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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족으로부터의 여성적 글쓰기 by 나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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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해밀 글쓰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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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02:19:3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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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아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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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02:20:4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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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연신</title>
         <author>528lov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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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딸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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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과제 및 공지사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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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02:22:5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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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형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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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02:37:2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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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둥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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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미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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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02:42:1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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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선희</title>
         <author>jejussalang72</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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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주차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p><p>나는 김포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집은 뒤에는 산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밭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아버지는 농사와 전기공사 수금원 일을 같이 하시다가 부동산업으로 전환하셨다. 우리집은 마을회관 옆에 있었고 우리집 옆으로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집 앞의 논 중에는 겨울이면 커다란 호수로 변하는 곳이 있었다. 저수지였으나 깊은 물이어서 밑이 들여다보이지 않았고 추운 날씨가 되면 꽁꽁 얼어붙어 커다란 얼음판이 되었다. 굉장히 넓어서 트랙을 만들어 스케이트를 탔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학교 공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공부는 오직 학교에서만 하면 되고 숙제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들로, 산으로 다니며 맘껏 놀기만 하면 되는 시기였다.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산에 올라가 신기한 것도 찾아보고 들로 다니며 북한으로부터 날아온 삐라를 줍기도 했다. 냇가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풀숲에서 벌레 잡기, 싱아 따먹기, 오디나무 오르기 등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아이들과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라야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엄마도 집안일이며 밭일로 늘 바빴기에 저녁 식사 시간이 빠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늘상 바쁜 날들을 보내셨고 나도 동네 아이들과 늘상 밖에서 지내다 집에 돌아와 허기에 겨워 저녁을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난다.</p><p>그런데 어느 날 옆집 아저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집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남자애가 있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저씨의 죽음은 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나이였다. 분위기가 심각하고 무겁긴 했으나 아무도 내게 옆집 사정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무슨 일인지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단지 늦은 시간 옆집 아이가 우리집에 왔으니 나는 그 아이와 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자고 있는 그 애를 깨우려고 했더니 엄마가 화를 내시면서 그 애를 건들지 못하게 했다. 당연히 내 편이어야 하는 엄마가 그 애를 위해 마음 쓰는 걸 보고 나는 나보다 옆집 애가 더 소중한가? 라는 생각으로 집안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 안의 감정과 생각들을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했겠으나 뭔지 모를 억울함, 슬픔 등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엄마는 내 감정까지 생각하기에 처리할 일들이 너무 많았고 어린 딸이 그 일로 상처받았으리라고 생각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감정을 혼자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소리 죽여 울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말이다.</p><p>죽음은 비단 옆집만의 일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오빠가 넷, 언니가 한 명이었는데 나를 제외하고 모두 2살 차이였는데 유독 나만 늦둥이로 늦게 태어났다. 엄마 말로는 8살 위인 막내오빠까지 낳고 한동안 아이를 안 낳고 있었는데 엄마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아이를 낳아 몸조리를 잘하면 몸이 회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낳게 되었다고 했다. 나를 낳고 엄마의 건강이 회복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6~7경이 되었을 때 엄마의 건강을 위협하는 큰일이 우리집에 닥쳐왔다. 그 일은 바로 막내오빠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 일이다. 감기처럼 열이 많이 났다고 했는데 정확한 변명도 모르고 허망하게 죽은 것이다. 그 후 엄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주 앓아누워 계셨다. 나에게 오빠의 죽음은 크게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자주 아파 누워 있었기에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컸다.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면 가끔 했던 말이 내가 엄마도 빨리 죽을까 봐 걱정돼서 자기가 늙을 때까지 꼭 살아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를 알기 전에 나는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과 사랑하는 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엄마의 삶을 통해 감지했던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은 나에게 외로움과 슬픔을 깊이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p><p>그 후 엄마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p><p><br></p><p>3주차 공간으로서의 가족</p><p>&nbsp;</p><p>내가 태어난 집은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이었다. 중앙에 마당이 있어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고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대문, 창고, 부엌, 안방, 마루, 작은방 등이 둘려진 집이었다. 마당에는 물을 기는 펌프가 있었는데 위치 때문이었을까 펌프를 중심으로 바쁘게 오갔던 집 풍경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이야 수돗물을 틀면 쉽게 물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내가 어릴적인 70년대에는 펌프 물을 길어 올려야 물 사용이 가능했다. 비록 힘들게 길어 올려야 했지만 물을 얻는 기쁨은 참 컸다. 길어 올려진 지하수는 깨끗하고, 건강한 물이라 마시고, 음식을 만들고, 몸을 씻기에 충분했다. 두 개의 커다란 고무 함지박에 담긴 물을 며칠 쓰곤 했는데 에어컨이 없던 시절,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는 고마운 물이었고, 겨울에는 얼기 전에 빨리 써버려야 하는 물이 되곤 했다. 언젠가 나는 왜 집하면 이 펌프가 생각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 생각났다. 펌프 주변에는 엄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것을... 엄마는 늘 물이 가득 담긴 함지박 근처에서 야채도 다듬고 몸도 씻고 빨래도 했다. 엄마가 함지박 물을 사용하면서 집에 있을 때는 뭔지 모를 안도감이 있었다. 그리고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엄마의 분주함을 보면서 거들 생각이 든 건 아니지만 엄마가 내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으로도 마음의 공허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린 나이에 무슨 공허감이 있을까마는 엄마의 존재는 육체의 허기를 채우는 존재이면서도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의 동선은 안마당의 수돗가에서 부엌으로 뒷마당으로 창고로 안방으로 이어지곤 했다. 엄마의 그런 흔적이 이제는 너무 그립다. 이젠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엄마의 기억이 더 사무치는지 모르겠다.</p><p>내가 기억하는 우리집의 또 다른 공간은 뒷마당이다. 그곳은 엄마 이외는 다른 가족들이나 가족 외 사람들이 드나들 기회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뒷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창고가 있었다. 장독대는 햇빛이 잘 들었고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이 담긴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엄마는 겨울에 하얗게 눈 내린 장독대 눈을 쓸면서 그곳에서 고추장, 된장 등을 퍼와서 요리를 하셨다. 우리집은 욕실이 없었기에 나는 간혹 목욕을 하고 싶으면 뒷마당에 큰 함지박을 놓고 그곳에서 목욕을 했다.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목욕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로 뒷마당을 두른 나무 울타리 사이로 누군가 들여다 볼까 겁도 났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뒷마당에서 여유를 부리며 혼자 목욕도 하고 땅바닥에 그림도 그리며 혼자 잘 놀았다. 형제가 많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나 오빠, 언니들과는 같이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잘 놀았다. 혼자여도 엄마만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럼 엄마가 없어서일까 외로움을 많이 탄다. 그래도 딸이 생겨 든든하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언니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친구처럼.. 그때 난 그런 엄마한테 서운했다. 나는 딸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난 큰딸과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2살 더 어린 둘째 딸과는 나누지 않는 대화이다. 어쩜 난 엄마를 속까지 닮았나 보다.</p><p><br></p><p>4주차-돌봄의 언어</p><p>&nbsp;</p><p>나에겐 10살 많은 언니가 있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집은 늘 집안일이 많았다. 게다가 엄마는 밭일에, 친척 일에, 돈 버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겨울에는 농사일이 줄어 한가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마실을 다니며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하셨다. 언니는 그런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했는데 빨래, 밥하기, 청소하기, 등 못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집은 아들이 넷, 딸이 둘이었는데 나는 워낙 늦게 낳아 어렸기에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오직 언니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빠들도 엄마 일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남자 일과 여자 일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기에 그런 풍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p><p>언니는 10살 어린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니는 엄마를 대신해서 10대에 이미 집안일을 맡아하고 동생까지 돌보며 지냈던 모양이다. 언니 손은 크지는 않았지만 통통했다. 타고난 것이 그래서가 아니라 어릴 때 추운 겨울에 차가운 물로 빨래며 설거지 등을 많이 해서 손에 동상이 걸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가여운 언니. 난 그런 언니가 참 좋았다. 어떤 때는 엄마보다 언니가 더 좋다고 느끼기도 했다. 언니는 어린 동생이 귀찮기도 했을 텐데 평생 나한테 화낸 적이 없다. 늘 돌봐줘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p><p>언니의 돌봄은 비단 집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언니는 전교 부회장을 하면서 학교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런 언니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나가 취직을 했는데 그곳에서 형부를 만나 결혼도 했다. 난 언니 자취방에 놀러 갔다가 형부를 처음 봤는데 언니를 빼앗긴 듯해서 형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언니는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가서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다. 언니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그 장면이 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내 감정을 이야기하자니 딱히 표현하기도 어렵다. 집 앞에 높게 자란 옥수수대가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서의 안도감이었는지 아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와서 느낀 뿌듯함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아련하기만 한 기억이다. 단지 뭔가 기분 좋은 기억이었다는 생각이다. 난 그렇게 언니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다. 언니는 결혼해서도 어린 동생을 잘 챙겼다.</p><p>그런 언니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다. 형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결혼 후에도 친정과 시댁을 살뜰히 돌보던 언니는 갑자기 불어닥친 비운의 소식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형부의 죽음 뒤 남겨진 두 아이를 홀로 돌보며 언니는 참 힘들게 살아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대학을 갓 졸업했다. 나는 언니 집으로 들어가 형부의 부재를 조금이라도 보충해야만 했다. 뒤돌아보면 그때 언니, 나, 조카들 모두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나는 취업을 위해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며 언니 집에서 지냈고 조카들을 돌보기도 했으나 돌봄에 서툰 이모는 조카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내며 매를 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들었던 매라 조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후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언니 집에서 나와 남편과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의 무게로 언니의 고달픔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당시 언니는 내게 자신의 어려움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잘 버텨준 언니가 대단하고 고맙다. 조카들에게도 고맙다. 철없는 이모라 미안했다고 언젠가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은 장성한 어른이 되어 사업 수완을 발휘해 가게 사장이 된 조카들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랄 때 드리워진 아픔 때문에 마음에 병이라도 있을까 걱정도 해 보지만 어찌하리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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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0 13:59:27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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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름으로 불린다는 것(글쓰기2주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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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가족안에서 하나의 이름만을 가지고  그 이름에 명명하기에는  우리세대 50대  여성들의 삶이 단순하지만  않다고 생각한다.</p><p>나를 포함한 우리는 지역사회내에서는 건실한 직장인으로서  가족안에서는 딸로서,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기대에 부응  '하는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p><p>부모님 세대의 배고픔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직접 바라봤고,  하고싶은 것도  나중을 위해  참아내는 인내를 물려받았다.</p><p>그래서 우리나라에 살아오면서  3만4천달러라는  경제적성장을 이루는데 먼지만큼이라도 역할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그만큼 바쁘게 살아왔던 거 같다.  그  생애주기에  나는 가난하고  못배웠지만  자식만큼은  잘 가르켜보겠다고  희생을 하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3살때부터 직장생활을 하였고  직장생활 5년차인  28살에 결혼을 안하면 모자라는 사람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해서 결혼하면 잘산다라는</p><p>주변과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여 한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을 했다.</p><p>결혼과 동시에  가진 아들을 위한 엄마라는 이름은 나를 세상과 맞서  강하게 살아갈수 있는 기대와 책임감이라는 삶을 주었다.</p><p>출산휴가 두달만 있던 90년대 중후반에  나는  엄마의 역할을  해 줄수 있는 시어머니와 합가를 하면서 직장에만 최선을 다하며 살수 있었다.</p><p>그 부분은 시어머니의 희생에 감사하다.</p><p>물론 남존여비사상에 절어있어 아들과 손자만을</p><p>최고로 하는  의식에 부당함을 느껴 반발하기에는  내게 너무나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 그 당시는</p><p>그래서 나의 30대는 직장일과  어린 남매 키우는데 10년을 보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p><p>시어머는 가사일과 육아, 나는 직장일과  육아 각자 역할을 원만하게 이루고 현재  아이들은</p><p>건강하고  밝게 사회구성원으로 각자 잘 살아가고있다.</p><p>그러나, 아직도 나는 며느리로서  딸로서</p><p>기대에 부응해야하는 책임감이 남아있다.</p><p>나도 나의 삶의 역할을 하며  가족을 위해</p><p>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는데</p><p>94세 노령에도 치매끼없이 장수하며 예전 사고방식으로 함께사는 사람들의 배려없이  자기밖에 모르는 시어머니나 장남밖에  모르면서 집안대소사를 나에게 본인의 노후 삶을  내 옆에서 지내고 싶어하는 친정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럽다.</p><p>며느리, 딸, 아내의 무게가 부담스럽지만</p><p>현명하고 지혜롭게 잘 역할을 하고싶다.</p><p><br></p><p><br></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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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03:20: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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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2025.10.26.</p><p>딸로서 나는</p><p>&nbsp;</p><p>우리집은 아들 한명, 딸이 네 명이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우리집에는 일을 할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식들은 늘 밭일, 집안일을 해야 했다. 집안일은 특히 딸들이 몫이었다. 여섯 살 터울이 나는 오빠와 큰언니는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던 해에 둘 다 육지로 갔다. 우리집은 남아선호사상이 깊어 아들은 육지 대학 보내고, 딸은 돈 벌러 보냈다.</p><p>그러다보니 중학교때 부터는 집에 남은 셋째인 언니와 넷째인 내가 거의 대부분 집안과 주말이면 밭에 가는 일이 많았다. (아래 일곱 살 밑의 여동생이 있지만 나와 언니만큼 일을 시키지는 않은 것 같다.)</p><p>초등학교 6학년때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바로 옆집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는 것도 우리 일이 되어버렸다.</p><p>친구들과 놀다가도 밥때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 밥을 챙기려 와야 했다. 그때는 엄마가 해야할 일을 왜 딸인 우리가 해야 하냐며 원망을 하기도 했다.</p><p>엄마는 늘 바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정말 쉬지 않고 일을 하신 것 같다. 아빠는 마을 이장, 농협이사 등등 바깥으로 도는 일이 많아, 집안일과 농사일은 신경을 쓰지 않다보니 밭일부터 집안일, 시부모님 모시는 일까지 다 엄마 몫이 되어버렸다.</p><p>엄마는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매일 화가 나있었고, 우리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우리는 청소도, 빨래도, 심지어 밥도 하는데도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조금 놀다 늦게 들어오면 빗자루를 들고 쫒아왔다. 나는 맞기 않기 위해 도망다니기도 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다 해야 하는지, 나는 한다고 하는데 못했다고 야단 맞고 심지어 매까지 맞아야 하는지...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엄마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p><p>&nbsp;</p><p>하루는 밤이 늦었는데도 엄마도 아빠도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걱정이 돼서 마당에 나와보니 창고 구석이 엄마가 앉아 울고 있었다. 왜 우는지 몰라 조용히 엄마 옆에 앉았는데 엄마가 혼잣말로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셋째아들이라고 결혼했는데 시부모님 모셔야 하고, 남편이라는 사람은 매일 밖으로만 돌고..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말을 하며 우시는 엄마 모습을 보니 엄마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늘 화만내는 우리엄마가 너무 가엽게 느껴지는 날이었다.</p><p>&nbsp;</p><p>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보내면서 마음먹은 것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빠같은 남자도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p><p>&nbs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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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05:38:5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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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did0411a</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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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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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0-26 08:06: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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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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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br>사랑하는 딸에게 <br><br>마당있는 집에서 7년을 지내고 아파트로 이사 오던날.. 자기 방이 생긴다며 좋아하던 너를 잊을 수가 없구나. 작은 평수의 아파트다 보니 네 방 구석에 이불이며 옷상자를 가득 놓을 수 밖에 없었는데, 짐들이 가득 쌓여진 것을 보면서도&nbsp; 자기의 공간이, 책상이 생기는 것 만으로도 좋아하던 너~~..<br>커가면서 엄마 옆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네가,&nbsp;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네 방에 들어가 방문을 꼭 닫는 모습을 볼때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든단다.<br>자기 취향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싶을텐데,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날도 있을텐데 늘 어수선한 방에 있게 하는 것 같아서...<br>엄마가 여고생때는&nbsp; 내 방에서 음악도 듣고, 혼자 좋아하는 책도 읽고 그랬는데, 네 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환경인것 같아서...<br>좁은집에 할머니까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더 짐이 많아지고 네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데도 싫다는 내색 한번 안하는 네게 미안하고 고맙구나..<br>그래도 네 나름대로 좁은 공간에서 네 물건, 네 책들을 정리하고 책상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잘 컸구나, 불편하다고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네 나름의 방법을 찾아서 지내는 것 같아 우리 딸이 대견하게 느껴져~~ <br><br>사랑하는 딸아~~<br>부모로서 내 딸에게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지금의 상황에서는 잘 정리하고 짐을 줄이는 방법 밖에는 없구나.<br>그래도&nbsp; 온전한 네 방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이 곧 올꺼라는 희망을 가져보자~~<br>그 희망이 내년에는 이루어질 수 있게 엄마, 아빠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내년에 이사가게 되면 제일 먼저 네 방을 만들어줄께~~<br>온전한 네 방이 생기면 지금까지 못했던 모든 걸 마음껏 하려무나~~<br>사랑하는 딸아~~<br>엄마는 네가 엄마딸이라서 자랑스럽고, 고마워~~<br>늘 응원하고 있으니까 네가 당당하게, 밝게 지냈으면 좋겠구나~<br>우리딸~~사랑해~~❤️ <br><br>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br><br>2025년 11월 1일<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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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1 23:40:1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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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집이라는 몸(글쓰기 3주차)</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61590450</link>
         <description><![CDATA[<p>안녕. 나의  테라스야?  너는 운명적으로 나를 제주로 오게 만든 공간이야. 직장생활 30년차 구도심이지만 아파트촌과 편의시설 24시간 사람들로 바글대던 내 젊은시절의 삶에서 너는 나를 이곳으로 오게한 결정적인 곳이지. 사람들에게서 지쳐서 한적함과 편안함을 찾고자 실행력 짱인 나를 너는 이끌었어.</p><p>그래서 11개월, 평생 도심에서  살던 내게 시골의 삶은 똑같이 직장다니고 주말엔 하고싶은 일들하러 다녀도 시간은 더디가는거 같아.</p><p>정작 나를 이끌었던 남쪽 한라산과 북쪽 바다뷰를  볼 수 있는 테라스에서의 시간보내는것은 생각만큼 자주는 아니었던거  같아.</p><p>여행자로서 떠남의 한정된 시간에서 실컷 현재의  경치를 느끼려는 아쉬움과</p><p>언제든지 올라가서 볼수 있는 풍경을 소유한자의 여유는   사람의 마음처럼 자꾸 변하는것이니까.</p><p>작년 7월 어쩔수 없이 사전입주검사를 하기위해</p><p>(그때도 여전히 갈팡질팡 선택을 못한시기라)</p><p>내려온  내게 지금집은   아파트 19층에서 살던 내게  신선한 충격였고 아름다운 제주풍경에 빠져</p><p>나를 이곳으로 이끌게  했다. 그 공간이 테라스  너 였고.</p><p>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익숙해져 버린 너라는 공간이 불과 1년도 안되었는데 40년의 세월을 잊게 해준다.</p><p>물론 나를 제외한 두식구인 남편과 시모는 여전히 적응중이지만.</p><p>집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고 바깥을 나갈수 있어서 나는 지금도 좋지만 그리고 옥상 테라스 하나로</p><p>수십년간 살았던 아파트를 탈출하고 이곳으로</p><p>오게 된 운명이 이 결정 이후로</p><p>매사 도전은 하되 결정은 운명에 맡기게 된</p><p>새로운 습관이 생겼다.</p><p>아무리 애를  써도 정해지는 일은 정해지니까.</p><p>앞으로의 삶도 맘에서 하고싶은데로 시도는 계속하고 안되는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리라.</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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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2 00:56:5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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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주차 집이라는 몸</title>
         <author>jejussalang72</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61694852</link>
         <description><![CDATA[<p>3주차 집이라는 몸</p><p>&nbsp;</p><p>나는 결혼 전에 12년 동안 과수원 안에 있는 집에 혼자 살았다. 그때의 집은 쉴 수 있는 곳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더 고요했고 올곳이 혼자 있을 수 있었다.</p><p><br></p><p>청년일 때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집에서 살았을 때 나는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살았고, 어머니와는 냉랭한 관계였다. 그래서 마음을 둘 곳이 없었고 외로웠다. 그 당시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믿었던 스승에게 느꼈던 배신감으로 사람에게 지쳤고, 힘든 과정을 겪은 몇 년 간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택했던 방법은 사는 집을 멀리두는 것이였다. 그 집에서는 나만 있었다. 무섭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집은 나의 방패막이였다.</p><p>&nbsp;</p><p>과수원 집에 정착하면서 집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 내가 사는 동안 짐은 많지 않아야 하고 떠날때는 가볍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밖에서는 허술해도 집 안은 자연에 가까운 나무가 주재료였다. 아마 요새 로컬 찻집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았다. 집의 색깔은 자연에 가깝게 편안한 색이여야 했다. 붉은 계통의 강렬한 색은 집에 두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면 항상 편안했다. 어두운 밤에 혼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보다 에너지가 없었던 청년 시절에 나는 나를 보호하고 조용히 12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좋았다.</p><p>&nbsp;</p><p>내가 내는 소리 외에는 자연에서 나는 소리만 있었던 시간이였다. 낮과 밤에는 학생들과 신나게 가르쳤고 늦은 밤과 아침에는 오롯이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였다. 많은 인연을 만들어서 살아가는 삶을 택하지 않았고, 내가 추구했던 한 두 가지에 집중했던 시간이였다.</p><p>&nbsp;</p><p>많은 것에 힘이 들었고, 많은 것이 버거웠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앞이 막막할 때 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p><p>사람에게 보호받고 싶었고, 사람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줬으면 했던 내면의 결핍이 많았던 시절에 과수원 집이 나에게는 울타리였다. 그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마음이 단단해졌다. 나로서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던 시간이였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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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2 06:17: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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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67241479</link>
         <description><![CDATA[<p><strong>나의 “처음”의 가족</strong></p><p><br/></p><p>기억나는 가족의 장면을 써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고서 줄곧 어떤 기억이 나는지 찾아 헤매였다. 찾아 헤매이게 된 것은 나에게는 엄마의 기억이 별로 없다. 같이 살아본 적이 짧았기 때문이다. 몇 장면이 단편적으로 기억이 나지만 이어져서 나는 기억이....없다.</p><p>&nbsp;</p><p>몇 살이였는지는 모른다.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이였지 싶다. 우리 엄마는 뜨개질을 했었던 것 같다. tv 위에 분유통 같은 쇠 통에 코바늘이 많았다. 키 작은 내가 뭔가를 꺼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그 통이 떨어지면서 내 발바닥에 코바늘이 박혔다. 코바늘이 길고 무게가 있었다. 너무 많이 아팠다. 앉아서 울기만 했다.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조금만 움직여도 코바늘의 코가 걸려있어서 발이 아리고 너무 아팠다. 큰소리로도 울어보고... 기다려도 보고.... 한 참을 울었던 것 같다.</p><p>&nbsp;</p><p>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모습을 보고 놀라고 무슨 일이냐고 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엄마가 나를 엎더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발바닥에 꽃힌 코바늘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 더 큰 아픔을 느꼈다. 그 코바늘이 발을 뚫고 나올 것 같이 너무 너무 아프고 무서웠다. 엄마는 아랫집 언니 집으로 갔다. 우리 이모는 코바늘을 바로 빼냈었다. 된장을 끓였던 것 같다. 뜨거운 된장을 천에 놓고 내 발바닥에 싸주었다. 된장의 뜨거움과 진한 냄새가 생각이 난다. 처치가 끝난 후 엄마는 나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 엄마가 이모처럼 이 코바늘을 바로 빼냈다면 나의 아픔도 빨리 끝났을 텐데....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뛰었을 때 느꼈던 내 발의 통증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p><p>&nbsp;</p><p>또 다른 기억은 엄마에게 업혔을 때 엄마의 숨소리 발소리 당황하는 느낌 걱정하는 느낌을 등에서 느꼈던 것 같다.</p><p>돌아와서 나는 편안하게 잠을 잤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p><p>&nbsp;</p><p>가족에 대한 기억을 써보라고 했을 때 그 없는 기억에서도 엄마와의 장면을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놀라는 엄마, 아파하는 엄마, 그 느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p><p>아빠와의 기억은 더 많았을 텐데도.....말이다.</p><p><br/></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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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5 04:56:1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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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67243000</link>
         <description><![CDATA[<p><strong>이름으로 불린다는 것</strong></p><p>&nbsp;</p><p>어린 연신이는 병약했다. 엄마가 조산을 해서 어릴 때 나는 자주 아팠다고 했다. 어렴풋한 기억에서 항상 생강 물, 밀감 껍질 달인 물로 집 안에서 약초 냄새가 많이 났었던 것 같다.</p><p>우리 할머니가 나를 보면 항상 당신의 팔로 요마한 것이 눈도 쪼금 입도 쪼금 이 아이가 살아서 지금 이렇게 컸네!! 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p><p>&nbsp;</p><p>어릴 때 나는 큰 딸이였지만 약해서 내가 무엇을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또한 동생과 같이 살았던 기억이 없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제주로 동생이 와서 동생과 같이 살게 되었다. 나에게는 2살 아래 동생이 있었지만 가까웠던 기억은 별로 없었다. 부산에서 할머니랑 같이 살았던 때도 취향이 너무 달랐던 것 같다. 나는 구슬치기 달리기 등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았고, 동생은 한 명 두 명이 소꿉놀이, 인형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p><p>&nbsp;</p><p>돌아보면 나는 동생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만 생각했다. 동생이 좋은 물건 갖고 있으면 갔다 쓰고, 동생 것인데 몰래 친구에게 선물 주고, 성인이 되면서는 그 친구의 삶의 방식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가까이 두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안에서 무시했었다.</p><p>&nbsp;</p><p>20대 초반부터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 괴로운 감정들!! 부모에 대한 원망, 새어머니에 대한 미움, 나의 한계 등과 부딪치면서 많은 감정들과 싸우며 살았다. 이 괴로움을 없애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내면의 자유를 얻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어떤 방법이 있는가? 하는 고민과 함께 방법을 찾아 헤매이던 시절을 지나가고 마음의 힘이 생길쯤 머리를 때리는 깨달음이 있었다.</p><p>나도 이렇게 힘이 들어 찾아 해메이고 있는데 나보다 어린 동생은 더 힘들었겠지!!! 힘이 드니까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구나!!!</p><p>&nbsp;</p><p>이런 마음이 생기면서 나는 동생을 살피기 시작했다. 많은 관심을 두고 동생을 많이 보살피려고 했다. 언니 역할이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다. 20년이 넘어간다. 내가 도와줬다고 얼마나 생색을 냈겠는가!!!</p><p>이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포기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더 강렬했던 이유는 내 동생이 두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다.</p><p>부모 밑에서 자라보지 못한 나와 동생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엄마의 부재는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p><p>힘들 때도 많았다. 억울하기도 했다. 이 아이는 왜! 아직까지! 이렇게 해메이고 살아가는 걸까? 나는 안쓰럽고 또 안쓰러웠다.</p><p>&nbsp;</p><p>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준 도움의 크기와 받은 사람이 도움의 크기가 같지 않고. 주는 자의 무게감과 받는 자의 무게감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안 하면 내가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되어 줬다 할 것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었다.</p><p>&nbsp;</p><p>엄마인 동생이 이 두 아이를 키워 이 두 아이가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p><p>나는 이제.... 언니로서 이 무게감을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다. 아직 엉킨 것, 풀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이제는 이 역할을 줄이려고 한다. 줄이고 있다.</p><p>&nbsp;</p><p>이 글을 마무리하면서</p><p>딸, 언니, 아내, 이모, 동료, 친구, 선생님, 상담사 등 많은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역할들 속에서 나는 잘 쓰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로서 잘 쓰이고 그 시절 인연에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겁지 않게</p><p>그럼에도 그 중에 가족에서의 역할이 나를 가장 무겁게 했던 것 같다. 딸, 손녀, 언니...등으로 불려질 때가 무거웠다.</p><p>그 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는 훨씬 가벼움을 느낀다.</p><p>&nbsp;</p><p>지금도 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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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5 04:57:14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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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돌봄의 언어(글쓰기 4주차)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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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돌봄의 언어(글쓰기 4주차)</p><p>&nbsp;</p><p>주제 : 손, 음식, 기다림</p><p>&nbsp;</p><p>이 주제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엄마’였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라는 단어에 ‘손’과 ‘음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p><p>&nbsp;</p><p>엄마는 소위 말하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어촌어부의 집에서 9형제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때꺼리도 해결 안되는 지독한 가난이 우리나라의 현실였던 1950년대, 그 와중에 왜그리 금실이 좋은 부부인지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2-3년 터울로 남동생들을 낳았고 출산 후 보름만 지나면 자식들 먹이기위해 외할아버지따라 외할머니는 고깃배를 탔고 엄마의 젖이 고픈 동생들은 자질어지게 울어대면 엄마는 밥물을 끓여서 어린 아기인 동생들을 먹여서 살렸고, 열이 펄펄 끌어 사경을 헤매는 동생을 포대기로 업고 흔들면서 기저귀를 천정에 매달고 그 끈에 엄마 손을 묶어서 누워 자지 않기 위해 밤을 새며 동생을 살렸다고 했다.</p><p>그런 혹독한 엄마수업을 어린 나이에 배운 엄마는 아이들 많은 것을 싫어했었다.</p><p>그럼에도 삼형제를 낳은 것은 어릴적 엄마를 여의고 가족의 그리움이 많았던 아버지의 바램을 수용한 것이었다,</p><p>엄마는 초 겨울을 싫어했다. 먹을게 없이 오직 김치만을 의존하는 겨울을 나기위해 10월부터 시작된 김장과의 전쟁이 싫어서였다. 2-3백포기를 한달내내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울이</p><p>시작되었다고 한다.</p><p>그래서 엄마는 김치를 참 맛있게 담근다. 동네사람들이 다들 맛있다고 해서 김치를</p><p>퍼가는 시골생활을 도시에 이사와서도 이어졌는데 생존을 위해 했던 일이 생계를 위해</p><p>일로 연결이 되어 엄마는 반찬가게를 하셨고 당연 김치는 인기 품목이었다.</p><p>김치 몇십포기는 일도 아니게 엄마는 뚝딱 만드셨고 김장때도 일하는 나를 바쁘다고</p><p>부르지 않고 혼자 담그셨었다. 지금은 엄마의 김장이 그립다. 이제는 연세가 드셔서 김치를 담그셔도 예전의 그 맛이 안 나고 체력이 안되서 김장을 안하신다.</p><p>나는 김치수제비를 좋아한다. 어릴적 시골에서 보낸 나는 연탄불위에서 보글보글</p><p>끓는 물에 뜨개질을 하다 밀가루 반죽해서 손으로 똑똑 투박하게 띠어 놓고 폭삭익은</p><p>김치를 넣어 김치 수제비를 끓여준 엄마의 손맛 김치수제비가 어릴적 자주 먹던 음식였는데</p><p>그래서 좋아한다. 뜨겁게 호호불며 먹던 수제비속에 실털이 간간이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p><p>손으로 일하시면서도 음식을 맛있게 잘 하셨다.</p><p>그렇게 엄마는 손으로 참 많은 일들을 하셨다.</p><p>시골에서는 튀김가게, 뜨게방, 구멍가게, 도시에 올라오셔서는 반찬가게, 한복가게</p><p>그러나 나는 엄마의 손재주는 물려받지 않은거 같다. 단지 엄마의 새로운 일에 대한</p><p>호기심과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며 묵묵히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는 것만</p><p>물려받은거 같다.</p><p>이제 나도 엄마로부터 받은 희생과 사랑을 아이들에게 건네주면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p><p>잘 하며 살아가고 싶다.</p><p>&nbs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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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8 02:34:38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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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돌봄의 언어</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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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나에게 돌봄이 훅 다가온 것은 조카들이 태어나고부터이다. 나에게 돌봄이란 영혼의 돌봄이고 무엇을 하든지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마음을 보살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카들이 조금씩 커 나갈 때 항상 그 옆에 있었고, 많은 관심을 두었다. 다양한 경험을 함께 했었다. 그것에는 열심히였다.</p><p>&nbsp;</p><p>그래서 나의 돌봄의 시작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두고,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을 한다. 그 관심 표현의 출발은 나누는 것이다. 말을 나누는 것, 시간을 나누는 것, 먹을 것을 나누는 것, 내가 만든 것을 나누는 것 등 나누는 것이다.</p><p>&nbsp;</p><p><br/></p><p>나는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손 바느질을 좋아한다. 한 땀 한 땀 조각보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을 완성해서 선물을 줄 때 나는 뿌듯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을 준다는 것에 큰 기쁨이 있다. 받는 사람이 더 좋아하면 더 기쁘지만 주는 기쁨이 상당해서 받은 사람의 반응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p><p>&nbsp;</p><p>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언제까지 만들 수 있을지 모르니 줄 때 받으라고....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가볍게 받으라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p><p>&nbsp;</p><p>50이 넘어가면서 나에게 돌봄은 큰 화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는 실천을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궁금하면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 문자보다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작은 관심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p><p>좋은 관계가 되려면 관심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서 서서히 빚어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p><p>&nbsp;</p><p>내가 돌봄을 생각해봤을 때 연상이 되는 단어는 관심, 시간, 정성, 나눔 선물 등 나누는 것이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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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9 05:20: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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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족의 닮음 - 우리 가족은 5명이었다. 아빠, 엄마, 나, 여동생 정화, 남동생 승범아빠랑 정화, 승범이는 너무 닮았다. 나는 엄마랑 많이 닮았다. 내가 어릴적에 아빠가 오시면 엄마는 카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짜장도 만드었다. 아빠랑 정화 승범이는 카레를, 엄마랑 나는 짜장을 먹었다. 나는 지금도 카레를 먹지 못한다.아빠는 여드름 피부,  엄마는 잡티가 많은 피부 아빠손은 뭉툭하고 손톱이 네모난 일 많이 하는손. 엄마손은 길쭉하고 늘씬하고 손톱이 길고 피아노를 치면 딱 좋은 그런 예쁜손지금 나의 손을 보면 마디는 굵어 지고,  손에 주름도 많고 손톱도 깨져 있다. 엄마가 내 나이가 된건을 보지 못했으니 알수 없지만 엄마랑 나랑 많이 닮았으니 내가 나이드는 모습이 엄마의 모습이 아닐까? 엄마의 50세 의 손은 나의 지금 손하고 닮아 있을꺼다. 앞으로 핸드 크림도 좀더 자주 바르고 좀더 곱게 늙어가고 싶다. </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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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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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9 06:52:2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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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장 오래된 기억에 남는 손의 순간</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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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가장 오래된 기억에 남는 ‘손의 순간’</p><p>&nbsp;</p><p>초등학교 때 나는 긴 생머리였다.</p><p>긴 머리카락이다 보니 머리감는 일이 정말 일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보일러도 아닌 연탄불로 따뜻한 물을 데워서 씻던 때라 물을 뎁혀서 머리 감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이었다. 엄마는 바쁜 와중에도 내 머리를 보면 머리를 감겨주셨다. 빨래를 하다 고무장갑을 끼고 벗을 시간도 아까웠는지 고무장갑을 낀 채로 머리 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두피를 문지르면 머라카락이 뽑힐 만큼 아팠다. 따뜻한 손길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눈물이 찔끔 나면서도 엄마가 내 머리를 감겨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한번 하지 않고 감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었다.</p><p>&nbsp;</p><p>이제는 내가 내 딸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딸의 머리카락은 내가 어릴적보다 더 길다. 딸의 머리를 감겨주면서 그때의 엄마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p><p>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기름끼 핀 머리를 두고 볼 수 없어 깨끗하게 감겨주는데, 어릴 적 엄마도 딸의 떡진 머리를 보며 깨끗하게 씻겨주고 싶은 마음었을 것이라. 딸의 예쁜 모습을 보고 픈 마음~~</p><p>내 딸도 어른이 되어서 어느 순간에 엄마의 손을 머리 감겨주는 손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진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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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9 06:54:56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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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타인돌봄은 내 시간을 할애하는 것</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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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내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나의 주어진 24시간을 누군가에게 할애하는 것이다.</p><p>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나에게도.</p><p>태어나서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을 당연히 나의 시간으로 알고 지내다가,</p><p>한슬이가 태어난 2005년과 한비가 태어난 2007년 이어서 2009년까지 5년간 나에게 주어진 하루24시간 대부분 타인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는 걸 경험을 하면서 내 삶속에서 ‘돌봄’에 대해 진지한 사색이 시작되었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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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09 06:58:41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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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침묵과 균열 (5주차 글쓰기)</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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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나는 남편과 결혼한지 29년차로 남매인 아이들이 독립하고 제2의 신혼기를 맞이했다.</p><p>행복해야 할 신혼은 부부사이에 95세 된 노모가 있고 살아오면서 해결되지 못한 성격차이를 입밖으로 내 뱉지 못한 말들이 많아 행복하지가 않다.</p><p>현재 우리 부부는 대화가 잘 안된다. 결혼해서 최대의 위기인거 같다.</p><p>남편은 워낙 사근사근하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세심하고 다정다감하였고 잘 챙겨주는 스타일여서 그 부분이 맘에 들었고 결혼해서도 ‘현기사’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디든 태우고 데리러 와주고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p><p>그런데 살아가면서 원하는 데로 일이 잘 안풀리면서 성격이 완고하게 변해가기 시작했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무뚝뚝하게 변했다.</p><p>그런데 나는 그런 남편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표현을 하지 않고 불만이 있을때는 화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p><p>그 선택은 남편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던 ‘배려’였는데 오랜 시간이 흐린 지금은 ‘불통’으로 되어버린거 같다.</p><p>50대 후반 대부분의 여자들은 부모님 세대에서 물려준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전통관습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받아들였지만 그 제도가 잘못되었다라고 느끼는 세대이다.</p><p>예를 들면 남아선호사상과 제사문화 등등</p><p>그러나 반면 대부분 남자들은 그런 문화를 그대로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강요 하기를 바라는 경향이다. 가부장적인 사고를 유지한채.........</p><p>나는 직장과 육아를 병행해야해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되었고 한집에 산지 28년째이다. 같이 사는 동안 마음은 불편했지만 시어머니랑 성격이 고만고만 비슷해서 큰 갈등은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p><p>그러나 시어머니랑 아이들이 독립할때까지 같이 살게 될지는 몰랐고 95세인 지금은 부부사이의 큰 장애물이 되었다.</p><p>제주에 내려와서 환갑인 나이에 취업도 힘들어진 남편은 노모봉양을 본인의 중요한 일로 여기며 힘들면서도 인내하면서 하고 있고 나는 세상의 변화에 맞게 요양원입소를 권유하면서 부부갈등은 심해졌다. 치매도 없고 거동도 불편하지는 않지만 노모가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마음이 들고 늙어가는 나도 이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런 남편이 싫어졌다.</p><p>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진다.</p><p>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효도하고 싶으면 혼자서 하고</p><p>나는 따로 살고 싶다고. 그런데 입안에서 우물댄다. 그런말을 하는 나의 상처 10%, 남편의 상처90%이 싫어서.</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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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14 08:41:10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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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각하지 못해 하지 못한말 이제라도 해야 할까?</title>
         <author>did0411a</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84454787</link>
         <description><![CDATA[<p>회사를 20년쯤 다니니 매일 회사에 나가는 게 미친 짓 같았다. 휴직을 할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였다. 과감하게 별별 이유를 가져다 붙여 휴직을 신청했다.</p><p>달콤한 1년반이 지나고 복직을 1달여 앞눈 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p><p>아빠가 폐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부랴부랴 비행기를 예약하고 청주로 날아 갔다.</p><p>병원에서 정밀진단을 거쳐 나온 결과는 충격이었다. 그냥 있으면 1~2개월 항암하면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이란 내용이었다. 다행히 표적치료제가 있어 시간이 연장되었다.</p><p>&nbsp;</p><p>이번에도 내가 휴직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별별 서류와 이유를 붙여 1년을 연장하고 아빠를 제주에 모셨다.</p><p>&nbsp;</p><p>우리집에서 2주를 지내시더니 못있겠다 하신다. 사위 눈치도 보이고 불편하시다고</p><p>&nbsp;</p><p>그래서 우선 짧은 단기로 집을 구했다.</p><p>&nbsp;</p><p>매일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빠가 지내는 곳으로 출퇴근 아닌 출퇴근을 했다. 매일 운동을 핑계로 제주의 숨은 곳곳을 다니며 관광아닌 관광을 하고 돌아 다녔다.</p><p>&nbsp;</p><p>아빠의 치료는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다. 1달에 1번 서울에 다녀 올 때 마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6개월쯤 지나고 약 이 맞이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뇌 부종이 오고 제주대병원에는 치료를 거부했다. 지병도 있고 나이도 있고 체력도 안되고 등등등 여러 이유를 댔다. 사실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서울로 가겠다 했다. 그리고 1년쯤은 그래도 그럭저럭 지내셨다. 나이 집과 지척인곳으로 집을 옮기고 다시 생활을 시작했다. 갑자기 상태가 11월이 되니 갑자기 상태가 않조아 지셨다, 뇌경색이 온 것이다. 약이 맞이 않았나 보다.</p><p>그렇게 아빠는 청주에 다시 생활지를 옮기고 이제는 정화가 아빠와 함께 생활했다. 난 아이들</p><p>과 함께 생활을 하고 복직도 하여 출근을 하다 보니 생활지를 이동할수 없었다. 한달에 두세번씩 주말로 다녀왔다 그러면 가기전에 카레 한 냄비, 미역국 한 냄비를 돌아가면서 끓여 놓고 갔다. 그래서 인지 아이들은 지금도 카레하고 미역국은 잘 먹지 않는다.</p><p>&nbsp;</p><p>돌보기 가장 힘들 시기에 정화가 아빠와 같이 생황를 했다. 중간 중간 아빠가 병원에 입원할땐 약 부작용으로 망상 장애가 와서 침도 뱉고, 주먹질도 하고, 집에 안가면 창으로뛰어 내리겠다고 몸부림도 치고 하니 침대에 묶어 생활도 했다. 그 상황들을 온전히 여동생의 몫이었다. 대 소변을 받아내고,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 입히고, 씻기고 딸이기도 하지만 여자이기도 한 여동생이 아빠이지만 남자이기고 한 사람을 온전히 돌본다는게 얼마나 어려웠을까?</p><p><br></p><p>나의 두려움으로, 불편함으로 인해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동생에게 가장 힘든 시기를 떠 넘긴건 아닐까? 원망이나 마음의 상처가 남진 않았을까?</p><p>동생에게 이제라도 이야기를 해야할까? 미아했다고 너무너무 미안했다고</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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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16 06:42:1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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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5주차 말하지 못한 가족 이야기</title>
         <author></author>
         <link>https://padlet.com/528love/19bbbxwbezvrdr2/wish/3684458281</link>
         <description><![CDATA[<p>11.16 말하지 못한 가족 이야기</p><p>&nbsp;</p><p>학창시절 아버지는 늘 밖으로만 도셨다.</p><p>마을 리장일로 농협이사, 4H 회장 등 바깥에서 일 잘하고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아버지로서 인정은 받지 못했다.</p><p>그런데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후두암 판정을 받아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바깥일보다 집에 있는 일이 많아졌다. 병이 드니 집에 머무르는 아빠가 미웠다. 병을 앓으시는 아빠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던 것 같다.</p><p>엄마 때문에 더 아빠기 미웠으리라.</p><p>엄마는 내가 중학교때부터 고등학생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병수발과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챙기면서 농사일에 집안일까지 모두 혼자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금 삶이 나아질꺼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아빠가 아프면서 엄마는 또 아빠의 병수발에 농사일까지, 모두 엄마 몫으로 또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빠가 너무 미웠다.</p><p>아빠는 15년동안 암과 싸우시다 돌아가셨다.</p><p>후두암에서 폐암으로 전이되고, 또 간암으로 전이되면서 15년동안을 힘들게 지내셨다. 그럼에도 아빠를 미워했던 내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워했다는걸 아빠는 돌아가셔도 몰랐을꺼다.</p><p>&nbsp;</p><p>돌아기시기 며칠 전 항암치료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갈비탕이 먹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아빠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에 먹자고 하고 집으로 모셔다드렸다. 그리고 얼마 없으셔서 아빠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아빠께 갈비탕을 사드리지 못한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미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은 조금 다른 것 같다.</p><p>&nbsp;</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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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16 06:51:25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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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회상</title>
         <author>jejussalang72</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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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이제까지 쓴 글 편집에서 올립니다. </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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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29 07:10:02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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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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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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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30 06:26:13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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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돌봄은 여전히 여성의 몫...</title>
         <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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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nbsp;</p><p>제주의 여성은 대부분 생계를 도맡아 밭농사를 짓거나 해녀일을 평생 한다. 아프지 않으면 돌아가실 때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집안일에 자녀 돌봄까지 모두 여성의 몫이다.</p><p>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맞벌이를 하고, 집안일, 자녀 돌봄도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구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엄마세대에는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p><p>우리 엄마는 80대이다. 20대에 결혼을 해서 약 60년 동안 밭일에 집안일, 자녀 돌봄, 시부모님 봉양까지 자기의 삶을 살기보다 가족을 위해 삶을 사셨다.</p><p>&nbsp;</p><p>우리 아빠는 4남2녀 중 아들 중에는 셋째아들, 형제자매 중에는 다섯 번째이다. 제주의 역사적 아픔인 4.3을 겪으면서 아빠는 셋째 아들이 아닌 첫째 아들역할을 해야 했다. 이런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장남역할을 하는 아빠덕분에 집안의 모든 제사와 시부모님 봉양까지 맡아서 했다. 내가 중학교 때 할머니가 쓰러지시고 할머니 병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할아버지마저 쓰러지시면서 돌아기시기까지 꼬박 7년을 매 삼시세끼를 챙겨드리고 병수발까지, 모든 역할은 엄마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엄마를 보며 자란 우리들은 엄마의 역할을 나눠서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늘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밥 짓고 할아버지 식사 챙겨드리고, 밤늦게까지 밭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늘 녹초가 되었다. 엄마는 입에서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평소 일도 버거울 텐데 우리집은 제사와 명절일 일년에 열세번이 있었다. 한달에 두 번 제사가 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합제도 하고 추석명절도 안하는 집이 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돌아가신 분들 제사를 모두 올렸고, 밤 12시에 제를 지내는 시대라 제삿날이 많다는 것은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와서 제삿밥을 먹던 때라 준비해야할 음식량도 많았고, 제사가 끝나면 설거지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12시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까지 마치면 새벽 3시가 훌쩍 넘었다. 그렇게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하고 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침준비하고 할아버지 식사를 챙기던 엄마.... 우리는 제사가 있는 뒷날에는 학교 지각하는 날이었다. 엄마를 도우며 늦게 잠을 자면 꼭 늦잠을 잤다.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면서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난다.</p><p>가부장제의 권력의 중심이었던 아빠는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늘 밖으로만 도셨다. 마을 이장일, 농협 이사에 4H회장 등 바깥에서 감투란 감투는 다 쓰고 바깥에만 돌다보니 엄마의 노동 강도는 더 컸던 것 같다. 그런 아빠가 내가 대학교 때 암진단을 받고부터 엄마는 아빠 돌봄의 역할이 하나 더 생겼다. 시부모 병수발에서 벗어나니 그 뒤부터 아빠 병수발이 이어졌다. 그렇게 15년을 아빠는 암투병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엄마는 한평생을 누군가의 돌봄으로 지내셨다.</p><p>가족을 위한 삶을 살면서 한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엄마, 늘 고단한 엄마의 삶을 보면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살았는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나는 지금 엄마를 돌보고 있다.</p><p>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 농사일을 계속 하던 엄마는 4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혼자 힘으로 뭐든 다하던 엄마가 이제는 혼자 거동조차 힘들게 되었다. 누군가를 돌보았던 엄마가 이제는 딸의 돌봄을 받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건 하루 종일 내가 돌봄을 맡아하지 않아도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p><p>우리가 내는 장기요양보험료로 요양의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요양보호사 파견제도나 주간에 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우리 엄마는 주간에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면서 돌봄을 받고 있다.</p><p>만약 하루 종일 엄마의 돌봄을 내가 맡고 있다면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실 때처럼, 아빠 병수발을 들 때처럼 늘 그늘진 얼굴로 행복하지 않은 딸로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나와 함께 사는 남편이 같이 돌봄에 참여하고 있고,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함께 돌봄의 역할을 나누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누구도 불행하지 않게 돌봄을 나누면서 지내고 싶다.</p><p>&nbsp;</p><p>돌봄 노동을 ‘여성의 당연한 역할’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한 노동으로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돌봄은 더 이상 가정만의 책임도, 특정 성별의 역할도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사회적 기능이라는 것을, 가정과 사회가 협력해 돌봄을 분담할 때, 개인의 삶의 질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지속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알아야 한다.</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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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25-11-30 06:28:09 UTC</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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