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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반] 6월 민주항쟁 타임라인_1,2,3모둠 by 신민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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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5-09-16 00:15:2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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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3138588</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6월 9일, <strong>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strong>(<strong>민주주의적인 헌법을 반드시 얻어내려는 활동을 위해 여러 단체가 모여 만든 조직</strong>)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strong>고문살인 은폐조작</strong>(<strong>고문으로 인해 사람이 죽은 사건을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밈</strong>) 규탄(잘못이나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항의함)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 대회 출정을 위한 <strong>연세인 결의대회</strong>(<strong>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해 민주화 활동 참여를 결의하는 모임</strong>)’가 개최되었다.</p><p>전국에 <strong>갑호비상령</strong>(<strong>특정 지역의 군대가 질서 유지 및 통제를 위해 긴급히 발령되는 명령</strong>)이 떨어진 가운데, <strong>이한열</strong>도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strong>백골단</strong>’(<strong>군사/경찰 조직의 폭력 진압 집단</strong>)과 시위대가 <strong>공방</strong>(<strong>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며 맞서는 행동</strong>)을 나누는 가운데 충돌이 발생했다.</p><p>그 과정에서 이한열은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strong>SY-44 직격 최루탄</strong>(<strong>직접 발사하여 가스와 충격으로 진압하는 무기</strong>)에 뒷머리를 피격(공격을 당함)당하여 쓰러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에 가야하는데..”였다. 언젠가 그가 노트에 메모한 대로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strong>제물</strong>(<strong>희생되어 다른 사람이나 목적을 위해 바치는 존재</strong>)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던 그는 사경(죽음 직전, 생사가 위태로운 상태)을 헤매다 7월 5일 결국 사망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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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19 02:56: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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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배경</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3140428</link>
         <description><![CDATA[<p>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이기면서,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자는 직선제 개헌 요구가 점점 커졌다.<br>1986년에는 많은 국민이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그 결과 국회 안에 개헌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br>하지만 여당과 야당이 계속 의견이 달라서 협상은 잘 되지 않았다.<br>이 틈을 이용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자신의 임기 동안은 개헌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br>그리고 지금 헌법 그대로, 즉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을 ‘호헌조치’라고 한다.</p><p>이런 개헌 거부가 공식화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은 큰 폭로를 했다.<br>그것은 1987년 1월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숨겨지고 거짓으로 꾸며졌다는 사실이었다.<br>이 사실이 드러나자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br>그리고 야당과 민주화 운동 세력은 전두환 정부에 맞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p><p>출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a></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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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19 02:57: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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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배경 4.13 호헌조치 철폐 투쟁</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3153480</link>
         <description><![CDATA[<p><strong>① 직선제 개헌 요구의 확산</strong><br>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간선제로 뽑는 방식이었다.<br>이 때문에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계속 나왔다.<br>198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과 야당은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을 강하게 요구했다.<br>신민당은 1천만 명이 서명하는 큰 운동을 벌였고, 이로써 국민의 지지를 모았다.<br>직선제를 바라는 목소리는 전국으로 퍼져서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p><p><strong>② 정권의 탄압과 국민의 분노</strong><br>하지만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주장하고, 야당은 끝까지 직선제를 요구하면서 협상은 계속 실패했다.<br>정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억압했다.<br>또한 건국대 사건 같은 용공 조작 사건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을 약하게 만들려 했다.<br>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br>특히 1987년 1월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정권의 폭력을 드러내며 국민을 크게 충격에 빠뜨렸다.</p><p><strong>③ 4·13 호헌조치와 민주항쟁의 불씨</strong><br>이 위기 속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br>그는 올림픽을 잘 치르고 정국 혼란을 막기 위해 개헌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br>그래서 대통령 선거는 지금 헌법대로, 즉 간선제로 하겠다고 밝혔다.<br>정권은 이것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국민은 장기 집권을 위한 속임수라고 여겼다.<br>결국 이 조치는 국민의 반발을 더 크게 만들었고, 직선제를 바라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br>이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p><p>출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1">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1</a></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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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19 03:03: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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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10 항쟁</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3182041</link>
         <description><![CDATA[<p>-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strong>4·13 호헌조치</strong>(<strong>헌법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겠다는 결정</strong>)와 박종철 <strong>고문치사 사건</strong>(<strong>고문으로 인해 사람이 죽은 사건</strong>)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국민은 개헌 거부와 <strong>은폐 조작</strong>(<strong>사실을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밈</strong>)에 큰 <strong>분노</strong>(<strong>매우 큰 화, 격한 감정</strong>)를 느꼈다.</p><p>6월 10일은 민주항쟁의 중요한 날이었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는 <strong>민정당 전당대회</strong>(<strong>정당에서 주요 의사결정과 후보 지명을 위해 여는 대회</strong>)가 열렸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strong>호헌</strong>(<strong>헌법을 지키고 개헌을 하지 않음</strong>)을 주장하며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발표했다.</p><p>같은 날 전국 곳곳에서 <strong>국민운동본부</strong>(<strong>여러 단체가 모여 만든 조직</strong>)가 국민대회를 열었다. 서울 도심에는 약 24만 명이 모였다. 시민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시위는 <strong>을지로, 세종로 등 도심</strong>(<strong>도시의 중심 지역</strong>) 전역으로 번졌다.</p><p>상인들과 시민들은 학생들을 숨겨주거나 음료를 제공하며 시위를 도왔다. 경찰은 강경하게 막았지만 <strong>지하철역 11곳이 폐쇄</strong>되며 도심이 마비되었다. 경찰의 힘은 한계에 이르렀다. 지방에서도 시위가 확산되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22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p><p>6월 10일은 전국적인 <strong>저항의 날</strong>(<strong>억압이나 권력에 맞서 싸운 날</strong>)로 기록되며 이후 명동성당 농성과 <strong>6·26 국민평화대행진</strong>(<strong>전국 시민이 평화적으로 행진하며 민주화를 요구한 대규모 집회</strong>)으로 이어져 민주항쟁의 전환점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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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19 03:18: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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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 고문치사 사건</title>
         <author>m27d251034</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3204379</link>
         <description><![CDATA[<p>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strong>치안본부 대공분실</strong>(<strong>당시 경찰이 정치 반대 세력을 감시·체포·고문하던 비밀 부서</strong>) 소속 <strong>수사관</strong>(<strong>범죄나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사람</strong>) 6명에 의해 <strong>연행</strong>(<strong>억지로 잡아 이동시킴</strong>)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strong>수배</strong>(<strong>경찰이 잡기 위해 지명함</strong>)받고 있는 선배인 박종운을 잡기 위해서였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strong>물·전기고문</strong>(<strong>물을 이용하거나 전기를 흘려 몸에 고통을 주는 고문</strong>)을 받다가 <strong>사망</strong>(<strong>죽음, 목숨이 끊어짐</strong>)했다.</p><p>경찰은 책상을 탁 치는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strong>발뺌</strong>(<strong>책임을 회피함</strong>)을 했지만, <strong>시체부검</strong>(<strong>죽은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사망 원인을 확인하는 의학적 검사</strong>) 결과 <strong>고문치사</strong>(<strong>고문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 사건</strong>) 사실이 <strong>드러났다</strong>(<strong>숨겨진 사실이 밝혀짐</strong>). 부검의 증언으로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공식 <strong>시인</strong>(<strong>사실임을 인정함</strong>)했고, 수사경관 강진규를 <strong>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strong>(<strong>범죄를 더 무겁게 처벌하도록 한 법률 위반</strong>) 혐의로 <strong>구속</strong>(<strong>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을 잡아 가둠</strong>)했다. 각계인사(<strong>사회 각계의 인사, 여러 분야의 중요한 사람</strong>) 6만 명으로 준비위원이 구성되어 2월 7일 박종철군 <strong>범국민추도회</strong>(<strong>죽은 사람을 기리고 애도하는 모임</strong>)를 개최했다.</p><p>5월 18일,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strong>조작</strong>(<strong>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으로 꾸밈</strong>)되었다'는 제목의 <strong>사제단</strong>(<strong>종교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사람, 신부·목사 등</strong>) 성명은 엄청난 <strong>반향</strong>(<strong>사회의 큰 반응</strong>)을 불러왔다. 5월 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6월 10일엔 <strong>규탄대회</strong>(<strong>어떤 잘못이나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항의하는 모임</strong>)를 열기로 했다.</p><p>6월 10일 <strong>민주헌법쟁취</strong>(<strong>민주주의적인 헌법을 반드시 얻어내려는 활동</strong>) 국민운동본부(여러 단체가 모여 만든 조직)는 '박종철 고문 은폐(<strong>사실을 숨김, 감춤</strong>) 조작 및 <strong>호헌선언</strong> 반대 <strong>범국민대회</strong>(전 국민이 참여한 집회)'를 개최했다.</p><p>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strong>명예졸업장</strong>(<strong>공식적으로 학위를 인정하는 상징적 졸업장</strong>)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내무부 등으로 구성된 <strong>관계기관 대책회의</strong>(<strong>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기관 회의</strong>)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밝혀졌다.</p><p><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74">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74</a></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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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19 03:31: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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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9민주화선언 + 결말</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8430290</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국에서 <strong>시위(많은 사람이 모여 의견을 알리며 항의하는 행동)</strong>가 커지자 정부는 <strong>군 투입(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거나 관리하는 것)</strong>까지 검토했지만, <strong>국민 여론(사람들의 의견)</strong>과 미국의 <strong>압력(강제로 영향을 주려는 힘)</strong>, 올림픽 준비 부담 때문에 물러섰다.<br>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strong>직선제(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제도)</strong>, 김대중 <strong>사면복권(죄를 용서하고 정치 활동 등 권리를 되돌려 줌)</strong>, <strong>언론 자유(신문·방송 등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strong>, <strong>지방자치(지역 주민이 스스로 지역 일을 다스리는 제도)</strong> 등을 약속했고, 이로써 호헌조치는 <strong>철회(취소)</strong>되었으며 이후 개헌과 선거를 통해 노태우가 <strong>당선(선거에서 뽑힘)</strong>되었다</p><p>출처 <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1">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1</a></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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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3 00:16: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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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title>
         <author>m27d251034</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598455268</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5월부터 야당(<strong>여당이 아닌 정당</strong>) 재야(<strong>정권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회운동 세력</strong>) 학생들의 <strong>민주대연합</strong>(<strong>민주화를 위해 여러 단체와 인사가 모인 연합 조직</strong>)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민주대연합의 구체적 모습이 향후 6월민주항쟁에서 구심적(<strong>중심적 역할을 하는</strong>) 역할을 하는 '<strong>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strong>'(약칭 <strong>국본</strong>)이다. 5월 27일 전국에서 1,191명의 <strong>발기인</strong>(<strong>조직 결성을 위해 처음 참여한 사람</strong>)을 대표한 계훈제, 박형규, 김상근 등 150여 명의 인사들이 <strong>향린교회</strong>에 모여 <strong>발기인대회</strong>(<strong>조직 결성을 위해 처음 모인 회의</strong>)와 함께 <strong>결성대회</strong>(<strong>조직을 공식적으로 세우고 선언하는 모임</strong>)를 열었다.</p><p>국본은 대회에서 <strong>4·13조치</strong>(<strong>헌법 개정이나 선거 관련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strong>)는 <strong>건국정신</strong>(<strong>나라를 세운 정신</strong>)과 민주화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도덕적(<strong>옳고 그름의 기준</strong>)·법률적으로 당연히 무효(<strong>효력이 없음</strong>)라고 선언했다. 또한, 현행 헌법 및 <strong>집시법</strong>(<strong>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strong>)과 <strong>언론기본법</strong>(<strong>언론 활동에 대한 기본 법</strong>) 등 모든 <strong>악법</strong>(<strong>공정하지 못하거나 민주적이지 않은 법</strong>)의 민주적 개정과 무효화를 위한 <strong>범국민적 운동</strong>(<strong>전 국민이 참여하는 운동</strong>)을 벌였다.</p><p>국본은 각종 사건의 진상을 <strong>규명</strong>(<strong>사실을 밝히고 원인을 조사함</strong>)하고, 민주인사의 <strong>석방 및 복권</strong>(<strong>체포된 사람을 풀어주고 권리를 회복시킴</strong>)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국본은 8명의 <strong>고문</strong>(<strong>조직의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strong>)과 11명의 <strong>상임공동대표</strong>(<strong>항상 조직을 대표하며 운영하는 대표</strong>)로 구성되었다.</p><p>국본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6월 10일에 '<strong>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strong>'를 열기로 했고, 6월 5일 '<strong>6·10 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strong>'을 발표하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오전 10시에 맞춰 <strong>대성당</strong>에서 옥외 <strong>마이크</strong>를 통해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 <strong>무효화</strong>(<strong>효력이 없다고 선언</strong>)를 선언했다. 국본은 선언문과 함께 "<strong>법을 확립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온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평화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할 것</strong>" 등을 내용으로 <strong>결의문</strong>(<strong>조직의 방침과 의지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문서</strong>)을 발표했다.</p><p><a rel="noopener noreferrer nofollow" href="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140">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140</a></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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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3 00:30: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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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배경 요약</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4978192</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강하게 요구했지만, 정권은 이를 거부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는 장기 집권 음모로 비쳐져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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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14: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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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 요약</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4984373</link>
         <description><![CDATA[<p>박종철은 1987년 1월, 선배를 잡기 위한 수사 과정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경찰은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 해명을 했으나, 부검 결과 고문치사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는 사건 발생 5일 만에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일부 수사관을 구속했지만, 진실은 계속 은폐·축소되었다. 이후 범국민 추도회와 성직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며 사회적 분노가 커졌고,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대규모 집회로 발전했다. 이 사건은 정권의 폭력성과 거짓을 드러내며 6월 민주항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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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16: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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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한열 요약</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4986305</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6월 9일, 6·10 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출정을 위한 결의대회’에 이한열이 참가했다.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백골단과 시위대가 충돌했고, 이한열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그는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남겼고, 끝내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사망했다. 이 사건은 정권의 폭력성을 다시 드러내며 국민적 분노와 민주화 열망을 더욱 고조시켰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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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17: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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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9민주화선언+결말 요약</title>
         <author>m27d251034</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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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987년 <strong>6월 민주항쟁</strong>으로 전국에서 <strong>시위</strong>가 커지자, 정부는 <strong>군 투입</strong>까지 검토했지만 <strong>국민 여론</strong>, <strong>미국의 압력</strong>, <strong>올림픽 준비 부담</strong>으로 물러났다. 이후 <strong>노태우</strong>는 <strong>6·29 선언</strong>을 발표해 <strong>대통령 직선제</strong>, <strong>김대중 사면복권</strong>, <strong>언론 자유</strong>, <strong>지방자치</strong> 등을 약속했고, <strong>호헌조치</strong>는 <strong>철회</strong>되었다. 이후 <strong>개헌</strong>과 <strong>선거</strong>를 통해 노태우가 <strong>당선</strong>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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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18: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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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10항쟁 요약</title>
         <author>m27d251034</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5006811</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strong>6월 민주항쟁</strong>은 <strong>4·13 호헌조치</strong>와 <strong>박종철 고문치사 사건</strong>으로 촉발되었습니다. 국민은 <strong>개헌 거부</strong>와 <strong>은폐 조작</strong>에 분노했고, <strong>6월 10일</strong>, <strong>전두환</strong>과 <strong>노태우</strong>가 <strong>호헌</strong>을 주장하며 <strong>민정당 전당대회</strong>를 여는 날, <strong>국민운동본부</strong>는 전국에서 <strong>국민대회</strong>를 열었습니다.</p><p>서울 도심에는 약 24만 명이 모여 "<strong>호헌 철폐</strong>, <strong>독재 타도</strong>"를 외치며 <strong>시위</strong>가 번졌고, <strong>상인</strong>과 <strong>시민</strong>들도 참여했습니다. <strong>지하철역 폐쇄</strong>, <strong>경찰의 강경 진압</strong> 속에서도 시위는 <strong>부산</strong>, <strong>대구</strong>, <strong>광주</strong> 등 <strong>22개 도시</strong>로 확산되었고, <strong>6월 10일</strong>은 전국적인 <strong>저항의 날</strong>로 기록되었다. 이후 <strong>명동성당 농성</strong>과 <strong>6·26 국민평화대행진</strong>으로 이어지며 <strong>민주항쟁의 전환점</strong>이 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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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27: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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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 요약</title>
         <author>m27d251034</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5014002</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5월,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strong>민주대연합</strong>이 크게 성장하며, 6월 민주항쟁의 중심인 <strong>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strong>가 결성되었습니다. 5월 27일, 계훈제, 박형규, 김상근 등 150여 명이 향린교회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고, 국본은 <strong>4·13 조치</strong>를 무효라고 선언했다.</p><p>국본은 현행 헌법과 악법의 민주적 개정과 무효화를 목표로 범국민 운동을 벌였고, 사건 진상 규명과 민주인사 석방, 복권을 위해 힘썼습니다.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준비했고, 6월 5일에는 대성당에서 후보 선출 무효를 선언하며, 평화적인 모든 방법을 총동원할 것을 결의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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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31:3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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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요구 방법, 요구 사항</title>
         <author>m27d251039</author>
         <link>https://padlet.com/jnums/clon759txvn3jldp/wish/3605031617</link>
         <description><![CDATA[<p>1. 요구사항</p><ul><li><p><strong>대통령 직선제 개헌</strong>: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게 해 달라.</p></li><li><p><strong>군사정권 종식과 민주주의 실현</strong>: 군사독재를 끝내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달라.</p></li><li><p><strong>인권 보장과 정의 실현</strong>: 고문·부당한 탄압 중단, 공정한 사회.</p></li><li><p><strong>정치적 참여 확대</strong>: 국민이 정치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리 확보.</p></li></ul><p>2. 요구방법</p><ul><li><p><strong>대규모 집회와 시위</strong>: 6월 10일 서울 전역에서 열린 시위, ‘6·10 국민대회’.</p></li><li><p><strong>연대 활동</strong>: 학생, 노동자, 시민 단체가 함께 참여하여 힘을 모음.</p></li><li><p><strong>구호와 선언</strong>: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요구 의사 표현.</p></li><li><p><strong>언론과 문화 활용</strong>: 신문, 방송, 노래, 포스터 등을 통해 시민 여론 환기.</p></li><li><p><strong>평화적 저항과 불복종 운동</strong>: 폭력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시민적 행동으로 압박.</p></li></ul>]]></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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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09-26 02:41: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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