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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 지역의 문화유산 조사하기 by 남미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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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수상의 의욕을 담아 만듦</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22-04-08 06:02: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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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융건릉</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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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br><br>내용<br>사적 제206호. 장조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소생으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배봉산(拜峰山: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br><br>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혜빈 홍씨는 1815년(순조 15)에 죽어 그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br><br>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76년에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한 뒤 1800년에 죽자 현륭원 동쪽에 초장하였다가 효의왕후가 1821년에 죽자 현륭원 서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하였다.<br><br><br><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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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5: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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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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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div><div>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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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6:4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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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주 보광사 목조보살 입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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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보광사 대웅보전의 정면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세 부처(삼세불)가 본존 부처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우 끝에 마치 협시보살(가운데 부처의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처럼 두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두 보살상은 본존인 세 부처와는 조각 솜씨가 다르다. 세 부처는 1610년에 만든 여주 신륵사의 나무 석가삼존상과 비슷하다. 반면 두 보살상은 정면 오른쪽 보살상 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 바라고 원하는 것을 적은 글)에 1633년(인조11)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 모시기 위하여 영색(英賾), 성근(省勤) 등의 다섯 명의 조각 스님이 함께 만든 미륵보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보살상과 짝을 이루는 반대쪽 보살상은 제화갈라보살이며, 이들은 양주 회암사가 없어진 후에 이곳 보광사로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br><br>두 보살상은 옷주름과 손의 위치만 다를 뿐 모습이 같다. 이목구비는 작고 아담하여 천진무구한 모습이며,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운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댄 채 올리고 내렸다. 네모진 얼굴, 불꽃무늬와 꽃무늬 달개가 달린 장식적인 관, 두꺼운 옷자락과 밋밋한 신체, 가슴의 속옷 끝자락을 꽃잎을 이어 붙인 것처럼 마무리한 점 등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치마를 묶은 띠매듭을 발목 사이로 길게 드리운 표현은 앞선 시기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두 보살상은 발원문을 통하여 이름은 물론 만든 때와 만든 이를 알 수 있고 또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조선 후기 불교조각의 기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하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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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6: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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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부산 오륙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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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부산 오륙도는 부산 북안 육지부인 승두말로부터 남남동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바위섬들로 오륙도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東萊府誌 山川條)에 “오륙도는 절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br><br>(五六島在絶影島東 峯巒奇古列之海中 自東視之則爲六峯 自西視之則爲五峯 故名之 以此)”라 기록된 바와 같이 보는 사람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br><br>(일설에는 방패섬과 솔섬의 아래 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일 때는 우삭도라 불리우는 하나의 섬으로 보이나 밀물일 때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는 데서 온 것이라고도 하나 이는 19세기 일본인이 잘못 기록한 내용에 의한 오해라는 주장이 있다.)<br><br>승두말에서 가까운 섬부터 우삭도(밀물시에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눠짐),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의 순서로 늘어서 있으며, 각 섬마다 수직에 가까운 해안절벽과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파식대와 각양 각색의 해식동 등 기이하고 다양한 해양지형과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라온 동식물들, 그리고 짙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br><br>오륙도는 섬의 수가 5개 또는 6개로 보인다는 신비감과 함께 오륙도 앞의 항로는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들어서는 주요 해상 관문의 하나이다. 또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제영이 끊이지 않아 오륙도를 주제로 한 많은 노래와 시가 전하는 등 오랜 기간 동안 부산 시민의 정서상 ‘부산의 표징’ 역할을 해 오는 등 부산을 대표하는 섬으로 상징성이 매우 큰 아름다운 명승지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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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19:5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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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1: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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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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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s://namu.wiki/w/%EC%84%B8%EC%A2%85(%EC%A1%B0%EC%84%A0)">세종</a>과 <a href="https://namu.wiki/w/%EC%86%8C%ED%97%8C%EC%99%95%ED%9B%84">소헌왕후</a>를 모신 <a href="https://namu.wiki/w/%EC%A1%B0%EC%84%A0%EC%99%95%EB%A6%89">조선왕릉</a>으로 <a href="https://namu.wiki/w/%EA%B2%BD%EA%B8%B0%EB%8F%84">경기도</a> <a href="https://namu.wiki/w/%EC%97%AC%EC%A3%BC%EC%8B%9C">여주시</a>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있다. 아내 소헌왕후와 합장되어 있는데, 이 능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이다.<br><br>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a href="https://namu.wiki/w/%EC%98%81%EB%A6%89(%ED%9A%A8%EC%A2%85)">영릉</a>은 묶여서 <a href="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C%82%AC%EC%A0%81">사적</a> 제195호로 지정되었다.<br>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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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2: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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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5: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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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융건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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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br><br>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br><br>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br><br>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br><br>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br><br>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br><br>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br><br>화성이미지1<br>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br><br>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br><br>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br><br>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br><br>문화 유산적 가치<br>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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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6: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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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층석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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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br><br>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br><br>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br><br>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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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6:3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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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융건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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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사적 제206호. 장조는 영빈이씨의 소생으로 1736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배봉산 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에 정조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으로 명명하였다.</div><div>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혜빈 홍씨는 1815년에 죽어 그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div><div>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76년에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한 뒤 1800년에 죽자 현륭원 동쪽에 초장하였다가 효의왕후가 1821년에 죽자 현륭원 서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하였다.</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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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1 02:29: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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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종암</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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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여러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표면이 고른 4개의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1684년(숙종 10)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 등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여러 글귀를 새긴 것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가 수만 번 굽이쳐 마침내 동쪽으로 흘러가듯이 충신의 절개도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한 글귀로,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의리를 나타낸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은 ‘제후의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 왜군을 물리친 것을 말한다. 모두 선조의 어필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은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지통재심(至痛在心)〉은 ‘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다’는 뜻으로, 아픔은 너무나 크지만 어찌할 길이 없음을 말한다.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북벌(北伐)을 추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효종의 심정이 담긴 글이다. 〈조종암〉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전서(篆書)로 썼다. 1804년(순조 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조종암기실비(朝宗巖記實碑)”를 조종암의 여러 바위 중에서 하나를 고른 후 받침돌로 삼아 세웠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팽배해 있던 숭명배청(崇明排淸), 소중화(小中華), 대명의리(對明義理) 사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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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49: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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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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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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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0: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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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0:3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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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0:4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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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1: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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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1:5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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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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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2:0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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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2:1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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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거북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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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br>우리의 민속문화 중에서 경기도와 충청도에만 분포하는 놀이가 있으니, ‘거북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거북놀이는 추석에 수숫대를 벗겨 거북의 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길놀이, 우물굿, 마을놀이, 문굿, 터주굿, 조왕굿, 대청굿, 마당놀이 등을 순서대로 펼치는<br><br>민속놀이다.<br><br>다른 민속놀이에 비하여 추석 때에 주로 이루어지는 점, 거북을 만드는 재료가 수숫대인 점, 중부 내륙지방에만 이 놀이가 분포하고 있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또 마을을 돌며 놀이판을 펼치면서 마을의 전체와 각 가정의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해주는 제의적 성격이 강하며, 놀이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실제 놀이에 이르기까지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석한다는 점에서 마을의 화합을 도모하는 대동놀이이기도 하다.<br><br>이천 거북놀이는 다른 지역의 거북놀이에 비하여 그 놀이과정과 기물의 형태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고, 이천거북놀이보존회가 있어 거북놀이에 대한 조사·연구·보존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2017년 제14회를 맞이한 이천거북놀이축제는 이천거북놀이의 원형을 보존하고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지역의 민속놀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천거북놀이 보존회 http://cafe.daum.net/gg50)</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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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3: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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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3: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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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3: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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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택농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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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하였고, 이는 평택농악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인 동시에 걸립패농악(중들이 꽹과리치면서 염불하고 동냥하는 일)의 성격을 갖는다.<br><br>농악에 사용되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북, 버꾸, 호적, 나팔이 있다. 편성은 영기수(令旗手), 농기수(農旗手), 나팔수, 호적수, 상쇠, 부쇠, 종쇠, 징수 1, 징수 2, 설장구, 부장구, 상장구, 북, 상버꾸, 부버꾸, 종버꾸, 꼬리버꾸, 상무동, 종무동, 삼무동, 칠무동, 중애(사미), 양반으로 되어있다. 농악수들은 옛날 군졸들이 입었던 의상을 입고 그 위에 색띠를 걸쳐 매며 머리에는 벙거지나 고깔을 쓴다. 악기에 있어서 징과 북이 타지역에 비하여 적으며 소고와 법고의 구별이 없다.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며 노래굿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또한 길군악칠채는 경기농악에만 보이는 장단으로 평택농악의 길군악칠채는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br><br>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의 소박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공연성이 뛰어난 남사당패 예인들의 전문적인 연희를 받아들여 복합적으로 구성한 수준높은 농악이며, 무동놀이(어른의 목말을 타고 아이가 춤추는 놀이)가 특히 발달하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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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4: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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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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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4: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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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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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되는 무덤은 ‘능(陵)’과 ‘원(園)’으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陵)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br><br>조선시대의 왕릉과 원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녕릉 3기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도읍지인 한양에서 40km 이내에 입지하고 있으며, 왕릉이 40기, 원이 13기, 총 53기가 있다.<br><br>조선왕릉 위에서 바라본 이미지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석인, 무석인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br><br>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br><br>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br><br>조선왕릉 측면에서 바라본 이미지조선시대의 능원은 600여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한 왕조의 능원제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능원공간 조영 형식의 변화, 관리공간 영역의 변화, 조형물 특성의 변화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br><br>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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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4: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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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양 만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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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 정조(正祖)의 현륭원(顯隆園) 참배 행차시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한 다리로 정조 19년(1795)에 건립하였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교량이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길을 닦고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또한 영조(英祖)를 부추겨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金尙魯)와 관계되는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길로 바꾸도록 하였다.<br><br>원래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1794)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br><br><br><br>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蜺水門)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br><br><br><br>원래는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에 국도 확장 때 이 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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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5: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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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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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연주대’는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크고 작은 바위가 우뚝 솟아 절벽을 이룬 봉우리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집터를 만든 곳이다. 이름의 한자를 보면 ‘연(戀)’은 그리워 한다는 뜻이고 ‘주(主)’는 주군(主君) 즉 임금을 뜻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곳’으로 풀이된다.<br><br>연주대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677년에 지은 작은 암자로 원래 ‘의상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의 연주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붙인 것이다. 이름과 관련된 전설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이 세워지고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로 옮겨지면서 고려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여기에 올라 옛 왕조와 충신들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조선이 세워지고 한양이 수도로 정해질 때,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권유로 태조 이성계가 직접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경치를 둘러보고 조선과 한양의 복을 빌기 위해 원각(圓覺) · 연주(戀主) 두 절을 지었고 이때부터 ‘연주대’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br><br>연주대와 관련된 설화 중에는 세종의 형인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의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셋째 왕자 충녕 대군(훗날 세종)을 세자로 정하려 하자 두 형은 궁을 나와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양녕 대군이 이곳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고, 효령 대군은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이야기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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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6:0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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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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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8: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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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과천 연주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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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연주대’는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크고 작은 바위가 우뚝 솟아 절벽을 이룬 봉우리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집터를 만든 곳이다. 이름의 한자를 보면 ‘연(戀)’은 그리워 한다는 뜻이고 ‘주(主)’는 주군(主君) 즉 임금을 뜻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곳’으로 풀이된다.<br><br>연주대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677년에 지은 작은 암자로 원래 ‘의상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의 연주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붙인 것이다. 이름과 관련된 전설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이 세워지고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로 옮겨지면서 고려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여기에 올라 옛 왕조와 충신들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조선이 세워지고 한양이 수도로 정해질 때,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권유로 태조 이성계가 직접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경치를 둘러보고 조선과 한양의 복을 빌기 위해 원각(圓覺) · 연주(戀主) 두 절을 지었고 이때부터 ‘연주대’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br><br>연주대와 관련된 설화 중에는 세종의 형인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의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셋째 왕자 충녕 대군(훗날 세종)을 세자로 정하려 하자 두 형은 궁을 나와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양녕 대군이 이곳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고, 효령 대군은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이야기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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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8:0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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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융건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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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a href="https://namu.wiki/w/%EC%9C%B5%EB%A6%89">융릉</a>과 <a href="https://namu.wiki/w/%EA%B1%B4%EB%A6%89">건릉</a>을 합쳐 부르는 말로, <a href="https://namu.wiki/w/%EA%B2%BD%EA%B8%B0%EB%8F%84">경기도</a> <a href="https://namu.wiki/w/%ED%99%94%EC%84%B1%EC%8B%9C">화성시</a> 효행로481번길 21에 위치한 <a href="https://namu.wiki/w/%EC%A1%B0%EC%84%A0">조선</a> <a href="https://namu.wiki/w/%EC%99%95%EB%A6%89(%EB%AC%B4%EB%8D%A4)">왕릉</a>이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a href="https://namu.wiki/w/%EC%A0%95%EC%A1%B0(%EC%A1%B0%EC%84%A0)">정조</a>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왕릉으로 1970년 5월 26일에 <a href="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C%82%AC%EC%A0%81">사적</a>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br>융릉은 <a href="https://namu.wiki/w/%EC%A1%B0%EC%84%A0">조선</a>의 추존왕이자, 22대 왕 <a href="https://namu.wiki/w/%EC%A0%95%EC%A1%B0(%EC%A1%B0%EC%84%A0)">정조</a>의 생부인 <a href="https://namu.wiki/w/%EC%82%AC%EB%8F%84%EC%84%B8%EC%9E%90">장조의황제</a>와 그의 부인 <a href="https://namu.wiki/w/%ED%98%9C%EA%B2%BD%EA%B6%81%20%ED%99%8D%EC%94%A8">헌경의황후</a>의 합장릉이다.<br>건릉은 조선 제22대 왕 <a href="https://namu.wiki/w/%EC%A0%95%EC%A1%B0(%EC%A1%B0%EC%84%A0)">정조선황제</a>와 그 부인 <a href="https://namu.wiki/w/%ED%9A%A8%EC%9D%98%EC%99%95%ED%9B%84">효의선황후</a>의 합장릉이다.&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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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8: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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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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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8: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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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여주영릉(세종대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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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div><div><strong><br>능의역사</strong></div><div>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div><div><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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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9:0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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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여주 영릉</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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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영릉은 조선 4대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이다.<br><br>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br><br>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br><br>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br><br>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br><br>영릉은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이다.<br><br>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br><br>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br><br>시흥 오이도 유적<br><br>시흥 오이도 유적(始興 烏耳島 遺蹟)은 사적 제44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914번지 외 이다.<br><br>오이도는 경기도 시흥시와 약 4㎞ 떨어진 남북이 긴 섬이었으나, 1932년 갯벌을 염전으로 이용하면서 육지화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말 시화공단을 조성하면서 완전히 육지화되었다. 인근에는 제부도·대부도·소래포구 등과 연결되어 있다. 시흥 오이도 유적은 수자원공사에서 오이도 추가단지 조성을 추진하기 위해 지표조사(1988) 및 발굴조사(1988·1994·1999~2001)를 한 결과, 신석기시대, 초기 철기시대, 백제시대의 패총과 통일신라시대 주거지(온돌)가 확인되어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의 고대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유적이다.<br>발굴조사에 의해,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백제·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유구가 출토되었으며, 신석기시대의 토기·석기·수혈주거지·야외노지·화덕·청동기 패총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 삼국시대의 타날문토기 등 백제토기,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 주거지 및 온돌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는 1988년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월과 3월에 걸쳐서 2차례의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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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2:59: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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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0:3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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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0:3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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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 화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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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div><div>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div><div>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div><div>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div><div>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div><div>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다.(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div><div>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div><div>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div><div>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div><div>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div><div>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div><div>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div><div>수원화성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화서문(보물),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방화수류정(보물)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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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0: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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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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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1:2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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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br><br>조선시대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 온천 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지만,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었다.<br><br>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 수원부 읍치자리로 옮기고,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현륭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특히 1795년(정조19) 어머니인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br><br>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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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1: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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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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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2: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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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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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화성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을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정조 18)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각루(角樓), 군사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br><br>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교류를 보여주고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br><br>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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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2: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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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 화성</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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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div><div>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div><div>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div><div>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div><div>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div><div>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다.(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div><div>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div><div>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div><div>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div><div>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div><div>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div><div>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div><div>수원화성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화서문(보물),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방화수류정(보물)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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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1953년 9월 6일 남한산성을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다음 달 10월 10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유시를 내려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남한산성 수축을 지시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보존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남한산성이 허물어진 고적 수리와 도로의 신설 등을 통하여 국립공원으로 대중에게 개방된다. 하지만, 4·19 민주화 운동 후 제2공화국 때 남한산성 국립공원 지정은 무효화 되었다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된다.<br>[대한뉴스 제41호] 새 단장한 남한산성 공원(1954, CEN0005242(3-1)) 참고 이미지<br>[대한뉴스 제41호] 새 단장한 남한산성 공원(1954)<br>그 후 1971년 3월 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1974년 광지원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되었다. 이후 서울을 비롯한 인근 지역 주민들이 남한산성을 찾기가 매우 쉬워졌다.1975년부터 1997년까지 성곽 5.1km를 보수하는데 모두 40억 여원이 투입되어 남한산성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갔다. 1976년 문화재를 보호하고 공원의 시설물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남한산성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자가용이 보편화되면서 남한산성은 서울 인근의 손꼽히는 문화관광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다.<br>남한산성도립공원 사업계획결정(1971, BA0035258(1-1)) 참고이미지<br>남한산성도립공원 사업계획결정(1971)<br>수어장대남한산성의 건물 중 가장 멋진 건물로 꼽힌다는 수어장대는 서쪽에 자리한 장대라는 의미에서 ‘서장대’로 더 많이 불렸다. 수어장대는 1972년 지정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다. 조선의 국왕 중 처음 남한산성 서장대에 오른 국왕이 숙종이었으며,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남한산성을 대폭 보수한 국왕도 숙종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패전으로 청과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성벽의 수리나 신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673년 청에서 ‘삼번의 난’이 발생했고 이 혼란을 틈타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48개와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남한산성을 보강하였다.<br>남한산성 수어장대(1977, CET0061285(1-1)) 참고 이미지<br>남한산성 수어장대(1977)<br>남한산성수어장대(1978, CET0061341(11-1)) 참고 이미지<br>남한산성수어장대(1978)<br>이후에 수어장대는 크고 작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을 변형시키는 일까지 발생했다. 수어장대의 현판 위치와 색 역시 원형과 다르다는 지적이 일었다. 거기에 건물의 세부 사항도 몇 차례 바뀌었다. 다행히 2012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09년의 유리원판 사진을 토대로 원형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남한산성은 1836년경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현재 걸려있는 ‘수어장대’ 현판은 원본을 본떠서 새로 만든 것으로 1836년에 조성한 진짜 ‘수어장대’ 현판은 상자에 담아 수어장대의 2층 누각에 보관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축조 당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 누각을 올렸다. 영조는 외부를 수어장대, 내부는 무망루(無忘樓)라 이름 지었다. 인조의 굴욕과 효종의 못다 이룬 꿈, 북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영조 대에 조성한 ‘무망루’ 현판은 2층 누각 안쪽 벽면에 걸려있으며 남한산성박물관이 완공되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2014년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지역의 공학적 군사기술을 보여주고 요새화된 군사도시라는 점에서 등재 기준을 충족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2018년 현재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을 전면 보수하고 잘못 복원된 팔작지붕을 원형인 맞배지붕으로 되돌리며 노후화된 구조물을 교체할 예정이다. 2017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수어청 무예 시연과 더불어 새롭게 남한산성에서 열린 과거 시험을 연극 형태로 재현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며, 남한산성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남한산성박물관은 2022년에 개관될 전망이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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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2: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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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3: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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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구리 동구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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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9릉 17위의 왕과 왕비, 후비 등을 안장한 왕릉이다. 사적 제193호. 1408년(태종 8) 태조의 건원릉(健元陵) 터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 일대를 통해 족분(族墳)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王陵群)이다.</div><div>기록에 따르면,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검교 참찬 의정부사(檢校參贊議政府事) 김인귀(金仁貴)의 추천으로 하륜(河崙)이 양주검엄(楊州儉嚴)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택정하였다고 한다.</div><div>항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동구릉 상지전설(相地傳說)은 태조가 생전에 무학(無學)을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의 적지를 택정해서 얻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무학의 법술이 신통함을 빙자해 만든 전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9개의 능 하나 하나가 조성된 사정을 보면 일일이 여러 곳으로 길한 능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에 귀착한 것이라 하겠다.</div><div>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문조(文祖)의 능인 수릉(綏陵)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陵)·동칠릉(東七陵)이라고 부르던 사실이 실록에 전하고 있다.</div><div>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 이론에 합당한 지세임은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이 여러 대를 걸쳐 9개의 능터를 찾아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묘함에 감탄해 “어떻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는가?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造山)일 것이다.”라고 찬탄하였다 한다.</div><div>현재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그 원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현릉(顯陵),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인 목릉(穆陵),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능인 숭릉(崇陵),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능인 휘릉(徽陵),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인 혜릉(惠陵),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陵),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능인 경릉(景陵), 제23대 순조의 원자인 문조와 원비 신정익왕후(神貞翼王后)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잡고 있다.</div><div>참고문헌&gt;<em>20</em><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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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3: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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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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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701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br><br>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br><br>종의 높이는 115㎝, 입지름 71㎝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 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연뢰(蓮蕾)가 사각형의 연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입상이 표현되었다.<br><br>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명문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br><br>18세기의 종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사인비구가 한국 전통형 뿐아니라 이처럼 중국종 양식을 따른 작품도 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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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4: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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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여주 영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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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영릉은 조선 4대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이다.<br><br>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br><br>세종 28년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br><br>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겼다.<br><br>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br><br>영릉은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이다.<br><br>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br><br>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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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4: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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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 아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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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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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4:5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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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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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수원 화성</strong>(水原 華城) 혹은 <strong>화성</strong>(華城)은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대한민국</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2%BD%EA%B8%B0%EB%8F%84">경기도</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8%98%EC%9B%90%EC%8B%9C">수원시</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D%8C%94%EB%8B%AC%EA%B5%AC">팔달구</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D%96%89%EA%B6%81%EB%8F%99">장안동</a>에 있는 길이 5.52<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D%82%AC%EB%A1%9C%EB%AF%B8%ED%84%B0">킬로미터</a>의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4%B1%EA%B3%BD">성곽</a>이다.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963%EB%85%84">1963년</a> 대한민국의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82%AC%EC%A0%81_(%EC%A0%9C1%ED%98%B8_~_%EC%A0%9C100%ED%98%B8)">사적 제3호</a>로 지정되었으며,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1997%EB%85%84">1997년</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9C%A0%EB%84%A4%EC%8A%A4%EC%BD%94">유네스코</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4%B8%EA%B3%84%EC%9C%A0%EC%82%B0">세계문화유산</a>으로 등록되었다.<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8%98%EC%9B%90_%ED%99%94%EC%84%B1#cite_note-1"><sup>[1]</sup></a>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98%B9%EC%84%B1_(%EA%B1%B4%EC%B6%95)">옹성</a>, 성문, 암문, 산대,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B2%B4%EC%84%B1">체성</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B9%98%EC%84%B1">치성</a>, 적대, 포대,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B4%89%EC%88%98%EB%8C%80">봉수대</a> 등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지형에 맞추어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9D%8D%EC%84%B1">읍성</a>과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2%B0%EC%84%B1_(%EA%B1%B4%EC%B6%95)">산성</a>의 구조가 모두 존재하도록 축조되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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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5: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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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5:2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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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포천 메나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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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포천메나리</strong>는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2%BD%EA%B8%B0%EB%8F%84">경기도</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D%8F%AC%EC%B2%9C%EC%8B%9C">포천시</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0%80%EC%82%B0%EB%A9%B4_(%ED%8F%AC%EC%B2%9C%EC%8B%9C)">가산면</a> 일대에서 논을 맬 때 불렀던 농업노동요이다. 2000년 8월 21일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2%BD%EA%B8%B0%EB%8F%84%EC%9D%98_%EB%AC%B4%ED%98%95%EB%AC%B8%ED%99%94%EC%9E%AC">경기도의 무형문화재</a> 제35호로 지정되었다<br>포천 지역에는 여러 종류의 노동요가 전해오고 있지만 그 중에도 논맬 때 부르는 메나리가 매우 독특하여 포천의 노동요를 묶어 포천메나리라고 명명하게 되었다.</div><div>메나리는 악곡 명으로서 강원도에서도 널리 논매는 소리로 노래되는 곡이다. 강원도에서는 보통 교환창이나 윤창, 독창으로 노래되는데, 포천의 메나리는 다섯 조를 나누어 소리를 부르는 독특한 가창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메나리는 음악학에서는 한반도 동부지역의 음악 양식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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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5: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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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6: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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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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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br>수량/면적 | 1,969,675㎡<br>지정(등록)일 | 1970.05.26<br>소 재 지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br>시 대 | 조선 태종 8년(1408)<br>소유자(소유단체) | 문화재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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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6:3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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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6:4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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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성 요두사 대웅보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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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strong>화성 용주사 대웅보전</strong>은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2%BD%EA%B8%B0%EB%8F%84">경기도</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D%99%94%EC%84%B1%EC%8B%9C">화성시</a>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6%A1%EC%82%B0%EB%8F%99_(%ED%99%94%EC%84%B1%EC%8B%9C)">송산동</a>에 있는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8B%9C%EB%8C%80">조선시대</a>의 건축물이다. 1983년 9월 19일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A%B2%BD%EA%B8%B0%EB%8F%84%EC%9D%98_%EB%AC%B8%ED%99%94%EC%9E%AC%EC%9E%90%EB%A3%8C">경기도의 문화재자료</a> 제35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5월 19일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B%B3%B4%EB%AC%BC">보물</a>로 지정예고절차를 거쳐, 2017년 8월 14일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B%B3%B4%EB%AC%BC">대한민국의 보물</a> 제1942호로 승격되었다.<br><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9A%A9%EC%A3%BC%EC%82%AC">용주사</a>는 <a href="https://ko.m.wikipedia.org/wiki/%EC%82%AC%EB%8F%84%EC%84%B8%EC%9E%90">사도세자</a>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1790)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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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7:0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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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7: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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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왕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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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br><br>태조가 죽은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br><br>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다.<br><br>동구릉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br><br>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br><br><br><br><br><strong>※(동구릉 → 구리 동구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strong></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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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7: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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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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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입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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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br>수량/면적 | 2구<br>지정(등록)일 | 1963.01.21<br>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 9번지<br>시 대 | 고려시대<br>소유자(소유단체) | 국유&nbsp;<br>관리자(관리단체) | 파주시&nbsp;</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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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7: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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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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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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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었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br><br><br><br>정자각은 제향(祭享, 제사)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정전에 2칸의 배위청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의 건물로, 태조가 세상을 떠난 1408년(태종 8)에 건립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히 1764년(영조 40) 건물이 크게 퇴락하자 중수청을 설치하여 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를 잘 따르고 있으며, 기둥 상부의 익공(翼工)형식은 18세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1764년(영조 40) 중수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br><br><br><br>『국조오례서례』 길례 「단묘도설」 중 산릉에 대해서 ‘침전(寢殿:정자각)은 능실(陵室) 남쪽에 위치하는데,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한다. 모두 3칸으로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신좌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3칸은 신좌를 배설하고 의례를 행하는 정전만 지칭하는 것으로 2칸의 배위청과 결합하면 5칸이 된다.<br><br><br><br>이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건원릉 정자각은 건립 당시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조선 1대 태조고황제의 능인 건원릉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조선의 능침제도 중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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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8:0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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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주 용미리 마애이 불입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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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경기도 파주 장지산 중턱 용암사 옆 중턱에 두 마애부처님이 깃들어 있다.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竝立像)’이다. 약간의 키 차이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정다운 부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높이만 해도 14.2m로 석불로는 드문 경우다.<br><br></div><div>부처님의 몸은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표현했다. 부조형식으로 얕게 돋을새김을 하여 표현했다. 상호는 두 개 내지는 세 개의 돌을 포개어 조각하여 올린 마애입상불이다.<br><br></div><div>바라보는 쪽에서 왼쪽의 부처님이 키가 크고 원형관모를 쓴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 부처님은 사각탑형의 모자를 쓰고 합장하고 있다. 정교하기보다는 투박한 조각으로 서로 대칭적 구조를 벗어나 서민적으로 보인다.<br><br></div><div>원형모양의 관을 쓴 부처님은 남성적이다. 연꽃가지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들고 있다. 이성도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는 “고려시대 최대의 환조로 만들어진 관촉사 석조보살상과 비슷한 도상을 가지고 있는데 손의 자세가 반대이다. 이곳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오른손이 큰옷 사이에 감추어지면서 드러나는 두 손가락은 매우 짧고 투박하면서도 손톱까지 표현하는 세밀함이 있다.”고 했다.<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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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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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택 농악</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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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하였고, 이는 평택농악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농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인 동시에 걸립패농악(중들이 꽹과리치면서 염불하고 동냥하는 일)의 성격을 갖는다.<br><br>농악에 사용되는 악기로는 꽹과리, 징, 북, 버꾸, 호적, 나팔이 있다. 편성은 영기수(令旗手), 농기수(農旗手), 나팔수, 호적수, 상쇠, 부쇠, 종쇠, 징수 1, 징수 2, 설장구, 부장구, 상장구, 북, 상버꾸, 부버꾸, 종버꾸, 꼬리버꾸, 상무동, 종무동, 삼무동, 칠무동, 중애(사미), 양반으로 되어있다. 농악수들은 옛날 군졸들이 입었던 의상을 입고 그 위에 색띠를 걸쳐 매며 머리에는 벙거지나 고깔을 쓴다. 악기에 있어서 징과 북이 타지역에 비하여 적으며 소고와 법고의 구별이 없다.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며 노래굿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또한 길군악칠채는 경기농악에만 보이는 장단으로 평택농악의 길군악칠채는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br><br>평택농악은 두레농악의 소박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공연성이 뛰어난 남사당패 예인들의 전문적인 연희를 받아들여 복합적으로 구성한 수준높은 농악이며, 무동놀이(어른의 목말을 타고 아이가 춤추는 놀이)가 특히 발달하였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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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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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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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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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양 만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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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 정조의 현륭원 참배 행차시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한 다리로 정조에 건립하였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교량이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길을 닦고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또한 영조를 부추겨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와 관계되는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길로 바꾸도록 하였다.<br><br>원래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br><br><br><br>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br><br><br><br>원래는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에 국도 확장 때 이 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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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3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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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회룡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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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道峯山)에 있는 사찰. <br>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681년(신라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863&amp;ref=y">신문왕</a> 1)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933&amp;ref=y">의상</a>(義湘:625∼702)이 창건했을 때의 명칭은 법성사(法性寺)였다. 930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119&amp;ref=y">경순왕</a> 4)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059952&amp;ref=y">경보</a>(慶甫), 1070년(고려 문종 24)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066974&amp;ref=y">국사</a>(國師) 혜거(慧炬), 1384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505&amp;ref=y">우왕</a> 10) 자초(自超) 등이 각각 중창하였다. 특히 자초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이 곳에서 3년간 수도하였고, 이성계가 정계로 나간 뒤에는 자초가 홀로 남아 사찰을 중건하고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곳에 찾아와 절 이름을 현재의 회룡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咸興)에 머물다가 1403년(태종 3) 서울로 돌아와 이곳에서 수도하던 자초를 찾아오자 자초는 ‘회란용가(回鸞龍駕)’라 하면서 기뻐하였는데, 절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div><div>1630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362&amp;ref=y">인조</a> 8)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05786&amp;ref=y">비구니</a> 예순(禮順)이 중건하였으며, 1881년(<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062330&amp;ref=y">고종</a> 18)에는 최성(最性)이 중수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8년 비구니 순악(順岳)이 중수하고 칠성각을 지었으며, 1940년에는 석굴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 이후에도 불사를 거듭하여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약사전·삼성각·선실·요사채가 있다. 사찰 유물로는 신중<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52609&amp;ref=y">탱화</a>와 오층석탑·석조(石槽)·노주(露柱) 등이 있다. 이 중 신중탱화는 1883년 수락산 흥국사에서 만든 것이다. 오층석탑에는 의상의 <a href="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07191&amp;ref=y">사리</a> 1과가 모셔져 있다고 전하나 탑의 형식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석조와 노주도 조선 전기의 유물로</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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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5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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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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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충렬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학문과 덕행, 충성스러운 절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렬사(忠烈祠)’에서 시작되었다. 충렬사는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창건하였다.<br><br><br><br>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선조 38년(1605) 경기도관찰사 이정구(李廷龜), 용인현감 정종선(鄭從善) 등이 정몽주의 묘가 있는 모현읍에 옮겨 중건을 시작하였다. 1608년에 사당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문루 3칸 규모로 완성하고 문루 위에는 강당을 지었다. 이 때 조광조의 위패는 새로 창건된 심곡서원으로 옮겨졌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忠烈書院(충렬서원)’으로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일)되었고, 이후 정몽주의 손자 정보(鄭保)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이시직(李時稷)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 사당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br><br><br><br>사당 중앙에는 정몽주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좌·우 위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봉안하였다.<br><br></div><div>내레이션</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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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09:5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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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입상</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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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br><br>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br><br>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br><br>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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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0:0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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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성남사당풍물놀이</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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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br></div><div>경기도 무형문화재</div><div><strong>안성남사당풍물놀이 (安城男寺黨風物놀이)</strong></div><div><br><strong>남사당 6마당(살판)</strong></div><div>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분 류 | 무형문화재<br>지정(등록)일 | 1997.09.30<br>소 재 지 | 경기도 안성시<br>관리자(관리단체) | &nbsp;<br>&nbsp;| &nbsp;<br>&nbsp;| &nbsp;</div><ul><li><br></li><li><a h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223100210000&amp;pageNo=1_1_1_1#">전승자보기</a></li></ul><div>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br>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br>· 상 세 문 의 : 경기도 안성시 문화관광과 031-678-2504</div><ul><li><a h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223100210000&amp;pageNo=1_1_1_1#tab2">문화재 설명</a></li></ul><div><br>닫기</div><div><strong>안내판 설명<br></strong><br></div><div>안내판 설명 준비 중입니다.</div><div><strong>문화재 설명<br></strong><br></div><div>남사당패는 조선후기 서민층에서 생겨난 민중놀이 집단으로 풍물놀이와 함께 접시돌리기(버나)·재주넘기(살판)·탈놀이(덧뵈기)·줄타기(어름)·꼭두각시 놀음(덜미) 여섯가지 기예능을 곁들여 공연했던 전문연희 집단이다. 꼭두쇠 아래 4~5명의 뜬쇠, 가열, 삐리(초입자), 저승패와 등짐꾼을 포함해 40~50여명으로 구성된다. 안성시 서운면 산중에 자리한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안성남사당패의 기원은 청룡사의 후원을 받은 불당골 사당패로 볼 수있다.<br><br>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는 영기와 서낭기, 호적이 편성되고, 풍물잽이는 사물과 벅구 및 무동으로 구성된다. 풍물가락은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쓴다. 판굿의 구성은 인사굿·돌림벅구·겹돌림벅구·당산멀림·벅구놀림(양상치기)·당산놀림벅구(허튼상치기)·당산돌림벅구·오방진·무동놀림·벅구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채(쩍쩍이굿)·밀치기벅구·상쇠놀이 등 개인놀이, 무동서기(새미받기)·채상놀이 등으로 구성된다.<br><br>20세기 초에 많은 남사당패 모갑이들이 배출되었는데, 안성의 풍물은 ‘웃다리 농악’으로 불리며 경기지역 농악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활약하던 남사당패로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원육덕패, 이원보패 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사당패의 실질적 기원은 ‘바우덕이,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김기복’ 꼭두쇠의 계보로 이어진다.<br><br>1982년 이원보패에서 상쇠수업을 받은 김기복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가 설립되었다.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7년 김기복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지난 2015년 작고했다. 이후 보존회장 겸 전수조교인 성광우를 중심으로 공연활동 및 이 종목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br><br></div><div><strong>문화재 설명</strong></div><div>남사당패는 조선후기 서민층에서 생겨난 민중놀이 집단으로 풍물놀이와 함께 접시돌리기(버나)·재주넘기(살판)·탈놀이(덧뵈기)·줄타기(어름)·꼭두각시 놀음(덜미) 여섯가지 기예능을 곁들여 공연했던 전문연희 집단이다. 꼭두쇠 아래 4~5명의 뜬쇠, 가열, 삐리(초입자), 저승패와 등짐꾼을 포함해 40~50여명으로 구성된다. 안성시 서운면 산중에 자리한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안성남사당패의 기원은 청룡사의 후원을 받은 불당골 사당패로 볼 수있다.<br><br>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는 영기와 서낭기, 호적이 편성되고, 풍물잽이는 사물과 벅구 및 무동으로 구성된다. 풍물가락은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쓴다. 판굿의 구성은 인사굿·돌림벅구·겹돌림벅구·당산멀림·벅구놀림(양상치기)·당산놀림벅구(허튼상치기)·당산돌림벅구·오방진·무동놀림·벅구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채(쩍쩍이굿)·밀치기벅구·상쇠놀이 등 개인놀이, 무동서기(새미받기)·채상놀이 등으로 구성된다.<br><br>20세기 초에 많은 남사당패 모갑이들이 배출되었는데, 안성의 풍물은 ‘웃다리 농악’으로 불리며 경기지역 농악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활약하던 남사당패로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원육덕패, 이원보패 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사당패의 실질적 기원은 ‘바우덕이,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김기복’ 꼭두쇠의 계보로 이어진다.<br><br>1982년 이원보패에서 상쇠수업을 받은 김기복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가 설립되었다.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7년 김기복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지난 2015년 작고했다. 이후 보존회장 겸 전수조교인 성광우를 중심으로 공연활동 및 이 종목의&nbsp;전승에 힘쓰고 있다.</div><div><br></div><div><br></div><div><br></div><div><br></div><div><br></div><div><br></div><div><br></div><div>(우)35208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정부대전청사 1동 8-11층, 2동 14층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br><br></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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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0:4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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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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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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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0:4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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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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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왕릉은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 남쪽에 물이 있고 뒤로는 언덕에 의해 보호되는 배산임수(背山臨水)의 터이며, 멀리 산들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자리를 선택해 마련되었다. 왕릉에는 매장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를 위한 장소와 출입문도 있다. 봉분뿐만 아니라 T자형의 목조 제실, 비각, 왕실 주방, 수호군(守護軍)의 집, 홍살문, 무덤지기인 보인(保人)의 집을 포함한 필수적인 부속 건물이 있다. 왕릉 주변은 다양한 인물과 동물을 조각한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5,000년에 걸친 한반도 왕릉 건축사를 완성한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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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1:0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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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우면 혼날거야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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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4 03:12:1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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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안양 만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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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1:56:4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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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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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1:59: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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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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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iv>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br>정조 18년(1794년)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습니다.</div>]]></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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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2-04-15 02:02:2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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