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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도 by 송은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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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전 세계 어디에서나 게시</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4-05-20 00:56: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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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기도 용인시</title>
         <author>skywithstars79</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200526</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김윤후는 고려 고종 때의 승려로 원나라에 맞서 싸운 승려 출신 장수이다. 1232년 몽고가 침입해 처인성을 공격하자 몽고 장군 살리타이(散禮搭)를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몽고군이 다시 침입하여 성을 포위했지만, 백성들과 힘을 합쳐 70여일 간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함께 싸웠던 백성들은 주로 천민들이었는데, 이들을 사기를 높이기 위해 종문서(노비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후에 조정에서는 이들의 신분을 해방시키고, 그를 감문위상장군에 임명하였다.</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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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1:11: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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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김포</title>
         <author>by244108</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497707</link>
         <description><![CDATA[<div>조헌선생님<br><br>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1587년 정여립과 이산해의 도리에 어긋남을 논박하는 소를 올려 국왕의 분노를 일으켜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에서 후율정사라는 서실(책을 갖추어 두고 글을 읽거나 쓰는 방)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을 지켰다. 그러나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해산당하여 얼마남지 않은 병력으로 금산에서 전투를 하다가 전사하였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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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08: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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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title>
         <author>by244104</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2256</link>
         <description><![CDATA[<div>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역사가, 만화가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 재학중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함께 하여 도우며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연락, 통지)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살이를 하는 고생을 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강령(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열렬히 높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시작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경찰서에 옥에 갇혀 고생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곧 탈퇴하였으며 그해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제 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북한으로 납치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div><div>참고자료</div><div><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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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2: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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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title>
         <author>by244112</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4007</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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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4: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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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Pyeongtaek-si, Hyeondeok-myeon, Gwongwan-ri, 평택농악마을</title>
         <author>by244102</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5580</link>
         <description><![CDATA[<div>경기도 평택지방에서 전승되는 농악이다. 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요하여 평택지방의 농악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더욱이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평택 농악의 특징은 쇠가락으로 길군악칠채가 다른 지역과 구분되며,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다. 또한, 잡색(雜色) 중에는 대포수가 빠지고 무동(舞童)과 사미·양반 등이 있는데, 특히 무동의 수가 많으며, 판굿에 있어 진(陣)풀이는 사각행진놀이와 당산벌림과 같은 ㄷ자형 놀이가 있고, 노래굿이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평택농악은 1985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기예능 보유자로는 김용래(金龍來)가 있다.<br><br>참고링크</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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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5: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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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재홍</title>
         <author>by244116</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5746</link>
         <description><![CDATA[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역사가, 만화가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 재학중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함께 하여 도우며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연락, 통지)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살이를 하는 고생을 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강령(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열렬히 높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시작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경찰서에 옥에 갇혀 고생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곧 탈퇴하였으며 그해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제 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북한으로 납치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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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6: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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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 고덕면 Yeoyeom-ri, 황금옥</title>
         <author>by244115</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8429</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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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7: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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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Pyeongtaek-si, Seodong-daero, 평택대학교</title>
         <author>by244118</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9406</link>
         <description><![CDATA[<div>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다. 1605년(선조 38)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11년 정인홍의 회퇴변척(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에 분노하여 정인홍을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서다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에 가평 잠곡에서 숨어 지내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도사, 병조좌랑, 안변도호부사, 동지성절천추진하사 등을 두루 지냈다. 1649년 우의정이 되어 대동법(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으나 반대파 김집과의 불화(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겪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충청도에 시행하였다. 1657년 전라도에도 대동법의 실시를 확대하고자 건의하였으나 실행되기 전에 죽었다. 저서로는 &lt;잠곡유고&gt;, &lt;잠곡별고&gt;, &lt;잠곡속고&gt;, &lt;유원총보&gt; 등이 있다. 선생의 생애는 나라 안으로는 임진·병자란을 겪은 후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진 농업경제의 정비와 고갈된 국가 재정의 재편성을 해야했던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밖으로는 명(明), 청(淸)나라 교체기에 놓여 있어 미묘한 정국을 요리해 나가야 하는 복잡한 시기였다. 더욱이 청(淸)나라에 지배를 받아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 효종(孝宗)은 북벌(北伐)을 꾀하는 한편 안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뼈대있는 집안의 후예라는 긍지와 뛰어난 기품으로 가난했던 가정형편 속에서도 학문에 열중하여, 후에 경제사상의 주축을 이루었다고 이르며, 또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의 근본정신인 민본사상(民本思想)의 기틀이 잡혔다고 평가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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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8: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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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Pyeongtaek-si, Gyeonggi-daero, 평택시청</title>
         <author>by244120</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9776</link>
         <description><![CDATA[<div>평택 팽성읍 안정리 출생의 독립운동가이다. 14살에 3·1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흑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33년에는 흑우회 단원들과 주중일본공사 암살계획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첩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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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8: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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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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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남양주시</title>
         <author>by244111</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09866</link>
         <description><![CDATA[<div>정약용&nbsp;<br><br>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사회에 대한 실용적 관심에 토대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며 당시의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천주학)에 관심을 가졌다. 1789년(정조 13)에 식년문과에 합격하였으며 1792년(정조 16) 홍문관수찬이 되어 축조계획 중이었던 화성을 설계하였고, 화성 건설을 위한 다양한 기계를 발명하였다. 거중기와 활차 및 녹로(도르레)를 만들어 작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움직일 수 있게 하여 화성을 쌓는 건설기간을 2년9개월로 단축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흠흠신서」 30권, 「경세유표」 49권, 「목민심서」 48권 등을 저술활동을 하며 정치ㆍ경제 등 제도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권의 광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의 실학사상은 오늘날 학문이 실제 생활에 이용되어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의 실천으로 생활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널리 높이 받들고 있다. ㄹㅇㅋㅋ</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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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8: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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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title>
         <author>by244109</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10514</link>
         <description><![CDATA[<div>평택농악 상쇠 기능보유자로, 평택 팽성읍 원정리 출생이다. 1980년 평택농악단을 이끌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평택농악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데 힘썼으며, 상쇠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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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19: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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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연천군</title>
         <author>by244111</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15300</link>
         <description><![CDATA[<div>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1657년(효종 8)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예송논쟁(조선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중에 상복을 입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으로 인해 낮은 관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가 2년 뒤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며 연천에 돌아갔고, 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우의정까지 올랐다. 같은 해, 유배 중인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은 다시 분열되어 허적은 탁남, 허목은 청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2년(숙종 8) 87세로 세상을 떠났고, 미강서원과 미산서원, 회원서원에 모셔져 제사를 지냈다. ㄹㅇㅋㅋ<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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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2: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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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Anseong-si, Gongdo-eup, Daesindu-gil, 안성 팜랜드</title>
         <author>by244110</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20189</link>
         <description><![CDATA[<div>송문주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원나라가 침입했을 때 박서와 함께 원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1236년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전략을 파악하고 공격에 대비하여 15일간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였다. 성내의 사람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으며, 죽주성을 방어한 공로로 좌우위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탁월한 지략을 갖춘 장군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현재도 안성시 이죽면 매산리의 죽주산성 안에는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송문주사당’이 남아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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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6: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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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시</title>
         <author>by244106</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20639</link>
         <description><![CDATA[<div>정도전</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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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6: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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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Pyeongtaek-si, Seodong-daero, 평택대학교</title>
         <author>by244122</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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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김육</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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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6: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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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광주시</title>
         <author>by244121</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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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서유견문'을 저술한 사상가이자 정치인이다. 1870년 박규수에게 실학사상을 배우면서 해외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어 일본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귀국하였고, 이후 '한성순보'의 실무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883년 7월에는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884년에는 미국의 담머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에 귀국하였는데, 갑신정변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개화파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이후에는 1892년까지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하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기도했으니 실패하여 유폐되기도 하였다. 학교, 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 발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연금기간 동안 집필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국문에 한자를 섞어 쓴 글체)로 서술되었으며, 서양의 근대문명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그렇지만 서양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의 주장을 담아 서술하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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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7: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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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시</title>
         <author>by244123</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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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정도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1375년 권신(권세를 잡은 신하) 이인임 등의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83년 9년간에 걸친 유배생활을 끝내고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었다. 1388년 밀직부사로 승진해 정치개혁안을 건의하고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말에서 떨어진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죄가 있음을 꾸짖음)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조선 개국 일등공신으로서 주요 관직을 두루 지내고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였다. 1398년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고,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다. 정치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단을 일부 포용하는 민족의식적인 성격을 띠었다. 저서로 &lt;경제의론&gt;, &lt;감사요약&gt;, &lt;고려국사&gt;가 있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으며, &lt;문덕곡&gt;, &lt;몽금척&gt; 등의 작품과 &lt;삼봉집&gt;이 전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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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29: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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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성남시</title>
         <author>by244108</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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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강정일당]]></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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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0: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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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남양주시</title>
         <author>by244115</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28499</link>
         <description><![CDATA[<div>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후기 고종황제의 아버지이다. 1863년 제25대 철종이 대를 잇는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정왕후 (헌종의 어머니)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대원군에 봉해졌다. 대원군은 과감하게 정치개혁을 진행하여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과 각 지역의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을 막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키는 등의 개혁도 진행하였다. 세제 개혁 또한 진행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권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경복궁 중건 사업을 무리하게 펼치면서 오히려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천주교 탄압과 함께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면서 강력한 대외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1866년 프랑스군의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군의 신미양요에 승리하였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였다. 명성황후(明星皇后)와의 대립으로 1873년에 물러난 이후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천진(天津)에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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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2: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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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시흥시</title>
         <author>by244111</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28850</link>
         <description><![CDATA[<div>하우명은 일찍 죽은 두 형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묘소에서 3년간 시묘(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삶)하였으며, 손수 조리한 찬을 상에 올려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는데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정성을 다해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1483년(성종 14)에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각(정자)을 세워서 잊지 아니하고 일컬었고 호세(戶稅, 호별세금)를 면제해주어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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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2: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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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파주</title>
         <author>by244116</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28952</link>
         <description><![CDATA[<div>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을 무력으로 물리친 명장이다. 1103년 여진족이 고려를 공격하자 윤관은 여진을 무력으로 물리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윤관은 별무반(여진 정벌을 위하여 기병을 중심으로 만든 군대)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했고, 1107년 17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 되어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9성을 쌓아 방어를 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이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은 끊임없이 9성에 대하여 공격을 하는 동시에 강화(싸움을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고자 함)를 요청해왔고, 조정에서는 9성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동북면의 영토 회복을 위한 윤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더욱이 돌아오는 도중에 파면(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나 직업을 그만두게 함)을 당하고, 1111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죽은 후 예종은 문숙공이라는 시호(재상이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내리고, 1130년에는 예종의 묘정(종묘와 명당)에 모셔지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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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2: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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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고양시</title>
         <author>by244117</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31882</link>
         <description><![CDATA[<div>권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방어사 곽영과 함께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명나라 지원군과 합세하여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때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명나라 지원군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크게 승리한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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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4: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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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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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과천시</title>
         <author>by244111</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32735</link>
         <description><![CDATA[<div>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이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중국 청나라 때, 고서 연구의 방법으로 일어난 학문)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유학의 경서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문자가 새겨져 있는 종이나 비석, 금속 같은 문화 유물을 연구하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학문에 늦게 종사한 후진의 학자)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또한 연경에 가서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손수 쓴 글씨를 감상하면서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어떤 사물의 진위나 가치 따위를 알아내는 방법)과 서도사 및 글씨 쓰는 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글씨를 쓰는 올바른 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글씨를 쓰는 일정한 격식이나 양식)를 따라 배우면서 여러 서체를 익혔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조선 말기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또한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과 평론(예술 작품이나 문화 현상 따위에 대하여, 그 가치, 우열, 미추 따위를 논하여 평가함)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손수 쓴 글씨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는데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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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5: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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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평택</title>
         <author>by244116</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33256</link>
         <description><![CDATA[<div>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그는 지치주의(至治主義,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는 것)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힘주어 말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향촌의 서로 돕는 일을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조선 시대, 국가적인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의 폐지를 강력히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여 성공하였다. 한편으로 현량과(조선 중종 때 조광조 등의 제안으로 실시된 관리 채용 제도)를 처음 실시,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고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 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세력(대대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가 있는 집안 세력)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고 이에 유배되었다. 그가 죽은 후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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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5:5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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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South Korea, Gyeonggi-do, 파주</title>
         <author>by244113</author>
         <link>https://padlet.com/skywithstars79/fy2wz8tmxykjya4a/wish/2999533308</link>
         <description><![CDATA[<div>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을 무력으로 물리친 명장이다. 1103년 여진족이 고려를 공격하자 윤관은 여진을 무력으로 물리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윤관은 별무반(여진 정벌을 위하여 기병을 중심으로 만든 군대)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했고, 1107년 17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 되어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9성을 쌓아 방어를 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이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은 끊임없이 9성에 대하여 공격을 하는 동시에 강화(싸움을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고자 함)를 요청해왔고, 조정에서는 9성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동북면의 영토 회복을 위한 윤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더욱이 돌아오는 도중에 파면(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나 직업을 그만두게 함)을 당하고, 1111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죽은 후 예종은 문숙공이라는 시호(재상이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내리고, 1130년에는 예종의 묘정(종묘와 명당)에 모셔지게 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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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4-05-20 04:35: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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