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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626 표혜령 by 표혜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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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주지원, 박서진, 이하진, 김범준, 천상영</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2-06-23 06:35: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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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 공화정이 뭘까? : 2623 주지원</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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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로마 공화정이란?<br>기원전 6세기 로마 전빈기에 인이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로마 공화정 체제는 통령과 원로원과 평민회 중심이었다. 로마 공화정을 움직인 정치 기구는 군대를 지휘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집정관(통령)은 2명이었고임기는1년이었다. 외교와 재정 문제 및 집정관에 대한 자문담당인 원로원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체제로 권력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관리 선출과 입법, 재판 및 국가 주요 정책 등을 결정하고 호민관을 선출하는 평민회로 이루어져 있다. 제1 · 2차 삼두 정치를 거쳐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제정을 실시함으로써 공화정은 끝이 났다.<br><br>호민관이란 무엇일까?<br>호민관이란 로마 공화정 시대 때 평민의 권리를 옹호하던 관직이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되어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정무관이나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호민관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합의제로 운영되었고 그 신체와 생명은 불가침이었다. 호민관의 권한과 기능은 평민 세력의 신장과 더불어 강화되었다. 호민관의 원명은 tribunus plebis로 뜻은 '평민의 우두머리'이다<br><br>호민관을 선출하는 과정은?<br>평민회에서 선출되며 평민 계급을 대표한다. 오직 평민만 선출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선거에 10명이 선출되었고 신체에 대한 신성불가침권을 가지며, 민회를 통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고, 원로원의 결의에 거부권을 가지는 등 매우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호민관으로 선출되면 다음에 원로원 의원 후보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법무관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얻게 된다. 호민관 바로 위의 법무관 때부터 총독의 직무가 주어졌고 또한 때때로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호민관의 직위는 상당히 높은 자리였다. 따라서 호민관까지 올라갔다면 입신출세를 어느 정도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br><br>호민관의 유래<br>호민관이 생기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로마가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던 시절 귀족에겐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 평민은 이러한 권력을 누릴 수 없었고 귀족은 평민들을 부려먹고 이들을 구타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평민들의 권력이 커지자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는데 호민관은 이러한 구타를 막을 권한이 주어지게 된다. 이는 거부권이 된다. 그러나 이 권한을 행사하다 호민관도 같이 얻어맞는 일이 생기자 평민들은 호민관이 얻어맞으면 안 되는 권한을 요구하였고 이로써 신변불가침권을 받게된 것이다.<br><br>12표법<br>12표법은 기원전 450년경 로마에서 제정된 최초의 성문법이다. 로마법의 기초를 이룬 고대 로마의 성문법으로 법 지식과 공유지 사용을 독점해오던 귀족과 평민의 투쟁의 결과이다. 그전까지는 귀족과 사제 계급이 관습법의 해석과 운용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평민의 불만과 저항이 고조되자 지배층에서는 평민과의 타협책으로 관습법의 일부를 성문화하였다. 그리하여 평민 또한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2표법 역시 귀족 계급의 주도로 만들어져 여전히 평민의 불만을 샀다. 이후 12표법은 로마 법률 제정에서 귀족과 평민의 권리를 조화시키는 기본 모델 역할을 하게 된다.12표법은 후에 전공사법(全公私法)의 원천이 되었다.<br><br>리키니우스법<br>고대 로마 법률의 하나로 기원전 367년에 호민관이던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 두 사람이 제안에 따라 성립된 법률을 말한다. 이 법에는 세 가지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 첫째는 이전까지 국정을 담당하는 최고 관직이었던 트리부누스를 폐지하고 두 명의 콘술, 즉 집정관과 한 명의 법무관을 설치하되 콘술 중에서 한 명은 평민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최초로 평민에게 최고 관직의 길을 열게 된 계기다. 둘째는 부채에 관한 것인데, 부채의 상환은 3년 분할 지급으로 하고 이자는 원금에서 공제하여 지불해도 좋다고 한 내용이다. 셋째는 농지에 관한 건데 공유지 선점을 한 명당 500유게라(약 125헥타르)로 제한하고 공유 목지에 방목할 수 있는 가축 수도 한정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리키니우스법은 귀족과 평민 신분의 정치적 평등을 도모하고 경제적으로는 빈부 격차를 줄이는 데 목적이 있었다.<br><br>호르텐시우스법<br>기원전 287년, 귀족과 평민과의 싸움(성산 사건)을 조정하기 위하여 '퀸투스 호르텐시우스(Quintus Hortensius)'가 독재관으로 뽑혔으며, 평민 출신인 독재관인 그가 제정한 법이다. 이전까지 로마에는 전체 시민의 민회와 귀족만을 위한 민회가 있었고, 일반 시민은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 호르텐시우스 법에 따라 평민 회의의 결정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모든 시민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졌다. 원래 로마의 입법체계는 무조건 원로원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원로원의 입법권 독점으로 인한 평민 계층의 불만이 높아지자 평민들은 야니쿨롬(Janiculum)에서 농성한 결과로 만들어 졌다. 이 법으로 공화정 시기에 계속 대립해 온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 투쟁이 법제상으로 종결되었다.</div><blockquote>로마 공화정, 로마의 정치기구와 법률을 알아보면서 평민들이 귀족들과의 권리가 동등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이 마치 일제강점기 시대때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일본과 조선의 관계로 느껴졌는데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항상 조선이 을이었으며, 일본에게만 이득인 법들만을 제정해왔지만 귀족은 평민의 의견들을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반영해주는 것을 보며 같은 갑의 위치이지만 일본과 로마의 귀족들은 확연히 다르다고 느꼈다.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흑인의 인권을 찾기 위해 비폭력 평화시위를 주징한 마틴 루터킹과 같이 어떤 나라던 자신이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있으면<em> </em>직접 나서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모습들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em>교과서에서는 겉핥기 수준에 내용만 기재되어있어서 공부를 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 활동을 통해서 자세히 탐구할 수 있었고 로마의 법들을 로마의 법으로만 끝내는게 아닌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지어 생각해본다거나 다른 나라 역사 중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을 연관지어 생각하다보니 머릿 속에 더 잘 기억 되는 것 같다.</em></blockquote>]]></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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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6-23 06:52: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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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2404 김범준)</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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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혼란을 거쳐서 로마에 궤도에 올린 첫 황제&nbsp;<br>옥타비아누스의 이야기이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충실했던 부하 안토니우스가 잠깐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빠져 자기의 나라인 로마를 등 돌리게 된다. 카이사르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처벌해달라 한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카이사르 사후의 공개되었다.<br>이것을 알게 된 안토니우스는 배신감을 느껴 로마를 상대로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군과 싸우게 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해전에서 물리치고 클레오파트라를 생포하기 위해 도착하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죽은 후였다.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가에게 멸망했다. 그럼으로 옥타비아누스는 500년 로마 공화정 역사가 막을 내리면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nbsp;<br><br>옥타비아누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아우구스투스로 이름을 바꾸고 200년간 지속되는 로마 평화시대, 팍스로마나 를 열게 된다.<br>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기원전 27년 전부터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80년 까지의 시기를 말한다.&nbsp;<br><br>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둘다 독재를 하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독재와는 달랐다. 그는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 받고 정중히 거절하는데 오히려 원로원이 그에게 평생토록 권력을 갖도록 인정해주게 된다.&nbsp;<br><br>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후 삼두정의 한 축을 맡고 있었으나 권력을 잡은 후 키게로 처형을 비롯해 정적들이나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정치력과 유능한 내정 관리 능력으로 불안정했던 로마를 안정시켰다.<br>로마의 제정을 안정시키기도 하고 정치나 군사 체계를 정비를 하며 시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여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수 국가로 만든 기틀을 다져졌다고 생각이 든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자신을 제 1시민으로 자칭하였다. 그의 이름을 따 달력의 여섯 번째 달을 아우구스투스로 칭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으로는 냉정하지만 위에 있는 노예와 유리잔 일화나 자신의 정적의 아이들 중 위협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돌봐준 점 등을 보면 사적으로 잔인무도한 인품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는 77세 까지 오래 살기도 했는데 빵, 대추, 야자 약간, 물 정도만 조금씩 생각날 때마다 소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의외로 도박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nbsp;<br><br>아우구스투스는 많은 기록들이 있었다.<br>예를들어 앙카라 신전에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입상이 있다.<br>아우구스투스 신전은 앙카라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들어서 있다. 보행자 전용 인도를 통해서만 찾아갈 수 있다. 앙카라에 들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하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앙카라는 로마가 정복하기 전, 이미 지역 내 성지로 통하던 곳이다. 7세기 이후 이슬람이 앙카라 지역을 지배하면서 언덕 위 전체가 모스크 공간으로 변신한다. 현재 아우구스투스 신전 바로 옆에는 터키 이슬람사원을 대표하는 하시 바이람이 들어서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업적록 관찰은 이슬람 신자의 기도와 아랍어로 울려퍼지는 코란 찬양 속에서 이뤄졌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지만 대리석에 새겨진 업적록은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가 어렵다. 언어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터키어·아랍어·영어·독일어 주석이 업적록 밑에 따로 전시돼 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구성된 전부 35개 문장의 기록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서기 13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전의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후의 평가 자료로서의 기록인 것이다.&nbsp;<br><br>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주머닛돈으로 로마군 월급을 지불한 황제이다. 돈을 마구 찍어내거나 세금을 올리지 않으면서 당대 세계 최강 로마군을 유지하였다. 현대 시대 군인들의 월급은 세금으로 지불하며 세금을 올리기도 하는 등 대통령의 돈으로 지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크지 못한 돈을 주지만 최강 군을 만든것에 매력을 느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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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6-24 03:21: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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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의 정치 체제 : 2626 표혜령 </title>
         <author>phr2392</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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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로마는 <strong>왕정</strong>을 더불어 시작되었다.<br>하지만 로마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로마의 <strong>공화정</strong>이란 왕이나 소수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속하는 공유물을 말한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인 사안들에 대해 왕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 공동체가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공화주의는 본래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안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닌다는 <em>자유의 원리</em>를 내세운다. 공화정 초기에는 정치의 실권이 귀족에게 있었으나, 많은 위협들로 인해 시민들의 군사적 역할이 커지자 시민들은 자신들의 <em>정치적 권리</em>를 요구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귀족들과 투쟁을 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얻기 위해서 전쟁중에 철수를 하기도 하였다.&nbsp;<br><br></div><blockquote>귀족들과 시민들의 계속되는 신분투쟁에 결국 귀족들은 시민들의 요구를 점진적으로 받아드리게 된다. 귀족들은 <strong>호민관직</strong>과 <strong>평민회</strong>를 설치한다. 호민관직은 평민회에서 선출되었고 민회를 소집하고 의장으로서 주재하며 평민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을 했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때에 따라서 원로원을 소집하고 청원 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집정관이나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동료 다른 호민관의 결정에 대하여 그것이 평민의 권익에 배치될 때에는 거부권을 가짐으로써 무효화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blockquote><div><br></div><blockquote>그리고 또 법률을 제정하였다. <strong>12표법( =성문법 )</strong>을 제정하고 <strong>리키니우스법</strong>으로 집정관 중 1명은 평민에서 선출하였으며, <strong>호르텐시우스법</strong>으로 평민회의 결의가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평민들은 형식적으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blockquote><div><br>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strong>삼두정치</strong>가 시작된다. 삼두정치는 로마에서 황제체제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3인 집권 체제를 말한다.&nbsp; 로마제국에는 총 2차의 삼두정치가 있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등 대외팽창으로 인해서 사회 내부에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nbsp;<br><br></div><blockquote>유력자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오랜 시간동안 방치된 농지를 독차지하여&nbsp; 라티푼디움(대농장)을 경영하였고 이로 인해서 땅을 잃은 중소 장영농층들이 빈민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호민관에서 선출된 그라쿠스 형제가 대토지 경영을 제한하는 '농지법'과 빈민들에게 싼값으로 밀을 제공하는 '곡물법'을 통해서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서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회혼란 틈에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삼두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blockquote><div><br>2차 삼두정치를 주도한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하면서 로마의 군대와 재정을 장학하고 혼란을 수습하였다.&nbsp; 그는 자신을 일반시민들과 다름이 없는 신분이라며 자신 '제 1시민' 이라고 칭하였으나, 군 지휘권과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며 사실상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br><br>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사실상 로마의 공화정은 없어지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다.&nbsp; 이후 로마에 <strong>5현제와 같은 유능한 황제들</strong>이 등장하고 로마는 정치적 안정과 제국의 영토가 최대에 이르는 번영을 누렸고<em> '로마의 평화시대'</em>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여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는<strong> '군인 황제 시대'</strong>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서 로마는 점점 피폐해졌다.<br><br>로마의 정치체제를 알아보고 조사하면서 로마의 공화정이 많은 사람들에게&nbsp;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시민들이 귀족과 신분에 차이가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정치 권리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자신들의 정치 권리를 찾은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정치에 가담하는 정치가들 뿐만아니라 우리처럼 일반 시민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고 정치인들을 뽑는 등 우리나라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서 우리 의견을 내고 나라가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을 로마의 공화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처럼 시민들이 각자 정치적 자유와 자신들의 삶에 자유가 있는 반면에 이와 반대로 정치적 자유가 없고 시민들 삶에 자유가 없는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나라들도 시민들이 자유를 되찾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로마의 정치 체제를 조사하면서 많이 느꼈다.&nbsp;<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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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6-24 06:51: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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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건축 B.C 8C~A.D. 4C</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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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로마를 대표하는 판테온,콜로세움 등의 건축물은 이전 재료나 공법으로는 축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들을 가능하게 한것은 '콘크리트' 라는 재료의 도입과 아치와 볼트라는 형식의 채용이다.&nbsp;<br><br>1)콘크리트의 사용</div><div>콘크리트는 이미 천여 년 전 이미 발견되었고, 사용되었지만 로마인들은 콘크리트를 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를 이용하여 더욱 더 튼튼하고 영구적인 건축물들을 세웠다.&nbsp;</div><div>로마인들의 콘크리트 사용은 벽돌이나 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분말로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이다.&nbsp;</div><div>콘크리트 공법은 그리스 건축의 석조건축보다 자유로운 장식을 가능하게 하였다.&nbsp;<br><br>2)아치와 볼트</div><div>로마의 견고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요소는 아치와 볼트이다</div><div>기존의 수직수평의 기둥구조는 점차 아치형으로 발전하였다. 아치는 상부의 하중을 더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하여 건축물을 더높고 효율적으로 축조 할 수 있도록 하였고 개구부를 더 넓게 만들 수 있게 하였다.&nbsp;</div><div>콘크리트보다 더 가벼운 재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아치와 아치가 연속되어 터널을 이루는 반원형통의 둥근 천장 형태는 로마 건축의 주요 요소이다.&nbsp;</div><div><br></div><div>로마건축에 사용된 콘크리트는 오늘날에도 사용되는데, 콘크리트는 현대건축에서도 사용되는데 현대에는 콘크리트 안에 철근을 넣어 콘크리트의 단점인 부족한 인장강도를 잡아주어 보완하여 사용된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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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6-24 07:27: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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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의 미술사 : 2619 이하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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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로마는 단순히 덩치만 큰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서양 문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nbsp;<br>로마는 정치 제도, 세계관, 기술력, 학문 등 전반적인 문명 수준을 매우 높게 끌어올리게 되는데 여기서 유럽 문명이 처음으로 꽃피기 시작하게 된다.&nbsp;<br>로마는 멸망한 후에도 중세, 르네상스,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 거의 모든 역사에서 계속 그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로웠던 로마시대를 수많은 후대의 유럽 국가들이 본받고자 했기 때문이다.&nbsp;<br>이런 흔적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서양 사회에 남아있다.&nbsp;<br>예를 들어 독일 나치의 손을 올리는 특이한 경례법이나 독수리를 당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모두 히틀러가 로마제국을 흉내 낸 것이다.&nbsp;<br>그리고 지금도 미국이 독수리를 자국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상원의원을 로마의 원로원, Senatus에서 따서 Senate라고 부르는 것 역시 비슷한 예가 될 수 있다.<br><br>로마미술<br>로마 미술은 간단히 말하면 로마가 그리스의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복제한것이다.<br>우선 로마는 그들이 동경하던 그리스의 미술들을 소유하기 위해 기술자들을 고용해 수많은 그리스 조각 복제품을 남기게 된다.&nbsp;<br>실제로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라오콘' 같은 유명한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은 원본품은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 로마인들이 남겨놓은 복제품들이다.&nbsp;<br>제국을 통치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은 로마인들, 특히 원로원 귀족계층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그리스 조각들을 복제하여 자신들의 별장을 장식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리스 미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부유했던 로마인들이 많은 복제품을 남겨준 덕이기도 하다.&nbsp;<br>그러나 로마 미술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br>또한 로마 미술은 인접한 문화와 지배하였던 지역의 문화를 절충적으로 받아들이며 발전하였다.&nbsp;<br>때문에 로마의 건축ㆍ조각ㆍ회화ㆍ공예 등에서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이집트 등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nbsp;<br>특히 건축과 조각에서 그리스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br>다른 문화를 가져와 고유의 것과 독창적으로 혼합하는 절충적이고 융합적 측면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할수 있다.<br><br>신발을 신지 않는다.<br>미술관에 가서 그리스 로마 조각들을 볼 때 한 가지 알아 두면 재미있는 것은 신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nbsp;<br>그리스 로마 조각을 보면 신발을 벗고 있는 조각이 있다면 그 조각상은 신을 조각한 것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다.&nbsp;<br>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벗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nbsp;<br>다만 로마의 정치인들 중에도 신을 벗고 있는 조각상들이 있는데, 이는 사후 신격화된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br><br>로마의 조각<br>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했을때 힘과 돈이 많은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여러 미술품들을 마구 샀다.<br>로마에서는 그리스 조각의 모방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br>요즘으로 치면 OEM제작과 비숫하다고 볼 수 있다.<br>손님들은 카탈로그를 보고 원하는 조각을 보고 골라 주문 제작을 할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을 할 수 있었다.<br>그렇기에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로마조각들은 거의 그리스의 조각품들 이거나 혹은 그리스 조각인지 로마조각인지 논란이 있는 작품들일지도 모른다.<br>그리스의 대표적인 주제가 '신'이었다면 로마는 '황제'와 '영웅'들이다.<br>그리스와 로마의 공통점은 이상적인 표현을 하였다.<br>그리스는 신을 표현라고 로마는 인간을 이상적인 표현하는 차이점이 있다.<br><br><br>느낀점<br>로마 미술사를 통해 로마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br>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점은 로마는 인체에 대해 조금은 집착을 하는것같다.<br>또한 내가 알던 로마시대 작품들이 그리스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던같고 조사를 하면서 궁금한 것은 로마시대 그렇게 복제한 제품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로마 시대 오리지널 석상들은 생각보다 인체를 많이 표현하지 않은것같다.<br><br><br><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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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6-24 10:04: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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