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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학년 1반의 독립운동가 by 한윤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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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2-11-14 17:19: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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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윤다은]18세의 아름다운 유관순 열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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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strong>&lt;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19년 학생으로 서울 만세시위 참여<br>-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br>-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옥중 만세시위 주도<br>-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br>-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strong><br><br></div><div><strong><mark>(1)유관순 열사의 출생 및 가족관계</mark></strong></div><div>&nbsp;유관순 열사는<strong>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strong>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李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div><div><br><br><strong><mark>(2)유관순 열사의 업적</mark></strong></div><div>&nbsp; 유관순 열사가 학생이던 때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div><div>그러자 유관순 또한 아직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만세 운동에&nbsp; 참여했습니다.</div><div>또한 유관순은 1919년에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본 군에게&nbsp; 체포되고 말았습니다.<br>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협박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strong>유관순 열사는 1년 뒤인 1920년 3/1일 3.1 운동 1주년이 되는 날에 옥 중에서 만세 시위를 또 한번 주도</strong>했습니다.<br>그렇지만 아무리 독립 의지가 강한 유관순 열사도 일본의 모진 고문을 버텨내진 못했습니다.<br>일제는 입에 담지도 못할만한 잔인한 고문을 하며 유관순 열사를 괴롭혔습니다.<br>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말했습니다.</div><blockquote>"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고통 만은 참을수가없습니다.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blockquote><div><br><br><strong><mark>(3)유관순 열사의 죽음</mark></strong></div><div>일제의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으로 인해 유관순 열사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strong> "1920년 9월 28"</strong>일 에 18세의 나이로 옥 중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div><div><br><strong><mark>(4)유관순 열사를 조사하며 느낀 점<br></mark></strong>유관순 열사(님)를/을 조사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br>유관순 열사(님)을 조사하기 전까진&nbsp; 유관순 열사(님)이 받으신 많은 폭행과 고문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br>막상 알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너무 잔인하고 정말 18세의 나이에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조사를 하면서도 너무&nbsp; 두려웠다.<br>만약 내가 유관순열사님이라면 정말 독립 운동도 해보지 못하고<br>하루하루를 두려워하며 살 것 같다.<br>내가 그때 살았더라면..살 길이 막막하고 두렵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 했을 것 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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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25: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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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자민]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 한용운</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yunitell/ec57yywvx2iiubqj/wish/2465487793</link>
         <description><![CDATA[<blockquote><strong><em>&lt;주요 공적&gt;<br>- 1913년 &lt;조선불교유신론&gt; 간행<br>-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옥중에서&lt;조선독립의 서&gt; 저술<br>- 1927년 신간회 참여, 경성지회장 취임</em></strong><br><br>💖_출생<br>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blockquote><div><br></div><blockquote>🧡_생애<br>&nbsp;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혹은 17세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 뒤 불교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다가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용운이란 법명(절에서 스님을 부르는 이름)을 받았습니다.</blockquote><div><br>&nbsp;그 뒤 일본에 건너가 신문명을 돌아보았으며,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중국에 있는 독립군 군관 학교를 찾아가 이들을 격려했습니다. 또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애국 지사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br><br>&nbsp;1913년 우리 나라로 돌아와 불교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같은 해 동래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썼습니다.<br>그는 이 책에서 기존의 무능한 불교를 새롭게 고쳐 현실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1918년 월간지 『유심』을 펴냈으며,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br><br></div><blockquote>💛_독립운동 시작<br>1919년 3ㆍ1 운동이 일어나자 <mark>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mark>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으며, 「독립 선언서」 공약 3장을 썼습니다.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했습니다.&nbsp; 한용운은 감옥에서 「조선 독립 이유서」를 썼는데, 이는 비타협적인 독립 사상으로 민족 독립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제시했다습니다.</blockquote><div><br>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계속 강연과 창작 활동을 하면서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br>&nbsp;<br>&nbsp;1926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mark>「님의 침묵」</mark>을 써서 일본에 저항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족 운동을 펼치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경성(서울) 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 1931년에는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같은 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고 독립 사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br><br></div><blockquote>💚_소설<br>&nbsp;1935년 첫 장편 소설인 <mark>「흑풍」</mark>을 <mark>「조선 일보」</mark>에 연재했으며, 1937년에는 불교 관련 항일 단체는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일본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blockquote><div><br><br>&nbsp;주요 저서로는 「님의 침묵」, 장편 소설 「박명」이 있습니다.</div><div><br><br>💙_ 느낀점<br>&nbsp;<br>&nbsp;이번에 한용운 독립운동가 분을 소개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분이라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nbsp;<br><br>&nbsp;소개글을 쓰면서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한번 짧게 읽어보았는데 많은 친구들이 한번 읽어보아도 좋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ᐟ<br><br>&nbsp;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있으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편하게 생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해볼 수 있었던 활동이어서 좋았던 거 같다.<br><br><br>&nbsp;(⁎⁍̴̛͂▿⁍̴̛͂⁎)*✲ﾟ*｡⋆ 💕</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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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28: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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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다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안중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yunitell/ec57yywvx2iiubqj/wish/2465489220</link>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br>- 1908년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국내 진공 작전<br>- 1909년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br>- 1910년 옥중에서 &lt;동양평화론&gt; 저술 중 사형 순국</strong><br><br></div><div><strong><em>1.출생 및 생애</em></strong><br>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 지주였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 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br><br>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안중근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br><br><strong><em>2.천주교 입교</em></strong><br>천주교당으로 피신하게 되었다.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다.</div><div><br>이후 안중근은 신부로부터 교리와 함께 불어를 배우며 천주교의 포교에 힘썼다. 의사는 전도 활동 중에 일반 민중들과 광범위하게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민중 계몽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br><br><strong><em>3.계몽운동</em></strong><br>이후 안중근은 그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 학교와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br><br>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br><br></div><div><strong><em>4.의병부대를 이끌며 전투</em></strong><br>안중근은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4월 연추 얀치혜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우영장 안중근 등이었다. 이 동의회는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이었던 의사가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br><br>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div><div><br></div><div>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연추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톡, 수찬, 하바로브스크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재기를 꿈꾸었다. 의사는 1909년 2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br><br><strong><em>5.이토 히로부미 처단</em></strong><br>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br><br></div><div>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 이강, 우덕순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br><br></div><div>도중에 안중근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켰다. 그리하여 의사를 중심으로 이토 포살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처음 의사는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만주 동청철도(중동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과 관성자, 그리고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 등 4개 지점에서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모자랐고, 또 실행 인물도 부족하여 부득이 도착지인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였다.<br><br></div><div>교차역으로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안중근의 거사 계획뿐이었다.<br><br></div><div>안중근은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를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br><br>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br><br>안중근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br><br><strong><em>6.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em></strong><strong><br></strong>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중근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br><br></div><div>"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br><br>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내고,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br><br></div><div>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1.서 2.전감 3.현상 4.복선 5.문답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br><br><strong><em>7.조사하며 느낀점<br></em></strong>안중근 의사가 대단한 것을 원래 알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세삼 또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를 믿으면서 신부와 같이 활동하다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부가 반대해도 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을 한것이 멋졌다.그리고 이토에게 총을 쏠 때 정말 떨렸을것 같은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주 용감하게 행동한것이 감동이었다.우리나라에 이런 위대한 영웅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br><br>안중근 의사 영상 링크:<br>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amp;mngNo=3150</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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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29: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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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서현] 최고의 여사 독립운동가 남자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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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strong>1.출생 및 생애<br>&nbsp; </strong>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7세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과 대학을 통달했다.<br><strong>2.독립운동을 시작 한 계기</strong><br> 김영주는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중 전사했다.남자현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김영주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으로 이주했다.<br>(김영주는 남자현의 남편이다.)<br><strong>3.독립운동</strong><br>&nbsp; 12개의 교회를 건립하고 여성계몽에도 힘썼다.또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했다.망명생활 6년이 지난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하지만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 다니며 통합을 독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927년 봄 상해 안창호 선생이 길림 조양문 밖에서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회를 개최하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 선생 등 3백 명을 체포하게 하고, 주요 간부급 50인을 신병인도하도록 했다.당시 남자현은 투옥중인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으며 중국은 우리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했다.<br><strong>4.구출</strong><br>여사를 후원하던 일송 김동삼 선생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됬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현은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 받았다.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남자현은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은 애국청년들에게 간호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div><div><strong>5.국제연맹조사단</strong><br>&nbsp;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흰천에다 ‘조선독립원/한국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본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했던 것이다.<br><strong>6.감금</strong></div><div>&nbsp; 1933년 3월 1일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남자현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br><strong>7.결심</strong></div><div>&nbsp;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br><strong>8.유언</strong></div><div>남자현은 유복자인 독자 영달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nbsp;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br><strong>9.애도</strong><br>당시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가 되어 여사의 영전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br><strong>10.조사하고 느낀 점</strong><br> 원래 몰랐지만 남자현에 대해 조사하면서 독립운동가분들이 우리나라 위해 많은 일과 목숨을 바친 것에 대해서 존경스럽다.조사를 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 일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좋았고,남자현을 비롯한 모든 독립운동가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또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분들이 있다는게 너무 감사하고,자랑스럽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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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0: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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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서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봉창 선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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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이봉창 의사 <strong><mark>출생</mark></strong>:<strong><mark>[李奉昌, 1901. 8. 10 ~ 1932.10.10]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李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mark></strong>어려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div><div>세월이 지나면서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은 피지배민족이 정복 민족의 수괴를 처단한 의거임을 깨닫게 됐다. 안 의사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하게 했다.</div><div><br></div><div>이봉창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남만에서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다.<br><br></div><div>이봉창 한인애국단 선서문(1931)</div><div>1월 2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녕(李東寧) 선생이 동료 국무원들과 함께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div><div>“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div><div>“그 자는 하오리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div><div>하오리는 일본식 남자 옷을 말한다. 백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정색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창 밖의 바람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사이, 백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br><br></div><div>“현재 그 젊은이를 조사하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두시지요.”</div><div><br></div><div>“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div><div><br>그러나 선생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하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해, 임시정부 청사와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같은 사실이 백범에게 전해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만남 같기도 하고, 역사적 우연처럼 비치기도 한다. 백범은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金東宇)를 시켜 선생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봉창 선생이 단순히 ‘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div><div><br></div><div>안중근 의사 아우의 집에 가 수류탄 들고 맹세</div><div><br></div><div>거사 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경과도 교제를 하면서 속수무책인 건달 행세를 했다.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br><br></div><div>“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br><br></div><div>그런 후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br><br></div><div><strong><mark>&nbsp;업적</mark></strong>:도쿄에서 궁성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div><div><br>일본인을 가장하고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br>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br><br></div><div>이봉창 의거 관련 중국·일본신문(1932년 1월)</div><div><br>이봉창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div><div><br>그러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다.<br><br></div><div>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생은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미혼이었으며 처자식이 없는 순국이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br><br></div><div>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br><br>이봉창선생님을 조사하면서 이봉창선생님이 자신이 죽을걸알면서도 일왕에게 폭탄을던져서 없애려했지만실패로 돌아가 아쉽지만 이봉창선생님에 마음만큼은 전해져서 많은독립운동가들이 만들어진거같다. 이봉창선생은 이른나이 30대에 돌아가셔서 정말아쉽다. 내가 이봉창 선생이였으면 용기가안나 하루하루 고민하면서 살거같은데 이봉창선생님의 마음과 용기는 대단한거같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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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2: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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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옥은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 운동가,권기옥</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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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비행기를 생각한다면 다들 인류 최초 비행을 성공한 라이트형제를 생각하기마련이지만<br><br><strong>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strong>인 "<strong>권기옥</strong>" 도 있다.<br><br><strong><mark>권기옥</mark></strong>은 <strong>1901년1월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strong>에서 4녀1남중 2째딸로 태어났다.<br><br>할아버지때에는 부유했으나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4살되던 해에는 남의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br><br><strong>11살</strong>이 되던 해엔 <strong>은단공장에 취직</strong>해 집안살림을 돕던 김기옥은 <strong>12살</strong>의 나이로<strong><em> </em></strong><strong>장대현교회가 운영하던 순형소학교에 입학</strong>했다.<br><br><strong>졸업 후</strong> <strong>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strong>해 숭의여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78673"><mark>송죽회</mark></a>에 가입하고 <strong>독립운동에 투신</strong>하였다.<br><br>이후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당시 여성차별이 심했을때도 어린시절,비행사의 꿈을 이루기위해 <strong>중국 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strong>해 꿈을 이루며 <mark>한국 최초의 비행사</mark>가 되었다.<br><br><strong>결혼후</strong>에도 독립운동가 였던 남편 이상정과 함께 <strong>독립을 위한 여러활동에 가담</strong>해 <strong>1968년 대통령 표창,1977년 독립장을 수여</strong>받았다.<br><br><em>느낀점_<br>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br>비행을 하며 힘들었겠지만 <br>그 순간에서도 독립 운동을 하는 권미옥이 자랑스럽고 멋지다고 생각했다.<br></em><br>💗_<em>비행사 권기옥의 대한 이야기를</em> <em>담은 {니 꿈은 뭐이가?}<br></em>&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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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3: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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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준영]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 홍범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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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mark>1</mark></strong><mark>.</mark><strong><mark>출생및생애</mark></strong>. <br>&nbsp;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 홍윤식이었고,어머니는 출산 휴유증으로 돌아가셨다.그래서 홍범도는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또 9살이 되던 해 아버지 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홍범도는 작은 아버지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랐고 그러던 중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2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3년간의 병영 생활은 안정을 주기도 했지만 사병들에 대한 학대로 병영을 탈출하게 되었다.<br><br><strong><mark>2</mark></strong><mark>.</mark><strong><mark>의병부대조직</mark></strong>.<br>&nbsp; &nbsp;그 이후&nbsp; 홍범도는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이동한 뒤,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이 의병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에 북천지계에 따라 북상하던 일본군과 3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의병부대를 전개하였다.(여러 곳에서 일본군 격파!)<br><br><strong><mark>3</mark></strong><mark>.</mark><strong><mark>봉오동전투</mark></strong><mark>.(</mark><strong><mark>청산리대첩</mark></strong><mark>)</mark><br>&nbsp; &nbsp;또한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병부대와 함께 자신이 잘 알고 있<br>는 지형 봉오동으로 가서 일본군에게 큰 대첩을 거두었었고 청란<br>리에서도 큰 대첩을 거두었다.<br><br><strong><mark>4.그외에업적</mark></strong><mark>.</mark><br>&nbsp; &nbsp;또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의병부대 조직,평안 감영 나팔수로 활동 했던 일 뿐만 아니라 의병과 계몽운동의 공동전선 모색,권업회와 노동회 조직, 투쟁역량 배양,대한독립군 편성,자유시 참변 후 한인 권익보호운동 등 같은 일도 많이 하셨다.<br><br> <strong><mark>5</mark></strong><mark>.</mark><strong><mark>홍범도장군죽음</mark></strong><br>&nbsp;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 했다.그 이후 25년이 지난 1962년에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를오르단에서 75세의 나이로&nbsp; 10월 25일에 사망하셨다.<br><br> <br>&nbsp;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이후 정부에서는 홍범도 장군을 공훈으로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nbsp; 대통령장을&nbsp; 추서하였고,2021년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br><br><strong><mark>6</mark></strong><mark>.</mark><strong><mark>조사하면서느낀점</mark></strong><mark>.</mark>&nbsp;<br>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많이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br>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크를오르단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br>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을 격파한 것이 자랑스럽다!<br>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2021년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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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4: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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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비송]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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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br>- 황해도 해주 출신 안중근의사의 어머니이다.<br>- 경술국치 직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투옥되자 법원에 상소하여 목숨을 구걸하느니 영광된 죽음을 맞이하라고 수의를 지어 보냈다.<br>- 이후 중국 상해에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정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에 몰두하였다</strong><br><br></div><div><strong>1. 출생</strong><br>출생:1862년 4월8일 생이다.&nbsp; 본관: 배천 조씨, 본명: 조성년( 趙姓女) ,사망:1927년 7월25일 (향년 65세)<br>자녀: 장남 <a href="https://namu.wiki/w/%EC%95%88%EC%A4%91%EA%B7%BC">안중근</a>, 차남 <a href="https://namu.wiki/w/%EC%95%88%EC%A0%95%EA%B7%BC">안정근</a>, 삼남 <a href="https://namu.wiki/w/%EC%95%88%EA%B3%B5%EA%B7%BC">안공근</a>, 장녀 안성녀, 며느리 김아려<br><br><strong>2. 생애</strong><br>안태훈과 결혼했으며 자신의 아들 안중근이 사형을 구형당하고 <a href="https://namu.wiki/w/%EB%A4%BC%EC%88%9C%EA%B0%90%EC%98%A5">뤼순감옥</a>에 갇혀있을 때 수의와 편지를 보낸 것이 유명하다. 본명은 조성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항년 65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br><br><strong>3.&nbsp; 편지의 글</strong><br>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때 편지로 이렇게 말하였다.<br><br>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strong>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strong>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a href="https://namu.wiki/w/%EC%88%98%EC%9D%98">수의</a>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의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br><br><strong>*생각이나 느낀점<br>조마리아 여사가 편지를 쓴건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몰랐는데 조사를 하면서 더 자세하게 알게되었다.&nbsp; 조사하면서 많은 내용을 알게되어서 뿌듯했다.</strong></div><div><br></div><div><br>* 관련영상<br>https://youtu.be/mQnC1lbSxUU</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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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6: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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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한서] 무장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지청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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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양성<br>- 1924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및 총사령관으로 국내진격전 지휘<br>-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역임<br>-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하여 총사령관 역임</strong></div><div><br><strong>1. 출생</strong> <br> 지청천은 1888-01-2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30 에서 태어났다.일본육군중위가 되었다가 대한독립에 뜻을 두어 1916년에<br>滿洲에 가서 兩路軍政署 부속인 新興武官學校 敎成隊長으로 있었다 <br><br><strong>2. </strong>1920년 일본의 兩狹작전에서 반항하여 이를 격퇴하고 동년 12월 金佐鎭 장군과 합류하여 寧安縣에서 徐一을 총대로하는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활약하였다.<br><br><strong>3</strong>. 익년 정월 독립군의 부사령관이 되어 崗陽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쳐 점령하고 蘇領 으로 건너갔다<br><br><strong>4.</strong> 소령에서 高麗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 중 사상적 대립으로 蘇당국은 동년 6월 22일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를 강요함에 6월 28일 장군은 민족적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br>항전 끝에 피체되었다가 석방되었다.<br><br><strong>5. </strong>1925년 1월 正義府 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 및 조선의 용군총사령관을 겸임하여 平安道 일대의 일병을 소탕하였다.<br><br><strong>6.</strong> 1930년 洪陳, 申肅 등과 韓獨黨을 조직하여&nbsp; 軍事委員長에 취임하고 동년11월 독립군총사령관이 되었다.<br><br><strong>7.</strong> 1932년 2월 18일 부터 일본의 육공 공격을 견디어 다음해 6월에는 大甸子嶺 전투에서는 大捷하여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하였다.<br><br><strong>8</strong>.河南洛陽 군관학교 특설반의 책임장교로서 동포에 군사 교육에 노력하였다<br><br><br> <strong>9. </strong>1957년 1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br><br><strong>[이야기를 쓰고느낀점]</strong><br>나는 지청천을 정말 대단하게&nbsp;<br>생각한다<br>왜냐하면 지청천은 엄청난<br>인재였지만<br>일제에 협력하지않고<br>평생을 무장투신에&nbsp;<br>헌신하여 우리가&nbsp;<br>본받기위해 노력해야한다고<br>생각하고 지청천이<br>평생을 무장투신에<br>헌신한걸 생각해보면<br>지청천의 끈기또한 대단하다는것에<br>감탄하게되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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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7: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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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백주호] 역사학자 신채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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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1. 출생 및 생애</strong><br>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현재 대전시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3417&amp;ref=y">중구</a>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10826&amp;ref=y">어남동</a>)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령이며,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필명으로 금협산인,무애생 등을 사용 부친은 신광식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신성우로 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8726&amp;ref=y">신기선</a>의 추천으로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2480&amp;ref=y">성균관</a>에 들어가 이남규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604&amp;ref=y">을사늑약</a>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br><br></div><div><strong>2. 언론활동</strong></div><div>1905년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5679&amp;ref=y">황성신문</a>》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81700&amp;ref=y">대한매일신보</a>》 주필로 활약했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1907년 항일결사조직인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8883&amp;ref=y">신민회</a>와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7555&amp;ref=y">국채보상운동</a>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와 관련해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이듬해 순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했다. 또한 《대한협회보》, 《기호흥학회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친일조직인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6777&amp;ref=y">일진회</a> 성토에 앞장섰다.<br><br></div><div><strong>3. 독립운동</strong></div><div>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4082&amp;ref=y">이갑</a>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5607&amp;ref=y">블라디보스토크</a>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권업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권업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베이징으로 건너가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5990&amp;ref=y">비밀결사</a>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가 되었다.<br><br></div><div><strong>4.임시정부 참가</strong></div><div>1919년 상하이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은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7291&amp;ref=y">국제연맹</a>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br><br></div><div><strong>5.임시정부 탈퇴</strong></div><div>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하였다. 신채호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을 조직에 가담하여 지도했으며, 본국의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했다.<br><br></div><div><strong>6.무정부운동</strong></div><div>1925년경부터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5072&amp;ref=y">무정부주의</a>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9653&amp;ref=y">외국환</a>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br><br></div><div><strong>7.저서</strong></div><div><strong>《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사론》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br><br>8.조사하면서 느낀 점</strong></div><div><strong>글로라도 독립운동을 한게 대단하고 논설도 많이 만들었지만 광복을 하기전 6년 전에 옥사했다는 것이 안타깝다.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고 독립운동가인게 존경스럽다.</strong></div><div><br></div><div><br><a href="https://youtu.be/n8Xq1DVCbrU">신채호</a>https://youtu.be/ n8Xq1DVCbrU영상</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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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8: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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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다빈]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독립운동가 서재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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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strong><mark>1.출생 및 가족정보 </mark></strong><br>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서광언과 모친 서주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br>그리고 인근 대덕 군에 살던 근친 서광하 의 양자로 입양되었다.<br>선생은 일곱 살 무렵 서울로 보내져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를 대비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br><br><strong><mark>2.핵심 인물</mark></strong><br>서재필 선생은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div><div>특히 1882년 3월 선생이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서적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의 부정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들과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심화시켜 갔다. <br><br><strong><mark>3.사관학교 설립</mark></strong><br>1884년 7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였다.</div><div>&nbsp;그리고 고종도 이를 승낙하여 선생은 조련국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세력의 침투를 우려한 청나라와 임오군란 이후 수구정책으로 회귀한 친청 정권의 반대로 사관학교 설이 지지부진하게 되었다.</div><div><br><strong><mark>4.갑신정변</mark></strong><br> 이에 선생은 급진적인 개화와 개혁을 꿈꾸게 되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br>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거사에 돌입한 정변에서 선생은 청년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br><br><mark>5.군사분야의 개혁과 근대화</mark><br>개화당 정부는 서정쇄신과 근대적 사회개혁 이념을 담은 14개조 개혁강령을 반포하였지만,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3일만에 붕괴되고 말았다.<br>이때 선생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되어 군사분야의 개혁과 근대화 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br><br><mark>6.일본으로 망명</mark><br>그러나 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후일을 기약하면서 1884년 12월 11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상선 천세환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br><br><mark>7.서재필의 주장</mark><br>이 밖에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여 주권 수호를 주장하면서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국민의 권리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논설을 자주 실었다. <br>이뿐만 아니라 각종의 강연과 토론회에서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려주는 한편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하여 봉건 백성을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려고 하였다. <br>나아가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을 가져야 열강의 침략을 막고 국민의 자유 민권도 신장된다고 주장하였다.<br><br><mark>8.독립선언</mark><br>구미 각국 민중으로 하여금 우리 독립선언의 주장과 국내외 사정을 이해하게 하는데 노력하기로 하고, 일본 정객에게 충고문을 보내어 일본의 실책을 각오하게 하여,<br>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기로 한고,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한 모두는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하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표출 선전한 뒤, 선생의 사회로 미국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br><br><mark>9.독립운동가 서재필을 조사 후 느낀 점</mark><br>잘 모르고 있었던 독립운동가라 어떡해 조사를 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막상 서재필에 대해 조사를 해 보니 어렵지 않고 쉽게 독립운동가들을 조사할 수 있었던것 같아 간편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려운 시기에 열심히 우리나라를 위해 버텨준 것이&nbsp; 포기 없이 열심히 노력한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직접 확인하고 적으며 조사한 분이시니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br>그리고 모든 독립운동가 들이 오늘날의 평화를 위해 정말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끝까지 노력 한 것 을 보고 정말 감동적이 었고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운동한 독립운동가분들이 자랑스러웠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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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8: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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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승우] 위대한 사상가 이회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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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1.이회영(李會榮, 1867. 3. 17 ~ 1932. 11. 17)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李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이조(吏曹)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李恒福)이다. 백사 이래 이유승(李裕承)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br><br>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br><br>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 항일한 후 20여명만 살아남아<br>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석영·회영·호영 3형제가 만주와 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가며 장렬하게 순국했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br><br></div><div>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형 석영도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br><br></div><div>2.여동생이 청상과부가 되자, 관습 깨고 과감하게 재혼시켜</div><div><br>우당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대 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긴 우당의 한 단면이다. 선생의 혁명가적 기질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들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나타난다. 당시 정서로서 판서 집 딸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집으로부터 데리고 온 뒤 “이 판서 집 딸 아무개가 급환(急患)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訃告)를 냈다. 그런 후 간단하게 장사를 치르고 새 혼처를 찾아 개가(改嫁)를 시켰음은 물론이다. 선생의 이 같은 풍모와 대인(大人)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이승을 떠날 때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반상(班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고치고,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지하고, 개가 재혼을 장려하는 등 선생의 혁명적인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실로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br><br></div><div>선생은 21세 때인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李商在) 이상설(李相卨) 이범세(李範世) 서만순(徐晩淳) 조한평(趙漢平) 여규형(呂圭亨) 이강연(李康演)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 신진 정치가들의 협력, 내치(內治)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가는 나라 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선생은 이 같은 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선산(先山)인 풍덕(豊德)에 인삼 밭을 경작, 경영했는데 1901년 채삼기(採蔘期)에 이르러 일인(日人)들이 작당, 착취·노략질해가는 것을 일경에 엄중 항의하는 한편,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李容翊)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진언케 했다. 이를 전해들은 고종은 선생을 “실로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예”라고 칭찬하고 탁지부주사(度支部主事)를 제수했으나 강직한 선생은 벼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br><br></div><div>이처럼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友堂)은 아우 시영의 그늘에 가리워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우당의 6형제들이 50여 가족들을 데리고 ‘솔가망명(率家亡命)’한 저력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했다.<br><br></div><div>3.일본 영사관과 일본군 수송선 폭파, 청산리 전투 주역 배출한 불꽃 같은 삶</div><div><br>송일본정부서(送日本政府書, 1922.7)<br><br></div><div>우당이 명문(名門)을 팽개치고 형제·가족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며, 둘째는 중국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 격렬한 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br><br></div><div>이 과정에서 선생이 해온 일들을 꼽아 보면 이렇게 된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1905년),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梁起鐸) 이동녕(李東寧) 신채호(申采浩) 노백린(盧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1907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년),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在)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br><br></div><div>선생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다. 상하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톈진항 일본군수물자수송선폭파사건, 톈진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등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는 사명감 속에 계속 실행됐다.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기운 속에 이듬해 이봉창(李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폭탄투척의거가 실현된 것이다.<br><br></div><div>나이 65세에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 추진하다 체포돼 순국</div><div><br>그러나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中央日報)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피압박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br><br></div><div>4.‘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br><br></div><div>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br><br></div><div>이 같은 기사의 실체는 즉각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하고, “그 노인이 이회영(李會榮)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생이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br><br></div><div>선생은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5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였다. 일(日) 군국주의의 서곡인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다. 1932년 초 선생은 중국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1월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였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br><br><br><br>이회영이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br><br><br><br>선생은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65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다니 정말 화가난다.<br><br><br>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1905년),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梁起鐸) 이동녕(李東寧) 신채호(申采浩) 노백린(盧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1907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년),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在)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하다니 정말 대단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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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8: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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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시현]평민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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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mark>1.출생<br></mark></strong>1878.11.3 ~ 1908.11.18<br><br><strong><mark>2.업적<br></mark></strong>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이후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며 활약하였다.<br><br>&nbsp;1895년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597&amp;ref=y">을미사변</a> 이후 일본군의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911&amp;ref=y">의병</a>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896). 1905년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a h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3604&amp;ref=y">을사늑약</a>이 체결되자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애국적 의분을 대일항쟁으로 쏟았다.</div><div><strong><br></strong>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하였다(1907. 12).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br><br></div><div><strong><mark>3.신돌석장군의 죽음</mark></strong><br>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08. 1). 1908년 3월에는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세력을 강화하고,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평해 한곡에서(7월), 희암(9월)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활약한 후, 겨울이 되어 다음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키고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의병인 김상열(金相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들이 모의하여 그만 신돌석을타살하였다.<br><br><strong><mark>4.신돌석장군을 조사하며 느낀점</mark></strong><br>평민출신인데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신돌석장군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난 신돌석장군을 보고 평민도 장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div><div><br></div><div><br></div><div><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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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38:2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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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시연] 흥사단을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신 독립운동가 안창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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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1. 출생 <br>&nbsp;</strong>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江西郡 草里面 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필명은 산옹(山翁)·섬메·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은 안광택(安廣宅), 안창호(晏彰昊)이다. <br><br><strong>2. 주요공적</strong></div><div><strong>- 1907년 신민회 조직, 대성학교 설립<br>- 1912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회장, 1913년 흥사단 조직<br>-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서리 겸 내무총장<br>-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strong><br><br></div><div><strong>3. 업적</strong><br>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도산은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야말로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였다. 민족의 역량 성숙과 함께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힘주어 강조하며 발 빠르게 전 동포사회를 추동해 독립운동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을 독려하며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재외 동포들이 단결할 것과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5개국 대사에게도 편지를 보내 한국대표(김규식)의 출석권을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특히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책임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각지에 산재한 여성단체들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1919년 8월 북미의 5개 여성단체가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br><br></div><div>한편 3월 24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도산을 중국에 파견하기를 결의하였다. 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자 힘썼다. 우선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가 운영되려면 재정 확보가 우선되어야 했기에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재정 확보책을 고민하였다. 한편 1919년 7월에 한국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를 편찬하고자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도산이 총재로 취임하여 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9월 23일에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4편 4책의 1백질이 발간되었다. 이는 국제연맹회의에 선전 자료로 제출하고자 하는 우선의 목적을 가졌지만 한일간의 근대 역사를 새로이 정리하여 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해 정부의 국민적 기반을 구축하고 임시정부의 연락과 교통망을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간도 등지에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하고자 교섭하였다. 그 외에도 대한적십자회 재건, 재상해 교민학교인 인성학교의 공립학교 출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1919년 8월 21일 창간) 발행 등의 사업이 진행되는데 도산의 역할이 컸다.</div><div><br></div><div><strong>4. 안창호 선생님을 조사하면서 느낀 점</strong><br> 안창호 선생님을 조사하면서 느낀 점은 흥사단을 세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 쓰신 점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nbsp;<br>그리고 안창호 선생님의 끈기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br>신민회와 흥사단을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펼치신&nbsp; 안창호 선생님은 참 위대하신 분 같습니다.<br><br>끝!!<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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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40: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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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진우]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김좌진 장군</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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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nbsp; <strong>&nbsp; &nbsp;</strong>&nbsp; &nbsp; &nbsp; &nbsp; <strong><mark>&nbsp;1. '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mark></strong><br>백야(白冶) 김좌진(1889. 11. 24 ~ 1930. 1. 24) 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金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 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 노릇을 하였다. 특히 병정놀이 때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다.<br><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strong><mark>2.고향에서 호명학교 설립,계몽운동에 힘쓰다 </mark></strong><br>장군은 1905년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장군은 노비해방을 단행한 후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장군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있었으며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본경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는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그러나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다. 때문에 장군은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는데, 이 사건으로 장군은 1911년 6월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br>한편 만주로 망명하면서 장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다.<br><br>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br><br>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br><br>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br><br>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br><br>진정 님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br><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strong>&nbsp; &nbsp; </strong><strong><mark>&nbsp;3.청산리 대첩의 승리 이끌어</mark></strong><br>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였으며 1920년 6월 7일에는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br>그러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장군은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strong>&nbsp;</strong><strong><mark>4. 마지막 순간과 건국훈장</mark></strong><br>&nbsp; &nbsp; &nbsp; 궁극적으로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장군<br>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nbsp; &nbsp;<br><br>느낀 점<br>내가 이 인물을 조사하면서 청산리 대첩에서 대승을 거둔것 까지는 알앗는데 건국훈장을 받은 이야기를 새로 알수있어서  신기했고 또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조사해 보고 싶다.<br>관련 영상&nbsp; &nbsp; https://youtu.be/74hzjuxHndU &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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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45: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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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승우] 이항복의 10대손 이시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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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1.이항복 10대손. 스물 두 살에 문과 급제. 을사조약 체결되자 관직 사직, 외부대신과 절교</div><div><br>이시영(李始榮, 1869. 12. 3 ~ 1953. 4. 17) 선생은 경주 이씨로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성옹(聖翁)이요, 호는 성재(省齋) 혹은 시림산인(始林山人)이었다. 선생은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니,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가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부친은 우찬성·이조판서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이조판서 순조(順朝)의 딸이었으니 당대에도 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소영(韶榮)·호영(頀榮) 등 7형제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난 선생은 첫 부인으로 영의정 김홍집(金弘集)의 딸을 맞았으나 사별하고, 반남 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br><br></div><div><br>선생은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소용돌이치는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만 16세 되던 1885년(고종 22)에 진사가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된 뒤, 18세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br><br></div><div><br>만 22세 되던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홍문관 교리‧승정원 부승지‧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즉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 사이에 주로 궁궐 안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95년 관직을 물러나 10년 동안 자신을 가꾸었다. 중형 회영(會榮)을 비롯하여 이상설(李相卨)과 같은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br><br></div><div><br>선생이 다시 관직에 나선 시기는 1905년, 즉 관직을 물러난 지 10년 지난 시기였다. 이번에는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자리를 맡자마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이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것을 막아내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받아들였다. 이에 비감해진 선생은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집안은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당시 선생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이 약혼한 상황이었는데, 을사조약 체결에 박제순이 동의하자 선생은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절교해 버린 것이다. 선생이 외부 교섭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강제체결을 막지 못함에 따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br><br></div><div>2.한일합병 후 선생 형제 가족 50여명 가진 재산 처분…독립군 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모두 망명</div><div><br>선생은 그 다음 해에 다시 관직에 발탁되었다. 만 37세이던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이다. 당시 평안남도가 얼마나 중시되던 지역이었는지를 고려한다면 선생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에 부임한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907년에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어 상경하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 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 모두 만 40세가 되기 이전에 선생이 맡았던 관직들이었으니, 선생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관직생활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07년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李東寧)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하였다. 이 사실은 나라를 잃자마자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동참한 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br><br></div><div><br>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면서,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다. 1900년대에 의병항쟁을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략이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계몽운동가들 가운데, 신민회 그룹은 무장항쟁의 방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 나갔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신민회는 일제 강점에 들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잃자마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 길이다. 눈 질끈 감고 일제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면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를 고스란히 누릴 수도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다는 말이다. 가는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대가족이 모두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명문거족이나 권문세가 출신으로 다수가 망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회영과 이시영 선생 형제 일가 50여 명이 만주로 망명한 사실에 대해 박은식은 ‘명문거족 가운데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하였다.<br><br></div><div>3.전재산 처분한 돈, 민족교육기관과 독립군 양성기관에 쏟아 부어. 훗날 청산리대첩의 밑거름…</div><div><br>선생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家財)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1910년 말 서간도(西間島)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柳河縣 三源堡 鄒家街)였다. 일행이 도착한 직후인 1911년 4월에 그곳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다.<br><br></div><div><br>독립전쟁을 일으키자면 군대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하자면 인력과 재력이 필요했다. 우선 동포사회를 구성하여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근거지를 마련하여 정착지를 갖춰야 했다. 경학사의 결성은 곧 동포사회의 형성과 운영을 이끌어 가는 데, 또 신흥강습소는 인력, 특히 군사력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기관이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발전되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가면서 독립군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이 당시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李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지만, 이시영 형제들도 모두 여기에 참가하면서 국내에서 마련해 간 재원을 쏟아 부었다. 이들의 활동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선생도 참가한 독립군기지 건설이 허망한 사업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바로 1920년의 청산리대첩이 그를 확인시켜준다. 그 날의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유와 그곳에서의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청산리 승전이었기 때문이다.<br><br></div><div><br>4.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1919.2)</div><div><br>선생은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세개(袁世凱)에 주목하기도 했다. 선생은 1913년 9월에 북경으로 갔다. 국내에서 이미 잘 알고 있던 원세개를 이용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북경행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원세개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무렵에 선생이 자리잡은 남만주·서간도 지역에서 &lt;대한독립선언서&gt;가 발표되었다. 1919년 2월 1일자로 발표된 이 선언에는 남만주 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활동하던 주역들이 서명하였는데, 선생도 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여기에 참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수립 선포된 정부마다 선생을 법무총장이나 재무총장 등 중요한 각료의 한 사람으로 기록했던 이유가 모두 이러한 활동 때문이었다.<br><br></div><div><br>5.&lt;임시정부 개조안&gt;(독립신문 1919.9.2)</div><div>임시정부 세워진 후 법무총장 재무총장 맡아…가난과 시련 속의 임정 지키는 마지막 보루 역할</div><div><br>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립운동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닥치고 이와 함께 독립의 기회가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에 독립운동가들도 정세변화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선생은 바로 그 시기에 북경에 가 있었고, 따라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곳도 바로 북경이었다. 선생이 당시 북경에 머물렀던 이유는 고종황제를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세변화에 맞는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고종의 사망과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br><br></div><div><br>거족적인 항쟁 소식을 듣자마자 선생은 당시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회영과 이동녕 및 이광과 함께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4월 10일에 열린 회의에 참가하였다. 29명의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 날 아침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되었으니, 결국 선생도 제헌회의에 참가한 셈이 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2회(4월 22-23일)와 3회(4월 25일) 의정원 회의에 참가하였다. 4월 13일에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고, 다음 날 위원제가 실시되면서 선생은 법무총장을 맡았고, 당시 법무위원으로는 남형우·김웅선·한기악이 임명되었다. 선생이 법무총장을 맡은 시기는 5월 10일까지 짧은 기간이었고, 9월 15일부터는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자금 관리를 도맡았다. 특히 이 시기에 대다수 총장들이 아직 상해로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선생이 담당한 역할과 위상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br><br><br>“중국 지도자들이여, 일제의 비열함을 직시하라.” ≪감시만어(感時漫語)≫ 직접 써서 발간하다니 대단하다.<br><br><br>이시영 선생이 외부 교섭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강제체결을 막지 못함에 따른 충격은 매우 컸을 것같다.<br><br><br>이봉창·윤봉길 의거 등 한인애국단의 항쟁이 줄을 잇는 무렵에는 미리 항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니 정말 멋있다.<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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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51: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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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유혜련] 주시경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국어 연구, 어문 민족주의의 중심에 서다</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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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1. 출생 및 생애</strong><br>주시경 선생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에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극소수의 부류를 제외하고는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의 노력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나아가 근대화와 자주화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혹은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었다. 이 같은 경중완급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개항 이후의 시기는 가히 전방위적 근대화 운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주시경 선생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선생이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산나물과 도라지를 캐어다가 죽을 쑤어 형제들의 나이 차례로 나누어 먹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갈" 정도였다.&nbsp;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선생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아 갔다.&nbsp; 하지만 그러던 중 몸도 돌보지 않는 한글 연구와 강의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선생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다.<br><br><strong>2. 활동</strong><br> 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선생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히게 된 것은 중부 학만씨의 양자가 되어 1887년 상경하면서부터이다. 물론 향리에서도 부친과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익히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당연한 민족적 사회적 과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br>&nbsp;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머리가 있는 자는 머리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하듯이 선생은 한글 연구와 보급으로 역사적 과제 해결에 헌신하였다. <br> 국망의 위기가 현재화되어 가면서 그에 대한 연구와 보급은 민족 정체성의 확립을 뛰어넘어, 그를 통해 민족의 보존, 수호, 발전을 지향하는 어문 민족주의로까지 승화되어 갔다. 그러한 어문 민족주의자 가운데 가장 우뚝 선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br> 선생은 한문을 배우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아가 한글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br> 배재학당의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으로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자국어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br> 그 결과 이 때부터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서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nbsp; <br> 선생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lt;독립신문&gt;을 창간하자 회계 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집중하였다. <br> 생의 상소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br> 선생은 1907년부터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 밖에도 선생은 공옥, 이화, 숙명, 진명, 기호, 협성, 보성, 배재, 중앙, 경신 등 20여 개의 각급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우리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앉을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을 만큼' 분주하게 강의할 책을 큰 보자기에 싸서 이 학교 저 학교로 다닌 덕분에 민족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자주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다.<br><strong>3. 저서</strong><br>1906년 학생용 교재인 [대한국어문법] 발간, 1908년에 음성론과 소리갈 등의 국어 문법에 관한 연구서인 [국어문전음학] 간행, <br>1909년 2월에 초등 국어교과서인 [국문초학], 1910년 4월에 [국어문법]을 상동 박문서관에서 발간, 철자법 등 11개 항목의 [국문연구안]을 냈고, 이를 토대로 [국문연구의정안]을 만듬 &lt;서우&gt;, &lt;대한협회월보&gt;를 비롯한 계몽 잡지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nbsp; [국어사전] 편찬, 1914년에 [말의 소리]를 간행<br><br>주시경은 이렇게 말했다.<br><strong>“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strong></div><div><em>- 선생의 저작 [국어문전음학(1908)] 중에서 <br><br></em><strong>4. 조사하면서 느낀 점<br>&nbsp;</strong>세종대왕이 한글을 과학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고 한글을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세워질 만큼 우리나라 말(한글)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에서 옛날에도 한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이 내용을 읽고 다시 한번 한글이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 독립신문을 주시경 선생이 서재필과 함께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깊었고 주시경 선생이 한 말처럼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말과 자랑스러워 할 문화유산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스러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 말과 유산이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겨야겠다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주시경 선생이 여러 책을 써 한글연구에 대한 기록과 어린이들을 위해 책을 썼다는 점이 인상깊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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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52: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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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현]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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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17년 비밀결사 청년 구락부 조직<br>- 1919년 독립신문 등사·배포 중 체포<br>- 1921년 천도교 소년회 조직, 어린이 운동 전개<br>- 1923년 잡지 어린이 창간, 색동회 조직, 어린이날 제정</strong><br><br></div><div><strong>1. 업적<br></strong>방정환은 어린이들을 위해서 어린이날을만들었다. 엄마 아빠들을 위해서 어버이날이 있는것 처럼 어린이들도 어린이들을 위한 날인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방정환은 어린이날만들고 어린이들을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철이 많이 들었다.<br><br><strong>2.</strong> <strong>출생과 성장</strong></div><div>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족보 및 방정환이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방정환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방정환은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큰고모, 작은 고모, 삼촌 등과 4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1)<br>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2) 그러나 아홉 살 때에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3)나면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br>가세가 기운 이후 방정환의 집은 사직동 도정궁 앞의 초가로 이사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권병덕4)의 소개로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5)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매우 명랑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1908년에 조직된 소년입지회의 활동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div><div><br></div><div><strong>3.민족운동에 투신</strong></div><div><br>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br><br></div><div><strong>(1) 청년운동</strong></div><div>방정환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1908년 조직된 소년입지회를 통해서였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최초의 조직 활동8)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소년입지회는 일종의 토론회로서 8 ~ 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9) 소년입지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수가 16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방정환은 이 소년입지회의 총대장으로서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대한문에서 경축행사를 가진 일, 장충단으로의 소풍, 성북동에서의 밤줍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0&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div><div>방정환은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등을 탐독하였다.11) 그러던 중 방정환은 졸업을 1년 앞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div><div>이후 그는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하며, 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사자생의 임금은 하루에 20전, 한 달에 대략 5원 내외였다.12) 이시기 방정환은 적은 월급으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그는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경제적 곤궁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18년 7월 7일 방정환은 이중각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발기, 조직하여 회장 이복원(李復遠), 부회장 이중각(李重珏)을 선출하고, 문예부, 체육부, 음악부를 두었다.13)</div><div>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조직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년입지회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14세부터의 청소년들로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광렬은 이 경성청년구락부가 1918년 무렵 회원이 200여명이었다고 증언하였다.14) 이로 보아 방정환은 소년운동단체를 청소년운동단체로까지 확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div><div>경성청년구락부는 음악회 개최, 연극 공연,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등 계몽활동을 주로 전개하는 한편 기관지 성격을 갖는 잡지 『신청년』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경성청년구락부의 활동은 1920년대 초 우리 실력양성운동의 흐름과 일치한다. 특히 잡지 『신청년』의 발행을 통해 자신들의 논리와 활동을 전파하였다.</div><div>한편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의 제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문화통치를 선언한 일제의 지배정책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수용한 천도교의 젊은 지도층을 중심으로 1919년 9월 2일 경성에서 이돈화, 정도준, 박래홍, 박달성 등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하 교리강연부)를 조직하였다.</div><div>방정환은 박래홍, 손재기, 이돈화, 황경주, 최혁, 박용회와 함께 간의원으로 선출되어 교리강연부의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에는 보다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라 개칭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에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이돈화, 박달성 등이 중심이 되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다. 방정환도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div><div>개벽사 전경(방정환)</div><div>1921년 일본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동경지회는 1921년 1월 10일 발기인 대표 방정환을 비롯하여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 등이 발기한 후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券町) 302호 대선관(大扇舘)에 모이라고 광고하였다. 여기에는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이태운, 박춘섭, 김광현, 박달성 등 10여 명이 모였고, 5 ~ 6명은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주소와 성명을 통지하였다.</div><div>1921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것을 기념하는 천일기념식을 올리고 오후 3시부터 소석천정(小石川町) 차고 앞에 있는 보정(寶亭) 2층에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 개최되었다. 보정의 문기둥에는 궁을기가 내걸리고 정면에는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라고 하는 간판이 걸렸다. 회장 방정환의 개회사에 뒤이어 내빈으로는 학우회 회장 김종필, 동우회 회장 김봉익, 동아일보 특파원 민태원, 매일신보 특파원 홍승서, 각 대학 동창회 대표, 여자흥학회 회장 유영준, 그리고 10여 명의 축사가 있었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조직 이후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15)</div><div>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외에도 동경에는 1922년 1월 천도교 동경전교실을 설치하였다. 동경전교실의 주요 구성원은 방정환을 비롯하여 석현, 박달성, 이기정, 김상근, 이태운, 구중회, 고경인, 박영환, 강영호, 김의진, 배기원, 정일섭, 정중섭 등이었고, 박사직이 동경전교사로 임명되어 1922년 7월 부임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는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3개반의 강연대를 조직하여 천도교 진리의 선전과 현대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조선 각지를 순회하는 강연회를 조직하였으며, 방정환은 이와 같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변천과 활동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연회의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br><br><strong>4. 조사하면서 느낀 점<br>어린이날을만든것이대단하다 내가방정환을 아니 뿌듯했다 그리고 어린이날만드니 자랑스럽다</strong><br>방정환의 이야기&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끝&nbsp; &nbsp; &nbsp;&nbsp;<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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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53: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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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대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김구 선생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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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04년 애국계몽운동<br>-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br>-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활동 지휘<br>- 1940년 임시정부 주석</strong><br><br></div><div><strong><mark>1. 태어나신 곳과 어릴때 겪은 위기</mark></strong>:<br>대단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님께서는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1879년(4세)에 천연두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지만,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br><br><strong><mark>2. 관상 공부와 동학</mark></strong>:<br> 17세(1892)가 되던 해 김구 선생님은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상 공부를 하던 선생님은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아 크게 실망하다가, 어느 책에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이 말이 선생님에게 절망을 게속 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1893년에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 도유사의 한사람으로 뽑힌 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를 만나 팔봉도소접주로 임명되었습니다. 1894년 9월 탐관오리를 내쫓고 서양오랑캐와 왜를 물리치자는 깃발을 올리며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 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위한 평생의 첫 걸음이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br><br><strong><mark>3. 애국계몽운동</mark></strong>:<br> 20세 되던 1895년 2월 동학 봉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선생은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맡겼습니다. 1904년에 최준례와 혼인한 무렵 선생은 본격적으로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br><br><strong><mark>4. 나라 망한 후</mark></strong>:<br>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서울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논의한 끝에 두 가지 대응방법을 정했습니다. 하나는 도독부와 각도 총감을 두어 행정을 장악하여 나라의 맥을 이어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워 인재를 기르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신민회의 존재를 알아채고 회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따라 선생도 붙잡혀 서울에서 징역 2년 형으로 갇혀 지냈습니다.<br><br><strong><mark>5. 3·1과 임시정부</mark></strong>:<br>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선생은 신익희·윤현진·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습니다. 1931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재무장을 맡고 있던 선생에게 권한을 맡겼습니다. 윤봉길 의거 직후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을 돕던 미국인 피치의 집에 숨어 있다가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쟈싱의 추푸청 집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면서 운영되던 임시정부는 갖가지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한 1940년에 당·정·군 기본 틀을 완비하였습니다. 그러다 일본군의 진주만기습 소식을 듣자마자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습니다. 선생님과 임시정부는 중국전구사령부와 한미군사합작을 이끌어 내어,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키는 국내정진작전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부터 산시성 시안과 안후이성 푸양에서 OSS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br><br> <strong><mark>6. 일제의 항복</mark></strong>:<br>여기에서 길러진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투입되기 바로 전날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였습니다.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입니다.<br><br><mark>7. </mark><strong><mark>광복 후</mark></strong>:<br>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그러는 바람에 귀국날짜는 많이 늦어져 광복이 되고도 석 달이 더 지난 11월 23일에서야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하였습니다. 환국한 뒤 선생은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였습니다. 하나는 열강의 신탁통치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이미 충칭시절부터 추진했던 정책이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음은 임시정부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길을 추진하였습니다. 셋째로 선생은 분단을 반대하면서 통일국가를 추진하였습니다.<br><br><strong><mark>8. 김구 선생의 죽음</mark></strong>:<br>오로지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흉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쏜 탄알)에 돌아가셨습니다.<br><br><strong><mark>9. 이 이야기를 쓰고 느낀 점</mark></strong>:<br>와~ 김구 선생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거 같다. 왜냐하면 나라 망하기 전, 나라 망하고, 광복될 때까지 게속 활약하시고 미래를 예측해 나라를 옳은 길로 보낼려고 노력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김구 선생님을 꼭 본받을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김구 선생님을 더 알아가는거 같아 좋았다.<br><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끝</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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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56: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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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종원]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김마리아 여사</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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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https://youtu.be/htxiATi1RZk<br><br>&nbsp; &nbsp; &nbsp; &nbsp; "<strong><em>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em></strong></div><div><strong><em>일본군의 심문 중에서.<br><br>&lt;</em></strong><strong>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19년 일본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br>- 1919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br>- 1922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선임<br>- 1928년 미국에서 근화회 조직, 회장 역임</strong><br><br></div><div><br><strong><mark>1. 생애</mark></strong><br><strong>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에서 부친 김윤방과 어머니 무장김씨김몽은 사이의 세 딸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br><br>이름인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이 지은 것이며 김윤방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하였다. <br><br></strong><strong><mark>2. 업적</mark></strong><strong><br>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br><br>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및 구금되었는데 이 때 고문을 당해 몸이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nbsp;<br><br>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br><br>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장로회,감리해등 한국 개신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nbsp;<br><br>3. 사망<br>1943년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결국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nbsp;<br><br><br>조사하며 느낀 점<br>(안타깝다 대단하다 존경스럽다)<br>김마리아 여사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나,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갖가지 노력을 한 사람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br>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광복되기 딱 1년전인 1944년에 돌아 가신 것 이다.<br>돌아가실때는 맘편히 돌아가실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들을 하게된다.<br>김마리아 여사 말고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널리 알려지고, 일본이 정식으로 사과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br></strong><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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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2:56: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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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서준] 독립운동가 이봉창 영상 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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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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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유주] 등 뒤에 태극기를 짊어지고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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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br>- 1929년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 개혁 실시<br>- 1930년 중국으로 망명, 김구 등을 만남<br>- 1932년 홍구공원에 폭탄 투척, 침략 원흉 시라카와 등 처단</strong><br><br></div><div>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 짧지만 강렬했던 윤 의사의 생애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그가 꿈꾸었던 나라를 살펴보자.</div><div>​</div><blockquote><strong><em><mark>챕터1</mark></em></strong><br><strong><em><mark>19세의 나이로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mark></em></strong></blockquote><div>​</div><div>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金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윤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div><div><br></div><div>​</div><div>그러나 농민 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 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div><div>​</div><blockquote><strong><em><mark>챕터2</mark></em></strong><br><strong><em><mark>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길, 백범 김구와의 만남</mark></em></strong></blockquote><div>​</div><div>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div><div>​</div><div>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div><div>​</div><div>백범 선생과 윤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lt;상해 일일신문&gt;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윤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div><div>​</div><blockquote><strong><em><mark>챕터3</mark></em></strong><br><strong><em><mark>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의 의거</mark></em></strong></blockquote><div>​</div><div>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div><div>​</div><div>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은 윤 의사였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2014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장은 당시 경성지방검찰청의 신문(訊問) 조서 내용을 공개하며 던지지 못한 남은 폭탄이 ‘자결용’이 아니라 ‘거사용’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명확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div><div>​</div><div>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div><div>​</div><div>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div><div>​</div><div>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div><div>​</div><blockquote><strong><em><mark>챕터4<br>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mark></em></strong><br><strong><em><mark>​</mark></em></strong></blockquote><div>피체된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金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div><div>​</div><div>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윤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div><div>​</div><blockquote><strong><em><mark>남긴 말</mark></em></strong></blockquote><div><br></div><div>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div><div>​</div><div>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div><div>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div><div>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div><div>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div><div>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div><div>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div><div>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div><div>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div><div>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div><div>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div><div>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div><div><br><br></div><blockquote><strong><em><mark>조사하며 느낀 점</mark></em></strong></blockquote><div><br>편견을 꿰뚫었다. 조선인이라면 당연히 일본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일본의 인식을 철저히 꿰뚫어 주었다.<br>한 손에 폭탄을 들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당신.<br>이미 10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br>이번 기회로 인해 더욱 윤봉길 의사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br><br><br>당신같은 사람이 하나의 생명으로<br>한국에서 태어나&nbsp;<br>뜨거운 마음으로 미래를 위한 길을 뚫어주었다는 것에<br>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됩니다.<br>윤봉길 의사, 당신의 마음에 서려 있는 그 용기와<br>일본에게 맞서 싸우는 담대함으로<br>당신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br>다른 사람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br>당신의 ' 목숨을 건 ' 그 한걸음의 발자국.<br>그 발자국이 우리 대한민국에 영원히 남아<br>모두가 윤봉길 의사, 당신을 기억하길&nbsp;<br>감히 기도해봅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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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3:01: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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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연수]시인 독립운동가 윤동주                  </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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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윤동주독립운동가는 꽤 이른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br><br>윤동주 이야기<br><br>윤동주는 만주의 북간도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났으며<br>&nbsp;기독교인 할아버지의 영향을&nbsp; 받았다.<br>1935년 윤동주가 다니던 중학교는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패교가 되었습니다. <br>&nbsp;그리하여 윤동주는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들어가 졸업을 했습니다.&nbsp; 1941년엔&nbsp;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습니다.&nbsp; <br>그리고는 일본으로 건너가여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중 중퇴하여 다른 대학의 영문과로 들어갔습니다.<br>그리고 학업다중 항일 운동을 했다해서 2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건강이 않좋아져서&nbsp; 1945년 2월 16일에 돌아가셨습니다.<br><br>윤동주의 시와 독립운동<br>윤동주는&lt;삶과 죽음&gt;&lt;초한대&gt;&lt;병아리&gt;&lt;빗자루&gt;&lt;오줌싸개 지도&gt;등&nbsp; 다양한 &nbsp; 시를 지었습니다<br>윤동주는 태극기로 독립운동을 하는대신 글로써 맞써싸웠다는 생각이 들어요.<br>시들중 윤동주의 시로 잘못알려진게 있다고 하는데 어떤 신문에선 그냥 실었다고 합니다. 확인하고 해주었으면 좋겠네요.<br><br><br><strong>별 헤는 밤<br>윤동주</strong></div><div><strong><br>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br>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br><br>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br>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br><br>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br>이제 다 못 헤는 것은<br>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br>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br>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br><br>별 하나에 추억과<br>별 하나에 사랑과<br>별 하나에 쓸쓸함과<br>별 하나에 동경과<br>별 하나에 시와<br>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br><br>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strong><a href="https://namu.wiki/w/%EB%9D%BC%EC%9D%B4%EB%84%88%20%EB%A7%88%EB%A6%AC%EC%95%84%20%EB%A6%B4%EC%BC%80"><strong>라이너 마리아 릴케</strong></a><strong>'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br><br>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br>별이 아스라이 멀듯이.<br><br>어머님,<br>그리고 당신은 멀리 </strong><a href="https://namu.wiki/w/%EB%B6%81%EA%B0%84%EB%8F%84"><strong>북간도</strong></a><strong>에 계십니다.<br><br>나는 무엇인지 그리워<br>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br>내 이름자를 써 보고<br>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br><br>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br>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br><br>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br>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br>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br>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br>(1941. 11. 5.)</strong></div><div><br></div><div><br><strong>나의 생각</strong><br>윤동주는 시로만 투쟁한게 아니라 일본앞에서 정말 당당하게 싸웠구나를 알게되었고<br>윤동주의 시는 너무 아름다운게 많은것같아요<br>윤동주와 윤동주의 주변인물을 알아볼수있는 시간이여서 너무 좋았어요!<br><br>[2023년 2월 3일 금요일 12시 황산초 5학녕 1반 23번 조연수]</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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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2 03:48: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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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동환] 독립운동가 이상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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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1.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가 될 만큼 학문에 비상했던 선생<br><br>이상설(李相卨, 1870. 12. 7(음) ~ 1917. 3. 2) 선생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李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동,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에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무렵에는 박의암이라는 한학자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다. 선생은 총명한 두뇌와 탁월한 이해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단한 학구열로 17세 때는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구열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타고난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로 선생은 20살이 넘으면서 이미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만한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따라서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르렀다.<br><br>2.을사조약 강제 체결 후 같은 상소를 다섯 차례 걸쳐 올리다.<br><br>선생은 1896년 탁지부 재무관을 그만둔 후 1904년 1월 종2품의 궁내부 특진관에서 해임된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그동안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직에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광무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바탕 하에서 후일 그가 헤이그 사행에 수석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무렵 일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이권 확대를 목적으로 1904년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의 장악을 명시하고 있었다. 즉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개편하고 한국에 일본인의 이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유생들과 전직관료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선생도 그 해 6월 22일 박승봉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어 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이 올린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br><br>3.헤이그 특사로 파견,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 펼쳐<br><br>‘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선생은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다. 선생은 북간도 중에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용정촌에서 건물을 매입하여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 창립 후의 숙장은 자신이 맡았으며 직접 산술을 가르쳤다. 서숙에는 각지에서 온 학생 22명을 받아들여 중학과 소학 과목을 망라한 신학문을 교육하면서,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독립사상을 주입하였다. 그리하여 서전서숙은 연변에 이주한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시하던 재래적인 구식 교육으로부터 신식 학교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br><br>4.13도의군과 성명회에서 활동하다.<br><br>선생은 헤이그 사행 이후 미주를 순방한 후 1909년 4월 정재관과 함께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선생이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연해주를 해외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선생은 한민회 회장 김학만과 해조신문 주간 정순만, 그밖에 윤일병 등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원동임야주식회사라는 공동출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기지의 적지로 중, 러 접경지대에 있는 봉밀산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이 지역을 사들이고 개척하기 위해 영남 출신의 저명한 학자인 이승희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였다.<br><br>5.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조직<br><br>블라디보스토크에 다시 모인 연해주 지역의 중요 인물들이 대거 참가하여 1911년 5월 권업회가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에는 홍범도가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연해주지역은 물론이고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물들도 참여시키면서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 해 12월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선생을 의사부 의장에, 이종호를 부의장에 선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활동을 권장하는 한편, 민족교육과 한인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데 활동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위해 비밀리에 광복군의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다. 권업회가 광복군을 양성한 실상은 소상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우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광복군을 양성하려고 하였다는 점은 밝혀졌다. 1913년 동북만주 나자구(羅子溝)에서 권업회의 중요 임원인 이종호, 이동휘,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석 등이 대전학교(大甸學校)라 부르는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대전학교의 운영이나 성과에 대해서는 일제가 압수한 ‘각처군용정세상세’라는 문서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 공지(空地)에서 총기를 소지하여 훈련 받은 병력이 29,365명이고, 그밖에 총기 13,000정과 탄약 50만을 수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권업회 의장인 선생이 이 계획을 주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권업회의 광복군 양성 활동은 선생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r><br>느낀점:이상설이라는 독립운동가분이 있는줄 몰랐는데 이번엔 조사를 하면서 알게되었다.독립운동가 이상설은 정말 대단하신거 같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게 정말 감동적이다.<br><br>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amp;mngNo=4614</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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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3 02:59: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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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서연]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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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lt;주요 공적&gt;</strong></div><div><strong>- 1919년 함북 회령에서 3·1운동에 참가<br>- 이후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에서 독립군으로 활약<br>- 1921년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br>- 1926년 10월 민족주의적 성향의 영화 '아리랑' 제작 개봉</strong></div><div><br><strong>1. 출생<br></strong>나운규는 1902년(북한에서는 1901년으로 추정)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군인이었던 나형권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br><br><strong>2. 영화 아리랑</strong><br>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는바로 아리랑입니다.</div><div>영화 아리랑은 핍박받고 있던 농촌의 현실과일제에 고통을 받는민중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한 관객들에 의해서 주제가인 아리랑은 사람들 입을 전해 퍼져 나갔습니다.일제치하 암흑기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그대로 표현된 영화인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에 전국 곳곳에서 상영이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들어와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영화의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서속박하는 사람과 속박당하는 사람의 대립을 암시하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뺐겨서 온전한 정신이 도리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선구자가 되었는데 아쉽게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br><br><strong>3.독립운동</strong><br>나운규는 거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해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했습니다.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신흥학교고등괄글 거쳐서 명동 중학에 입학했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가 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게 되었습니다.나운규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했는데 북간도에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에 가입했습니다.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치게 되었지만 일제의 수비 부대간의교통을 차단하기 위해서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맡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br><br><strong>4. 연기파 배우로 성장</strong><br>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단역으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을 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서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번째 작품인 심청전에심봉사로 출연해 연기파 배우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에 조연으로 출연해서 연기에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구상하고 각본을 한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내게 되었습니다. <br><br><strong>5. 요절</strong><br>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고향 친구인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div><div>하지만 나운규의 개인적인 인기와는 다르게 나운규프로덕션 경영은 순조롭지 못했다고 합니다.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이후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등을 만들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합니다.경제적이니 궁핍에 시달리고 있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해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면서 무대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했는데 그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이 작품으로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div><div>모두를 잡을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과로 등이 겹쳐 결핵이 악화되면서 35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br><br><strong>6. 조사하며 느낀점</strong><br>책에 잘 나오지않아서 내가 알고있진 않았지만 조사해보니 나운규도 대단한 사람인걸알았다 영화 아리랑을 보러온 관객들 때문에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발생했을때 나운규의 기분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이때까지 몰랐던 나운규를 자세히 알게되어 좋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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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5 15:22: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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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윤성민]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 의식을 깨우치게 한 이원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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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1.이원록(이육사)의 출생<br></strong>이육사 선생[본명 이원록, 1904. 4. 4(음력) ~ 1944. 1. 16]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아은처사인 부친 이가호와 모친 허길 사이에서 5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陸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이 숙장이었던 예안보문의숙(禮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하였다.<br><br><strong>2. </strong>의열단에 가입 활동중,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붙잡히다.<br><br>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맹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에서 북경으로 이동하여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陸史)라 하였다.<br><br><strong>3. </strong>'청포도' 등 30여편의 시를 발표하여민족의식을 일깨우다.<br><br>이원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br>이후 이원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년 &lt;개벽지&gt;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lt;비판&gt; 지, &lt;조선일보&gt;, &lt;중앙일보&gt; 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lt;인문평론&gt;, &lt;문장&gt;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lt;인문평론&gt;, &lt;문장&gt;, &lt;냉광&gt;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한편 선생은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으나, 글을 발표하던 &lt;문장&gt;, &lt;인문평론&gt;지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br><br><strong>(이육사의'청포도')<br><br>내 고장 칠월은<br>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br><br>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br>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br><br>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br>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br><br>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br>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br><br>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br>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br><br>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br>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strong><br><br><strong>4. 조사하며 느낀점</strong><br>조사하며 느낀점은 내가 지금 평화롭게 사는것이 무엇덕분인지 누구의 희생인지 알게되어서 뿌듯했다.<br>또 잘알려진 독립운동가도 많지만 잘 알려지지않은 독립운동가도 사람들에게 잘알려지게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이 들었다.<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끝<br>(2월7일화요일)</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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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3-02-07 01:58: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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