 불만을 갖고 스가모 형무소에서의 대우에 대해 비판적인 그의 모습은 패전국이 된 일본의 비운이라는 감정을 능가하는 강력한 반미감정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1940년대 후반 냉전의 기운이 서서히 강해지자 간접적이지만 미국과의 동거를 희망하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div><div>&nbsp; &nbsp;</div><div>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부당함과 자신의 처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스가모 형무소를 나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기시 노부스케의 불안과 함께 점차 증가했다. 이것은 ‘냉전’이라는 미소 양 진영의 대립이 서서히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일본의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동시에 일본과 자신의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8월 산책 중에 전범들 사이에서 ‘미소 대립을 일본 재흥의 호기로 보는 희망적인 관측에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말하며 ‘오랜만에 의기헌앙’의 기분이 되었다고 밝혔다. 석방의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희망의 빛 또한 1946년 여름부터 싹 트고 있었으며 그는 이런 정황들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div><div>&nbsp; &nbsp;</div><div>1947년 3월 트루만독트린, 6월 마샬플랜이 제시되고, 10월 소련에서 코민포름 설치가 발표되는 등 미소 냉전이 한창 가속화되어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냉전이라는 상황에서 일본이 수행해야 할 사명과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또한 점점 심각해지는 미소 냉전은 일본과 자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로서 매우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미국이 대일본 정책을 명확한 목표하에 다시 수립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하여 기대와 희망을 언급하는 동시에 기존의 미국의 대일본 정책이 ‘그 의의를 대부분 상실해 가고 있다.’라고도 언급하였다.</div><div>&nbsp; &nbsp;</div><div>또한 기시 노부스케는 ‘공산주의에 대한 감정적 증오감’이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라는 현실적인 위협 속에서 일본에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를 막을 수 있는 역할을 미국이 일본에 부여할 것을 촉구하는 심정을 일기에 표현하였다. 기시는 자신 내부에 혼란스럽게 얽혀있는 ‘반공’과 ‘반미’가 교착되어있던 상황이 거의 말끔히 정리, 해소되었으며 석방 후 기시가 취하게 될 정책에 대한 단서로 보이는 의식이 확인되었다. 즉, 기시 노부스케는 국제 정치의 변화를 이용하고 변화를 갈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반공 혐오’를 강조하며 일본의 사명과 개인의 안위를 위한 초석으로 삼고자 하였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기시의 전후 정치 기반</strong></div><div>&nbsp; &nbsp;</div><div>냉전 체제와 맞물려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 기시는 정치 무대에서 빠르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전전 군국주의 체제를 주도했던 기시가 어떻게 전후의 정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전전에서 이어지는 정치자금과 정치세력을 가장 큰 이유로 볼 수 있다.</div><div>&nbsp; &nbsp;</div><div>기시는 정계 실력자 중에서 재계와 가장 큰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nbsp;</div><div>&nbsp; &nbsp;</div><div>첫째, 기시는 전전에 당시 어떤 정부 부서보다도 재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은 상공성의 산증인과 같은 존재였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의 재계인 중에 상공성 관료 출신이 많았다는 점도 기시의 정치자금 조달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시는 제3차 하토야마 내각의 간사장으로 일하던 때를 회상하며</div><div>&nbsp; &nbsp;</div><div><em>“그 당시의 재계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朗)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 경단련 계통으로는 우에무라 고고로(植村甲午郞)였다. 나는 상공성에서 계속해서 근무했으므로 재계 쪽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편이었다”</em></div><div>&nbsp; &nbsp;</div><div>고 말하여, 자신의 정치자금 수집 능력의 원동력이 상공성에서의 경력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두 번째로 도쿄제국대학이라는 학벌이다. 기시의 라이벌이던 다른 파벌의 영수의 출신 대학을 보면,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쿄제국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기시는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재계인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에 가장 유리했다. 예를 들어 기시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동기생으로 기시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도이 마사하루(土井正治)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시와의 절친한 관계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는 1947년부터 스미토모화학의 사장으로 일하였으며, 1958년에는 경단련 부회장에 취임하였다.</div><div>&nbsp; &nbsp;</div><div>셋째, 죠슈번에 해당하는 야마구치현 출신 재계인의 지원이다. 미키 요노스케(三鬼陽之助)에 의하면, 기시가 관료로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데에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지만, 전후 스가모 형무소에서 나와 수상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데에도 역시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는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아이카와 요시스케, 스기 미치스케(杉道助)등을 필두로 한 야마구치현 출신 재계인들을 열거한 후,&nbsp;</div><div>&nbsp; &nbsp;</div><div><em>“하나의 현에서 재계에 이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은 거의 없다. (중략) 이 재계의 ‘돈줄’로 본다면, 단순히 출신 현만으로도 상당한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돈줄은 또 다른 돈줄을 파생시켜 새로운 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em></div><div>&nbsp; &nbsp;</div><div>라고 말하여, 기시의 정치자금 동원력을 설명하고 있다.</div><div>&nbsp; &nbsp;</div><div>정치자금뿐만 아니라 기시는 전전에서부터 호국동지회라는 정치세력의 영수였으며, 이것이 전후 기시의 정치활동에 큰 자산이 되었다.</div><div>&nbsp; &nbsp;</div><div><strong>기시의 전후 정치행태와 그로 인한 결과</strong></div><div>&nbsp; &nbsp;</div><div>앞서 설명한 기반을 통해 빠르게 전후 정치에서 입지를 다진 기시는 전후 정치에서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55년체제의 성립과 안보 개정에 의한 요시다 노선의 확립을 들 수 있다. 54년의 민주당결성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친 2단계의 보수합동 전 과정에 중심인물로서 참여한 것은 기시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수합동을 기시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한 기시가 요시다 노선 확립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60년의 안보 개정은 결과적으로 요시다 노선에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즉 55년체제와 요시다 노선이라는 전후 일본의 정치, 외교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는 데에 기시가 기여했다고 본다면, 기시가 전후 정치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는 크게 빗나간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시만이 전후 일본 수상 중, 유일하게 대중운동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nbsp;</div><div>&nbsp; &nbsp;</div><div>55년 체제라는 보수 정당의 황금기를 만들어내고, 일본의 빠른 발전을 만들어낸 요시다 노선의 확립을 가져왔던 기시가 대중의 반대에 의해 실패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일본의 전후 정치가 전전과 완전히 같지 않았음에도 그가 전전의 사고방식을 고수했다는 점에 기인한다.</div><div>&nbsp; &nbsp;</div><div>이러한 그의 모습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안’을 둘러싼 정치 공방과 안보 개정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58년 10월 7일이 각의에서 결정된 ‘경직법 개정안’은 경찰력을 강화하여 앞으로 있을 안보 개정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억제할 의도로 만들어졌다. 어떤 식으로 경찰력이 강화되는지를 알기 위한 예를 들면, 당시의 경직법에는 경찰관은 생명, 신체, 재산에 대한 위해(危害)가 절박한 상황에 한해 타인의 토지, 건물, 배, 자동차 등에 들어갈 수 있다고 되어있으나, 새로운 개정안에 의하면 공공(公共)의 안전 질서에 대한 위해가 절박한 경우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이처럼 ‘공공의 안전 질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찰관의 활동 내용과 활동 영역을 대폭적으로 확대한 것이 이 경직법 개정안의 골자였다. 경직법 개정안은 ‘점령 잔재 청산’이라는 기시의 정치목표에 부합되는 것이었으며, ‘사회공공의 법익 보호’를 부르짖는 기시의 발상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유경쟁 경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전전의 기시의 발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국회 논의에서도 “일부의 사람이 과도한 인권옹호를 주장하기 때문에 공공의 복지가 침해되는 것은 헌법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안은 이러한 선에서 제안된 것으로 결코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공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개인의 사상에 입각한 주장을 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전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 신문들은 일제히 이 법안에 대하여 반발했으며, 당시로는 전후 최대규모의 대중운동이 연일 벌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반대 논리는 ‘공공의 안전 질서’라는 개념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div><div>&nbsp; &nbsp;</div><div>경직법 개정안을 둘러싼 기시의 정치행태에는 전전의 기시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미 검토한 바 있는 전전 기시의 정치관과 이 경직법 개정안을 둘러싼 기시의 발언에서 나타나는 그의 정치관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신의 정책이, 의회의 실질적인 심의를 거치지 않고 효율적으로 시행되는 체제일 것이며, 그것은 전후의 일본보다는 전전의 만주, 군국주의 체제하의 일본에 보다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시의 정치관은 1959년에서 1960년에 걸친 안보 개정을 둘러싼 정치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안보 개정에서 가장 고생한 것은 당내조정이었으며, 다음이 미일 교섭이었다. 국회 대책 쪽은 어차피 야당은 반대할 테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데모도 극좌파가 선동한 일부 그룹이 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내기반을 굳건히 하여 대미교섭을 어떻게 추진해 나갈 것인가가 가장 큰 일이었다.”는 기시의 회상은 이 점을 확인시켜준다.&nbsp;</div><div>&nbsp; &nbsp;</div><div>그러나 전후 정치는 기시의 정치관이 통하던 전전 정치와는 달랐다. 결국 기시는 통치의 대상으로 여기던 국민의 역습을 받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한 정치인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서 퇴장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1960년의 격렬한 대중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시가 퇴장한 이후, 자민당은 더 이상 기시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우익적인 정치과제들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실질적으로 개헌을 포기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1960년 요시다 시게루의 적자인 이케다 하야토가 수상으로 등장한 이래, 일본은 소위 요시다 노선이라는 레일 위를 달리게 되며, 1960년까지 요시다 노선과 대결을 벌이던 ‘기시 노선’이라 명명할 수 있는 정치과제들은 냉전이 끝난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일본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시는 일본의 전후 모습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정치 행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의 전후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명확하다.</div><div>&nbsp; &nbsp;</div><div>마지막으로, 기시 노부스케와 요시다 시게루를 비교하며 마치고자 한다. 기시 노부스케와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노선을 재정비하고, 미국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일본 경제에 빠른 발전을 가져온 인물들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 둘의 대미정책에서는 일부 차이점이 존재한다.</div><div>요시다 시게루의 경우, 기본적으로 ‘요시다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외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는 미국의 재군비를 거절하고 안보 자체를 미국에 의지하여 빠를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노선을 얘기한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빠른 성장의 기반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미일 협정 내에서 각자가 동맹으로서 일본은 기지와 여타의 생산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의무의 개념으로 미국의 군사력을 지원받는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이러한 안보 조약을 기본 틀로 하여 내용 일부를 수정하게 된다. 신구 안보 조약의 주된 차이점은, ① 유엔과의 관계를 명문화, ②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명기, ③ 미군에 대한 기지 제공과 운용에서의 사전협의제도의 도입, ④ 경제적 협력 조항의 신설, ⑤조약 기한의 설정 등이다. 그중 가장 큰 특징은 상호 방위라고 하는 군사상의 의무를 일본 측이 짊어지게 된 점에 있다. ‘조약 구역’은 일단 “일본의 시정 아래에 있는 영역”이라고 여겨졌지만, 미군의 ‘주둔 목적 구역’은 “극동에서의 국제평화 및 안전 유지에 기여”이며, ‘행동 구역’에는 한정이 없다고 여겨졌기에 이후 미일 군사 협력의 확대를 낳게 된다. 일본은 기지를 빌려주고 미국은 군사력을 제공한다는 ‘물건과 사람과의 협력’이라는 기본적인 틀이 변화한 것은 아니나, 미국에 의무를 지게 하고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의무를 지게 됐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div><div>요시다 시게루로 시작하여 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지는 이러한 일본의 대미정책은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 일본 내에서 여러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나며 세부적인 내용이나 환경들에 변화들이 생겼지만, 현대 일본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입장과 정책에 대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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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2-06 17:35: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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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1205 더글러스 맥아더 발표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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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미국의 아칸소 주에서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남북전쟁, 스페인 전쟁, 필리핀 전쟁 등에 참전했던 아버지와 저명한 가문 출신의 어머니 아래에서 어릴 적부터 군사학와 관련해 다양하게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나는 읽거나 쓰기도 전에, 심지어 걷거나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 때와 거의 동시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도 뛰어난 인재였는데, 맥아더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주니어가 택사스 주로 배속된 이후 그는 명문 사립학교였던 서부 택사스 군사 중학교에서 100점 만점에 97.33점이라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더불어 맥아더의 어머니인 메리 맥아더 역시 아들을 출세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생 아들을 따라다니며 온갖 문제에 개입했고, 아들의 승진을 위해서라면 남편의 옛 부하였던 사람들에게 청탁 편지를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노력으로 테오발트 위원 추천서를 받아 맥아더는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에서도 2470점 만점에 2424.17점을 받으며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성적을 받으며 수석으로 졸업 후 공병 소위로 입대하며 1903년, 본격적으로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군인이 된 그는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활약을 펼칩니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1903년에는 필리핀으로 파병되었고, 1905년에는 태평양 지부의 수석 기술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의 보좌관으로서 일본 군사 소재지에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nbsp;</div><div>1914년 7월,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시기(1915년)에 맥아더는 소령 계급으로 승진하며 전쟁부로 부임했고 정규군 확대 및 방위 계획 수립에 참여하였습니다. 1917년, 미국 역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유럽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고 윌슨 대통령은 웨스트프론트 방위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맥아더는 주 편애 논란 방지 위해 여러 주 단위의 병대 파병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제 42사단 수석 참모로 프랑스 편에 파병됩니다. 그는 루네빌 지역에 진입하여 프랑스군과 진군, 다수의 독일군 포로 확보, 독일군 참호에</div><div>3차례의 선공을 감행합니다. 동시에 전선에서 부하들 직접 지위하며 아군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그가 군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공을 인정받아 수훈 십자상, 은성훈장, 프랑스의 무공 십자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수여받습니다.&nbsp;</div><div>&nbsp;전쟁이 끝나고 그는 자신의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의 졸업생들이 군사학 이외의 분야에는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육의 다양화를 추진하고 시스템을 현대화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는 1922년에 생도 명예 규정을 제정하며 기초군사훈련을 고학년생도가 아닌 현역 장교가 담당하도록 변경합니다. 그의 노력으로 웨스트포인트 학교의 학생들은 최신 무기 조작법 등의 현대적인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 최신 전쟁사 등 다양한 교양 과목까지도 수강할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의 교육 개혁은 교수진과 동문의 반발로 임기 종료 후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이후 폭넓은 지지를 받아 다시 복구되었다고 합니다.&nbsp;</div><div>&nbsp;1922년, 맥아더는 사회운동가이자 재벌가 출신이었던 루이즈 크롬웰 브록스와 결혼합니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순종적인 며느리를 원했기에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고 사회운동을 하며 드센 성격이라고 여겼기에 반대했고 그녀를 탐탁지 않아했고 크롬웰 가문 사람들 역시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의 맥아더가 자신의 가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와 루이즈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결혼 후 그는 루이즈와 루이즈의 두 자녀와 함께 마닐라의 군대 지휘권을 얻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필리핀에서 그는 제23보병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25년에는 44세의 나이로 육군 최연소 소장으로 진급하여 조지아 애틀란타의 4군단지역을 지휘합니다. 1927년에는 올림픽위원회의 윌리엄 프라우트 단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올림픽을 위해 미국팀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미국팀은 본 올림픽에서 24개의 금메달을 따고 17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후 1930년에는 최연소의 나이로 미 육군 대장으로 승급하여 샌 프란시스코와 9군단 지역 지휘부를 이끌었고 같은 해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nbsp;</div><div>&nbsp;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선언 후 약 2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때의 맥아더는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으로부터 요청받아 필리핀 연방 정부의 군사고문 겸 원수로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1941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는 퇴연 장군을 동원 소집하며 맥아더를 국동군미 육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대장으로까지 승진한 맥아더는 일본 제국과 외교 협상에서 실패한 이후 일본의 선제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 발발 시 필리핀 주둔군은 마닐라만에서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본토에서 파견된 지원군을 대기하며 일본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는 것을 계획을 삼았지만, 맥아더는 필리핀 해안지역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공군력으로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에서 해군과 공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밀리고 일본군의 상륙을 해군으로 저지하려 했던 계획이 실패하여 전력의 지나친 분산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던 맥아더가 전사하면 미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을 걱정한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호주로 퇴각 명령을 내리고 맥아더는 급히 탈출합니다. 맥아더의 초기 방어작전 실패로 맥아더에게는 필리핀 패망에 대한 큰 책임이 있었지만, 별다른 지원 없이도 일본군에 항쟁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이와 더불어 맥아더는 남서태평양지역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며 전쟁을 이어나갑니다. 1944년, 맥아더는 미국 내에서 영웅으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 공화국의 보수파 세력은 그를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리려고 하였으나 맥아더는 필리핀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결정합니다. 같은 해 루스벨트는 일본에 대한 공세 순서 결정을 위해 하와이로 맥아더를 소환합니다. 당시 니미츠 제독은 대만 공략을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필리핀을 해방하여 미국의 도덕적 의무를 완수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후 윌리엄 홀시 제독이 필리핀을 공습했으나 적의 반발이 미약하자 홀시 제독은 필리핀 동쪽에 위치한 레이테 만 공격에 찬성하고, 루스벨트 역시 필리핀 탈환 추친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필리핀 탈환 작전이 시행되자 일본군은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결국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의 해상 병력은 궤멸하며 미군이 레이테 만을 정리하게 됩니다. 필리핀 탈환 최후의 일격의 몰락 직전에서 맥아더는 제20공군을 제외한 태평양 전 육공군부대를 지휘하며 활약을 펼쳤고 그런 과정 속에서 미국의 일본을 향한 원자 폭탄 투하로 일본은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1945년,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도 마무리를 짓게됩니다.&nbsp;</div><div>&nbsp;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은 연합군의 감시 체제 아래에 있게 됩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의 이 시기를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라고 칭합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주둔하였는데, 맥아더는 육군 원수로 최소 사령관 자리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지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맥아더는 워싱턴 대통령으로부터 명을 받아 일본에 주둔하며 엄청난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명목상 일본 정부는 존재했었지만, 일본국 헌법 또는 내각총리대신보다 최고사령부였던 맥아더의 명령이 더욱 강했기 때문에 정부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이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침략 전쟁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도쿄 재판이 열리고 당시 수상이던 도조 히데키를 포함해 28명의 전쟁 범죄자가 기소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쇼와 천황은 기소되지 않습니다. 이 배경에는 맥아더가 있었는데, 그는 쇼와 처황을 처벌을 가하기보다 오히려 친서구적 온건파라며 천황을 보호했다. 동시에 천황의 신성성을 떨어뜨리려 했는데 일례로 천황과 맥아더가 함께 찍은 사진을 신문 기사로 퍼뜨린 일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그 사진은 자신이 신처럼 믿고 따르던 천황이 맥아더에게 불려가 양복을 입고 긴장된 자세를 잡고 있지만 맥아더는 그저 편한 차림의 육군 근무복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일본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된 것입니다. 맥아더는 일본인들이 평소 믿고 따르던 천황의 신성성을 억제해 전쟁의 재발을 막으려는 목적이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천황보다 더 높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맥아더 숭배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 증빙하듯이 맥아더가 일본에서 국민들에게 받은 편지만 하더라도 약 45만 통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하는 기간동안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민주주의 도입, 토지 개혁, 국군주의 근절 등 다양한 체제를 정비하기도 합니다. 1946년, 맥아더와 GHQ는 천황의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는 ‘일본국 헌법’을 제정합니다. 일본국 헌법 제1조에서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 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라는 대일본헌법의 제1조 내용과 천황을 그저 일본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 외에도 이 헌법에서는 남녀평등법을 통해 여성 인권을 보장하고, 지방 정부 분리화, 기본권을 보장하는 등 근대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일본인들은 맥아더를 푸른 눈의 쇼군(青目の将軍), 외국인 천황(外国人天皇) 등으로 부르며 그가 일본을 떠날 때까지 숭배합니다. 이후 1948년,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게 다시 권력을 넘겨주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 주둔을 종료합니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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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221205 더글러스 맥아더 발표문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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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다음은 한국전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div><div>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국 측의 수뇌부인 미국과 영국, 소련 세 나라는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얄타 회담에서 전쟁의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해진 38선은 원래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된 군사 분계선이었으나, 각각 북측은 소련, 남측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현재의 남북 분단의 정치적 분계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유엔의 주도 하에 한반도의 총선거가 이루어질 뻔 했으나, 북한에서는 공산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아 남한의 단독 선거만이 이루어졌고, 이승만을 내세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곧 북한에서도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부터 북한은 전쟁의 낌새를 보여왔습니다. 3월에 김일성과 북한의 핵심 인물들은 소련을 방문해 남한의 공격에 대한 동의와 긴밀한 협력을 약속 받았으며, 중국의 공산당과도 만나 남침에 대한 동의, 조선인 부대의 귀국과 보급품 공급 등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후 소련과 미국이 각각 남한과 북한에서 철수하고,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자 북한은 6월 25일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애치슨 선언은 애치슨 라인을 기준으로 방위선 밖의 국가는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된다는 선언으로, 한 마디로 선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돕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남한은 이 선에서 제외되었습니다.</div><div>당시 국력과 국방이 매우 약했고,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던 국군은 갑작스러운 북한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유엔은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며 남한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고, 최초로 유엔 연합군을 조직했는데 이때 최고 사령관으로 맥아더가 발탁되었습니다. 맥아더는 한국 전쟁에서 미군의 지휘관이자 유엔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개전 당일부터 한국군을 지원했습니다.&nbsp;</div><div>&nbsp;</div><div>유엔군이 지원을 왔지만 이미 북한으로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맥아더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상륙 작전을 펼칠 지역의 후보는 인천 뿐만 아니라 전라도 군산, 강원도 주문진, 그리고 평택의 포승면 등 여러 곳이 있었으나 맥아더는 인천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심한 조수간만의 차, 깊고 넓은 갯벌 등 여러가지 지형적 이유 때문에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며 합동참모본부조차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항구 중의 하나이고, 상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 작전이 낙동강까지 떨어져 있는 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북한군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인천 상륙 작전을 단념시키기 위해 육해군의 참모총장들이 맥아더를 찾아가 군산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맥아더는 인천의 많은 약점을 극복하고 거꾸로 역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그들을 설득했습니다.&nbsp;</div><div>“성공확률 1% 미만의 엄청난 도박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나는 적을 격파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nbsp;</div><div>맥아더의 이런 열정과 자신감으로 그는 반대하던 합참과 트루먼 대통령 등 여러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해 마침내 상륙 작전을 최종적으로 수락받았습니다. 그가 끝까지 인천을 고집하던 이유는, 인천이 바로 수도인 서울의 관문이자, 경제와 교통, 그리고 보급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준비기간은 불과 23일로, 미군이 아무리 화력과 기동력에서 우세했다 하더라도 맥아더의 우수한 전략과 실행력이 아니었더라면 이와 같은 결과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고 유엔군과 국군은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 북한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우려해 38선을 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맥아더는 미국의 이러한 입장과 달리 38선을 돌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 대부분을 탈환해 압록강까지 이르렀습니다.&nbsp;</div><div>&nbsp;</div><div>그러나 맥아더의 오판으로 중공군에 밀려 다시 후퇴하는 등의 위기를 겪고, 핵무기 사용이 전쟁에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해 만주에 핵폭탄 사용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트루먼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된 맥아더의 반항에 인천 상륙 작전이나 38선 돌파 등 정부의 입장과 계속해서 반대되는 행보를 취한 맥아더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하여, 1951년 4월 맥아더는 72세의 나이로 군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맥아더의 해임에 관해서는 뒤에 추가적으로 설명을 하겠지만, 유럽의 안보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 욕심을 내던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div><div>맥아더는 국내에서는 군인으로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1944년과 1948년 대통령 선거를 놓친 맥아더는 1952년의 선거를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1950년 여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일본에서 시들고 있던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금 사람들에게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이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였습니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며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서 정치인과 대중들에게 유례없는 열광적인 성원을 받았으나, 한국전쟁때 범했던 실수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는 사건 등으로 인하여 미국 내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맥아더는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치에 대한 그의 꿈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맥아더의 정치적 인기는 완전히 쇠락하였고, 그가 사망하는 1964년까지 그의 이름은 대통령 후보 대열에 다시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div><div>&nbsp;</div><div>국내에는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는 여론이 절대적이지만, 맥아더는 사실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모순적이고도 양면적입니다. 그의 부관이었던 케니 장군은 맥아더를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장군”이라 단정했고, &lt;미국의 시저&gt;의 저자인 맨체스티는 맥아더에 대한 평가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이 나라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천재 군인”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던 루즈벨트는 맥아더를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했고,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에 대한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맥아더의 장례식에는 수십만 명의 애도 행렬이 이어졌을 정도로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이 둘은 조문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 샬러는 맥아더를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라고 언급했으며, 높이 평가되는 맥아더의 군사적 업적도 객관적으로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미국의 거인이었으며, 상충적인 것과 모순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던 신화적 존재”로서, “사려 깊은 지성인, 자아 중심적인 군인이었고, 권위적이면서 민주주의 신봉자이며 타고난 연설가” 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맥아더의 평가가 다양한 것은 그의 역할의 이중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정복자인 동시에 해방자였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아시아인과 전쟁을 치룬 점령자인 동시에 아시아인의 해방자이기도 하였고, 일본군을 필리핀에서 추방하고 일본을 패전국으로 몰아갔지만 군국주의로부터 일본을 해방시킨 해방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중적인 그의 역할과 행동은 양면적이고도 이중적인 무수한 평가를 낳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그를 바라보는 입장과,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게 됩니다.</div><div>&nbsp;</div><div>국내에서도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변화하였는데요, 여전히 그를 영웅처럼 칭송하는 의견이 대다수이긴 하나 과거에는 현재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 더 나아가 신처럼 떠받들곤 했습니다. 1988년 인하대 정치외교학과의 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인천 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맥아더가 20.3%를 얻어 1위를 차지했으며, 과거 무당들 중에서는 맥아더 장군상을 모셔 놓고 신으로 섬기는 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nbsp;</div><div>맥아더는 사실 한국전쟁 이전부터 한국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실권을 장악했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지역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맥아더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데에도 직접적이진 않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1948년 8월, 그의 첫 한국 방문이자 한국전 이전의 유일한 방문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서울대학 제1호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나와 조선의 관계는 매우 깊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의 부친은 조선 고종황제로부터 청동제 화로를 받은 적이 있었으며 나 자신은 1905년 당시에 연락장교로 조선을 방문한 일도 있었다.” 는 말과 한국에 대한 관할권이 없을 당시에도 이승만에게 자신 있게 “나는 남한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남한을 미국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하겠다” 등의 말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지켜준 전쟁 영웅이자 남한과 우호적 관계를 쌓았던 맥아더는, 그가 쓴 회고록의 번역본이나 위인전 등 국내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출판을 통해 영웅적 이미지가 강화되었습니다. 모든 작품들이 맥아더의 영웅적 서사를 반복해 재생산했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논쟁과 비판이 거세된, 영웅 맥아더만이 남게 되었습니다.</div><div>영웅 맥아더가 국내에서 위상이 흔들리게 된 계기는 2003년 MBC의 시사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맥아더와 한국전쟁’ 1,2부였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맥아더의 모습을 역사가, 한국전 관련 공문서, 그리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재적 군사 전략가와 오만하고 독선적인 장군의 양면적인 모습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를 기리기 위해 인천의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의 철거 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맥아더가 미국의 이익, 혹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가지고 있던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잘못된 북진 전략으로 1.4후퇴를 불러온 실질적 장본인이며, 중국군의 개입으로 어려워진 한국전 전황을 뒤집기 위해 세운 핵무기 사용 전략은 한반도 거주민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라며 비난했습니다.&nbsp;</div><div>&nbsp;</div><div>그러나 핵무기 사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트루먼과 맥아더의 대립과, 이로 인한 맥아더의 해임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최근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그동안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를 종합해보면 트루먼 정부는 “언제나 핵무기 사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하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등 먼저 핵무기 사용을 주도했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부정적 견해를 가졌었다고 합니다. 또한 맥아더의 해임 나흘 전인 4월 7일 트루먼 대통령이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건의에 따라 “핵무기를 괌으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통해, 핵무기에 관한 대립으로 그를 해임했다는 사실은 옳지 못한 주장이며, 그의 오판으로 인한 전세 악화, 정치적 경쟁 등으로 인해 해임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div><div>&nbsp;</div><div>&nbsp;<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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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12-06 19:44: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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