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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5년 1학기 삶과종교 2차 수행평가 제출 게시판 by 정동건</title>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link>
      <description>서울동산고등학교 1학년 &quot;삶과 종교&quot; 과목 수행평가</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5-06-09 15:16:40 UTC</pubDate>
      <lastBuildDate>2025-06-22 23:32:36 UTC</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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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시)10700 정동건</title>
         <author>holyedu1</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3629307</link>
         <description><![CDATA[<p>대강 이런 식으로 내용을 넣으시고요... 이 사람의 초상화나 사진, 영상자료도 한 가지 이상 첨부해서 넣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의 제목은 꼭 학번과 이름을 넣으시기 바랍니다.</p><p><br/></p><ol><li><p>생애</p></li></ol><p><br/></p><ol start="2"><li><p>업적</p></li></ol><p><br/></p><ol start="3"><li><p>평가</p></li></ol><p><br/></p><ol start="4"><li><p>소감</p></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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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09 15:20: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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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배서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3963458</link>
         <description><![CDATA[<p><strong> 업적</strong></p><p><br/></p><p> 헨리 아펜젤러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A%B0%90%EB%A6%AC%ED%9A%8C">감리회</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C%84%A0%EA%B5%90%EC%82%AC">선교사</a>. 1885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C%A1%B0%EC%84%A0">조선</a>에 왔으며 선교와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일제강점기전에 사망했기에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가 설립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B0%B0%EC%9E%AC%ED%95%99%EB%8B%B9">배재학당</a>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p><p><br/></p><p>생애</p><p><br/></p><p>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D%8E%9C%EC%8B%A4%EB%B2%A0%EC%9D%B4%EB%8B%88%EC%95%84">펜실베이니아</a> 사우더턴(Souderton)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C%8A%A4%EC%9C%84%EC%8A%A4%EA%B3%84%20%EB%AF%B8%EA%B5%AD%EC%9D%B8">스위스계</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8F%85%EC%9D%BC%EA%B3%84%20%EB%AF%B8%EA%B5%AD%EC%9D%B8">독일계</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A%B0%9C%EC%8B%A0%EA%B5%90">개신교</a>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기디언(Gideon)은 독일개혁교회 신자였으며, 어머니 머리아(Maria)는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파(Mennonite)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펜젤러가 어렸던 시절에도 독일어로 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주곤 했고 집에서 거의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어려서부터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하여 펜실베니아의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89%B4%EC%A0%80%EC%A7%80">뉴저지</a> 주의 드루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가풍의 영향으로 본래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C%9E%A5%EB%A1%9C%ED%9A%8C">장로회</a>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교단을 옮겼으며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p><p><br/></p><p>평가</p><p><br/></p><p>인성적인 면에서든 활동적인 면에서든 구한말의 인물들 중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이로, 현대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A%B0%9C%EC%8B%A0%EA%B5%90">개신교</a>계를 비롯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행보에 따른 역사적 의의 때문에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직접적인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독립운동가</a>들을 배출하거나 당시 조선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을 교육 및 계몽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사에도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학생 인권단체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a rel="nofollow noopener ugc" class="_3yhGzsXI"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27855&amp;cid=46623&amp;categoryId=46623">협성회</a>를 조직한 것도 아펜젤러가 최초이다.또한 아펜젤러가 세운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C%A0%95%EB%8F%99%EC%A0%9C%EC%9D%BC%EA%B5%90%ED%9A%8C">정동제일교회</a>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일단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장례 또한 치러졌다.<br><br><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k3pgn7Qq" href="https://namu.wiki/w/%EB%B0%B0%EC%9E%AC%EA%B3%A0%EB%93%B1%ED%95%99%EA%B5%90">배재고등학교</a>는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아펜젤러의 동상과 초상화 등을 소장 중이다. 외부인 개방 시간에 배재고등학교 정문의 수위실에 문의를 하고 직접 볼 수 있으니 참고. 그 외엔 정동제일교회 근방에 <a rel="nofollow noopener ugc" class="_3yhGzsXI" href="https://appenzeller.pcu.ac.kr/">배재학당 역사박물관</a>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p><p><br/></p><p>소감</p><p><br/></p><p>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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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0 00:01: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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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02구진혁 11008심재륜</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4330779</link>
         <description><![CDATA[<ol><li><p>생애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의 스위스계·독일계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독일어 성경을 접하며 성장했고,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한 후 드루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원래 인도 제국 선교를 꿈꿨으나 조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1885년 부활절에 아내 엘라와 함께 조선에 도착했다.</p></li></ol><p>하지만 갑신정변 직후 불안한 정세로 인해 첫 입국이 저지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같은 해 7월 29일 재입국하였다. 이후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선교·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1902년 목포에서 열린 성경 번역자 회의 참석 중 선박 충돌 사고로 조한규 및 학생들을 구하다가 익사, 순직하였다.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p><p>2. 업적</p><p><strong>배재학당 설립</strong> :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 설립.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교훈 제정.</p><p><strong>선교 활동</strong> : 정동제일교회, 내리교회 등 한국 감리교회의 기반 조성.</p><p><strong>성경 번역</strong> : 언더우드, 게일 등과 함께 마가복음, 마태복음 번역.</p><p><strong>출판·서점 사업</strong> : 조선성교서회 설립으로 성경 보급 및 출판 활성화.</p><p><strong>교육·계몽 운동</strong> : 배재학당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 배출, 협성회 조직 지원.</p><p><strong>콜레라 구호 활동</strong> : 콜레라 창궐 시 왕실과 함께 구제 사업 참여, 부패 관리 비판.</p><p>3. 평가</p><p>아펜젤러는 선교사이자 교육자로서 조선 근대 교육과 계몽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배재학당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내며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 정동제일교회가 독립운동 거점이 되는 데에도 그의 선교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p><p>감리교계는 물론 교육사, 종교사,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협성회를 조직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원형도 제공하였다.</p><p>4. 소감</p><p>아펜젤러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닌, 조선의 변화와 독립운동의 토양을 닦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문을 열어준 외국인 중 한 사람으로서 교육과 계몽의 힘을 믿고 실천했다. 목숨을 걸고 학생을 구하다 순직한 모습은 그가 단순히 신앙을 넘어 인간애를 실천한 인물임을 보여준다.</p><p>그의 헌신과 철학이 오늘날에도 배재고등학교와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음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직접적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조선 근대사의 방향을 바꾼 숨은 인물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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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0 03:07: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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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805김태희</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50255</link>
         <description><![CDATA[<p>업적</p><p>최일도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밥퍼나눔운동본부’를 창립하여 30년 넘게 소외된 이웃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해왔다. 1988년 청량리역 인근에서 노숙자 한 명에게 설렁탕을 대접한 것을 계기로 무상 급식 사역을 시작했고, 이후 ‘다일공동체’를 설립하여 의료, 교육, 주거 등 다양한 복지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밥퍼’, ‘빵퍼’, ‘꿈퍼’라는 이름의 나눔 사역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11개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기부와 헌신을 실천하며 교회 퇴직금과 사택 보증금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으며, 암 투병 중에도 현장 사역을 멈추지 않는 등 실천적 사랑을 몸소 보여주었다.</p><p><br/></p><p>생애</p><p>최일도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에서 목회를 시작하며 도시 빈민과 노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목회를 하던 중 직접 길거리로 나가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밥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후 밥퍼 사역이 체계화되며 다일공동체가 설립되었고, 그는 목회보다는 실천적 구제활동에 삶의 중심을 두게 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활동 무대를 넓혀 국제 NGO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중간에 육종암 판정을 받았으나 치료 중에도 현장을 지켰으며, 청량리 밥퍼 센터의 철거 논란 시에도 끝까지 현장을 지키며 활동을 지속했다.</p><p><br/></p><p>평가</p><p>최일도는 한국 개신교 안에서 보기 드문 ‘실천적 목회자’로 평가된다. 단순한 설교나 전도 중심의 목회가 아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행동으로 복음을 전한 인물로,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활동은 종교계를 넘어 NGO, 시민사회, 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도시빈민과 노숙자, 독거노인 문제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해결책 제시로 귀감이 되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종교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로 손꼽힌다.</p><p><br/></p><p>소감</p><p>어려운사람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만들어서 도움을 주며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든다.</p><p>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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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38: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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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808 안지성</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53668</link>
         <description><![CDATA[<p><strong>1. 생애</strong><br>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평범한 정치인으로 살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점점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노예제의 부당함을 깨닫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평생을 바치게 됩니다.</p><p><strong>2. 업적</strong><br>윌버포스는 무려 20년 넘게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의 비인간성과 부도덕함을 알리는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계속해서 말했고, 마침내 1807년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예제 자체를 없애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33년, 영국은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평생 바라던 세상을 눈으로 보고 생을 마감했습니다.</p><p><strong>3. 평가</strong><br>사람들은 윌버포스를 “정의로운 정치인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단지 법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바꿨고, 세상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간 그의 삶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서, 진심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인물로 평가받습니다.</p><p><strong>4. 소감</strong><br>윌버포스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건 정말 가능한 일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당장 눈앞에 성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 싸운 결과, 결국 모두가 그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나중에, 내 주변에서라도 부당한 일이 있을 때 눈감지 않고, 작더라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윌버포스처럼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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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42: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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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810 이유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60663</link>
         <description><![CDATA[<p><strong>1. 생애</strong></p><p><br/></p><p>스크랜튼 부인의 본명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은 1832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이 깊은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후에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아들 스크랜튼 윌리엄 베어드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고 당시 조선 사회의 여성 교육 부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886년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게 됩니다 이후 약 20년간 조선에서 여성 교육과 선교 활동에 헌신하다가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909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p><p><br/></p><p><strong>2. 업적</strong></p><p><br/></p><p>스크랜튼 부인의 가장 큰 업적은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입니다 그녀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하며 여성의 잠재력을 키워주었습니다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점차 성장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이후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p><p><br/></p><p><strong>3. 평가</strong></p><p><br/></p><p>스크랜튼 부인은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여성 인권의 첫걸음을 디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과 봉사를 실천한 점에서 사회적 종교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녀가 세운 이화학당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대학이 되었으며 그녀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p><p><br/></p><p><strong>4. 소감</strong></p><p><br/></p><p>스크랜튼 부인의 삶을 알게 되면서 한 사람의 용기와 신념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저도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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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49: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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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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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814 정지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63716</link>
         <description><![CDATA[<p>1.생애</p><p><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C%82%AC%EC%B6%94%EC%84%B8%EC%B8%A0%EC%A3%BC">매사추세츠주</a> 태생으로 당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B0%A8">마차</a>를 생산하던 지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new" href="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B2%A8%EC%B2%98%ED%83%80%EC%9A%B4&amp;action=edit&amp;redlink=1">벨처타운</a>에서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A%A9%EC%82%AC">목사</a>였으며, 스크랜튼은 12세 때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기독교</a>에 입교했다. 그녀는 공립 학교를 졸업하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84%A4%ED%8B%B0%EC%BB%B7%EC%A3%BC">코네티컷주</a>에 있는 노리치 여학교에 입학했다. 1853년 제철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을 낳았고, 1872년 남편과 사별하기 전까지 코네티컷에서 거주했다. 그녀는 남편의 사망 이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을 따라 오하이오에 정착했으며, 그곳의 교회를 통해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new" href="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97%AC%EC%84%B1%ED%95%B4%EC%99%B8%EC%84%A0%EA%B5%90%EC%82%AC%ED%9A%8C&amp;action=edit&amp;redlink=1">여성해외선교사회</a>(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에 가입하여 해외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p><p>1869년 설립된 여성해외선교사회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mw-redirect"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C%82%AC%EC%B6%94%EC%84%B8%EC%B8%A0">매사추세츠</a>에 위치한 도시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C%8A%A4%ED%84%B4">보스턴</a>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new" href="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D%8A%B8%EB%A0%88%EB%AA%AC%ED%8A%B8%EA%B0%80&amp;action=edit&amp;redlink=1">트레몬트가</a>를 중심으로 여성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 선교사회는 남성 중심의 선교활동에서 벗어나 9가지 교파를 아우르는 수천 명의 후원자를 가진 단체로 성장하여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여성선교단체가 되었다. 이는 19세기 초반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확산된 여성선교 운동이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mw-redirect"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B%B6%81%EC%A0%84%EC%9F%81">남북전쟁</a>을 계기로 12개의 여성선교단체가 기존의 미국 내에서만 이뤄졌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복음 운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p><p><br/></p><p>2. 업적</p><p>스크랜튼 부인(Mary Fletcher Benton Scranton)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교육자이며, 이화학당(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및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입니다.그녀는 1885년 외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와서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 을 했습니다. 스크랜튼 부인은 한국에 와서 한국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이화학당을 통해 여성들의 자립과 역량 강화에 기여했습니다</p><p><br/></p><p>3. 평가</p><p>스크랜튼 부인은 조선 시대에 여자들을 위해 학교와 병원을 세운 분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가 공부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걸 바꾸려고 노력하신 게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p><p><br/></p><p>4.소감</p><p>정말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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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52: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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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801 권소희</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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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ol><li><p>생애</p></li></ol><p>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1832년 12월 9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선교사로 조선에 오게 된다.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1885년 6월 20일 53세의 나이로 조선에 도착해서 조선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활동하였다</p><p>1909년 10월 8일, 한국 서울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p><p><br></p><ol start="2"><li><p>활동 내용</p></li></ol><p>스크랜튼 부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화여대)을 설립한 인물이다. 스크랜ㄴ튼 부인은 조선에 있는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에서 1886년 서울 정동 자택에서 단 한 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과외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여성의 교육을 금기시하던 시기였지만 스크랜튼 부인은 낯선 땅에서 언어와ㅡ 문화의 장벽을 이겨내며 소녀들에게 글과 생활, 종교, 위생 등을 가르쳤다. 그렿게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며 이화학당은 조선 사회에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고, 이후 이화여자대학교로 성장하였다.</p><p><br></p><ol start="3"><li><p>평가</p></li></ol><p>스크랜튼 부인의 삶은 용기와 헌신, 신념의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외국인 여성인데다 50대가 넘은 나이에 조선이라는 외진, 낯선 땅에 와서 여성 교육을 실천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여성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p><p>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차별과 거부를 이겨내며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녀의 노력은 단지 한 학교의 설립을 넘어, 조선에서 여성의 가능성을 사회에 알리는 큰 변화로 이어졌다.</p><p><br></p><p><br></p><ol start="4"><li><p>소감</p></li></ol><p>처음에는 그냥 선교사 활동을 했던 외국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사를 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 신념과 사랑으로 조선 여성들을 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교육기관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헌신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스크랜튼 부인처럼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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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53: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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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817 천민주</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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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생애: 장기려 박사는 1911년에 태어나 한국의 대표적인 외과 의사이자 기독교 의료 선구자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다. 그는 1951년 부산에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했고, 1943년에는 간암 환자에게 대규모 간 절제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1969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계해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기반을 마련했다. 장 박사는 평생 검소하게 살며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치료비를 대납하는 등 희생적인 봉사를 실천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료와 사회복지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남겼다.</p><p><br/></p><p>업적: 장기려 박사는 1951년 부산에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였고, 1943년 간암 환자에게 대규모 간 절제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며 한국 간외과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1969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계하여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평생 환자들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지원하는 등 헌신적인 의료 봉사와 사회복지에 앞장섰다. 이러한 업적으로 장기려 박사는 한국 의료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p><p><br/></p><p>평가: 장기려 박사는 한국 의료계와 사회복지 분야에서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외과 의사로서 의료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무료 진료를 제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실천했다. 또한 의료보험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여 국민 건강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소박한 생활과 희생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기려 박사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에도 의료인과 시민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다.</p><p><br/></p><p>소감: 장기려 박사님이 얼마나 존경 받는 분인지 알 수 있었고 무료 진료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을 텐데 정기려 박사님이 얼마나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는지 알 수 있게되어서 나도 존경하게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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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1 23:54: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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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806김하연,10818최지예</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72468</link>
         <description><![CDATA[<p><strong><mark>생애</mark></strong></p><p><strong>1911년 평안북도 10월 5일 용천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 1928년 송도고보 입학 후 “가난한 이를 돕겠다”는 맹세 아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 모체)에 진학, 1932년 수석 졸업</strong></p><p><strong><mark>업적</mark></strong> </p><p><strong>졸업</strong> <strong>후</strong> <strong>경의전</strong> <strong>외과학교실에서</strong> <strong>조수</strong>·<strong>강사로</strong> <strong>재직하며</strong> <strong>충수염</strong> <strong>등</strong> <strong>세균학</strong> <strong>연구에</strong> <strong>집중</strong> 1940<strong>년</strong> <strong>평양연합기독교병원으로옮겨</strong> <strong>무료</strong> <strong>진료에</strong> <strong>헌신했으며</strong>, <strong>일본</strong> <strong>나고야제국대학에서</strong> <strong>충수염</strong> <strong>세균</strong> <strong>연구로</strong> <strong>의학박사</strong> <strong>학위를</strong> <strong>취득했다</strong></p><p>1951<strong>년</strong> <strong>부산에서</strong> <strong>창고를</strong> <strong>개조한</strong> <strong>복음진료소를</strong> <strong>시작으로</strong>, <strong>무료</strong> <strong>진료를</strong> <strong>통해</strong> <strong>복음의원</strong>→1961<strong>년</strong> <strong>복음병원으로</strong> <strong>성장</strong>. <strong>열악한</strong> <strong>전후</strong> <strong>시기에</strong> <strong>하루</strong> <strong>수백</strong> <strong>명의</strong> <strong>영세민을</strong> <strong>치료하며</strong> <strong>병원</strong> <strong>운영과</strong> <strong>강의</strong>(<strong>서울대</strong>·<strong>부산대</strong>·<strong>가톨릭대</strong> <strong>외과</strong> <strong>교수</strong>)<strong>를</strong> <strong>병행했다 </strong>1969<strong>년에는</strong> <strong>간질환자</strong> <strong>모임</strong> ‘<strong>장미회</strong>’<strong>를</strong> <strong>창립해</strong> <strong>환자</strong> <strong>치료와</strong> <strong>심리적</strong> <strong>지지를</strong> <strong>제공했고</strong> 1968<strong>년에는</strong> <strong>조합원</strong> <strong>기반</strong> <strong>민간의료보험인</strong> <strong>청십자</strong> <strong>의료보험조합을</strong> <strong>발족</strong>, <strong>한국</strong> <strong>의료보험제도</strong> <strong>확산에</strong> <strong>기여했다</strong></p><p><strong><mark>평가</mark></strong></p><p><strong>장기려 박사는 단순한 명의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를 넘어 의료복지 체계 확립과 인간애 실천에 평생을 바친 진정한 사회 지도자라 여기고 있다.</strong></p><p><strong><mark>소감</mark></strong></p><p><strong>장기려</strong> <strong>박사의</strong> <strong>삶을</strong> <strong>보면</strong>, <strong>진짜 위대함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다는</strong> <strong>사실을</strong> <strong>깊이</strong> <strong>느끼게됩니다</strong>. <strong>자신보다</strong> <strong>남을</strong> <strong>먼저</strong> <strong>생각하며</strong>, <strong>평생을</strong> <strong>가난한</strong> <strong>이웃을</strong> <strong>위해</strong> <strong>바친</strong> <strong>그의</strong> <strong>모습은</strong> <strong>지금</strong> <strong>우리</strong> <strong>사회에도</strong> <strong>여전히</strong> <strong>큰</strong> <strong>울림을</strong> <strong>줍니다</strong>.</p><p><strong>그분처럼</strong> "<strong>할</strong> <strong>수</strong> <strong>있는</strong> <strong>것을</strong> <strong>묵묵히</strong>, <strong>끝까지</strong>" <strong>실천하는</strong> <strong>삶이야말로</strong> <strong>진정한</strong> <strong>존경의</strong> <strong>대상이</strong> <strong>아닐까 생각든다.</strong></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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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0:01: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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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815 조수빈</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72615</link>
         <description><![CDATA[<p>업적</p><p>최일도 목사는 다일공동체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병원인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영성생활수련원을 세워 운영해 왔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도 다일공동체 해외 분원을 설립하여 사회봉사 활동을 확장시켰다. 또한, 사회선교와 시민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육화론적 영성생활과 봉사신앙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그의 공로로 장로회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한국교회를 빛낼 인물 1위’로 선정되었으며, ‘올해의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동대학교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의 겸임교수로 활동하면서 TV 방송 진행과 저술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p><p><br/></p><p>생애</p><p>최일도 목사는 1957년 9월 10일에 태어났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대학원도 했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중, 굶주린 함경도 할아버지에게 라면을 끓여드린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1988년부터 도시 빈민과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사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신학대학원 시절에는 성공회 성 베다 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다일공동체를 설립하여 무료 병원과 영성수련원을 운영하며 국내외 빈민 구호와 사회봉사에 힘써왔고, 목회철학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한동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방송과 저술을 통해 사회선교와 나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p><p><br/></p><p>평가</p><p>최일도 목사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삶과 사역은 단순한 신앙을 넘어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적극적인 사랑과 봉사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다일공동체를 통해 무료 병원과 영성수련원을 운영하며 국내외 빈민 구호에 앞장선 점은 그의 헌신과 실천적인 목회철학을 잘 보여준다.</p><p>또한, 그는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강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고, 사회선교와 시민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학계와 방송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영향력을 넓혀온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p><p>전반적으로 최일도 목사는 신앙과 사회봉사를 통합한 ‘삶으로 실천하는 목회자’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깊은 감동과 변화를 불러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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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0:01:39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72615</guid>
      </item>
      <item>
         <title>10812정지우 -스크랜튼 부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186462</link>
         <description><![CDATA[<p><strong>메리 스크랜트 1832년12월9일 매사추세츠 주 벨처</strong></p><p><strong>타운에서 감리교 벤튼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strong></p><p>1909년에&nbsp; 건강악화로 인해 늦은 나이에 조선에 들어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24년 동안 조선 여성들을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77세 때 별세하여 이곳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p><p>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화학당을 설립]</p><p>그녀는 52세 되던 1884년 미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고,</p><p>이듬해 외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p><p>처음엔 한국에 들어와 익숙지 않은 음식과 환경으로 고생을 하셨었다.</p><p>전국 곳곳을 다니며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셨다</p><p>스크랜튼 대부인이 1898년에 쓴 보고서에 보면 모두 8명의 전도부인들이 그녀와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전도부인은 전국 곳곳을 다니며 대복음을&nbsp; 전했다.</p><p>여성들은 스크랜턴 대부인으로 부터 직접 복음을 듣기를 원하여서 각지의 편지를 보내왔다</p><p>당시에는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고 교육 기회 조차도 없었는데</p><p>조선에서 메리 스크랜튼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p><p>단순히 외국인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낯선 땅의 여성들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그들에게 배움을 통해 자립의 길을 열어준 점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p><p>진정한 선교사는 단지 종교의 전파가 아닌 사랑과 실천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p><p>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교육의 기회와 권리가 누군가의 헌신괴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되세기게 됩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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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0:13: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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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09 서인주 10716 이효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465406</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nclosure url="https://youtu.be/TfvA2tvr9mk?si=-iSVECPqM-RWUXro" />
         <pubDate>2025-06-12 02:51: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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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05 김하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499886</link>
         <description><![CDATA[<p>1. 메리 스크랜튼(1832~1909)**은 조선에 온 미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strong>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strong>을 1886년에 설립했습니다. 당시 여성 교육이 없던 조선에서, 그녀는 여성들에게 글과 신앙, 위생, 영어 등을 가르치며 교육의 길을 열었습니다. 또한 1887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strong>보구여관</strong>을 세워 여성 의료 활동도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자립과 인권 향상에 큰 기여를 했으며, 1909년 사망 후에도 <strong>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strong>로 존경받고 있습니다.</p><p><br/></p><p>&nbsp; 2.&nbsp; 스크랜튼 부인은 서울 정동 자택에서 여성들에게 글쓰기, 영어, 산수, 성경 등을 가르치며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학교가 점차 커지자 교육 과정을 체계화하고 교사도 양성했다.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을 돌보며 의복, 음식, 위생 교육도 함께 진행했다. 여성 전용 병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887년에는 여의사 메타 하워드를 초청해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했다. 또한 여성 주일학교와 예배 모임을 조직하여 여성 신자들의 신앙 성장을 도왔고, 지방을 돌며 여자 학교와 성경공부 모임을 세우는 등 여성 교육과 선교를 전국으로 확대했다.</p><p><br/></p><p>3. 스크랜튼 부인께서는 당시 여자들이 교육받기 어려웠고 사회적 위치도 낮았던 조선에서,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 교육을 시작하셨고 보구여관을 만들어 여성과 아동 의료에도 힘쓰셨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여성들의 배움과 건강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여성들의 사회적 자립과 권리 신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꿈을 꾸고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여성 교육의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변화가 되었습니다.</p><p><br/></p><p>4. 스크랜튼 부인 덕분에 여자들도 공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 신기하고 존경스러워요.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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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3:10: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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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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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617 정소리</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692863</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strong> : <strong>미국런던에서</strong> <strong>태어나</strong> 13<strong>세가</strong> <strong>되던해에</strong> <strong>미국이주</strong>.</p><p><strong>뉴욕대학교를</strong> <strong>졸업하여</strong> <strong>문학사학위를</strong> <strong>받고</strong> <strong>네덜란드</strong> <strong>개혁신학교에</strong> <strong>입학</strong>.</p><p><br/></p><p><strong>업적</strong> : 1883<strong>년</strong>11<strong>월</strong> <strong>장로교</strong> <strong>목사가</strong> <strong>됨</strong>.<strong>조선이라는</strong> <strong>동아시아의</strong> <strong>생소한</strong> <strong>국가에</strong> <strong>파견할</strong> <strong>선교사</strong> <strong>한명을</strong> <strong>찾지</strong> <strong>못했다는</strong> <strong>소식을</strong> <strong>듣고</strong> <strong>조선에서</strong> <strong>선교활동을</strong> <strong>하기로</strong> <strong>결심</strong>.</p><p><br/></p><p><strong>평가</strong> : <strong>자신의</strong> <strong>선교</strong> <strong>방식과</strong> <strong>교리에</strong> <strong>대해서는</strong> <strong>일체</strong> <strong>타협을</strong> <strong>하지</strong> <strong>않았으며</strong> <strong>이때문에</strong> <strong>다른</strong> <strong>선교사들과</strong> <strong>갈등을</strong> <strong>격기도</strong> <strong>함</strong>.<strong>장로회에서는</strong> <strong>최초의</strong> <strong>장로회선교사로</strong> <strong>연세대학교에서는</strong> <strong>설립자로</strong> <strong>추앙하고</strong> <strong>있으며</strong> <strong>한국</strong> <strong>개신교</strong> <strong>역사에도</strong> <strong>큰</strong> <strong>업적을</strong> <strong>남겼다</strong>.</p><p><br/></p><p><strong>소감</strong> : 이사람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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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5:14: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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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608 박시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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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생애: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가정은 기독교 신앙과 유학 교육을 기반으로 한 가족환경에서 자랐습니다</p><p><br/></p><p>업적: 1959년 한국 최초로 간의 일부를 절제하는 대량 간절제 수술에 성공. 이는 당시로선 고난이도 수술이었으며, 국내 간질환 수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간 질환 연구의 발전과 전문화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피난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 무료 수술을 제공하며 병원을 운영하고 환자가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돈으로 약과 피를 사주고, 병원 뒤문을 열어 퇴원비 없이 보냈다.</p><p><br/></p><p>평가: 의료계, 사회, 종교계 등 전 분야에서 매우 높습니다. 그의 삶은 단지 의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삶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p><p><br/></p><p>소감: 장기려 박사에 대해 알고 장기려 박사님이 무슨 좋은일을 하셨는지 자세히 알았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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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5:22: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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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615이천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7705540</link>
         <description><![CDATA[<p>10615이천문</p><p><br/></p><p>1.생애</p><p>윌리엄 윌버포스는</p><p>영국에서 1759년 8월 24일 잉글랜드 요크셔 주의 <strong>헐(Hull)</strong>, 정식 명칭은 킹스턴 어폰 헐(Kingston upon Hull)에서 태어나</p><p>런던 근처 켄트 주의 브롬리(Bromley) 지역에서</p><p>1833년 7월 29일에 사망했다.</p><p>그는 죽기 전까지도 노예제 폐지를 위한 활동에 열정을 쏟은것으로 알려져 있다.</p><p><br/></p><p>2.활동내용</p><p>윌리엄 윌버포스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p><p>노예제도 폐지가 있다. 구체적으로</p><p>1807년 노예무역 폐지 이후에도 1833년 노예제도 폐지법을 내놓았다. 그외에도 교도소개혁이나</p><p>선교활동을 지속하였다.</p><p><br/></p><p>3.평가</p><p>윌리엄 윌버포스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영국의 정치인이며, 노예제 폐지를 위한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 하원 의원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비인도적인 노예 무역에 맞섰고, 이를 종식시키기 위한 입법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p><p>특히 1787년부터 시작된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그의 신앙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에 기반한 도덕적 확신은 윌버포스로 하여금 노예제도의 비인간성과 사회적 악을 직시하게 만들었다.</p><p><br/></p><p>4.이 사람에 대해 조사하면서</p><p>나도 이사람처럼 자신의</p><p>능력선에서 타인을 도우며 살아가야겠다는</p><p>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돕는것을 다수의 사람들이</p><p>실천하면 결국 공공의 이익으로 돌아오는 뜻깊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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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05:22: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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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0908신현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621536</link>
         <description><![CDATA[<p><br/></p><p>생애</p><p>장기려 박사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의 한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고향의 의성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의전에 입학할 당시인 17세 때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게 해준다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첫 결단이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던 해 곧 21세 때 김봉숙과 결혼하고, 장인 김하식의 권유로 백인제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게 된다. 이때부터 패혈증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1940년 9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경성의전에서 일했으나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으로 옮겨갔고, 두 달 후 안도선의 후임으로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모략과 질시 때문에 다시 두 달 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심리적 고통이 있었으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 있다. </p><p><br>활동 내용&lt;업적&gt;</p><p>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했다. 1936년까지 약 270건의 실험에 바탕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인에게 발병률이 매우 높은 간암으로 연구를 넓혀 194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암의 절제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간장외과학을 개척했다. 후속 연구로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 연구’를 비롯해 ‘간 절제술의 절제단의 처치법’과 ‘간경변증시 간 절제의 한계 및 간의 급성 실조시 대상의 방법들에 관한 실험’ 등을 진행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959년 원발성간암에 대한 간우협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했다. 당시 열악한 수술기구나 진단기술의 한계 속에서 수술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후에도 간 연구를 지속하여 1979년에는 20년간 한국에서 실시된 189건의 간 대량 절제 수술의 사례를 수집 및 분석하여 간암의 부위에 따라 수술법을 달리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p><p><br/></p><p>평가</p><p>장기려 박사는 간장외과학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의사이자 환자를 위해서 인생을 희생한 의사였다. 2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의료윤리, 사상과 신앙, 이타적 삶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대단하며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p><br/></p><p>소감</p><p>한국에서 최고의 실력으로 국가와 여러 대학에서 수많은 상을 받은 의사이지만 환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간암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민하며 결국 간암 절제술을 개발한 대단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간암 절제술 개발에 만족하지 하고 각종 복지 단체와 청십자 병원을 설립하여 대한민국의 의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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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23:48: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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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15최병찬</title>
         <author>a01054344722</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629327</link>
         <description><![CDATA[<ol><li><p>생애: 최일도목사는 1957년 9월 10일에 태어났으며, 대한민국에 태어나 장로 신학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신학대학원에 졸업을 했다.</p><p><br/></p></li><li><p>업적: 사회봉사 단체이며 개신교 영성 공동체인 다일공동체<strong>의</strong> 설립자로써 대한민국 최초<strong>의</strong>무료 병원인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영성생활수련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strong>의</strong> 개발도상국에 해외분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p><p><br/></p></li><li><p>평가: 최일도 목사님은 한국에서 가장 실천적인 사랑을 보여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활동이 공공성과 법적 테두리 내에서 조율될 필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되고 있습니다.</p><p>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서부터 ‘과도한 종교적 영향력 행사자’까지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한국 사회에서 나눔과 섬김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점입니다.</p><p><br/></p></li><li><p>소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도와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며 나도 어려운 사람들이있으면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p></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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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23:56: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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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11이성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629731</link>
         <description><![CDATA[<p>1. 생애</p><p>셔우드 홀 가족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온 선교사 가정으로, 3대에 걸쳐 한국에서 의료 선교와 사회복지 활동을 하였습니다.</p><p>윌리엄 제임스 홀은 1891년에 조선에 와서 의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94년 평양에서 순직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출신의 여성 의사로,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 교육과 장애인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서며,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펼쳤습니다.</p><p>2. 활동내용</p><p>셔우드 홀 가족은 조선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료선교 활동을 했습니다.</p><p>특히 로제타 홀은 여성 의료진을 양성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에스더(김점동)를 키웠고, 시각 및 청각 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를 설립하여 장애인 교육에 힘썼습니다. 또한 셔우드 홀은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를 만들고,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 결핵 퇴치 기금을 모았습니다.</p><p>3. 평가</p><p><br/></p><p>4. 소감</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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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2 23:57: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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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03 김한결 &lt;가편집 본&gt;</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636051</link>
         <description><![CDATA[<p><br/></p><p>1.생애</p><p>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1991년 4월 5일 98세를 일기로 별세.</p><p><br/></p><p>1893년 11월 10일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4%9C%EC%9A%B8">서울</a>에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4%A0%EA%B5%90%EC%82%AC">선교사</a>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忽)과 어머니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1%9C%EC%A0%9C%ED%83%80%20%EC%85%94%EC%9A%B0%EB%93%9C%20%ED%99%80">로제타 셔우드 홀</a>(Rosetta Sherwood, 許乙) 사이에서 태어났다.</p><p><br/></p><p>한국에서 추방당한 1941년부터 1963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앞장섰으며, 1991년 4월 5일 98세를 일기로 별세.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E%A5%EB%A1%80%EC%8B%9D">장례식</a>을 치르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6%91%ED%99%94%EC%A7%84%EC%99%B8%EA%B5%AD%EC%9D%B8%EC%84%A0%EA%B5%90%EC%82%AC%EB%AC%98%EC%9B%90">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a>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p><p><br/></p><p>2.활동내용</p><p>1911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8%A4%ED%95%98%EC%9D%B4%EC%98%A4">오하이오</a> 주 마운트 허먼(Mount Hermon) 학교를 거쳐, 1919년 마운트 유니언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매리언과 결혼했다. 1923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86%A0%EB%A1%A0%ED%86%A0">토론토</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D%98%EA%B3%BC%EB%8C%80%ED%95%99">의과대학</a>을 졸업하고, 1924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9%B4%EC%9A%95">뉴욕</a>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A%B2%B0%ED%95%B5">결핵</a> 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A%B0%90%EB%A6%AC%ED%9A%8C">감리회</a>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매리언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br><br>1926년 7월 해주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하여, 의창(懿昌) 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운산금광(동양연합광업회사)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7일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B4%EC%A3%BC%EC%8B%9C">해주시</a>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하여 한국 최초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br><br>결핵 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셔우드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 꼴인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대한민국</a>에서는 5사람 중 한 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5%AD%EC%9D%B8">한국인</a>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lt;부끄러운 병&gt;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 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이 결핵 문제는 셔우드 개인과도 연관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B0%95%EC%97%90%EC%8A%A4%EB%8D%94">박에스더</a>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B3%B4%EA%B5%AC%EB%85%80%EA%B4%80">보구녀관</a>에서 셔우드의 어머니 로제타와 함께 활동한 인연으로 인해 셔우드와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 박에스더는 과로와 이 결핵이 겹쳐서 1910년에 사망했다.<br><br>결핵 치료의 재원 마련을 위해 1932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81%AC%EB%A6%AC%EC%8A%A4%EB%A7%88%EC%8A%A4%20%EC%94%B0">크리스마스 씰</a>을 도입했으며, 이후 1940년까지 9회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으나, 일본 헌병대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 5,000엔과 함께 국외추방되었다.</p><p><br/></p><p>3.평가</p><p>셔우드 홀 가족들을 보고 </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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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03: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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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09윤믿음 </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641045</link>
         <description><![CDATA[<p>당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F%85%EC%9D%BC">독일</a>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5%84%EB%8F%8C%ED%94%84%20%ED%9E%88%ED%8B%80%EB%9F%AC">아돌프 히틀러</a>의 등장과 더불어 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특히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당시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정도로 우경화 되고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교회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설립하고 고백교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며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br><br>그러나 당국은 그에게 감시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곧 교수직과 목회 자체에 대해서도 조금씩 제제를 가하고 있었다.<br><br>이 시기의 독일 남성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A7%95%EB%B3%91%EC%A0%9C">반드시 군복무</a>를 해야만 했다. 평화주의자이며 반나치사상가였던 본회퍼에게도 위기가 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5%84%ED%94%84%EB%B2%A0%EC%96%B4">아프베어</a>의 수장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B9%8C%ED%97%AC%EB%A6%84%20%EC%B9%B4%EB%82%98%EB%A6%AC%EC%8A%A4">빌헬름 카나리스</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A0%9C%EB%8F%85">제독</a>이 손을 써서 본회퍼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5%84%ED%94%84%EB%B2%A0%EC%96%B4">아프베어</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GY8CJUyU" href="https://namu.wiki/w/%EB%94%94%ED%8A%B8%EB%A6%AC%ED%9E%88%20%EB%B3%B8%ED%9A%8C%ED%8D%BC#fn-5"><sup>[5]</sup></a> 소속 정보원 신분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8%81%EA%B5%AD">영국</a>에 파견을 나가는 것으로 복무를 대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F%85%EC%9D%BC%20%EA%B5%AD%EB%B0%A9%EA%B5%B0">독일 국방군</a>에 영국에 대한 동향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외 나머지 평일에는 자유로이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br><br>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7%9D%EB%AA%85">망명</a>을 권유했다. 특히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9%B4%EC%9A%95">뉴욕</a>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는 그에게 연구교수직을 제안했다. "학생을 가르치지 않아도 좋으니 학교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라"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일단 독일을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포들이 어둠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독일로 귀국하기에 이른다.      목사가되기전:     그는1906년2월4일 독일제국의 브레이크슬라우에서 태어남</p><p>그의집안은 루터교회에 뿌리를 둔전통적인 개신교 가문이었다.</p><p>할아버지는 플로이센 왕국 왕실의 궁전목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도 자녀들에게 성서이야기,시,노래를 거르칠 정도로 믿음과 교왕이 모두 훌륭하다.</p><p>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큰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며, 그가 신학도의 길을 걸어가려 하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으로알려져있다.</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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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07: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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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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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119최나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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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trong>윌리엄 윌버포스</strong></p><p><br/></p><p>1.생애:</p><p><br/></p><p>1759년, 영국 요크셔의 킹스톤 어폰 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690%EB%85%84">1690년</a> -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776%EB%85%84">1776년</a>)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B0%9C%ED%8A%B8">발트</a> 교역에서 부자가 된후 헐 시장을 두 번 역임한 유지였다. 아버지는 로버트 윌버포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728%EB%85%84">1728년</a> -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768%EB%85%84">1768년</a>)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9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큰아버지 집에서 지내다가 큰아버지의 유산까지 상속받아 일찍부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4]</p><p><br/></p><p>2.업적:</p><p>윌버포스는 무려 20년 넘게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의 비인간성 과 부도덕함을 알리는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계속해서 말했고, 마침내 1807년 영국에서는 노예무 역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예제 자 체를 없애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 기 직전인 1833년, 영국은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 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평생 바라던 세상 을 눈으로 보고 생을 마감했습니다.</p><p><br/></p><p>3.평가:</p><p>윌리엄 윌버포스 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노예제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역사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을 여러 측면에서 평가해볼 수 있습니다</p><p>그는 복음주의적 신앙에 입각하여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정치인으로서 도덕적 개혁 을 추진했습니다.</p><p>도박, 음주, 폭력 등 당대의 여러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고, 사회적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p><p><br/></p><p>4.소감:</p><p>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한 <strong>개인적인 소감</strong>을 정리하자면, 그는 단순히 한 정치인이 아니라 <strong>신념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strong>이라는 점에서 깊은 감동을 줍니다</p><p>윌버포스의 삶을 보면, 한 사람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strong>그렇다 고 말해주는 증거</strong> 같아요.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 오히려 저항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strong>노예제 폐지</strong>를 위해 평생을 바쳤죠. 쉽게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려 20년 이상을 같은 법안을 계속 제출하고 싸워나간 끈기와 용기는 정말 놀랍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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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46: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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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08 박동한,11114 장준혁</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720347</link>
         <description><![CDATA[<p>헐버트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1863%EB%85%84">1863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1%EC%9B%94_26%EC%9D%BC">1월 26일</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B%AA%AC%ED%8A%B8%EC%A3%BC">버문투즈</a> 뉴헤이번에서 아버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xtiw" href="https://en.wikipedia.org/wiki/Calvin_Butler_Hulbert">칼빈 헐버트</a>와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로 사이에서 3남 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버몬트주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mw-redirect"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3%A4%EB%B2%A0%EB%A6%AC_%EB%8C%80%ED%95%99%EA%B5%90">미들베리 대학교</a> 총장이었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xtiw" href="https://en.wikipedia.org/wiki/Calvin_Butler_Hulbert">칼빈 헐버트</a> 목사였다. 어머니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D%8A%B8%EB%A8%B8%EC%8A%A4_%EB%8C%80%ED%95%99%EA%B5%90">다트머스 대학교</a>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메리 우드워드로, 그녀의 아버지는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였던 관계로 어머니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하였다.</p><p>1882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B%AF%B8_%EC%88%98%ED%98%B8_%ED%86%B5%EC%83%81_%EC%A1%B0%EC%95%BD">조미수호통상조약</a>을 체결한 조선은 영어와 근대식 교육을 담당해줄 교사 파견을 미국에 요청했다. 1884년 여름, 미국 교육위원장 이튼(John Eaton)은 대학선배인 헐버트의 아버지에게 아들 중 1명을 조선에 교사로 파견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호머 헐버트는 자원하여 조선에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중에 1884년 12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A%B0%91%EC%8B%A0%EC%A0%95%EB%B3%80">갑신정변</a>으로 인해 계획이 연기되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D%8A%B8%EB%A8%B8%EC%8A%A4_%EB%8C%80%ED%95%99%EA%B5%90">다트머스 대학</a>을 졸업한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mw-disambig"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88%EC%96%B8_%EC%8B%A0%ED%95%99%EA%B5%90">유니언 신학교</a>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고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해 공부하며 준비를 계속하였다. 조선의 정국이 안정되자 헐버트는 조선에 가기위해서 1886년에 유니언 신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했다.</p><p><strong>입국후 활동</strong></p><p>벙커(Bunker), 길모어(Gilmore)와 함께 1886년 7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호머 헐버트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9C%A1%EC%98%81%EA%B3%B5%EC%9B%90">육영공원</a>(育英公院) 교사가 되었고 헐버트는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1888%EB%85%84">1888년</a> 3월경부터는 하루 2시간씩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A4%91%EC%9B%90">제중원</a> 학당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헐버트는 입국직후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한국어 학습이 필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비로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웠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8%B8_%ED%97%90%EB%B2%84%ED%8A%B8#cite_note-15"><sup> </sup></a>그의 회고록에는 "배우기 시작한지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적혀있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8%B8_%ED%97%90%EB%B2%84%ED%8A%B8#cite_note-16"><sup> </sup></a>한국어 학습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그는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p><p>고종은 육영공원 학생들을 궁으로 불러 영어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는데, 고종이 영어 문제를 직접 읽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고종은 영어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한글로 발음이 표기된 것을 보고 영어문장을 읽는 모습을 본 헐버트는 별도의 발음기호 없이 직접 영어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p><p>한글에 우수성을 깨닮은게  감영 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분을 선택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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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57: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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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16 정태성 </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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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 1863년 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B2%84%EB%AA%AC%ED%8A%B8">버몬트</a>주<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3"><sup> </sup></a>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F%B8%EB%93%A4%EB%B2%84%EB%A6%AC%20%EC%B9%BC%EB%A6%AC%EC%A7%80">미들버리 칼리지</a>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B%A4%ED%8A%B8%EB%A8%B8%EC%8A%A4%20%EB%8C%80%ED%95%99%EA%B5%90">다트머스 대학교</a>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C%A1%EC%98%81%EA%B3%B5%EC%9B%90">육영공원</a>(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A%B3%A0%EC%A2%85">고종</a>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4"><sup> </sup></a>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사역하다 일시 귀국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7%A8%EB%A6%AC%20%EC%95%84%ED%8E%9C%EC%A0%A4%EB%9F%AC">헨리 아펜젤러</a>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p><p><br/></p><p>2.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5%84%EB%A6%AC%EB%9E%91">아리랑</a>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p><p><br/></p><p>3.재입국 후 1895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D%84%EB%AF%B8%EC%82%AC%EB%B3%80">을미사변</a>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6%B8%EB%8D%94%EC%9A%B0%EB%93%9C">언더우드</a> 그리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7%90%EB%B9%84%EC%8A%A8">에비슨</a>과 함께 고종을 보호한 3인의 외국인 중 한명이였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5"><sup>[5]</sup></a> 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F%85%EB%A6%BD%EC%8B%A0%EB%AC%B8">독립신문</a>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br>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C%84%B1%EC%82%AC%EB%B2%94%ED%95%99%EA%B5%90">한성사범학교</a>의 책임자가 되었다</p><p><br/></p><p>4.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A%B3%A0%EC%A2%85(%EB%8C%80%ED%95%9C%EC%A0%9C%EA%B5%AD)">고종</a>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8%B8%EB%9F%AC%EC%8A%A4%20%EB%89%B4%ED%84%B4%20%EC%95%8C%EB%A0%8C">호러스 뉴턴 알렌</a>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6"><sup>[6]</sup></a>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B%9C%EC%96%B4%EB%8F%84%EC%96%B4%20%EB%A3%A8%EC%8A%A4%EB%B2%A8%ED%8A%B8">시어도어 루스벨트</a>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7%A4%EC%9D%B4%EA%B7%B8%20%ED%8A%B9%EC%82%AC">헤이그 특사</a>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p><p><br/></p><p>5.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5%84%EB%A6%AC%EB%9E%91">아리랑</a>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p><p><br/></p><p>6.재입국 후 1895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D%84%EB%AF%B8%EC%82%AC%EB%B3%80">을미사변</a>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6%B8%EB%8D%94%EC%9A%B0%EB%93%9C">언더우드</a> 그리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7%90%EB%B9%84%EC%8A%A8">에비슨</a>과 함께 고종을 보호한 3인의 외국인 중 한명이였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5"><sup> </sup></a>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F%85%EB%A6%BD%EC%8B%A0%EB%AC%B8">독립신문</a>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br>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C%84%B1%EC%82%AC%EB%B2%94%ED%95%99%EA%B5%90">한성사범학교</a>의 책임자가 되었다.</p><p><br/></p><p>7.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A3%BC%EC%8B%9C%EA%B2%BD">주시경</a>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9D%84%EC%96%B4%EC%93%B0%EA%B8%B0">띄어쓰기</a>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9%BC%ED%91%9C">쉼표</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7%88%EC%B9%A8%ED%91%9C">마침표</a>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8"><sup> </sup></a>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받았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8%80%ED%95%99%ED%9A%8C">한글학회</a>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p><p><br/></p><p>8.또한 1892년 &lt;한글&gt;(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8%80">한글</a>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해외 학술지에 활발히 기고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재미있게도 헐버트는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5%AD%EC%96%B4">한국어</a>를 익혔다고 한다. 이러한 한글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9"><sup>[9]</sup></a>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p><p><br/></p><p>9.평가:호머 허트는 우리나라 도움을 많이 줬다.</p><p><br/></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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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58: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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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103 김상원</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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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p><p> 1. 생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1863%EB%85%84">1863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1%EC%9B%94%2026%EC%9D%BC">1월 26일 </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B2%84%EB%AA%AC%ED%8A%B8">버몬트 주</a> 뉴헤이븐 출생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1949%EB%85%84">1949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8%EC%9B%94%205%EC%9D%BC">8월 5일</a> (향년 86세) 별새. </p><p>             아버지 캘빈 헐버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사이에서 출생</p><p><br/></p><p> 2. 활동내역: 재입국 후 1895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D%84%EB%AF%B8%EC%82%AC%EB%B3%80">을미사변</a>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6%B8%EB%8D%94%EC%9A%B0%EB%93%9C">언더우드</a> 그리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7%90%EB%B9%84%EC%8A%A8">에비슨</a>과 함께 고종을 보호한 3인의 외국인 중 한명이였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5"><sup> </sup></a>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8F%85%EB%A6%BD%EC%8B%A0%EB%AC%B8">독립신문</a>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br>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C%84%B1%EC%82%AC%EB%B2%94%ED%95%99%EA%B5%90">한성사범학교</a>의 책임자가 되었다.</p><p>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A%B3%A0%EC%A2%85(%EB%8C%80%ED%95%9C%EC%A0%9C%EA%B5%AD)">고종</a>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8%B8%EB%9F%AC%EC%8A%A4%20%EB%89%B4%ED%84%B4%20%EC%95%8C%EB%A0%8C">호러스 뉴턴 알렌</a>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6"><sup> </sup></a>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B%9C%EC%96%B4%EB%8F%84%EC%96%B4%20%EB%A3%A8%EC%8A%A4%EB%B2%A8%ED%8A%B8">시어도어 루스벨트</a>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7%A4%EC%9D%B4%EA%B7%B8%20%ED%8A%B9%EC%82%AC">헤이그 특사</a>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p><p><br/></p><p>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7"><sup>[7]</sup></a>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9D%84%EC%82%AC%EB%8A%91%EC%95%BD">을사늑약</a>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p><p><br/></p><p>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A3%BC%EC%8B%9C%EA%B2%BD">주시경</a>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9D%84%EC%96%B4%EC%93%B0%EA%B8%B0">띄어쓰기</a>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9%BC%ED%91%9C">쉼표</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7%88%EC%B9%A8%ED%91%9C">마침표</a>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8"><sup> </sup></a>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받았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8%80%ED%95%99%ED%9A%8C">한글학회</a>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p><p><br/></p><p>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A3%BC%EC%8B%9C%EA%B2%BD">주시경</a>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9D%84%EC%96%B4%EC%93%B0%EA%B8%B0">띄어쓰기</a>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C%89%BC%ED%91%9C">쉼표</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B%A7%88%EC%B9%A8%ED%91%9C">마침표</a>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ELlJr+2I" href="https://namu.wiki/w/%ED%98%B8%EB%A8%B8%20%ED%97%90%EB%B2%84%ED%8A%B8#fn-8"><sup>[8]</sup></a>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a rel="nofollow noopener ugc" class="DuheRWB1" h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803594">#</a>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받았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8%80%ED%95%99%ED%9A%8C">한글학회</a>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br><br>또한 1892년 &lt;한글&gt;(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8%80">한글</a>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해외 학술지에 활발히 기고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재미있게도 헐버트는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Rewi8BPc" href="https://namu.wiki/w/%ED%95%9C%EA%B5%AD%EC%96%B4">한국어를</a> 익혔다고 한다. 이러한 한글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p><p><br/></p><ol start="3"><li><p>평가: 호머 허버트는 우리나라를 위해 여러 도움을 주면서도 한국어라는 언어를 공부하고 사민필지라는 책도 쓸만큼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도 매우 많은 도움을 주어 우리 국가를 많이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p></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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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0:58: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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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015 전민찬</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793438</link>
         <description><![CDATA[<p><strong>1.생애</strong></p><p>장기려 박사는 1911년 4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 속에서도 그는 의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이어갔고, 1935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의사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의사로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사,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적인 의사로서 길을 걸었습니다.</p><p>장기려 박사는 한국전쟁 중 수많은 민간인과 북한 포로들을 치료하며 그의 의사로서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또한, 그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장기려 박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p><p>그는 1995년 4월 11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가 남긴 유산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p><p><strong>2. 활동 내용</strong></p><p><strong>의료 활동</strong><br>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신경정신과와 마취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전쟁 동안에는 피난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고, 전쟁 중에도 민간인과 포로들에게 헌신적인 의료 서비스를 이어갔습니다.</p><p><strong>사회적 활동</strong><br>장기려 박사는 단순히 의학적 치료를 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고아원과 양로원 설립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복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의사로서의 역할은 단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p><p><strong>봉사 정신</strong><br>장기려 박사는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며, 나누는 삶을 중요시했습니다. 그의 의료 봉사와 사회 복지 활동은 그저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한 예시였습니다.</p><p><strong>3. 평가</strong></p><p>장기려 박사는 단순히 의사로서의 업적을 넘어, 인간애와 사회적 책임감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활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제공합니다.</p><p>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의사의 사명이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헌신이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의료 봉사뿐만 아니라 인권과 복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유산은 매우 뜻깊습니다.</p><p><strong>4. 소감</strong></p><p>장기려 박사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의 삶이 단순히 의학적인 업적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져준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나누고 봉사하는 삶"이 진정한 삶의 의미임을 보여주었습니다.</p><p>그의 의사로서의 헌신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 복지와 인권에 대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감을 줍니다. 장기려 박사의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p><p>그의 유산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내가 만약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따라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p><p>이 내용은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업적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그의 삶을 되새기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을 다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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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1:36: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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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1014이한별</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796444</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최일도</strong>(崔一道, 1957년 9월 10일 ~ )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대한민국</a>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C%98%88%EC%88%98%EA%B5%90%EC%9E%A5%EB%A1%9C%ED%9A%8C(%ED%86%B5%ED%95%A9)">장로교</a> 목사이자 시인, 빈민 운동가이다</p><p><br/></p><p>업적)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병원인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영성생활수련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해외분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한편, 본인(최일도)이 원년멤버 MC로 활동한 C채널 &lt;힐링토크 회복&gt; 7회(2013년 1월 22일) 게스트로 나온<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C%EB%8F%84#cite_note-1"><sup>[1]</sup></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F%B8%ED%99%94">김미화</a>는 본인(최일도)이 대표로 있는 다일공동체 대표이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C%EB%8F%84#cite_note-2"><sup>[2]</sup></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2013%EB%85%84">2013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8%EC%9B%94_20%EC%9D%BC">8월 20일</a>부터 본인(최일도) 등과 공동 진행을 맡아왔지만<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C%EB%8F%84#cite_note-3"><sup>[3]</sup></a> 연기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빠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84%B1%EB%AF%BC_(1969%EB%85%84)">임성민</a>의 뒤를 이어<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2015%EB%85%84">2015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2%EC%9B%94_2%EC%9D%BC">2월 2일</a>부터 &lt;힐링토크 회복&gt; MC로 발탁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84%A0%ED%9D%AC">정선희</a>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F%B8%ED%99%94">김미화</a>의 여동생과 같은 학교에 다녀<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D%BC%EB%8F%84#cite_note-4"><sup>[4]</sup></a> 개그우먼이 되기 전부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F%B8%ED%99%94">김미화</a>와 알고 지내왔으며 &lt;힐링토크 회복&gt;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2015%EB%85%84">2015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5%EC%9B%94_4%EC%9D%BC">5월 4일</a>부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84%A0%ED%9D%AC">정선희</a> 단독 진행으로 바뀌었는데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84%A0%ED%9D%AC">정선희</a>가 이 프로그램 193회(2014년 11월 18일) 게스트로 나온 바 있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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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1:38: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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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017 정재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23381</link>
         <description><![CDATA[<p>생애 : 장기려 박사(1911~1995)는 한국의 외과 의사이자 부산 복음병원의 설립자이며, 한국 의료복지의 선구자이자 의료 선교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과 봉사의 정신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외과 수련을 받은 뒤, 귀국하여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p><p>대표적인 활동들 : 특히 간 질환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외과의로 평가받았으며, 한국 최초로 간 절제 수술을 성공시킨 외과의이기도 합니다.</p><p><br/></p><p>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와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부상자들과 피난민을 치료하며 의료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이후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무료 진료 활동을 시작했고, 무의촌 진료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헌신적인 진료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p><p><br/></p><p> 자신의 월급을 병원 운영과 환자 치료에 쏟아부었으며, 생활은 검소하게 유지했습니다. 이런 삶 때문에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습니다.</p><p><br/></p><p>장 박사는 또한 의료보험 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여 한국 민간 의료보험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제도는 훗날 한국 국민건강보험의 모델이 되었으며, 의료 사각지대 해소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의료 철학을 평생 실천하며 살아갔습니다.</p><p><br/></p><p><br/></p><p>장기려 박사님의 대한 내 평가 :</p><p>전쟁속에서도 다친 사람들을 위해 그 위험한 전방에서도 </p><p>끊임없는 치료로 많은 이들을 살렸으며 또 피난민이 많이 간 부산에서</p><p>병원을 설립해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처방해 주는 모습을 보여준것으로</p><p>장기려 박사님은 우리나라에서 꼭 기억하고 존중받아 뜻을 이어가야 할만한</p><p>위대하고 자랑스러우신 분이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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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1:55: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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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05 김윤지</title>
         <author>yxnzl</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26046</link>
         <description><![CDATA[<ol><li><p>생애 - 최일도 목사님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신학생 시절 우연히 노숙인에게 라면 한 그릇을 나눠준 경험을 계기로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p></li><li><p>활동내용 - 최일도 목사님은 1988년 서울 청량리 쌍굴다리 아래에서 끼니를 굶는 노숙인과 독거노인을 위해 직접 밥을 지어 나눠주며 ‘밥퍼’ 무료급식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 작은 실천은 이후 빈곤, 질병, 소외 문제에 종합적으로 대응하는 비영리단체 ‘다일공동체’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최일도 목사님은 이 공동체를 통해 무료 진료서인 ‘다일천사병원‘을 세우고, ’꿈퍼(교육지원)‘, ‘빵퍼(해외 빈곤 지역 아동 지원)‘ 운동을 통해 국내는 물론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탄자니아, 우간다 등 전 세계 11개국 21개 분원에서 지속적인 나눔과 복지 사역을 실천하며, 나아가 영성 수련과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회복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돌봄을 펼쳐왔습니다.</p></li><li><p>평가 - 최일도 목사님을 보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뜻깊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다른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나 말이 힘들지 않고, 오히려 이런 캠페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하시는 모습이 멋졌습니다.</p></li><li><p>소감 - 이번 수행평가를 통해서 많은 목사님들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나도 어려운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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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1:56: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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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1003김서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27249</link>
         <description><![CDATA[<p>최일도 목사</p><p><br/></p><p>생애 </p><p>최일도 목사는 한국에서 1957년 9월 10일에 태어나 사역과 활동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 밥퍼 나눔 운동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있다 신학을 전공한 후, 독일과 프랑스로 유학을 계획했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내와 함께 청량리로 이주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아직 살아게심</p><p><br/></p><p>활동내용</p><p>최일도 목사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서 무료 급식 활동인 ‘밥퍼 나눔 운동’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활동해왔습니다. 그의 사역은 다일공동체라는 사회복지단체를 통해 진행되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치료비 지원과 해외 빈곤 아동들의 교육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2022년, 서울시가 다일복지재단의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건물의 무단 증축에 대해 건축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최일도 목사는 9박 10일의 묵언·단식기도를 진행하며 항의하였고, 이후 서울시와 협의를 통해 증축 건물을 기부채납하는 조건으로 갈등이 해결되었습니다 .  또한, 최일도 목사는 ‘밥 피스 메이커’라는 평화 통일 퍼포먼스를 통해 남북한 병사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자는 구호를 외치며 민간 차원의 대북 교류를 촉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그의 사역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 우간다 등 10개국에 17개 분원을 두고 있으며, ‘밥퍼’(무상급식), ‘꿈퍼’(교육사업), ‘헬퍼’(의료사업), 1:1 아동결연 등의 다양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p><p><br/></p><p><br/></p><p>평가</p><p>이사람의 생애는 1988년부터 밥퍼나눔운동을통해 노숙인,이웃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집적 현장에서 몸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또 다일공동체를 설립해 의료지원,교육해외 빈곤 아동 지원같은 체계적인 살회복지 활동을 펼쳤다</p><p><br/></p><p><br/></p><p>소감</p><p>말로만 하는 도움이 아니라 진짜로 도와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 그리고 꾸준함과 인내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나도 최일도 목사님 같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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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1:57: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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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16 전준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33816</link>
         <description><![CDATA[<p><mark>생애</mark>: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으며,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조수 및 강사, 1940년 일본 나고야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 1947년 평양의과대학의 외과 교수, 1950년에 월남한 다음 서울대 외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다.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여 간장외과 발전에 돌파구를 마련하였습니다. 지속된 간에 대한 후속 연구로 수많은 간질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1968년에는 국내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고 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무료진료에 나서는등 은퇴가 없는 초인적인 박애와 봉사의 삶을 살았다.</p><p><br/></p><p><mark>업적</mark>: 1943년 국내 최초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요약하면 간장외과의 발전, 촤초의 미간 의료 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그리고 지역 사회 봉사활동 등이 있습니다.</p><p><br/></p><p><mark>평가</mark>: 장기려 박사는 단순히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살고싶게 만드는 ’의사’였던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고 싶은 그 집념과 도와주고 싶은 그 마음이 청십자병원 설립, 무료진료라는 결정이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닐테지만 장기려 박사는 조금 남다른 사람이였던것 같습니다. 질병만 치료하는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그런 의사가 아니였나 생각해보았습니다.</p><p><br/></p><p><mark>소감</mark>: 장기려 박사의 업적과 생애를 검색해보면서 ’이렇게 대단하신분을 내가 몰랐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단순한 의사가 아닌 그 이상을 보여주었던 장기려 박사의 생애를 돌아보니 힘들게 산 정도가 아니구나 라는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도 장기려 박사와 똑같이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의 모습을 본 받아서 끊임없이 모두를 도와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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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01: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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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12 이승영</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33913</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strong></p><p>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부산으로 내려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의료비를 받지 않고 환자들에게 '월급은 식구 수대로'라는 철학을 실천하며, 의료인의 사명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제도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의료 복지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리며, 생애를 통해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p><p><br/></p><p>업적</p><ul><li><p><strong>복음병원 설립</strong>: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의료 소외계층을 돌보며 평생 무료 진료를 실천</p></li><li><p><strong>청십자의료보험조합 창설</strong>: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어 국민건강보험의 기틀 마련</p></li><li><p><strong>의료윤리 실천</strong>: 의술을 돈벌이 수단이 아닌 봉사의 도구로 여기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림</p></li><li><p><strong>학술 및 교육 활동</strong>: 인재 양성과 학술 활동을 통해 한국 의료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p></li></ul><p>&nbsp;&nbsp;</p><p>평가</p><p>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이웃에게 무상의료를 실천하고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을 도입해 국민의료 접근성을 넓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봉사를 실천한 그는 청렴한 삶과 겸손한 태도로 동료와 제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명예를 철저히 멀리한 그의 삶은 한국 의료윤리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인술의 본보기로 회자됩니다.</p><p><br/></p><p>소감</p><p>장기려 박사님의 삶을 알게 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의사라는 직업을 넘어서 아픈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분이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병원비를 대신 내주고 늘 겸손하게 살아가셨다는 이야기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을 좇기 쉬운 시대에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의 삶은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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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01: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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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20 한진희</title>
         <author>h01075621039</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44003</link>
         <description><![CDATA[<p>윌리엄 윌버포스</p><p><br/></p><p>1.생애</p><p><br/></p><p>윌버포스는 1759년 8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헐(Hull)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라게 됩니다.그 다음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말솜씨와 사교성으로 유명했으며, 윌리엄 피트(훗날 총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21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정치보다는 사교 생활에 더 집중했습니다.유럽 여행 중 신앙적으로 깊은 감화를 받아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삶의 방향이 바뀌어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게 됩니다.건강 악화로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계속해서 노예제 폐지 운동에 참여하고 1833년 7월 26일, 노예제 폐지 법안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3일 뒤인 7월 29일에 사망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안장됨.</p><p><br/></p><p>2.업적</p><p><br/></p><p>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 신념을 세우고, 사회 정의와 도덕성 회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그의 활동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노동 착취 개선, 도박과 음주 문화 개선 등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1787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합니다.노예제의 비인간성과 비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하며, 동료들과 함께 끈질기게 법안을 추진했습니다.그러나 수년 동안 그의 노력이 무시되거나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20년 가까운 끈질긴 노력 끝에 1807년,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이 법은 영국 내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행위를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윌버포스는 말년에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지만, 여전히 노예제 완전 폐지를 위한 운동에 참여했습니다.그는 1833년 7월 26일, 노예제 폐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 뒤인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노력은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p><p><br/></p><p>3.평가</p><p><br/></p><p>윌버포스는 영국의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를 이끈 인권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와 도덕 개혁을 실천하며,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생 헌신했습니다. 끈기와 인내로 수십 년간 노예제 폐지에 힘쓴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사회 정의와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귀감이 됩니다.노예제도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상징입니다.정치와 신앙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가받으며, 도덕성과 양심을 정치에 반영하려는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p><p><br/></p><p>4.소감</p><p><br/></p><p>사실 인물조사를 하면서 재미를 느낀적이 이번에 처음인거 같다.</p><p>윌버포스 조사를 하면서 사람의 끈기와 신념이 얼마나 큰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윌버포스가 삶은 정의를 위해 오래도록 싸우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줬다.</p><p><br/></p><p><br/></p><p><br/></p><p><br/></p><p><br/></p><p><br/></p><p><br/></p><p><br/></p><p><br/></p><p><br/></p><p><br/></p><p>정동건 목사님 매우. 잘생기셨어요.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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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06: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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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19 하희성 11013 이은성 메리 스크랜튼 부인</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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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생애</p><p>메리 스크랜튼은 미국 출신으로,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파송을 받아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당시 조선)에 입국하였고 1904년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선 각지를 순회하며 선교와 교육에 헌신하였다.<br>"조선 땅에서 죽겠다"는 신념을 지켰으며,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사망하여 <strong>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strong>에 안장되었다</p><p><br/></p><p><br/></p><p>2.업적</p><p>메리 스크랜튼는 <strong>이화학당 설립 </strong>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설립하셨고</p><p>한국 여성 교육의 문을 열고, 한글·영어·수학·성경 교육 실시단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여성 교육의 상징적 학교로 성장시키셨다. 그리고 평생 한국에 기어하셨다.</p><p><br/></p><p><br/></p><p>3.평가</p><p>이화학당이라는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해</p><p>여성들을 위해 헌신 하신 메리 스크랜트 부인이 훌륭하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p><p><br/></p><p>4.소감</p><p>메리 스크랜트 부인은 여성들을 위해 여러 기관을 설립하셨기에 매우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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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08: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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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010이경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48575</link>
         <description><![CDATA[<p>1.생애</p><p>최일도 목사님은 한국에서 '밥퍼 목사'로 잘 알려진 사회복지 활동가이자 기독교 지도자입니다. 그는 1988년부터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굴다리 지하차도에서 무료급식 운동인 '밥퍼나눔운동'을 시작하여, 노숙인과 소외된 이웃들에게 지속적으로 식사를 제공해왔습니다. 이후 2009년부터는 동대문구 시유지에 가건물을 설치하여 '밥퍼나눔운동본부'를 운영하며,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그의 활동은 단순한 급식 제공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사회적 책임을 결합한 실천적 복음주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p><p><br/></p><p>2.업적</p><p>최일도 목사님은 한국 사회에서 '밥퍼 목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과 복지 활동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p><p><br/></p><p>3.평가</p><p>최일도 목사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종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도 높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p><p><br/></p><p>4.소감</p><p>최일도 목사님의 삶과 사역을 들여다보며 느낀 점은, <strong>신앙이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희생으로 이어질 때 그 힘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준다.</strong></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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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09: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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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1018조해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88871938</link>
         <description><![CDATA[<p>1.생애: 1863년 1월 26일에 아버지인 캘빈 할버트와 어머니인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사이에서 태어났고 1949년 8월 5일 (향년86세) 별세 하였습니다.</p><p><br/></p><p>2.활동내역: 호머 허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1886년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 언론인, 역사학자로,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1886년 한국에 처은 도착한 하버트는 왕립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며,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을 썼습니다. 그는 1889년 &lt;the Korean language&gt;라는 글을 뉴욕 트리뷴에 발표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는 육영공원,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 등에서 교육 활동을 펼치며 한국 근대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한글 교재인 《사민필지》를 집필하여 보급했습니다. 1892년부터 1899년까지 1901년부터 1906년까지 《The Korea Review》를 발행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고종의 밀사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렸으며,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단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국제 사회에 고발했습니다. 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한국에서 추방되었으나, 1949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일주일 만에 별세했습니다.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삼등급을 추서했습니다. 허버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평가되며, 그의 삶과 업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p><p><br/></p><p>3.평가: 허버트는 외국인이지만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한 것이 대답한 것 같습니다. 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힘을 쓰셨던 용기있는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p><p><br/></p><p>4.소감: 저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사람과 친해질때에 다가가는 걸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호머 허버트를 조사하면서 깨닳았습니다. 인간관계는 말이 잘 통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strong>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strong>을요 이런 가르침을 얻게 해준 호머 허버트님 대한민국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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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3 02:21: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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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03김재서 10706박지현</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57455</link>
         <description><![CDATA[<p>생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는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 그리고 반나치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하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는 등 나치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본회퍼는 결국 1945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p><p><br/></p><p><br/></p><p>활동내용  </p><p>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나치 정권에 저항한 신학자이자 목사이자 스파이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실천하며 나치 정권의 불의에 맞섰고,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설립하고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습니다.</p><p><br/></p><p><br/></p><p>평가  </p><p>오늘날에는 주로 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순교자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였다 이미 젊은나이부터 어마어마한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신학자였기에 신학계에서는 그가 좀더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이루지 못한채 목숨을 잃었던 것을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분이 히틀러에게 얼마나 저항하신분이였단걸 알게되어 좋앗다</p><p><br/></p><p><br/></p><p>소감 </p><p>디트리히 본회퍼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히틀러에게 저항하던 용감한 사람이다 너무너무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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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5 23:34: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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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11오연수</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58073</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strong></p><p>최일도 목사는 1956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대학 시절 신학을 전공하며 목회의 길을 결심했고,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며 ‘밥퍼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p><p><br/></p><p>특히 1988년부터 서울 청량리 쪽방촌에서 노숙인과 빈민들을 위해 무료 급식 사역을 하며 ‘다일공동체’를 세워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p><p><br/></p><p><strong>업적</strong></p><ul><li><p>다일공동체 설립 (1988)<br>서울 청량리에서 노숙인과 빈민,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 운동 ‘밥퍼’를 시작해, 매일 점심을 제공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운영.</p></li><li><p>국내외 사역 확대<br>다일공동체는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베트남, 미국 등 해외에도 지부를 설립하여 빈민촌, 고아원, 교육시설을 운영.</p></li><li><p>사회복지, 의료, 교육, 국제구호사업<br>노숙인 무료 진료소 운영, 어린이 공부방, 장학 사업, 긴급구호 활동 등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앞장섬.</p></li><li><p>다수의 저서 출간<br>《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밥짓는 시인 밥퍼 목사》 등 자신의 경험과 철학, 나눔의 가치를 담은 책 출간.</p></li><li><p>각종 사회봉사상 수상<br>대한민국 국민훈장, 보건복지부 장관상, 사회복지대상 등 다수 수상.</p></li></ul><p><strong>평가</strong></p><p>최일도 목사는 한국 교계와 사회 안팎에서 <strong>‘행동하는 목회자’, ‘나눔의 리더’</strong>로 평가받습니다.</p><p>긍정적인 평가는</p><ul><li><p>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 실천</p></li><li><p>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나눔과 봉사 운동</p></li><li><p>한국 사회 복지의 한 전형을 제시</p></li></ul><p>부정적인 시각으로는</p><p>일각에서는 종교인의 사회 참여가 과도하다는 비판이나,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의 미비를 지적하기도 함.<br>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의 진정성과 지속적인 활동에 대해 존경과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입니다.</p><p><br/></p><p><strong>소감</strong></p><p>최일도 목사의 생애와 업적을 보며, 종교적 신념이 단지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사랑과 나눔으로 실천될 때 사회에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p><p><br/></p><p>특히, 밥퍼 운동처럼 아주 작은 한 끼의 나눔이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고,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됩니다.</p><p><br/></p><p>종교를 떠나, <strong>‘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짓는 마음’</strong>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퍼져 나가기를 바라게 됩니다.</p><p><br/></p><p><br/></p><p><br/></p><p>혹시 이 내용을 리포트 형식이나 발표문으로도 정리해드릴까요? 원하시는 형태로 다시 정리해드릴 수 있어요.</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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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5 23:35:29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58073</guid>
      </item>
      <item>
         <title>10704 김태연 10708 서유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65247</link>
         <description><![CDATA[<p>생애</p><p><br/></p><ul><li><p>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p></li><li><p>독일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람</p></li><li><p><strong>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strong>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로 임명됨</p></li><li><p><br/></p><ul><li><p>1902년 6월, 선교를 마치고 중국 상하이로 가던 중<br></p><ul><li><p>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황해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익사</p></li><li><p>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음</p></li><li><p>조선과 미국 선교계에서 큰 충격을 줌</p></li></ul></li></ul><p><br/></p></li></ul><p><br/></p><p>업적</p><ul><li><p>조선 최초의 서양식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함.</p></li><li><p>영어, 수학, 과학, 성경 등 서양식 학문을 가르쳤고, 한국 근대 교육의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받음.</p></li><li><p>한국어로 된 성경 번역 작업에 참여함.</p></li><li><p>특히 신약성경 번역에 공헌하며, 복음 전파의 기반을 마련함.</p></li><li><p>단순한 선교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조선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활동함.</p></li></ul><p><br/></p><p>평가</p><ul><li><p>배재학당 설립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한국에 처음 도입한 인물로, 교육 개혁과 인재 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됨.</p></li><li><p>영어, 과학, 성경뿐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와 인권 의식을 교육함.</p></li><li><p>단순히 종교만 전파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료·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p></li><li><p>조선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활동한 점이 높이 평가됨.</p></li><li><p>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 초기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함.</p></li><li><p>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록됨.</p><p><br/></p><p><br/></p></li></ul><p><br/></p><p>소감</p><p><br/></p><p>서유민)아펜젤러는 조선의 근대 교육과 기독교 전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교사다</p><p>문화적 차이를 넘어 조선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그의 태도는 존경받을 만하다</p><p>그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여전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p><p><br/></p><p>김태연)아펜젤러는 교육과 선교를 통해 조선의 새로운 길을 연 인물이다.</p><p>그의 삶은 조선 근대화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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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5 23:47:38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65247</guid>
      </item>
      <item>
         <title>10709서인주 10716이효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71338</link>
         <description><![CDATA[<p>-생애:윌리엄 제임스 홀_1860년 캐난다 온타리오 글렌뷰얼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태어남 로제타 제임스 홀-1865년 9월19일 미국 뉴욕주 리버티 출생</p><p><br/></p><p>-업적: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에 헌신한 인물들이다 특히 호남지역에서의 의료선교 활동을 통해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결핵 확산을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전국적인 결핵퇴치 운동을 벌엿다 또한 이들은 한센병 체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시 소외받던 환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서양 의학뿐 아니라 한방과의 협력 치료를 병행해 지역 의료의 실용성을 높였다 여성과 빈민 등 의료 소외 계층을 위한 치료뿐 아니라 이화학당을 통한 여성교육에도 깊이 관여하며 한국 사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p><p><br/></p><p>-평가:셔우드 홀 가족의 업적은 단순히 의학적 기여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한국의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생명과 인간의 가치를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익이나 명예가 아닌, 타인을 위한 진정한 사랑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삶인거 같았다</p><p><br/></p><p>-소감:셔우드 홀 가족을 보고 정말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다 우리 사회에도 저런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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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5 23:55: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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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10 석예진 10702 김아람</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76566</link>
         <description><![CDATA[<p>1. 생애</p><p><br/></p><p>스크랜튼 부인, 본명은 메리 플레처 벤튼 스크랜튼이세요. 1832년 11월 9일에 미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856년에 아드님인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을 낳으셨고, 1872년에는 남편과 사별하셨어요.</p><p><br/></p><p>52세가 되시던 해인 1884년에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사로 임명되셨고, 이듬해인 1885년에 아드님 내외분과 함께 조선에 오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시란돈'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며느리분과 구별하기 위해 '대부인'이라고 불렸다고 해요. 1909년 10월 8일에 76세의 연세로 돌아가셔서 양화진에 잠드셨습니다.</p><p><br/></p><p>2. 활동 내용</p><p><br/></p><p>스크랜튼 부인께서는 조선에 오신 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우셨습니다. 당시 조선은 여성들이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이 매우 드물었던 시기였어요. 갑신정변 이후에 미국 감리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파견했는데, 그때 스크랜튼 부인께서 오시게 된 거예요. 김옥균이라는 분이 고종 임금께 학교나 병원을 세우는 것을 건의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p><p><br/></p><p>스크랜튼 부인께서는 이화학당의 설립자이자 첫 번째 교장 선생님으로서 1904년까지 학교 운영과 여학생들 교육에 힘쓰셨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고, 결혼하면 학교를 그만두는 분위기였지만, 점차 학교의 교육 과정을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여성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초등 과정과 고등 과정도 생겼다고 해요.</p><p><br/></p><p>이화학당 외에도 수원에 **삼일소학당**이라는 학교(지금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를 만드시기도 했습니다.</p><p><br/></p><p>3. 평가</p><p>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19세기 말 조선에 오셔서 여성 교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p><p>특히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당시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p><p>그분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한국 여성들이 자립심과 자긍심을 갖도록 이끄는 데 주력하셨습니다.</p><p>스크랜튼 부인의 헌신은 우리나라 근대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고 수많은 여성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p><p><br/></p><p>4. 스크랜튼 부인께 드리는 소감</p><p><br/></p><p>스크랜튼 부인께서는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문을 처음으로 여신 분으로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크랜튼 부인의 가치관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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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0:00: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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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717 임혜윤 10718 정나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77677</link>
         <description><![CDATA[<p>1. 생애</p><p>출생: 메리 스크랜튼은 183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p><p>사망: 한국에서 사역 중이던 1909년, 조선 땅에서 별세했습니다. (정확한 장소는 당시 활동지인 평양 일대로 알려져 있어요.)</p><p><br></p><p>—-</p><p><br></p><p>2. 활동 내용</p><p>조선 최초의 여성 선교사: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19세기 후반 여성 인권과 교육에 헌신했어요 .</p><p>여성 교육사업: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Ewha Haktang,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을 설립했죠. 이를 통해 조선 여성들에게 현대적 교육의 길을 처음 열어주었습니다.</p><p>사회 문화적 영향: 단순히 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 자립을 위한 실질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p><p><br></p><p>—-</p><p><br></p><p>3. 평가</p><p>스크랜튼 부인은 자기보다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고, 용기가 넘쳐나는 사람인것같고 말보다 행동에서 리더십이 나온다고 생각해</p><p><br></p><p>—-</p><p><br></p><p>4.소감</p><p>스크랜튼 부인의 대해 자세하게 알수있었던 시간이되었던것같다 </p><p>앞으로도 열심히 조사할것이다. 조사방법을 더 알게 된거같아서 좋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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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0:02: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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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715이동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0881262</link>
         <description><![CDATA[<p>생애</p><p>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친 참의사였습니다. <strong><mark>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사와 박애의 삶을 실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존경을 받았습니다</mark></strong></p><p>활동내용</p><p>장기려 박사는 외과의사이자 사회사업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의료 봉사와 박애를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는 무료 진료 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여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또한 간 질환 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며 존경받았습니다</p><p>평가</p><p>장기려 박사는 헌신적인 의료 활동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봉사 정신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돈으로 치료비를 지원하고, 평생을 인술을 베푸는 데 헌신한 의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초석을 다진 청십자운동을 시작한 것으로도 평가받습니다</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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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0:06: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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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117 조미수</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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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최일도 목사</p><p><br/></p><p>1. 생애 1957년 9월 10일에 태어난 최일도는 대한민국의&nbsp;장로교&nbsp;목사이자 시인, 빈민 운동가이다. 사회봉사 단체이며 개신교 영성 공동체인 다일공동체의 설립자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병원인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영성생활수련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해외분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p><p> 최일도는 장로회신학대학교신학과(TH.B) 및 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였다. 아침마당에 나와서 사회선교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최일도 목사가 당시 방송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유학을 준비하던 중 굶주려 쓰러진 함경도 할아버지에게 라면을 끓여드린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p><p> 현재 최일도는 그의 모교인 장로회 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그는 한국교회를 빛낼 인물 1위로 선정되었고 올해의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한국언론인연합회) 등을 수상하였으며 현재&nbsp;한동대학교&nbsp;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의 겸임교수 및 TV방송 진행과 저술활동에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2023년 최 목사는 육종암&nbsp;판정을 받은 근황을 전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육종은 뼈, 연골, 근육, 지방, 신경, 혈관 등의 비상피성 결합조직에서 발생한 종양이다. 암 진단 소식에 밥퍼와 다일공동체의 미래를 우려했지만 그는 "밥퍼와 다일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통해 이 같은 사역은 계속될 것"이라며 "나이를 먹고 건강이 더 안 좋아지거나 어떤 상황이 오든 소외계층,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상 급식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p><p><br/></p><p>2. 활동  최일도 목사님의 밥퍼는 1988년 11월 최 목사가 신학대학원생일 때부터 시작됐다청량리 야채시장 한 켠을 빌려 기증받은 음식 재료들을 가지고 무상 급식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청량리역에서 시작된 무상 급식은 청량리 야채시장, 쌍굴다리를 거쳐 서울시의회와 동대문구청이 제공한 가건물에서 점점 크기를 넓혀 밥퍼와 다일공동체 창설로 이어졌다. 현제 최 목사는 최근 생활 물가 상승이 걱정이라고 전했다. 하루 평일 500~600명, 주말에는 최대 1200명까지 무상급식을 이용하는 노숙인들과 독거노인들이 있는데 생활물가가 오르면서 공과금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밥퍼가 NGO라고 해도 감안해 주는 것이 없다”며 “특히 식재료비가 많이 올라서 밥퍼 나눔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다른 경비를 줄여서라도 무상 급식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p><p> 베스트셀러요 나눔의 고전이 된 그의 저서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동아일보사)에 의하면 최일도 목사는 참 사랑의 나눔은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라고 나눔의 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사회선교와 시민운동으로 그리스도의 육화론적 영성생활과 봉사신앙을 실천하고 있다</p><p><br/></p><p>3.평가 </p><p>노인분들에게 무상 급식을 하는 밥퍼 운동과 무료 병원,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선심을 쓰는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게서 잘생긴 아들을 내려주신 것 같다. 소수라도 깊이, 겸손과 봉사 통해 사회변화 추구하는 것이 정말 멋있다</p><p><br/></p><p><br/></p><p>4.소감</p><p>조사하면서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다는걸 느꼈다. 착한 일을 하면 그만큼의 착한 일이 돌아오는 것 같다 느껴 나도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도우는 활동을 많이 해야겠다고 느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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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2:41: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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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이호진 11112</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19416</link>
         <description><![CDATA[<p><br/></p><p><strong>🌱 1. 생애와 초기 배경</strong></p><p><br/></p><p><br/></p><ul><li><p>런던에서 출생, 12세에 미국 이민 후 뉴욕대학교(학사, 1881)와 뉴브런즈윅 신학교(1884)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 안수 .</p></li><li><p>1884년 북미 장로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인도 선교 준비를 한 후 한국으로 길을 잡음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2. 한국 도착 및 초창기 활동</strong></p><p><br/></p><p><br/></p><ul><li><p>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 도착 .</p></li><li><p>당시 선교 활동 금지 상황에서 제중원(현 세브란스병원)에서 물리·화학 강사로 임하며 한국어를 습득함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3. 교회 설립 및 복음 전파</strong></p><p><br/></p><p><br/></p><ul><li><p>1887년 조선인 교인 중심의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정동교회)를 설립 .</p></li><li><p>북한 지역을 포함해 여러 차례 전도 여행을 통해 복음을 확산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4. 교육·출판·언어 활동</strong></p><p><br/></p><p><br/></p><ul><li><p>영어·한글 문법, 과학 교육에 힘쓰며 언어 교육 기반 구축.</p></li><li><p>1896년 한국 최초의 찬송가 출판, 1897년 한글 기반 기독교 신문사 설립 .</p></li><li><p>1900년 신약성서와 1910년 구약성서 한국어 번역 완성에 주도적으로 참여.</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5. 학교 및 YMCA 설립</strong></p><p><br/></p><p><br/></p><ul><li><p>1886년 소년 기숙학교(John D. Wells Academy), 1912년 피어슨성경학원(현재 평택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 .</p></li><li><p>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초대 교장으로 취임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6. 의료 사역과 인도주의</strong></p><p><br/></p><p><br/></p><ul><li><p>제중원에서 과학 강의와 약제사로 활약했고, 한국인 의료교육 기반 마련 .</p></li><li><p>그의 아내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박사도 조선왕비의 주치의로 활동하며 여성·아동 보건에 헌신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7. 한국 근대화 지원 및 애국적 활동</strong></p><p><br/></p><p><br/></p><ul><li><p>피어슨기념 성서학원의 교장으로서 조선의 자립교회 운동을 지지 .</p></li><li><p>일제 강점기 한국 민중과 연대, 라디오를 통해 일제 비판과 해방 메시지를 전함 .</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8. 사망과 유산</strong></p><p><br/></p><p><br/></p><ul><li><p>건강 악화로 1916년 미국 귀국 후 그해 10월 대서양시티에서 사망. 이후 1999년 유해가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옮겨 안장됨 .</p></li><li><p>후손들은 연세대, 기독교 교육·외교· 사회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p></li></ul><p><br/></p><p><br/></p><p><br/></p><p><br/></p><p><br/></p><p><strong>🏛️ 9. 총평</strong></p><p><br/></p><p><br/></p><p>호러스 언더우드는 한국에 선교, 교육, 의료, 출판, 자립교회 운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근대사와 개신교 성장의 토대를 세운 개척자입니다. 그의 유산은 단지 종교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교육 전반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p><p><br/></p><p><br/></p><p><br/></p><p>소감: 굳이 친하지도 않고 알지더 못하는 한국을 도와주고 문화를 알려주는 모습이 너무 멋잇엇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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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2:42: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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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07라예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22139</link>
         <description><![CDATA[<p>메리 F. 스크랜튼 부인</p><p>(Mary Fletcher Scranton,</p><p>1832년12월 9일~1909년 10월 8일)</p><p><br/></p><p>1832년 미국에서 태어난 스크랜튼 부인은 1885년, 52세의 나이에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목사와 함께 조선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듬해인 1886년부터는 자신의 집에서 소녀들에게 글과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1888년에는 정동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문을 열였고</p><p>이화학당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었고 글과 지식을 배우는 곳이자,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공동체 안에서도 존중받을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장소였고,그녀가 전한 따스한 사랑과 진실한 헌신은 곧 조선 땅의 소녀들에게 등불이 되어 주었고, 그 빛은 의료와 교육, 선교 분야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여성 리더를 길러낸 학교이다.</p><p><br/></p><p>1909년 10월 8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스크랜튼 부인이 남긴 교육의 씨앗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져 한국 여성 교육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기리며 ‘스크랜튼대학’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p><p><br/></p><p>그래서 이분은 정말로 참 멋지신 선교사 이시라고 느꼈고 정말로 학생과 사람을 위해 한국에서 열정적으로 해주신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분이 희생하고 노력해주신 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을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료 조사 하는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미국으로 안 돌아가시고 조선 땅에서 죽음을 받아드리신 그런 신념도 멋있다고 생각합니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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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2:44: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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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111윤시원</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41000</link>
         <description><![CDATA[<p><strong><br>&nbsp;생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 ~ 1945.4.9)</strong></p><p><br/></p><p><strong>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나치 정권에 맞서 싸운 저항운동가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신앙과 양심, 그리고 저항의 삶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언으로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strong></p><p><strong>생애 요약</strong></p><p><br/></p><p><strong>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지식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신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 21세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스페인과 미국 등에서 공부하며 사회적 책임과 제자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나를 따르라』, 『윤리학』, 『옥중서신』이 있습니다.</strong></p><p><br/></p><p><strong>활동내용: 히틀러 집권 이후, 교회가 국가에 순응하는 모습을 비판하며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했고,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전쟁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외국에서 안전하게 지낼 기회가 있었지만, 독일 국민과 고난을 함께하기 위해 귀국했습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체포된 후 2년 넘게 수감되었고,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strong></p><p><br/></p><p><strong>이사람에대한평가:</strong></p><p><br/></p><p><strong>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해 조사하면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단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생명을 잃었지만,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한 그의 모습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strong></p><p><br/></p><p><strong>소감: 비록 과거의 인물이지만, 본회퍼의 삶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저도 앞으로는 내 삶 속에서 정의롭고 양심적인 선택을 하며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교회다닌다 말로만하고 일요일에만 크리스천이 되지말고 실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성경,그리고 QT를함으로서(청소년매일성경)을</strong></p><p><strong>읽으면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strong></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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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2:55: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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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02 강하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44041</link>
         <description><![CDATA[<p><strong>아펜젤러 생애</strong></p><p>• 헨리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감리교 신학 교육을 받은 후, 《은둔의 나라 조선》을 읽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p><p>1885년 부활절,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지만, 갑신정변의 여파로 곧바로 선교를 시작하지 못하고 잠시 일본에 머물렀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한국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p><p>• 1902년, 성서번역회의 참석을 위해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순직했다. 그의 죽음은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의 17년간의 사역은 한국의 교육과 기독교 발전에 큰 유산을 남겼다.</p><p><br/></p><p><strong>활동 내용</strong></p><p>•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활동하며 한글 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했고, 기존 번역본을 수정·보완해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 《누가복음전》, 《마태복음전》 등을 출판했다.</p><p>• 1889년에는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를 세워 기독교 서적과 정기간행물을 국내에서 인쇄하며 출판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했다.</p><p>교육에도 헌신하여 1887년 고종에게 ‘배재학 당’ 현판을 하사받고 본격적인 기독교 교육을 시작했다. </p><p>• 그는 ‘자조’와 봉사를 강조하며 학생들을 지도자와 사역자로 양성하고자 했으며, 신학반을 조직해 한국 감리교회의 기반을 다졌다.</p><p>• 또한 정동에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와 성찬식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p><p><br/></p><p><strong>평가</strong> </p><p>• 아펜젤러는 조선에 기독교를 전한 것 뿐만 아니라 조선이 성장 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웠던 점이 인상 깊었다. 또한 조선인들을 위해 정성을 들여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부분이 대단했다.</p><p><br/></p><p>소감</p><p>• 아펜젤러를 조사하면서 아펜젤러가 단순 선교를 떠나서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진심이 느껴졌고 어떻게 보면 자신과 관련 없는 조선을 위해 헌신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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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2:56: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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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13 임유선</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56360</link>
         <description><![CDATA[<ol><li><p>생애: 스크랜튼 부인은 1832년 11월 9일 &nbsp;미국 매사추세츠&nbsp;주 벨처타운 출생이다. 1909년&nbsp;10월 8일&nbsp;(향년 76세) 대한제국에서 사망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nbsp;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개신교 감리교회 선교사며,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시초가 된 인물이라 평가 받는다.</p></li></ol><p><br/></p><ol start="2"><li><p>활동내용:</p></li></ol><p> • 이화학당 설립: 스크랜튼 부인은 조선에 파견된 미국 감리교 여성 선교사로, 1886년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의 길을 열었다. 당시 여성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조선 사회에서, 스크랜튼 부인은 한 명의 소녀와 시작한 수업을 통해 여성이 배울 수 있는 권리를 실현시켰다.</p><p><br/></p><p> • 교육 및 의료설교: 여성들이 치료받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1885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선교사가 설립한 베델 병원과 협력하거나 별도로 여성 전용 진료소를 운영하며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기초적인 간호 교육과 위생 교육을 통해 여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이는 단순한 복지 활동을 넘어 여성의 자립과 인권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스크랜튼 부인의 모든 활동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설교와 인도, 실천을 동반한 교육선교의 일환이었다. </p><p>이처럼 여성을 위한 활동에 집중하며 조선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교육과 의료의 문을 열었다. </p><p><br/></p><ol start="3"><li><p>평가 : 스크랜튼 부인은 여성 교육의 개척, 의료선교의 실천, 그리고 기독교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된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편견을 깨고,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했으며, 여성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진료소를 운영하며 의료선교에 힘쓰셨다. 이렇게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교육 및 의료선교, 여성을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p></li></ol><p><br/></p><ol start="4"><li><p>소감: 사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조사하면서 자세히 알아보고, 그 당시 상황도 잘 알게 되면서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여성의 존엄과 가능성을 믿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대단하신 것 같다. 또한 다른 나라에 와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였다는 점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이 존경스럽다.</p></li></ol><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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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3:03: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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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1101강승우,11106김윤호</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56511</link>
         <description><![CDATA[<p>업적: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폐지운동을위해힘을 썼다. 노예무역 폐지법안을 통과하기위해서 20년 동안 노력하여 1807년에 법을 통과시켰다. 이 노력 덕분에 점차</p><p>노예제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윌리엄 윌버포스는 복음주위 운동과 사회계혁을 위해서도힘을썼다. 이는복음주위 기독교인으로 도덕적 사회적 개혁운동에도 힘을 썼다</p><p>그리고 아동노동,가난한 이들의 처우 개선,</p><p>도박과 주류 소비 문제등 다양한 사회문제에</p><p>대해 행동했다. 또 클라이범 섹트를 주도하였으며, 교육활동 기독교 선교활동 등등</p><p>많은노력을 하였다.</p><p> </p><p>생애: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영국 요크셔</p><p>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는</p><p>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p><p>공부하고, 윌리엄 피트 (후일 영국 총리)와 </p><p>깊은 인연이 생겼다. 1780년에 하원의원 당선 되었다. 그리고 당선 된후에 여러가지의</p><p>업적이 있었다.</p><p><br/></p><p>평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들을 위해서 </p><p>노예법 폐지 법안을 만들었던것이 남을 </p><p>위해서 노력을 하는 사람인거 같다.(11101강승우)</p><p> </p><p><br/></p><p><br/></p><p><br/></p><p><br/></p><p><br/></p><p>소감: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폐지법 등</p><p>여러가지 업적이 있는것을 보아 윌리엄 윌버포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헌신 할수 있는</p><p>엄청 대단한 사람 인거 같다(11101강승우)</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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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3:03: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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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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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1115정은직</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64784</link>
         <description><![CDATA[<p>생애: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현 룡천군 신암리 두바위골)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張雲燮, 1877. 5. 9 ~ ?)이며 어머니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5%B4%EC%A3%BC%20%EC%B5%9C%EC%94%A8">해주 최씨</a> 영세(崔永世)의 딸이다.</p><p><br/></p><p>업적:그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p><p>절제술을 국내 최초로 성공하고, 무</p><p>료 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하여</p><p>가난한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또한,</p><p>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여 의</p><p>료보험 제도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의 삶은 인술,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한 모범으로 평가받았습니다</p><p><br/></p><p>평가:장기려 박사는 한국 의료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뛰어난 의술과 헌신적인 봉사 정신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nbsp;그는&nbsp;한국 간 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료 봉사에도 힘썼습니다.&nbsp;특히,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을 통해 의료 공공성 확보에 기여한 점도 높이 평가받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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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3:07:35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164784</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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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0914정봉기</title>
         <author>ji08090907</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22510</link>
         <description><![CDATA[<p><strong>최일도 목사님의 생애와 업적</strong></p><p><strong>1. 생애</strong><br>최일도 목사님은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과 봉사의 가치를 배우며 성장했다. 신학을 전공한 후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했고, 청년 시절 설곡산 다일공동체에서 영성 수련을 받던 중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최근에는 육종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지만, 여전히 봉사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p><p><strong>2. 업적</strong><br>1988년 서울 청량리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라면을 나누는 작은 봉사를 시작으로 ‘밥퍼 나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하루 수백 명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사회 봉사 활동으로 성장하였다.</p><p>또한, ‘다일공동체’를 설립하여 국내뿐 아니라 네팔, 캄보디아, 탄자니아 등 여러 국가에서 무료 급식, 의료 지원, 아동 교육, 주거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p><p>2002년에는 ‘올해를 빛낸 한국인’ 상을 수상했으며, 상금 전액을 기부하였다. 저서 인세와 강연 수입 등도 꾸준히 기부하여 지금까지 총 10억 원 이상을 나눔에 사용해왔다.</p><p>코로나19 방역 기간 중에도 거리두기 상황에 맞춰 도시락 배달을 통해 노숙인과 독거 어르신을 돕는 활동을 이어갔으며, 밥퍼 센터 증축 관련 소송에서도 공익성을 인정받아 승소하였다.</p><p><br/></p><p>3.평가</p><p>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계시는 대단한분이신거같다.</p><p><br/></p><p>4.소감</p><p>최일도 목사님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육종암으로 투병 중이신데도 여전히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신다는 것을 보고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나 도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봉사를 했지만 그것을 투병 중이 쉰 상태에서 꾸준히 하신다는 점이 너무나도 대단했다.</p>]]></description>
         <enclosure url="" />
         <pubDate>2025-06-16 06:20: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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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20홍지후</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38754</link>
         <description><![CDATA[<p><strong><mark>생애</mark></strong>:호머 허버트 박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1949년 8월 5일 사망한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사학자, 언어학자, 교육자, 언론인,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입니다. 1886년 조선에 와서 육영공원 교사로 일했고, 이후 고종의 밀사, 을사늑약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 헤이그 특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p><p><br/></p><p><strong><mark>업적</mark></strong>:호머 허버트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으로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최초의 외국인 한글 학자로서,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편찬하고, 한글 로마자 표기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아리랑을 채보하여 논문으로 발표하고, 독립신문의 창간에 기여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글의 발전과 보급에 노력했습니다.&nbsp; </p><p><strong><mark>상세한 업적</mark></strong></p><ol><li><p>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 <strong>사민필지</strong>를 저술하여 육영공원 교재로사용&nbsp;</p></li></ol><ol start="2"><li><p>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한글의 가독성을 높이는 데 기여.&nbsp;</p></li><li><p>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전국 세금의 약 1.5%를 지원금으로 냈다.&nbsp;</p></li><li><p>독립신문의 창간을 돕고, 헤이그 특사로 활동하며 일제 침략주의를 규탄했다.&nbsp;</p></li><li><p>1896년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고 논문으로 발표하여 아리랑이 세계에 알려지는 데 기여.&nbsp;</p></li><li><p>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에 "한글"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렸다.&nbsp;</p></li><li><p>1903년 세계 유명 학술지에 한글 창제 과정 및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했다.&nbsp;</p></li></ol><p> <strong>평가</strong>:호머 허버트 박사는 우리나라 사회에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그의 행동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p><p><strong>소감</strong>:호머 허버트 박사를 조사하면서 이 사람이 우리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많은 일을 하였는지 알게되어 감동적이고 존경하는 마음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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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0: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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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10윤은성,10919홍승표</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0563</link>
         <description><![CDATA[<p>언더우드가문</p><p><br/></p><p><strong>생애</strong></p><ul><li><p><strong>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strong>는 <strong>1859년 7월 19일</strong>, <strong>영국 런던</strong>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자랐으며, <strong>1885년 4월 5일</strong>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습니다.</p></li><li><p>그는 31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strong>1916년 10월 12일</strong>, <strong>서울에서 별세</strong>했습니다.</p></li><li><p>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strong>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strong>에 안장되어 있습니다.</p><p><br/></p></li></ul><p> <strong>활동 내용</strong></p><ul><li><p>언더우드는 <strong>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strong>로서 조선에 들어와 <strong>기독교 선교, 교육, 출판, 의료</strong>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p></li><li><p>한국어를 익혀 <strong>한글 성경 번역</strong>, <strong>한영사전 편찬</strong> 등에도 참여했습니다.</p></li><li><p><strong>경신학교</strong>, <strong>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strong>를 설립하며 조선의 근대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p></li><li><p>또한 <strong>기독교 출판사</strong>, <strong>교회 설립</strong>, <strong>의료 선교 지원</strong>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끈 인물입니다.</p></li></ul><p><br/></p><p>   평가)</p><p><br/></p><p>   10919 홍승표 : 언더우드 가문은 그 당시 조선과 한민족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나먼 이국 조선에서 평생을 일한것을 보면</p><p>   나는 어떻게 보면 외국인들 중에 가장 고마운 인물이였다고 생각한다.</p><p>   </p><p>   10910 윤은성 : 언더우드는 단순한 종교 선교사를 넘어, 조선 사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strong>교육자이자 문화 개혁가</strong>였습니</p><p>   다.</p><p><br/></p><p><br/></p><p><br/></p><p>    소감)</p><p><br/></p><p>   10919 홍승표 : 한국을 위한 외국인을 알게되어 영광 이였다.</p><p><br/></p><p><br/></p><p>   10910 윤은성 : 언더우드에 대해 조사하면서 놀라웠던 점은, 단순히 선교 목적이 아닌 </p><p>                           <strong>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도우려 했.다는 태도</strong>였습니다.</p><p>                           언더우드는 당시 조선이 겪고 있던 혼란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p><p>                           교육과 의료, 언어 연구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p><p>    </p><p><br/></p>]]></description>
         <enclosure url="" />
         <pubDate>2025-06-16 06:32:17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0563</guid>
      </item>
      <item>
         <title>10913 전소율</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1933</link>
         <description><![CDATA[<ol><li><p><strong>언제 태어났고, 언제 돌아가셨나?</strong></p><ul><li><p><strong>출생:</strong>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p></li><li><p><strong>사망:</strong> 1995년 12월 25일 (향년 84세, 서울에서 별세)</p></li></ul></li><li><p><strong>무엇을 하며 살았나?</strong></p><ul><li><p><strong>외과 의사</strong>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strong>무료로 진료</strong></p></li><li><p>한국 최초로 <strong>간암 수술</strong> 성공</p></li><li><p>6.25 전쟁 중 부산에 <strong>복음병원 설립</strong></p></li><li><p>1968년, 가난한 이들을 위한 <strong>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strong></p></li><li><p>평생을 <strong>무소유, 청빈한 삶</strong>으로 헌신</p></li></ul></li><li><p><strong>이해하기 쉬운 한 줄 요약</strong><br>→ <strong>"평생 가난한 환자만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strong></p></li><li><p><strong>기억해야 할 핵심 포인트</strong></p><ul><li><p>대한민국 의료보험 제도의 기초를 만든 사람</p></li><li><p>의사이자 사회운동가</p></li><li><p>본인은 평생 월급도 안 받고 병원 운영비에 사용함</p></li><li><p>묘비명도 없이 조용히 생을 마감</p></li></ul></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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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3:25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1933</guid>
      </item>
      <item>
         <title>10916</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4713</link>
         <description><![CDATA[<p>생애:최일도 목사는 1955년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와 수필에 재능을 보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우유, 신문, 계란 등을 자전거로 배달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kid.chosun.com">kid.chosun.com</a>)</p><p>최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8년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중 청량리역에서 굶주린 할아버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청량리역에서 무료 급식 활동을 시작하여 다일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일복지재단 이사장, 다일천사병원 병원장 등을 역임하며, '밥퍼' 운동을 통해 노숙인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kid.chosun.com">kid.chosun.com</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koreadaily.com">koreadaily.com</a>)</p><p>현재까지 최일도 목사의 사망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나 정보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다일공동체를 이끌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p><p><br/></p><p><br/></p><p><br/></p><p>업적</p><p>최일도 목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회운동가이자, 다일공동체(Dail Community)의 창립자로서 많은 사회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업적은 크게 <strong>빈민구제</strong>, <strong>사회복지 실천</strong>, <strong>국제 구호</strong>, 그리고 <strong>영성운동</strong> 영역에서 두드러집니다:</p><p>🌾 1. <strong>다일공동체 창립 (1988년)</strong></p><ul><li><p><strong>청량리역 인근 노숙자에게 밥을 나눠 준 사건</strong>을 계기로 시작됨.</p></li><li><p>‘<strong>밥퍼(Bap-For) 운동</strong>’으로 알려진 무료급식 사역은 서울 청량리에서 시작되어 전국과 해외로 확산.</p></li><li><p>현재까지 수백만 그릇의 밥을 노숙인과 독거노인, 소외 계층에게 제공.</p></li></ul><p>🌍 2. <strong>국제 사회복지 실천</strong></p><ul><li><p><strong>다일천사병원</strong> 설립: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p></li><li><p>해외 구호활동:</p><ul><li><p><strong>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네팔, 탄자니아, 우간다</strong> 등지에 다일공동체 지부 설립.</p></li><li><p>현지 아이들을 위한 <strong>학교, 보건소, 급식소 운영</strong>.</p></li></ul></li></ul><p>🙏 3. <strong>영성과 나눔 운동</strong></p><ul><li><p>기독교적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며, <strong>영성과 사회참여의 통합 모델</strong> 제시.</p></li><li><p>『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하늘양식』 등 수십 권의 책을 집필.</p></li><li><p>“<strong>한 끼의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strong>”는 철학을 널리 전파.</p></li></ul><p>🏅 4. <strong>수상 및 사회적 인정</strong></p><ul><li><p>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p></li><li><p>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KBS 인간승리상, 유엔 NGO 선정 ‘세계 100대 인물’ 등 다수 수상.</p></li></ul><p>✨ 영향력</p><ul><li><p>한국 사회에서 종교인으로서 <strong>말뿐이 아닌 실천적 나눔을 실현한 대표적 인물</strong>.</p></li><li><p>다일공동체는 지금도 다양한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과 함께 나눔과 섬김을 이어가고 있음.</p></li></ul><p>필요하시면 그의 저서나 활동 내용을 더 자세히 정리해드릴 수도 있어요.</p><p><br/></p><p><br/></p><p>소감문</p><p>꾸준히 열심히 해 나가며 포기하지않고 기독교를 널리 퍼뜨리며 세상에 알릴려고 하는모습니 굉장히 멋져서 인상깊었다</p><p><br/></p><p><br/></p><p>평가문</p><p>포기하지 않는 멋진분</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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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5: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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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01 프리셔스</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4803</link>
         <description><![CDATA[<p>생애</p><p><br/></p><p>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D%8E%9C%EC%8B%A4%EB%B2%A0%EC%9D%B4%EB%8B%88%EC%95%84">펜실베이니아</a> 사우더턴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C%8A%A4%EC%9C%84%EC%8A%A4%EA%B3%84%20%EB%AF%B8%EA%B5%AD%EC%9D%B8">스위스계</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B%8F%85%EC%9D%BC%EA%B3%84%20%EB%AF%B8%EA%B5%AD%EC%9D%B8">독일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A%B0%9C%EC%8B%A0%EA%B5%90">개신교</a>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기디언은 독일개혁교회 신자였으며, 어머니 머리아는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파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펜젤러가 어렸던 시절에도 독일어로 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주곤 했고 집에서 거의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어려서부터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하여 펜실베니아의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B%89%B4%EC%A0%80%EC%A7%80">뉴저지</a> 주의 드루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가풍의 영향으로 본래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namu.wiki/w/%EC%9E%A5%EB%A1%9C%ED%9A%8C">장로회</a>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교단을 옮겼으며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p><p><br/></p><p><br/></p><p>업적</p><p><br/></p><p>한국어 이름은 아편설라였다. 암울했던 구한말 내한하여 헌신한 개신교 선교사 1세대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선교에 힘썼으며 성경번역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p><p><br/></p><p><br/></p><p>평가</p><p><br/></p><p>아펜젤러는 교육자로서도 뛰어난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와 함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 근대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p><p><br/></p><p><br/></p><p>소감</p><p>아펜젤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수행평가를 통해 아펜젤러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던것 같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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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5:44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4803</gui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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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04맹서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6304</link>
         <description><![CDATA[<p>1. 생애</p><p>⦿ 윌리엄 제임스 홀 (William James Hall, 1860~1894)</p><p>	•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p><p>	•	1892년 조선에 입국, 평양에서 의료 선교 활동.</p><p>	•	1894년 장티푸스에 걸려 조선에서 순직.</p><p>⦿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p><p>	•	미국 뉴욕 출신 여성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의 아내.</p><p>	•	남편 사망 후에도 한국에 남아 40여 년 간 의료 선교, 사회복지 활동 수행.</p><p>	•	특히 한센병(나병) 환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에 헌신.</p><p>	•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 중 한 명.</p><p>⦿ 셔우드 홀 (Sherwood Hall, 1893~1991)</p><p>	•	윌리엄과 로제타의 아들.</p><p>	•	캐나다에서 의학 공부 후 1920년대 한국에 와서 한센병 치료 및 병원 설립에 주력.</p><p>	•	“나병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p><p>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추방.</p><p>⸻</p><p>2. 활동 내용</p><p>⦿ 의료 선교 및 병원 설립</p><p>	•	평양, 원산, 서울 등지에서 병원 설립 및 의료 활동.</p><p>	•	구한국 시대 의료의 선진화를 이끌었으며, 서양의학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p><p>⦿ 한센병(나병) 환자 치료</p><p>	•	특히 셔우드 홀은 경기도 수원 근처 ‘에비슨 기념 나병원’ 등을 설립.</p><p>	•	한센병 환자들을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둠.</p><p>⦿ 장애인 복지</p><p>	•	로제타 홀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 설립(평양맹아학교, 1894년), 점자 책 제작 등 진행.</p><p>⦿ 교육 활동</p><p>	•	의학교육, 간호사 양성, 장애인을 위한 교육 등도 활발히 지원.</p><p><br/></p><p>3. 평가</p><p>	•	셔우드 홀 가족은 한국 근대 의료와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평가됩니다.</p><p>	•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의료봉사를 넘어 인권, 평등,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p><p>	•	특히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가와 병자들을 차별 없이 돌본 점은 윤리적 귀감으로 여겨집니다.</p><p>	•	2020년대에도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전시회, 기념사업 등이 이어지고 있음.</p><p>⸻</p><p>4. 소감</p><p>셔우드 홀 가족의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그들이 단순히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의료와 교육을 제공하며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p><p>특히 셔우드 홀이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병원뿐 아니라 공동체를 만든 일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요즘 사회에서도 여전히 소외된 이웃들이 존재하는데, 셔우드 홀 가족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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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7: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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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06손재혁손재혁</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47667</link>
         <description><![CDATA[<p>그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1906%EB%85%84">1906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2%EC%9B%94%204%EC%9D%BC">2월 4일</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F%85%EC%9D%BC">독일</a> 제국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br><br>그의 집안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3%A8%ED%84%B0%EA%B5%90%ED%9A%8C">루터교회</a>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A%B0%9C%EC%8B%A0%EA%B5%90">개신교</a>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4%84%EB%A1%9C%EC%9D%B4%EC%84%BC%20%EC%99%95%EA%B5%AD">프로이센 왕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8%B8%EC%97%94%EC%B4%90%EB%A0%88%EB%A5%B8%20%EA%B0%80%EB%AC%B8">왕실</a>의 궁정 목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도 자녀들에게 성서 이야기, 시, 노래를 가르칠 정도로 믿음과 교양이 모두 훌륭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며, 그가 신학도의 길을 걸어가려 하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br><br><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8A%80%EB%B9%99%EA%B2%90%20%EB%8C%80%ED%95%99%EA%B5%90">튀빙겐 대학교</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GY8CJUyU" href="https://namu.wiki/w/%EB%94%94%ED%8A%B8%EB%A6%AC%ED%9E%88%20%EB%B3%B8%ED%9A%8C%ED%8D%BC#fn-2"><sup>[2]</sup></a>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B2%A0%EB%A5%BC%EB%A6%B0%20%EB%8C%80%ED%95%99%EA%B5%90">베를린 대학교</a>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워낙 신학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E%90%EC%9C%A0%EC%A3%BC%EC%9D%98%20%EC%8B%A0%ED%95%99">자유주의 신학</a>의 거두였던 아돌프 폰 하르낙의 촉망받는 제자였고<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GY8CJUyU" href="https://namu.wiki/w/%EB%94%94%ED%8A%B8%EB%A6%AC%ED%9E%88%20%EB%B3%B8%ED%9A%8C%ED%8D%BC#fn-3"><sup>[3]</sup></a>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이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1%9C%EB%A7%88">로마</a>에서 공부하면서 가톨릭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A0%84%EB%A1%80">전례</a>를 경험하기도 한 그는 25세부터 목사 안수를 주는 루터교회의 법에 의거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br><br>이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하면서 그 곳에서 평화주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독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상황이 어려워진 고백교회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br><br>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A0%9C2%EC%B0%A8%20%EC%84%B8%EA%B3%84%20%EB%8C%80%EC%A0%84">제2차 세계 대전</a>이 발발하며 주요 인사들에게 체포령이 내려 많은 수의 인사들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결국 고백교회는 지하로 내려가 활동을 하게 되었고, 본회퍼 역시 활동을 줄이기에 이른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br><br>1940년 9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2%98%EC%B9%98">나치</a>는 "본회퍼의 행동이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발언 금지 조치를 내리고 관할 경찰서에 주소지를 의무적으로 신고할 것을 명령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그가 옳다 여기는 일을 쉬지 않았다. 1941년 10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B2%A0%EB%A5%BC%EB%A6%B0">베를린</a>에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방첩대 요원으로 위장하여 구출하는 '작전 7'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43년 1월 13일,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1924년생)와 약혼하고 가정을 꾸리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4월 5일, 게슈타포의 가택수색으로 한스 폰 도나니 부부, 요제프 뮐러 부부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GY8CJUyU" href="https://namu.wiki/w/%EB%94%94%ED%8A%B8%EB%A6%AC%ED%9E%88%20%EB%B3%B8%ED%9A%8C%ED%8D%BC#fn-6"><sup>[6]</sup></a><br><br>이 와중에 1944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81%B4%EB%9D%BC%EC%9A%B0%EC%8A%A4%20%ED%8F%B0%20%EC%8A%88%ED%83%80%EC%9A%B0%ED%8E%9C%EB%B2%A0%EB%A5%B4%ED%81%AC">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a> 대령은 히틀러 암살을 기획하게 된다. 만약 암살이 성공하면, 군부를 신속히 장악하고 친위대를 제압한 후, 카나리스 제독이 본회퍼를 통하여 영국에 선을 넣어 강화협정을 진행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E%88%ED%8B%80%EB%9F%AC%20%EC%95%94%EC%82%B4%20%EB%AF%B8%EC%88%98%20%EC%82%AC%EA%B1%B4">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a> 항목 참조.<br><br>결국 암살 작전 이후 경악에 광분한 히틀러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E%A5%EA%B2%80%EC%9D%98%20%EB%B0%A4">장검의 밤</a>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었고, 그 포위망은 옥죄어져 왔다. 결국 본회퍼 역시 체포되었다.<br><br>초기에는 감옥에서 저술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고, 감옥에서의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암살작전 가담의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처우 역시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 역시 처형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strong>종전을 겨우 한 달 앞둔</strong>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br><br>한편 그의 본거지인 브레슬라우는 2차대전 이후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8F%B4%EB%9E%80%EB%93%9C">폴란드</a>령이 되어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B8%8C%EB%A1%9C%EC%B8%A0%EC%99%80%ED%94%84">브로츠와프</a>라 불리는데, 폴란드 공산정권 몰락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생가에 기념물과 기념판을 만들었다.</p><p><br/></p><p><br/></p><p>평가:디트리히 본회퍼목사님는 20세기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  반나치 운동가로평가됩니다. 나치 독재에 반대하여 고백교회를 설립하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하여 나치 정권의 폭압에 맞섰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신학적, 윤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제자도의 대가, 값싼 은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nbsp;</p><p><br/></p><p><br/></p><p>소감:디트리히 본회퍼목사님대해 찾다가  그의 명언을 보았다 근데 거기에서 내가 마음에든 명언을 찾았던 그명언 실천은생각에서나오는것이아니라 책임질준비를하는데서나온다 그리고 나는 다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을 </p><p>참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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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38: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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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17 홍상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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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strong>1.생애 [1759년 8월 24일 잉글랜드 요크셔 주&nbsp; 어폰 헐에서 태어나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과 졸업을 한 뒤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운동에 평생을 받쳤으며 1833년 7월 26일, 노예제도 폐지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목격하고 29일날 눈을 감으셨다.]</strong></p><p><br></p><p>2.업적 [ 윌리엄 윌버포스는 20년동안 영국의 노에제를 폐지 하였으며 노예무역 폐지법을 제정,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했으며 선언 협회를 설립하였다.</p><p><br></p><p>3.평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억지로 끌려가는 노예들을 위해 노예 폐지법을 만들어 그들을 해방시켜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p><p><br></p><p>4.소감[&nbsp; 선택권이 없는 노예들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해방시켜주려고 노력하고 노예 폐지법을 만든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웅으로 보인다.</p><p><br></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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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40: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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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05박시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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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ol><li><p>생애</p><p><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1832%EB%85%84">1832년</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11%EC%9B%94%209%EC%9D%BC">11월 9일 태어나 </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 </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7%A4%EC%82%AC%EC%B6%94%EC%84%B8%EC%B8%A0">매사추세츠</a> 주 벨처타운에서 출생 </p></li><li><p>활동</p><p><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F%B8%EA%B5%AD">미국</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7%A4%EC%82%AC%EC%B6%94%EC%84%B8%EC%B8%A0">매사추세츠</a> 주 출신인 메리 스크랜튼은 1885년 미국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A%B0%90%EB%A6%AC%EA%B5%90">감리교</a> 여성해외선교회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의 파송으로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98%EC%82%AC">의사</a>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대한민국</a>에 왔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BC%EB%B3%B8">일본</a>에서의 생활은 즐거우며 선교사들의 생활 조건도 훌륭하나, 나는 내 민족(<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5%9C%EA%B5%AD%EC%9D%B8">한국인</a>)에게 가서 그들 속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였다 </p><p>한국에 온 최초의 외국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A%B0%9C%EC%8B%A0%EA%B5%90">개신교</a>(<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A%B0%90%EB%A6%AC%EA%B5%90">감리교</a>) 여성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84%A0%EA%B5%90%EC%82%AC">선교사</a>.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B4%ED%99%94%EC%97%AC%EC%9E%90%EB%8C%80%ED%95%99%EA%B5%90">이화여자대학교</a>ㆍ<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B4%ED%99%94%EC%97%AC%EC%9E%90%EA%B3%A0%EB%93%B1%ED%95%99%EA%B5%90">이화여자고등학교</a>ㆍ<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B4%ED%99%94%EC%97%AC%EC%9E%90%EC%99%B8%EA%B5%AD%EC%96%B4%EA%B3%A0%EB%93%B1%ED%95%99%EA%B5%90">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a>의 전신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B4%ED%99%94%ED%95%99%EB%8B%B9">이화학당</a>과,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7%A4%ED%96%A5%EC%A4%91%ED%95%99%EA%B5%90">매향중학교</a>ㆍ<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B%A7%A4%ED%96%A5%EC%97%AC%EC%9E%90%EC%A0%95%EB%B3%B4%EA%B3%A0%EB%93%B1%ED%95%99%EA%B5%90">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a>의 전신인 삼일소학당을 설립했다. 한국 근대 여성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a rel="nofollow noopener ugc" class="ZxfLatuF" href="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3">2009년 12월 21일</a>일반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A%B5%AD%EB%AF%BC%ED%9B%88%EC%9E%A5">국민훈장</a>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p><p> </p><p>내한하여 봉건제도에 얽매여 있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한국 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시키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따로 부지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학교를 준비하였다. 1886년 2월부터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5월경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김씨 부인\"으로 알려진 정부 관리의 첩에게 가르쳤으나 석 달이 못되어 떠나갔다. 한달 늦게 \"별단이\"라는 학생이 찾아왔으니 그가 실질적으로 첫 학생이다. 그 해 11월에 완공한 한옥 교사(校舍)는 여선교사들의 거주처이자 한국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구심점이 되었다. 1887년 명성 황후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외서독판 김윤식을 통하여 \"이화학당\"(梨花學堂)이라는 명칭의 편액을 하사하였다.</p></li></ol><p>    </p><ol start="3"><li><p>평가 </p><p>스크랜튼 부인은 한국을와서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최고 훈장이느 국민훈장 무궁화창에 추서되었다 .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켰다 난 우리나라를 사랑해 우리나라에서 돌아가신 스크랜튼 부인에게 감사를 느낀다 스크랜튼 부인이 없었다면 한국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품성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드려 개화 시키셨고 1887년 명성황후의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외서독판 김윤식을 통하여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의 편액을 하사하여 스크랜튼 부인을 인정하였다 .</p></li><li><p>스크랜튼 부인을 알아본 소감 </p><p>저는 예전부터 일제강점기때 이야기를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또 다른 일제강점기때의 일을 알 수 있게되어 기뻤습니다 ,  항상 일제강점기때의 힘내주시던 의사분들 , 독립가들 같은 분들 모든 분들을 감사하고 또 우리나라를 지켜주시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모진 고문들과 힘든 독립운동에 의해 돌아가신분들 우리나라를위해 힘써주신 분들 덕분에 우리나라를 이렇게 지킬 수 있었고 저희가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때 독립운동을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 그리고 이화학당 이라는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켜주시어 감사합니다. </p><p><br/></p><p><br/></p></li></o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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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40: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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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02 김다건</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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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의사이자 인권 운동가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p><ul><li><p><strong>출생</strong>: 1911년 11월 17일</p></li><li><p><strong>사망</strong>: 2005년 2월 16일 (만 93세)</p></li><li><p>1911년 11월 17일에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2005년 2월 16일에 생을 마감 했습니다.</p></li><li><p>경성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며 의료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p></li></ul><p>2. 주요 업적과 활동</p><ul><li><p><strong>의료 봉사</strong>: 한국전쟁 중 북한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하였으며, 전후에는 낙후된 지역에서 무료 진료를 제공하였습니다.</p></li><li><p><strong>인권 운동</strong>: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p></li><li><p><strong>교육 활동</strong>: 의료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에 힘썼으며,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p></li></ul><p>3. 유산과 영향</p><p>장기려 박사는 그의 헌신적인 의료 봉사와 인권 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현재도 다양한 기념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습니다.</p><p><br/></p><p>  평가: 여기다가는 글씨를 쓰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어떠ㅎ게 하며 살았는지 보면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의 정신은 지금도 여러 의료기관과 사회운동에서 이어지고 있어요. 200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의료계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라 생각을 합니다.</p><p><br/></p><p>  소감: 이렇게 한국에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 주는게 아닌가 라고 생학을 합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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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43: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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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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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918 홍성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55886</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strong></p><p>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부산으로 내려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의료비를 받지 않고 환자들에게 '월급은 식구 수대로'라는 철학을 실천하며, 의료인의 사명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제도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의료 복지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리며, 생애를 통해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p><p><br/></p><p>업적</p><p>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의료 소외계층을 돌보며 평생 무료 진료를 실천</p><p>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어 국민건강보험의 기틀 마련</p><p>의술을 돈벌이 수단이 아닌 봉사의 도구로 여기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림</p><p>인재 양성과 학술 활동을 통해 한국 의료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p><p>&nbsp;&nbsp;</p><p>평가</p><p>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이웃에게 무상의료를 실천하고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을 도입해 국민의료 접근성을 넓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봉사를 실천한 그는 청렴한 삶과 겸손한 태도로 동료와 제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p><p><br/></p><p>소감</p><p>장기려 박사님의 삶을 알게 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의사라는 직업을 넘어서 아픈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분이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병원비를 대신 내주고 늘 겸손하게 살아가셨다는 이야기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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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44: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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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921 황예림</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59897</link>
         <description><![CDATA[<p><strong>아펜젤러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 헨리 아펜젤러의 대해</strong></p><p><strong>아펜젤러 가문은 19세기 후반부에 한국에서 선교,교육,출판등 여러 활동을 했던</strong></p><p><strong>미국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가문이다.</strong></p><p><strong>이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헨리 아펜젤러”에 대해 알아보자</strong></p><p><br/></p><p><strong>1.“헨리 아펜젤러”의 생애</strong></p><p><strong>1858년에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난 “헨리 아펜젤러”는 모태신앙으로 부모님을 따라</strong></p><p>독일 개혁교회를 출석하며 어렸을때부터 신앙을 길러왔고,</p><p>1876년에 회심을 경험한후 델라웨어 카운티 공립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는데</p><p>이 사실을 보고 대한제국의 고종이 아펜젤러의 교육선교를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p><p>이후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잠시 일을 하였는데,</p><p>1881년 2월 19일에는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다.</p><p>결국 뉴저지주의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간 파송예베에서 만난 사람에게 목사안수를 받아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서 아내와 자식까지 낳고 조선 사역,교육에 힘썼다.</p><p>이후 일본에서 전라남도로 가는배가 침몰할때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하였다.</p><p><br/></p><p><strong>2.“헨리 아펜젤러”의 업적</strong></p><p>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선교에 힘썼으며 성경번역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아버지를 이어 배재학당에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에 헌신했고,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p><p><br/></p><p><strong>3.“헨리 아펜젤러”에 대한 나의 평가</strong></p><p>보편적으로 ”헨리 아펜젤러“는 상당히 쉽지 않은, 여려운 결정과 업적을 이루어낸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다.</p><p>태생부터 모태신앙으로 시작해 상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선교학교로 선교학교에서 먼 외국으로 가서 교육과 선교를 하며 끝날까지도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사람이다.</p><p>마치 빛어 놓은듯 숭고하고 희생적인 인생을 살아오셨던 “헨리 아펜젤러”를 내가 감히 평가하자면</p><p>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고, 한국의 학생으로써 보면 정말 감사한분이다.</p><p>한줄로 평가하면 정말 귀감이 되는 선교사이자 인성과 신앙심으로 봐도 일반적인 사람에게선</p><p>찾아보기 어려운 숭고하고 대단한 사람이다.</p><p>라고 나는 평가한다.</p><p><br/></p><p><strong>4.“헨리 아펜젤러”에 대해 알아본 소감</strong></p><p>기독교인으로 타지 선교에 대해 간접적으로 나마 접한적이 종종있다.</p><p>예를들어 교회에서 필리핀의 아이타 부족으로 선교를 간적이 있었고 그 발표를 들은적이있다.</p><p>필리핀의 소수민족인 아이타 부족은 핸드폰과 인터넷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패쇄적인</p><p>부족이였다. 그곳에 처음으로 선교를 갔던 선교사님은 정말 많은고생을 했다는것을 들었다.</p><p>더운 기후,허구한날 내리는비,재대로 되지 않은 수고시설,처참한 경제,패쇄적이고 경계하는부족</p><p>이 요소를 해치고 선교를 하는것도 정말 어렵고 엄청난 수고인데,</p><p>하물며 더 환경이 열악하고 전쟁도 나는일이 잦고 외국인에 대한 경계도 생각하면</p><p>어떻게 이런 선교활동을 어떤 심정과 신앙심, 숭고함으로 결심하고 실천했을지 상상이 되지않는다.</p><p>지금 배우는 역사에서도 조선은 옛날 흥선대원군 시절 프랑스 선교사 4명을 죽인다거나,</p><p>기독교를 야소교라고 부르며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탑압했던 전적이 있던 나라인데</p><p>충분히 위험하게 느낄수도 있고 좀더 나은 선교지를 선택할수도 있었는데도</p><p>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딫어 교육과 선교에 힘써 조선에게</p><p>불교,유교말고 다른 종교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여성과 가난한 이들에게도 배울기회를 베푼</p><p>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일생은 내게 또다른 신앙심과 감사함, 교육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p><p><br/></p><p>지금까지 “헨리 아펜젤러”의 일생과 업적을 알아보고 평가와 소감을 작성해보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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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06:47:48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1459897</guid>
      </item>
      <item>
         <title>10616임수정</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251740</link>
         <description><![CDATA[<p>생애:1957.9.101남2녀로 태어났다</p><p>업적:청량리 근처 노숙자들 일자리가 없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것을 나누어주었다</p><p>평가:최일도 목사에게 붙혀지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있는 데&nbsp;어떤 게 진짜 그의 대표사역인지는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역시 청량리역에서의 ‘밥퍼’ 사역이다. 따라서 그 사역이 최 목사의 대표적인 사역이라고 보여지지만 반드시 그렇치는 않다. 최 목사의 사역은 크게 방송출연, 기업체 강의, 영성훈련, 1004 병원, 해외밥퍼 6개처와 부흥회을 직접하는 현장인이면서도 법인 대표를&nbsp;겸하고 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웠을텐데 아무렇지않게 먼저 나서는 모습이 멋있엇다</p><p>소감:나도 최일도 목사님처럼 도움이 필요한사람에게 언제나 힘이 되주는 사람이 되고싶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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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23:41:12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251740</guid>
      </item>
      <item>
         <title>10607 김하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254623</link>
         <description><![CDATA[<p>생애: 아펜젤러 가문은 미국 출신의 선교사 가문으로 한국 근대 교육과 개신교 전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 인물인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한국에 들어와 배재학당을 세우고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그는 1902년 선교 활동 중 배 사고로 사망했지만 그의 헌신은 한국 역사에 깊이 남아 있다.</p><p>아펜젤러 가문은 한국 근대화 초기 교육과 종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교사 가문이다. 특히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1885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p><p><br/></p><p>업적: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배재학당 설립이다. 이 학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중등교육 기관 중 하나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근대 학문과 영어 교육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접할 수 있었으며 훗날 독립운동과 사회개혁에 앞장서는 인물들도 이곳에서 배출되었다.</p><p>또한 아펜젤러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며 복음 전파뿐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문해력 향상에도 기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한문 중심의 교육에 소외되어 있었지만 한글 성경을 통해 많은 이들이 글을 배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p><p>아펜젤러 가문은 이후에도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들의 헌신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뿌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아펜젤러 가문은 단순한 종교 선교를 넘어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기억된다.</p><p><br/></p><p>평가: 아펜젤러 가문은 한국에 근대 교육과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로 평가된다. 특히 헨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통해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했고 성경 번역을 통해 국민 계몽에 기여했다.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선교를 넘어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이끈 중요한 역할로 기억된다.</p><p><br/></p><p>소감: 아펜젤러 가문에 대해 알아보면서 한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게 인상 깊었다. 외국인이었지만 우리나라 교육과 기독교 전파에 힘썼다는 점이 존경스러웠고, 그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p><p><br/></p><p><br/></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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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23:44: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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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610 서유나</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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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헨리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세스퀘해나 에서 출생함.</p><p>펜실베이니아 주 프랭클린 안 마샬 대학을 졸업</p><p>감리교 목사 안수 후, 1885넌 조선으로 파견</p><p>조선에서의 활동 : 1885년 4월 5일 제물포(인천) 도착 </p><p>같은 해 4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 이후 서울로 이동하여 선교활동 시작</p><p>서울 정동에 배재학당 설립 (훗날 배재중학교 , 배재 고등학교로 발전)</p><p>학국어 성경번역에 적극 참여</p><p>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음. 감리교회 조직과 전도 활동 수행</p><p>단순 선교 뿐 아닌 교육과 계몽을 통해 근대화 기여</p><p>그리고 1902년 6월 11일, 목포근처에서 배를 타고다던 중 충동사고로 인해 사망 (묘소는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음) </p><p>평가 :</p><p>당시 조선이라는 낯선나라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쳤던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17년동안 떠나지않고 , 심지어 죽음도 조선에서 맞았다는것에 대단하다고 느꼈다.</p><p>소감 :</p><p>낯선곳에서도 포기하지않고 열심히 산 한 사람의 위대한 삶 이라고 생각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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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23:55:4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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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605김서윤</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268869</link>
         <description><![CDATA[<p><strong>생애</strong></p><p>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현 룡천군 신암리 두바위골)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張雲燮, 1877. 5. 9 ~ ?)이며 어머니는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D%95%B4%EC%A3%BC%20%EC%B5%9C%EC%94%A8">해주 최씨</a> 영세(崔永世)의 딸이다.</p><p><br/></p><p><strong>업적</strong></p><p>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 청십자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class="qYcMde0-" href="https://namu.wiki/w/%EC%9D%98%EB%A3%8C%EB%B3%B4%ED%97%98">의료보험</a>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것이다.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은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공했던 임의의료보험조합으로 전국적으로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와, 의료보험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마련시켰다.</p><p><br/></p><p><strong>평가</strong></p><p>장기려 박사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어려우신 사람들을 위해 힘 써주신 고마운 사람이다. </p><p><br/></p><p><strong>소감</strong></p><p>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셨다는게 잘 보이시는 사람이다. 의료보험을 만드신건 정말 멋지시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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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6 23:58: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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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510 연가연 10516 정지안</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06108</link>
         <description><![CDATA[<p>생애 </p><p>장기려 박사(張起呂, 1911–1995)는 한국의 대표적인 외과 의사이자 의료 사회운동가로, 특히 ‘바보 의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헌신과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p><p><br/></p><p>업적</p><p>출생과 학업<br>평안북도 용천(현재 북한) 출신으로,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외과 조수 및 강사로 활동했습니다&nbsp; .</p><ul><li><p>초기 경력 및 의학 박사 취득<br>1940년 나고야대에서 충수염·복막염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nbsp; , 평양 기휼병원 외과 과장으로 활동했습니다&nbsp; .</p></li><li><p>간 절제술 개척<br>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에 대한 간 절제(hepatectomy)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1959년 대량 간 절제 수술도 시행하는 등 간 외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nbsp; .</p></li><li><p>한국전쟁과 복음병원 설립<br>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부산으로 내려온 뒤, 1951년 복음진료소(현 복음병원)를 설립해 무료 진료를 제공했습니다&nbsp; .</p></li><li><p>의료보험 운동 선도<br>1968년에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체계의 기틀이 된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nbsp; .</p></li></ul><p><br/></p><p>평가 </p><ul><li><p>1979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 실천적 기독교 박애 정신으로&nbsp; 열심히함</p></li><li><p>국가 훈장(무궁화장 등), 1991년 호암상, 2006년 한국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헌액 등 다양한 공로상 수여&nbsp; </p></li></ul><p><br/></p><p><br/></p><p>소감</p><p><br/></p><p>10510 연가연 - 솔직히말해 종교에대해 아무런 관심도없었고 흥미도없었는데 이번 활동으로 인해 배우고 알게된거같아 좋았다 종교시간때 좀 더 수업 열심히 들을수있을거같다</p><p><br/></p><p>10516 정지안 - 장기려 박사가 한 업적이나 평가를 보며 존경스러웠고 장기려 박사님이 헌신과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듯이 장기려 박사님을 닮으며 살고싶다 생각했다. 장기려 박사님 짱.</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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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5:32: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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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502 고금혜</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08624</link>
         <description><![CDATA[<p>디트리히 본회퍼목사님(Dietrich Bonhoeffer)의 삶과 사상은 한 사람의 전기 그 이상으로, 20세기 신학·윤리·정치·영성의 복합적 교차점에 서 있는 인물로 평가됩니다.</p><p>---</p><p>1️⃣ 생애 상세 연대기</p><p><br/></p><p>● 유년기와 교육 (1906–1927)</p><p><br/></p><p>출생: 1906년 2월 4일,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 (현 폴란드 브로츠와프)</p><p><br/></p><p>가정: 아버지 칼 본회퍼(Karl Bonhoeffer)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였고, 어머니 파울라(Paula Bonhoeffer)는 엄격한 루터교 가정에서 자람.</p><p>디트리히는 8남매 중 여섯째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p><p>어린 시절부터 음악(특히 피아노), 고전, 철학에 능했으며, 신학에 이끌림.</p><p><br/></p><p>● 신학 수학과 유학 (1923–1931)</p><p><br/></p><p>1923년: 튀빙겐 대학교 입학 후 곧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p><p>1927년 (21세): 박사학위 취득. 논문 주제는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해 (Sanctorum Communio).</p><p>1930년–1931년: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유학.</p><p>이 시기에 흑인교회(특히 Abyssinian Baptist Church)를 경험하면서 사회 정의, 인종차별, 실제적 기독교 신앙에 깊은 인상을 받음.</p><p>본회퍼가 "현실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몰입하게 되는 계기.</p><p>---</p><p>2️⃣ 주요 활동과 저항 운동</p><p><br/></p><p>●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초기 경고 (1933–1934)</p><p>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의 위험성’을 지적함.</p><p>&gt; 방송 중 히틀러 비판 부분이 검열로 중단됨.</p><p><br/></p><p>1934년 바르멘 선언: 나치의 “국가 교회화” 시도에 맞서, 칼 바르트 등과 함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창립.</p><p>국가 권력에 휘둘리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p><p>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다!</p><p><br/></p><p>● 파켄발데 신학교 운영 (1935–1937)</p><p><br/></p><p>고백교회 신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비밀 지하 신학교 설립.</p><p>이 신학교에서의 경험은 그의 대표작인 《신도의 공동생활》, 《성경 묵상》 등에 반영됨.</p><p>훈련은 단지 학문적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과 제자도를 중심으로 함.</p><p><br/></p><p>● 외국 망명 거절 (1939)</p><p><br/></p><p>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다시 초청되어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피할 기회를 가졌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귀국함:</p><p>&gt; “이 고난의 시대에 나는 내 민족과 함께 고난받지 않으면, 전후에 독일 교회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p><p>---</p><p>3️⃣ 히틀러 암살 모의와 체포 (1940–1945)</p><p><br/></p><p>● 군사 정보기관(Abwehr) 내 저항 활동</p><p><br/></p><p>형제 클라우스 본회퍼와 매형 한스 폰 도나니는 아베어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고, 본회퍼도 그들과 함께 비밀리에 반히틀러 활동에 가담.</p><p>히틀러 암살 시도에 정보 수집 및 외교 창구 역할 수행</p><p>본회퍼는 외국 교회와의 연계를 통해 ‘나치 내부 저항 세력’의 존재를 알리는 데 노력.</p><p><br/></p><p>● 체포와 수감 (1943)</p><p><br/></p><p>암살 음모와 관련한 자료가 발각되며 체포되어 테겔 감옥 수감.</p><p>이후 베를린, 뤼벡, 최종적으로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로 이감.</p><p>수감 중 쓴 편지가 훗날 《옥중서신》으로 출판됨.</p><p>---</p><p>4️⃣ 순교와 최후</p><p><br/></p><p>1945년 4월 5일: 히틀러 암살 음모 관련자들의 문서가 발견됨.</p><p>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 당시 39세.</p><p>처형 전, 본회퍼는 동료 죄수에게 이렇게 말함:</p><p>&gt;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시작입니다 — 삶의 시작.”</p><p>수용소 의사의 증언:</p><p>&gt; “나는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의 죽음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는 담대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p><p>---</p><p>5️⃣ 신학 사상과 주요 주제</p><p><br/></p><p>🧭 1. 값싼 은혜 vs 값비싼 은혜</p><p><br/></p><p>《나를 따르라》에서 언급된 개념</p><p><br/></p><p>값싼 은혜: 죄의 회개나 변화 없이 단순히 용서만을 말하는 종교적 형식주의</p><p>값비싼 은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자기 부인의 길, 제자도의 실천</p><p><br/></p><p>🧭 2.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제자도)</p><p><br/></p><p>신앙은 단순한 교리나 교회 출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삶의 방향성이어야 한다.</p><p><br/></p><p>🧭 3.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의 신앙</p><p><br/></p><p>《옥중서신》의 핵심 주제</p><p>‘종교 없는 기독교’를 언급하며, 성숙한 세계 안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줘야 함.</p><p><br/></p><p>🧭 4. 윤리와 실천</p><p><br/></p><p>《윤리학》에서 “상황 윤리”나 “절대 윤리”에 대한 고정 관념을 비판.</p><p>하나님 앞에서, 현실의 책임 속에서 최선의 선을 택해야 한다.</p><p>---</p><p>6️⃣ 주요 저서 정리</p><p><br/></p><p>제목	설명</p><p><br/></p><p>《나를 따르라 (Nachfolge)》	제자도의 의미, 십자가, 은혜 개념의 깊은 성찰</p><p>《신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	파켄발데 신학교의 공동체 경험 바탕, 일상적 경건 훈련</p><p>《윤리학 (Ethik)》	미완성 대작. 옥중에서 쓰인 글 모음. 도덕과 책임의 복잡함 다룸</p><p>《옥중서신 (Widerstand und Ergebung)》	신, 인간, 공동체, 고통, 침묵 등 깊은 영성과 철학이 담긴 편지 모음</p><p>---</p><p>🗣️ 7️⃣ 명언 10선</p><p><br/></p><p>1. “악 앞에 침묵하는 것도 악이다.”</p><p>2. “신앙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p><p>3. “값비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이다.”</p><p>4.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통해서도 가르치신다.”</p><p>5.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공동체다.”</p><p>6. “자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p><p>7. “우리의 말보다 침묵이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p><p>8. “믿음은 행동 없는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p><p>9. “종교 없는 시대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증거해야 한다.”</p><p>10.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이 멀어지신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오신 것이다.”</p><p>---</p><p>🕊️ 8️⃣ 유산과 영향력</p><p><br/></p><p>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p><p>정의로운 저항의 상징으로서, 독일 내 양심적 지식인의 상징 기독교 윤리, 정치신학, 실천신학, 교회론에 엄청난 영향</p><p><br/></p><p>영향을 받은 인물들:</p><p>마틴 루터 킹 주니어 (비폭력과 정의)</p><p>데스몬드 투투 (남아공 인권 운동)</p><p>장 마리 엘리, 장 뤽 마리옹 (현대 가톨릭 철학자)</p><p>오늘날의 "공공신학"의 선구자적 역할</p><p><br/></p><p>소감: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을 조사하면서</p><p>정말 멋진분울 지금 알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고</p><p>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었던데 그 영화를 꼭 보고싶다 느꼈고 히틀러라는 무서운존재 에게서 맞서싸우신 부분이 정말 멋지고 용감하다  느꼈다 또한 노래와 마지막 기도문구 까지 알려져 있는것을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애서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수 있는것 같았다 시험이 끝나면 더욱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기는 것도 고려해볼 것 같다</p><p><br/></p><p>평가: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정말 멋지신 분이다 왜냐하면공동체와 제자도에 대한 통찰,'값싼 은혜'비판,행동하는 신학자라는 점들을 합쳐서 생각을 해보니 그는 신앙과 실천이 하나로 통합된 드문 인물이며, 양심과 용기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p><p>많은 신학자들이 뛰어난 이론을 세우지만, 본회퍼는 신학을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증명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 단순히 반대의</p><p>목소리를 낸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정권을</p><p>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에도 뛰어들었던 점과 특히</p><p>그의 신학은 단순히 교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본회퍼를 신학자 중의 신학자일 뿐   </p><p>아니라, 성자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단순한 지성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p><p><br/></p><p>동영상:</p><p>https://youtu.be/wk7Fm9kXExY?si=e4x4JNeXfQMNYWuQ</p><p><br/></p><p>https://youtu.be/e0oHalQnLyI?si=bUtvb6-5PAaw9581</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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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5:34:02 UTC</pubDate>
         <guid>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08624</guid>
      </item>
      <item>
         <title>10517 하은지</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14680</link>
         <description><![CDATA[<p>최일도(1957년생) 목사님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1988년 청량리역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였습니다. 춘천행 기차를 타기 전, 역 광장의 한 노숙인이 하루 종일 굶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노숙인을 설렁탕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고, 이후로 매일 아내의 용돈을 털어 설렁탕을 사드렸으며, 곧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이는 방식으로 ‘근거리 밥퍼’를 시작했습니다&nbsp; </p><p>청량리 야채시장 인근으로 배식 장소를 옮기자, 단숨에 80여 명이 몰려들었고, 시장 상인들의 자발적인 후원도 이어져 밥퍼 운동은 전국 교회와 자원봉사자들의 참여 속에 확산되었습니다&nbsp; . 이후 29년 동안 약 1,000만 그릇의 무료 식사를 제공했으며, 5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연대해 사역의 기반을 다졌습니다&nbsp;</p><p>밥퍼 사역이 확장되며 의료 시설의 필요를 절감한 그는, 초기 무료 급식 대상자였던 한 노인이 병 없이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고 무료 병원 설립을 결심했습니다&nbsp; .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작은천국 호스피스’였으며, 이는 빈곤층과 노숙인들에게 보살핌을 제공하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의료 사회봉사 모델을 실행에 옮긴 결과였습니다&nbsp; </p><p>2010년, 목회자 정년을 11년 앞두고 담임목사직에서 조기 은퇴하며 퇴직금과 보증금 전액을 교회 장학금으로 헌금하였습니다. 이 장학기금은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nbsp; </p><p>건강의 위협도 있었지만, 꿋꿋이 사역을 이어왔습니다. 2023년에는 육종암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치료(33회)를 받으며 밥퍼 운영과 건물 철거 위기 등 행정적 갈등 속에서도 중심을 지켰습니다</p><p>한편 다일공동체는 국내를 넘어 해외 10여 개국에 분원을 열어 빈민 구제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밥 피스 메이커’ 프로젝트로 판문점에서 남북 병사가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퍼포먼스로 평화 나눔 사역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nbsp; .</p><p>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자리합니다. “삶은 라면”이라는 노숙인의 단순하고 진솔한 선언은, 그의 사역 전체를 꿰뚫는 신앙과 삶의 일치(신·삶 분리 불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 이처럼 최일도 목사님은 “밥이 답이고 밥이 평화”라는 삶의 철학을 몸소 실현하며, 소외된 이들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p><p><br></p><p>평가 : 저는 최일도목사님은 단순히 목사라는 직업만으로 살지 않고 자신의 직업과 삶을 뒤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섬기는 그 신념과 마음가짐이 너무 감동적이고 밥퍼나눔운동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도운 목사님의 고우신 마음을 본 받고 싶다. 그리고 단지 밥만 퍼준 것이 아니라 따듯한 마음과 희망까지 퍼준 것 같아서 정말 감동적인 것 같다.</p><p><br></p><p>소감 : 이번 조사를 통해 최일도 목사님의 생애에 한 발짝 더 가까워 질 수 있던 것같아서 의미있었고, 나도 앞으로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더 따듯하게 대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싶다. </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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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5:38:2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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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10513 이예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17665</link>
         <description><![CDATA[<p><br/></p><ul><li><p>출생: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스퀘해나 카운티 (Susquehanna County, Pennsylvania)</p></li><li><p>사망: 1902년 6월 11일, 대한제국 해역(한국 근해)에서 배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p></li><li><p>아펜젤라의 활동</p><p><strong>1. 📖</strong></p><p><strong>기독교 선교 활동</strong></p><ul><li><p>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도착.</p></li><li><p>조선에서 미국 감리교의 첫 선교사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습니다.</p></li><li><p>선교 초기에 직접 설교하는 것보다 교육과 의료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p></li></ul><p><strong>2. 🏫</strong></p><p><strong>교육 활동 – 배재학당 설립</strong></p><ul><li><p>1885년, 서울 정동에 배재학당(Paichai School) 설립. 이는 근대적 교육기관의 시작이었습니다.</p></li><li><p>이 학교에서는 한글과 영어, 성경뿐 아니라 수학, 과학, 세계사 등도 가르쳤습니다.</p></li><li><p>신분 차별 없이 교육을 제공하며, 많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을 배출했습니다.</p></li></ul><p><strong>3. 📜</strong></p><p><strong>성경 번역 활동</strong></p><ul><li><p>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데 깊이 관여했습니다.</p></li><li><p>특히 언더우드(장로교) 등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조선어 성경의 출판에 기여했습니다.</p></li></ul><p><strong>4. 📚</strong></p><p><strong>출판 및 문서 선교</strong></p><ul><li><p>기독교 문서, 찬송가, 교육 교재 등을 한글로 출판하여 보급했습니다.</p></li><li><p>기독교가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조선 사람의 언어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게 한다</p></li><li><p>아펜젤러의 생애를 보고 느낀것</p></li><li><p>아펜젤러는 생애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헌신과 타인을 위한 삶, 교육의 힘, 문화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실천하는 신념이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p></li></ul><p>그는 단지 선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씨앗을 심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p></li><li><p> 아펜젤러를 조사하며 느낀것</p></li><li><p>아펜젤러의 생애를 접하며, 나는 한 사람이 진심으로 타인을 위해 헌신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이라는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조선에 와서 선교와 교육이라는 사명을 실천했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학교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문이 되었다.</p><p>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겸손하고 실천적인 태도였다. 그는 조선의 문화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와 조선인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이는 단지 종교적인 활동을 넘어선 진정한 인류애와 존중의 표현이라고 느꼈다.</p><p>그의 마지막 순간 역시 감동적이었다. 배 사고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보다 타인을 먼저 돕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삶 전체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p><p>아펜젤러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삶의 본보기다. 타인을 위한 헌신, 교육의 힘, 그리고 실천하는 신념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 그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p></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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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5:40: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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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10501 강희용</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2821225</link>
         <description><![CDATA[<p><br/></p><p>🎓 초기와 한국 입국</p><p><br/></p><p>1859년 런던 출생, 1916년 별세</p><p><br/></p><p>NYU(1881), 뉴브런즈윅 신학대(1884) 졸업 후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4월 5일 서울 입국(부활절)  </p><p><br/></p><p><br/></p><p>🏥 교육·의료 활동</p><p><br/></p><p>서울 최초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훗날 제중원)에서 물리·화학 교사로 활동  </p><p><br/></p><p>1886년 소년기숙원(Christian orphanage) 설립, 이후 존 D. 웰스 아카데미 발전  </p><p><br/></p><p><br/></p><p>📖 성서·문서 번역 및 출판</p><p><br/></p><p>앱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등과 함께 신구약 성서 한글 번역 주도</p><p><br/></p><p>신약 1900년, 구약 1910년 완성  </p><p><br/></p><p><br/></p><p>1888년 한국 전도지 공사회 창립, 1896년 한국 최초 한글 찬송가 출판  </p><p><br/></p><p><br/></p><p>✝️ 교회·사회·청년활동</p><p><br/></p><p>1887년 새문안교회(현 서울 중심부) 설립  </p><p><br/></p><p>1900년 조선YMCA 서울지부 초대 조직  </p><p><br/></p><p>1917년 조선기독교대학 창립, 이후 연세대학교 전신  </p><p><br/></p><p><br/></p><p>🏫 교육기관 설립 및 대표직</p><p><br/></p><p>피어선기념성경학교(Pierson Bible Institute) 설립  </p><p><br/></p><p>1912년 평택대학교·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 전신) 총장 취임  </p><p><br/></p><p><br/></p><p>📚 저술 활동</p><p><br/></p><p>한국에 관해 여러 책 저술: 『The Call of Korea』(1908),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1910),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1914)  </p><p><br/></p><p><br/></p><p>👪 가족 및 유산</p><p><br/></p><p>1889년 한국인 왕비의 주치의였던 Lillias Horton 박사와 결혼  </p><p><br/></p><p>아들·손자들도 연세대 및 한국 선교·교육 분야에 기여</p><p><br/></p><p>1999년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이장되었고, 연세대 캠퍼스에는 그의 동상과 언더우드 기념관이 있다  </p><p><br/></p><p><br/></p><p><br/></p><p>---</p><p><br/></p><p>📌 요약</p><p><br/></p><p>한국 입국: 1885년</p><p><br/></p><p>주요 역할: 성서 번역, 교회 설립, 한국 최초 찬송가 출판</p><p><br/></p><p>교육 활동: YMCA·성경학교·연세대 전신 설립</p><p><br/></p><p>문서 저술: 한국 정세·문화 분석과 언어 교재</p><p><br/></p><p>유산: 현재까지도 한국 기독교와 교육의 핵심 인물로 기념</p><p><br/></p><p><br/></p><p>언더우드는 한국의 근대화, 기독교 확산, 교육 기반 마련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정신은 지금도 연세대학교 및 서울의 여러 기념 시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p><p><br/></p><p>°소감:이시간을 통해 이런분들이 있는줄 몰랐는데 조사하고나니 알게되었다</p><p><br/></p><p>°평가:한국을 위해서 이런일을 하셔서 대단하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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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5:43: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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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518 황희빈</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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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호머 헐버트 박사</p><p>생애 : 호머 헐버트 박사의 생애 요약</p><p>출생과 초기 생애</p><p>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출생.</p><p>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졸업 후, 1890년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p><p>한국에서의 활동</p><p>배재학당 교사로 재직하며 영어 교육과 근대 교육에 힘씀.</p><p>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연구함.</p><p>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섬.</p><p>《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등의 영어 잡지를 통해 한국을 서양에 소개.</p><p>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인 《독립신문》 발간에도 기여.</p><p>대한제국과 독립운동</p><p>고종 황제의 외교 자문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자주권 수호를 위해 노력.</p><p>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대한제국의 외교적 지원 활동 전개.</p><p>일제의 한국 침략과 병합을 강하게 비판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헌신.</p><p>말년과 한국에서의 서거</p><p>1949년,</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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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9:30: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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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518 황희빈</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pastor_chung_class/e4wotwt74e7cu87a/wish/3493098849</link>
         <description><![CDATA[<p>호머 헐버트 박사</p><p>생애 : 호머 헐버트 박사의 생애 요약</p><p>출생과 초기 생애</p><p>1863년 미국 버몬트주에서 출생.</p><p>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졸업 후, 1890년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p><p>한국에서의 활동</p><p>배재학당 교사로 재직하며 영어 교육과 근대 교육에 힘씀.</p><p>한국의 언어, 역사, 문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연구함.</p><p>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섬.</p><p>《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등의 영어 잡지를 통해 한국을 서양에 소개.</p><p>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인 《독립신문》 발간에도 기여.</p><p>대한제국과 독립운동</p><p>고종 황제의 외교 자문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자주권 수호를 위해 노력.</p><p>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대한제국의 외교적 지원 활동 전개.</p><p>일제의 한국 침략과 병합을 강하게 비판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헌신.</p><p>말년과 한국에서의 서거</p><p>1949년, 조선의 독립을 본 뒤,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에서 서거.</p><p>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됨.</p><p>업적 : 🏅 호머 헐버트 박사의 주요 업적</p><p>1. 📚 한국 근대 교육과 언어 연구</p><p>배재학당 교사(1890년~)</p><p>→ 한국의 청년들에게 영어 및 근대 학문을 가르침.</p><p>→ 조선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과 근대적 사고를 심어주는 데 기여.</p><p>한글의 우수성 연구 및 홍보</p><p>→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평가.</p><p>→ 《The Korean Alphabet》(1896)이라는 논문을 통해 한글을 서구 학계에 소개.</p><p>한국어 교재 개발</p><p>→ 조선어 학습서인 《Syllabus of the Korean Language》 집필.</p><p>→ 외국인을 위한 조선어 교육의 기초를 세움.</p><p>2. 📰 언론 및 출판 활동</p><p>《독립신문》 발간 지원(1896)</p><p>→ 서재필, 고영희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창간에 협력.</p><p>→ 국한문 혼용으로 대중의 언론 접근성 확대에 기여.</p><p>영문 잡지 발간</p><p>→ 《The Korean Repository》(1892~1898)</p><p>→ 《The Korea Review》(1901~1906)</p><p>→ 서구에 한국의 문화, 정치 상황, 국제 문제를 꾸준히 알림.</p><p>3. 🤝 대한제국의 외교 활동 및 자주권 수호</p><p>고종 황제의 외교 고문</p><p>→ 대한제국의 독립과 자주 외교를 돕기 위해 신뢰받는 외국인 자문관 역할 수행.</p><p>헤이그 특사 사건(1907)</p><p>→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을 때, 헐버트는 미국과 유럽에 외교적 지원 활동을 펼침.</p><p>→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으나,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됨.</p><p>일제의 침략 규탄 및 독립운동 지지</p><p>→ 미국과 유럽에서 강연, 글, 저술 등을 통해 일제의 조선 병합을 비판.</p><p>→ 대한제국의 독립 정당성을 계속해서 주장.</p><p>4. 🇰🇷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속적 지원</p><p>3.1운동 지지 및 해외 여론전</p><p>→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서양에 알리는 글을 지속적으로 기고.</p><p>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연대</p><p>→ 이승만, 서재필 등과 교류하며 대한인국민회 등 독립운동 단체와 협력.</p><p>조선 독립 후 귀국 요청을 받아 한국 방문(1949)</p><p>→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다"라는 말을 남기고,</p><p>→ 한국의 독립을 본 후 서울에서 서거.</p><p>평가 :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한 외국인 중 한 사람으로, 한국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음.</p><p>"조선은 내 조국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애국적 태도를 보인 인물</p><p>소감 : 이런 활동을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아주 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을 받았는지 인상깊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기분이었습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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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6-17 09:32: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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