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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별의부산정거장 by 사람이다이누무자식ㅇ</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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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8반4조</description>
      <language>en-us</language>
      <pubDate>2014-10-10 02:43: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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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user_1412908985</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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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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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4-10-10 02:55:3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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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user_1412909155</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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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p>〈<b>이별의 부산정거장</b>〉은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_%EC%A0%84%EC%9F%81"><u>한국 전쟁</u></a> 직후 전쟁과 피난의 기억을 담아 큰 반향을 얻은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u>대한민국</u></a>의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D%8A%B8%EB%A1%9C%ED%8A%B8"><u>트로트</u></a> 곡이다.</p><p><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8B%9C%EC%B6%98"><u>박시춘</u></a> 작곡, <a href="http://ko.wikipedia.org/w/index.php?title=%ED%98%B8%EB%8F%99%EC%95%84&amp;action=edit&amp;redlink=1"><u>호동아</u></a> 작사의 노래로 한국전 휴전 이듬해인 <a href="http://ko.wikipedia.org/wiki/1954%EB%85%84"><u>1954년</u></a>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82%A8%EC%9D%B8%EC%88%98"><u>남인수</u></a>가 불렀으며,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C%9D%BC%EC%A0%9C_%EA%B0%95%EC%A0%90%EA%B8%B0"><u>일제 강점기</u></a>부터 히트곡을 많이 낸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작품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인기를 끌었다.</p><p>전쟁의 영향 속에 있던 이 시기에는 박시춘 작곡의 〈전우야 잘 자라〉,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B0%95%EB%8B%A8%EB%A7%88"><u>박단마</u></a>가 취입한 〈슈샤인보이〉,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D%98%84%EC%9D%B8"><u>현인</u></a>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a href="http://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8B%A0%EC%84%B8%EC%98%81&amp;action=edit&amp;redlink=1"><u>신세영</u></a>이 부른 〈전선야곡〉 등 전쟁의 상처와 관련된 노래들이 유행했다. 이 노래는 역시 박시춘이 작곡한 〈굳세어라 금순아〉처럼 피난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데, 가사 중에 '피난살이', '판자집', '경상도 사투리' 등이 직접 등장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한다.</p><p>가사 내용은 낯선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B6%80%EC%82%B0"><u>부산</u></a> 땅에서 피난살이를 마치고 피난지에서의 추억을 간직한 채 환도 열차를 타고 부산을 떠나면서 부산정거장, 즉 <a href="http://ko.wikipedia.org/wiki/%EB%B6%80%EC%82%B0%EC%97%AD"><u>부산역</u></a>에서 이별을 맞는 순간을 애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몸부림치며 이별하고 기적마저 슬퍼 우는 가사 내용과는 달리 노래 가락은 빠르고 경쾌하여 희망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sup><a href="http://ko.wikipedia.org/wiki/%EC%9D%B4%EB%B3%84%EC%9D%98_%EB%B6%80%EC%82%B0%EC%A0%95%EA%B1%B0%EC%9E%A5#cite_note-1"><u>[1]</u></a></sup> 대중의 감성과 정확히 공감대를 이룬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남인수는 만년가수로서의 관록을 증명했다.</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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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4-10-14 00:15: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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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user_1412909155</author>
         <link>https://padlet.com/user_1412908985/Bookmarks/wish/37162234</link>
         <description><![CDATA[<p><p>1. 625 한국전쟁의 원인</p><p><strong>19세기에 이르면서 주변 강대국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여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합니다</strong></p><p><strong>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주변국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strong></p><p>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우리는 자주독립에 의한 새 역사가 실현되는 듯 하였습니다</p><p>그러나, 종전과 함께 시작된 미국과 소련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p><p>이 과정에서 소련은 북한지역을, 미국은 남한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p><p><strong>광복과 함께 우리에게는 통일국가를 건설할 기회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strong></p><p><strong>김일성은 '남한 정부가 적법하게 제정한 모든 법률은 무효이며 위법이다'라고 선언하며</strong></p><p><strong>대한민국의 존재를 전면 부정합니다</strong></p><p>38도선을 편의적으로 분할한 강대국의 전후처리 방침과 한반도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려는</p><p>소련의 계획적 공작으로 결국은 38도선을 경계로 허리가 두 동강이 나게 되며,</p><p>남에는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정부가, 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p><p>수립됨으로써 민죽과 국토가 분단됩니다</p><p>그러면서 소련의 적극적인 북한 지원과, 미국의 다소 소극적인 남한 지원이 이뤄졌구요</p><p>이후에 소련과 북한정부(김일성은) 체계적으로 남측 도발을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며</p><p>북한, 소련, 중공의 합의가 이뤄지고</p><p><strong>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을 남침 개시일자로 지정합니다</strong></p><p>남측에서는 1949년 말부터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얘기가 남한사회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으며,</p><p>전쟁발발 가능성에 관한 소문은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p><p>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5,6월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으며</p><p>맥아더 장군 역시 '최근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6월에 남침할 것' 이라는 비밀정보를</p><p>워싱턴으로 전한 바 있습니다</p><p>이렇게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p><p><strong>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감행한 전면기습 공격이 시작되며</strong></p><p><strong>6.25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게 됩니다</strong></p><p>2. 6.25 전쟁 기간</p><p><strong>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발발 ~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strong></p><p>약 3년 1개월간의 긴 전쟁이 있었습니다</p><p>3. 6.25 전쟁은 누가 했는가?</p><p><strong>위에서도 언급했듯이, 6.25 한국 전쟁은 북한의 철저한 준비속에서</strong></p><p><strong>북측의 남침으로 발발하게 되었습니다.</strong></p><p>4. 6.25 전쟁은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가?</p><p>이 질문은 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묻는 질문인지, 아니면 전쟁 과정을 묻는 질문인지 잘 모르겠네요</p><p>원인과 배경은 위 1번에서 어느정도 설명이 되었구요</p><p>전쟁의 과정을 어느정도 요약하자면</p><p>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p><p>38선상의 북한군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합니다</p><p>북한군 기동부대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p><p>38선 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합니다</p><p>주말을 맞아 많은 병력이 외출및 휴가중이었던 우리는 속수무첵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p><p>소련제 전차와 자주포를 내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p><p>당시 우리는 단 한대의 전차도, 자주포도 없었습니다</p><p>결국 6월 26일 의정부가 하루만에 점령되고 우리 국군은 방어지역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분산되어 철수하게 됩니다</p><p>6월 28일 날이 밝으면서부터 서울은 북한구의 지배하에 놓이기 됩니다</p><p>이런식의 전쟁이 지속적으로 계속 이뤄졌고,</p><p>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다양한 작전을 전개하며 전쟁이 지속됩니다</p><p>서부전선의 지연전</p><p>중부 및 동부전선 지연전</p><p>낙동강선 방어</p><p>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p><p>수도인 서울의 수복</p><p>북진작전의 전개</p><p>평양과 원산을 우리가 점령</p><p>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전개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p><p>한반도의 통일이 현실이 되는듯 하였습니다</p><p>그러나, 중국이 본격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방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p><p>이와같은 전쟁이 계속 되는 도중에도</p><p>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때까지 휴전 협상이 이뤄졌었고</p><p>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김정일이 평양에서 서명하고</p><p>중공군의 팽덕회는 다음날인 28일 오전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p><p>3년 1개월 2일, 1129일간 지속된 참혹한 6.25전쟁은 정전상태에 들어갔다</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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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4-10-14 00:25: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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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전쟁휴전회담 허우진,윤현민,정동혁,김현수,장용학,김홍엽</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user_1412908985/Bookmarks/wish/37483382</link>
         <description><![CDATA[<P class=txt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3372518452595">유엔군의 북진에 맞서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유엔 총회는 전투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12월 14일 ‘정전 3인단(<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Three</SPAN>-<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5195176722231">man</SPAN> <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Group</SPAN> <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on</SPAN> <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Cease</SPAN>-<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Fire</SPAN>)’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캐나다의 L.페르슨, 이란의 N.엔테잠, 인도의 B.라우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전 3인단의 임무는 한국에서 만족할 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전 3인단은 중공대표와의 회담·교섭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어 1951년 1월 1일에 중공과 
북한은 대규모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총회의 정전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중공의 의사가 명백해졌다. </P><P class=txt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3372512809229">이에&nbsp;1951년 2월 1일 유엔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의거 중공은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Collective</SPAN> <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Measures</SPAN> <SPAN class=word_dic _hpseen="true">Committee</SPAN>)’의 보고에 따라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가맹국에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특히, 6월 23일의 유엔 주재 소련대표 Y.A.말리크의 성명을 
통하여 침략군이 전투행위를 중지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공산군사령부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고, 7월 초에 
휴전회담 개시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P><P class=txt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3372587518544">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 병원선에서의 회담을 제안하였다. 중공군도 1·2차 춘계공세를 통하여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유엔군을 격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회담개최 의사를 밝혔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개최되어 쌍방의 정부대표 
명단이 교환되고, 본회담 개최 장소를 개성으로 결정하였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하였고, 10월에 회담장소를 <A onclick="clickcr(this, 'bdk.creference', '', '', event);" href="/entry.nhn?docId=1157177&amp;ref=y" _hpseen="true"><U _hpseen="true"><FONT color=#0066cc _hpseen="true">판문점</FONT></U></A>으로 옮겼다. 회담은 장기화하였고 파란곡절을 겪었다. 
여러 문제에 있어, 특히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에 대하여 성실하게 교섭하지 않으려는 공산측의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는 
2회에 걸쳐 총 9개월간이나 회담을 중지하였다. </P><P class=txt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33725922250">1952년 10월의 휴전회담 중지에 이어서 유엔 
총회는 1952년 12월 3일의 결의로써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재확인하고 전쟁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총괄적 계획을 제안하였으나 공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공산측이 광범위한 지연책을 쓰고 나서 1953년 7월 13일과 14일에 전란 중 최대의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A onclick="clickcr(this, 'bdk.creference', '', '', event);" href="/entry.nhn?docId=1157177&amp;ref=y" _hpseen="true"><U _hpseen="true"><FONT color=#0066cc _hpseen="true">판문점</FONT></U></A>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BR _hpseen="true"><BR _hpseen="true">휴전협정은 정전, 쌍방간의 <A onclick="clickcr(this, 'bdk.creference', '', '', event);" href="/entry.nhn?docId=1105984&amp;ref=y" _hpseen="true"><U _hpseen="true"><FONT color=#0066cc _hpseen="true">비무장지대</FONT></U></A>, 38선의 약간 이북을 대부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및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대와 장비의 한국도입금지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P><P class=txt _hpseen="true" __dttjindo__id="e141344593372554452044">휴전협정 이행을 감시하고 지적된 위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유엔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설치되고 동 본부를 <A onclick="clickcr(this, 'bdk.creference', '', '', event);" href="/entry.nhn?docId=1157177&amp;ref=y" _hpseen="true"><U _hpseen="true"><FONT color=#0066cc _hpseen="true">판문점</FONT></U></A>에 두었다. 동 협정은 또한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로 구성되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설치를 규정하였다. 동 중립국감시위원단은 한국에 병력 및 장비를 증강하는 데 관련된 휴전협정 조항의 
준수·관찰·감시·조사를 할 수 있다.<BR _hpseen="true"><BR _hpseen="true">휴전협정에는 정치문제 해결에 관한 조항이 없으나, 제60항은 휴전협정 조인 및 효력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한국으로부터의 전외국군 철수문제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교섭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양측의 관계정부가 각각 임명하는 
고위층 대표간의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을 양측의 우방관계국 정부에게 권고하도록 하였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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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4-10-16 07:52:4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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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부산피난민들의 생활 허우진, 윤현민, 정동혁, 김현수, 김홍엽, 장용학</title>
         <author>l5886828</author>
         <link>https://padlet.com/user_1412908985/Bookmarks/wish/37615343</link>
         <description><![CDATA[<p><p>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바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던 시간입니다 갑작스런 전쟁에 서울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부랴부랴 짐을 싸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는데요.</p><p>이들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부산이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전쟁을 피해 온 수많은 사람들로 부산은 초만원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피난민들은 어떤 곳에서 생활을 하였을까?</p><p>부산에는 40계단 이라는곳이 있습니다 바로 6.25전쟁 피난민들이 처절한 삶을 살아가던 현장입니다 부산항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에 피난미들이 많이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일자리와 구호물자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다양한 미군의 구호물자가 도착했던 곳이기 때문에 40계단 주변은 구호물자를 얻고 동시에 일자리를 함께 얻을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40계단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되었던 이유입니다</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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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4-10-17 02:42: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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